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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2017년 8월호)

 

  기독교계의 해방 후 1년
  

본문

 

도적같이 임한 해방
대부분의 역사적 사건과 마찬가지로 한국의 해방도 극적으로, 도적처럼 임했다. 이는 마치 시편 126편 1절을 연상시킨다. “여호와께서 시온의 포로를 돌려 보내실 때에 우리는 꿈꾸는 것 같았도다.” 해방의 꿈은 너무나 귀하고 강렬했고, 역설적으로 그 꿈을 끝까지 유지하지 못한 사람도 많았다. 그 결과 막상 해방이 되자 당황하여 시간을 흘려버린 측면이 있다. 오늘날 자주 사용되는 표현으로 말하자면, 골든타임을 놓친 격이라고 할까? 해방은 잃어버린 나라를 되찾았다는 점, 즉 국가 재건이라는 점에서 ‘광복’이라는 표현이 사용되었다. 비록 오늘날 건국론과 정부수립론이 갈등을 빚고 있지만, 오랫동안 그리고 지금까지 8·15는 광복절이다. 실제로 선교사 중에는 한국인의 꿈을 함께 나누고자 자신의 아들 이름을 ‘광복’이라고 지은 이도 있었다.
한국교회는 해방의 꿈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은 집단 가운데 하나였다. 그러한 자세는 신사참배 거부와 같은 적극적 저항이나 마음속에 종말론적 희망을 품는 소극적 저항으로 나타났다. 물론 적지 않은 사람들, 특히 지도층에 속한 사람들이 제국주의의 압력에 굴복하였고 식민주의의 허위의식에 동화되었다. 바로 이 때문에 해방 직후 한국교회는 ‘애국’과 ‘친일’이라는 모순을 지닌 야누스적 존재로 등장하였고, 대외적인 역사적 과제를 해결하는 동시에 대내적인 자기분열을 해소해야 할 운명에 처했다. 교회가 해방 후 1년 동안(1945. 8.–1946. 8.) 보인 행동은 해방과 교회의 관계의 실상을 드러내는 시금석이라고 할 수 있다.1 당시 교회가 몰두한 과제는 내적으로는 교회 재건, 외적으로는 국가 및 사회 재건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두 가지 재건은 때로는 별개로, 때로는 맞물려 전개되었다.

교회의 영적 재건과 기구적 재건
한국교회는 먼저 종교기관으로서 교회 재건이라는 과제를 안게 되었다. 그것은 바로 고난 속에서 피폐해진 교회, 특히 배교와 친일의 불명예를 안은 현실 교회를 어떻게 재건하느냐의 문제였다. 교회 재건에는 영적 측면과 기구적 측면이 모두 나타났다.

1) 영적 정화(淨化) 혹은 청산(淸算) 작업
영적 재건은 주로 신사참배 반대 운동의 격전지였던 북한을 중심으로 시작되었다. 장로교회의 경우 1945년 8월 15일 20여 명의 신사참배 반대자들(소위 출옥성도)이 출옥하였는데, 이들은 당일 모여 교회 재건운동을 시작했고, 1945년 9월 중순에는 한국교회 재건의 기본 원칙을 발표했다. 이후 평북노회를 중심으로 평북지역 여섯 개 노회의 교역자 퇴수회가 개최되었지만, 친일부역 문제로 오히려 편이 갈리는 일이 벌어졌다. 교회 재건 운동을 추진하던 세력은 소수파였고, 자신들의 대의명분을 확산시켜 다수파의 공감대를 얻지 못했다는 문제를 지녔다.
이 운동은 결국 교파 형성으로 이어져 ‘재건파’라는 소수 교파가 출현하였고, 1950년대에는 장로교회 내에 ‘고신측’이라는 교파가 대두되었다. 감리교회의 경우 1945년 9월 평양의 교역자 심령부흥회에서 회개를 위한 집회를 가졌으며, 서부연회의 재건을 논의하였다.
한편 남한에서 장로교회는 총회 차원에서 신사참배 취소 결의를 했다. 1946년 남부총회(추후 32회 총회로 소급)에서 관련 결의를 했으나, 원만하게 해결되지 않자 34회 총회(1948) 및 38회 총회(1954)에서 결의를 거듭했다.
교회사를 보면, 환란 후 교회 재건은 거의 언제나 분열을 동반했다. 로마 시대의 박해 종식, 독일 제3제국 붕괴, 동구 공산권 몰락 이후를 보면 알 수 있다. 앞으로 한반도 통일 후에도 이런 문제가 반복될 가능성이 높다. 친일부역 문제는 개인적인 차원에서도 불거졌는데, 정춘수의 가톨릭교회로의 재개종을 들 수 있다.

2) 영적 신원(伸寃) 작업
일본제국주의는 기독교의 영적 측면과 정치적 측면 모두를 의식했다. 그래서 제2차 세계대전이 종전될 즈음 한국교회 교인들, 적어도 지도자들을 몰살하려는 음모가 있었다고 전해진다. 역으로 해방 직후 조선총독부의 최우선 과제 중 하나는 조선신궁의 신물(神物)을 일본으로 긴급히 공수하는 일이었다. 이런 판국에 한국교회가 일본의 패망을 하나님의 심판으로 이해하고, 영적 전쟁의 전리품을 나누려는 의식을 엿보인 것도 어느 정도 예상할 수 있는 일이었다.
한국교회는 해방 후 첫 번째로 맞는 1946년 부활절 연합예배를 조선신궁 자리에서 드렸다. 2년 후인 1948년 평양신학교의 전통을 잇는다는 장로회신학교가 자리 잡은 것도 바로 그곳이었다. 이는 오늘날 표현으로 ‘영적 전쟁’ 행위로 해석할 수 있다. 사실 일본은 한국의 기상을 꺾는 작업의 일환으로, 원래 단군신전 터에 조선신궁을 세웠던 것이다. 결국 그 자리의 주인이 단군에서 일본 신으로, 다시 기독교 신으로 바뀐 셈이다.
그뿐만 아니라 1945년 9월 미 군정은 일본인이 소유하고 있던 재산, 소위 적산(敵産)을 처리하기 시작했는데, 교회는 이와 관련하여 실제적 유익을 많이 보았다는 평가가 있다. 그런데 당시 기독교와 관련하여 적산은 두 가지 의미가 있었다. 하나는 일제 식민주의의 소산인 일반적인 적산이었고, 다른 하나는 기독교가 일본 식민정부에 의해 직접 강탈당한 적산이었다. 따라서 한국교회와 재한선교부는 적산 처리에 상당한 관심을 가졌다. 여기에서 한 가지 염두에 둘 점은 교회가 혼란 후 재산권 행사를 하는 과정에서 종종 문제가 발생했다는 사실이다. 동구 공산권이 몰락한 후에도 이러한 상황이 연출되었다. 한반도가 통일된 후에도 이와 같은 상황이 벌어질 수 있다. 이런 맥락에서 한때 월남한 기독교인들을 중심으로 북한 소재 재산 포기 운동이 일어난 바 있다.

3) 교파 재건
교회는 연합교회인 일본그리스도교단 산하 조선교단(이하 조선교단)의 잔존과 개별적인 교파 재건(혹은 교파 환원)이라는 양자택일의 문제에 봉착했다. 기구적 재건은 주로 정치 중심지였던 남한에서 전개되었다. 한국교회는 일제강점기 말에 일본에 의해서 강제로 통폐합되어 조선교단이 되었다. 조선교단의 존재는 계륵(鷄肋)과 같아서 유지하기도, 중단하기도 애매했다. 일본의 경우 비록 일본그리스도교단이 정부의 강제 조치에 따라 형성되기는 했지만, 결과적으로 교회일치의 꿈을 실현했다는 이유로 잔존하게 되었고 일부 교파들은 독자노선을 걸었다. 그러나 한국의 경우는 달랐다. 조선교단의 존재는 종교 탄압인 동시에 식민의 잔재였다.
이런 맥락에서 해방 직후인 1945년 9월 8일 장로교회와 감리교회를 중심으로 서울에서 조선교단 남부대회가 열렸다. 이때 감리교회 일부 인사가 회의장을 퇴장하는 상징적 사건으로 인해 조선교단이 잔존할 가능성은 사라졌고, 교파 재건은 본격화되었다. 1945년 11월에는
제2차 조선교단 남부대회가 열렸지만 대세를 바꿔놓을 수는 없었다. 장로교회는 1946년과 1947년 개최된 남부총회를 중심으로 재건되었고, 감리교회는 1946년과 1948년 부흥파(복흥파)와 재건파로 나뉘어 재건되었다.
비주류 교파들도 재건에 나섰지만 상황은 각기 달랐다. 구세단으로 변형되었던 구세군은 1946년 4월 구세교회로 재건되었고, 성공회는 1946년 4월 외국인 주교 쿠퍼(구세실)가 재입국함으로 사실상 재건이 이루어졌다. 일제강점기 말에 교파가 아예 폐쇄되었던 교파들도 재건되었다. 성결교회는 1945년 9월 재흥 예배를 드린 후 11월에는 재흥 총회를 가졌다. 침례교회는 1946년 2월에 ‘동아기독교회대회’를 열면서 재건되었다.
해방 직후 상황을 전반적으로 말한다면 정치적으로는 남북한에 각각 별개의 조직이 들어섰지만, 기독교적으로는 북한교회가 독자적인 조직을 만들기보다는 남한교회의 중심적 존재를 인정하면서 통일을 기다리는 추세였다. 북한에서 장로교회는 1945년 12월 이북5도연합회를 구성하였고, 감리교회는 서부연회를 재건했다. 더구나 북한에서 남한으로 대거 이주한 월남 기독교인으로 인해 남한의 중심적 위상은 강화되었다.2 특히 월남한 기독교인들은 ‘피난민교회’라는 새로운 교회 형태를 구성했고, 이중에서 영락교회는 최초의 대형교회 사례가 되었다.

4) 기관 재건
교파 재건은 기관 재건으로 이어졌다.
첫째, 신학교가 재건되었다. 가장 먼저 성결교회가 1945년 11월 경성신학교를 재건했다. 장로교회의 경우 남한에서는 1946년 6월 남부총회에서 해방 전에 설립된 조선신학교를 직영 신학교로 인정하였고, 북한에서는 이북5도연합회 결성 시 평양신학교를 재건하였다. 감리교회의 경우 남한에서는 1946년 2월 감리교신학교를 재건하였고, 북한에서는 1946년 6월 성화신학교를 설립하였다.3
둘째, 다양한 기독교 기관들이 재건되었다. 먼저 조선교단이 해체되고 교파들이 재건되자, 일제강점기 말에 폐쇄되었던 초교파 연합기구인 조선기독교연합회(현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의 전신)가 1946년 9월 재건되었다. 이 밖에 다양한 기관이 재건되었는데 한국기독교청년회연합회, 대한성서공회, 대한기독교서회 등이 있다.4 한편 1946년 1월 「기독교공보」 같은 기독교 언론지가 창간되었다.
셋째, 기독교 사학과 기독교 병원들이 재건되었는데 남한과 북한의 양상이 달랐다. 북한에서는 사회주의 정책에 따라 기독교 사학과 기독교 병원이 위축되었고, 남한에서는 기존의 조직이 재건된 것 이외에 북한의 기관이 월남하여 재건되는 경우도 나타났다.


5) 선교사의 귀환
제2차 세계대전이 종전된 후 선교사의 귀환은 현지 교회의 독립 문제나 선교 및 교회의 주도권이라는 문제와 맞물려서 중요한 에큐메니컬 문제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그러나 한국의 경우 대부분 한국교회와 재한선교사 모두 귀환을 강력히 원하였다. 귀환한 선교사들은 교회 재건 특히 물질적 재건에 큰 영향을 미쳤고, 귀환 초기에 미 군정의 주요 인물이나 협력자가 됨에 따라 한국의 국가 및 사회 재건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이로 인해 해방 후 한국교회의 친미주의 성향에 결정적 역할을 했다.

국가 및 사회 재건
1) 국가 재건
한국교회는 초기부터 정치사회적 역할을 자임했다. 특히 해방 후 주요 정치지도자 대부분이 기독교인이었고, 그들은 기독교 중심적 국가 재건을 부르짖음으로써 넓은 의미에서 기독교 건국론자들이라고 볼 수 있다. 기독교 정치지도자 가운데는 우파에서 좌파에 이르기까지 정치적 입장도 달랐고 국가 건설을 어떻게 구상하는지 그 내용도 다양했지만, 결국 분단 상황과 맞물려 남한교회의 우경화 경향이 강해지는 양상을 보였다. 그 이유는 남한에서는 좌파의 입지가 줄어들었고, 북한에서는 아예 기독교의 존재 자체가 위협을 받았기 때문이다. 가령 여운형은 조선건국준비위원회를 결성했지만 인정받지 못했고, 김창준은 기독교 민족사회주의를 실험하려고 했지만 결국 월북으로 끝났다.
기독교인들의 정치 참여는 적극적이었다. 북한에서는 1945년 9월 윤하영과 한경직을 중심으로 기독교 정당인 기독교사회민주당을 결성하였고, 남한에서는 굳이 기독교 정당을 만들 필요가 없을 정도로 기독교인들이 정치계를 주도했다.
한국교회의 이러한 정치지향은 남북대치 상황에서 대조적인 결과를 낳았다. 북한에서는 기독교가 일제강점기처럼 전반적으로 반정부적인 존재로 간주되었고, 이런 상황은 결국 월남하는 사람들이 늘어나는 원인이 되었다. 북한교회의 공동화 현상은 후에 한국전쟁 등을 거치면서 가속하기 시작했다. 한편 남한에서는 기독교가 식민정부와 군정이라는 이민족 정부 이후에 등장한 자국민 정부에 대해 거의 무조건적으로 우호적인 태도를 보이게 되면서 남한교회의 친정부 성향의 전통을 낳았다.

2) 사회 재건
해방과 분단은 남북한 사회에 엄청난 변화를 초래했다. 첫째, 치안 공백 혹은 치안 부재의 상태가 벌어졌다. 해방 직후 미군과 소련군이 진입하기 전까지 일본군이 무장해제를 완전히 하지 않은 상태에서 한국인들이 치안 유지에 나섰는데, 기독교인들이 그 일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맡았다. 둘째, 해방은 일본인의 귀국으로 인해 인적·물적 자원의 공백을 초래했고, 분단은 이 상태를 파행으로 몰고갔다. 이런 맥락에서 특히 남한에서는 기독교 인사들이 대거 관계(官界) 등 사회에 진출하였고, 교육 및 의료 등의 분야에서 크게 기여했다. 셋째, 분단은 국내 이주를 초래했다. 이 과정에서 북한 출신 목회자는 물론이고 노회 등 조직까지 ‘무지역노회’ 형식을 통하여 남한에 정착했다. 그 결과 남한교회 내에서 북한 출신의 영향력이 커졌고, 반공주의가 강화되었다. 넷째, 분단은 국제 이주 또한 야기했다. 해방이 되자 해외 동포들의 귀환 문제가 대두되었는데, 남북한이 분단되고 두 개의 군정이 시작됨에 따라 일사불란하게 처리되지 못했다. 귀국한 사람들의 중심지는 서울역이 되었고, 서울역 인근의 교회와 기독교 기관, 특히 세브란스병원 의대생들이 귀국 동포에 대한 사역을 감당한 바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해외동포들은 거주지에 계속 정착하였고, 이런 맥락에서 재일교포, 재중교포(소위 조선족), 재러교포(소위 고려인) 등의 문제가 나타났다. 일본의 경우 일본그리스도교단에 편입되었던 재일대한기독교회가 재건되었고, 이 교파는 후에 남북한 통일운동에 중요한 역할을 맡게 된다. 중국의 경우 대다수는 중국에 남았고, 일부만이 남한으로 환국하는 과정 중 중국선교사였던 방지일이 혁혁한 공을 세워 후에 국가로부터 훈장을 받았다. 그러나 중국 공산화 후, 중국교회가 전반적으로 침체됨에 따라 중국의 한인교회들도 쇠퇴하였다. 러시아의 경우 전반적으로 중국과 유사한 상황이었다. 특히 러시아는 공산화 직후 종교탄압을 통해 연해주지역 교회를 박해했으며, 제2차 세계대전 당시에는 연해주에 거주하는 한인들의 참전을 방지할 목적으로 강제로 이주시켰고, 그 후유증이 아직까지도 남아 있는 상태이다.

해방 후 1년, 통일 후 1년의 데자뷔?
해방 당시 한국교회는 영성, 조직, 인원, 재정 등 각 방면에 걸쳐 난국에 처했지만, 전반적으로 회복세를 이어나갔다. 1930년대 후반에 약 70만 명에 이르렀던 교인 수는 일제강점기 말기에 절반가량으로 줄었으나, 해방 후 10년 내에 원래의 세를 회복했다. 그리고 비록 문제가 많았지만, 교파 재건을 통해 민족교회의 위상을 회복했다. 신학교 등 기관의 재건 및 설립을 통해 목회자 등 필요한 인원이 충당되었다. 그러나 급격한 변화로 인해 자립 등 한국교회의 자랑스러운 전통이 무너졌고, 이런 상황은 한국전쟁으로 인해 악화되었다.
한편 교회의 친일청산 같은 영적이고 정신적인 문제는 미완의 과제로 남았다. 그뿐만 아니라 당시 교회는 정치 및 사회 상황 속에서 친정부적 성향, 친미주의, 반공주의 및 우경화 등의 특징을 보이기 시작했다. 해방 직후 이러한 한국교회의 모습에 대한 이해가 과연 또 다른 격변기가 될 통일 직후의 한국교회에 교훈이 될 수 있을까?

1 해방 직후의 역사에 대한 대표적인 책은 다음과 같다. 김양선, 『한국기독교해방10년사』(서울: 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 종교교육부, 1956).
2 북한에서는 한국교회가 전반적으로 반정부적 태도를 지속하자, 이에 맞서기 위해 해방 1년이 지난 1946년 11월 28일 친정부기구인 북조선기독교도련맹(현 조선그리스도교련맹의 전신)을 설립하였다.
3 교회사를 연구하는 김흥수(목원대학교) 교수에 의하면, 이는 분단을 염두에 둔 조치였다. 후에 장로교회의 평양신학교와 통합되었지만 한국전쟁으로 인해 폐쇄되었다.
4 대한기독교서회는 공식적으로 1948년 재건되었지만, 해방 직후 이미 사역을 시작하였다.


안교성 | 장로회신학대학교에서 교회사를 가르치고 있다. 저서로 『독일 통일 경험과 한반도 통일전망』, 역서로 『영국성공회 선교사의 눈에 비친 한국인의 신앙과 풍속』 등이 있다.

 
 
 

2017년 10월호(통권 70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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