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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me > 기독교사상 > 성서와설교 > [바울의 칭의론을 통해 사유하는 ‘그리스도인의 자유’ 03]
성서와설교 (2022년 8월호)

 

  불트만의 실존주의적 성서해석에서 그리스도인의 자유: 고립된 자아의 근원적 불안으로부터의 자유
  

본문

 

루돌프 불트만(Rudolf Bultmann)의 바울신학: 현대화된 루터주의

지난 글에서는 그동안 기독교의 영원한 진리를 담은 교리서로만 보던 마르틴 루터의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16세기에 그것이 쓰인 역사적 상황과 연결지어 살펴보았다. 이 책을 루터와 교황청의 대립 관계 위에 위치시키자, 루터의 비판이 율법을 매개로 부패한 교회법을 향하고 있음이 드러났다. 루터가 율법을 벗어난 그리스도인의 내적 자유를 강조한 것은 교회법을 통해 외적 자유를 확대하려는 교황청에 대한 우회적 비판이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정교분리를 가져왔다고 여겨지는 루터야말로 자신의 신앙에 입각하여 누구보다 적극적으로 정치적 행동에 나섰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농민전쟁의 맥락에서 자신이 내세운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농민 억압의 도구로 사용했다는 점에서 그의 정치적 보수성 또한 드러났다고 말할 수 있다. 그의 이러한 양면성은 루터 개인을 오랫동안 괴롭혔던 죄의식의 문제, 시대의 아들로서 그가 지닌 반유대적 정서, 그리고 세상의 나라와 하나님 나라를 구분하는 두 왕국론과 결합되었고, 그 결과 루터의 전체 사상에서 ‘율법으로부터의 자유’는 인간에게 죄의식을 가져오는 율법으로부터의 자유를 의미하게 되었고, ‘자유와 섬김의 관계’는 세속권세에 대한 무조건적 복종을 주장하는 이데올로기적 성격을 띠게 되었다.
문제는 이 과정에서 바울이 ‘율법으로부터의 자유’, ‘자유와 섬김의 관계’에 대해 말했던 상황성과 역사성이 제거되고, 반유대주의자 혹은 친제국주의자라는 오명을 쓰게 되었다는 점이다. 그리고 이것은 루터로부터 무려 4세기가 지난 20세기 불트만의 실존주의적 성서해석, 특히 그의 바울신학에까지 이어진다. 이제 불트만의 바울신학이 실존주의적 성서해석을 통해 루터주의를 어떻게 현대화했는지, 여기서 율법과 자유는 어떻게 이해되고 있으며, 당시 세계사적 상황과 관련하여 어떤 의의를 지니는지 탐구하려고 한다.

실존주의적 성서해석에서 그리스도인의 자유: 고립된 자아의 근원적 불안으로부터의 자유

“하느님의 말씀이 인간을 그의 인격적 실존으로 부르며, 그럼으로써 그에게 자유를 선사한다.”1라는 선언이 보여주는 것처럼, 불트만에게 자유는 구원과 동의어이다. 실제로 그는 자유 개념이 “바울에게서 결정적인 역할을 담당한다.”고 진술한다.2 이는 그가 “바울”이라는 논문에서 자유를 “실존의 새로운 종말론적 양태”로 규정하고 상술한 데서,3 『신약성서신학』 바울신학 편에서 바울의 자유를 신앙 혹은 구원의 실질적 내용으로 보고 독립된 장으로 다루는 데서도 분명하게 나타난다.4 더욱이 두 글 모두에서 자유는 앞서 전개된 바울신학 전체를 수렴하는 주제로 일종의 결론부를 구성하는데, 이 역시 불트만이 자유를 바울신학의 정점으로 보았음을 시사한다. 사실, 실존주의 자체가 개인의 자유와 결단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이는 당연한 결론이다.5
불트만은 바울의 신학을 크게 ‘신앙의 계시 이전 인간’과 ‘신앙 하의 인간’으로 구분하여 전개한다. 여기서 ‘신앙’은 루터의 ‘오직 신앙’(sola fide), 즉 이신칭의를 연상시키며, ‘인간’은 “신학은 곧 인간학”6이라고 주장하는 실존주의적 성서해석을 연상시킨다. 이것은 루터주의의 이신칭의 구조에 입각하여 이를 실존주의적으로 해석하려는 불트만의 의도를 시사한다.
사실, 인간의 실존을 신앙 전후로 구분하는 것 자체가 루터적이다. 바울의 자유가 ‘신앙으로 의로워진 인간의 새로운 실존의 종말론적 양태’로 서술될 수 있는 것은 바로 이와 같은 루터주의적-실존주의적 성서해석 방법에 기인하다. 그렇다면 이러한 불트만의 해석학에 비추어 바울의 자유는 구체적으로 어떻게 해석되고 있는가?
불트만은 바울의 도식에 따라 자유를 크게 세 개의 범주, 즉 죄로부터의 자유, 율법으로부터의 자유, 죽음으로부터의 자유로 구분하여 서술하고 있다.7 따라서 바울의 자유 개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선 신앙 이전의 인간을 구속하는 죄와 죽음 그리고 율법의 실존적 의미를 규명해야 한다.8 그에 따르면, 인간은 하느님의 피조물로서 그분에게서 모든 것을 받은 존재이다. 그러한 인간이 하느님을 창조주로 인정하지 않고 자신의 힘으로 세계, 즉 마음대로 이용할 수 있는 대상을 통해 생의 안전을 추구할 때 그것은 죄가 된다. 그리고 이처럼 지상적이고 자연적인 것, 즉 “무상성(無常性)에서 삶의 근원을 찾는 자는 무상한 것 자체의 파멸과 함께 반드시 망한다.”9 이것이 죽음의 의미이다.
불트만은 이와 같이 인간의 “자기 존재에 대한 잘못된 이해”10, “자주적 태도”11 및 “자기신뢰”12로서의 죄의 이면에는 “자기를 위해 스스로 염려하는 불안이 있다”13고 보았다. 그에 따르면, “‘염려하다’는 미래에 직면하여 근심하는 불안을 뜻하는바, 대비적 염려(여기서도 물론 불안은 언제나 근저에 남아 있다)로서, 자주적으로 미래를 포박하고 미래에 대해 자신을 확보하거나 현재의 것을 미래에 지속시키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다. ‘세상 일들을 위한 염려’(고전 7:32 이하)는 세상의 이용성 있는 것으로 생을 안정시킬 수 있다는 망상에 근거를 두고 있는 것이다.”14
이러한 근원적 불안 속에서 생의 안전과 안정을 추구하는 인간은 두 가지 삶의 양상을 보인다. 하나가 “반성되지 않은 경솔”(특별히 이방인에게서 그렇다)로 나타난다면, 다른 하나는 “번성된 업적욕”(특별히 유대인들에게 그렇다)으로 나타난다. 전자가 “윤리적 요구들에 대한 멸시”로 나타난다면 후자는 그에 대한 “과장 또는 그것을 실천하려는 열심”으로 나타난다.15 율법은 바로 이 지점에서 등장하는데 전자가 율법을 멸시하는 태도라면, 후자는 보상사상에 근거하여 율법을 형식적으로 준수하는 태도를 의미한다. 불트만이 보기에 바울이 유대교와 분리되는 지점은 “율법의 정력적 실천”16에 대한 비판에 있다. 보상심리에 근거한 선행은 “윤리적 행위의 동기를 부패케 하는 결과를 초래”17한다는 것이다. 결국, 불트만의 바울신학에서 죄와 죽음 그리고 율법은 하느님의 피조물임을 부정하는 인간의 거짓된 실존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자유는 한마디로 잘못된 자기이해로부터의 해방을 의미한다. 불트만은 이를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

신의 “은혜”에 대한 신앙의 순종적 복종,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받아들임은, “스스로” 살고 스스로의 힘으로 생명을 얻으려는, 그러나 그렇게 함으로 죄와 사망의 세력들 중에 빠져서 자기 자신을 상실하는 인간의 옛 자기이해를 포기하는 것이었다. 그 까닭에 그것은 “믿음의 순종”으로서 동시에 이 세력들로부터의 해방이다. “믿음”과 함께 선사되는 새로운 자기이해는, 믿는 자가 “생명”과 동시에 자기 자신을 얻는 자유의 새로운 이해이다.
자유는 바로, 믿는 자가 “대속으로 빼낸 자”로서 이미 자기 자신의 것이 아니라는 것(고전 6:19), 그는 자신의 생명, 자기 자신을 이미 자신의 염려의 대상으로 삼지 않고 이 염려를 버리므로 자신을 철두철미 은혜에 맡기고 자신을 신 내지 “주”의 소유로 알면서 그를 위해 산다는 사실에서 자란다.18


이처럼 불트만에게 바울의 자유는 자신의 피조성을 망각한 고립된 자아의 근원적 불안으로부터의 자유, 자신을 철두철미 하느님의 은혜에 내맡김으로써 미래에 직면하여 아무런 두려움 없이 결단할 자유를 의미한다. 여기서 자유는 본질적으로 하느님에 대한 순종을 통해 역설적으로 자기 삶의 주체가 된 인간 실존의 상태를 뜻하지만, 보상심리에 근거하지 않은 자발적 선행이 가능해진다고 본다는 점에서 윤리적 성격을 내포한다. 이것은 불트만이 바울의 자유를 논하면서 이를 구원의 직설법과 명령법 그리고 사랑과 연결한 데서도 잘 알 수 있다. 신앙을 통해 죄와 죽음, 율법의 저주에서 구원받은 인간만이 비로소 하느님의 명령이자 율법의 참 정신인 이웃사랑을 실천할 수 있다는 것이다.

바울의 ‘자유’에 대한 실존주의적 성서해석의 시대적 의의와 한계

실존주의적 성서해석은, 두 차례에 걸친 세계대전으로 인해 근대 이후 이성과 합리성에 대한 믿음이 산산이 부서지고 야만과 광기, 폭력이 전면에 등장한 상황에서, 인간 내면의 악의 뿌리를 파헤치는 동시에 윤리적 희망을 되찾으려는 기독교적 고뇌의 산물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불트만이 이해한 바울의 자유는 개인으로 하여금 하느님과의 인격적 만남 속에서 미래를 어떻게 살 것인가 끊임없이 결단하게 만든다는 점에서, 그리고 특히 자신이 처한 그때그때의 상황에서 윤리적 결단을 피해갈 수 없게 만든다는 점에서 내세사상에 근거한 순응주의와는 거리가 멀다.
그러나 불트만이 분명하게 밝힌 것처럼 그의 일차적 관심은 개인의 “내면적인 자유”20에 있다. 그리고 이 개인을 구속하는 것은 시대의 고통이나 아픔이 아니라 역사를 초월한 자아의 근원적 불안이다. 불트만에게서 바울의 자유가 분명하게 실천적 윤리와 연결됨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적극적인 사회·정치적 윤리로 발전하기 어려운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실존주의적 성서해석에서는 죄와 악이 사회적 구조가 아닌 불안의 형태로 개인의 내면에 깃들어 있기 때문에 개혁의 일차적 대상이 사회가 아니라 개인이 된다.
바울의 묵시적 종말론의 진술을 비신화화함으로써 거기에 담긴 급진적인 정치적 함의를 탈락시키고 모두 개인의 자아에 대한 진술로 환원시킨 것도 이러한 방식의 자유 및 윤리 이해가 도출되는 데 한몫했다. 비신화화라는 필터를 거치고 나면 세계에 대한 하느님의 계시는 사라지고 미래에 대한 전망과 목표는 오직 개인의 실존 영역에서만 일어난다.21
불트만이 제시한 바울의 자유 개념과 윤리가 세계와 역사와의 접점을 쉽게 놓칠 수 있다는 사실을 위르겐 몰트만(Jürgen Moltmann)은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불트만이 이해한) 신앙은 주체가 하느님으로부터 받는 선물이다. 신앙은 주체를 철저한 고독 속으로 인도하며 그를 ‘개별자’로 만든다. 신앙은 조직화된 사회의 한복판에서 그를 탈세계화한다. 신앙은 인간에게 “어둠과 수수께끼 속에서 단호히 전진하고 결단의 고독 속에서 행위의 책임을 과감하게 짊어질 수 있는” 자유를 선사한다. 그렇게 되면, 실존주의의 전형적 특징인 “대상 세계 앞의 무력감” 속에서 그리스도인의 윤리는 자아 수용과 세계 일반의 책임을 위한 “윤리적 요구”로 축소된다. 하지만 그것은 더 이상 정치적, 사회적 생활을 위해 실제적인 윤리의 지침들을 제공할 수가 없게 된다. 이리하여 그리스도인의 사랑은 법과 사회질서로부터 떠나 버린다. 그것은 자발적인 우정 속에서, 사물을 통해 매개되지 않는 직접적인 너와 나의 관계 속에서 언제나 사건이 된다. 만약 사랑이 이처럼 공허한 것으로 변하면, 법과 사회질서와 정치적 정의는 실증주의적으로 단순한 조직으로, 권력과 법률로 이해될 수밖에 없다. 그렇게 되면, 그리스도인이 사랑해야 할 ‘이웃’은 언제나 만나는 사람, 독자적으로 살아가는 이웃이다. 하지만 그는 그의 법적 인격과 사회적 역할 안에서는 더 이상 인식되고 존중되고 사랑받을 수 없다. ‘이웃’은 단지 인격적 만남 속에서만 나타날 뿐, 그의 사회적 실제 속에서는 나타나지 않는다. 그렇다면 문 앞에 서 있고 손에 닿을 수 있는 자가 이웃이다. 하지만 사회적, 법적 질서, 개발 원조와 인종 문제, 사회적 직업과 역할과 권리 가운데서 만나는 사람은 이웃이 아니다.22

불트만은 바울을 통해 율법으로부터의 자유에서 섬김의 자유로 나아갔지만, 그가 말한 이웃사랑의 가치는 가정 및 이웃과 같은 기초적 차원에서 발생하는 문제와는 다른 세계적이고 시대적인 복잡한 정치문제를 다루는 데에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 결국, 불트만은 정치와 종교가 구분된 세계 속에서 하느님의 왕국에서만 이웃사랑이 실천될 수 있다고 보았던 루터의 그늘로부터 크게 벗어나지 못한다.
바울의 자유 개념과 관련해서 불트만의 율법관 역시 루터의 영향을 비껴가지 못했다. 루터주의의 계승자로서 불트만은 바울이 ‘공로-의’와 ‘신앙-의’의 구조 안에서 인간의 실존을 이해했다고 보았고, 여기서 유대교는 율법의 공로를 통해 스스로 의로워지려는 종교로 이해된다.23 불트만 자신은 나치 치하에서 독일을 지배했던 국가사회주의에 내재한 반유대주의를 신랄하게 비판했지만,24 이러한 그의 개인적 정치활동과 별개로 그의 유대교 해석은 율법주의에 머물러 있다.
불트만이 제시한 바울의 자유 개념은 하느님과의 인격적 만남 속에서 인간을 자유로운 주체로 세운다는 장점을 지니지만 다음과 같은 한계에 직면해 있다. 첫째, 불트만은 개인의 내적 자유에 초점을 맞춤으로써 개인의 형식적 윤리에서 공동체의 정치적 윤리로 나아가지 못했다. 이는 그가 제시한 바울의 자유 개념이 윤리적 토대로서 허약하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둘째, 비신화화마저 바울-루터의 칭의론과 평행한다는 불트만 자신의 진술에서 알 수 있듯이25 그는 유대교를 율법주의적 종교로 해석함으로써 여전히 루터의 반유대주의적 태도를 보여준다. 말하자면, 불트만의 실존주의적 성서해석의 장에는 실존주의의 본질상 개인만이 들어오며 세계와 역사가 들어설 자리는 없다. 묵시적 종말론이 개인 내면의 갈등에 대한 고대적 표현으로 비신화화되어야 했던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된다. 고대의 신화적 언어를 근대인이 이해 가능한 언어로 번역하는 것은 정당하지만, 불트만의 문제는 그 과정에서 묵시적 종말론이 지닌 정치적 성격 자체를 제거했다는 데 있다. 그 결과 실존주의적 성서해석에서 세계대전으로 상징되는 근대 세계의 악마성의 구조적 측면은 비판 대상에서 제외되었으며, 홀로코스트라는 끔찍한 역사적 사실 앞에서도 유대교는 여전히 율법주의적 종교로 남았다.
실존주의적 성서해석도 바울에게서 반유대주의자, 친제국주의자의 혐의를 벗기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그러나 불트만 이후 전통적인 바울신학에 내재한 반유대주의는 ‘바울에 관한 새 관점’을 통해, 비정치적 성격은 바울에 대한 사회·정치적 해석을 통해 극복된다. 그렇다면 다음 글에서는 ‘바울에 관한 새 관점’의 등장 이후 율법에 대한 해석의 패러다임 전환 및 바울의 자유 개념 해석의 변화를 살펴보겠다.

주(註)
1 Rudolf Bultmann, Jesus Christ and Mythology (New York: Charles Scriber’s Sons, 1958), 40.//루돌프 불트만, 허혁 옮김, “예수 그리스도와 신화”, 『학문과 실존 제3권』(성광문화사, 1981), 233.
2 루돌프 불트만, “그리이스-로마 고전과 그리스도 선포에 의한 자유의 사상”, 『학문과 실존 제3권』, 262.
3 Rudolf Bultmann, “Paulus,” Religion in Geschichte und Gegenwart, vol.4, 2nd ed. (Tübingen: J. C. B. Mohr, 1930), 1019-1045.//루돌프 불트만, 소기천 옮김, “바울”, 「신약논단」 10권 3호(2003): 723-771.
4 R. 불트만, 허혁 옮김, 『신약성서신학』, 개정 제6판(성광문화사, 2008), 336-361.
5 바울을 확대하여 전체 신약성서와의 관련성 속에서 바울의 신학을 다룬 책이 『신약성서신학』이므로 여기서는 이 책을 중심으로 논의를 전개하려고 한다.
6 불트만은 바울신학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바울의 신학은 … 신의 본질 자체를 다루지 않고 오로지 신이 인간과 그의 책임, 그의 구원을 위해 중요한 만큼 신을 다룬다. 마찬가지로 그것은 세계와 인간도 그것들이 있는 대로를 독립적으로 다루지 않는다. 오히려 그 신학은 항상 신과의 관련에서 세계와 인간을 본다. 신에 관한 명제는 모두 동시에 인간에 관한 것이고 인간에 관한 것은 모두 신에 관한 것이다. 그 까닭에 그리고 그런 의미에서 바울의 신학은 동시에 인간학이다.” 불트만, 『신약성서신학』, 186.
7 죄, 율법, 죽음 사이의 긴밀한 관계 그리고 이 세 개념과 자유와의 긴밀한 관계는 바울의 다음 두 선언에서 분명하게 드러난다. “사망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네가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이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고전 15:55-56)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롬 8:2); 논문 “바울”에서는 이 세 범주의 자유에 “사람들과 그들의 척도로부터의 자유”가 추가되어 있는데, 『신약성서신학』에서 이 자유는 바울서신의 인간학적 개념인 사유와 양심을 분석하는 가운데 부차적으로 서술되어 있다. 참조. 불트만, “바울”, 768; 불트만, 『신약성서신학』, 215-216.
8 이하의 내용은 참조. 불트만, 『신약성서신학』, 223-269.
9 앞 글, 245.
10 앞 글, 264.
11 앞 글, 240.
12 앞 글, 237.
13 앞 글, 241.
14 앞 글, 240.
15 앞 글, 237.
16 앞 글, 238.
17 앞 글, 9.
18 앞 글, 337.
19 참조. 앞 글, 336-361.
20 루돌프 불트만, “그리이스-로마 고전과 그리스도 선포에 의한 자유의 사상”, 『학문과 실존 제3권』, 269.
21 불트만의 실존주의적 성서해석에 따르면, 인간의 존재 양식은 시공간을 초월하여 동일하다. 그러나 성서의 언어는 1세기의 세계관에 큰 영향을 받고 있다. 이를테면, 성서에서 우주는 하늘과 땅, 지옥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그 안에서 하나님과 천사들이라는 선한 세력과 사탄과 그의 군대라는 악한 세력이 전쟁을 벌이고 있다. 인간은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악의 세력에 사로잡히기도 하면서 둘 사이에 놓여 있다. 이것은 신화적 용어로 근대 이후 더 이상 통용될 수 없으며, 따라서 근대인이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해석되어야 한다. 이를테면 양 신적 세력의 갈등은 개인 내면의 갈등으로 이해될 수 있다. 이것이 불트만이 말하는 비신화화이다. 이에 대해서는 참조. 데이비드 퍼거슨, 전성용 옮김, 『불트만』(대한기독교서회, 2001), 173-200.
22 위르겐 몰트만, 전경연·박봉랑 옮김, 『희망의 신학』(대한기독교서회, 2014), 338-339.
23 불트만, 『신약성서신학』, 238.
24 Rudolf Bultmann, “The Task of Theology in the Present Situation,” Existence and Faith(shorter Writings of Rudolf Bultmann), ed. by S. Ogden (London: Fontana Library, 1964), 186-195.
25 “실제로, 극단적인 비신화화는 율법의 행함이 없이 오직 신앙으로만 의로워진다는 바울-루터의 칭의론과 평행한다. 더 나아가서 이것은 칭의 교리를 지식의 장에 일관되게 적용한 것이다. 칭의론과 마찬가지로 비신화화는 그것이 우리의 어떤 선행이나 어떤 지식에 근거하든지 간에, 모든 그릇된 보장과 보장에 대한 모든 그릇된 요구들을 파괴한다.” Bultmann, “On the Problem of Demythologizing,” New Testament Mythology and Other Basic Writings, ed. and trans. by Schubert M. Ogden (Philadelphia: Fortress Press, 1984), 122.


장양미|이화여자대학교 사회학과를 졸업한 후 동 대학원 기독교학과에서 신약성서신학을 전공하여 석박사학위를 받았다. 역서로 『풍성한 생명』(공역) 등이 있다.

 
 
 

2022년 8월호(통권 76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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