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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me > 기독교사상 > 성서와설교 > [잠언의 역사적·문학적 콘텍스트 10]
성서와설교 (2022년 10월호)

 

  여호와 그리고 왕(잠 16:1-15)
  

본문

 

오늘날의 사회는 탈현대화(포스트모더니즘)를 맞이했다. 절대적인 것으로 주장되던 것들은 이제 모두 의심 속에 해체되기에 이르렀다. 그것은 일견 타당성을 가진다. 폭력적인 지배권력, 관료주의, 남성우월주의, 인종차별, 신자본주의에 대한 격렬한 저항이 지구촌 곳곳에서 일어나기 시작했다. 이와 함께 종교의 절대적인 그 무엇, 신성한 진리의 세계는 부식되어 왔으며 옛것으로 사라졌다. 이전과 다른 새로운 차원의 종교성은 더 깊어졌지만, 포스트모더니즘 종교성은 더 이상 이전 세계의 것은 아니다.
새로운 종교, 새로운 체험, 새로운 영성, 새로운 사상은 기독교 교회 내부에서 새로운 엘리트들의 담론으로 떠올랐다. 하나님의 보좌는 땅에 파묻혔으며 그 자리는 자아가 대체했기에 절대적 삶의 목적은 큰 의미가 없다. 희생을 치르고 지켜야 할 진리와 가치관에 대한 강조는 옛 부패한 세속 종교의 주장일 뿐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자본주의 소비 세계는 여전히 살아남아 위세를 떨치고 있음에도, 이 속에서 신은 죽음을 맞이하고 오직 자아만이 가장 핵심적인 종교로 부상하게 되었다. 이제 전통 종교는 자아의 종교와 포스트모더니즘의 소비적 종교의 형태의 어디쯤으로 변경되었다. 탈현대화된 신학은 이제 각기 다른 타자의 목소리를 듣는 것에서 시작해야 한다고 생각하며, 이성적 해석이 아닌 감성적 이해가 더 중요하다고 말한다. 이른바 ‘반토대주의적’ 관점은 오늘날 유행하는 영성의 배경이다.
포스트모던 영성의 배경에는 극단적인 개인주의, 무한한 자아 긍정, 자신의 지적·심미적 수단으로 신을 만날 수 있다는 이교도적 착각이 존재한다. 잠언의 저자는 이 같은 탈현대화의 구도에 반대한다.(16:1-5) 그는 여호와가 여전히 위에서 아래로 진리를 계시하며 개개인의 삶에 개입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스스로를 신뢰하지 말고 여호와를 신뢰하라고, 또한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열렬히 추구하라고 말한다.

문학적 형식과 구조

잠언 16:1-15을 둘로 나누면 1-9절은 여호와에 대해, 10-15절은 왕에 대한 레퍼런스로 집중된다. 15:33-16:9을 하나의 단락으로 볼 수도 있겠으나(클리포드), 15:33은 16장보다는 15장 전체의 주제와 더 어울린다. 여기서 와이브레이는 이것은 의도된 배열이며, 왕의 모습을 여호와의 모습과 대비시킴으로써 “여호와에 대한 인간의 복종은 왕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되며, 왕의 권력을 남용하는 유혹의 관점과 연결된다.”라고 주장한다.1 쉽게 말해 하나님이 인간 세상에 개입하듯이 왕궁의 일에도 개입하고 있음을 설명한다.
또한 이러한 본문 배치는 세상의 통치자로서 왕의 역할을 여호와의 역할과 동일시하기 위한 것이라고도 해석할 수 있으나, 이는 16:14-15에 제한된다. 물론 10-25장 컬렉션에서는 이러한 여호와 잠언들이 중심부를 차지하고 있지만, 다른 컬렉션에도 이러한 길고 일관된 편집이 드러나는 것은 아니며, 25:1-29:27에는 이러한 여호와 잠언이 거의 없다.(16:33-17:3, 20:5-12, 20:20-21:4, 22:1-14)2 또한 16:17(MT)에서 악을 떠나는 것과 길을 지킴에 대한 주제는 잠언 전체의 중심 구절이며, 히브리어 본문과 달리 칠십인역은 1, 3-4, 6-9절을 생략한다. 이런 점을 고려할 때 16:1-15은 상당히 이후에 편집된 부분으로 추론할 수 있다.3
여호와 잠언(16:1-9)의 주제는 여호와의 초월적 개입이다. 15장의 전체 주제는 지혜에 관한 교훈이었고, 마지막 33절은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은 지혜의 훈계라 겸손은 존귀의 길잡이니라”로 끝났다. 핵심은 여호와 경외라는 종교적 정서와 겸손과 같은 미덕의 중요성이다. 따라서 여호와 언급은 16:1-9(8절 제외)과 16장 마지막인 33절에서 반복되면서 여호와의 직접적 개입을 강조한다. 잠언 10-22장 전체(솔로몬 잠언 Ⅰ)에서 15-16장은 확실히 그 중심을 차지한다. 10-15장과 대비되는 16-22장의 뚜렷한 특징은 대조 잠언이 아닌 유사 잠언이 등장한다는 점이다. 이외에 미덕에 대한 강조, ‘~보다 낫다’는 격언은 지속적으로 등장한다.

1. 여호와 잠언 (16:1-9)
. 1.1. 인간의 계획과 여호와의 주권 (1)
. 1.2. 여호와의 통제 (2-4)
. 1.3. 실천적 방안들 (5-8)
. 1.4. 인간의 마음과 여호와의 주권 (9)
2. 왕의 잠언 (16:10-15)
. 2.1. 정의로운 통치 (10-11)
. 2.2. 공의로운 통치 (12-13)
. 2.3. 왕의 분노와 호의 (14-15)

여호와 잠언(16:1-9)

16:1-9의 여호와 잠언에서는 단일한 신학적 주제인 여호와의 절대적 주권을 다룬다. 이 구문의 시작인 1절과 9절은 각각 인간의 마음, 생각과 여호와의 행동을 대비시킨다. 6절 중심부는 여호와 경외에 대한 구절이 차지한다.
1절을 운율에 맞게 풀어 보면, “마음의 계획은 인간에게, 혀의 대답은 여호와에게”이다. 마음의 성향 혹은 반향은 ‘나’라는 존재가 제어할 수 있을지 모른다. 하이데거는 인간의 실존 의식은 세계 속에 머무르며, 세계 속에 존재하는 나는 유일한 존재로서 수많은 사물을 인식하고 반향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 의식에서 나오는 말은 어떤가? 잠언의 저자는 그 언어가 여호와가 주신 것이라고 단언한다. 내가 통제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다. 무슨 말인가? 존재자가 아무리 지혜롭고 의식을 통제할 수 있다 할지라도 궁극의 의사소통은 인간의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결국 16:1-3은 여호와를 신뢰해야 하며 자신의 명철을 의지해서는 안 된다는 잠언 3:5, 7절의 메시지로 돌아가는 것으로 보인다. 이와 가장 유사한 경구는 잠언 20:24이다.(참조. 16:9, 33, 19:14, 21)

사람의 걸음은 여호와로 말미암나니 사람이 어찌 자기의 길을 알 수 있으랴(20:24)

여기서는 말이 아니라 걸음, 곧 행위가 여호와에 의해서 발생하며, 따라서 인간은 자신의 운명을 알지 못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전도서가 미래에 대해 냉소적인 시각을 보여준 것과 달리 잠언은 여호와에 대한 절대적 의존을 강조한다. 그리고 악을 계획하는 마음에는 거짓이, 샬롬을 계획하는 마음에는 기쁨(12:29)이 있을 것이라고 함으로써 악이 아닌 평화의 도덕적 가치를 부각시킨다. 〈아메네모페의 교훈〉에서도 혀의 조종자가 인간이 아니라 신이라는 것을 부각시킨다.(ⅩⅩ.1, 4-6, AEL II)4
2절을 직역하면 “인간의 모든 길은 자신의 눈에는 정결하나 영들을 감찰하는 이는 여호와이다.”(=21:2)인데, 이 구문도 대조를 이룬다. 첫째, 인간은 자신의 시각에서 자신의 행위를 정당화하면서 아무런 죄가 없다고 굳게 믿는다.(2a절, 참조. 14:12a) 이때 ‘정결한’ 것은 바르고 정의로운 행위를 말한다. 욥기에서 빌닷은 욥의 행위가 이와 같다면 그의 처소가 평화로울 것이라 말했으며, 엘리후는 욥의 말을 왜곡하여 말한다.(욥 8:6, 33:9) 잠언 20:11은 아이의 행위가 그러한 것처럼 개인의 품행은 청결함과 정직함을 속일 수 없다고 말한다. 또한 잠언 20:9은 자신의 마음이 청결하다고 할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음을 말한다. 따라서 잠언 16:2은 위선적 자기 합리화와 착각을 비판하는 구문으로 볼 수 있다. 이는 동시에 무지함을 함의한다.(21:2, 24:12)
둘째, 이런 인간의 심령이 바른지 그른지를 판단하는 이는 여호와이다.(2b절, 비교. 21:2, 24:12) ‘감찰하다’(토켄)의 의미는 자신의 의지에 따라서 무언가를 배열하거나 크기나 무게를 측량하는 것을 함의한다. 24:12은 타인에 대한 구원을 거절하면서 몰랐다고 말해서는 안 되며, 하나님이 마음을 저울질하면서 그 행위대로 보응할 것이라 말한다. 하나님은 인간의 영을 꿰뚫어보며 그의 선악을 판단하므로, 모든 일에 대한 판단이 있을 것이다. 모든 것, 개인의 마음에 숨은 죄악은 결국 다 드러날 것이다.(참조. 15:11)
언어에 대한 신적 통제와 마음에 대한 신적 판단을 이해한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잠언 16:3은 명령한다. “너의 일을 여호와에게 의탁하라 그러면 너의 계획(생각)이 이루어질 것이다.” 16:2에서 인간의 길(행위)은 뒤따르는 3절에서 인간의 ‘행사’와 연결된다. 여기서 ‘맡기다’로 번역된 히브리어는 ‘갈랄’(גלל)인데, 무언가를 굴린다는 의미이고, 다른 사본들에서는 ‘드러내다’로 읽힌다.(גלה, Syr, Tag, Vul) 그렇다면 여호와께 굴린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이것은 ‘포기’이자 ‘위임’을 함의한다. 시편 22:8은 자신의 일을 여호와에게 굴린다면 구원이 있을 것이라 말하고, 시편 37:5에서도 이 의탁은 여호와가 행동하게 한다고 말한다.[집 7:17 (MS A)] 잠언 16:3은 명령과 결과로 이루어져 있는데, 인간이 자신의 불완전함을 인식하고 행위를 여호와에게 위탁한다면 그 결과가 긍정적일 것을 약속한다.
3b절에서 ‘계획들’은 곧 ‘생각들’을 의미한다. 물리적인 ‘일들’(3a절)에서 ‘생각들’의 성취로의 이동은 언뜻 보면 현실에서는 반대가 되어야 하는 것 같다. 유사하게 잠언 4:26은 발걸음을 숙고하면 모든 걸음이 확고해질 것이라고 약속했으며(비교. 20:18b),5 이때 그 걸음은 광범위한 아비의 말들이었다.(4:20)
폭스는 잠언 16:3을 잠언 28:20과 연관하여 설명하는데,6 16:3의 태도가 욕심에 눈이 먼 탐욕스러운 태도와는 구분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잠언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종교적 편법을 장려하지 않으며, 부자가 될 것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 아니라 개인의 생각이 확고해질 것을 말하고 있다. 이를 통해 잠언의 저자는 단순한 목적의 성취를 말하다기보다 ‘행위의 완결’이 여호와에게 있음을 강조한다.(잠 3:5-6) 그것은 또한 기도의 언어이기도 하다.(시 90:17)7
16:4-5에서는 신적 목적과 악의 문제를 다룬다.8 “그 쓰임에 적당하게”(4절)로 번역된 히브리어는 ‘라마아네후’(למענהו)인데, 여기서 ‘마아네’는 ‘목적’을 뜻하는 명사 ‘마아네’(מענה) 혹은 ‘대답’을 뜻하는 ‘마아네’(מענה, 참조. 미 3:7, 잠 15:1)를 의미한다.(HALOT) 그렇다면 둘 중 무엇으로 해석해야 하는가? 또한 16:4a을 직역하면 “그것의 목적을 위해서”인데, 지시어 ‘그것’(3인칭 남성)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첫째, 이 단어는 ‘그(하나님)의 목적을 위해서’로 볼 수 있다. 둘째, 이 단어는 ‘특정 피조물의 목적’으로 볼 수 있다. 셋째, ‘그것(모든 것들)의 대답에’로 볼 수 있다.
맥케인은 이를 ‘그것의 대응물과의 관계에서’로 번역하면서 하나님은 모든 것을 사물들의 적절한 질서에 대응하도록 만들었다고 해석한다.9 이 해석에 따르면 세계는 정해진 자발적인 질서들 속에서 균형에 맞추어 작동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하지만 맥케인의 번역은 적절하지 않다. 가장 최선은 이 단어를 존재들의 ‘목적’으로 보는 것이다. 사물 그 자체의 목적으로 보든, 더 직접적으로 여호와의 목적으로 보든 여호와가 세계를 창조했다는 점은 차이가 없다. 본문에 이어지는 악인들과 교만한 자들의 등장과 연계해서 본다면, 여호와가 이 대상들을 그 쓰임새에 맞게 만들었다고 보는 편이 좋다. 이 단어는 집회서에도 등장한다. 집회서는 하나님이 자신을 위하여 저장고를 열었고 구름이 하늘에 떠다닌다고 말한다.(43:14a, Mas) 집회서 43:26은 하나님으로 인하여 그의 메신저들이 성공하며 그의 말씀에 의해서 세상이 유지된다고 말하는데, 이 텍스트들은 모두 하나님의 창조와 관련된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이어지는 구문 “심지어 악한(재앙) 날에 악인”의 의미는 무엇일까? 첫째, 여호와의 목적에 적합하게 악인에게 재앙이 임할 것이 분명하다는 의미일지 모른다.10 여호와가 모든 것을 적합하게 한다면, 도덕적 심판은 반드시 그들에게 실현될 것이다. 둘째, 재앙의 날에 악인은 세상을 심판하는 도구로 적절한 때에 사용될 수 있다는 것이다.11 집회서는 신정론의 질문에 대해서 신적 심판으로 하나님이 갚으실 것을 언급하는데(집 33:13, 39:16-21), 모든 것은 정해진 목적성을 가지고 창조되었다는 것이다.(집 39:27)12 집회서에 따르면 세상의 모든 피조물(물, 불, 바람, 동물 등)이 가진 목적성은 신적이며, 선인과 악인에게 각기 구별되어 발생한다.(집 39:22-35, 40:8-10) 즉 악인은 신적 도구로 인간을 심판하기 위해서 만들어졌다.
5b절의 “손을 잡는다”는 것은 악수 같은 물리적 접촉을 의미하는 일종의 숙어로 어떤 ‘확증’이나 ‘단언’의 의미를 가진다.(예. 잠 11:21)13 이를 재번역하면 “그가 심판을 면하지 못하리라는 것은 확실하다.”가 된다. 따라서 5절은 여호와가 교만을 증오한다고 매우 거친 어조로 말하고 있다.(참조. 6:16-17, 사 2:11-17) 마음이 높아진 모든 이에게 심판은 반드시 시행되며 이들에 대한 용서는 허용되지 않는다. 16:18의 ‘영’이 교만한 자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된다.(참조. 6:16-17) 악한 자들이 도구로 사용된다 하더라도(4b절), 이들에 대한 심판은 확고하다(5절).
이어지는 두 구절(6-7절)은 5절과 대조되는 용서와 화해의 이슈로 나아간다.14 첫째, 인자(헤세드)와 진리(에메트)는 죄를 면제해주며(예. 사 6:7, 22:14), 여호와를 경외함은 개인이 악에서 돌아서게 한다.(16:6) 여기서 ‘속죄’는 제의적 상황과 관련된 특수한 용어로, 속죄가 제의적 의식을 통하여 발생하지 않는다는 점은 확실하다. ‘죄’에 대한 속죄를 말하는 6a절의 평행구문인 6b절은 “악을 피한다”이다. 그렇다면 헤세드, 곧 신실한 사랑과 진리는 인간의 속성인가, 신적 속성인가?15 앞선 잠언 3:5은 하나님과 인간의 눈에 선호와 선한 이해를 얻을 것이라 말했다. “사랑은 모든 죄악을 덮는다”(10:12b)고 말할 때의 사랑은 인간관계 속 사랑이다. 이어지는 구문인 16:7에서 인간의 행위가 언급되는 점을 볼 때, 헤세드와 에메트는 인간의 내적 미덕임을 알 수 있다. 그것은 곧 경외심이라는 신앙적 감정과도 연결된다. 결국 잠언은 제사보다 더 중요한 것으로 도덕적 덕성을 언급하며(레 4:4), 바로 그것이 인간을 악에서 건져내는 구원을 이룬다고 생각한다.
물론 신실한 사랑과 진실함을 여호와의 성품으로 볼 수도 있다. 시내산에서 금송아지를 숭배했던 이스라엘에게 진노하여 그들을 멸하려 했던 여호와는 모세의 중재로 마음을 돌이킨다. 중보의 기도(출 34:6-7)로 유명한 출애굽기 34장은 여호와를 “자비롭고 노하기를 더디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으로 묘사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잠언 16:6의 헤세드와 에메트는 신적 속성으로 해석할 수도 있을 것이다.
둘째, 인간의 길(행위)이 여호와를 기쁘게 한다면, 하나님에게 적대적이었던 자들도 서로 화목하게 되는 결과를 맞이한다.(16:7) 그러면 여호와에게 기쁨이 되는 행위는 무엇일까? 우선 여호와에게 자신의 일을 의탁하는 것(3절)이며, 스스로의 행위가 정결하다고 속이는 일을 멀리하는 것(2절)이다. 가장 근접한 것은 내면의 도덕적이며 지혜를 통한 경외심을 통한 행위들(6절), 제덱과 미쉬팥의 길을 걷는 것(8절)이다.
그런데 이와 같은 지혜자의 덕성들이 어떻게 대적들과 화목하게 만들 수 있단 말인가? 그 방법은 알 수 없지만, 공동체의 삶 속에서 나와 타인이 모두 적의 없는 평화로운 삶을 살 수는 있다.(예. 창 26:26-31, 창 44-55, 왕상 8:50)16 요셉 이야기를 보면, 유년 시절 교만했던 요셉의 삶은 정직함과 진실함으로 치환되었고, 그는 결국 뒤얽힌 배신과 분노, 적의로 가득 찼던 형제들과의 갈등이 해결되는 것을 경험한다. 요셉은 형제들이 자신에게 악을 행했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었고 결국 많은 사람의 구원을 위해 자신을 사용했다고 고백한다.(창 45:7-11, 50:19-21) 여기서 핵심은 이것이 여호와의 절대적 결정, 인도하심 그리고 호의라는 것이다.
종합하면 개인의 죄, 곧 하나님에 대한 적의, 적대적인 행동이 있다 하더라도, 도덕적 미덕과 여호와에게 인정받고 그를 기쁘게 하는 행위들은 한 개인의 죄를 용서받게 하는 효력이 있다. 이는 잠언을 인과응보적 책이라고만 생각하는 사람들에게는 의외의 구절일 것이다.
8절은 공의로움의 중요성을 상기시킨다.

적은 소득이 공의를 겸하면 많은 소득이 불의를 겸한 것보다 나으니라

맥케인은 이 구절이 “소득은 정의와 공존할 수 없다는 것을 가정한다.”라고 말한다.17 하지만 모든 부요함은 불의하며 모든 가난은 정의롭다고 말하려는 것은 아닌 듯하다. 본문이 말하는 바는 ‘정의’가 아닌 수단에 의해서 경제적 이득을 얻는 것의 문제점과 공의로움이라는 수단으로 산출된 적은 소득을 말한다. 즉 ‘~보다 낫다’의 잠언을 통해 공의로움의 미덕을 표현한다면 이 구절은 전후 문맥과 어떤 관계일까? 현재 구절과 유사한 구절은 잠언 15:16-17과 16:19이다.

가산이 적어도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크게 부하고 번뇌하는 것보다 나으니라 채소를 먹으며 서로 사랑하는 것이 살진 소를 먹으며 서로 미워하는 것보다 나으니라(15:16-17)
겸손한 자와 함께 하여 마음을 낮추는 것이 교만한 자와 함께 하여 탈취물을 나누는 것보다 나으니라(16:19)


이러한 대조적 관계는 여호와 경외와 타자를 사랑하며 겸손함의 가치를 극대화하면서 번뇌, 미움, 교만을 경계하려는 의도이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삶은 구체적으로 채소를 먹더라도 타인을 사랑하는 삶이며 그것은 16:8의 정의로운 삶과도 관계된다. 따라서 16:8의 공의로운 삶으로써 적은 이익을 만드는 삶은 여호와 경외의 종교적 감정과 무관하지 않다. 또한 외견상으로는 추가적으로 삽입된 구절로 보이지만, 정의/공의로운 삶이 바로 16:7에서 하나님을 기쁘게 만드는 삶일 수 있다.
따라서 이 구절이 말하는 재물의 차원은 일그러진 불의한 세상에 대한 반영으로 보인다. 거대한 ‘부’(wealth)는 때로 그 자체로 ‘무익하며’(10:2), 공의가 개인을 구원한다(11:4, 13:23)는 것은 강조되며, 불의한 세계에서 부요함은 위험할 수 있다는 것을 증거한다.18
9절은 1절과 대응한다. 인간의 마음은 어떤 사건들을 정교하게 계산하고 설계하며 그것을 이룰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사실 인간의 행동을 궁극적으로 결정하는 것은 여호와이다. 1절에서는 언어에 대한 통제였다면, 여기서는 행동에 대한 통제를 시사한다. 이 격언이 인간의 전략을 무시하는 결정론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인간의 지혜로운 노력과 전략은 필요하나 그 모든 것이 최종적인 결실을 맺도록 하는 것은 여호와의 손길이다.
이와 유사한 구절은 잠언 19:21과 예레미야에 등장한다.19 “여호와여 내가 알거니와 사람의 길이 자신에게 있지 아니하니 걸음을 지도함이 걷는 자에게 있지 아니하니이다.”(렘 10:23) 만약 최종적으로 일을 성취하는 손길이 여호와의 것이라면, 이는 인간의 행위를 여호와에게 신뢰할 수 있는 중요한 이유가 된다.(16:3)

왕의 잠언(16:10-15)

이어지는 6개의 격언은 각각 2절씩 짝을 이룬다. 각각의 격언은 왕의 대권적 역량과 권위를 말하는 동시에 그들 역시 신적인 통치의 대상임을 증언한다. 따라서 10-15절은 여호와 격언 1-9절의 일부분으로 여호와 통치의 대리자로서 신적이면서 인간인 왕의 의무와 권력을 명시한다.20
먼저 10-11절은 사법적 판단, 무게와 측량이 모두 신적 정의의 일부분임을 말한다. 10절을 직역하면 다음과 같다. “점치는 것은 왕의 입술에 있으며 그의 입은 심판에서 불의하게 행하지 않는다.” 케셈은 이를 어떤 미래 사건에 대한 예측이나 점술(민 23:23, 삼상 15:23) 혹은 신적 공표나 결정을 함의한다고 말한다.21 또한 11절의 여호와에 대한 언급은 후자인 신적 결정이나 판결을 의미하며, 단순히 점술가로서 왕을 말하려는 것은 아니라고 본다.22 맥케인은 이 단어를 사무엘하 14:17, 20, 27절에서 다윗의 현명함이 “하나님의 사자같이 선과 악을 분간”하고 “땅의 일을 다 안다”라는 드고아 여인의 고백의 맥락에서 이해한다.23 만약 사무엘하 14장 이해의 관점에서 본다면, 잠언 16:10은 정치적·사회적 문제들을 온전하게 사고하고 정확하게 판단을 내릴 수 있는 능력, 법적으로 정의롭게 분별할 수 있는 능력을 말한다.(물론 다윗은 요압의 정치적 술수에 의해 조종당한 여인의 말에 농락당했지만) 드고아 여인은 “내 주 왕의 말씀을 좌로나 우로나 옮길 자가 없으리이다”(삼하 14:19)라고 말하면서 왕의 말에 신적 권위가 있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본문은 판관으로서 왕의 절대적 공의로움에 대한 신뢰를 표현한다. 신적 권위가 그의 언어 속에 있으므로 그의 치리는 언제나 정의로울 수밖에 없다. 물론 그의 신적 결정은 여호와의 것이며, 모든 왕의 결정이 정의롭지는 않다.(예. 사울, 삼상 14:24-46)
11절은 측량 도구인 정의로운 저울들과 주머니 속 저울추에 대해 말한다. 세계의 모든 측량 기구는 여호와의 것이며 그가 지으신 것이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상업활동에서 측량 도구를 개조하여 거짓 저울로 상대방을 속이고 거래하는 불의를 비판하려는 의도다. 미가 6:11에선 악인의 집이 불의함에 대해 말하고 부정한 저울과 거짓된 저울추를 언급한다. 또한 이는 우상숭배의 정황과도 연결되며, 이사야 46:6에서 인간들의 주머니 속 은과 금은 우상을 만드는 재료가 된다. 아모스에서는 이 거짓 저울이 여호와의 진노를 불러일으키는데, 사람들은 타인을 노예로 삼는 수단으로 돈을 모을 때 이 거짓 저울을 사용한다.(암 8:5-6) 따라서 왕의 잠언(10-15절)의 문맥에서 생각한다면, 신성한 측량의 도구들이 땅에서 질서 있고 공정하게 사용되도록 관리해야 할 의무가 있다.
중요한 점은 여호와가 바로 이 측량 기준을 만든 자라는 사실이다. 그는 구체적인 경제 정의의 질서를 만든 자이므로, 이를 위배하는 것은 그에게 대항하는 것이다.(잠 20:10, 23) 신적 정의는 단순히 종교적인 것뿐만 아니라 구체적인 경제적 측량 도구에도 적용된다.
12-13절의 공통된 단어는 ‘공의’이며, 왕들이 싫어하는 것과 기뻐하는 것을 차례로 말한다. 왕의 통치는 악행을 미워하는 그의 태도에서 드러나며, 그의 권좌는 공의에 의해서 굳게 설 수 있다.(12절) 사회적 정의가 온전하게 실행될 때, 위정자가 가진 권력을 국가의 정의로움을 확립하는 방향으로 행사할 때 그 정부는 존재할 수 있다. 브루너(Brunner)는 이집트 신화에서 따온 이 구문에 공의라는 기초 위에서 만들어진 보좌의 개념이 들어 있다고 말한다. 이집트 파라오의 보좌에는 세계의 질서와 정의에 대한 표식인 마앗(Maat, 정의/진리)이 상징으로 새겨져 있다.(참조. 왕상 10:18-20)24 즉 왕의 통치 행위는 신적인 진리를 행사하고 창조의 질서를 확립하는 행위라는 의미이다. 이러한 논증이 적절하다면 왕은 곧 신의 질서를 땅에 실현하는 자가 된다.25
하지만 12절은 왕의 의무에 대해 말한다. “왕은 악을 미워해야만 한다”라고 말할 때, 그것은 어디를 향하는가? 인간으로서 왕의 내면의 악에 관한 것과 왕 외부에 관한 것, 곧 왕권을 위협하거나 악행을 저지르는 자들에 관한 것이 모두 해당된다. 잠언은 헤세드와 에메트(‘신실한 사랑과 진리’, 잠 20:28, 29:14)를 왕위가 유지되는 조건으로 본다. 잠언 25:5은 “왕 앞에서 악한 자를 제하라 그리하면 그의 왕위가 의로 말미암아 견고히 서리라”라는 격언이 등장한다.(시편 101)26 12a절에서 “왕들이 미워함”은 5a절에서 “여호와가 미워함”과 대응되며, 곧 왕은 여호와의 대리자로서 신적 분노를 실행해야만 한다.(시 89:14)
12절의 시작과 대응하면서 13절은 “왕들이27 기뻐하는 것”에 대해 말한다. 여기서 “입술의 공의”는 잠언 10:32a의 “공의로운 자들의 입술은 기쁨을 안다”와 유사하다. 흠 없는 자(11:20), 선을 추구하는 자(11:27), 선한 자(12:2), 신실하게 행하는 자(12:22), 옳은 자(14:9), 의로운 자의 기도(15:8)는 모두 이 기쁨과 관계되며 그것은 신적 기쁨과도 무관하지 않다. 지혜를 찾는 자는 생명과 여호와의 기쁨을 얻는다.(8:35) 13절에서는 의로운 언어를 구사하는 자는 왕의 기쁨을 얻고, 정직한 말을 하는 자(잠 22:11, 시 101:7)는 왕의 사랑을 얻는다. 이는 아마도 왕의 면전에 나아가는 왕의 조언자나 신하에게 해당하는 조언처럼 보인다. 동시에 ‘의로운 입술’은 왕 스스로의 덕목이다.
14-15절은 사람들을 향한 왕의 ‘진노’와 ‘은택’(라쫀)에 대해서 말한다.(참조. 19:12) 14a절에서 왕의 분노는 일반적인 개인의 분노와는 다르다.(20:2, 24:21-22) 개인적인 분노와 혈기는 지혜로운 자가 취해야 할 행동이 아니며(15:1, 4), 자신의 충동적인 기질을 통제하는 것이 미덕이다.(참조. 16:32, 22:24, 27:4)
또한 왕의 진노에 대한 부정적 시각도 존재한다.(14:35, 28:15) 이러한 왕의 분노는 앞선 12-13절의 정의롭고 질서가 있는 다스림을 위한 것 혹은 왕이 혐오하는 것들에 대한 신의 대리적 성격을 띤다. 따라서 왕의 진노는 여호와의 진노와 동일한 심판의 성격을 가진다. 왕의 진노는 ‘죽음의 메신저들’(천사들)에 비견된다.(시 78:49-50) 이 메신저들은 질병이나 자연재해를 통해서 사람들을 심판한다. 따라서 왕을 진노하게 하는 행위는 죽음을 초래할 수 있으므로 극도로 주의해야 한다.(20:2) 여기서 다시 한번 16:1-9의 여호와의 임의적 개입의 요소가 왕의 진노에서 드러난다. 왕과 여호와를 동시에 두려워해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24:21-22)
지혜자의 지혜는 ‘그것’, 곧 왕의 진노를 누그러뜨리는 유일한 수단이다.(참조. 29:8) ‘쉬게 한다’(카팔)라는 단어는 16:6a에서 죄가 속죄된다는 구문에서 동일하게 사용되고, 6-7절에서 여호와의 속죄 및 용서의 주제와 일치한다. 광야를 헤매던 다윗은 갈멜로 가서 나발에게 도움을 청하나 모욕과 함께 거절을 당하고 후에 400명의 사람들과 함께 나발을 치러 올라간다.(삼상 25장) 이때 아비가일은 다윗이 하나님이 세운 이스라엘의 지도자임을 고백하고 참극을 막는데, 다윗은 그녀를 칭찬하며 이렇게 말한다.

네 지혜를 칭찬할지며 또 네게 복이 있을지로다 오늘 내가 피를 흘릴 것과 친히 복수하는 것을 네가 막았느니라(삼상 25:33)

16장 15절을 직역하면, “왕의 얼굴의 빛에 생명이 있으며, 그의 기쁨은 늦은 비의 구름 같다”이다. 따라서 왕의 얼굴빛을 유지하도록 왕궁 사람들은 왕의 정서를 면밀히 살펴야 한다. “왕의 얼굴 속의 빛”은 보상 혹은 은혜를 함의한다. 마찬가지로, 왕의 찬란한 미소는 신성의 특징이기도 하다.(예. 시 4:7, 44:4, 89:16, 민 6:25)28 욥은 고통 중에 자신이 누리던 왕 같은 위치를 회상하면서 자신의 ‘얼굴빛’을 사람들에게 비추었던 시절을 그리워한다.(욥 29:24) ‘늦은 비’(혹은 ‘봄비’)의 구름은 왕의 얼굴빛과 기쁨에 대비되며, 이는 3-4월에 내리는 봄비의 중요한 전조이다. 1년 농사의 중요한 수확을 위해서 기다리던 비는 사람들에게 무엇보다 큰 선물이 된다. 이 늦은 비(봄에 내리는 비)는 구약에서 여호와의 오심 혹은 신적 은혜로 비유된다.(호 6:3, 욜 2:23, 슥 10:1) 결국 왕은 비를 주는 자, 땅에 생명의 풍요로움을 만드는 자로 표현된다.

소결 1: 존재와 시간, 그리고 인간의 무게

독일의 철학자 하이데거는 『존재와 시간』에서 존재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본질적인 질문을 던진다.29 20세기 이전의 철학자들이 큰 관심을 두지 않았던 이 질문은 바로 ‘세계 속에 존재하는 나’에 대한 질문이다. “존재란 무엇인가?”, “존재자는 존재와 어떻게 다른가?” 세계 내부에 존재하는 존재자는 유일무이한 특이한 것으로 하이데거는 존재의 의미, 그리고 그 존재의 의식에 관심을 둔다. 인간은 그야말로 유일무이하게 모든 동물 가운데 자신의 존재를 고민하며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고민하고 세계에 자기를 기투(企投)하는 존재이다.30 하이데거는 현존재는 항상 불안하다고 말한다. 그 불안 속에서 현존재는 스스로를 ‘짐’으로 인식하며 불안을 감추거나 은폐하려 시도한다. 이 불안의 기운은 ‘현존재의 근원적 존재양식’이라고 말한다.31 위선과 회피는 의식하는 현존재의 죄와 불안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태도에서 출발한다. 또한 빈말과 호기심 그리고 애매성 가운데 ‘세계 속에 존재하는 존재자’로서 우리는 퇴락하고 있으며, 죽음은 쉽게 망각된다. 하이데거는 나를 유해하게 하는 존재자들로 인하여 두려움에 처한다고 말하고, 진정 우리를 두렵게 하는 것은 세계 속 내부자들의 존재들이 아니라 말한다. 그것은 세계 자체가 가지는 “무의미의 심연”이며32 그 속에서 우리는 ‘나’라는 실존을 비로소 대면하고 세계를 발견한다. 이러한 존재에 대한 물음은 잠언의 일상에서도 중요하다.
하이데거의 현존재는 자아의 본체를 온전하게 파악하는 것이 근원적으로 불가능하다. 본질에 대한 추구, 형이상학적 실체에 대한 연구는 주관적이다. 실존이라는 의식의 흐름을 추적할 뿐이다. 인간의 언어를 통제하는 것은 마음이 아니다.(16:1) 잠언 16:2, 9은 인간의 자아에 관해 서술하면서 자아는 자신의 외피만으로 스스로 정당화하는 위선에 빠진다고 말한다. 하지만 ‘나’라는 존재, 그 마음과 영혼의 진정한 실체는 하나님에 의해서만 온전하게 파악된다. ‘나’라는 실체적 현존재의 마지막에는 공허, ‘무’(nothingness)가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있다. 따라서 나는 하나님을 통해서 온전히 세계 속에 드러난다.
여호와는 중심을 보신다. 베냐민 지파의 사울은 외모가 무척이나 매혹적인 인물이었다.(삼상 9:2, 10:23-24)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가 자신들을 대신하여 전쟁을 치러줄 것이고 공동체에 유익을 끼칠 것이라 믿었다. 그러나 그는 여호와의 명령에 불순종하는 악을 저지른다.(삼상 15:19, 22) 그리고 여호와는 사무엘을 통해 다른 왕을 찾기 시작한다. 사무엘은 베들레헴 사람 이새의 아들 엘리압이 여호와가 기름 부으실 자, 곧 왕이 될 사람이라는 확신을 가진다.(삼상 16:6)
잠언은 인간 스스로의 눈에 자신의 길이 100% 깨끗하다고 생각해도 여호와만이 인간의 영혼에 무게를 달아 감찰할 수 있다고 말한다.(잠 16:2b) 인간의 언행과 모든 것은 결국 여호와에 의해 결정된다. 여호와는 모든 것을 정해진 목적에 합당하게 만들었으며(4절), 적절한 때에 악인들을 심판하신다(5절). 반면에 신적인 감정과 경외심은 용서와 평화를 가져다 주며(6절), 여호와를 기쁘시게 하는 행위와 정의로운 삶을 사는 것은 중요하다.(7-8절) 결국 삶의 모든 경로에서 여호와를 깊이 신뢰하는 것만이 신적 인도를 받는 유일한 길이다. 고린도전서 4:4-5에서 바울은 자신을 심판하실 분이자 어둠에 있던 것들과 마음의 뜻을 드러낼 분인 그리스도가 오실 때에 각 사람에게 참된 칭찬이 있을 것이라 말한다.

소결 2: 청년 고독사와 왕의 의무

한국 사회의 청년 고독사는 2017년 63명에서 2020년 102명으로 62%나 급증했다.(“40세 미만 청년 고독사 3년간 62% 급증”, 「동아일보」, 2021년 9월 22일) 고독사는 무연고로 홀로 죽음을 맞이하는 경우를 말한다. 취업 문제, 가난, 친구 및 가족과의 관계 단절, 정신적 어려움, 가정폭력 등으로 자살하거나 병으로 죽음을 맞이하는 꽃다운 청년들. 이들은 무연고 사망자로 공영장례가 치러지고 있다.
2021년 4월부터 “고독사 예방 및 관리에 관한 법률”이 시행되었다. 하지만 여전히 우리 사회는 20-30대 청년들의 죽음을 막지 못한다. 복지의 사각지대에서, 특히 코로나19로 인하여 관계가 단절된 청년 세대가 연락을 끊고 죽음을 택하는 안타까운 사례가 증가하고 있다. 세계 속 존재들은 이렇게 삶의 가능성이 좌절될 때 현실을 극복하고 다시금 그 속에서 살아내려 하지만, 소망 자체가 꺾였을 때는 극단의 선택을 할지 모른다. 정부와 사회가 함께 복지와 관계망을 확충해 이들을 돌봐야 한다.
이는 곧 왕들의 의무이다. 왕의 권력은 신성한 것으로 여겨졌지만, 그에 따른 무서운 책임도 함께 강조된다. 이집트와 이스라엘의 왕들은 정의가 땅에 실현되지 않으면 그의 왕좌가 흔들릴 것을 이해했다.(16:12) 따라서 왕의 잠언은 시작부터 철저하게 그의 언행의 정의로움에 관하여(16:10), 경제적 정의가 온전하게 실행되는 것에 관하여(11절), 악이 사회 속에서 저지되는 것에 관하여(12절) 강조한다. 왕이 진실로 기뻐하고 주위에 두는 자들은 정의롭고 올바른 직언을 할 수 있는 자들이다.(13절) 왕은 이러한 정의로움이라는 질서의 기준에서 세상을 다스리기에 때로는 분노하고 때로는 버려진 자들에게 은혜를 베푸는 통치자가 되어야 한다.(14-15절)
시편은 바로 이러한 정의의 실행자로서 여호와가 이스라엘과 세계에 공의를 행사하기를 갈망했다.(시 9:4, 8) 왕의 잠언이 제시하는 정의를 실현케 하는 이 냉엄한 기준은 욕망에 사로잡힌 모든 위정자가 새겨들어야 할 메시지일 것이다. 잠언은 지혜를 추구하는 자들이 어지러운 세상을 정화시킬 수 있다고 생각한다.(16:14)

주(註)
1 Roger N. Whybray, The Composition of the Book of Proverbs, JSOTSup 168 (Sheffield: JSOT, 1994), 88.
2 Roger N. Whybray, Proverbs, NCBC (Grand Rapids: Eerdmans, 1994), 89.
3 Raymond C. Van Leeuwen, “Proverbs,” in Proverbs-Sirach, NIB V (Nashville: Abingdon, 1994), 157.
4 아람어 아히칼(viii 115)을 참조하라. William McKane, Proverbs: A New Approach(London: SCM, 1970), 495.
5 Whybray, Proverbs, 240.
6 Michael V. Fox, Proverbs 10-31, AB 18B (New Haven: Yale University Press, 2009), 610; 아메네모페와 비교, AEL 2.157.
7 Richard J. Clifford, Proverbs: A Commentary, OTL (Louisville:Westminster John Knox, 1999), 157.
8 맥케인은 4-5절이 신정론에 대한 것이라고 본다. McKane, Proverbs, 497.
9 McKane, Proverbs, 497.
10 Whybray, Proverbs, 241; Roland E. Murphy, Proverbs, WBC 22 (Nashville:Nelson, 1998), 120.
11 Fox, Proverbs 10-31, 611.
12 JiSeong J. Kwon, “Determinism in Ben Sira?,” Semitica (2022): Forthcoming.
13 Fox, Proverbs 10-31, 539.
14 ⅬXX에서 6절은 15:27 이후로 이동된다.
15 폭스는 ‘인자와 진리’가 문맥상 하나님의 속성에 해당하며, 잠언 15:5b-6a은 출애굽기 34:6-7에서 죄를 용서하는 여호와의 성품과 관련된다고 본다. 따라서 16:6b에서 여호와 경외심은 16:16a의 인자, 진리와 평행관계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해석은 6-7절에서의 용서와 화해라는 명확한 구절들과 맞지 않는다. Fox, Proverbs 10-31, 612; 유사하게, Van Leeuwen, “Proverbs,” 159.
16 Clifford, Proverbs, 158.
17 McKane, Proverbs, 499.
18Van Leeuwen, “Proverbs,” 159.
19 일부 잠언(8:14, 11:14, 15:22, 24:6)의 경우에는 계획의 긍정적 측면을 부각하기 때문에 단순히 운명론으로 16:9을 평가할 수 없다고 폭스는 말한다. 또한 신적 결정의 중요성을 부각한다는 측면에서 19:21과 유사하다. Fox, Proverbs 10-31, 613.
20 와이브레이는 왕에 관한 10-15절의 격언들이 1-9절의 격언들을 크게 반향한다고 언급한다. Whybray, Proverbs, 243.
21 겜서(Gemser)가 주장하듯이 우림과 둠밈에 대한 왕의 사용과 무관하다. Mc-Kane, Proverbs, 499.
22 신명기에서 ‘케셈’은 부정적인 톤으로 사용된다.(신 18:10) Murphy, Proverbs, 121.
23 McKane, Proverbs, 500.
24 Hellmut Brunner, “Gerechtigkeit Als Fundament Des Thrones,” VT 8.4 (1958): 426-428; 맥케인의 브루너에 대한 참조를 보라. McKane, Proverbs, 492.
25 하지만 직접적인 인용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잠언은 왕의 권력이 언제나 모든 경우에 정당하게 행사되거나 부패하지 않는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에게도 주어진 의무가 있다.(예. 잠 22:11, 24:21)
26 Clifford, Proverbs, 159.
27 ⅬXX, Syr, Tg에서는 ‘왕들’(MT)이 아니라 ‘왕’으로 번역된다.
28 Fox, Proverbs 10-31, 617.
29 Martin Heidegger, Sein und Zeit 1.1 (Tübingen: Neomarius Verl., 1949).
30 박찬국,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 읽기』(새창미디어, 2013), 23.
31 박찬국, 위의 책, 73.
32 박찬국, 위의 책, 101.


권지성|영국 더럼대학교에서 구약학을 전공하여 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스위스 취리히대학교와 로잔대학교에서 연구교수로 히브리 성서 및 제2성전기 문헌을 연구하였다. 저서로 Scribal Culture, 『특강 욥기』, 『특강 전도서』 등이 있다. 현재 기독연구원 느헤미야에서 전임연구위원으로 일하고 있다.

 
 
 

2022년 11월호(통권 76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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