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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me > 기독교사상 > 성서와설교 > [잠언의 역사적·문학적 콘텍스트 04]
성서와설교 (2022년 4월호)

 

  여호와 신뢰와 훈육의 가치(잠 3:1-12)
  

본문

 

인간은 변화될 수 있을까? 인간은 교육을 통해 교화될 수 있을까? 작년 말 11명의 중학생들이 초등학교 6학년 여아를 대상으로 잔혹한 폭행을 저지른 사건이 발생하면서, 성인과 달리 형사적 처벌을 받지 않는 촉법소년(범행 당시 만 10세 이상 14세 미만의 형사미성년자)의 연령대를 낮추자는 국민청원과 입법 움직임이 늘고 있다. 해가 거듭할수록 촉법소년의 범죄는 증가세를 보이고 있으며(2016년 6,576명 → 2017년 7,533명 → 2018년 7,364명 → 2019년 8,615명 → 2020년 9,606명), 심지어 살인 범죄까지 발생하고 있다.1
형법주의자들은 살인, 강간과 같은 흉악범의 경우에는 아이들이라 하더라도 강력한 처벌로 다스려야 하고 촉법소년의 연령대를 낮추어 무고한 피해자들이 더 늘지 않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반대로 아이들은 여전히 교화가 가능하기에 우리 사회가 보호하고 훈육해야 하며, 형사처벌로만 다룬다면 이들이 징역형 이후에 온전한 삶을 살아갈 수 있겠느냐는 교육자들의 의견도 있다. 이는 쉽게 결론을 내릴 수 없는 문제이다.
여기에 중요한 시사점이 있다. 첫째, 십 대 소년들의 범죄에는 원인이 있다. 이들이 범죄에 이르게 된 것은 대부분 부모와의 관계 파괴에서 시작한다. 즉, 아이들의 잘못이 아닌 경우가 태반이다. 둘째, 어떤 범죄는 범죄자의 나이가 비록 어릴지라도 그들에게 엄히 책임을 묻고 피해자의 고통을 어루만져주고 보호해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잠언은 교육에 대해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2 먼저 잠언은 모든 이들이 교육을 통해 변화될 수 있으리라 확신하는 듯하다.(1:2-6) 지혜는 지혜로운 자뿐 아니라, 어리석은 자들도 교화의 대상으로 삼는다.(1:22, 8:5) 그러나 다른 구절들에서는 어리석은 이들의 변화가 불가능하다고 말하는 것 같기도 하다.(9:7-9) 이들을 교화시키려는 노력은 어리석다는 것이다. 또 한편으로 어떤 이들은 변화와 교화가 가능한 사람들이 있으며, 이들은 올바른 수단과 방법을 통해서 참된 변화에 이를 수 있다고 믿는다.(2:1-10)
잠언 3:1-12은 지혜에 대한 앞의 가르침을 이어간다. 잠언의 저자는 배움을 통해 ‘지혜로움’에 이르는 것이 최종 목표가 아니며, 그 지혜를 통해 ‘여호와에 대한 온전한 믿음’에 이르러야 함을 설득한다.

문학적 형식과 구조

3장은 가르침(3:1-12, 21-35)과 의인화된 지혜(3:13-20) 두 부분으로 나뉜다. 마인홀트의 지적대로,3 3:1-10은 가르침/훈계와 이에 대한 목적/동기/이유(motive clause)에 대한 평행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를 기반으로 각 구절의 관계를 지정하면 가르침의 명령과 이에 대한 순종의 결과가 번갈아 등장한다. 즉, 1, 3, 5, 7, 9절은 명령이, 2, 4, 6, 8, 10절은 그 결과이다. 이어지는 11-12절은 명령과 이유가 나타난다. 1, 11, 21절은 각각 “내 아들아”라는 부름으로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를 설정하는데, 이와 같은 설정은 인스트럭션 장르의 전형적 표현이다. 1, 3, 5, 7, 9, 11절은 각각 명령형으로 구성된다. 5a, 9절은 긍정의 명령, 그 외에는 부정의 명령이다. 5a, 7b, 9, 11, 12, 19, 26, 32, 33절에는 여호와가 언급되어 있다. 아래는 전체 구조이다.

1. 지혜의 가르침과 그에 따른 복 (1-4)
2. 자신의 지혜가 아닌 여호와에 대한 신뢰 (5-8)
3. 여호와에 대한 예배와 그에 따른 복 (9-10)
4. 사랑에서 기인한 여호와의 징계 (11-12)


여호와의 법의 준수와 결과(3:1-12)

3:1-12은 잠언 1-9장의 10번의 가르침(lesson) 중 세 번째(1:8-19, 2:1-22, 1:20-33은 삽입구)에 해당한다. 여기서의 핵심적인 가르침은 2장의 내용과 별반 다르지 않다. 부모의 가르침을 어떻게 실천해야 하며 그 가르침의 실제적 내용이 무엇인지 여호와 신앙의 기준에서 더욱 구체적으로 말해준다. 이 단락에서 지혜를 가리키는 직접적인 어휘는 등장하지 않지만 이어지는 13-20절에서 세상이 지혜라는 기반 위에 창조되었으며 부모의 가르침을 활성화시키는 것이 지혜임을 말해준다.
1-2절은 아버지의 법을 잊지 말고 ‘마음’으로 그 명령을 지켜야 할 이유는 장수의 누림과 평강이 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마음을 통해 부모의 법을 내면화하는 것은 1:8, 2:2, 10절에서와 같이 3:1, 3, 5절에서도 강조된다.(참조. 4:4, 23, 5:12, 6:21, 7:3, 25) 옛 지혜자들의 가르침을 잊어버린다는 것(쉬카흐)과 그것을 지킨다는 것(나짜르)은 상호 대구를 이룬다. ‘잊어버림’은 상황에 따라 유익이 될 수도, 손해가 될 수도 있다.(31:5-7) 구약성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을 잊어버리는 현상을 죄악이라며 일관되게 비판하였다.(신 8:14-19) 그들은 구원의 하나님을 망각했고(사 17:10), 이에 대한 심판은 하나님이 그들을 잊어버리는 것이었다.(사 49:14) 핵심은 마음(심장)을 다하여 지혜자의 가르침을 지키는 것으로, 이는 외적인 율법적 행위를 넘어서는 함의를 가진다.
3-4절은 더욱 추상적으로 1-2절을 다시금 설명한다. 하나님과 사람에게서 은총과 존귀히 여김을 받은 결과는 오직 ‘인자와 진리’의 실현 여부에 달려 있다. 3절에서 언급한 ‘인자와 진리’(헤세드 베에메트, 3:3, 14:22, 16:6, 20:28)는 1절의 아버지의 토라(가르침), 미즈바(명령)와 평행을 이룬다. 특히 목에 인자와 진리를 동여매는 것과 ‘마음판’에 새기라는 명령은 아비의 명령을 내면화하라는 1절의 가르침을 설명한다. 그렇다면 부모의 가르침은 ‘인자’와 ‘진리’라는 어떤 속성을 가지는 환유법(Metonymy)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4 3절의 마음판에 새기라는 문구5는 신명기적 용어와 관계된 것으로 보인다. 즉, “오늘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 이를 모든 곳, 모든 장소에서 교육하고 강론하고 기록하라는 쉐마의 명령(신 6:6)은 3:3과 동일한 명령이다.
5-6, 7-8절은 지혜에 대한 독특한 시각을 반영한다. 5, 7절은 각각 여호와에 대한 깊은 신뢰와 경외심, 그리고 악을 떠남을 통한 종교적 명령을 하면서 이와 동시에 ‘명철’과 ‘지혜’를 버리라고 말하기 때문이다. 맥케인은 이 구문이 “인스트럭션의 국가화”(the nationalizing of the Instruction)라고 단언하면서, 옛 지혜에 대한 예언적 공격과 관련된 것이라고 말한다.(사 5:21)6 교육을 통한 옛 지혜의 습득은 여호와를 마음으로 신뢰하는 것에 미치지 못하며, 이 지혜자들은 구시대의 유물에 불과하다. 따라서 이사야서에서 예언자들이 지혜자들을 비판한 것처럼 잠언 3:5-8은 옛 지혜에 대한 비판을 반영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주장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본문에서 자기 자신의 ‘명철’(비나)을 의지하지 말라는 것과 자신의 눈에서 ‘지혜롭지’(하캄) 말라는 명령은 ‘신적 지혜’를 소유함으로 인한 영적 변화의 차원과 다르게 인식되어야 한다. 대표적으로 26:4-5은 미련한 자들의 우둔함에 따라서 대답을 해야 하며, 어설픈 가르침은 이들로 하여금 ‘스스로 지혜롭다’는 착각에 빠져들게 만들 위험이 있다고 말한다. 28:11에서도 부자가 스스로 지혜자라고 심각하게 착각하는 어리석음과 경제적으로 가난한 자라도 명철이 있는 자들이 있음을 말한다.(참조. 26:12, 16) 참된 신적 지혜를 소유하는 자들에게 어떤 ‘지혜스러움’이 임하는 것은 분명하지만, 이는 근본적으로 스스로 지혜롭다는 우둔함과는 구별되어야 하며, 참된 지혜의 특성은 겸손이라는 것을 뜻한다. “교만이 오면 욕도 오거니와 겸손한 자에게는 지혜가 있느니라.”(11:2) 따라서 5-8절의 내용을 지금까지 서술한 신적 지혜를 반대한다든지 국가적 종교관을 강조하는 후대의 개념으로 보는 관점은 설득력이 없다.7
아마도 3:5-9절은 신명기적 사상에 영향을 받았다기보다는 인스트럭션 장르가 선호하는 행위와 보상 사상에 가깝다. 첫째, 악에서 떠나 여호와를 신뢰하면(5절), “모든 너희의 길들” 속에서 여호와를 인식하고 있다면(6a), 결국 그가 걷는 모든 행위들의 도덕적이고 물질적인 결과들은 긍정적일 것이다.(6b) 2장에서는 여호와가 지혜를 주는 분으로 묘사되었는데, 3:1-12에서는 여호와에 대한 절대적 신뢰가 지혜 추구의 궁극이 되어야 함을 역설한다. 이뿐만 아니라 3:1-12에서 지혜로움, 명철함은 모두 단순한 지적 능력이며 신적 지혜와 다른 것임을 유의할 필요가 있다. 자신의 마음을 신뢰하면서 신적 지혜와 접촉점이 없는 자들은 미련한 자이지만, 참된 지혜를 가진 자는 구원에 이른다.(28:26) 신뢰한다는 것이 자신의 마음이 되어서는 안 되며 그의 마음속에는 두려움이 있어야 한다.(14:16) 그렇다면, 6절의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 직역하면 “그가 너의 길들을 곧게 하실 것이다”라는 구절을 생각해보자. 여기서는 어떤 장애물을 제거하고 목적지로 수월하게 안내한다는 의미를, 혹은 누군가가 정의롭고 공정한 방식으로 행위를 할 수 있도록 돕는다는 의미도 함께 가질 수 있을 것이다.8 지혜 소유의 목적 중 하나는 개인의 도덕적 미덕을 형성시켜주는 것이다.(2:8-9) 11:5는 “완전한 자의 공의는 자기의 길을 곧게 하려니와 악한 자는 자기의 악으로 말미암아 넘어지리라”라고 말한다. 따라서 6b절은 신적 능력을 통해 한 개인이 공의로운 삶을 살게 한다고 이해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둘째, 스스로 지혜롭다는 위험을 벗어나고 여호와를 두려워하며 악에서 떠난다면(7절) 어떤 선한 결과가 있을 것이다. 그 결과는 ‘건강’(שׁר)에 치료가 있고 몸의 골격에 ‘치료약’(שׁקוי)이 주어질 것이라 말한다.(8절)9 7절은 앞선 5-6a절과 유사하나 부정의 명령이 먼저 출현한다. “스스로 지혜롭게 여기지 말지어다”(7a, 참조. 26:5, 12, 28:11)를 직역하면, “너의 눈 속에서 지혜롭지 말라”, 즉 ‘스스로 자만하지 말라.’를 함의한다. 예언서에도 이 구문이 등장하는데 이사야 5:21은 “스스로 지혜롭다 하며 스스로 명철하다 하는 자들은 화 있을진저”라고 말한다. 이 구문은 왕의 지도자들이 악을 선으로, 선을 악으로 바꾸어 말하면서 국가의 위기에 대처하지 못하는 상황을 말한다.(사 5:20) 이들은 뇌물을 취하고 악인에게 의인의 보상을 주고 의인을 압제하는 범죄자들의 무리이다. 잠언은 부요함이 일괄적으로 경건의 표징이라고만 생각하지 않으며, 부자들이라도 스스로 지혜롭게 여기는 어리석은 자들을 경고한다.(28:11) 스스로 생존법이나 삶의 성공 방정식을 알고 있다고 착각하는 자들, 즉 여호와를 두려워하지 않으며 악에 머물러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는 자들에게 경고한다. 이러한 비판에서 자유로우면서 이 명령에 순종하는 자들에게는 삶 전체에 회복이 나타날 것이다.
9-10절은 첫 열매로 공경하라는 명령의 결과로 창고가 차고 새 포도즙이 넘치는 것에 대해 말한다. 9절에서 “네 모든 곡물 수확물의 첫 열매로부터”(메레쉬트 콜 테부아테카)에서 ‘첫 열매’를 뜻하는 ‘레쉬트’는 성전 제사법과 관련된 단어이며, 이와 관련된 유일한 명령의 형태로 등장한다. 잠언에서 레쉬트가 여러 차례 나타나지만(1:7, 3:9, 4:7, 8:22, 17:14) 제사와 관련된 것은 이 절이 유일하다. 잠언 전체 가운데 오직 이 절에서는 지혜 추구를 통한 여호와 신앙이 개인적 차원만이 아니라 제사법과 의식, 그리고 공동체적인 것과 관련된 것으로 나타난다.10 일반적으로 잠언은 제사법에 대해 약간의 관심을 보이며(7:14, 15:8, 21:3, 27), 이는 모세오경의 일부와 관계된 듯 보일 수도 있다.(출 23:19, 34:26, 레 23:10-14, 신 26:1-3)11 그럼에도 잠언에서의 제사에 관한 문장들은 대부분은 악인의 제사나 음녀의 제사와 관련된 부정적 상황에서만 묘사되며, 부모의 가르침으로 정한 법으로써 등장하는 곳은 없기 때문에 잠언의 관심사가 성전 제사장 문헌과 어떤 관련이 있는지 말하기는 힘들다.
‘곡물’이12 창고에 채워지고, 포도주 부대가 새 포도주로 터져나간다는 표현은 앞의 재물과 첫 소산물로 여호와를 영광스럽게 하라는 명령의 결과이다. 이는 신명기 7:13, 15:13-14, 28:8에서는 신명기 율법 준수와 약속의 땅에서의 물질적 축복을 약속하는 것과 유사성을 보이지만,13 고대근동문헌에서 신에게 제사와 예물을 통해 존경심을 표하는 것은 지혜문헌의 일반적인 현상이다.14
11-12절을 보자. 이 구절은 징계의 효과에 대해 말한다.

11내 아들아 여호와의 징계를 경히 여기지 말라 그 꾸지람을 싫어하지 말라 12대저 여호와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기를 마치 아비가 그 기뻐하는 아들을 징계함 같이 하시느니라

1-10절까지는 일관되게 명령과 축복의 수여 관점을 서술했으나, 11-12절은 갑자기 ‘징계’(무쌀), ‘꾸지람’(토카하트)을 받아들일 것과 여호와는 ‘징계하시는 자’라고 말한다. 여기서의 고통은 아비의 법에 불순종한 처벌로 겪는 고통이 아니라 교육을 위함이다. 징벌은 어떤 목적을 위해서 행해지는 것으로, 그 순기능에 대해 역설한다. 이는 욥이 당하는 고통에 대한 엘리바스와 엘리후의 진단과 맥을 같이 한다.(욥 5:17, 33:16-18, 35:10)
고통은 여호와의 징계와 꾸지람이므로 이를 거부하거나 외면해서는 안 된다.(12절) 그는 적극적으로 이를 수용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그 이유에 대해 잠언의 저자는 징계가 자녀를 향한 아버지의 사랑과 기쁨에서 시작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신뢰의 기반이 자녀를 향한 부모의 애정이라면, 이는 받아들여져야 한다. 그것은 단순한 처벌을 넘어서는 것이며 이스라엘의 여호와를 아버지로, 잠언의 독자들을 자녀로 대응시키는 것이다.
순종과 보상이라는 체계를 벗어난 이 구문은 설명되지 않는 고통에 대한 이유를 제시한다. 잠언이 단순히 인과응보적 교리 차원의 가르침이라는 것은 사실이 아니며, 잠언은 모든 부요함이 복의 결과라고 말하지도 않는다. 이 아들은 처벌을 받을 만한 잘못이 없음에도 더 나은 무언가를 위해 고통을 당한다. 현대인의 시각에서 보면 어떤 면에서는 가혹한 방식으로 훈육하라는 잠언의 명령이 부당하게 느껴진다.(29:15, 17)

네가 네 아들에게 희망이 있은즉 그를 징계하되 죽일 마음은 두지 말지니라(19:18)
아이를 훈계하지 아니하려고 하지 말라 채찍으로 그를 때릴지라도 그가 죽지 아니하리라(23:13)


그러나 성서는 고난이라는 과정을 통해 무지한 자들을 깨우치는 과정이 분명히 있음을 알려준다.(시 119:71, 75, 신 8:5)15 어떤 사람들에게는 그의 죄악을 심판으로 다스리는 것이 최종 목적이 아니라 무한한 사랑의 행위로써, 믿음의 표증으로써 발생하는 고난이 있다.(삼하 7:14-16, 89:30-33) 잠언은 고통의 슬픔이 크다 하더라도 단순한 처벌이 아니라 무한한 사랑으로 인해 발생하는 것이기에 이를 넉넉히 받아들이라고 말한다.

소결

몇 가지 사항들을 정리해보자. 잠언 3장(3:13-20 삽입구 제외)은 지적 허영심 혹은 자만심이 아니라, 여호와를 향한 신뢰가 결국 지혜 추구의 궁극적 지향점임을 말해준다.
첫째, 여호와에 대한 신뢰 행위의 바탕에는 신적 약속이 담겨 있다.(3:1-10) 그리고 잠언에서 그 약속의 시작은 토라의 말씀만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권위 있는 가르침 전체를 포괄한다. 그것에는 확실한 약속이 담겨 있다.(3:1-4) 둘째, 여호와의 대한 신뢰는 스스로의 어리석은 지혜를 거부하는 것이다.(3:5-8) 스스로가 지혜롭다고 생각하는 것은 부어지는 신적 지혜와 다르며, 저자는 이 모든 것을 버리고 여호와를 두려워할 때 회복이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셋째, 여호와 신뢰는 그에 대한 예배 속에서 나타나야 한다.(3:9-10) 그러나 그 제사의 행위는 단순한 의식이 아니라, 여호와를 영화롭게 높이는 것이다. 넷째, 신적 사랑에서 기인한 징계의 의미를 이해해야 한다.(3:11-12) 잠언은 고통의 의미를 무한한 신적 애정에서 발현된 교정의 과정으로 보기를 요청한다.
보상에 대한 기대가 신앙의 힘이 아니라, 무한한 신적 사랑만이 현재를 이기게 하는 능력이다. 여기서 이스라엘이 광야를 지났던 기간에 대한 신명기를 언급하는 것은 적절할 것이다. 부모가 자녀를 징계함 같이 여호와가 자신의 백성을 징계했으며, 그 목적은 여호와의 명령을 단순히 지키고 그 길을 걷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라고 말한다.(신 8:5-6) 잠언의 지혜담론 역시 마찬가지이다. 그것은 단순한 보상을 위한 욕망이 동인이 되어서는 안 된다. 장수, 성공, 치료, 부가 그 핵심이 아니다. 핵심은 모든 일상 속에서 여호와를 인식하고 모든 행위 속에서 공평과 정의를 실현하며 영혼 속에 그러한 미덕을 길러가기 위한 것이다.(3:6) 또한 고통과 시련을 인내함으로 걸을 수 있는 것은 그 아픔의 원인이 무엇인지 알기 때문이다. 부름받은 이들에게 징계는 단순한 처벌과 다르다. 그것은 참된 미덕을 갖추어 나가기 위한 교정의 일부이며 기쁨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단 한 가지만을 가르친다면: 여호와 신뢰

오직 단 한 번만, 단 한 가지만을 가르친다면 당신은 자녀에게 무엇을 가르칠 것인가? 부모와 선생님, 세상과 만물에서 단 하나를 배운다면 당신은 무엇을 배울 것인가? 필자는 돈을 어떻게 관리해야 하는지 교육과정 속에서 제대로 배워본 적이 없다. 목돈이 생기면 적금에 들라고, 투자를 하려면 증권을 사고 분산투자를 하라고, 부동산 계약은 이렇게 하라고 아무도 말해주지 않았고, 불의한 공권력과 권력자에 맞서서 시민들을 조직하고 항거하는 방법을 학교에서는 가르쳐 주지 않는다. ‘성’(sex)에 관한 체계적인 지식 또한 기껏해 봐야 수백 명이 들어가는 강당에 학생들을 밀어넣고 조그만 TV 모니터에 다큐멘터리 하나를 보여준 것이 전부였다. 이성을 만나고 관계를 맺고 살고 결혼하고 자녀를 낳고 기르는 방법은 생존을 위해 필수적인 것이지만 누구도 말해주지 않는다. 사실 잠언은 이러한 현대사회 생존에 필수적인 지식과 다소 동떨어진 수천 년 전 일상의 잔잔한 교훈들을 전달할 뿐이다.
하지만 그 속에는 시간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진실이 숨어 있다. 그것은 바로 여호와에 대한 신뢰(잠 3:5, 7, 11-12, 26)이다. 그것은 궁극적인 영광을 약속한다. 사사기는 철저한 배교와 도덕적 혼돈(케이아스)의 상황을 증언한다. 책 제목은 사사기이지만 내용은 사사들의 타락과 제사장들의 타락을 증언한다. 그리고 사사기 저자는 이스라엘이 멸망하고 그곳이 텅 빈 곳이 된 이유를 질문한다. 이스라엘은 과거의 숱한 역사 속에서 학습했다. 그들의 정치력, 군사력이 부족해서 바벨론으로부터 패망했거나 셀레우코스 제국의 핍박과 로마제국의 압제를 당한 것이 아님을 말이다. 그 원인의 중심에는 여호와와 맺은 언약과 그의 계명을 무시한 쓰라린 역사가 있다. 이 역사로부터 무언가 배워야 한다.

징계의 가치, 부모의 역할

3장 11-12절은 고통을 사랑과 애정의 관점에서 말한다. 물론 그 무엇으로도 이 고통의 관점을 완벽하게 설명하긴 힘들 것이다. 훈육이 폭력의 대물림이 되거나, 훈육이라는 이름의 학대가 되어서는 물론 곤란하다. 아무리 여린 것이라도 끊임없이 믿고 기다려 줘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사랑과 신뢰에 기반한 훈육과 교정이 없이는 그 누구도 현재의 “나”가 되지 못한다. 〈소년심판〉(2022)이라는 넷플릭스 드라마의 첫 에피소드는 흉악한 토막살인을 저지른 한 소녀가 촉법소년에게 죄를 뒤집어씌운 이야기를 다룬다. 20년 형의 법원 판결 후, 두 담당 판사는 이런 대화를 나눈다. 좌배석 판사는 이 아이들에게 교도소가 정말 최선일지 회의적인 시각을 표명하고, 형을 살면서 아이들이 진실로 변화되기 원하는 소망을 드러낸다. “걱정돼서요. 모든 처분을 받고 어른이 돼서, 그다음요.” 이에 우배석 판사는 이렇게 말한다.

아무리 판사라도 그 근본까지 바꿔 줄 순 없어. 부모의 역할이지, 그건. 본인 잘못이 얼마나 큰지 깨닫게 해준다면. 근데 없을 거야, 그다음은. 그 악랄한 범죄를 자기 자식이 저질렀는데 부모는 참석조차 안 했어. 부모가 노력하지 않으면 자식은 변하지 않아.

우배석 판사는 악랄한 살인을 저지른 이 아이를 마지막까지 사랑해주고 변화시켜 줄 사람은 그 누구도 아닌 부모라고 말한다. 그렇다. 아이들은 끔찍한 살인사건의 가해자이지만, 결국 그와 같은 괴물을 만든 것은 부모의 무지와 무관심이다.
다른 한편으로 우리 사회가 엇나간 십 대 아이들을 법의 테두리 안에서 온전히 징계하지 못했을 때 초래할 수 있는 폐해들을 인지할 필요가 있다. 우배석 판사는 아파트 위에서 벽돌을 떨어뜨려 자신의 아들을 사망에 이르게 했던 십 대들이 또다시 집단 성폭력 사건에 연루되었음에도 반성하지 않자 이렇게 말한다.

아이 하나를 키우려면 온 마을이 필요하다는 말이 있지. 이를 거꾸로 말하면, 온 마을이 무심하면 한 아이를 망칠 수도 있단 뜻도 돼. 과연 피해자 강선아에게 가해자가, 저 아이들뿐일까? 누구도 비난할 자격 없어. 모두가 가해자야.

그렇다. 오늘날 소년들의 범죄의 책임은 그들을 따뜻하게 품어주고 사랑으로 가르쳐 주지 못한 모든 어른들과 사회의 책임일 것이다.

주(註)
1 “잇따른 청소년 범죄에 ‘촉법소년 연령 낮추자’ 다시 논란”, 「한국일보」, 2021년 12월 19일.
2 Michael V. Fox, “Who Can Learn: A Dispute in Ancient Pedagogy,” in Wisdom, You Are My Sister, ed., Michael L. Barre (Washington DC: CBAA, 1997), 62-77.
3 마인홀트는 잠 3:3-12에서만 ‘가르침’(Hauptteil)과 ‘결과’(Schluß)로 각각 나누어 생각한다. Arndt Meinhold, Spruche Kapitel 1-15 (Zurich: TVZ, 1991), 72.
4 Bruce K. Waltke, The Book of Proverbs Chapters 1-15 (Grand Rapids: Eerdmans, 2004), 241.
5 LXX(70인역; Codex Vaticanus)에서 “네 마음판에 새기라”라는 표현은 누락되지만, 마소라 사본(MT), 타르굼(Vg), 불가타(Tg), 시리악(Syr)은 이를 포함하는데, 마소라 사본은 이 부분이 잠 7:3에서 온 것으로 본다.
6 William McKane, Proverbs: A New Approach (London: SCM, 1970), 292; 대표적으로 다음을 참고하라. Prophets and Wise Men (London: Trinity, 1984).
7 Roger N. Whybray, Proverbs (Grand Rapids: Eerdmans, 1994), 62; Michael V. Fox, Proverbs 1-9 (NewYork: Doubleday, 2000), 149
8 Fox, Proverbs 1-9, 150.
9 Whybray, Proverbs, 63.
10 Richard J. Clifford, Proverbs (Presyterian Publishing Corporation, 1999), 52
11 Roland Murphy, Proverbs (Thomas Nelson Inc., 1998); Whybray, Proverbs, 64.
12 10a절에서 ‘풍성해진다’를 뜻하는 ‘싸바’(שׂבע)는 이어지는 10b절의 ‘포도주’와 병렬을 이루는데, 어떤 경우에 이 구문은 ‘곡물’(שׁבר)로 읽히기도 한다.(LXX)
13 Raymond C. Van Leeuwen, “Proverbs” in The New Interpreter’s Bible (1997), 49.
14 Fox, Proverbs 1-9, 152.
15 Whybray, Proverbs, 64.


권지성|영국 더럼대학교에서 구약학을 전공하여 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스위스 취리히대학교와 로잔대학교에서 연구교수로 히브리 성서 및 제2성전기 문헌을 연구하였다. 저서로 Scribal Culture, 『특강 욥기』, 『특강 전도서』 등이 있다. 현재 기독연구원 느헤미야에서 전임연구위원으로 일하고 있다.

 
 
 

2022년 4월호(통권 76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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