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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와설교 (2022년 7월호)

 

  하나님은 왜 가인의 제물을 받지 않으셨는가
  

본문

 

“하나님은 왜 가인의 제물을 받지 않으셨을까?” 가인과 아벨 이야기(창 4:1-16)가 던지는 이 물음에 고대로부터 지금까지 수많은 이가 천착해왔다. 이에 대한 주된 해석은 다음 세 가지로 정리할 수 있겠다.
첫째, 고대로부터 시작된 가장 보편적인 해석으로, 아벨은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을 드린 반면 가인은 “땅의 소산”을 제물로 드렸다(3-4절)는 언급으로부터 가인이 바친 제물이 잘못되었다고 보거나, 아니면 “네가 …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7절)이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근거로 가인이 제사를 드릴 때 그의 마음가짐에 문제가 있었다고 보는 것이다. 그러나 성서는 그들의 제물을 종류는 똑같이 ‘민하’(מִנְחָה, 제물)로 칭하면서(3, 4절) 질적·양적 차이를 두지 않는다. 오히려 하나님이 받으시고 받지 않으신 것을 “아벨과 그의 제물”(4절), 또 “가인과 그의 제물”(5절)이라고 표현함으로써 제물과 제물을 드리는 자를 동일시하고 있다.
둘째, 서로 다른 직업에서 거부 원인을 찾는다. 즉 문화적 가치의 측면에서 볼 때 농부보다 목자가 우위에 있으며, 따라서 동물을 바치는 제사가 곡식을 바치는 제사보다 더 가치 있다는 것이다.1 그러나 아담에게 동산을 경작하며 지키라고 하신 하나님의 명령(2:15)으로부터 직업이 분화되었다는 점에서 이 주장은 타당하지 않다. 왜냐하면 수렵이든 채집이든, 목자의 일이든 농부의 일이든 모두 다 땅을 경작하는 행위이며, 경작 행위에 따른 모든 직업은 곧 하나님 명령의 성취이기 때문이다.
직업과 관련한 또 하나의 흥미로운 해석은 “농사하는 자”(4:2)인 가인이 바친 제물이 하나님이 저주하신 땅(3:17-19)의 소산이었기에 제물로서 태생적 결함을 지녔다는 것이다.2 이 주장 또한 성립하기 어렵다. 땅을 경작하고 지키라는 소위 하나님의 ‘문화명령’과 마찬가지로, 아담으로 인해 하나님이 땅을 저주한 것 또한 ‘땅’ 자체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땅에 대한 저주는 아담 개인뿐만 아니라 인류 전체에 해당하는 사건으로서 이로 인해 모든 인간은 양식을 얻고 생명을 보존하기 위해 고된 노동을 하게 된 것이다.(3:18) 그러니까 가인과 아벨의 제물은 모두 고된 노동의 산물이다. 이렇게 직업 면에서 보아도 가인과 아벨의 제사는 그 유형은 물론 제물의 질에서도 아무런 차이가 없다.
셋째, 오늘날의 주석 경향에 따르면 성서 본문에는 하나님이 가인의 제사를 거절할 만한 합당한 이유가 나타나지 않는다는 점을 확인하고 앞서 상술한 두 가지 유형의 주장을 반박하면서, 하나님이 제사를 받으시느냐 그렇지 않느냐의 여부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자유로운 의지’라고 설명한다.3 이에 따르면 가인의 죄는 제사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자의로 제사를 거부하신 것에 부정적으로 반응한 데 있다. 하지만 이런 식의 해석은 신학적인 문제를 유발한다. 하나님이 특별한 이유 없이 가인의 제사를 거부하신 것이라면, 형제 살인의 근본 원인이 다름 아닌 하나님의 차별적인 행동이 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원역사(창 1-11장)는 물론 가인과 아벨의 이야기에서도 하나님은 인간의 죄를 반드시 심판하신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기에(4:13-15), 하나님이 제사를 거부한 이유를 하나님의 자유의지로 설명하는 것은 본문의 맥락에서, 더 넓게는 원역사의 흐름에서 크게 벗어나는 해석이다.
이 글은 성서에 나타난 ‘최초의 제사’에서 하나님이 가인의 제사를 거부하신 데는 특별한 의도가 있으며, 특히 예배자의 사회적 책임(사 1:10-17, 암 5:21-25 등)이 가인과 아벨 이야기의 핵심 메시지임을 드러내고자 한다.

부당해 보이는 하나님의 제사 거부의 의도

가인과 아벨 이야기는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아담과 하와로 시작하지만, 초점은 곧바로 그들의 두 아들 가인과 아벨에게로 이동한다. 이야기의 관심은 두 사람에게 동일하게 배분되지 않고 처음부터 가인을 향해 있다. 그것은 먼저 가인의 이름 풀이(2절)에서, 그다음에는 가인과 하나님의 지속적인 소통(6-7, 9, 10-12절)에서 드러난다.
어머니 하와는 첫아들을 낳고 ‘내가 여호와와 함께 남자를 얻었다.’고 말하며 이름을 ‘카인’이라 짓는다.(1절) 이름 ‘카인’(קַיִן)이 파생된 동사 ‘카나’(קָנָה, 얻다)는 하나님의 창조행위를 가리키는 것으로4(창 14:19, 22, 신 32:6) 하와는 가인을 창조하였다고 말하는 것이다. 이것은 하와의 교만을 드러내는 표현이 아니라, 여성의 임신과 출산은 다름 아닌 ‘하나님과 함께한 창조행위’라는 선언이다. 이를 통해 가인은 하나님과 밀접한 관계에 있는 존재라는 점이 강조된다.
이에 반해 아벨의 출산에 관해서는 간략히 서술될 뿐이며, 그 이름의 유래는 언급조차 되지 않는다.(2절) ‘아벨’이라는 이름은 ‘숨, 바람, 무(無), 헛됨’이라는 뜻인데, 이는 아벨이 육체적으로, 또 사회적으로 약자임을 시사한다. 이러한 불평등은 에덴동산 바깥 세상의 기본적인 특징으로 나타난다. ‘최초의 제사’에서 하나님이 가인과 아벨을 ‘불공평하게’ 대하신 특별한 의도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은 아닐까?
주목할 점은, 보통 남자아이를 출산하면 ‘아들’(벤)을 낳았다고 하는데(4:25 참고) 특이하게도 하와는 태어난 가인을 ‘남자’(이쉬)라고 부른다는 사실이다. 이는 하나님이 손수 ‘창조하신’ 첫 사람 아담과 같이, 출산을 통해 ‘태어난’ 첫 사람 가인도 여자와 하나님의 동역으로 ‘창조’되었다는 점을 강조한다. 무엇보다 ‘남자’라는 단어가 처음 등장하는 상황을 보면 이 호칭이 지닌 근본적인 의미가 더욱 잘 드러난다. 아담은 하나님이 만드셔서 자기 앞에 두신 하와를 본 순간 그를 ‘여자’(잇샤)라고 부르며 이는 ‘남자’(이쉬)에게서 나왔기 때문이라고 말한다.(2:23) 이로써 ‘남자’와 ‘여자’라는 칭호는 서로 뗄 수 없는 상호관계에 있음을 말해준다. ‘남자’와 ‘여자’는 암수(雌雄)를 뜻하는 성적 개념(1:27)이 아니라 불가분리적 유대관계를 나타내는 사회적 용어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하와가 가인을 ‘남자’라고 부른 것은, 가인과 아벨이 한 부모에게서 난 뗄 수 없는 상호관계에 있음을 말해준다.
여기서 우리는 가인과 아벨이 드린 첫 제사에 대해 하나님이 그들을 ‘달리’ 대하신 특별한 의도를 짐작해 볼 수 있다. 가인의 제물은 힘든 노동의 산물이며 동시에 하나님의 복을 증거하는 것이 분명하지만, 하나님이 그의 제사를 의도적으로 거부하셨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가인에게 무언가 깨닫게 하고자 할 목적을 지녔다고 할 수 있다. 즉 하나님과 깊은 관계에 있는 가인의 제사를 거부하심으로써 하나님은 가인으로 하여금 자신의 특별한 지위와 그에 걸맞은 책임을 인식하게 하려는 것이다. 바로 여기 최초의 제사에서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뗄 수 없이 결부되어 있음이 드러난다. 하나님이 가인의 제사를 거부하심으로써 추구한 특별한 의도는 7절에서 더욱 분명해진다.

“네가 선을 행하면”, “네가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아무리 배후에 특별한 의도가 있다 하더라도 하나님의 부당한 차별 자체를 받아들이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가인은 몹시 분을 내며, 문자적으로 말해 ‘얼굴을 떨군다.’(5절) 하나님도 이러한 반응을 당연히 인정하시듯 가인에게 왜 그러냐고 물으신다.(6절) 그리고 뒤이어 말씀하신다.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네가)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7절)

이 구절은 창세기의 난제 중 난제로 꼽힌다. 구체적인 의미가 드러나지 않고 모호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네가 선을 행하면”과 “네가 선을 행하지 않으면”이라는 두 가지 조건 모두 이미 발생한 사건, 즉 앞의 제사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 가인이 하거나 하지 않을 경우를 가리킨다는 것이다.
(1) 선을 행할 경우 그 결과는 ‘얼굴을 드는 것’이다. 바로 앞 절에서 하나님이 가인에게 ‘얼굴을 떨궜다’라고 하셨으니(6절), 선을 행할 경우 얼굴을 드는 주체는 문맥상 가인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가인이 하나님 앞에서 얼굴을 든다는 말은 아니다. 얼굴을 든다는 것은 인간관계의 바람직한 상태를 나타내는 표현이다.(삼하 2:22, 욥 11:15, 22:26) 본문에서 가인의 인간관계는 아벨과의 관계를 말하므로, 가인이 얼굴을 든다는 것은 가인이 아벨을 동료 인간, 즉 형제로 대할 때의 결과를 뜻한다. 따라서 가인이 행해야 할 선이란 아벨과의 바람직한 인간관계, 그를 형제로 대하는 것임이 분명해진다.
(2) ‘네가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 앞에 엎드려 있느니라.’라는 전통적인 번역은 문법적 오류를 범함으로써 그 구체적인 뜻을 모호하게 한다. 첫 번째 문제는 엎드려 있는 주체가 누구인가 하는 것이다. 전통적으로 ‘죄’가 엎드려 있다고 번역하지만, 문법을 고려하면 성(性)이 일치하지 않으므로 ‘엎드려 있는 자’(남성형)는 ‘죄’(여성형)가 될 수 없다. 또한 ‘죄’와 ‘문’은 동일하게 여성명사이며 동격으로 볼 수 있기에 이를 고려하면, “죄가 문 앞에 엎드려 있는” 것이 아니라 (어떤 남자가) ‘죄의 문 앞에’ 또는 ‘죄라는 문 앞에’ 엎드려 있다고 보아야 한다. 그러면 누가 엎드려 있는가? 맥락상 가인이 가장 적합하다. 따라서 “죄가 문 앞에 엎드려 있다.”라는 기존의 번역은 ‘가인이 죄의 문 앞에 엎드려 있다.’는 의미로 이해해야 한다. 그 의미는, 가인이 선을 행하지 않으면 죄의 문으로 들어간다는 것이다. 즉 아벨을 형제로 대하지 않으면 가인은 죄의 문으로 들어가게 된다. 이어지는 구절은 여기서 추상적으로 표현된 ‘선’(善)이 무엇인지를 보다 구체적으로 설명해준다.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7절 하반절은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라고 번역되었으나, 성서 원문에는 ‘죄’라는 단어가 명시된 것이 아니라 단지 남성형 대명사인 ‘그’가 사용되었다. 이를 직역하면 ‘그는 너를 원하고 너는 그를 다스릴 것이니라.’이다. 여기서 ‘그’는 죄를 가리킬 수 없다. 왜냐하면, ‘죄’는 문법적으로 여성형이기 때문이다. 문맥에 따르면 이 구절에서 ‘그’는 아벨이 가장 잘 어울린다. 따라서 7절 하반절을 문법과 문맥에 따라 번역하면, ‘아벨이 너를 원하니 너는 그를 다스릴지니라.’가 된다.
놀랍게도 이 구절은 하와에게 하신 하나님의 말씀과 매우 유사하다. “너는 남편을 원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3:16) 남편과 아내의 관계를 말해주는 이 말씀과 비교하면, 7절 하반절은 형제인 가인과 아벨의 관계에 대해 말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아내가 남편을 원하듯이 아우 아벨이 형 가인을 원하고 있다. 보통 ‘원함’이나 ‘사모함’으로 번역하는 히브리어 ‘테슈카’(תְּשׁוּקָה)의 근본 의미는 자기가 본래 난 곳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강한 소망을 나타낸다.5
여기서 다시금, 그러나 보다 더 근본적으로 가인과 아벨의 공동 소속이 강조된다. 아담과 하와가 본래 한 몸이었듯 가인과 아벨은 한 부모에게서 태어났다. 하와의 ‘갈망’과 ‘사모함’이 남편과 한 몸이 될 것을 지향하듯이, 연약한 아벨의 ‘원함’도 형제 가인과의 연합을 목표로 한다. 즉 아벨은 가인의 도움이 필요한 존재인 것이다. 육체적·사회적으로 불완전한 아벨은 가인의 도움이 절실히 필요하다. 아벨의 이러한 ‘원함’에 대한 응답은 가인이 아벨을 ‘다스리는 것’(마샬)이다. 여기서 ‘다스림’이란 군림하고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남편과 아내의 관계가 보여주듯이 돌보는 것이다. 약한 아벨을 책임 있게 돌보는 것이 바로 다스림이다. 이처럼 7절 하반절 역시 가인을 의지하는 아벨을 외면하지 말고 형제로 대할 것을 가인에게 요구하고 있다.
종합하자면, 7절은 육체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약자인 아벨이 형 가인의 도움을 바라고 있으니, 가인에게 아벨을 형제로 대하라고 요구하는 동시에 그것이 강한 자의 책임이라고 말하고 있다.

계속되어야 할 ‘지킴’의 과제

하나님은 가인에게 그가 어떻게 할지를 자세히 알려주셨지만, 가인은 이를 거부하고 아우 아벨을 쳐 죽인다.(4:8) 창조 이래 발생한 첫 죽음이다.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을 불순종한 결과는 그들의 죽음이 아닌, ‘땅이 저주’를 받는 것이었다.(3:17) 이에 반해 형제를 외면하고 살해한 가인의 벌은 ‘땅에서 유리’하는 것이다. “네가 땅에서 저주를 받으리라!”(4:11) 첫 인간이 하나님의 명령을 어겼을 때, 남자도 여자도 아닌 땅이 저주를 받고 그 결과 모든 인간은 오직 힘든 노동을 통해서만 땅의 소산을 얻게 된다.(3:16-18)
그러나 가인의 경우 저주는 가인 한 사람에게만 해당된다. 가인이 받은 저주(4:11)는 뱀이 받은 저주(3:14)와 그 형태가 동일하다. 즉 뱀이 동물 세계에서 소외된 것처럼, 가인은 인간 세계에서 소외된다. 가인은 형제 없이, 공동체 없이 살게 된다. 또 “네가 밭을 갈아도 땅이 다시는 그 효력을 네게 주지 아니할 것이요”(4:12)라는 저주는, 노동의 수고를 통해서만 땅의 소산을 얻을 것이라는 아담의 저주와는 달리 가인에게는 땅의 소산조차 허용되지 않음을 의미한다. 아담이 죄를 지은 결과 에덴동산에서 추방되었듯이, 가인은 자신의 경작지에서 추방된다. 형제 아벨에 대한 가인의 형제답지 못한 행동은 가인으로 하여금 공동체에 소속되지 못하여 유리하며 방랑하는 자가 되게 하고 인간을 두려워하게 하는 결과를 낳는다.(4:14-15)
첫 사람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께 불순종한 후 수치심을 느끼고 이를 감추기 위해 자신의 몸을 숨김으로써 자신들의 죄를 인정하였다.(3:7) 그러나 가인은 아벨을 죽이고도 “네 아우가 어디 있느냐?”라는 하나님의 질문에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입니까?”라고 불평하며 대꾸하기까지 하는데(4:9), 특히 “내 죄벌이 지기가 너무 무겁다.”(4:13)라는 그의 고백은 하나님이 자기에게 요구하신 것이 무엇이었는지를 가인이 이미 잘 알고 있었음을 시사해준다. 형제답지 못한 자신의 행위에 대한 징벌을 가인은 이렇게 표현한다. “주께서 오늘 이 지면에서 나를 쫓아내시온즉 내가 주의 낯을 뵈옵지 못하리니.”(4:14) 가인은 ‘땅에서 쫓겨난 삶’과 ‘여호와의 얼굴을 보지 못하는 삶’을 동일한 것으로 간주한다. 여기서 우리는 형제에 대한 우리의 태도와 하나님과의 관계가 뗄 수 없는 상관성을 맺고 있음을 다시 한번 관찰할 수 있다.
첫 인간에게 주신 하나님의 명령은 “경작하여 지키라”(2:15)라는 것이었다. 인간 본연의 임무인 ‘경작’과 ‘지킴’, 이 두 가지 개념이 놀랍게도 가인과 아벨 이야기에서 다시 나타난다. ‘경작’은 “땅을 경작하는 자”(4:2)라는 가인의 직업에서, ‘지킴’은 바로 “내가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4:9)라는 가인의 반문에서 언급되는데, 이렇게 두 개념 모두 가인에게서 재등장하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닐 것이다. 이것은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께 불순종한 결과로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후 인간의 새 거주지가 된 에덴동산 밖의 세상에서 ‘경작’이라는 과제는 일(직업)을 통해 계속되고, ‘지킴’의 과제는 형제와의 관계에서 계속된다는 것을 말해준다.6
결국 지킴의 과제를 실패한 가인은 자기 거주지에서 쫓겨난 후 떠돌다가 드디어 에덴 동편 놋 땅에 정착하게 된다.(4:16) 이는 가인의 새 출발을 알려준다. 여기서 특히 “에덴 동편”이라는 지리적 규정은 아담이 에덴동산에서 추방된 이후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불 칼”이 그 동산을 지키고 있음을 상기시키며(3:24), 동시에 아담이 실패한 ‘지킴’의 과제(동산 지키기)가 그룹들(케루빔)에 의해 계속되듯이, 가인이 실패한 ‘지킴’의 과제(형제 지키기)도 그의 후손을 통해 계속되어야 함을 시사해준다. 그러나 가인의 후손 역시 동료 인간에게 폭력을 가함으로써(4:23) 이 ‘지킴’의 과제에 실패했다. 이로써 가인의 족보는 막을 내린다. 아벨을 대신한 셋의 출생으로 세상은 다시 시작한다.(4:25-26)

제사와 이웃 사랑

하나님이 가인과 가인의 제물을 거부하신 것은 그의 제물에 흠이 있거나 그의 마음가짐에 문제가 있어서가 아니며, 직업의 문제도 아니고, 하나님의 자유의지는 더더욱 아니다. 그것은 오직 형제의 도움 없이 살 수 없는 약한 형제를 돌보라고 일깨워주기 위한 하나님의 ‘의도적인’ 거부였던 것이다. 가인이 아벨에게 어떤 해를 가하지 않았음에도 하나님이 ‘의도적으로’ 가인과 그의 제사를 거부하신 것은, ‘선한 행위’란 해를 가하지 않는 소극적 행동이 아니라 약한 형제를 적극적으로 돕는 것임을 가르쳐주기 위함이었다고 이해할 수 있다. 다시 말해 남에게 위해를 가하지 않거나 악을 행하지 않는 것이 곧 선을 행하는 것이 아니라, 약자를 돕는 것이 악을 행하지 않는 것이요 선을 행하는 것이라는 뜻이다.
형제 사랑 없이 하나님을 만날 수 없고, 하나님을 사랑하면 형제를 사랑할 수밖에 없다. 이와 같이 하나님을 예배하는 일과 이웃을 사랑하는 일은 동전의 양면과 같다.(마 5:23-24) 예수 또한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을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으로 요약하셨다.(마 22:38-40)
이처럼 가인과 아벨 이야기는 인간과 세상의 근본 질서에 관한 본질적 진술을 담은 원역사(창 1-11장) 안에서 하나님 예배와 이웃 사랑의 상관성,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의 사회적 책임에 대한 근본적 가르침을 명시하고 있다.

주(註)
1 H. Gunkel, Genesis (HKAT 1-1; Göttingen, 1964), 37; C. Meyers, “Food and the First Family: A Socioeconomic Perspective,” (eds.) C. A. Evans, J. N. Lohr & D. L. Petersen, The Book of Genesis: Composition, Reception, and Interpretation (VTSup 152; Leiden, Boston, 2012), 137-157.
2 이러한 주장은 1895년 Josef Halvy에게서 처음 나타나며, G. A. Herion, “Why God Rejected Cain’s Offering: The Obvious Answer,” (eds.) A. B. Beck, et al., Fortunate the Eyes That See (Grand Rapids, 1995), 52-65에서 자세히 대변된다.
3 G. von Rad, Das erste Buch Mose Genesis (ATD: Göttingen, 1972), 76.
4 창 14:19, 22, 신 32:6. H. Schmidt, “קנה”, THAT II (1976), 650-659; E. Lipiński, “קנה”, ThWAT VII (1990), 63-71 참고.
5 J. N. Lohr, “Sexual Desire? Eve, Genesis 3:16 and תשוקה, Journal of Biblical Liturature 130 (2011): 227-246.
6 K. M. Swenson, “Care and Keeping East of Eden:Gen 4:1-16 in Light of Gen 2-3,” Interpretation 60 (2006): 373-384.


배희숙|장로회신학대학교 구약학 교수로 재직 중이다. 저서로 『(대한기독교서회 창립 100주년 기념 성서주석) 역대하』, 역서로 『고대 이스라엘 역사 1』 등이 있다.

 
 
 

2022년 9월호(통권 76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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