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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와설교 (2018년 11월호)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본문

 

요한계시록에 등장하는 일곱 교회 가운데 주님께 칭찬받았던 서머나교회에는 주님께서 “십 일 동안 환난을 받으리라”는 예언의 메시지도 주셨고,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는 격려의 메시지도 주셨으며, “생명의 관을 네게 주리라”는 약속의 메시지도 주셨다.(계 2:10) 특히 “십 일 동안 환난을 받으리라”는 예언의 메시지는 짧고 경한 환난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기원후 313년 콘스탄티누스 대제에 의해 기독교가 공인되기까지 로마제국의 황제들에 의해서 오랜 세월 동안 자행된 기독교에 대한 10대 박해를 의미한다는 역사적 해석도 있다. 그렇다면 “생명의 관을 네게 주리라”는 약속의 메시지 속에 주어진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는 격려의 메시지는 어떤 의미가 담겨 있는 것일까?

십자가를 지라
주님께서는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눅 9:23)라고 말씀하신다. 누구나 십자가를 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부인하는 자만이 십자가를 질 수 있다는 뜻이다. 성서 속 사도 바울은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전 15:31)라는 별세 선언으로 자기를 부인했을 뿐만 아니라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갈 2:20)라고 예수 살기까지 선언하며 날마다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삶을 살았다.
‘복음의 봄소식’을 들고 스위스에서 조선에 온 여성 선교사 쇄읍(瑣邑, Scharpff Hanna, 1878-?) 역시 영혼을 살리는 일이라면 끼니도 거른 채 촌음을 아껴 말을 타고 곳곳을 누비며 전도를 하였다. 또한 거금을 들여 단독으로 ‘돌 예배당’까지 건축하는 등 자기 십자가를 짊어지고 헌신과 희생의 삶을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1931년 기독교조선감리회 제1회 동・중・서부 연합연회에서 여자 목사 안수까지 받았던 그녀의 조선 선교 25주년 기념식은 1936년 12월 10일 자신이 건축한 홍성읍교회(현재 홍성제일교회)에서 개최되었다. 좌방교회(현재 등대교회) 임명호 본처전도사(오늘날의 장로)의 사회 속에 양막교회 윤희두 권사가 그녀의 약사를 읽어 일반에게 큰 감명을 주고, 홍성지방 이명제 감리사가 뜻깊은 축사를 하였다. 마지막으로 서산구역 김만례 전도부인이 쇄읍 목사의 정성을 감사하는 본 지방 교인들의 기념품을 대표로 진정한 뒤에 성대한 기념식은 마무리되었다. 1937년 1월 16일 자 「감리회보」에 실린 기념식 기사에는 그녀가 짊어졌던 십자가와 함께 그녀에게 헌정하였던 선교사 찬미가를 담고 있다.

쇄읍 목사는 지금으로부터 육십일년 전 4월에 서서(瑞西, 스위스)에 사는 목사의 가정에서 나서 교육은 독일과 미국에서 받았다. 조선에 선교의 발자욱을 들여 놓기는 1911년 3월 3일 봄소식이 돌아오는 때에 복음을 가지고 조선사람에게 오셨다. 그는 1911년 3월로 1914년 7월까지는 강화도와 부평구역에서 사역하고 1914년 7월로 1920년까지는 세계 대전쟁으로 미국에서 휴양하다가 1920년에 다시 조선에 나와 1926년까지 이천지방에서 사역하다가 1926년부터 지금까지는 홍성지방에서 큰 활동을 하여 모든 사람의 사랑을 받고 있다.
쇄읍 목사의 독특한 것은 침식을 잊고 조선 사람의 영혼을 구원하기 위하여 동분서주한 것이다. 어떤 때는 많은 사무에 아침밥을 못잡수고 조반겸저녁으로 오후 여섯시에 잡수는 일도 있었다. 근년에는 홍성읍 예배당도 시가 6천여원의 건물을 단독으로 지어서 교회는 물론 사회까지 그녀의 갸륵한 행동에 칭송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언제든지 지방일에는 마지막 돈(있는 돈)은 다 쓰시는 분이다. 그의 충성에는 누구나 감복치 않을 이가 없다.…

선교사여!
그대의 발자취는 아름답구나!
우리는 거기에 감사한 입을 맞추고 기꺼운 노래를 올린다. 올린다.

우리의 노래를 들으소서
먼저 온 선교사여!
우리의 감사를 받으소서.
일 많이 한 선교사여!

이 땅에 주의 복음을 더욱 바쁘게
더욱 부지런히 심으소서. 가꾸소서.
그래서 무성해 가는 주의 곡식을 보게 하소서. 오오. 선교사여!1


생명을 걸어라
주님의 일을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다.(고전 4:2) 곧 주님을 위해 생명을 걸어야 함을 의미한다. 주님을 위해 생명을 걸었다면 인간이 지닌 고귀한 액체인 눈물과 땀도 흘려야 하지만 때로는 피까지도 흘려야 한다. 성서 속 베드로는 자신의 생명을 부지하기 위해 세 번씩이나 주님을 부인하였으나,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후 자신의 양을 돌보라는 예수의 당부대로 주님의 양 떼를 생명을 걸고 돌보았다. 그뿐만 아니라 유세비우스의 교회사 속 베드로는 주님을 위해 거꾸로 십자가에 매달려 생명까지 바쳤다.
이처럼 주님께서 맡겨주신 주님의 양 떼를 위하여 생명을 걸었을 뿐만 아니라 순교의 피까지 흘린 ‘양바보’ 목회자가 있었다. 그 목회자는 바로 김영학(金永鶴, 1877-1933) 목사이다. 그는 공산화되고 있던 시베리아에 선교사로 파송되어 ‘일상의 길’이 아닌 ‘고난의 길’에서 사고사로 음력 1932년 12월경에 순교한 것으로 추정된다. 1933년 11월호 「감리회보」에는 “노령에서 순교한 김영학 목사”라는 제하의 글을 통해 선한 목자였던 그의 순교를 경하하며 애도를 표하고 있다.

고 김영학 목사는 전 남감리교회의 유력한 목사로 내지에서 다년간 활동하다가 1922년 9월에 시베리아 선교지로 파송을 받아 로령 해삼위로 부임하였다. 그리하여 여러해동안 시베리아에서 헤매는 동포들의 영혼을 구하기 위하여 필사적으로 노력한 결과 교회까지 세우게 되었다. 그러나 불행히도 혁명된 노동 러시아의 종교 박멸운동으로 인하여 교회는 깨어지고 말았다. 예배당은 압수되고 교인들은 갖은 학대를 받게 되었다. 그러므로 견딜 수 없는 교인들은 혹은 북간도로 혹은 본국으로 도망하여 나오게 되었다. 그러나 선교사로 퇴거명령을 당한 김목사는 도주하여 국경을 넘지 못하는 교우들을 그대로 내버리고 떠날 수 없어 그들과 생사를 같이 하기로 결심하고 그의 가족들만 본국으로 돌려 보내고 자기 홀로 남아서 교우들을 돌보다가 1930년 1월 3일에 러시아 관헌에게 체포되어 십년 징역의 선고를 받고 해삼위 감옥에서 복역하다가 작년 9월에 감차카에서 밤낮 사흘이나 더 들어가는 나강으로 전감되었다. 그곳에서 11월경에 눈치는 일을 하다가 농가름에 빠져서 무참히도 세상을 떠났다.
하나님의 교회를 위하여 생명을 버린 그의 뜻을 생각할 때 쌍수를 들어 경하할 일이나 그의 유족들의 슬퍼함을 볼 때 흐르는 눈물을 금하기 어렵다.2


한결같아라
충성은 처음부터 끝까지 변함없는 신실함을 지키는 것을 뜻한다. 성서는 우리가 믿는 주님을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신 분(히 13:8)으로 소개하고 있다. 하지만 영원히 신실하신 주님 앞에 서 있는 인간은 연약하고 변화무쌍한 존재이다.
예산군 오가면장을 역임한 좌방교회 본처전도사 임명호(任明鎬, 1870-1937) 역시 연약한 인간이었으나 주님 앞에서 신앙의 용사이자 주님의 충복으로 살았다. 이 같은 그의 신실한 신앙을 후세에 전하고자 삽교구역 교우 일동은 1941년 12월 25일 ‘고전도사임명호씨기념비’를 좌방교회에 건립한 바 있다. 그는 기독교에 입교한 후 일부일부(一夫一婦)를 하나님의 뜻으로 깨달아 성서 속 아브라함이 하갈을 내보낸 것처럼 출첩도 하였고 축첩도 거부하였다. 또한 주초도 거절하고 교역자를 존대할 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담임교역자 봉급을 영구히 담당하겠다는 최후의 유언까지 남기며 주님 앞에 신실한 삶을 살다 갔다.
그가 남긴 최후의 유언은 그의 무남독녀인 임숙재 숙명여대 교수가 지켰다. “십 년이면 강산이 변한다.”라는 속담이 무색할 정도로 10여 년을 한결같이 삽교구역 담임교역자의 생활비를 지급한 것이다.3
그가 1937년 12월 22일 소천한 직후 조종범 목사는 ‘태산’ 같은 위대하고 흠모할 만한 신앙인이었던 그를 1938년 2월 1일 자 「감리회보」를 통해 다음과 같이 추모하였다.

선생이 신앙의 용사인 동시에 주님의 충복인 것을 기억에 있는대로 적어보자.
일. 신앙하신 초년의 일이었다. 일부일부주의가 하나님의 뜻인 것을 깨달으신 선생은 단연코 출첩하신 일이다. 뿐만 아니라 슬하에는 대를 이을 여자 한 명이 있을 뿐으로 축첩이라도 다시 하여서 자손을 보아야 한다고 매우 가까운 친척과 오랜된 친구들의 권면이 한두번이 아니로되 그의 신앙은 태산이 부동하고,
이. 공리생활 수십년에 관공리의 교제가 빈번하되 주초는 절대금물이었다. 교제에는 어찌할 수 없다는 여세타협(與世妥協)한 신자들아 부끄럽지 아니하냐.
삼. 교역자 존대문제이다. 노인으로 교역자가 비록 연천한 청년일지라도 극히 존대함은 다름이 아니라 주께서 보내신 종이라 하시는 의미에서 다시 말하면 주를 영접하는 그 마음이었다.
사. 최후유언이시었다. 그 무엇이든지 주를 위하여 하시겠다는 그 정신 그대로 저나라를 향하시려는 찰나에 유족들과 교회측을 불러 놓으시고 가장 힘드시는 말씀을 하시었다. 삽교구역을 위하여 담임목사의 봉급을 년 6백원으로 영구히 담당하겠다는 것이다. 아 감사한 일이다.4



1 “선교 이십오주년 맞는 쇄읍 목사,” 「감리회보」 1937년 1월 16일 자, 3.
2 “노령에서 순교한 김영학 목사,” 「감리회보」 1933년 11월호, 5.
3 “고임명호전도사 제십이주기 일을 맞어 기념종은 울리다,” 「조선감리회보」 1948년 2월 15일 자, 2.
4 “추도 고 임명호 전도사,” 「조선감리회보」 1938년 2월 1일 자, 5.



고성은 | 목원대학교와 호서대학교에서 교회사를 공부하여 박사학위를 받았다. 저서로는 『신홍식의 생애와 민족목회활동 연구』, 『철마 정경옥, 생애 연구』, 『동부연회 순교자열전』(공저) 등이 있다. 현재 충남 홍성에 있는 광리교회 담임목사로 시무하고 있으며, 목원대 외래교수로 강의하고 있다.

 
 
 

2018년 11월호(통권 71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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