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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와설교 (2018년 9월호)

 

  그는 알고 있었다
  욥기 3:20-26

본문

 

20 어찌하여 고난 당하는 자에게 빛을 주셨으며 마음이 아픈 자에게 생명을 주셨는고 21 이러한 자는 죽기를 바라도 오지 아니하니 땅을 파고 숨긴 보배를 찾음보다 죽음을 구하는 것을 더하다가 22 무덤을 찾아 얻으면 심히 기뻐하고 즐거워하나니 23 하나님에게 둘러 싸여 길이 아득한 사람에게 어찌하여 빛을 주셨는고 24 나는 음식 앞에서도 탄식이 나며 내가 앓는 소리는 물이 쏟아지는 소리 같구나 25 내가 두려워하는 그것이 내게 임하고 내가 무서워하는 그것이 내 몸에 미쳤구나 26 나에게는 평온도 없고 안일도 없고 휴식도 없고 다만 불안만이 있구나(욥 3:20-26)

주제 해설
사람이 일생을 사는 동안 아마도 최소한 두세 번 이상은 자신의 생명과 인생을 엄청난 무게로 짓누르는 일을 겪을 것이다. 그런 때가 아니라면 욥기 3장에 있는 그의 부르짖음이 잘 이해되지 않을 것이다. 자신의 미래가 지금보다 더 좋아지기를 바라는 대신에 그냥 이대로 끝나버리기를 바라는 사람에게 삶은 무엇이고 죽음은 무엇일까?

본문 주석
이는 쓰디쓴 인생의 현실에 직면한 욥의 한탄이다. 그는 자신이 아예 모태에서 생겨나지 않았기를 원했으나 이루어지지 않았으니, 또 태어나자마자 죽기를 바라던 일도 실현되지 않았으니, 이제 하루라도 빨리 죽기를 바랐다.
11절에 이어 20절도 의문사 ‘람마’(hM'l',, 어찌하여)로 시작한다. 이로써 그는 하나님께 두 가지 질문을 던졌다. 첫째로 어찌하여 하나님은 고난 가운데서도 자신의 생명을 연장시켜주시는지(20-23절), 둘째로 무슨 까닭으로 자신에게 고난이 찾아오는지를(25-26절) 물었다.
그는 자신의 모습을 여러 가지로 묘사했다. 먼저 욥은 자신을 ‘아멜’(lme[', 고난당하는 자)로 묘사한다. ‘아멜’의 뿌리인 ‘아말’은 단순하게 수고하며 일한다는 뜻을 넘어 비참하게 일한다는 말맛이 있다.(민 23:21, 사 59:4, 렘 20:18, 시 7:14 등) ‘아멜’이라는 말은 3장 10절의 ‘아말’(lm'e[',환난) 및 17절과 26절의 ‘로게즈’(zgro, 소요, 불안)로 이어진다.
또한 그는 자신을 ‘마음이 아픈 자’(vp,n" yrEm', 마레 나페쉬)라고 했다.(7:11, 10:1, 잠 14:10 참조) 이것은 매우 의기소침해진 상태를 가리킨다. 이 표현은 필시 ‘마르-함마붸트’(tw

- 한나가 마음이 괴로워서 여호와께 기도하고 통곡하며(삼상 1:10)
- 그들은 들에 있는 곰이 새끼를 빼앗긴 것 같이 격분하였고(삼하 17:8)
- 어떤 사람은 마음에 고통을 품고 죽으므로 행복을 맛보지 못하는도다(욥 21:25)
- 그들이 다 너를 위하여 머리털을 밀고 굵은 베로 띠를 띠고 마음이 아프게 슬피 통곡하리로다(겔 27:31)
- 내 영혼의 고통으로 말미암아 내가 종신토록 방황하리이다(사 38:15)


욥이 세 번째로 자신을 묘사하기를 현재 그는 음식 앞에서도 탄식이 나며 그가 앓는 소리는 물이 쏟아지는 소리 같다.(24절) 이에 덧붙여 자신이 두려워하던 일이 일어난 지금 그에게는 평온도, 안일도, 휴식도 없으며 다만 불안만이 있을 뿐이라고 자신의 상황을 그리고 있다.(26절)
그는 물었다. 하나님은 어찌하여(무슨 목적으로) 고통당해 지친 사람에게 빛을 주시는가? 차라리 죽었으면 좋겠다고 하는 사람의 생명을 연장해주시는가? 자신의 생활에 끝없이 밀려오는 환난을 겪으며 몸뿐만 아니라 마음과 영혼까지 침체일로를 걷는 욥은 스올에서나마 평안(휴식)하기를 갈망했다.(20-22절)
갈망하다는 말(חָכָה)은 대체로 긍정적인 소망과 기대를 나타낼 때 쓰인다. 그 목적어는 하나님 또는 하나님의 뜻이다.(시 106:13, 사 8:17, 30:18, 64:3, 호 6:9, 합 2:3, 습 3:8) “우리 영혼이 여호와를 바람이여 그는 우리의 도움과 방패시로다.”(시 33:20)
욥은 그와 정반대로 이 낱말을 썼다. 그는 아무도 원하지 않는 것을 바라는 사람이었다. 그는 하루라도 빨리 죽기를 바라는 심정을 스스럼없이 나타냈다. 그는 그런 자신을 무덤에서 보물을 열심히 찾는 자들에 비유했다. 무덤을 파헤치는 도굴꾼이 그 속에서 보물을 발견하면 펄쩍펄쩍 뛰며 기뻐하듯이 자신에게도 죽음이 찾아온다면 뛸 듯이 즐거워하리라는 것이다.(22a절)
그리스 신화에 보면 소포클레스가 필록테테스의 입을 빌려 이렇게 탄식했다. “사망아, 사망아, 내가 너를 날마다 방문할 수 있으나, 네가 내게 올 수 없나니, 어찌된 일인가?” 우가릿 문서에 따르면 아낫의 소생과 바알의 시신을 매장하는 일을 돕는 동안 지치도록 우는 태양의 여신의 모습이 이렇게 묘사되어 있다. “그녀는 연거푸 들이키는 포도주처럼 눈물을 마셨다.”(24절 참조) 사람이 몹시 지쳐있을 때, 그래서 살기보다는 차라리 죽는 편이 더 낫다고 위와 같이 생각하는 것은 어느 시대, 어느 문화에서나 다 한결같은 모양이다.
현실의 어려움 때문에 차라리 죽고 싶다고 성서에서 그 심경을 토로한 사람은 욥 외에도 몇 명이 더 있다. 그들은 누구인가? 모세(민 11:15), 엘리야(왕상 19:4), 예레미야(렘 20장), 요나(욘 4:3), 토비트와 사라(토비트 3:6, 10, 13, 15) 등 모두가 기라성 같은 인물들이다. 그들은 자신의 목숨을 하나님께서 거두어주시기를 바랐다. 욥도 그런 심정을 몇 차례 보여주었다.(욥 6:8-13, 7:15-16 등) 위대한 신앙인 중에서 스스로 자신의 목숨을 거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욥도 그랬다. 그는 죽겠다고 소리를 지를 뿐 스스로 죽으려는 행동을 단 한 번도 하지 않았다.
1-2장에 다섯 차례 쓰였던 ‘쁘아드’(d[;b, 둘레에, 주변에)가 다시 23절에 ‘빠아도’(Ad[]B, 그것의 둘레 안에, 그 주변 안에)로 나온다. 사탄은 욥을 철저하게 보호하시는 하나님에게 항변하면서 이 표현을 썼다. 이번에는 욥이 이것을 들고 나왔다. 하나님은 어찌하여 길 잃은 사람을 붙잡아 놓으시고 그 길을 사방으로 둘러싸시냐(막으시느냐)는 말이다.
이는 20절의 내용과 뜻이 잘 통한다. 살아갈 길이 없어 죽을 지경인 사람에게 무슨 이유로 빛과 생명을 허락하시는가를 묻던 그는 이제 인생의 문제를 돌파할 수 없어 아득한 사람에게 무슨 이유로 출구가 보이지 않게 사방을 다 막아버리시냐고 했다. 욥기 1장 21절, 2장 10절에서 그는 자신에게 임한 모든 재난의 배후에 하나님이 있다고 믿었다. 지금도 그 믿음에는 변함이 없다. 그는 자기가 죽으려야 죽을 수 없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24절에는 그가 겪는 고통이 한 폭의 그림처럼 묘사되었다. 탄식(hx'n"a)은 마음을 침울하게 하는 상황과 육체의 고생을 모두 일컫는다. 앓는 소리(hg"a'v.)는 번뇌하는 사람의 울부짖음을 가리킨다.(시 22:1, 32:3, 38:8)
어떤 심리학자들은 25절을 즐겨 인용한다. 이를 욥기 1장 5절과 연결지어 두려운 생각을 품으면 정말로 두려워할 일이 생긴다거나, 욥의 신경과민(신경질환)을 나타낸다거나, 욥의 신앙이 병적인 것이었다는 그들의 주장은 신학적으로 동의하기 어렵다. 여기에는 그가 처한 현실에 관한 그의 아픈 마음이 드러났을 뿐이다.
26절은 탄식할 수밖에 없는 욥의 기막힌 상황을 한마디로 요약했다. 그는 평안함도, 고요(평정)도, 평온도 상실했다. 그는 어디서 평안과 휴식을 찾을 수 있을까? 욥기 3장은 스올의 평온함(13-15, 17-19절)과 욥의 쉬지 못함 및 혼란스러움(10, 17, 20, 26절)이 극적인 대조를 이룬다.

설교 착상
1) 그는 알고 있었다

욥의 처지는 어떠한가? 욥은 고난당하는 자(직역: 힘겹게 일하는 자), 마음이 아픈 자(직역: 영혼이 쓴 자)였다. 그는 육체적·정신적으로 번뇌하면서 겨우 목숨만 부지하고 있으며, 음식을 보면 숟가락을 들기 전에 신음소리부터 내고, 그 입에는 물이 쏟아지는 듯 앓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것이 그가 아는 자신의 현실 전부일까? 아니다.
그가 아는 또 하나의 현실은 자신이 하나님에게 둘러싸여 있다는 사실이다. “자신의 길이 감추어진 남자에게 어이하여 하나님은 그 주위를 감싸고 계시는가.”(23절 직역) 하나님은 ‘그와 그의 집, 그에게 있는 모든 것 주위에 울타리를’ 둘러치셨다.(1:10) ‘가죽의 둘레에 가죽으로’ 두르셨다.(2:4) 진실로 하나님은 욥과 그 인생의 둘레에 울타리를 해 놓으셨다. 이를 잘 아는 욥은 비록 불평 어린 말투로 표현하면서도, 하나님께서 자신을 이대로 죽지 않게 보호하시리라 믿었다.
그가 말하는 죽음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그런 것이 아니다. 단지 잠시 동안 환란을 피해 있을 곳이요, 고난과 역경에서 한숨을 돌리는 자리일 뿐이다. 26절에서 그는 역설적으로 이를 표현했다. “나에게는 평온도 없고 안일도 없고 휴식도 없고 다만 불안만이 있구나.”(26절)
욥은 스스로 목숨을 끊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의 목숨을 하나님 손에 맡겼다. 이것이 그의 신앙이다. 비록 하나님을 이해할 수 없더라도, 현실을 견뎌내기 힘겹더라도 그는 하나님을 향한 신뢰를 포기하지 않았다.

2) 하늘이 무너지는 듯
욥기 3장에서 욥은 자신에게서 빛(생명)이 사라지기를 소원했다. 자신의 미래가 지금보다 더 좋아지기를 바라지 않는 사람의 심정은 어떤 것일까? 고난당하는 그에게는 빛이, 마음이 아픈 그에게는 생명이 주어졌다.(20절) 여기에는 서로 어울리지 않는 개념이 연결되었다. 이로써 그의 고통스러운 현실뿐만 아니라 내적인 갈등이 여실히 드러난다.
욥의 인생은 중간에 무너졌다. 그의 생활이 태어날 때부터 여유로웠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는 매우 유복하게 살았다. 주변 사람들이 부러워할 만큼, 또 하나님께서도 인정하며 칭찬하실 정도로 다복했다. 그런 것들이 하루아침에 다 날아가버렸다. 그 몸에는 질병이, 그 마음에는 상실과 파괴로 인한 괴로움과 허탈감이 자리를 잡았다. 그의 심정은 마치 하늘이 무너지는 듯하였으리라. 그런 사람은 아예 처음부터 그런 것이 없었던 이와는 전혀 다른 고통을 겪어야만 한다. 그의 입에서는 부정적인 말들이 쏟아져 나왔다.
이런 상황에서는 불평이라도 해야 살 수 있다. 가슴 속의 응어리를 말로 터트려야 살 수 있다. 그는 자신에게 지난날의 형통과 평안이 회복되기를 바라는 대신에 하루라도 빨리 죽기를 바랐다. 겉으로 보기에 결코 건전하지도, 경건하지도 않은 그의 불평은 이런 뜻에서 오히려 그를 살게 하는 힘이 되었으리라. 불평을 입에 달고 사는 사람이 되어서는 곤란하더라도 우리는 그것의 순기능도 받아들여야 한다.

3) 무엇이 무덤이고 무엇이 보배인가
22절에 무덤과 보배의 비유가 있다. 그 의미는 두 가지이다. 첫째로 어서 죽을 날이 찾아오기를 바라는 그의 심정이다. 무덤을 판다는 표현으로 그는 죽기를 갈망하는 자신의 심정을 드러냈다. 둘째로 무덤에 숨겨진 보배를 찾아내려 아무리 애써도 도굴꾼 마음대로 되지 않듯이 죽기를 바라는 마음도 자기 뜻대로 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는 삶도 죽음도 자기 뜻대로 되지 않는 자신의 처지를 처절하게 하소연하였다. 그는 결코 자살을 생각한 것이 아니다. 다만 자기 능력으로는 현재의 고통을 견뎌내기가 죽음보다 더 힘들다고 고백할 뿐이다. ‘고통을 해결하는 길은 죽음밖에 없지 않은가?’라고 생각할 정도로 그는 심각한 상태에 있다. 이에 그는 자신의 평안을 보장하지도 않으면서 어찌하여 자신에게 빛을 주시느냐고 하나님께 항변했다. 자기 인생을 형통한 길로 인도하지도 않으면서 어찌하여 자신의 생명을 지켜주시냐고도 했다.
칸트(I. Kant, 1724-1804)는 전집 제9권 중 “신통통치에서 철학적인 모든 시도가 도달할 수 없는 것에 관하여”(Über das misslingen aller philosophischen Versuche in der Theodizee)라는 글에서 욥의 이 물음을 자신의 방식으로 표현했다. “우리의 현존을 가능하게 한 창시자는 도대체 어디에서 우리를 삶으로 부르시는가, 만일 그것이 우리를 위해 바랄만한 가치가 없을 만큼 제대로 된 반전이 아니라면 말이다. 그런 불만은 징기스칸을 향한 아메리카 인디언 여성의 말에도 엿보인다. 그녀는 폭력에 의한 고통 때문에 역량을 충분히 발휘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미래를 안전하게 다져나갈 수 없었다. ‘우리를 보호해주지 않으려면 당신들은 무슨 이유로 우리를 정복했습니까?’”(110-111쪽)
물질을 하나님처럼 섬기는 세상에 살다 보니 자기 부모에게 이렇게 끔찍한 말을 하는 사람도 있다. “재벌의 자식으로 키우지도 못할 거면서 왜 나를 낳으셨나요?” 이는 기나긴 세월동안 노심초사하며 양육한 부모의 공로를 자신이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있게 후원하지 못한다는 이유 하나로 깡그리 무시하는 말이다.
예언자 이사야는 상한 갈대도 꺾지 않고 꺼져가는 등불도 끄지 않으시는 하나님을 찬양했다.(사 42:3) 욥은 그 반대로 고난당하는 자에게 빛을 주고 마음이 아픈 자에게 생명을 주시는 하나님을 원망했다. 겉보기에 이 두 사람은 서로 반대되는 말을 하는 듯이 보인다. 정말 그런가? 아니다. 욥은 부정적인 표현으로 오히려 긍정적인 측면을 부각시키는 수사법을 탁월하게 구사했다. 그는 인생이 죽음과 무덤이 아니라, 하나님 안에 머무는 것이 보배라는 점을 역설적으로 강조했다. 우리는 어떤가? 삶의 현실이 아무리 부조리하게 보여도, 불의가 아무리 정의를 이기는 듯이 보여도 하나님이 결국 선을 이루시는 분이라는 신앙은 얼마만큼 확고한가? 욥은 결국 자기 눈에 무덤처럼 보이는 것도, 보배처럼 보이는 것도 다 하나님의 전적인 통치영역 아래 놓여있다고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정현진 | 독일 마인츠대학교에서 구약성서신학을 전공하여 박사학위를 받았다. 『다윗도 사무엘도 몰랐다』, 『표적이 전하는 소리를 듣는가』, 『마틴 루터의 시간을 거닐기』 등을 저술했다. 현재 수도교회 담임목사, 한신대 외래교수로 활동 중이다.

 
 
 

2018년 9월호(통권 71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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