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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와설교 (2018년 6월호)

 

  함께 있었다
  욥기 2:11-13

본문

 

11 그 때에 욥의 친구 세 사람이 이 모든 재앙이 그에게 내렸다 함을 듣고 각각 자기 지역에서부터 이르렀으니 곧 데만 사람 엘리바스와 수아 사람 빌닷과 나아마 사람 소발이라 그들이 욥을 위문하고 위로하려 하여 서로 약속하고 오더니 12 눈을 들어 멀리 보매 그가 욥인 줄 알기 어렵게 되었으므로 그들이 일제히 소리 질러 울며 각각 자기의 겉옷을 찢고 하늘을 향하여 티끌을 날려 자기 머리에 뿌리고 13 밤낮 칠 일 동안 그와 함께 땅에 앉았으나 욥의 고통이 심함을 보므로 그에게 한마디도 말하는 자가 없었더라(욥 2:11-13)


주제 해설
욥기는 꽤 어려운 책이다. 일찍이 교부 히에로니무스는 “욥기를 설명하는 일은 뱀장어나 작은 곰치를 손에 잡고 놓치지 않으려는 것과 같다. 손에 힘을 줄수록 그것들은 더욱 잽싸게 손에서 빠져나간다.”라고 했다. 그러면서도 이 책의 내용은 많은 사람에게 용기와 영감을 불어넣었다. 이를테면 키르케고르는 『반복』에서 이렇게 말한다. “다른 책들과 달리 나는 이 책을 눈으로 읽지 않는다. 나는 이 책을 마음에 담아두고 매 구절마다 각기 다른 방식으로 투사하듯이 읽는다. 마치 어린아이가 다음 날 아침 수업준비에 잊지 않기 위해 베개 밑에 책을 두고 자는 것처럼 나는 욥기를 머리맡에 두고 잔다. 욥기의 말씀 한마디 한마디가 내 가난한 영혼을 위한 양식이고 옷이며 발삼 향과 같다. 깊은 잠에서 깨어나자마자 나는 새로운 소용돌이를 일으키는 그 말씀들에 압도당하곤 한다. 그리고 욥은 내 속에서 불끈 솟아나는 열매 없는 분노를 잠재우고, 격정에서 나오는 어리석고도 경악할 상처를 아물게 한다.”
이해하기 어려운 책 욥기를 풀어나가는 과정에서 우리는 욥의 친구들을 만난다. 그들은 욥과 인간의 고난(고통)에 관해 열띤 토론을 벌였다. 본문은 그 첫 대목이다. 그들은 먼 길을 마다하지 않고 욥을 찾아왔다. 누구에게나 그렇듯 주변 사람은 약이 되기도 하고, 독이 되기도 한다. 욥에게도 마찬가지였다. 특히 11절을 보면 친구(re¯a῾)와 재앙(ra¯῾â)이 언어놀이 형식으로 쓰였다. 이제부터 전개될 그들 사이의 대화가 이 사실을 잘 보여준다.

본문 살피기
산문 형식으로 된 욥기 1-2장은 여섯 장면으로 구성된다. 1) 욥의 온전한 삶(1:1-5), 2) 첫 번째 천상회의(1:6-12), 3) 욥이 받은 첫 번째 시험과 그의 반응(1:13-22), 4) 두 번째 천상회의(2:1-6), 5) 욥이 받은 두 번째 시험과 아내 및 욥의 반응(2:7-10), 6) 욥을 찾아온 친구들의 반응(2:11-13).
여섯 번째 장면에는 욥을 찾아온 세 친구가 등장한다. 욥이 심각한 상태에 있다는 소식을 들은 세 친구가 그를 방문한 것이다. 그들의 이름은 각각 엘리바스, 빌닷, 소발이다. 엘리바스는 아라비아 북서부 지방에서, 빌닷은 동쪽 지방에서, 소발은 남쪽 지방에서 왔으리라 추측된다. 성서 본문은 그들의 사회경제적 위치나 위상을 알려주지 않는다. 칠십인역은 이들을 왕으로 묘사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 친구들의 신상에 관한 어떤 것도 다 추측(추론)일 뿐이다. 여러 정황을 보건대 그들은 모두 자기 지역에서 명사요 현자였다.
친구라고 번역된 단어 ‘레아’는 ‘벗’이라는 뜻 이외에도 ‘이웃, 동료, 형제’ 등으로 다양하게 쓰인다. 친구들 가운데 첫 번째 사람은 엘리바스이다. 이 이름은 아랍어 ‘fawwâz’에서 파생되었다. 이 단어는 ‘하나님이 승리(정복)하신다, 하나님은 정금이시다(fa¯z), 하나님은 날렵하시다(fzz)’ 등의 뜻이다. 그는 데만 사람으로 에돔과 깊은 관련이 있다. 에서의 아들 중 엘리바스란 이름을 가진 자가 있다.(창 36:4, 10, 12, 15) 그의 아들이 데만이다.(창 36:11, 15) 이것은 에돔 북쪽의 한 지명이기도 하다.(겔 25:13) 그 시대 에돔인들은 지혜로운 자로 통했다.(렘 49:7, 암 1:11-12, 욥 8장 참조) 욥과 그 친구들이 나눈 대화에서 엘리바스는 항상 첫 번째 발언자로 나섰다.
두 번째 친구는 ‘빌닷’이다. 이 이름은 성서에만 나온다. 올브라이트(William F. Albright)에 따르면 이 이름은 ‘닷이 낳았다’는 뜻이다. 이를 받아서 스파이서(Ephraim A. Speiser)는 이 말을 ‘하닷의 아들’이라 해석했다. 이는 ‘빌’이라는 말이 아들이라는 뜻에서 착안한 것이다. 그의 고향은 수아이다. 창세기 25장 2, 6절에 따르면 이는 아브라함이 그두라를 통해 낳은 아들 이름과 같다. 그는 동방으로 가서 살았다. 만일 이것이 아카드 문헌에 나오는 수쿠(šuh.u)를 가리킨다면 그곳은 메소포타미아 지방 유프라테스강 중부지역이다.
세 번째 친구는 ‘소발’(초파르)이다. 이 이름은 욥기에만 나온다. 그 뜻은 아마 ‘어린 비둘기’일 것이다. 그는 나아마 출신이다. 그곳이 어디인지 우리는 정확히 알지는 못한다.
그들은 욥을 위문하고 위로하려고 왔다.(11절) 위문하다는 말(누드)은 이집트어(nwd)로 ‘움직이다, ~에 이르다, 약하다, 흔들리다’라는 뜻이다. 성서에서 이것은 갈대가 바람에 흔들리는 것을 묘사할 때 쓰였다.(왕상 14:15) 본문에는 이 단어가 전치사 ‘르’와 함께 쓰였다. 그래서 ‘라누드-로’는 ‘그와 관련하여 [머리를] 흔들었다.’는 뜻이다.
“그들의 땅으로 두려움과 영원한 웃음거리가 되게 하리니 그리로 지나는 자마다 놀라서 그의 머리를 흔들리라(붜야니드 뻐로쇼).”(렘 18:16) 이 구절에서 볼 수 있듯 불의의 사고나 사건을 겪는 사람을 보며 ‘이건 아니다,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다.’는 의미로 머리를 흔드는 몸짓은 성서 여러 곳에 나온다. 이 표현은 종종 어려운 처지에 빠진 사람을 동정한다는 뜻으로 쓰이기도 하였다.(욥 42:11, 시 69:20, 사 51:19, 렘 15:5, 16:5, 22:10, 48:27, 나 3:7)
본문과 시편 69편 20절, 이사야 51장 19절, 욥기 42장 11절에서 이 말은 위로(위안)하다는 말(나캄)과 함께 쓰였다. ‘나캄’은 고대 근동에서 ‘일깨우다, 위로하다’는 뜻으로 널리 쓰였다. 피엘형으로 쓰인 본문에서 이 단어는 ‘위로하다’는 뜻이다.[니팔형으로 전치사 ‘알’과 함께 쓰인 욥기 42장 6절에서는 ‘(생각을) 바꾸다, 후회하다’는 뜻으로 쓰였다.]
욥을 찾아보기로 약속한 그들은 거의 같은 날 같은 시각에 도착한 듯하다.(12절) 그 시기가 언제인지 정확히 알 수는 없으나, 욥기 7장 3절 “이와 같이 내가 여러 달째 고통을 받으니”라는 구절이 단서가 될 것이다. 그들이 도착했을 때 욥은 집 안에 있지 않고 잿더미 위에 앉아 있었다. 멀리서 보기에도 욥의 몰골은 말이 아니었다.(애 4:8 참조) 알아보기 힘들 만큼 모습이 달라진(사 52:14; 53:2 참조) 욥을 보며 그들은 1) 소리를 질렀다, 2) 울었다, 3) 겉옷을 찢었다, 4) 티끌을 공중에 날렸다, 5) 욥과 함께 땅에 앉았다, 6) 할 말을 잃었다.
그들이(11절 주석 참조) 이러한 행위를 취했다는 것은 비록 그것이 당시의 통례적인 관습에서 나온 것이라 할지라도 참된 우정의 발로임이 틀림없다. 그들은 주변의 이목이나 자신의 체면에 구애받지 않고 욥을 향해 연민과 비탄의 진실한 마음을 표했다. 그들은 아무 말 없이 7일 밤낮을 욥과 함께 땅바닥에 앉아 있었다. 7일이라는 기간은 죽은 자를 위한 애곡 기간이기도 하다.(창 50:10, 삼상 31:13, 집회서 22:12) 이렇게 그들은 욥에게 애통하는 마음을 최고조로 보여주었다.

설교 착상
1) 함께 있었다
욥의 세(네) 친구들은 욥을 찾아왔다. 이때 욥은 몹시 외로웠다.(“나는 이리의 형제요 타조의 벗이로구나”, 30:29) 또한 마음 둘 곳이 없었다.(“어린 아이들까지도 나를 업신여기고 내가 일어나면 나를 조롱하는구나”, 19:18) 친구들은 이런 그와 함께 있었다. 그들은 욥의 마음에 공감하며 그를 이해했다.(empathic understanding)
이것은 매우 중요한 점이다. 모든 위로와 치유의 출발은 함께 있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은 “성령과 믿음으로 성도들의 머리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된 모든 성도는 그의 은혜와 수난과 사망과 부활 및 영광 안에서 그와 교제한다.”(26조)라고 했다.
예수가 고난을 당하시기 전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 제자들은 그 산에 함께 있었으나 예수와 함께 기도하지 못했다. 곧 정신적·영적으로 그분과 함께하지 못했다. 그분이 체포되어 심문을 받으실 때에도 마찬가지였다. 고난(고통)의 자리에는 몸으로 동참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이럴 때에는 굳이 특별한 말이 필요하지 않다. 말을 하지 않아도 좋다. 그 자리, 그 시각에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친구들은 7일 밤낮을 욥과 땅바닥에 같이 앉아 있었다.

2) 할 말을 잃었다
친구들이 찾아왔을 때 욥은 잿더미 위에 앉아 질그릇 조각으로 자기 몸을 긁고 있었다.(7절) 그는 심한 고통을 겪고 있었다.(“나를 덮고 있는 피부는 검어졌고 내 뼈는 열기로 말미암아 탔구나”, 30:30) 그들은 욥이 고통스러워하는 그 자리에 함께 있었다. 처음 그를 보았을 때 최선의 방법으로 자신들의 애통과 공감의 마음을 표현했다.
우리는 세상을 사는 동안 몇 번이나 이런 경험을 한다. 우리 자신이 망연자실할 때도 있고, 이웃이 그런 상황에 처할 때도 있다. 할 말을 잃었을 때 어떻게 해야 할까? 주님께서 가신 십자가의 길을 묵상하라고 권하고 싶다. 십자가의 길 14처 묵상은 『장자』(莊子) 추수편(秋水篇)에 나오는 말 “우리가 아는 것은 알지 못하는 것만큼 많지 않다. 우리가 살아있는 시간은 우리가 태어나기 이전의 시간보다, 그리고 우리가 죽음 다음의 시간보다 많지 않다.”라는 사실을 깨닫게 하고 영원하신 주님과 그 사랑에 우리를 의탁하게 만든다.

3) 위로
이 세상에 위로가 필요하지 않은 사람도 있을까? 위로라는 말은 참 아름다운 낱말이다. 이것은 나 아닌 다른 사람에게 “너는 혼자가 아니다. 너는 세상에 외따로이 떨어진 고독한 존재가 아니다.”라는 의식을 갖게 만든다. ‘위로하다’는 그리스어로 ‘파라칼레오’이다. 이것은 ‘나란히’(같은 자리로, 곁에)라는 뜻의 ‘파라’와 ‘부르다’는 뜻의 ‘칼레오’가 결합한 말이다. 이런 의미를 전형적으로 나타내듯 ‘파라칼레오’의 명사형 ‘파라클레토스’는 보혜사 성령님을 가리킨다.
그래서 위로란 우리를 고통과 시련의 자리에서 불러내어 하나님과 함께 있도록 한다는 뜻이다. 예수께서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요 14:3) 하고 말씀하셨을 때, 위로라는 의미가 들어 있다. 위로는 둘 이상의 사람이 같은 자리에서 동류의식(同類意識) 아래 같은 시간을 보내면서 하는 것이다. 거기에는 ‘나는 네 마음을 알아. 나는 너와 함께 있어.’라는 깊은 뜻이 담겨 있다. 그것은 ‘너와 내가 힘을 합치자. 고통을 함께 감당하자. 앞길을 두려워하지 마라.’는 데로 나아간다.
“찬송하리로다 그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시요 자비의 아버지시요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시며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고후 1:3-4) 우리는 이런 사역에 부름을 받은 사람이다.

정현진 | 독일 마인츠대학교에서 구약성서신학을 전공하여 박사학위를 받았다. 『다윗도 사무엘도 몰랐다』, 『표적이 전하는 소리를 듣는가』, 『마틴 루터의 시간을 거닐기』 등을 저술했다. 현재 수도교회 담임목사, 한신대학교 외래교수로 활동 중이다.

 
 
 

2018년 7월호(통권 71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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