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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me > 기독교사상 > 성서와설교 > [성서와 설교] 설교자를 위한 성서읽기
성서와설교 (2018년 12월호)

 

  고난에는 아무런 뜻이 없을까
  욥기 5:1-7

본문

 

1 너는 부르짖어 보라 네게 응답할 자가 있겠느냐 거룩한 자 중에 네가 누구에게로 향하겠느냐 2 분노가 미련한 자를 죽이고 시기가 어리석은 자를 멸하느니라 3 내가 미련한 자가 뿌리 내리는 것을 보고 그의 집을 당장에 저주하였노라 4 그의 자식들은 구원에서 멀고 성문에서 억눌리나 구하는 자가 없으며 5 그가 추수한 것은 주린 자가 먹되 덫에 걸린 것도 빼앗으며 올무가 그의 재산을 향하여 입을 벌리느니라 6 재난은 티끌에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며 고생은 흙에서 나는 것이 아니니라 7 사람은 고생을 위하여 났으니 불꽃이 위로 날아 가는 것 같으니라(욥 5:1-7)

주제 해설
욥의 고난을 바라보는 엘리바스의 시선은 얼음장같이 차가웠다. 그는 자신이 보고 경험한 것에 높은 비중을 둔 나머지 자신의 이성과 지식을 적재적소에 활용할 줄 몰랐다. 이런 그의 모습을 보며 우리는 ‘남의 일이라고 이렇게 쉽게(?) 말해도 되는 걸까?’라는 물음을 던진다. 사람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목적과 섭리는 고난 속에 있는 인간에게 어떻게 작용하는가?

본문 해설
욥기 4장 15절은 시인 바이런(G. G. Byron 1788-1824)에게 영감을 불러일으켜 ‘한 영이 내 앞을 지나갔다.’고 노래하게 했다. 욥기 5장 1절은 라이너 마리아 릴케에게 영감을 주어 <두이노의 비가>(Duineser Elegien)를 부르게 했다.

내가 이렇게 소리친들, 천사의 계열 중 대체 그 누가 / 내 목소리를 들어줄까? 한 천사가 느닷없이 / 나를 가슴에 끌어안으면, 나보다 강한 그의 / 존재로 말미암아 나 스러지고 말 텐데. 아름다움이란 / 우리가 간신히 견디어내는 무서움의 시작일 뿐이므로.

엘리바스는 “소리치려면 쳐 보아라.”(1절 직역)라고 말문을 열었다. 그는 고난당하는 이웃에게 연민의 정을 품는 대신 자기주장을 폈다. 그의 반응은 싸늘했다. 욥에게 말하기를 잘못이 없다고 그 억울함을 호소하려면 하라고 했다. 그는 욥을 도울 자가 아무도 없다고 했다. 거룩한 자는 누구인가? 아마 하나님의 아들들(천사나 성인, 혹은 선택받은 이스라엘 백성)일 것이다.(욥 1:6, 2:1, 15:15 참조) 영적인 영역에 속한 그들마저도 욥을 외면하리라고 장담했다.(1절) 이런 주장은 결국 엘리바스 자신이 욥에게 전혀 공감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욥은 엘리바스 등 친구들에게도, 영적인 존재들에게도 버림받은 채 철저히 홀로 있을 뿐이다.
엘리바스는 갑자기 미련하고 어리석은 사람에 관한 주제를 꺼내들었다.(2-5절) 비록 욥을 직접 지목하지 않았더라도, 그가 말하는 대상은 분명 욥이다. 마치 욥에게 공감하지 않기로 작정이라도 한 것처럼 그는 사실과도 동떨어지고, 자칫 인격을 모독한다고 느낄 만한 언사를 쏟아냈다.
미련하고 어리석은 자란 어떤 사람인가? 자기 뜻대로 일이 진행되지 않을 때나 재앙이 자신에게 임할 때 회개 대신 분노하고 시기하는 사람이다. 이로써 악인은 스스로 자멸한다.(2절) 분노와 시기의 감정을 여과 없이 드러내는 것에 관해 잠언은 여러 차례 경고한다. “돌은 무겁고 모래도 가볍지 아니하거니와 미련한 자의 분노는 이 둘보다 무거우니라.”(잠 27:3, 잠 14:30과 27:4도 참고)
엘리바스는 자기가 관찰하고 깨달은 것에 기초하여 미련한 자(욥)를 나무에 비유했다.(3절) “내가 미련한 자가 뿌리 내리는 것을 보고”라는 말에서 보듯 그의 경험이 큰 역할을 했다. 나무가 튼튼히 뿌리를 박고 무성해가는 것처럼 종종 악인이 현세에서 번성한다고 했다. 지성인이자 종교인인 엘리바스는 그런 자를 그냥 두고 보지 않았다. 그는 그 집을 저주했다. 이것도 그가 지닌 인과응보 사상에서 나온 것이리라.
미련한 자는 자신뿐만 아니라 자기 자녀들까지 망가뜨린다.(4절) 물론 부모의 죄와 그 결과가 자녀에게까지 자동적으로 이어진다고 여긴 것은 아닐 것이다. 그보다는 “비록 노아, 다니엘, 욥 이 세 사람이 거기 있을지라도… 그들도 자녀는 건지지 못하고 자기의 공의로 자기의 생명만 건지리라.”(겔 14:14, 20)라는 말씀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성서는 죄와 의에 대한 보응이 각각의 인격체에 적용된다는 점을 분명히 하고 있다. 다만 부전자전(父傳子傳)이라는 말처럼 아버지의 범죄가 그 자손에게 악영향을 미쳐 자식들 역시 아버지와 비슷한 범죄를 자행하여 심판을 받을 확률이 높을 뿐이다.(출 20:5, 신 5:9 참조)
그들은 성문에서 제대로 대우받지 못한다. 성문은 고대 근동에서 흔히 재판정을 가리킨다.(신 25:7, 시 127:5, 사 29:21, 암 5:10) 여기서 성문은 그보다는 사람이 많이 모이는 성문(城門) 또는 일상생활에서 부당한 처사(공동번역개정: 몰매를 맞아도)를 당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럴 때 어리석은 자의 자녀들은 아무런 도움을 받지 못한다.
앤더슨(F. I. Anderson)은 성문을 광풍 또는 큰 바람으로 보았다. 히브리말로 성문과 광풍이라는 낱말의 철자가 똑같다.(r[;v:, 샤아르) 그러므로 이것은 터무니없는 주장이 아니다. 그렇다면 성문은 욥기 1장 19절에 나오는 대풍(hl'AdG> x:Wr, 루앗흐 그돌라)을 의미한다. 따라서 본문은 큰바람이 일 때 자녀를 잃은 욥의 재난을 빗대어 표현했다고 볼 수도 있다. 3-4절에서 욥을 은근히 ‘미련한 자, 어리석은 자’에 빗댄 엘리바스의 의도에 비추어볼 때 이런 해석도 가능하리라.
미련한 사람은 자기 재산을 아무리 잘 간수하려 해도 뜻대로 되지 않는다.(5절) 덫(!ce ~yNIci, ‘첸’=가시덤불, 올무)을 놓아 지키려 해도 아무 소용이 없다. 이는 고대 근동에서 농부가 추수한 뒤 곡식단을 가시나무로 가려서 짐승이 물어 가거나 먹는 것을 막거나, 식량을 약탈하는 도적의 눈을 피하였던 것을 가리킨다. 미련한 자가 마련하는 이런 자구책은 별로 효과가 없다는 것이다.
5절 후반부에서 “올무가 그의 재산을 향하여 입을 벌리느니라”[직역: 그리고 덫을 놓는 자가 그들의 부를 (잡아채 가려고) 헐떡거린다.]라는 말씀은 그가 아무리 자기 재산을 지키고 싶어도 세상이 그것을 그냥 두고 보지 않는다는 뜻이다. 이는 스바(욥 1:15) 및 갈대아 사람(욥 1:17)에게 모든 재산을 빼앗긴 욥의 처지를 빗대어 말하는 듯 들린다. 결국 욥의 처지는 굶주린 자들의 형편보다도 훨씬 못하게 되었다는 의미이다.
그가 진정으로 하고 싶은 말은 6-7절에 있다. 여기서 그는 티끌(hm'd'a, 아다마)과 사람(~d'a', 아담)을 언급했다. 이는 창세기 3장 17-18절을 떠올리게 한다. 마치 아담과 하와가 아무 이유없이 벌을 받은 것이 아니듯이, 인생이 겪는 고난과 시련은 까닭없이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불행이나 고생은 반드시 그 사람 자신이 뿌려놓은 씨앗이 있기에 생겨났다는 것이다.
이런 일은 마치 불꽃이 위로 날아오름 같이 단연하다. 여기서 ‘불꽃’(@v,r<-ynEb, 브네-레쉐프)이라는 말은 본디 ‘레쉐프의 아들’이라는 뜻이다. 일반적으로 ‘레쉐프’는 ‘불꽃’으로 해석된다.(아 8:8, 시 76:3) 고대 가나안 신화에 따르면 레쉐프는 파괴와 역병의 신이다. 당시에는 사람의 질병이 그가 안겨주는 것이라 여겨졌다. 구약성서에서 브네-레쉐프는 불, 역병(신 32:24, 합 3:5), 번갯불(시 78:48) 등을 상징한다.

설교 단상
1) 홀로 하나님 앞에 서다

욥은 누구의 도움도 기대할 수 없었다. 친구인 엘리바스의 반응은 싸늘했다. 그는 “소리치려면 쳐 보아라.”(1절 직역)라고 말문을 열었다. 욥에게 억울하다고, 잘못이 없다고 호소하려면 하라고 했다. 선택받은 이스라엘 백성 또는 하나님의 아들들(천사들) 가운데 아무도 욥에게 대답할 자가 없다고 그는 장담했다. 엘리바스에 따르면 거룩한 자들도 이런 점에서는 자신과 똑같다. 아무리 소리치며 하소연하더라도 만일 욥이 지금과 같은 입장을 고수한다면 그 누구 하나 거들떠보지 않으리라는 것이다. 욥기 5장 1-7절은 아프고 괴로운 이웃의 처지에 경청하지도, 공감하지도 못하는 사람이 어디까지 모질어지는지를 잘 보여준다. 엘리바스가 보기에 욥에게는 고난을 잘 견뎌내고 죄를 회개하는 것만이 필요할 뿐이다.
욥은 지금 혼자이다. 아내도, 찾아온 친구들도 정신적인 도움이 되지 못했다. 심지어 엘리바스는 거룩한 자들조차 욥을 돕지 않을 것이라고 악담을 했다. 이 대목에서 우리는 그가 진정 무엇을 위해 욥에게 왔는가를 의심할 수밖에 없다.
이제 욥은 선택의 기로에 섰다. 정말로 혼자 남을지, 아니면 세상이 보기에는 혼자일지라도 영적으로는 하나님과 함께하는 사람으로 남을지를 결정해야만 했다. 욥은 마치 예수께서 겟네마네 동산에서 홀로 기도드리면서도 실제로는 혼자가 아니었던 것같이 될 것인가?

2) 어리석음은 사람을 파멸에 이르게 한다
누가 어리석은 사람인가? 엘리바스에 따르면 고난이 닥쳤을 때 분노하는 사람이다. 남이 잘되는 것을 보며 시기하는 사람이다.(2절) 이런 자들은 누가 그를 해코지하기 전에 스스로 자기를 해친다. 그가 이 말을 욥에게 일방적으로 적용한 것을 빼놓는다면, 이 말 자체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 그는 고난에 대처하는 신앙적인 지혜의 소중함을 역설적으로 일깨웠다.
광야에서 가나안을 향해 가던 이스라엘 백성은 무엇이 부족하거나 어려움이 닥칠 때마다 불평과 원망을 했다. 노예살이에서 해방된 것 자체가 감사요 기쁨이기에 웬만한 어려움은 참고 견딜 줄 알았는데 실제로는 그렇지 못했다. 급기야 출애굽한 세대는 여호수아와 갈렙을 빼놓고는 아무도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하고 광야에 뼈를 묻어야만 했다.
다니엘은 어떤가? 그는 사자굴에 잡혀 들어갈 줄 알면서도 하나님께 감사드리며 기도드렸다.(단 6:10)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빌 4:6-7)
문제는 무엇이 어리석음인가이다. 엘리바스처럼 ‘내가 보았다’(3절)며 자기 경험과 지식으로 단단히 무장하면 지혜로운 사람인가? 자기가 고난당하는 이유(뜻)를 모르기에, 비록 탄식하고 탄원할지라도, 욥처럼 모르는 것을 모르는 영역으로, 신비한 것으로, 하나님의 영역으로 남겨놓는 것이 진실로 지혜로운 것일까?

3) 고난에는 뜻이 없다?
‘사람은 고생을 위하여 났다.’고 엘리바스는 말했다.(7절) 이 말을 하는 그는 욥을 염두에 두었으리라. 3-4절과 같은 현상을 직접 목격한 그는 모든 사람과 일을 “콩 심은데 콩 나고 팥 심은데 팥 난다.”라는 식으로만 판단했다. “재난은 티끌에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며 고생은 흙에서 나는 것이 아니니라”(6절)라는 말을 전적으로 부정할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이런 뜻에서 인과응보의 논리와 그에 따른 권선징악은 그 자체로 일리가 있다.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갈 6:7)처럼 성서에도 그렇게 풀이될 만한 말씀에 여러 곳에 있다. 다만 그런 말씀들을 어떤 현상(사건)이나 현세에 무차별하게 적용하면 곤란하다.
더 나아가 하나님 섭리의 신비나 고난의 비밀을 외면한 채 자기 경험이나 지식으로만 사람과 사건을 판단하면 곤란하다. 그것은 아무리 일리 있는 말일지라도 심각한 독단에 빠질 수 있기 때문이다. 엘리바스가 그 예다. 그는 욥기 1-2장에 있는 천상회의를 전혀 몰랐다. 신앙의 이름으로 포장된 그의 무지는 재산을 약탈당하고 자녀를 잃고 질병으로 고생하는 욥의 가슴에 대못을 쳤다. 위문(위로)하러 온 그가 바늘로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오지 않을 정죄자(심판자)로 변했다. 그에 따르면 고난은 인간의 죄와 무지로부터 올 뿐이다. 하나님은 그 속에 아무런 목적도, 섭리도 심어두지 않으셨다.
우리에게도 이런 일은 결코 낯설지 않다. 병문안을 가서 무심코 던진 한마디가, 재난을 당한 사람을 향해 던진 사려 깊지 못한 말 한마디가 그 사람의 가슴에 평생 남는 부스럼을 만들곤 한다. 욥을 이렇게까지 깎아내리는 이유가 다름 아닌 그의 신앙이기에 우리는 더욱 안타깝다. 엘리바스에게서 우리는 ‘아는 것’에 겸손해야 함을 배운다. 신앙을 통해 정죄와 심판만 배우고 포용과 자비를 익히지 못할 때 생겨날 폐단을 본다.
우리의 사고방식이나 판단력이 돌같이 굳어지는 대신에 살같이 부드러워야 할 것이다. “내가 그들에게 한 마음을 주고 그 속에 새 영을 주며 그 몸에서 돌 같은 마음을 제거하고 살처럼 부드러운 마음을 주어 내 율례를 따르며 내 규례를 지켜 행하게 하리니….”(겔 11:19-20) 이런 뜻에서 고난당하는 사람을 만날 때에는 성령에게 이끌리는 것이 다른 어느 때보다 더욱더 필요하다.

4) 인간의 한계는 깨달음의 한계인가
엘리바스는 땅으로부터 오는 관점(이성)에 집중한 나머지 자신의 인지능력 가운데 하늘로부터 오는 관점(영적인 지각)을 잃고 말았다. 그 결과 사물과 사건을 볼 때 인과법칙이라는 매우 간단하고 편리한 방법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물론 모든 일과 그 과정에는 인과관계가 있다. 그것들 중에는 분명 우리의 이성과 경험으로 충분히 파악할 수 있는 것이 존재한다. 하지만 우리의 이성과 지각 능력을 초월하는 것 곧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신비한 것들이 있다.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이여, 그의 판단은 헤아리지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롬 11:33) 이에 관해 파스칼은 『팡세』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성의 마지막 단계는 이성을 초월하는 무한한 사물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다. 그것을 깨닫기까지 이르지 못한다면 이성은 연약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자연적인 것들마저 이성을 초월하기 마련인데 하물며 초자연적인 것에 대해서 우리가 무슨 말을 하겠는가?

그렇다. 사람에게는 심은 대로 거두는 일이 적지 않다. 인과응보의 원리는 분명히 작용한다. 하지만 그것만이 전부는 아니다. 때로는 하나님께서 우리가 전혀 기대(예상)하지 못한 은혜를 부어주신다. 이것 또한 우리의 실제 상황이다. 교회와 성도를 박해하는 사울(바울)을 찾아와 만나시던 예수가 또한 그 증거이다.(행 9장)

* 정현진 목사님의 연재를 마무리합니다. 그동안 좋은 글 보내주신 목사님께 감사드립니다. - 편집부


정현진 | 독일 마인츠대학교에서 구약성서신학을 전공하여 박사학위를 받았다. 『다윗도 사무엘도 몰랐다』, 『표적이 전하는 소리를 듣는가』, 『마틴 루터의 시간을 거닐기』 등을 저술했다. 현재 수도교회 담임목사, 한신대 외래교수로 활동 중이다.

 
 
 

2018년 12월호(통권 72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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