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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me > 기독교사상 > 성서와설교 > [잠언의 역사적·문학적 콘텍스트 11]
성서와설교 (2022년 12월호)

 

  가난과 부요함(잠 28장)
  

본문

 

2016년 제69회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을 수상한 영화 〈나, 다니엘 블레이크〉(I, Daniel Blake)는 영국 뉴캐슬을 배경으로 40년간 베테랑 목수였던 다니엘이 실직자가 되면서 일어나는 일을 다룬다. 이 영화는 “요람에서 무덤까지”라는 유명한 복지국가의 이상을 만든 영국의 사회 시스템이 실상은 전혀 그렇지 않다는 것을 비판한다. 주인공 다니엘은 아내를 잃고 홀로 남은 어느 날, 심장 질병으로 일을 쉬고 있어 실업수당을 신청하지만, 점수가 부족해 지원을 받지 못한다. 이에 항의하려 해도 ‘컴맹’인 그는 인터넷을 사용할 줄 모른다. 이웃의 도움으로 겨우 성공했으나 여전히 실업수당을 받을 수 없어 집안의 가구를 하나씩 팔기 시작한다. 또 다른 등장인물인 미혼모 케이티는 아이 둘을 데리고 런던의 한 노숙자 쉼터에서 뉴캐슬로 이사한다. 그러나 관공서에 지각하는 바람에 보조금을 받지 못한다. 전기료를 낼 돈조차 없을 정도로 가난한 그들은 추위와 굶주림으로 절망한다. 케이티는 마트에서 도둑질을 할 만큼 절박했으나 아무런 보조금을 지원받을 수 없었고 결국 성매매를 하기에 이른다. 다니엘은 그러한 케이티를 도우며, 둘은 서로를 의지한다.
이 영화가 우리에게 따뜻하게 다가오는 이유는, 영국 정부마저 외면한, 막다른 벼랑 끝에 몰린 빈자들을 또 다른 힘없는 이웃들이 돕고 있기 때문이다. 영화의 마지막, 재판의 문턱에서 다니엘은 국가가 심각하지 않다고 여겨 보조금을 거부했던 그 질병, ‘심장병’으로 사망한다. 주로 가난한 자들의 장례식이 치러지는 아침 9시에 그의 장례가 거행되고, 그 장례식장에서 케이티는 다니엘이 재판에서 읽으려고 준비한 글을 대신 낭독한다. “나는 다니엘 블레이크, 개가 아니라 인간입니다. 이에 나는 내 권리를 요구합니다. 인간적 존중을 요구합니다.” 감독인 켄 로치는 영화를 통해 부유한 자본주의 국가의 우스꽝스러운 관료주의 모순을 비판한다. 이 영화에서 부조리한 복지제도의 문제점에 계속 저항하면서 땅 밑으로 추락한 인간의 존엄성을 마지막까지 지키려 한 다니엘의 죽음은 신성하게 느껴진다.
이번 글에서 다룰 잠언 28장은 어떤 통치구조의 모순과 부패의 문제 그리고 경제적 약자와 참된 경건의 주제를 다룬다. 선한 자들과 악한 자들을 구분하지만, 개인의 경건은 소유의 부유함을 결정하지는 않는다.

문학적 형식과 구조

잠언 28장은 25-27, 29장에 비해 압도적으로 신정론의 주제가 많다. 이 신정론적 문제들은 종교적인 차원의 것과 잘못된 정치경제적 현실, 그리고 혼란스럽고 무질서한 정황을 다룬다. 본문에서는 왕이 직접적으로 언급되기도 하며(28:2), 가난과 부요함을 심도 있게 다룬다.[28:3, 6, 8, (10), 11, 15, 16, 19-22, 25, 27-28] 이뿐만 아니라 신적 가르침으로서의 토라에 대한 레퍼런스가 등장하는데 이는 후대 삽입구로도 볼 수 있다.(Schipper) 4, 7, 9절이 그러한 예이며, 특히 7절에서는 지혜와 율법이 함께 등장한다. 또한 여호와에 대한 레퍼런스가 등장한다.(5, 25절)
중심 주제에는 여호와와 토라에 관한 표현이 나온다. 지혜와 훈육에 대한 주제는 2, 18, 23-24절에서, 악인과 의인의 엇갈린 운명에 대한 주제는 1, 10, 12, 16절에서 등장하며, 죄 고백에 대한 독특한 표현이 13절에 나타난다. 맥케인은 28장이 크게 두 부류의 격언으로 이루어졌다고 분석하는데, 하나는 신적이고 종교적인 도덕성에 대한 격언이고, 다른 하나는 공동체적 삶에 부정적인 영향을 줄 수 있는 반사회적 문제를 다루는 격언이라고 한다.1
전체 잠언의 문학적 구조에서 관찰되듯이, 28장은 유사 격언 혹은 비교 격언으로 이루어진 솔로몬의 잠언 두 번째 부분(25-29장)과는 달리 대조 격언으로 이루어져 있다. 예외적으로 28:3, 15에서는 직유법이 사용되었고, 유사 격언(21절), ‘~보다 낫다’(6절), 특별한 관계 없이 연결된 행으로 구성된 구절(8, 9, 10, 17, 22, 23, 24절)이 있다.2
역사적 배경에 대한 추정은 매우 흥미롭다. 28-29장에는 왕에 대한 직접적인 격언이 압도적이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일부 학자들은 이 격언들이 애초에 왕에 대한 격언으로 존재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마인홀드, 왈트키)3 이에 반해 폭스는 오직 28-29장(27:23-27 포함)에서 오직 6개의 절(28:15, 29:2, 4, 12, 14, 26)만이 통치자와 연관된다고 말하면서, 왕권에 대한 것은 여러 주제 중 하나일 뿐이며, 말코우가 주장하듯이 본문은 미래의 어떤 왕을 위한 매뉴얼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리카르도 타바레스는 최근 연구에서 잠언 28-29장이 여러모로 이집트 파라오의 〈메리카레를 위한 교훈〉과 〈아메넴헤트의 교훈〉과 유사하며, 기존 연구들과 달리 왕의 매뉴얼로 사용되던 것이 점차 일반인들에게 ‘대중적으로’ 적용된 것이라고 주장한다.4 확실히 27:23-27은 말코우와 타바레스가 주장하듯이 28-29장의 도입부로 쓰였을지도 모른다. 27:23은 통치자들에게 자신의 가축을 돌보라는 말로 시작해 24절에서 통치자들의 재물과 다스림이 영원하지 않을 것이라 말하고, 25-27절은 백성들의 생계에 필요한 의식주가 풍성히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왕에 대한 격언이 등장한다는 근거에 기반하여 형식비평적 결론을 내리는 것은 상당한 문제를 유발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그 근거가 매우 빈약하다.(윅스)

도망가는 악인과 담대한 의인(28:1)

1 악인은 쫓아오는 자가 없어도 도망하나 의인은 사자 같이 담대하니라

어떤 이들이 달아나는데, 이상하게도 추격하는 사람이 전혀 없다.(1a절) 이들은 과연 누구인가? 수수께끼 같은 이 구절의 끝에서 말하기를 이들은 ‘악인들’(라샤, רשׁע)이다. 실제 이들을 쫓는 자가 없음에도 악인들은 혼비백산 도망간다. 레위기 26:17, 36은 쫓아오는 자가 없음에도 도망하는 것이 바로 모세 언약을 깨뜨린 이들에게 임할 공포의 상황임을 말한다.
이에 반하여 의인들은 ‘젊은 사자’와 같이 어떤 확신에 차 있다. 그들은 어디로도 도망가야 한다고 느끼지 않으며 안전함을 누린다. 악인들은 자신들의 잘못으로 받게 될 심판에 대한 공포심 때문에 늘 불안한 삶을 살지만, 의인들은 그러한 재앙이 오지 않으리라고 굳게 믿기에 전혀 불안해하지 않는다. 이 구절은 28:1-11을 시작하는 구절로서, 도덕적·종교적으로 타락한 사회에서 율법을 거부하며 악한 길을 걷는 자들이 맞이할 최후의 상태를 경고한다.

폭우 같은 권력자(28:3, 15-16)

3 가난한 자를 학대하는 가난한 자는 곡식을 남기지 아니하는 폭우 같으니라

3절은 “가난한 사람을 학대하는 가난한 사람은 음식을 (남겨두지 않는) 폭우이다.”5라고 말한다. 핵심은 가난한 자를 학대하는 가난한 자이다. 이들은 실제로 경제적 빈자일까? 학자들은 크게 세 가지로 해석한다. 첫째, 이 학대자들은 실제로 가난한 자라기보다는 (28:1-2의 문맥상) 권력자들일 수 있다. 둘째, 한때 빈자였으나 어떤 계기로 권력자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셋째, 권력자 아래에서 타인들을 압제하는 가난한 자일지 모른다. 클리포드는 이들을 ‘세금 걷는 자들’(tax farming)로, 와이브레이는 이웃의 것을 훔치는 자로 본다.6
학자들이 제시한 여러 주석에도 불구하고, 본문은 가난한 자들 가운데서 비교적 힘을 가진 집단으로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이들은 권력자에게 기생하는 하층민들이다. 이 격언은 단순히 경제적, 계층구분적으로 보기 힘들기 때문이다. 이들은 폭우 같아서 이들이 지나간 자리에는 타인을 위한 먹을 것이 남아나지 않는다.(참조. 시 72:6, 사 30:23)
또한 15-16절은 악한 통치자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15 가난한 백성을 압제하는 악한 관원은 부르짖는 사자와 주린 곰 같으니라
16 무지한 치리자는 포학을 크게 행하거니와 탐욕을 미워하는 자는 장수하리라


15절은 가난한 자들을 악하게 통치하는 자들이 울부짖는 사자, 공격하는 곰과 같다고 은유적으로 말한다. 여기서 핵심은 ‘악한’ 통치자이다. 그는 강력한 포식자처럼 빈자들을 집어삼키기 위해 혈안이 된 야생짐승일 뿐이다. 왕은 종종 사자에 비유된다.(19:12, 20:2) 본문의 ‘부르짖는 사자’는 통치자의 폭력성을 잘 보여준다.
16a절은 15절을 보강하는데 “이해가 부족한 통치자는 강하게 압제하는 자이다.”로 번역된다. ‘포악/압제’를 뜻하는 히브리어 ‘마아샤코트’(מעשקות)는 압제를 통한 이득과 관련이 있다.(예. 사 33:15) 이어지는 16b절은 앞선 15-16a절과 직접 연결되진 않는다. 장수하길 원한다면 탐욕을 미워하라고 조언한다. ‘탐욕’으로 번역된 ‘베짜’(בצע)는 부정한 이득(창 37:26, 출 18:21, 삿 15:19, 삼상 8:3, 사 33:15, 56:11, 57:17)을 말한다. 이 부정한 이득은 포학을 통한 이익 추구와 관련지을 수 있다. 잠언 1:19와 관련지어 본문을 이해하면 결국 불의한 소득을 부정하게 취하는 자는 비참한 결말을 맞이한다는 것이다.
정리하면, 이 본문은 권력자에 기생하는 하층민이건, 통치자들이건 간에 빈자들을 압제하는 자들이 부정한 이득을 취하는 것에 대해서 경고한다. 그것은 생명과는 거리가 멀고 아둔한 행위이기 때문이다.

무질서, 신정론: 가난과 부요(28:2, 4-11)

2 나라는 죄가 있으면 주관자가 많아져도 명철과 지식 있는 사람으로 말미암아 장구하게 되느니라

히브리어 사본에서 28:2는 “땅이 범죄하는 때에 치리자들이 많아지나, 명철과 지식이 있는 사람과 함께한다면 정직7은 지속하게 될 것이다.”로 직역할 수 있다. 이 구절에서 사용된 히브리어 ‘켄’(כן)은 개역개정 성서에서는 부사적으로 번역되었으나, 어떤 ‘정직한 것’(창 42:11, 19, 31, 33, 전 8:10)을 지칭하는 명사적 용법으로 쓰였다. 의인화하여 땅이 범죄한다고 한 표현은 여러 반란의 상황을 가리키거나, 국가의 법을 무시하는 무질서의 상황을 전제로 한다. 이로 인해 그 땅에는 서로 다스리겠다고 나서는 권력자들이 늘어나게 되고, 압제의 상황은 가속화될 것이다. 이에 반하여 2b절은 ‘지혜’(지식과 명철)를 가진 한 통치자가 등장하는 상황을 설정한다. 그를 통해서 불의한 상황은 정리되고, 그 땅에는 정의로움과 정직함이 뿌리내리게 된다.
4-11절은 ‘율법’과 여호와 신앙의 측면이 전체적으로 신정론이라는 주제와 결합된다.

4 율법을 버린 자는 악인을 칭찬하나 율법을 지키는 자는 악인을 대적하느니라
5 악인은 정의를 깨닫지 못하나 여호와를 찾는 자는 모든 것을 깨닫느니라


4절에서 ‘율법’(토라)이라는 단어가 두 번 연속해서 나온다. 토라를 버린 자는 악인을 칭찬하고, 토라를 지킨 자는 악인을 대적한다. 즉 율법 준수 여부에 따라 악인에 대한 자세가 결정된다. 7, 11절은 ‘이해/지혜/명철’(메빈)이 있는 자들을 언급한다. 4-11절에서 ‘토라’는 이 텍스트들이 상당히 후대의 편집적 과정을 거쳤을 것으로 짐작게 한다. 토라는 곧 잠언 1-9장의 부모의 가르침 혹은 지혜의 가르침 전체를 함의하며(1:8, 3:1, 4:2, 6:20, 23, 7:2, 13:14, 29:18, 31:26), 오경에 국한될 필요는 없다.8 악한 이들의 행위를 칭송하는 것은 그 행위에 동조하고 충실하게 따르는 것을 함의하며, 이는 지혜의 가르침을 저버리는 자들의 특성이다. 악인들과 담대히 싸우는 자들은 그들의 위선에 맞서 싸우는 것이며, 곧 지혜의 가르침을 행하는 자들이다.
5절에서 ‘악인’은 ‘여호와를 찾는 자’와 대응을 이룬다. 그리고 ‘정의’는 ‘규제’(restraints)를 함의할지 모른다.9 그리고 ‘모든 것’은 말 그대로 모든 것이라기보다 정의와 불의에 대한 경계 혹은 이를 볼 수 있는 통찰력, 혹은 여호와 앞에서 정의로운 어떤 것을 뜻한다. 악인들은 정의, 곧 세계의 옳음과 심판의 문제가 어떤 것인지 전혀 이해할 수 없다.(5a절) 그러나 여호와 신앙을 가지게 된다는 것은 ‘모든 것’에 대한 통달을 함의한다. 악함은 지적 차원의 어떤 것도 이루지 못하게 하지만, 여호와를 추구하는 일은 완벽한 지적 채움에 이르게 만든다. 이는 2:5-6에서 여호와가 주는 지혜를 소유한 자가 얻게 될 여호와 경외심, 신적 지식, 이해에 대한 언급을 생각나게 한다. 2장과 다른 부분은 여호와를 추구하는 것 자체가 곧장 정의가 무엇인지에 대한 충만한 지적 상태에 이르게 된다는 점이다.
28:6-11은 가난과 부요함에 대한 격언이 율법과 결합한 사례들을 제시한다.

6a 가난하여도 성실하게 행하는 자는
6b 부유하면서 굽게 행하는 자보다 나으니라
7a 율법을 지키는 자는 지혜로운 아들이요
7b 음식을 탐하는 자와 사귀는 자는 아비를 욕되게 하는 자니라
8a 중한 변리로 자기 재산을 늘리는 것은
8b 가난한 사람을 불쌍히 여기는 자를 위해 그 재산을 저축하는 것이니라
9a 사람이 귀를 돌려 율법을 듣지 아니하면
9b 그의 기도도 가증하니라
10a 정직한 자를 악한 길로 유인하는 자는 스스로 자기 함정에 빠져도
10b 성실한 자는 복을 받느니라
11a 부자는 자기를 지혜롭게 여기나
11b 가난해도 명철한 자는 자기를 살펴 아느니라


6절과 11절은 6-11절 전체 구도에서 대응을 이룬다. 먼저 6절을 직역하면 “‘완전함’ 속에서 걷는 가난한 자는 부유하면서 굽은 (두) 길들에 있는 자보다 낫다.”가 된다. 여기서 ‘데레카임’(דּרכים)은 히브리어 마소라 본문(MT)에서 ‘길들’로 읽혀지나, 정확히 말하자면 ‘두 길들’이 되어야 한다.10 그렇다면 ‘굽은 두 길’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일차로 그것은 악인이 가는 여러 굽은 길일 수 있으며, 혹은 악한/선한 두 길을 넘나드는 것을 의미할 수도 있다. 경제적 빈곤의 상태는 완전한 행위와 공존한다.(6a절) 이것은 종교성과 물질에 대한 번영이 함께하지 않는 현실 상황이며(참조. 15:16-17), 종교성과 물질에 대한 번영이 일반적으로 함께 주어지는 상황에 반대되는 격언이다.
이에 반해서 ‘굽은 두 길’은 어떤 도덕적 타락상을 증언한다.(6b절) 그런데 이들은 부자이다. 이러한 증언은, 마음이 굽은 자는 여호와에게 미움을 받고, 행위가 완벽한 자는 여호와에게 기쁨을 얻는다는 잠언 11:20을 떠올리게 한다. 또한 마음이 굽은 자는 복을 얻지 못한다.(17:20) 잠언은 가난하면서 완전한 자가 입술이 굽은 자, 어리석은 자보다 낫다고 말한다.(19:1) 잠언은 여러 곳에서 패역한 자들의 길에는 가시와 올무가 가득하다고 경고하며 악의 마지막은 재앙이라고 말한다.(22:5. 참조. 시 101:4) 그런데 왜 타락한 이들이 부자가 되는 것일까? 어떤 측면에서 빈자들이 부자들보다 더 나은가? 이는 옳은 길을 걷는 자들에게 경제적 축복이 반드시 수반되지는 않음을 여실히 말해준다. 이 교훈은 완전한 행위의 나은 길을 옹호한다. 28:18 ‘이케쉬 데레카임’(악인들의 길들)에 있는 자들은 언젠가 넘어진다고 말한다.
11절에서는 부자의 자기 착각과 명철한 빈자의 자기 성찰을 대조한다. 부자들은 자신의 눈에만 지혜로운 부자이며, 미련한 자들보다 훨씬 더 최악이다.(참조. 26:5, 12, 16) 이들은 자신의 지혜로 부자가 되었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이때 “자기를 살펴 안다.”라는 표현은 “그를 통해 살핀다.”(야흐케레누)로 번역되어야 한다. 이해력(지혜)이 있는 빈자(무력한 자들, 약자들)는 스스로 지혜 있다고 착각하는 자들의 오만함을 통해 자신을 돌아본다.
물론 지혜자들이 지혜 있는 척하는 자들을 통해 자신을 성찰하는 행위가 그들을 부유하게 해주지는 않는다. 즉 지혜는 권력자들과 상류층에게 있지 않으며, 그것은 그의 경제적 상태와 무관하게 도덕적 행위와 참된 성찰에 머무른다. 이 주제와 관련하여 이사야 5:21, 23에서는 스스로 지혜롭다 하며 스스로 명철하다 하는 자들, 악인을 의롭다 하고 의인에게서 공의를 빼앗는 자들에 대한 재앙을 선언한다.11
이러한 구절들에서 공유되는 사회 계층구조 속 악의 문제와 사회의 부패, 그리고 부와 가난에 대한 개념은 인과응보와 대치된다. 그 사상적 친밀함은 전도서(전 9:16)에 가깝다.
7, 9절은 가르침/율법(토라)에 공통적으로 등장한다. 4절에서는 악인이 득세하는 무질서한 상황에서 옛 가르침을 지키려 애쓰는 자들의 가치에 대해 강조한다. 7절은 두 개로 분리된 잠언(disjoined proverb)으로서 정확한 평행구문을 이루지 못한다.12 지혜로운 아들은 가르침에 순종한다는 일반적인 원리를 말하면서, 음식을 탐하는 사람을 사귀는 자는 아버지를 욕되게 한다는 구체적인 결과로 이어진다. 이 구절에는 논리적인 공백이 보인다. 음식을 탐하는 자는 가르침(율법)을 어기는 자가 되고, 이는 곧 “부모에게 수모를 끼치는 행위가 된다.”로 읽는 것이 자연스럽다. 지혜로운 아들은 율법을 지키지만, 어리석은 아들은 음식을 탐하면서 부모를 수치스럽게 만든다고 읽는 것이다. 혹은 지혜로운 아들들은 바로 아버지를 높이고 즐겁게 하는 자들이다.(10:1) 아비의 마음을 즐겁게 하는 것은 바로 지혜로운 자의 마땅한 행위이다.(27:11) 이렇게 감추어진 공백은 다른 잠언들에서 채워질 수 있다. 먹는 것에 집착하는 이들, 그러한 욕망으로 불타는 이들은 아버지에 대한 사회적 평판을 떨어뜨리게 만드는데, 이는 자녀교육의 실패로 비춰지기 때문이다. 악한 자들의 무리에서 떠나 지혜로운 길을 걸으라는 훈육은 잠언 1-9장의 기본적인 메시지인 동시에 23:19-20의 현자들의 잠언과도 공명한다. 신명기 율법(신 21:18-21)에서는 부모의 목소리에 불복종하는 아들을 장로들에게 데려와서 ‘먹기를 탐하고 술 취함’이라는 죄목으로 고소할 수 있으며, 그 결과는 돌을 던져 죽이는 것이다.
9절은 토라를 듣는 것(실행하는 것)에서 자신의 귀를 돌린다면(거부한다면) 그 기도는 가증한 것이라고 말한다. 귀를 돌린다는 것은 의도적이며 단호한 거절의 뜻이다. 가르침을 무시하는 이와 같은 행위 속에서는 어떠한 기도라 할지라도 혐오스러운 것에 지나지 않는다. 잠언은 도덕성이 결여된 상태에서 행해지는 어떤 제의도 정당화하지 않으며 그것은 모두 가증한 것(토에바)이다.(15:8, 21:27) 상거래에서 일어나는 모든 거짓된 속임수 역시 가증한 것이다.(11:1, 20:10, 23) 반면에 의인의 기도는 반드시 응답된다.(15:29)
8절을 직역하면 “이자와 이윤(고리대금)으로 자신의 재산을 늘리는 자들은 누구나 빈자에게 관대한 자를 위해 그것을 모으는 것이다.”가 된다. 오경에서는 기본적으로 동족 이스라엘인에게 이자를 취하는 행위를 금한다.(레 25:36-37, 출 22:24-25, 신 15:3, 23:20. 참조. 시 15:5, 겔 18:8, 13, 17-18) 하지만 이자를 전면 금지하는 법이 실제로 시행되었는지는 의문이다. 그렇다면 이자 규정은 어떤 모세율법의 차원과 동일한가? 잠언 28:8은 이자 자체를 금지하지는 않으며, 이를 이용해 과도하게 자신의 재산을 불리는 행위를 비판한다. ‘타르비트’(תרבית)는 ‘이윤’ 혹은 부정적 착취를 뜻하는 ‘고리대금’, ‘부당이익’을 의미한다. 본문에서는 재산 증식을 부정적으로 바라보기에 ‘고리대금’으로 번역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그렇다면 가난한 사람을 불쌍히 여기는 너그러운 사람을 위해서 재물을 모은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이 구절은 어떤 악한 사회 상황에 대한 고발과 자선을 통한 경건성 강조가 핵심이다. 동족에 대한 무조건적인 이자 금지가 목적이 아니다. 과도한 경제적 착취, 탐심으로 눈이 먼 자들은 그 재물을 소유하지 못하며, 그것은 결국 빈자들에게 그것을 돌려주는 ‘경건한 자들’에게로 넘어가게 될 것이다. 잠언 13:22b는 죄인들의 ‘부’는 모두 공의로운 자들을 위해 쌓아두는 것이라고 말한다. 따라서 잠언의 원리는 경제적 불의함이 어떤 방식으로든 다시 자선의 행위자들에 의해 빈자들에게로 돌아간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빈자들에게 너그럽게 베푸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10절은 ‘의로운 자들’(야샤림)을 악으로 인도하는 자들과 그 행위에 있어서 ‘완전한 자들’(테미밈)을 대조한다. 10a절에서 이 악인들은 옳은 길을 가는 자들을 의도적으로 다른 길로 유혹하는데, 이들은 자신이 판 웅덩이13에 빠지게 될 것이다. 이 구절은 잠언 26:27(“함정을 파는 자는 그것에 빠질 것이요 돌을 굴리는 자는 도리어 그것에 치이리라”)과 동일하게 악을 행한 자의 마땅한 결과이다. 신명기 27:18의 저주 목록에서는 에발산에서 길 위의 장님을 의도적으로 잘못 인도하는 자들을 저주한다. 시편 119:10에서는 여호와의 율법에서 다른 곳으로 벗어나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한다.
이에 반하여 도덕적으로 완전한 자들은 선한 것을 상속받게 된다.(10b절) 10b절은 의미상 10a절에 상반되나, 10a절은 10b절에 비해 2배가량 길다. 이는 아마도 10절의 악인의 최후와 대비되는 이미지를 추가하기 위한 후대 첨언으로 평가된다.14 칠십인역에서는 “율법 없는 자들은 선한 곳을 지나갈지라도 그곳에 들어가진 못할 것이다.”로 번역한다.

소결

지난 2020년 12월 캄보디아 출신 여성 노동자가 숙소로 사용하던 비닐하우스에서 죽음을 맞이했다.15 그녀가 일하던 포천은 영하 20도 한파가 몰아닥쳤고, 맹추위 속에 그녀는 갑작스레 삶을 마감했다. 산재 사망에 대한 대책을 마련하라는 촉구 팻말만이 쓸쓸히 한 인터넷 기사에 걸려 있다.
‘희생자’는 타인이나 어떤 목적으로 인해서 자신의 목숨이나 재산을 바치거나 그것을 빼앗기는 사람을 뜻한다. 그녀는 희생자이다. 이 좁은 땅덩어리에서 한국 사람이 겪는 일상적 죽음과는 차원이 다른 죽음이 있다. 바로 외국인들의 무고한 죽음이다. 2021년 전체 노동자 가운데 외국인 노동자는 3.8% 정도에 그치지만, 중대재해 사망자 668명 중 이주노동자는 75명(11.2%)에 달한다.16 이들의 권리를 대변해주는 곳은 어디에도 없다. 우리가, 세계화가 가져다준 저임금 고효율의 달콤한 시스템을 누리는 동안, 상추를 재배하는 외국인의 손이 거칠어지고 그들이 흘린 피가 땅을 적시고 있었다.
잠언 28:1-11 전체는 사회의 부조리와 악함을 지적한다. 거기에는 악한 사회체제가 있다. 28:10은 의로운 자들을 악한 길로 유인하는 어떤 무리에 대해서 말했다. 이들은 과연 누구인가? 아마도 이들은 악한 자(1절), 곧 땅이 범죄하게 만드는 지도자들(2a절), 가난한 자들을 압제하는 가난한 자들(3절), 율법을 버리는 자들(4a절), 정의를 모르는 악인들(5a절), 행위가 굽은 부자들(6b절), 식탐하는 자들(7b절), 고리대금으로 폭리를 취하는 자들(8절), 율법 듣기를 거부하면서 종교적 활동에만 열심인 자들(9절), 스스로 지혜자라고 착각하는 자들(10절)일 것이다. 여기에는 권력가만이 아니라, 가난하면서 타인을 착취하는 악인들도 포함된다. 이들이 어떤 시대적 배경에서 출현했는지 우리는 알 수 없다. 다만 어느 시대에나 그러한 자들은 존재한다.
잠언 29:10은 피의 사람들, 피에 굶주리고 피 흘리는 일에 동조하는 자들은 행위가 완전한 자들을 증오하며 옳은 자들의 생명을 찾는다고 말한다. 잠언 28장의 저자는 악한 무리의 잔혹한 행위, 사회의 질서를 무너뜨리는 행위 속에서도 전혀 흔들림 없는 믿음을 가지고 있다. 그는 고리대금업으로 재물을 불리는 자들은 결국 자선을 베푸는 자들을 통해서 빈자들에게로 돌아갈 것이라고 말한다.(8절) 또한 의인들을 넘어뜨리려는 자들은 결국 자신이 판 웅덩이에 빠질 것임을 굳게 믿는다.(10절)
이에 반하여 여호와는 궁극적으로 선한 이들을 보호할 것이며 그들이 선한 것을 상속받게 할 것이다.(10b절) 그렇다면 이 선한 이들은 누구인가? 이들은 ‘지혜’를 소유한 자들이다.(2b절) 악인들은 무지할지라도 이 지혜자들은 여호와를 추구하며 완전함으로 정의를 이해한다.(5b절) 이들은 악한 자들에 대항하여 옛 가르침과 교훈과 율법을 마지막까지 사수하는 자들이다.(4b절) 이들은 어떤 면에서 사회적 약자이다.(11절) 그러나 단순히 경제적인 차이로만 이들을 구분지을 수는 없다.(6, 11절) 이 가난한 자들은 부자들을 통해서 자신을 성찰할 수 있는 지혜를 가진 자들이며, 행위에서 순전한 자들이다.
잠언은 ‘두 길’에 대한 이미지를 강조하지만, 의로운 행위를 선택했다고 자동적으로 그 결과가 운명 지워진 것은 아니다. 다시 말해 지혜자라고 해서 자동적으로 악한 길에 빠지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의인이라 할지라도, 지혜자라 할지라도 7번 넘어질 수 있다.(24:16) 따라서 자신의 삶에 대한 지속적인 성찰이 요구되는 것이다.(28:11)

주(註)
1 William McKane, Proverbs: A New Approach (London: SCM, 1970), 620.
2 Ibid., 620.
3 Bruce V. Malchow, “A Manual for Future Monarchs,” The Catholic Bibli-cal Quarterly Vol.47 No.2(1985. 4): 238; Udo Skladny, Die ältesten Spruch-sammlungen in Israel (Göttingen: Vandenhoeck und Ruprecht, 1962), 57-58.
4 Ricardo Tavares, Eine königliche Weisheitslehre?: Exegetische Analyse von Sprüche 28-29 und Vergleich mit den ägyptischen Lehren Merikaras und Amenemhats, OBO 234 (Freiburg: Vandenhoeck & Ruprecht Göttingen, 2007). www.zora.uzh.ch/id/eprint/143062.
5 LXX(칠십인역)에서는 ‘불경건한 행위로’(ἐν ἀσεβείαις)를 추가하여 “불경건한 행위로 가난한 자에게 협박하는 용감한 사람은 폭력적이며 쓸모없는 비이다.”로 번역하였다. ‘가난한 자’(רשׁ)가 다른 ‘가난한 자’를 학대한다는 문맥에서 BHS는 ‘부자’(עשׁיר)로 읽기도 한다. 혹은 ‘통치자’(ראשׁ)로 이해될 수도 있다.
6 Roger N. Whybray, Proverbs, NCBC (Grand Rapids: Eerdmans, 1994), 389-390; Richard J. Clifford, Proverbs: A Commentary, OTL (Louisville: Westminster John Knox, 1999), 243.
7 본문에서 ‘켄’(כן)은 부사적 용법인 ‘그러므로’ 이외에도 ‘올바른’, ‘정직한’, ‘확실한’으로 번역할 수 있다.(HALOT) 칠십인역은 이 본문을 “불경건한 자들의 죄로 인해서 혼란함이 생겨나고, 명철한 자는 그것들을 평정한다.”로 번역한다.
8 Michael V. Fox, Proverbs 10-31, AB 18B (New Haven: Yale University Press, 2009), 821; 반대로 다음을 보라. McKane, 앞의 책, 623; Roland E. Murphy, Proverbs, WBC 22 (Nashville: Nelson, 1998), 214.
9 McKane, 위의 책, 620. 맥케인은 다훗의 제안을 소개한다. 다훗은 “정의”를 “규제”로 28:5에서 “모든 것”을 “중용”(히브리어 에서부터 유도하여, “모든 것”이 아니라)으로 번역한다.
10 Tg. Syr에서는 “그의 길들”(דּרכיו)로 번역한다.
11 폭스는 잠언 28:11이 이사야의 이 정죄에 대한 부분을 공유한다고 주장한다. Fox, 앞의 책, 824.
12 이와 유사한 분리 잠언으로는 잠언 13:5를 들 수 있다. “의로운 자는 속이는 말을 싫어하며 악한 자는 부끄러움을 당한다.”는 정확하게 평행을 이루진 않으며, 5b절은 어떤 결과적 상황을 말한다. Fox, 위의 책, 494-495, 822.
13 ‘함정’을 뜻하는 이 단어는 히브리어 ‘쉐후트’(שׁחות)로 히브리어 성서에서 오직 이곳에서만 사용된다. 26:27에서 언급된 ‘함정’은 ‘샤하트’(שׁחת)를 사용한다.
14 William McKane, Prophets and Wise Men (London: Trinity, 1984), 622; Fox, 앞의 책, 824.
15 “무너진 코리아 드림… 외국인 노동자 569명 산재로 사망,” 「서울경제」, 2021년 10월 14일.
16 “외국인 노동자 비중 3.8%지만… ‘중대재해 사망자 11%가 외국인’,” 「연합뉴스」, 2022년 1월 21일.


권지성|영국 더럼대학교에서 구약학을 전공하여 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스위스 취리히대학교와 로잔대학교에서 연구교수로 히브리 성서 및 제2성전기 문헌을 연구하였다. 저서로 Scribal Culture, 『특강 욥기』, 『특강 전도서』 등이 있다. 현재 기독연구원 느헤미야에서 전임연구위원으로 일하고 있다.

 
 
 

2023년 1월호(통권 76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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