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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me > 기독교사상 > 성서와설교 > [바울의 칭의론을 통해 사유하는 ‘그리스도인의 자유’ 05]
성서와설교 (2022년 10월호)

 

  남미 해방신학에서 그리스도인의 자유: 불의한 법으로부터의 자유
  

본문

 

지난 호에서 우리는 ‘바울에 관한 새 관점’에서 칭의론이, 다시 말해 그리스도인의 자유가 어떻게 나타나는지 살펴보았다. ‘새 관점’은 바울이 그 누구보다 충실한 유대교인이었으며, 바울이 반대한 것은 율법 그 자체가 아니라 이방인이 그리스도인이 되는 데 장애가 되는 할례, 음식법, 안식일 준수와 같은 율법의 몇몇 조항이었음을 설득력 있게 논증했다. 그 결과 새 관점은 바울에게서 반유대주의자라는 오명을 벗겨냈다. 나아가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민족적·문화적 배타주의로부터의 자유로 해석함으로써 칭의론의 범위를 개인적 차원에서 공동체적 차원으로 확장했다. 그러나 ‘새 관점’은 묵시적 종말론이 지닌 정치적 저항성을 간과함으로써 칭의론을 정치적 차원으로 확장하는 데까지는 나아가지 못했다. 바울 교회의 그리스도인들이 유대인이건 이방인이건 로마제국의 억압과 착취로부터 해방되기를 염원하던 식민지 백성이었다는 사실을 놓친 것이다.
‘새 관점’의 이러한 한계는 남미 해방신학에서 극복되기 시작하는데, 여기서 바울의 칭의론 또는 그리스도인의 자유는 다시 한번 패러다임의 전환을 맞게 된다. 따라서 이제 해방신학에서 그리스도인의 자유는 어떻게 이해되고 있으며, 그것이 당시 남미 또는 남미로 대표되는 제3세계의 상황과 관련하여 어떤 의의를 지니는지 탐구하려고 한다.

남미 해방신학의 탄생

북미에서 ‘바울에 관한 새 관점’이 한창이던 1970년대에 남미에서는 해방신학이 싹텄다. 당시 남미는 경제 개발에 열을 올릴수록 국제적으로는 제1세계, 특히 미국에 대한 종속이, 국내적으로는 사회적 양극화가 심화되는 역설적 상황에 놓여 있었다. 그러나 불트만의 실존주의적 성서해석처럼 개인주의적이고 내적인 영성을 추구하는 신학 또는 신앙은 남미의 비참한 현실에 대해 어떤 비전도 제시하지 못했다. 다원주의적 관점에서 ‘새 관점’이 내세우는 민족적·문화적 포용도 남미의 경제적 빈곤 문제에 대한 근원적 해답은 되지 못했다. 두 사상 모두 남미의 특수한 상황의 핵심을 꿰뚫지 못하고 과녁을 빗나갔다. 이에 남미의 가톨릭 사제들은 성서의 출애굽-해방 전통에 근거하여 민중과의 연대 속에서 경제·사회·정치적 억압으로부터의 해방, 나아가 전인적·세계사적 차원에서 진정한 자유의 실현을 추구했다. 남미 해방신학이 탄생한 것이다.
해방신학은 방법론적으로 크게 두 가지 특징을 보여준다. 하나는 남미의 경제적 현실에 대해 사회경제학적 분석을 수행함으로써 현실의 경험을 신학의 출발점으로 삼은 것이고, 다른 하나는 몰트만(Jürgen Moltmann)의 정치신학을 기반으로 제1세계 신·구약성서 연구의 성과를 적극적으로 그러나 동시에 비판적으로 수용하면서 이를 남미의 현실에 맞게 토착화한 것이다.
당시 남미 사회학에서 대두한 종속이론은 남미가 미국을 위시한 제1세계의 원조를 받아 경제 개발을 추진할수록 저개발에서 해방되기는커녕 경제·사회·정치·문화면에서 부강국들에 종속될 수밖에 없는 메커니즘을 밝혀주었다. 구티에레즈(Gustavo Gutiérrez)는 종속이론이라는 창을 통해 “인류 역사의 주역으로 자처하는 부강국들이 만든 새로운 형태의 제국주의”,1 즉 자본주의적 제국주의를 남미 빈곤의 근본 원인으로 보았다. 미란다(Jose Porfirio Miranda)는 자본주의와 그 핵심인 사적 소유제에 대한 정치경제학적 분석을 통해 자본주의적 임금 체제를 “인류 역사상 가장 완벽한 노예제도”2로 규정하고 기독교와 자본주의의 양립불가능성을 주장했다.
이처럼 철저한 현실 사회 분석은 남미 해방신학자들에게 억압의 실체가 자본주의이며, 이로부터 해방되기 위해서는 적극적인 정치적 행동이 필요하다는 깨달음을 주었다. 현실 세계에 대한 각성은 성서해석 방법으로도 이어져 몰트만의 정치신학, 그중에서도 특히 종말론에 담긴 정치적 저항성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는 계기가 되었다.3 유럽 유학파였던 구티에레즈와 미란다는 당시 유럽 구약학의 연구 성과를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창조적으로 재구성하면서 출애굽을 이집트라는 거대 제국으로부터의 해방 사건, 즉 “정치적 사건”4으로 규정하고 이 원형적 경험이 종말론의 중심에 있으며, 이러한 출애굽-해방 전통과 종말론이야말로 구약성서와 신약성서를 관통하는 핵심이라고 보았다. 북미 신약학계에서 역사적 예수에 대한 사회정치적 연구가 융성하기 한참 전에 구티에레즈가 예수의 대척점에 유대교가 아닌 로마제국을 위치시키고, 결정적으로 예수의 십자가가 로마의 정치범으로서의 죽음을 가리킨다는 사실을 직시한 것은 바로 여기에 기인한다.
게다가 남미의 가톨릭 해방신학자들은 개신교 신학자들과 달리 루터의 칭의론에 갇히지 않았기 때문에 ‘혁명가 예수 대 반동가 바울’이라는 덫에 빠지지 않고 예수와 바울, 공관복음서와 바울서신을 자유롭게 넘나들며 구약성서까지 포괄하여 통일성 있는 신학을 전개할 수 있었다. 바울의 자유 및 율법 이해가 해방신학의 기틀을 다지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러한 배경 때문이며, 이와 관련하여 구티에레즈와 미란다가 큰 역할을 했다.

구티에레즈의 핵심 사상: 개인의 이기심을 북돋우는 모든 체제와 구조로부터의 자유

구티에레즈는 해방신학의 중심에 ‘사랑하기 위해 자유롭게 되라’(참고. 갈 5:13)는 바울의 선언을 위치시켰다. 그만큼 해방신학을 세우는 데 바울의 자유 개념은 중요한 요소였다. 구티에레즈는 바울의 자유가 ‘~로부터의 자유’(liberté de)와 ‘~을 향한 자유’(liberté pour)의 구조로 이루어져 있다고 보았다. 말하자면 바울의 자유는 죄로부터의 자유에서 이웃을 사랑하기 위한 자유로 나아간다.5 바울의 자유에 대한 이러한 이해와 언어는 얼핏 보기에 개인의 내면에 집중하는 전통적 해석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러나 구티에레즈는 바울의 죄와 자유 개념을 사회·역사적 차원과 유기적으로 결합함으로써 전통적인 바울 해석에서 벗어났다.

··· 과거 오랜 세월 동안 신학은 인간사의 투쟁적 성격, 인간들과 사회계급과 지역국가들 사이의 대립관계에 관해서 거의 외면하고 사색하기를 기피했다. 그렇지만 성 바울로는 그리스도 실존의 파스카적 핵심, 인간생활의 파스카적 핵심을 거듭 강조했다: 낡은 인간에서 새 인간으로, 죄에서부터 은총으로, 노예 처지에서 자유 신분으로 넘어감을 이야기했다.
“자유를 위해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해방하셨습니다.”(갈 5:1) 이 구절에서 성 바울로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자아를 향한 이기적인 전향, 곧 죄악으로부터의 해방이다. 범죄한다는 것은 이웃을 사랑하기를 거부함이며, 종국에는 주님을 사랑하기를 거부함이다. 하느님과 이웃과의 절교인 죄는 인간세계의 모든 빈곤과 불의와 압제의 궁극 원인이라는 것이 성서의 가르침이다. 죄를 이 모든 여건의 궁극 원인으로 본다고 해서 상황을 그렇게 유도하는 구조적 이유들과 객관적 결정 요인들을 대수롭지 않은 것으로 보자는 말이 아니다. 우리가 강조하는 바는, 무릇 사건이란 우연하게 일어나지는 않는 법이며, 불의한 체제가 존재할 때에는 그 배후에 개인적 또는 집단적 의지, 고의적으로 하느님과 이웃을 배척하려는 의지가 도사리고 있다는 사실이다. 아울러 사회변혁이 제아무리 급진적이고 철저하다 해도 모든 악을 자동적으로 제거할 수는 없다는 암시이기도 하다.6


위 인용문에서 바울의 죄와 자유 개념에 대한 구티에레즈의 해석은 예수의 활동에 대한 해석에 비해 개인의 내면성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그에게 바울이 말하는 죄로부터의 자유는 일차적으로 개인의 “자아로부터의 탈피, 이기심의 극복”을 의미한다. 다만, 이것이 “이기심을 북돋우는 모든 체제와 구조에서의 탈출”로 곧장 연결된다는 점에서 실존주의적 성서해석과 다르다.7
사실 구티에레즈는 예수에게서 외적 속박으로부터의 자유를, 바울에게서 내적 속박으로부터의 자유를 좀 더 강조하고 양자를 통합함으로써 기독교가 내적 해방에서부터 정치적 해방까지 포괄하며, 따라서 정치적 운동으로 축소될 수 없음을 드러내려고 한다. 유감스럽게도 이러한 의도는 바울의 죄와 율법 이해가 실제 세계에서 법이 작동되는 방식과 연결되어 해석될 가능성을 차단한다. 그래서 구티에레즈의 신학에서 바울의 죄, 죽음, 율법은 개인이나 집단의 이기주의적·형식주의적 삶의 방식이라는 상징적 의미만 지닐 뿐 실제 세계의 사법적 영역과의 연관성 속에서 논의되지 못한다. 바울신학이 해방신학의 해방 및 자유 개념에 훨씬 더 강력한 신학적 근거를 제공할 수 있는 길이 막힌 셈이다.

미란다의 핵심 사상: 불의한 법과 문명으로부터의 자유

그러나 미란다는 바울의 율법 비판을 법과 문명의 본질에 대한 비판과 연결함으로써 그 막힌 길을 뚫고 나갔다. 바울의 관심이 처음부터 개인의 구원이 아니라 전 인류와 문명을 향하고 있다고 본 점, 이것이 미란다와 구티에레즈의 결정적 차이다. 미란다는 “오늘날 자행되고 있는 착취의 99%가 법의 뒷받침을 받고 있는” 현실을 목도하면서 법이 신성화되면 최선의 경우에도 정의 실현의 의무성을 결여하게 되고 “최악의 경우에는 억압과 불의의 도구로 전락하게” 되는 현실을 직시했다.8 미란다는 이러한 문제의식에서 법 자체의 본질에 대한 탐구에 나섰고, 마침내 서구의 법 정신과 성서의 법 정신, 나아가 서구 문명과 기독교 문명은 양립 불가능하다는 결론에 다다랐다.
미란다에 따르면, 오늘날 공법(公法)보다는 사법(私法), 무엇보다도 정당한 분배가 아닌 차별적 소유에 초점을 맞추는 서구의 법 정신은 희랍적 사고에서 유래했으며, 그것은 소위 ‘중립적 중재’를 통해 법에 도전하는 어떤 상대도 강제적으로 저지함으로써 기존 질서를 유지하는 데 관심을 갖는다. 그러나 성서에서 법은 “이 세상의 가난하고 억압받는 자를 위하여 정의를 성취하는 데 목적이 있다.”9 성서의 법 정신은 정의 구현을 위해서라면 기존 질서의 전복도 마다하지 않는다.
미란다는 구약성서에서 법 정신은 재판의 형식적 결과로서의 판결이 아니라 실질적 내용으로서 정의의 구현에 놓여 있다고 주장한다. 말하자면, 율법은 출애굽을 통해 실현된 정의를 지속해 나가기 위한 필요에서 생겨났다는 것이다. 출애굽이 국가 또는 민족 사이의 정의의 실현이라면, 율법은 이스라엘이라는 한 백성 안에서 억압과 불의의 철폐를 지향한다. 불의한 법령들을 하느님의 법 안에 교묘히 숨기려는 입법자들을 향해 예언자들이 저주와 독설을 퍼부을 수 있었던 것은(참고. 렘 8:7-9) 그들에게 법의 기준이 법 자체의 절대적 권위가 아닌 바로 정의였기 때문이다. 미란다는 예언자들로부터 예수를 거쳐 바울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동일한 법 정신 위에 서 있으며, 그렇기 때문에 당대의 불의한 정치적 현실에 대해 날선 비판을 감행할 수 있었다고 본다.
그러나 미란다는 바울이 “정의가 법 없이 성취되었다”(롬 3:21)고 선언하는 데서 다른 예언자들과 차별되며, 복음을 이전에 어디서도 들어본 적 없는 혁명적 메시지로 만든다고 주장한다.10 그에 따르면, 문명의 기본적 구성요소인 법의 폐기를 선언한다는 것은 그 법이 떠받치고 있는 문명의 종말을 선언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것은 임박한 종말을 가정하지 않고는 이해될 수 없다.
미란다는 죄와 법, 그리고 문명의 관계, 나아가 이 세 가지와 예수의 십자가의 관계를 다음과 같이 해석한다. 바울서신에서 죄가 악마적 세력으로 등장하는 것은 그것이 초개인적 차원과 성격을 지니는 실재, 결코 개인들이 저지른 죄의 총화로 환원될 수 없는 실재임을 드러낸다. “바울에 의하면 죄는 사회구조들 안에, 세상의 지배적 지혜 안에, 그리고 인간이 여전히 선악에 대한 양심을 지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주어진 방식으로 행동하게 하는 인간 문명 안에 육화되어 있다.” 죄가 사회구조적 차원에서 문명에 스며들었다면, 법도 죄의 영향에서 비켜설 수 없다. “법은 사회의 일차적인 구조적 초점”(에밀 뒤르켐)이고, “인간 문명 그 자체 안에 구조화되었으며, 이것의 가장 특징적이고 본질적인 표현이 법”(시헤스)이기 때문이다.11
예수의 처형은 어쩌다 한 번 일어난 실수, 오심(誤審)이 아니다. 그것은 “죄가 문명 속에 육화되어 있다는 점”, 즉 “법이 땅 위에서 정의를 실현할 능력이 없다는 사실을” 뜻한다. 그러므로 “하느님이 범법자가 된 예수를 부활시키셨을 때, 하느님은 죄인을, 즉 법과 인간 문명 전체가 불경하다고 하여 십자가에 매단 자를 정의롭게 만드셨던 것이다. 이것이 법의 정의이다. 법은 ‘죄를 모르는’(고후 5:21) 오직 한 사람을 십자가에 매달았다. 진정한 기독교가 지금까지 역사에 존재하였던 모든 법과 모든 문명에 반기를 드는 것은 하나의 끝없는 전복이다.”12
이처럼 미란다에게 바울의 ‘(율)법으로부터의 자유’13는 불의한 법과 문명으로부터의 자유를 의미한다. 이것은 사랑하기 위한 자유를 개인의 자선에 머물지 못하게 한다. 바울의 관심은 개인의 구원이 아니라 인류의 구원, 세계의 구원에 있기 때문이다. 미란다는 이웃사랑의 의미가 서구의 사고방식에서 자선과 구제로 이해되는 것을 비판하며, 구약성서에서부터 신약성서에 이르기까지 “성서가 알고 있는 사랑은 사랑-정의”라고 주장한다. 사랑받는 사람의 권리를 존중하지 않을 때 그를 돕는 행위는 상대에게 굴욕감을 주는 온정주의가 된다. 그것은 자격이 없는 열등한 사람에게 자신을 낮추는 사람의 시혜적 태도로서 이웃에게 억압적 모욕이 된다.14
그러나 히브리적 사고에 따라 성서에서는 사랑과 정의가 구분되지 않는다. “서구문화가 ‘자선’(구제)이라고 말하는 것을 성서가 ‘정의’라고 하는 것은 부자와 가난한 자를 가르는 사적 소유를 폭력과 약탈이 아니면 획득될 수 없는 것으로 간주하기 때문이다.”15 이로써 미란다는 구티에레즈의 바울 해석에서 바울신학의 사회구조적 차원을 한층 분명하게 드러냄으로써 해방신학의 토대를 단단하게 다졌다.

남미의 해방신학에서 북미의 사회정치적 성서해석으로

요컨대 남미 해방신학은 ‘제도적’ 폭력, ‘합법적’ 수탈에 의해 경제적·정신적 파산 상태에 놓인 남미의 현실을 분석하고 극복하려는 과정에서 바울신학의 지평을 개인적 차원에서 사회 비판 나아가 문명 비판의 차원으로 확장했다. 이로써 바울은 반유대주의자에 이어 친제국주의자라는 오명도 벗게 되었다.
남미 가톨릭 해방신학자들의 이러한 신학적 통찰은 훗날 북미 개신교의 진보적 신학자들이 반유대주의와 루터의 칭의론적 사고에서 벗어나 로마제국과의 대립적 관계 속에서 바울을 이해하는 데 큰 영감을 주었다. 바울의 복음에서 불의한 체제에 대한 저항 정신을 보았다는 의미에서 이 둘은 일맥상통한다. 차이가 있다면 바울에 대한 북미 신학자들의 사회정치적 해석이 최첨단 자본주의의 심장부에서 살아가고 있는 지식인으로서의 자기반성이라는 점이다. 남미 해방신학자들이 마르크시즘적 경제분석의 틀을 빌려 오늘날 그들이 사는 세계를 분석했다면, 호슬리로 대표되는 일군의 북미 신학자들은 같은 틀을 가지고 바울이 살았던 세계, 곧 로마제국을 천착해 들어감으로써 해방신학자들이 그들의 억압적 현실 경험으로부터 직관적으로 깨달은바, 바울의 복음에 담긴 정치적 저항성에 대해 풍부한 역사적 근거를 제공한다. 구티에레즈는 『해방신학의 영성』에서 해방의 영성이 아직 “새싹과도” 같아서 뚜렷한 윤곽이 그려지기까지 시간이 걸릴 것이라고 고백했다.16 그는 가령 예루살렘의 가난한 성도들을 위한 바울의 모금 운동 그리고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바울의 가르침이 장차 해방의 영성에 구체적 형상을 부여해 주기를 고대했다.17
북미 신학자들은 그의 기대에 부응했다. 그들은 사회학적 성서해석을 적극적으로 수용하여 바울의 활동이 로마제국과의 관계에서 구체적으로 어떤 정치적 의미를 지니는지 밝혔다. 그럼으로써 바울서신에 대한 남미 해방신학자들의 직관적 통찰에 대해 구체적인 역사적 근거를 마련해 주었다.
이처럼 남미의 해방신학과 북미의 사회정치적 성서해석은 바울서신에 대한 연구 성과를 함께 나누는 과정에서 상승작용을 일으키며 바울신학이 지닌 사회·정치적 함의 및 비전을 밝히는 데 큰 역할을 하고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다음 호에서는 북미에서 대두된 사회정치적 성서해석과 그에 따른 칭의론과 바울의 자유 개념 이해를 살펴보겠다.

주(註)
1 구스타보 구티에레즈, 성염 옮김, 『해방신학: 역사와 정치의 구원』(분도출판사, 2000), 44.
2 호세 미란다, 김쾌상 옮김, 『마르크스와 성서』(일월서각, 1987), 28.
3 몰트만의 희망의 신학이 구티에레즈의 해방신학에 미친 영향에 대해서는 다음 글을 참조하라. 구티에레즈, “희망의 신학,” 『해방신학』, 242-250, 특히 244-247.
4 위의 글, 174.
5 구스타보 구티에레즈, 이성배 옮김, 『해방신학의 영성: 우리는 우리 자신의 우물에서 마신다』(분도출판사, 1987), 150.
6 구티에레즈, 『해방신학』, 55-56.
7 위의 글, 56-57.
8 미란다, 『마르크스와 성서』, 33, 179.
9 위의 글, 53.
10 위의 글, 198, 216; 여기서 미란다가 직접적으로 설명하고 있지는 않지만, 신약성서에서 율법을 가리키는 헬라어 ‘노모스’(νόμος)는 원래 ‘법’이라는 뜻이다. 정관사의 유무에 따라 ‘법’과 ‘율법’을 구분할 수 있다는 주장도 있지만, 유대교의 율법을 따로 가리키는 용어가 없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신약성서에 나타난 ‘’에 대한 논의는 북미의 사회정치적 성서해석을 다루는 다음 호에서 더 자세히 언급할 것이다.
11 위의 글, 234-235.
12 위의 글, 242-243.
13 바울의 율법 비판에 대한 연구는 미란다를 기점으로 그의 사상을 계승한 신학자들에게서 법 일반에 대한 비판으로 확대된다. 따라서 이하의 논의에서 미란다 이후 남미 해방신학과 북미의 사회정치적 성서해석에서 바울의 율법으로부터의 자유를 말할 때, 논의의 맥락에 따라 ‘율법으로부터의 자유’, ‘법으로부터의 자유’, 또는 ‘(율)법으로부터의 자유’라는 용어를 혼용하도록 하겠다.
14 미란다, 『마르크스와 성서』, 92.
15 위의 글, 41.
16 구티에레즈, 『해방신학의 영성』, 151-152.
17 위의 글, 199, 214-215.


장양미|이화여자대학교 사회학과를 졸업한 후 동 대학원 기독교학과에서 신약성서신학을 전공하여 석박사학위를 받았다. 역서로 『풍성한 생명』(공역) 등이 있다.

 
 
 

2022년 11월호(통권 76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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