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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와설교 (2018년 11월호)

 

  계시 받음의 허와 실
  욥기 4:12-21

본문

 

12 어떤 말씀이 내게 가만히 이르고 그 가느다란 소리가 내 귀에 들렸었나니 13 사람이 깊이 잠들 즈음 내가 그 밤에 본 환상으로 말미암아 생각이 번거로울 때에 14 두려움과 떨림이 내게 이르러서 모든 뼈마디가 흔들렸느니라 15 그 때에 영이 내 앞으로 지나매 내 몸에 털이 주뼛하였느니라 16 그 영이 서 있는데 나는 그 형상을 알아보지는 못하여도 오직 한 형상이 내 눈 앞에 있었느니라 그 때에 내가 조용한 중에 한 목소리를 들으니 17 사람이 어찌 하나님보다 의롭겠느냐 사람이 어찌 그 창조하신 이보다 깨끗하겠느냐 18 하나님은 그의 종이라도 그대로 믿지 아니하시며 그의 천사라도 미련하다 하시나니 19 하물며 흙집에 살며 티끌로 터를 삼고 하루살이 앞에서라도 무너질 자이겠느냐 20 아침과 저녁 사이에 부스러져 가루가 되며 영원히 사라지되 기억하는 자가 없으리라 21 장막 줄이 그들에게서 뽑히지 아니하겠느냐 그들은 지혜가 없이 죽느니라(욥 4:12-21)


주제 해설
자신의 전통적인 신앙에 따라 욥에게 충고하던(욥 4:1-11) 엘리바스는 자신이 경험한 신비한 체험을 기반으로 말을 이어갔다. 그에게는 예언자가 환상을 본 것과 같은 일이 일어났다. 그가 받은 계시는 인간이란 철두철미 연약하고 무상하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인간은 하나님 안에서 어떤 존재인가? 엘리바스의 말처럼 인생이 그렇게 무가치한 것일까?

본문 살피기
욥기 4-5장에 있는 엘리바스의 말은 일곱 개의 문단으로 나누어진다.(4:1-6, 7-11, 12-17, 18-21, 5:1-7, 8-16, 17-27) 그중 욥기 4장 12-16절은 마치 모세나 이사야가 신비로운 경험을 하며 하나님 말씀을 들었던 대목(출 3:34, 사 6장)을 연상하게 한다. 또 예언자의 환상보도문도 생각나게 한다. 그는 예언자의 옷을 입고 나타났다. 그가 꿈과 계시를 통해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는 점에서 그렇다.
12-16절에서 그는 자신의 신비한 경험을 이야기했다. 12절은 ‘나를’이라는 말이 맨 앞에 쓰이며 크게 강조되었다.(직역: 그리고 나를 한 말씀이 사로잡았다. 그리고 가는 소리가 나를 사로잡았다.) 그 순간에 자신도 놀랄 만큼 계시의 순간은 신비했다. 마치 도둑처럼 갑자기 임한 그 말씀은 그의 정신을 훔쳤으며, 세미한 음성으로 그의 귀에 들려왔다.(왕상 19:12 참조) 그것은 자고 있는 사이에 일어났다.(13절) 잠들어 있는 자신을 압도했다.
‘깊은 잠’이라는 뜻의 단어 ‘타르데마’(hm'Der>T;)는 성서에서 세 가지 용례가 있다. 첫째, 요나의 깊은 잠, 이것은 자연적인 잠이다.(욘 1:5-6, 삿 4:21 참조) 둘째, 게으른 사람의 잠(잠 19:15), 이것은 태만한 결과이다. 셋째, 하나님께서 특별한 목적에 따라 주시는 잠이다. 이는 하나님께서 하와를 창조하실 때 아담을 잠들게 하여 무의식의 상태에 이르게 한 것이나(창 2:21) 어떤 것에 압도되어 정신(얼)이 나간 모습(사 29:10), 아브라함의 잠(창 15:12), 사울 일행의 잠(삼상 26:12) 등에 사용되었다. 이렇게 잠들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다. 엘리바스의 깊은 잠은 세 번째 경우에 속한다. 그는 수면 중에 초월인 존재를 만났다.
그때 그에게 범상치 않은 일이 몇 가지 일어났다. 첫째, 그의 생각이 번거로워졌다.(13절) 여기서 ‘생각’이라는 단어 ‘쉬임핌’(~yPi[if.)은 갈등이나 악몽 등으로 인해 잡념, 불안감, 정신적 혼란 등이 생기는 것을 나타낸다.(욥 20:2, 시 139:23, 왕상 18:21 참조) 이는 예언자 이사야가 거룩한 하나님의 존전에서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나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주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사 6:5)라며 망연자실한 것과 비슷한 말맛이리라.
둘째, 두려움과 떨림으로 뼈마디가 흔들렸다.(14절) 여기서 뼈를 나타내는 ‘에쳄’(~c,[,) 또는 ‘아차밈’(~ymic'[])은 뼈, 생명, 몸을 가리킨다. 개역개정은 잠언 3장 8절에서 이 단어를 ‘골수’로 번역했다. “나의 죄로 말미암아 내 뼈에 평안함이 없나이다”(시 38:3), “저주가 물 같이 그의 몸 속으로 들어가며 기름 같이 그의 뼈 속으로 들어갔나이다”(시 109:18), “욕을 끼치는 여인은 그 지아비의 뼈가 썩음 같게 하느니라”(잠 12:4), “심령의 근심은 뼈를 마르게 하느니라”(잠 17:22) 등에서 보듯이 이것은 성서, 특히 성문서에서 심령의 처소 또는 그 사람의 인격과 동일시되었다. 뼈를 인간의 몸을 구성하고 지탱하는 가장 중요한 부분일 뿐 아니라 마음(심장)처럼 지·정·의의 처소로 여겼다. 여기서는 하나님의 초월적 임재를 경험한 엘리바스가 두려움과 경외감으로 인해 온몸, 전 존재가 전율하는 것을 가리킨다.(렘 23:9, 합 3:16 참조)
셋째, 어떤 영(루앗흐)을 체험했다.(15a, 16a) 그것이 하나님의 영인지 사탄의 영인지 확실하지 않다. 학자들 중 일부는 이를 (음산한, 차가운, 초자연적인) 바람으로 해석하기도 하는데, 전후 문맥으로 보건대 이는 적절하지 않다. 그는 영의 임재를 느꼈다. 그는 두려움과 떨림으로 뼈마디가 흔들렸으며(14절, dxp) 전신이 전율했다.(15절, rms) 길가메시 서사시에도 이와 비슷한 표현이 있다. “너는 나를 건드리지 않았느냐? 나는 왜 놀라는가? 어떤 신이 지나가지 않았는가? 내 살이 왜 무감각한가?”(토판 5, 4:11-12)
넷째, 몸의 털이 주뼛하게 일어섰다.(15b) 이는 갑자기 바람이 휙 불자 소스라치는 듯한 모습이다. 어쩌면 뜻밖의 현상에 깜짝 놀라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머리카락이 곤두서는 것일 수도 있다.
다섯째, 어떤 형상을 보았다.(16a) 여기에서 ‘형상’(hn"WmT., 트무나)은 하나님과의 만남을 나타내는 독특한 용어이다.(민 12:8, 시 17:15)
마지막으로, 그는 어떤 목소리를 들었다.(16b) 마치 선지자 엘리야처럼(왕상 19장), 사도 베드로처럼(행 10장) 말이다.
엘리바스는 계시를 받아 영과 형상을 체험하며 무엇을 깨달았는가? 그는 자신의 깨달음이 자신의 직관이나 통찰력에서 온 것이 아니라 그 배후에 있는 신적인 권위(영)에 근거한다고 주장했다. 그 내용은 17절에 있다. 수사학적 의문문인 이 구절의 첫 낱말은 ‘사람’(vAna, 에노쉬)이다. 이것은 그 연약하고 유한한 본질로 인해 앞서 나온 영이나 형상과는 극명한 대조를 이룬다. 또한 이것은 욥기 4장 7절의 메아리처럼 들린다. “욥, 당신은 결코 의롭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의로운 자에게 고난을 허용하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당신이 겪는 일들이 당신은 죄인이라는 사실을 증명해줍니다.”
18-21절은 17절에 대한 설명이다. 여기에 나열된 용어들은 초자연적이며 신비로운 성격을 나타낼 뿐만 아니라 섬뜩하고 기묘하며 오싹하기까지 하다. 그에 따르면 하나님은 자신의 종도 믿지 않으시며, 천사들까지도 미련하게 여기신다. 성서에서 하나님의 종이나 천사가 매우 명예로운 존재라는 점을 감안할 때 이런 말은 매우 뜻밖이다.
엘리바스는 인간이라는 존재의 연약함과 허무함을 적나라하게 묘사했다.(19-21절) 그는 인간을 흙집과 티끌에 비유했다. 인간은 아침과 저녁 사이에도 부스러져 가루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그의 언급은 창세기 2장 7절을 상기시키면서도 의미상 그 대목과 근본적으로 배치된다.
그에 따르면 인간의 끝은 장막줄이 늘어져(끊어져) 주저앉은 천막과 같다.(21절) 그는 인간을 장막(천막)에 비유했다. 여기에서 장막은 인간의 육체를 나타내며(고후 5:1, 4, 벧후 1:13), 줄은 그것을 지탱하는 생명을 가리킨다. 장막을 지탱하는 줄을 빼낼 때 장막이 주저앉듯이 인간은 힘없이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이다.(욥 6:9, 사 38:12) 이렇게 인간은 잊혀져 영원히 사라지는 것이다.(전 1, 11장 참조)
이것이 성서의 가르침이라면, 우리 몸의 부활은 무엇이며, 새 하늘과 새 땅은 누구에게 주어지는 것일까? 욥기 1-2장에 나타난 욥의 모습은 다 허상인가? 이런 뜻에서 우리는 엘리바스가 받았다는 계시를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라고 볼 수 없다.

설교 착상
1) 비교할 것을 비교해야지

엘리바스가 계시를 받았다며 펼친 첫 번째 주장은 이렇다. “사람이 어찌 하나님보다 의롭겠느냐 사람이 어찌 그 창조하신 이보다 깨끗하겠느냐.”(17절)
이는 두말할 것도 없이 분명한 사실이다. 문제는 이를 지나치게 강조하는 데 있다. 그렇게 하다 보면 반드시 부작용이 생긴다. 이로써 하나님의 공의에 하나라도 더 합당하게 살려는 의지가 꺾인다. “이러나저러나 어차피 나는 하나님의 기대에 부응할 수 없다. 하나님의 뜻에 부합할 수 없다.”라며 지레 포기한다. 하나님과 말씀 안에서 선한 영향력을 끼치고 싶은 의욕을 잃는다.
엘리바스의 주장에는 근본적인 문제가 있다. 하나님과 인간을 비교하는 것 자체가 이미 불신앙이다. 하나님은 어떤 경우에도 인간과 비교될 대상이 아니다. 오직 신뢰와 경배와 영광을 받으실 분이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사는 동안 알게 모르게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것이 인생이다.

2) 아무도 믿지 않는 자의 불행
엘리바스의 두 번째 주장은 이렇다. “하나님은 그의 종이라도 그대로 믿지 아니하시며 그의 천사라도 미련하다 하시나니.”(18절)
참으로 엉뚱한 주장이다. 만일 이 주장대로라면 하나님은 얼마나 불행하실까? 하나님이 마치 주변에 자신이 신뢰하는 사람이 하나도 없이 살았던 스크루지 영감 같다는 말인가? 누군가를 신뢰할 수도 없고, 무엇인가를 믿고 맡길 수도 없는 이들에게 둘러싸여 사는 사람의 각박하고 고된 삶을 우리는 이미 잘 알고 있다.
엘리바스의 주장대로라면 인간은 그 누구도 주님의 사역에 참여할 수 없다. 하지만 성서에는 하나님께 신뢰받는 피조물이 있다. 그들은 하나님의 창조사역에 쓰임을 받았다.

-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창 5:24)
- 이것이 노아의 족보니라 노아는 의인이요 당대에 완전한 자라 그는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며(창 6:9)
- 우스 땅에 욥이라 불리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은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더라(욥 1:1)


베드로를 비롯한 제자들은 예수와 함께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파하기에 턱없이 부족한 사람들이었다. 그런데도 예수는 제자들과 그들 안에 거하실 성령을 신뢰하였다. 그 제자들이 사도가 되어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을 톡톡히 해낼 것을 내다보았다.

3) 연약하기만 한 피조물일까
엘리바스는 인간을 처음부터 끝까지 매우 연약한 피조물로 보았다.(19-21절) 그가 말하기를, 사람이란 “하루살이 앞에서도 무너질 자”이며(19절), “아침과 저녁 사이에 부스러져 영원히 사라질” 존재이다. 이말은 어느 정도 일리가 있다. 다만 진실의 전부는 아니다. 사람이 흙먼지로 만들어져 연약할지라도 하나님께서 만드신 피조물이요, 모든 피조물 가운데 유일하게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존재이다. 이 두 가지는 진실로 놀랍고도 신비로운 사실이다.
우리의 신앙은 이 두 사실을 균형 있고 조화롭게 받아들이는 것에서 출발한다. 하나님은 엘리바스가 말한 위와 같은 상태에 사람이 영원히 머물기를 바라실까? 결코 그렇지 않으리라. 성서는 다음과 같이 인간을 하나님의 청지기요, 성령의 동역자로 인정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동역자들이요 너희는 하나님의 밭이요 하나님의 집이니라.”(고전 3:9) “이 복음을 위하여 그의 능력이 역사하시는 대로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을 따라 내가 일꾼이 되었노라.”(엡 3:7)

4) 계시 받음의 허와 실
엘리바스는 확신에 차서 자신이 욥에게 하는 말을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계시라고 말했다.(12-16절) 어떤 말씀이 자기 마음을 사로잡았으며 가느다란 음성이 자기 귀에 들렸노라고 했다.(12절) 성서에 비추어 볼 때 그의 주장에는 두 가지 치명적인 오류가 있다. 하나는 그가 천상회의의 내용을 전혀 모른다는 점이다. 다른 하나는 하나님께서 이미 인정하신 욥의 경건을 아예 무시하는 태도이다.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것이 아닌 땅으로부터 오는 확신은 자칫 사람을 멍들게 하며 죽게 할 수도 있다. 엘리바스가 그 예이다. 물론 그와 반대되는 사례도 있다. 사도 베드로는 하나님의 계시를 받아 고넬료와 그 식구를 구원했다.(행 10장) 사도 바울은 계시를 받아 복음 전파의 영역을 아시아에서 서유럽으로 확장했다.(행 16:6-10)
오늘 우리는 묻는다. 우리의 신념이나 확신은 생명을 살리는 방향으로 가고 있는가? 우리가 받은 계시(말씀)는 피조물을 치유하고 회복시키는 길로 향하고 있는가?


정현진 | 독일 마인츠대학교에서 구약성서신학을 전공하여 박사학위를 받았다. 『다윗도 사무엘도 몰랐다』, 『표적이 전하는 소리를 듣는가』, 『마틴 루터의 시간을 거닐기』 등을 저술했다. 현재 수도교회 담임목사, 한신대 외래교수로 활동 중이다.

 
 
 

2018년 11월호(통권 71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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