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자 기 드보르(Guy Debord)가 말한 것처럼, 우리는 스펙터클한 세계에 던져졌다.1 현대인은 텔레비전 드라마의 환상 속에서 달콤한 즐거움을 찾고, 그 드라마에 나온 제품을 구매하며 가상의 세계에 자신을 투영한다. 헛헛한 자아를 채우려 비트코인 등의 가상자산에 투자하면서 미래를 건다. 3D 게임 속 가상현실이 실제 현실보다 더 현실처럼 느껴지고, 그래픽이 그려내는 매트릭스가 나의 세계가 된다. 내가 입고 쓰는 제품이 ‘나’라는 존재를 구현하고 이를 통해 자아가 실현되기 때문에 떠돌아다니는 유령처럼 끊임없이 온·오프라인을 넘나들며 쇼핑몰 가격할인 광고에 환호한다. SNS의 ‘좋아요’와 댓글 개수가 나의 감정을 좌우하고, 소셜미디어를 운용하는 전문가들은 분석을 통한 알고리즘으로 자극적인 세상을 보여주면서 나를 네트워크에 붙잡아 둔다.
바야흐로 근대적 기획과 자본주의는 인간을 상품으로 만들고, 스펙터클한 무대 위 쇼의 세계는 인간을 기호화하기에 이르렀다. 인간 존재는 스펙으로 입증되고 사람의 도덕성까지도 숫자로써 존재한다. 이렇게 참된 삶의 공간은 사라져 간다. ‘나’는 실제 세계에서 소외되어 그 어디에도 없다. 반복적으로 하루하루를 사는 인생은 무료하고 따분하다. 우리는 스펙터클한 가상의 판타지를 경험하지 않을 수 없는 환경에 둘러싸여 있기 때문에 실존하는 자아에 만족감을 주기란 쉽지 않다.
잠언 8:22-36의 시인은 우리를 상상의 세계로 이끈다. 그 세계의 주인공은 피조세계 이전에 존재했던, 모든 만물을 즐거워하며 만물의 창조에 관여한 지혜이다. 지혜는 모든 무질서를 질서로 만든 창조의 능력이며, 세계 창조의 엔진이다. 신적 지혜는 세계의 기쁨이 되고 인간 존재를 있는 그대로 기뻐한다.(8:30-31) 물신이라는 우상이 개인을 지배하고, 교회가 쇼핑몰이 되고, 종교 지도자가 나의 욕망을 이뤄줄 신의 대리자가 된 세상에서는 새로운 상상력이 필요하다. 잠언 시인은 이방 여인이라는 거짓된 환상의 세계를 거부하라고 조언했다.(잠 5-7장)
이제 권태로운 일상에서 우리를 자유롭게 할 수 있는 상상력을 발휘해 보자. 창조의 세계 속 무한한 기쁨으로 창조주와 교제했던 지혜가 떠오른다. 그 상상의 세계야말로 인간이 기호화되고 돈벌이 수단이 된 세계에서 생존할 수 있는 유일한 방편이다. 탈현대화되고 비인간화된 허상 속에서 왜곡된 기억의 편린들을 붙들고 살아가는 우리가 다시금 재생될 수 있는 방법은, 모든 것을 기쁨으로 물들이며 만물을 소생하게 하는 창조의 능력을 지닌 우주적 지혜의 초대에 수긍하는 것이다.
다음은 잠언 8:22-36의 구조이다.
1. 창조 속 지혜의 자기 칭송 (8:22-31): 2 Stanzas
. 1.1. 창조된 존재로서 지혜 (22-23)
. 1.2. 창조와 지혜 (24-29)
. . 1.2.1. 창조 이전 지혜의 선재성 (24-26)
. . . 1.2.1.1. 깊음과 거대한 물 이전 (24)
. . . 1.2.1.2. 산, 언덕 이전 (25)
. . . 1.2.1.3. 땅, 대지, 진토의 근원 이전 (26)
. . 1.2.2. 창조에 대한 증인 (27-29)
. . . 1.2.2.1. 하늘, 지평선, 깊음 (27)
. . . 1.2.2.2. 하늘, 구름, 깊음의 샘들 (28)
. . . 1.2.2.3. 바다의 한계점, 땅의 기초 (29)
. 1.3. 지혜의 기쁨 (30-31)
. . 1.3.1. 하나님과 지혜의 교제 (30)
. . 1.3.2. 지혜와 인간의 교제 (31)
2. 결론: 지혜의 초대와 마지막 경고 (8:32-36): 1 Stanza
. 2.1. [복 있는 삶] 아비의 훈계와 지혜의 소유 (32-33)
. 2.2. [복 있는 삶] 지혜를 얻은 삶에 대한 교훈 (34-36)
. . 2.2.1. 지혜의 접근성 (34)
. . 2.2.2. 지혜를 얻은 결과: 생명과 신적 선호 (35)
. . 2.2.3. 지혜를 버리는 결과: 파멸의 경고 (36)
창조 속 지혜의 자기 칭송(8:22-31)
창조주 여호와가 창세 전 지혜와의 관계에 대해서 말한다.(8:22-23)
22 여호와께서 그 조화의 시작 곧 태초에 일하시기 전에 나를 가지셨으며
23 만세 전부터, 태초부터, 땅이 생기기 전부터 내가 세움을 받았나니
이 두 구절은 지혜를 마치 여호와로부터 태어난 존재처럼 묘사한다.(‘가졌다’, ‘세움을 받았다’) 여기서 ‘카나니’[동사 카나(קנה)]는 (1) ‘나를 얻었다’ 혹은 ‘나를 소유했다’, (2) ‘나를 낳았다’로 번역할 수 있다. 또 다른 번역은 (3) ‘창조하다’로 칠십인역에서는 지지를 받지만, 사실 히브리어 ‘카나’와는 의미가 다르다. ‘얻다’ 혹은 ‘소유하다’를 뜻하는 동사 ‘카나’와 ‘빚어졌다’를 뜻하는 동사 ‘나싸크’(נסך II)는 ‘창조하다’를 뜻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22절에서 이 동사를 ‘창조하다’로 보는 것은 과도한 해석이다. 물론 23절의 “세움을 받았다”, “빚어졌다”라는 구문은 창조 이전에 선재했던 지혜를 말할 수도 있다.
두 번째 의미인 ‘낳다’는 어떨까?2 이렇게 해석하면, 여호와가 어떤 대상과의 사귐을 통해 아이를 낳는다는, 신화적이면서 다신교적인 의미를 가지게 되므로 단일신적 관념과는 맞지 않는다.3 따라서 첫 번째 의미에 따라 이미 존재한 대상을 창조 전에 ‘얻었다’, ‘소유했다’로 보는 것이 문맥에 적절하고 가장 무난해 보인다. 폭스가 지적한 것처럼 동사 ‘카나’는 인간이 지혜를 습득하는 것의 전조로서 여호와의 신적 지혜 습득에 대한 시적 은유로 보아야 한다.4
그렇다면 22-23절의 지혜라는 개체에 창조의 의미는 없는가? “그 조화의 시작”을 직역하면 “그의 길(일)의 시작”(레쉬트 다르코, ראשׁית דרכו)이다. 여호와께서 세계를 창조하는 첫걸음은 지혜를 얻는 것으로 시작했다. 이는 인간의 시작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보여준다. 그녀(지혜)는 태초 이전, 만세 전에 이미 존재했으며 여러 부분에서 창세기의 창조신학과 맥을 같이한다.(참조. 창 4:1) “길(일)의 시작”이 창조적 행위와 직결되는 곳은 구약에서 이 부분과 욥기 40:19(26:17)뿐이다. 또한 지혜는 태초 이전, 창조의 활동이 시작되기 전에 “세움을 받았다.” 직역하면 ‘부어졌다’, ‘직조되었다’(니싹티, 23절)로 해석할 수 있다. 즉 22-23절에 따르면 신적 창조 행위 이전, 시간의 기원에 지혜는 존재하고 있었으며 거기에는 하나님의 작업이 개입되었다.
이어지는 구절은 창조의 시간 전·후 지혜에 대해 말한다.(24-29절) 24-26절은 ‘~하기 전’의 구문으로 창조의 첫 시기에 대해서, 27-29절은 ‘~때’의 구문으로 창조의 때에 발생한 일들로 묶인다. 이 시는 지혜의 선재성, 우월성을 칭송하면서도 창조 그 자체나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내용을 강조하지 않는다. 또한 고대근동의 창조 신화들(예. 바벨론 문서들, “에누마 엘리시”, “마르둑에 의한 창조”)과 유사성을 가진다고 제안되었으나,5 그 문서들과 잠언의 차이는 확연하다.6 잠언의 핵심은 지혜가 세계와 생명체의 모든 것보다 선재하여, 이를 목격하고 경험해온 가장 오래된 것으로 처음 나타났다는 점이다. 24-26절의 창조 이전의 상황과 27-29절의 창조 이후의 상황은 모두 창세기 1-2장과 욥기 28장의 창조에 대한 모티브와 유사성을 가진다. 그러나 잠언에서는 하늘과 바다와 땅을 채우는 동식물에 대한 설명이 누락된다.
24 아직 바다가 생기지 아니하였고 큰 샘들이 있기 전에 내가 이미 났으며 25 산이 세워지기 전에, 언덕이 생기기 전에 내가 이미 났으니 26 하나님이 아직 땅도, 들도, 세상 진토의 근원도 짓지 아니하셨을 때에라 27 그가 하늘을 지으시며 궁창을 해면에 두르실 때에 내가 거기 있었고 28 그가 위로 구름 하늘을 견고하게 하시며 바다의 샘들을 힘 있게 하시며 29 바다의 한계를 정하여 물이 명령을 거스르지 못하게 하시며 또 땅의 기초를 정하실 때에
24절을 직역하면 “(옛적의) 깊음이 아직 없었을 때에 샘 곧 거대한 물이 아직 없었을 때에 내가 나타났다”가 된다. ‘바다’로 번역된 ‘테홈’(תהום)은 ‘(옛적의) 깊음’을 뜻하며, 창세기 1:2에서 창조를 통해서 지상에 질서가 도래하기 전 우주의 혼란스러운 상태를 묘사하는 표현과 유사하다. 즉 창조 이전의 물의 깊음, 혼돈은 지혜 이후의 첫 창조가 된다. 물론 ‘테홈’을 창세기 1:7에서 궁창 아래와 위로 물을 나누는 것, 바다의 조성으로 생각할 수도 있다.(예. 시 106:9)7 하지만 ‘바다’라는 번역을 의도적으로 따를 필요는 없다.8 이 구문은 창세기 1장(제사장적 개념, priestly ideology)의 창조 개념을 따르지 않으며(창조 리스트에 ‘깊음’이 포함된 것을 보면), 오히려 ‘테홈’은 지혜의 탄생 이후 첫 창조물이다. 잠언의 저자는 창세기의 창조기사와 다른 고대근동의 우주론 개념을 적용한 것으로 보인다.
25절은 산(하알)과 언덕(기브아)이 땅에 뿌리박고 이식이 되기 전에 지혜가 태어났다고 강조한다. ‘세워지다’라는 동사(타바)는 어딘가에 ‘뿌리를 내리다’로 해석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맥케인이 주장하듯이 ‘하나님의 산’이 어떤 신화적 함의를 의도한 것 같지는 않다.9 여기서는 24절의 ‘태어나다’를 반복적으로 사용하면서 지혜가 땅의 오래된 그 어떤 것보다 선재한다는 것을 강조한다. 욥의 친구인 엘리바스가 한 말은 잠언의 구절과 유사하다.10
네가 제일 먼저 난 사람이냐 산들이 있기 전에 네가 출생하였느냐(욥 15:7)
엘리바스가 욥에게 하는 비판의 요점은 욥이 하나님의 질서에 대해 부정적으로 말하는 것이 스스로를 창조적 지혜로 여기는 것과 같다는 데 있다. 이후 여호와는 욥기 38:6에서 욥을 향하여 땅의 기초가 세워진 것에 대한 지식을 알고 있느냐고 질문한다. “그것의 주추는 무엇 위에 세웠으며 그 모퉁잇돌을 누가 놓았느냐.”
26절은 계속해서 땅(대지)이 만들어지기 전의 상황에 대해서 말한다.(참조. 시 90:2) 그렇다면 “땅의 진흙 덩어리11의 근원”은 무엇을 의미할까? ‘근원’으로 번역된 ‘로쉬’는 시초 혹은 최상위를 의미한다. 첫째, 앞의 땅과 대지와 같이 ‘세계의 진흙의 시작’이므로 단순히 땅의 뭉쳐진 흙을 말할 수 있다.(Fox) 둘째, 인간에 의해서 경작된 토양을 함의할 수 있다.(Waltke) 셋째, 지혜를 가리킬 수 있다.(Toy, Meinhold) 여기서는 단순히 흙 덩어리를 함의한다고 볼 수 있다.
잠언 8:27-29은 창조주의 창조 활동 당시 지혜 자신이 이를 직접 목격했음을 증언한다. 창조주는 하늘과 바다(테홈)를 분리하고(사 40:22), 구름의 자리와 깊음의 물 근원을 힘이 있게 만들었다(27-28절, 욥 38:9, 시 89:7). 29절은 창조세계의 한계에 대한 주제를 다룬다. 바다의 무질서한 힘을 통제하면서 땅의 기반을 확정하는 것은 욥을 향한 여호와의 연설에서도 등장하는데,12 욥기에서는 무질서한 세상에서도 강력한 창조주의 힘을 이 표현을 통해 드러낸다.(욥 38:8-11) “네가 여기까지 오고 더 넘어가지 못하리니 네 높은 파도가 여기서 그칠지니라 하였노라.”(욥 38:11) 특히 29절의 ‘바다’(얌)를 신화적 존재로 본다면 본문은 바다를 통제하고 다스리는, 무질서와 하나님 간의 신적 전쟁의 주제로 생각할 수도 있다. 그것이 신화적 의미를 가지느냐와 상관없이 27-29절이 시사하는 바는 명확하다. 우주적 질서를 창조하는 것에는 지혜와의 교제가 있었다는 점이다. 지혜는 이 모든 과정을 목격했고, 잠언은 창조주 하나님의 창조 과정 가운데 지혜와의 관계성에 더 집중한다. 그 핵심은 “내가 거기 있었다”(27a)이며, 이어지는 30절의 “내가 그 곁에 있었다”와 대응된다.
8:30-31은 지혜의 기쁨의 본질에 대해서 서술하는데, 이 구문의 핵심은 즐거움이다.
30 내가 그 곁에 있어서 창조자가 되어 날마다 그의 기뻐하신 바가 되었으며 항상 그 앞에서 즐거워하였으며
31 사람이 거처할 땅에서 즐거워하며 인자들을 기뻐하였느니라
지혜와 여호와의 관계, 지혜와 인간의 관계가 순차적으로 서술된다. 여기에는 어떤 기쁨의 사이클이 감지된다. 지혜는 여호와의 기쁨을 유발하며, 여호와 앞에서 기쁨으로 충만하고, 피조세계에 거하면서 즐거움으로 충만하다.
하지만 개역개정 구문대로라면 지혜가 ‘창조주’가 되었다는 것인데, 어떻게 그럴 수 있다는 말인가? 본문은 여러 가지로 해석될 수 있다.13 첫째, 개역개정에서 ‘창조자’는 히브리어 아몬(남성명사)으로, 이는 예술가, 장인, 직공을 의미하지만 창조주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지혜는 창조의 시점에 여호와와 동행했으므로 창조의 작업에서 어떤 역할을 감당했을 것이며, 건축과 관련된 ‘장인’을 뜻할 수 있다.(렘 52:15, 아 7:2, 지 7:21, 13:1, Murphy) 둘째, ‘적절히 조화된’의 뜻으로 풀이되기도 한다.(LXX, Sy, Vg) 스콧은 이와 유사하게 ‘묶는’으로 해석한다. 셋째, 다른 헬라어 버전에서는 ‘젖먹이’, ‘아이’로 번역되기도 한다.(Aq; Baumann, Rüger) 지혜의 어린아이 같은 움직임을 뜻할 수 있고, 30절의 후반부에서 “즐거워하였으며”로 번역된 ‘메사헤케트’는 ‘춤춘다, 놀다, 즐거워한다’의 의미이므로 이 번역은 상당히 설득력이 있다. 넷째, 이 단어를 부정사로 보아 ‘성장하는’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Fox)14 다섯째, ‘법적 전문가’로 풀이하기도 한다.(Gaster) 여섯째, ‘아몬’은 여성명사 ‘지혜’가 아니라 ‘그’(하나님)를 직접적으로 꾸며줄 수도 있다.(Keel)
이 여섯 가지 중 ‘장인’을 함의하는 것에서 굳이 벗어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아몬은 지혜를 꾸며주는 보어적 기능으로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따라서 “내가 그 곁에 있어서 장인이 되었으며”로 번역된다.
여기서 우리는 기쁨의 첫째 사이클을 감지한다. 첫째, 지혜는 창조의 행위에 구체적으로 개입했으며, 창조는 둘 사이의 친교의 결과물처럼 그려진다. 둘째, 지혜가 매 순간 하나님의 ‘기쁨’(샤아슈임)의 근원이 된다고 말한다.(잠 8:30b, 참조. 렘 31:20) 여기서 ‘샤아슈임’은 어떤 갈망을 함의한다. 하나님의 기쁨의 근원이 지혜라면, 하나님 이외의 다른 어떤 더 나은 신적 본성이 지혜에 있다는 의미인가? 하지만 이미 8:22은 지혜가 여호와에 의해서 발생한 것임을 밝힌다. 여호와는 지혜를 통해 즐거움을 경험하고 있지만, 그 지혜는 하나의 신성의 관점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예레미야 31:20에서 여호와는 에브라임을 자신의 기뻐하는 아이라고 말한다. 또한 유대인들은 그의 기뻐하는 식물들이라고 말하기도 한다.(사 5:7) 이 본문들은 모두 하나님의 신적 기쁨이 되는 선택된 백성들에 대한 주제를 다룬다. 이에 반해서 시편 119편은 하나님의 말씀이 인간의 기쁨이 된다고 말한다.(24, 77, 92, 143, 174절)
셋째, 지혜는 모든 시간 속에서 스스로 하나님 앞과 세계 속에서 즐거워하고(사학) 있다.(30c, 31a절)15 여기서 ‘즐거워하다’(메사헤케트, 동사 ‘사학’의 피엘형)는 ‘놀다, 춤추다’의 의미를 가진다.16 (1) 지혜는 하나님 앞에서 뛰놀며 그에게 즐거움을 제공하는 어린아이와 같은 존재이면서, 동시에 스스로도 창조의 역사 속에서 뛰어놀면서 기뻐한다.(30c) (2) 지혜의 놀이는 피조세계 속에서 일어난다.(31a) 피조세계 속의 기쁨은 욥기 38:7에서 아침 별들과 하나님의 아들들의 즐거움에서도 나타난다.17 욥기 40-41장에서 나타난 베헤못과 리워야단 속 여호와의 즐거움은 인상적이다.(참조. 시 104:26, 31)
넷째, 지혜의 기쁨은 사람들에게서 발생한다. 즉 지혜는 세상에서 놀면서 인간들과 함께 기쁨을 누린다. 그 기쁨의 종결이 하나님께서 창조한 세계 속 인간이라는 사실은 시사점이 크다. 욥기의 마지막 부분에서 하나님의 기쁨의 근원은 인간이 아닌 리워야단이며, 인간이 이 피조물에 다가갈수록 공포스러운 상황이 발생하는 부분은 잠언 8장의 상황과 대조적이다.(욥 41:5)
정리하자면 지혜는 창조의 도구인 동시에 창조의 작업에서 여호와와 교제하였다.(8:30-31) 그 교제 속에서 창조주의 기쁨은 지혜였고, 지혜 또한 창조주 속에서 기뻐하였다. 이제 그 천상의 기쁨은 지상으로 내려온다. 세계 속 인간과 지혜의 관계는 기쁨으로 표상되며 인간의 존재는 지혜의 존재 속에서 발견된다. 창조의 시간에서 지혜와 하나님 간의 기쁨을 누리기 원한다면 그 기쁨은 오직 지혜 속에서 발견된다. 놀이를 통한 즐거움은 하나님의 창조의 가장 순수한 목적이다. 이 지혜를 로고스인 그리스도로 변주한다면, 인간의 기쁨은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될 수 있는 것이다.
결론: 지혜의 초대와 마지막 경고(8:32-36)
지혜는 이제 연설의 결론을 내린다.
32 아들들아 이제 내게 들으라 내 도를 지키는 자가 복이 있느니라
33 훈계를 들어서 지혜를 얻으라 그것을 버리지 말라
34 누구든지 내게 들으며 날마다 내 문 곁에서 기다리며 문설주 옆에서 기다리는 자는 복이 있나니
35 대저 나를 얻는 자는 생명을 얻고 여호와께 은총을 얻을 것임이니라
36a 그러나 나를 잃는 자는 자기의 영혼을 해하는 자라 36b 나를 미워하는 자는 사망을 사랑하느니라
지혜는 아들들에게 자신의 말, 자신의 길, 훈계를 듣고 지키고 기다려서 자신을 얻으라고 말한다. “아들들아 이제 내게 들으라”(8:32a)라는 구문은 앞선 부모의 가르침(레슨)에서 반복되었다.(5:7, 7:24) 여기서 지혜는 스스로를 선생님으로 여기고 앞선 구절을 인용하면서 지혜의 길을 지키는 자들은 “복되다”(8:32b, 참조. 3:13)라고 말한다. 이와 유사하게 역대하에서는 스바 여왕이 솔로몬 왕을 방문하여 그의 지혜로 인한 사람들의 축복에 대해 말한다. “복되도다 당신의 사람들이여, 복되도다 당신의 이 신하들이여, 항상 당신 앞에 서서 당신의 지혜를 들음이로다.”(대하 9:7) ‘복이 있다’라는 표현은 34절에서도 사용되며 ‘지혜의 집’의 모티브가 활용된다. 세 가지 동사 ‘듣다’(샤마), ‘관찰하다’(샤카드), ‘기다리다’(샤말)는 지혜의 집 밖에서 사랑을 갈구하는 인간의 모습을 그린다. 이는 지혜에 대한 에로틱한 갈망을 표현한다.18 이는 또 다른 지혜문서로 평가받는 아가서의 사랑의 노래와 유사성을 띤다.
지혜의 사랑을 얻은 결과는 여호와의 은총이다.(35절) 하지만 지혜를 얻는 것에 실패하거나 그녀를 미워하는 자는 자신을 파괴하는 자이며 사망을 사랑하는 자다.(36절) “복이 있느니라”라는 구문은 32b, 34c절에서 각기 반복되면서 35절의 ‘생명’과 ‘여호와 은총’으로 이끈다.
소결: 창조 지혜
그렇다면 왜 지혜를 가장 오래전 고대에 만들어진 창조물로서 강조할까?(8:22-36) 왜 세상의 모든 것들 가운데 창조된 객체로서 지혜의 특성을 알아야 하는가? 그 이유는 가장 오래된 것이 가장 지혜롭다는 고대의 믿음이 이곳에 투영되어 있기 때문이다.
시간의 거대한 강을 거슬러 가장 오래된 경험, 가장 오래된 지식과 사상, 인류의 가장 내밀한 비밀을 모두 알고 있는 존재가 있다고 생각해 보자. 그런 존재가 옆에 있다면 당신은 그에게 어떤 질문을 하겠는가? 세계가 만들어진 순간부터 지금까지 세계의 모든 것을 듣고 보고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존재했던 그녀는 바로 ‘호크마’, 곧 지혜이다. 피조세계 그 이전에 존재한 최초의 피조물이며 창조주와 함께 창조의 시작부터 과정에 참여한 존재이자, 여호와와의 친밀한 사랑과 인간과의 교제 속에서 무한한 기쁨을 가졌던 그녀를 우리는 사랑하고 칭송하지 않을 수 없다.
독자의 마음을 뒤흔드는 아름다운 시(8:22-31)의 하이라이트는 사랑의 언어다.(30-31절) 여호와 창조주와 지혜(호크마)의 연인 같은 교제를 보자. 호크마는 창조주에게 날마다 기쁨 그 자체가 되며, 호크마도 피조세계 속에서 그로 인하여 기뻐한다. 그녀는 피조세계 전체에서 이제 무한히 기뻐한다. 한마디로 기쁨을 위해서 존재한다. 기쁨을 주며, 스스로 기뻐하며, 기쁨이 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인간들을 기뻐한다.
창조 속 기쁨의 이러한 순환 과정은 사람의 존재 이유를 알려준다. 인간이 존재하는 이유는 창조의 질서 속에서 끊임없이 피조세계에서 기뻐하고 기쁨이 되는 것이다. 그 중심에 지혜가 있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시인은 우리를 초대한다. 지혜를 얻어야 한다. 무슨 일이 있어도 그녀를 소유해야 한다. 그것이 여호와의 은혜를 얻는 길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유일한 길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어떻게 기뻐할 수 있는가? 하나님께 기쁨의 근원이 지혜였다면, 인간에게 지혜는 과연 얼마나 필요할 것인가? 이 지점에서 기독 지혜론이 필요하다. 바울신학의 상당 부분은 잠언 8장의 지혜와 연관된다. 골로새서 1:15-20은 예수를 하나님의 보이지 않는 형상이며 모든 피조물보다 먼저 태어난 존재라고 정의한다.(골 1:15) 그리스도는 세계의 중심이시며 만물보다 선재하셨고 만물은 그 속에서 함께 존재한다.(골 1:16) 그리고 마침내 부활을 통해 만물의 으뜸이 되셨다.(골 1:17) 창조의 역사 속에서 인간 존재를 진정으로 만족시켜 주는 것은 허상으로 만들어진 자본이 아니라 그리스도와 교제 속에서 누리는 기쁨이라는 사실을 잠언은 알려준다.
주(註)
1 Guy Debord, La Société Du Spectacle (Paris: Buchet-Chastel, 1967).
2 Roland E. Murphy, Proverbs, WBC 22 (Nashville: Nelson, 1998), 47, 52; Bruce K. Waltke, The Book of Proverbs: Chapters 1-15, NICOT (Grand Rapids: Eerdmans, 2004), 409.
3 Roger N. Whybray, Proverbs, NCBC (Grand Rapids: Eerdmans, 1994), 130.
4 Michael V. Fox, Proverbs 1-9, AB 18A (New York: Doubleday, 2000), 280.
5 William McKane, Proverbs: A New Approach (London: SCM, 1970), 354-356; Luis I. J. Stadelmann, The Hebrew Conception of the World: A Philological and Literary Study (Rome: Pontifical Biblical Institute, 1970); Othmar Keel, Die Weisheit spielt vor Gott: ein ikonographischer Beitrag zur Deutung des Mesaḥäqät in Spr 8,30f. (Göttingen: Vandenhoeck und Ruprecht, 1974); Izak Cornelius, “The Visual Representation of the World in the Ancient East and the Hebrew Bible,” JNSL 20 (1994): 193-218.
6 Whybray, “Proverbs 8:22-31 and Its Supposed Prototypes,” VT 15, no. 4 (1965): 504-514.
7 Whybray, Proverbs, 132.
8 Fox, 앞의 책, 282.
9 맥케인은 겔 28:2 이하와의 연결 가능성에 대해 지적하기도 한다. McKane, 앞의 책, 356.
10 Raymond C. Van Leeuwen, “Proverbs,” In Proverbs-Sirach, 17-264, NIB, V (Nashville: Abingdon, 1994), 93.
11 “진흙”은 “아프롯”인데 이 단어는 아팔의 복수형으로서 흙 덩어리를 말한다.
12 rndt Meinhold, Sprüche Kapitel 1-15, Zurcher Bibelkommentare: AT, 16.1 (Zürich: TVZ, 1991), 146; Fox, 앞의 책, 285.
13 R. B. Y. Scott, “Wisdom in Creation?: The ’Āmôn of Proverbs Viii 30,” VT 10, no. 1 (1960): 213-223; Van Leeuwen, 앞의 책.
14 Michael V. Fox, “Amon Again,” JBL 115 (1996): 699-702.
15 30b-c절과 31a-b절은 각각 교차대구법(chiastic structure)을 가진다. 동사 ‘샤아슈임’과 ‘메사헤케트’는 반복해서 등장한다. Richard J. Clifford, Proverbs: A Commentary, OTL (Louisville: Westminster John Knox, 1999), 97.
16 Keel, 앞의 책.
17 Murphy, 앞의 책, 53.
18 Fox, The Song of Songs and the Ancient Egyptian Love Songs (Madison: University of Wisconsin Press, 1985).
권지성|영국 더럼대학교에서 구약학을 전공하여 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스위스 취리히대학교와 로잔대학교에서 연구교수로 히브리 성서 및 제2성전기 문헌을 연구하였다. 저서로 Scribal Culture, 『특강 욥기』, 『특강 전도서』 등이 있다. 현재 기독연구원 느헤미야에서 전임연구위원으로 일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