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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와설교 (2022년 8월호)

 

  노아가 세상을 구원하였다? 방주와 무지개의 의미
  

본문

 

창세기의 ‘노아의 홍수 이야기’(6:5-9:17)로 말하자면, 일반적으로 다음의 세 가지 내용을 주된 메시지로 이해하는 것 같다. (1) 노아가 세상을 구원하였다. (2) 노아가 사람들에게 앞으로 닥칠 홍수에 대해 경고했지만, 사람들은 그의 말을 무시하였다. (3) 노아 홍수 때에는 노아의 방주에만 구원이 있었다. ‘방주교회’라는 교회 이름이나 방주 형태의 교회 건축물은 이러한 이해의 산물일 것이다. 그런데 과연 노아의 방주를 교회의 상징으로 볼 수 있을까?
홍수 이후 하나님은 노아와 함께 방주에 있던 생명들과 언약을 맺으신다. 그리고 그 징표로 구름 속에 무지개를 두신다. 홍수가 시작하면서 노아의 방주가 있었다면, 그 홍수의 끝에는 하나님의 무지개가 있다. 노아의 방주와 하나님의 무지개는 홍수 이야기에서 둘 다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지만, 하나님의 무지개는 그다지 우리의 주목을 받지 못하는 듯하다. 이 글에서는 방주와 무지개의 의미를 살펴보며 노아의 홍수 이야기가 오늘날 교회와 기독교인에게 갖는 의미에 대해 생각해보려 한다.

하나님의 후회

하나님이 태초에 세상을 창조하시고 그 지으신 모든 것을 보셨을 때 참 좋았다.(1:31) 그리고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1:28)라는 복을 내리셨다. 그 결과 사람이 땅 위에 번성하기 시작했다.(6:1) 하나님이 세상을 다시 보시니, 그렇게 좋았던 세상(땅)은 부패하고 인간의 포악함으로 가득 차 있었다.(6:5, 12) 한마디로 피 흘림과 폭력과 억압이 난무하는 무법천지였다. 사람들이 마음에 생각하고 계획하는 모든 것이 악함(6:5)을 보시고서 하나님의 마음은 찢어졌고, 급기야 사람을 만드신 일을 후회하셨다.(6:6) 결국 하나님은 홍수를 일으켜 손수 창조하신 세상을 지면에서 다 쓸어버리기로 결정하신다.(6:7, 7:23) 그런 다음 그 결정을 노아에게 알리신다.(6:13, 17)1
그런데 모든 생명을 홍수로 멸할 것이라는 하나님의 계획을 들은 노아의 반응이 이례적이다. 창세기를 조금 더 읽어보면 하나님은 소돔과 고모라를 멸하기로 결정하시고 그 비밀을 아브라함에게 숨기지 않으시는데(18:17-18), 이때 아브라함은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 “의인을 악인과 함께 죽이는 것은 부당”하다고 항변하며 세상의 재판관이신 하나님은 공정해야 하지 않느냐고 따져 묻는다. 아브라함은 이에 그치지 않고 의인의 수를 50명에서 45명, 30명, 20명, 10명까지 낮춰가며 할 수 있는 한 하나님의 마음을 돌려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을 막거나 늦추려고 노력한다. 모세도 그렇다. 이집트 종살이에서 해방된 이스라엘 백성은 시내산에서 하나님과 언약을 맺자마자, 소위 언약서의 잉크가 마르기도 전에 금송아지를 만들어 언약을 파기한다. 이에 진노하신 하나님은 모세에게 “그들을 진멸하고 너를 큰 나라가 되게 하리라”(출 32:10) 하고 말씀하신다. 그러자 모세는 “그들의 죄를 사하시옵소서 그렇지 아니하시오면 원하건대 주께서 기록하신 책에서 내 이름을 지워 버려 주옵소서”(32:31-32)라며 용서를 간청한다.
그런데 노아는 어떻게 반응했는가? 노아는 의인이요, 당대에 완전한 자요, 하나님과 동행한 사람이다.(창 6:9) 이 세상에 의로운 사람이라고는 노아밖에 없다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실 정도였다.(7:1) 그런데 노아는 7일 후부터 홍수를 내려 모든 생물을 지면에서 쓸어버리겠다는 하나님의 비밀스런 계획(7:4)을 듣고도 아브라함이나 모세처럼 하나님의 뜻에 반대하거나 따져 묻지 않았으며, 그렇게 하지 마시라고 종용하지도 않는다. 하나님으로부터 유일하게 ‘재난문자’를 받고도 세상 사람들을 향해 ‘곧 홍수가 날 것이니 빨리 방주를 만들어 준비하라.’고 하거나, 자기와 자기 가족이 방주로 들어갈 때 사람들에게 ‘같이 이 방주에 들어가자.’고 설득하지도 않는다.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은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있었는데도(마 24:38-39, 눅 17:27) 노아는 방주만 만들 뿐이었다. 자신은 하나님의 은혜를 입었으면서도 다른 사람이 하나님의 은혜를 입도록 전도하지 않았다. 간단히 말해 노아는 선교하지 않았던 것이다. 왜 그랬을까?
성서는 노아의 순종을 강조한다. 노아는 “하나님이 자기에게 명하신 대로 다 준행하였다.”(창 6:22, 7:5) 방주와 관련하여 하나님이 노아에게 하신 말씀을 자세히 살펴보며, 그 이유를 생각해보자.

방주

하나님은 노아에게 고페르 나무로 ‘테바’(תֵּבָה)를 만들라고 하신다.(6:14) 히브리어 ‘테바’는 ‘상자’를 가리키는 이집트어 차용어로서 구약성서에서 모세를 담은 상자(출 2:3)를 가리킬 때 한 번 더 쓰인다.2 그러나 노아가 만들어야 할 상자는 그 길이가 300규빗, 너비가 50규빗, 높이가 30규빗으로 모세의 상자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규모가 대단하다. 1규빗(히브리어 ‘암마’)을 45cm로 환산하면, 135×23×13m에 이르는 대형 컨테이너이다.3 돛이나 닻이나 노나 키를 갖춘 배가 아니라, 홍수가 나면 저절로 땅에서 떠올라 물 위에 떠다니므로 ‘방주’(方舟)라 불린다.
그런데 하나님은 왜 이런 대형 컨테이너를 건축하라고 지시한 것일까? 방주 승선 명령을 보면 그 이유를 알 수 있다. 방주는 노아와 그의 가족 여덟 명만이 아니라 암수 한 쌍 또는 일곱 쌍의 “혈육 있는 모든 생물”이 홍수를 피해 들어갈 공간이다.(6:18-20, 7:1-3) 게다가 방주에는 이들이 그곳에서 살 동안 먹을 양식을 들여놓을 수 있어야 한다.(6:21) 하나님의 심판을 피해 1년이라는 긴 홍수 기간(7:11, 8:13)을 방주에서 버티며 생존하려면 당연히 식량이 필요하다.
하나님께서 지시하신 대로 노아와 그의 가족, 짐승과 새와 땅에 기는 모든 생물이 암수 둘씩 방주로 들어가자 하나님은 방주의 문을 닫으신다.(7:7-9, 13-16) 이후 “큰 깊음의 샘들이 터지며 하늘의 창문들이 열려” 40일 주야로 비가 땅에 쏟아진다. 하나님께서 가두어 두셨던 물의 경계를 터뜨리신 것이다.(1:7-10, 시 33:7, 93:3-4, 104:6-9) 높은 산들이 물에 다 잠기고, 육지에 있던 모든 생물이 다 죽는다.(7:10-12, 17-20) 이렇게 하나님은 사람과 가축과 기는 것과 공중의 새에 이르기까지 지면의 모든 생물을 다 쓸어버리신다. 이때 노아와 함께 방주에 있던 생명들은 방주 덕분에 생존할 수 있었다.(7:21-23) 그러니까 방주는 홍수를 피하게 해준 피난처와 같은 곳이었으며, 노아는 하나님의 세상 심판에서 방주 덕분에 살아남은 ‘생존자’였지 결코 세상을 구한 ‘구원자’가 아니었던 것이다.4 노아는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사람이었다.(6:8)

재창조

그러면 노아의 방주는 단지 노아와 그와 함께 방주에 있던 생명들의 생존만을 위한 공간이었을까? 방주는 그 이상의 의미를 담고 있다. 노아의 방주 안으로 들어가 보자.
노아가 하나님께 순종한 결과, 방주 안에는 노아와 그의 가족, 그리고 정한 짐승 및 부정한 짐승을 포함한 모든 땅 짐승과 하늘의 새가 들어가 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모든 생물에게 “먹을 양식으로”(1:29-30) 주신 온갖 푸른 풀이 들어 있다. 새(1:20-21), 가축과 땅에 기는 모든 것(1:24-25), 사람(1:27), 그리고 온갖 푸른 풀(1:11), 이들은 바로 태초에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상 자체이다. 이들이 방주 안에 있다는 것은, 방주가 곧 하나님이 태초에 창조하신 ‘세상의 축소판’이라는 말이다. 이 작은 세상에 노아와 노아의 아들들은 물론 혈육 있는 모든 생물이 “각기 암수(雌雄) 한 쌍씩”(6:19, 7:8-9) 있다는 사실에서 우리는 노아와 그와 함께 방주에 있던 생명체들의 생존 목적이 재창조임을 짐작할 수 있다.
마침내 홍수가 끝나고 물이 걷히자 노아와 그의 아내, 노아의 아들들과 그의 아내들, 또 노아와 함께한 모든 혈육 있는 생물 곧 새와 가축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은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방주 밖, 마른 땅으로 나온다.(8:13-19) 창조 때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그들에게 “땅에서 생육하고 땅에서 번성하라”(8:17)라고 복을 내리신다. 이 복의 말씀은 노아와 함께 방주에 있던 생명들에게, 즉 하나님이 만드신 첫 피조물에게 하나님의 창조 행위를 대신하라는 명령이다. 홍수 이후 세상은 태초에 하나님이 창조하실 때와 마찬가지로 다시 생명으로 가득 차게 될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이 손수 창조하심으로써가 아니라 노아와 함께 방주에 있던 존재들이 홍수 이후의 세상을 생명으로 채울 것이다. 이렇게 세상이 재창조된다.5 다시 말해 노아의 방주는 하나님이 세상을 물로 멸하실 때 “혈육 있는 모든 생물의 암수 한 쌍”의 생명을 홍수로부터 보존함으로써 홍수 이후 그 씨를 온 지면에 유전하게 한(6:19-20, 7:2-3), 말하자면 ‘재난 대비용 종자 보관소’(seed vault)와 같은 기능의 컨테이너였던 것이다.
따라서 노아의 방주를 교회의 상징으로 본다거나 그와 유사한 방식으로 이해하는 것은 성서가 전하는 바에 그다지 부응하지 않는다.6 더구나 홍수 이후 다시는 물로 세상을 멸하지 않으리라(9:11, 15)는 하나님의 언약에 비추어보면, 홍수 이후 시대에 방주 개념의 교회란 더더욱 필요하지 않다고 하겠다.
그렇다면 노아의 홍수 이야기는 오늘날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을까? 노아의 홍수 이야기에서 우리가 좀 더 주목해 보아야 할 것은 하나님의 무지개일 것이다.

하나님의 변화와 무지개

하나님 명령에 따라 방주에서 나온 노아는 제일 먼저 하나님께-성서에서 처음으로-제단을 쌓고 정결한 짐승을 제물로 삼아 전부 태워드리는 번제를 드린다.(8:20)7 이 제사는 노동의 산물을 드린 가인과 아벨의 일상적인 제사와는 달리 죽음의 위협에서 구원을 받은 자의 감사 제사이다.8 이에 하나님은 제물의 “향기로운 냄새”를 기뻐하심으로 응답하신다.(8:21, 출 29:18, 레 1:9 등) 이는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관계 회복을 의미한다. 나아가 하나님은 “다시는 땅을 멸시(개역개정: 저주)하지 않을 것이며 다시는 모든 생물을 멸하지 않으리라”고 마음에 다짐하신다. 땅(세상)이 존재하는 한, 그 상태와 무관하게, 하나님은 자연의 주기적인 순환을 통해 땅을 유지, 보존하실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이 이렇게 결심하신 이유가 참으로 놀랍다. “사람의 마음이 계획하는 바가 어려서부터 악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창 8:21) 사람이 생각하는 것이 어려서부터 악하다는 것은 하나님으로 하여금 홍수로 세상을 멸하시게 한 원인이었지 않은가!(6:5-7, 6:11, 13) 홍수 심판은 인간의 악함에 대한 하나님의 반응이요, 하나님의 정화 조치였다. 하나님은 인간이 땅에서 자행한 폭력과 부패에 “세상 멸절”이라는 폭력으로 대응하셨고, 이것은 폭력과 부패로 얼룩진 세상을 정화하기 위함이었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의 원칙(lex talionis)에 따라 하나님은 인간의 폭력에 폭력으로 대하셨다. 그런데 이제부터는 절대로 홍수와 같은 폭력으로 세상을 멸하지 아니하시겠다고 다짐하신다.
하나님이 변하셨다! 홍수 심판은 사람을 조금도 바꿔놓지 못했다.9 반대로 하나님이 달라지셨다! 하나님은 앞으로 인간이 악하다는 사실 때문에, 죄가 세상에 가득하다는 사실 때문에 더 이상 세상 창조를 후회하거나 근심하거나, 땅을 멸시하거나, 모든 생물을 멸하거나 하지 않으시겠다는 것이다. 죄에는 반드시 심판이 따른다는 홍수 이전 하나님의 원칙이, 홍수 이후에는 악한 세상을 그대로 견뎌내겠다는 하나님의 결심으로 바뀌었다. 하나님의 이 결정은, 세상(땅)이 존재하는 한 오고 오는 수많은 세대가 끊임없이 홍수로 멸망할 수밖에 없게 될 것을 아시는 하나님께서 이를 차마 견딜 수 없어 차라리 하나님 자신이 고통을 감내하겠다는 작정이자 각오인 것이다.
하나님은 이러한 “자기 마음의 변화”를 스스로에게 다짐하시고, 처음 계획하신 대로(6:18) “방주에서 나온 모든 것”(9:10)과 언약을 맺으시면서 “말씀으로써” 그 결연한 의지를 선언하신다. “다시는 모든 생물을 홍수로 멸하지 않으리라.”(9:11) 그런 다음 그 언약의 징표로 무지개를 구름 속에 두신다.(9:14-15) 마치 새끼손가락을 서로 걸고 약속한 사람들이 서로에게 믿음을 주고자 엄지를 맞대 도장을 찍고 또 손바닥을 스치며 복사하고 손등을 서로 부딪쳐 코팅하는 의식을 행하는 것처럼, 하나님도 마음속으로 다짐하신 것을 말씀으로 확증하시고, 언약을 맺으시고, 구름 속에 무지개를 두신다. 무지개는, 인간이 아무리 악하더라도 “땅을 멸시하지도”, “모든 생물을 멸하지”도 아니하시겠다고, 세상에 걸어두신 하나님 약속의 징표이다. 이것은 인간처럼 약속을 어길까 두려워서가 아니라 하나님은 속성상 악을 그냥 두고 볼 수 없는 분임을 역설적으로 선언하고 있다. 악을 지켜보는 일이 하나님께는 고통 자체인 것이다.
무지개는 평화나 동성애를 상징하는 것이 아니다. 무지개는 홍수 심판으로도 변하지 않는 인간의 악함 때문에, 그래서 차라리 하나님 자신이 고통을 당하는 게 낫다고, 스스로 변하실 수밖에 없었던 하나님의 세상 사랑을 상징한다. 그 변하신 하나님 때문에 세상은 악으로 가득 차도 멸망하지 않고 내일이면 또다시 태양이 떠오르고, 계절이 바뀌며, 그래서 심음과 거둠이 오늘도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이제는 누가?

노아 시대의 홍수는 폭력과 부패로 가득 찬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정화’ 심판이었다. 그러나 홍수 후에도 인간은 달라지지 않았다. 아무리 세상이 폭력과 부패로 가득 차도 세상을 절대로 멸하지 않겠다고 오히려 하나님이 달라지셨다. 홍수 심판에도 인간은 변하지 않았는데 하나님만 이렇게 변하셨다면, 그렇다면 이제 세상은 어떻게 될 것인가? 사람이 변하지 않았으니 세상은 다시 홍수 이전과 같이 폭력과 부패로 가득 찰 것임이 분명하다. 그런 세상에서 약자들은 어떻게 삶을 살 수 있겠으며, 폭력과 부패가 난무하는 세상은 과연 얼마나 지속할 수 있을까?
무지개를 징표로까지 두시며 변하신 하나님께 우리는 “그러면 이제 누가 세상을 정화합니까?”라고 질문하지 않을 수 없다. 예수의 말씀에서 답을 찾을 수 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라.”(마 5:13)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마 5:14) 세상을 정화할 이들은 바로 하나님이 택한 하나님의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땅의 모든 족속이 복을 받도록”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택하시고 부르신 것(12:1-3)은 바로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해야 한다.
교회가 왜 세상에 존재해야 하는지를 말해주는 것은 바로 방주가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의 변화를 나타내는 무지개이다. 하나님은 “무지개가 구름 속에 나타나면” “육체를 가진 땅의 모든 생물”과 맺으신 언약을 기억하시면서(9:16), 세상이 악함에도 세상을 멸하지 아니하셨다. 악을 감내하시며 세상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의 징표인 무지개를 보며, 교회도 세상에 대한 교회의 책임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하나님은 “악인이 죽는 것을 기뻐하지 아니하고 악인이 그의 길에서 돌이켜 떠나 사는 것을 기뻐”하시며(겔 33:11), 하나님은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추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려주신다.”(마 5:45) 노아의 홍수 이야기는 교회와 하나님이 택한 사람들의 책임이 바로 세상의 빛과 소금의 역할에 있음을 일깨워준다.

주(註)
1 1872년 조지 스미스(George Smith)가 쐐기문자 토판에서 노아의 홍수 이야기와 유사한 이야기가 있다는 것을 발견한 이래 고대 메소포타미아 지역에 수메르 홍수 이야기, 고대 바빌로니아 아트라하시스 서사시, 바빌로니아 길가메시 서사시와 같은 다른 버전의 홍수 이야기가 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바로 이로부터 ‘성서가 훨씬 더 오래된 고대 오리엔트 문학의 모방’이라는 소위 ‘비벨-바벨 논쟁’이 유래한다. 이들 홍수 이야기의 주인공인 지우수드라, 아트라하시스, 길가메시는 홍수로 인간을 진멸하기로 결정한 신들의 선택을 받아 배를 만들고 새들을 내보내 물이 줄었는지를 확인하며 홍수 후에는 신들에게 제사를 드린다. 이 글에서는 지면상 이들과의 비교 언급은 하지 않을 것이다.
2 H.-J. Zobel, “,” TDOT 15 (2006), 550-552.
3 오리게네스에 따라 ‘암마’를 이집트 측량 단위로 간주하여 계산한다. C. Westermann, Genesis 1-11 (BK; Neukirchen-Vluyn: Neukirchener Verlag, 1974), 565; J. Ebach, Noah: Die Geschichte eines Überlebenden (Biblische Gestalten; Leipzig: Evangelische Verlagsanstalt, 2001), 64, 174. 솔로몬 성전(왕상 6:2)과 높이만 같고 길이는 여섯 배, 넓이는 두 배 반에 달한다. 창이 있고 3층으로 된 여러 개의 방이 있으며 양쪽에는 문이 있다.(6:14-16) 건축적으로 성막과 유사하다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
4 모세도 갈대로 만든 상자 ‘테바’에 담겨 물에서 구원받는다.(출 2:3)
5 W. Klaiber, Schöpfung: Urgeschichte und Gegenwart (Biblisch-theologische Schwerpunkte; Vandenhoeck&Ruprecht, 2005), 146.
6 노아의 홍수 이야기에 대한 소위 ‘영적 해석’은 초대교회 때부터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가령 홍수의 물은 세례의 모형이며(벧전 3:21), 방주의 나무는 십자가를, 방주의 양쪽 문은 십자가의 예수를, 하나님이 방주를 닫으신 모습은 마리아의 동정녀를 예표한다는 것이다. J. Ebach, 앞의 책, 172-181.
7 이 때문에 “모든 정결한 짐승은 암수 일곱씩”(7:2) 방주에 들어갔을 것이다.
8 U. Cassuto, A Commentary on the Book of Genesis: From Noah to Abraham, translated by Israel Abrahams (Jerusalem: Magnes press, 1997), 117 외.
9 C. Westermann, 앞의 책, 611.


배희숙|장로회신학대학교 구약학 교수로 재직 중이다. 저서로 『(대한기독교서회 창립 100주년 기념 성서주석) 역대하』, 역서로 『고대 이스라엘 역사 1』 등이 있다.

 
 
 

2022년 8월호(통권 76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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