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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me > 기독교사상 > 성서와설교 > [르네 지라르의 성서 읽기 12 (마지막회)]
성서와설교 (2022년 1월호)

 

  연재를 마치며: 지라르의 신학과 윤리, 그리고 역사관
  

본문

 

지라르는 인류학자로서 종교를 연구했다. 그는 인류가 종교의 자식이라고 본다. 인류를 종교의 자식으로 보는 지라르의 주장은 두 가지 차원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첫째, 과거에 인류는 오랫동안 희생제의를 통해 공동체의 붕괴를 막고 종을 보존할 수 있었다. 희생제물을 드리는 종교 없이는 종의 보존이 불가능했다는 점에서 인류는 종교의 자식이라고 할 수 있다. 모방욕망에서 생긴 경쟁과 증오로 인간사회가 피바다가 되는 재앙을 막기 위해 인류는 집단살해를 통한 희생양의 피를 신에게 드렸다. 재앙을 막고 복을 비는 종교는 인류 역사에서 오랫동안 정치와 문화의 핵심을 차지했다. 재앙의 본질은 인간의 상호폭력이고 복은 평화이다.
둘째, 기독교의 출현 이후 인류는 희생양 만들기의 폭력성을 인식하고 지극히 작은 자들을 집단적 박해로부터 구출해내는 제도적 진보를 이룩해왔다. 인류의 진보는 기독교의 영향이며, 그 점에서 인류는 종교의 자식이다. 개인의 인권과 민주주의와 복지제도의 출현은 희생양에 대해 관심을 기울였던 기독교 문화의 산물이라고 지라르는 본다. 오늘날 대다수의 인류는 기독교 문명의 산물인 인권과 민주주의의 가치를 추구하고 있다. 민주주의와 인권이 기독교의 산물이라는 것은 사회학자 하버마스를 비롯한 많은 학자들도 주장하는 바이지만, 지라르는 특히 희생양 메커니즘에 초점을 맞추어 설명한다.
물론 기독교 문명권이 저지른 노예무역이나 식민지 개발 등의 죄악상을 지라르가 모르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식민지 개척은 아시리아 이후 모든 제국주의의 산물이라는 점, 그리고 노예무역은 기독교 문명이 아니라 이슬람에서 대규모로 시작되었다는 점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다. 인류는 아직 희생양 만들기를 극복하지 못했다. 기독교 역사에서 보이는 죄악상들도 자연사를 벗어나지 못한 인간의 보편적 모습을 보여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과거를 통렬하게 반성하고 회개하는 모습 역시 기독교 문명의 특징이며, 그것은 희생양 만들기를 비판하면서 출발한 기독교 신앙의 발로라고 지라르는 주장한다.
그러나 지라르는 동시에 기독교 근본주의를 매우 경계한다. 그들은 성서의 내용을 모두 하나님의 계시라고 봄으로써 구약성서에 있는 자연종교의 흔적까지도 계시의 말씀으로 받아들인다. 또한 그들의 지나친 배타주의는 성서의 하나님을 정복의 신으로 만든다. 그들은 종말의 재앙을 하나님이 내리신다고 믿는다. 그런 신앙은 정복과 폭력의 신들을 우상으로 규정한 성서의 계시와 거리가 멀다. 물론 지라르도 인류가 대재앙으로 인해 묵시적 종말을 맞이할 수 있다는 역사관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대재앙은 인간의 폭력성이 통제되지 못할 때 벌어질 전쟁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이 전 지구적으로 현실화된다면, 그것은 인류가 자초한 자멸이다. 하나님의 재앙으로 보면 안 된다.
지라르는 인문주의를 신뢰하지 않는 것 같다. 인류학자로서 지라르는 선한 모델이 인간 밖에서 제시될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이 말은 자연종교가 아닌 계시종교가 인류학적 차원에서 요청된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다. 기독교의 십자가는 폭력의 악순환을 선순환으로 바꾸어 인류를 구원할 영원한 선한 모델을 제시했다. 그렇게 인류학과 신학이 만난다. 인류학의 관점에서 볼 때에도 인류를 구원할 길은 기독교의 십자가 신앙에 있다는 말이다. 십자가의 예수를 인간이자 신으로 믿는 기독교 교리를 지라르는 인류학적 계시와 신학적 계시의 일치로 본다.
지라르의 인류학이 신학에 주는 의미에 대해서는 상세하게 살필 부분이 많다. 그러나 여기서는 기독교 교리에 대한 지라르의 언급을 짤막하게 설명하고 그의 윤리관과 역사관을 간단히 살펴봄으로써 연재를 마치고자 한다.

지라르의 신학: 원죄론과 속죄론

지라르의 글을 살펴보면 그가 기독교의 전통 신학에 충실하고 기독교의 오래된 교리를 매우 소중하게 다루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근대 독일 관념론의 영향을 받은 자유주의 신학이나 실존주의 신학, 그리고 역사주의 신학 등에 대해 지라르는 비판적 견해를 가지고 있다. 반면에 기독교 초창기에 형성된 교리들을 인류학적으로 뒷받침하고 중세 신학의 가치를 되살리려는 경향을 보인다. 그는 현대 신학에서 멀리하는 원죄론과 속죄론, 삼위일체론에 중요한 의미를 부여하는데, 여기서는 원죄론과 속죄론만 살펴보도록 하자.
지라르에게 기독교의 원죄론은 인류학적 사실과 연관된 신학적 계시의 산물이다. 수시로 공공의 적을 만들어 피를 보아야만 평화를 유지할 수 있는 인간 세상의 폭력성, 그것이 바로 인간의 원죄이다. 다시 말해서 원죄란 희생양을 만드는 무의식적 박해인데, 그 박해는 스캔들 때문에 생겨난다. 이웃이 가진 것을 갖고 싶어 하는 인간의 모방욕망은 서로 스캔들을 일으키고 스캔들에 걸려 넘어져, 결국 라이벌에 대한 증오심이 생기고 누군가를 희생양으로 만드는 폭력으로 이어진다. 그렇게 보면 스캔들을 일으키는 이웃 숭배가 인간의 원죄라고 할 수도 있다. 이웃을 모델로 삼는 이웃 숭배, 곧 원죄는 집단적 죄의 권세로서 초월적 힘을 가지고 개인을 지배한다. 그런 의미로 지라르가 현대 신학에서 잘 사용하지 않는 ‘사탄’이라는 말을 되살리기 원한다는 것은 앞의 글들에서 밝힌 바 있다.
필자가 볼 때 지라르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전통적 원죄론에 매우 가깝게 다가선다. 스캔들로 말미암은 희생양 만들기는 창세 때부터 벌어진 일이므로 조상의 죄이기도 하고, 지금도 인간이 무지 속에서 죄를 죄로 인식하지 못하여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죄이다. 희생양의 피를 통해 종을 보존하고자 했던 자연선택의 유전자가 인류에게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렇게 보면 논란이 많은 아우구스티누스의 유전설도 인류학적 관점에서 타당하게 받아들여질 수 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인간이 현재 벗어나지 못하는 죄의 힘을 가리켜 인류의 조상인 아담의 죄가 유전된 것이라고 설명했다.
물론 유전설과 관련된 복잡한 문제가 있다. 죄의 유전자를 타고난다면 인간에게 죄에 대한 책임을 물을 수 없지 않은가? 현대인들이 원죄론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이유도 거기에 있다. 지라르는 무엇이라고 말할까? 지라르는 희생양 메커니즘을 과거부터 지금까지 이어지는 원죄로 보지만, 그것이 운명론이나 과학적 결정론은 아니라고 말한다. 다시 말해 지금이라도 인간이 이웃을 모방하지 않고 그리스도를 모방하면 스캔들의 폭력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뜻이다. 인간은 스캔들에서 벗어날 수 있는데 벗어나지 않고 있는 것이다. 벗어나지 않는 게 아니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표현이 더 맞을 수도 있다. 개인이 군중과 세상을 따라가지 않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다. 좁은 길이요 어려운 일이지만 여전히 그것은 개인의 책임이다. 개인은 자유와 평화의 길을 스스로 선택하지 않고 있다.
지라르의 언급을 잘 살피면 그가 아우구스티누스의 원죄론을 매우 잘 알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아우구스티누스는 한편으로 아담의 죄가 유전되고 인간이 죄를 타고난다고 말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현재의 인간이 죄의 필연성에 ‘자유롭게’ 묶여 있다고 말한다. 죄를 짓지 않을 수 있는데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상태를 만든 책임이 개인에게 없지 않다는 말이다. 결국 아우구스티누스의 원죄론과 유전설은 인간의 구원을 하나님에게서 찾는 데 초점이 있다. 인간의 비극적 상황을 탈출하는 일이 인간 본성의 능력으로 해결되지 않고 하나님의 은총으로만 가능하다는 말이다. 유전설을 말한다고 해서 죄에 대한 개인의 책임이 없다는 뜻이 아니다. 지라르 역시 죄의 권세 곧 원죄를 벗어나는 일은 성령의 역사라고 말하고, 세상을 따르지 않고 성령을 따를 책임이 개인에게 있음을 말한다. 여러 가지 측면에서 지라르는 전통적인 원죄론을 인류학적 관점에서 매우 중요하게 받아들이고 있다.
이와 관련해서 주목할 부분이 속죄론이다.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인류의 죄를 대속했다고 믿는 속죄론은 현대 신학에서 중요하게 다루어지지 않는다. 그러나 지라르는 전통적 속죄론이 중요한 인류학적 의미를 담고 있다고 본다. 그는 특별히 오리게네스를 비롯한 동방교회 교부들의 속죄론이 십자가의 인류학을 잘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오리게네스는 십자가에서 일어난 대속 사건을 사탄이 하나님에게 속은 것으로 설명했다. 인류의 영혼이 죄 때문에 사탄의 손에 넘어가 있을 때, 하나님은 인류를 구하기 위해 자신의 아들을 희생시켜 사탄에게 속전으로 주었다. 십자가에서 죽은 하나님의 어린 양 그리스도를 대가로 받은 사탄은 인간을 풀어주었다. 그러나 사탄이 속았다. 그리스도는 희생양이 되어 죽었지만 부활하여 사탄의 손에서 벗어났기 때문이다.
사탄에 대한 그리스도의 승리를 말한 오리게네스의 속죄론은 십자가의 인류학에 잘 들어맞는다. 십자가의 인류학이란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희생양 메커니즘을 역으로 이용해서 희생양 메커니즘을 종식시켰음을 가리킨다. 지라르에게 사탄은 무의식적으로 작동되는 희생양 메커니즘을 가리키니, 결국 하나님은 사탄을 이용해서 사탄을 이겼다고 할 수 있다. 사탄이 속았다고 말한 오리게네스의 속죄론은 지라르의 인류학적 관점과 일치한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세상의 희생양이 된 그리스도가 희생양을 만드는 세상의 죄의 권세를 이겼음을 의미한다. 그리스도의 피로 인간이 죄 사함을 받았다는 속죄론이 의미하는 바가 그것이다.
죄의 권세에서 해방된 그리스도인들은 희생양 만들기에 가담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영향력이 커진다면, 이 땅에서 무고하게 희생되거나 억압되는 이들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가 커질 것이다. 그것은 역사의 진보를 의미한다. 이는 그리스도가 약속한 성령의 역사로 일어날 일이다. 그렇게 된다면 십자가 때문에 하늘로부터 떨어진 사탄(눅 10:18)이 더 이상 이 땅에서도 발을 붙이지 못하게 될 것이다.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처럼 땅에서도 이루어질 것이다.
기독교의 속죄론은 11세기에 이르면 안셀무스에 의해 새롭게 변신한다. 안셀무스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인한 인류의 대속 사건을 하나님의 정의와 사랑을 모두 만족시키는 일로 설명했다. 속죄론에서 사탄은 사라지고 십자가의 대속을 하나님 내부에서 벌어진 사건으로 보는 것이다. 여기서 자세한 설명은 생략하자. 어떻든 ‘만족설’(satisfaction theory)이라고 불리는 안셀무스의 속죄론이 등장한 이후에 이른바 ‘속량설’(ransom theory)로 불리는 동방교회의 속죄론은 쇠퇴한다.
필자가 볼 때 서방교회의 만족설은 속량설에 등장하는 사탄이 존재론적 실체로 여겨질 것을 염려한 결과로 보여진다. 윤리적 차원을 강화해서 좀 더 합리적으로 그리스도의 대속을 설명하고자 한 노력이 안셀무스의 만족설로 보여진다. 그러나 지라르는 동방교회 교부들의 속죄론이 약화된 것을 아쉬워한다. 희생양 메커니즘은 여전히 큰 위력을 가지고 인류를 조종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라르는 사탄이란 말을 살리고 그리스도의 대속을 사탄에 대한 하나님의 승리로 설명하는 것이 옳다고 보는 것 같다.

지라르의 윤리

지라르는 자신의 윤리 사상을 체계적으로 말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증인으로서 취할 태도를 순교로 본다는 점에서 지라르의 윤리는 초대 교회의 박해의 윤리와 통하는 면이 있다. 박해의 윤리는 상대의 폭력에 맞대응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당하는 것을 의미한다. “악을 악으로 갚지 말라.”는 산상수훈의 말씀에 기초한 윤리라고 할 수 있다. 바울 역시 로마서에서 이 말씀을 기독교 윤리의 핵심으로 삼고 있으며, 교부들이나 루터나 칼뱅 같은 종교개혁자들이 강조하는 기독교 윤리의 핵심 구절도 같은 말씀이다.
지라르의 윤리도 그러한 기독교 전통을 따른다고 보면 된다. 그러나 각론으로 들어가면, “악을 악으로 갚지 말라.”는 말씀은 역사적으로 몇 가지 다른 의미로 해석되어 왔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지라르의 윤리는 산상수훈의 말씀을 비폭력 평화주의로 해석하지 않는 것 같다. 산상수훈에 바탕을 둔 톨스토이는 국가의 형벌권을 인간에 대한 폭력으로 규정한다. 그는 또한 산상수훈에 기초해서 모든 전쟁에 반대한다. 그러나 지라르는 사법제도를 통한 법의 강제력을 중시한다. 인간의 폭력성은 일차적으로 강제력으로 억제할 필요가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전쟁 문제에 대해서도 지라르는 불가피한 방어 전쟁을 인정하는 것 같다.
그 점에서도 지라르의 윤리는 기독교의 주류 전통과 일치한다. 아우구스티누스와 루터, 칼뱅 등은 모두 국가의 공권력이 평화를 위해 꼭 필요하다고 보았다. 아우구스티누스에서 시작된 ‘정당한 전쟁론’(Just war theory)은 중세 아퀴나스를 거쳐 루터와 칼뱅에게 그대로 이어진다. “악을 악으로 갚지 말라.”는 말씀에 대한 기독교 주류 전통의 해석은 악을 징계하되 악인은 사랑하라는 말로 정리할 수 있다. 세상 나라의 원리인 법적 정의와 하나님 나라의 원리인 사랑을 모두 만족시키는 해석이다. 죄인을 처벌하되 증오하지 말아야 한다. 교부들이나 루터와 칼뱅의 문헌을 보면 악인에게 벌을 가하되 처벌하는 자의 주관적 감정을 매우 중시 여긴다. 증오심 없이 처벌하라는 것이다. 실천하기 어려운 가르침인데, 왜 기독교는 그토록 증오심을 경계했을까? 지라르가 어느 정도 답을 주는 것 같다.
필자가 볼 때 지라르의 윤리적 관심도 증오심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지라르는 약자들의 증오심도 경계한다. 다시 말해서 무고한 희생양을 옹호하는 지라르의 윤리는 단순히 약자의 편에 서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마 25:40)고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지라르에 따르면 ‘지극히 작은 자’는 약자를 가리키지 않고 무고한 희생양을 가리킨다. 예수 자신이 세상의 희생양이었다. 그러므로 누구든 세상의 희생양이 되는 자를 옹호하고 돕는 일은 희생양이었던 예수 자신을 돌보는 것과 같다. 물론 보통 사회 내의 약자나 소수자가 희생양이 될 가능성이 크다. 그러므로 지극히 작은 자는 약자와 소수자를 가리킬 경우가 많다. 그러나 평소에 강자로 여겨진 자라 할지라도 어느 날 갑자기 희생양에 굶주린 군중의 먹이가 될 수도 있다. 과장된 죄목을 뒤집어씌워서 말이다. 그럴 때 그는 세상에서 홀로 고립된 지극히 작은 자이다.
지라르는 이렇게 말한다. “기독교 윤리는 강자 앞에서 약자의 편을 드는 편견이 아니라, 폭력의 악순환을 막으려는 영웅적인 저항이다.” 강자 편이냐 약자 편이냐보다도 훨씬 중요한 것은 증오심의 편을 들지 않는 것이다. 순교자들도 자기를 죽이는 자들에 대한 증오심을 갖지 않았다. 폭력에 대해 폭력으로 대항하지 않을 뿐 아니라 내면에서 박해자에 대한 증오심을 갖지 않는다. 증오심은 끝없이 살아남기 원하는 폭력을 살아남게 해주기 때문이다. 증오심을 배제한 초대 교회의 박해의 윤리는 사탄의 권세를 이길 수 있었다.
그와 관련해서 증오심의 반대인 사랑이 기독교 윤리의 핵심으로 떠오른다. 지라르는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하라.”는 말씀에 기독교 윤리의 모든 것이 들어 있다고 말한다. 이것은 복음서에 나오는 예수의 말씀인데 바울도 그 말씀을 상기시키며 말했다.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탐내지 말라 한 것과 그 외에 다른 계명이 있을지라도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그 말씀 가운데 다 들었느니라.”(롬 13:9)
필자는 이 말씀을 이렇게 본다. 탐내지 말라는 계명은 지라르의 말대로 모방욕망을 경계하는 계명이다. 모든 죄의 핵심을 가리키는 계명이다. 그렇다면, 탐내지 말라는 계명도 이웃을 자신처럼 사랑하라는 계명에 들어 있다는 바울의 말은 결국 모방욕망이 일으키는 죄를 해결하는 길이 이웃 사랑에 있다는 말이다. ‘이웃’ 사랑이라는 말은 흔한 말이지만 지라르의 모방욕망 이론의 시각에서 보면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멀리 있는 사람이 아니라 나와 무슨 관계가 있는 사람만이 모방과 경쟁의 대상이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하라”는 구절을 지라르는 이렇게 해석한다. “너 자신을 사랑하는 만큼만 이웃을 사랑하라.” 매우 독특하고 이상하게 보이는 해석이다. 그런데 여기에 덧붙여 지라르는 인간이 자기 숭배와 이웃 숭배에 빠져 있다고 말한다. 더 자세한 설명은 없지만, 자기 숭배와 이웃 숭배라는 말이 지라르의 의도를 파악할 수 있는 핵심 낱말로 보인다. 두 낱말을 열쇠로 삼아 필자는 다음과 같이 지라르의 사랑의 윤리를 정리하고자 한다.
사실 인간은 자기를 사랑하지 못하고 이웃 숭배에 빠져 있다. 인간은 자기를 내팽개치고 이웃을 부러워하며 이웃을 쳐다보며 산다. 결국 중요한 것은 인간이 자기를 사랑하는 일이고, 자기를 사랑하는 만큼 이웃을 사랑하는 일에 구원의 길이 있다. “너 자신을 사랑하는 만큼만 이웃을 사랑하라”는 지라르의 말은 일단 그런 뜻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지라르의 사랑의 윤리는 이웃 사랑만큼 자기 사랑을 중요시한다고 볼 수 있다. 아니, 이웃보다 먼저 자기를 사랑해야 된다는 말로 들린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하라”는 구절은 “먼저 너 자신을 사랑하고, 그만큼 이웃을 사랑하라”는 뜻으로 풀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은 기독교가 말하는 사랑의 윤리와 어긋나는 것이 아닐까? 그리고 인간은 시키지 않아도 자기를 사랑하는데 자기 사랑을 윤리 규범으로 삼을 필요가 있을까?
그렇지 않다. 인간은 자기를 사랑하지 못하고 자기 숭배에 빠져 있다. 자기 숭배란 무엇일까? 지라르의 모방이론을 기초로 생각해보면, 인간의 자기 숭배는 이웃 숭배에서 생긴다. 나의 욕망과 결정의 기원이 남에게 있다. 지라르는 인간이 결코 자율적 주체가 아님을 강조한다. 나의 중심은 나에게 있지 않고 이웃에게 있다. 모방욕망에 의해 인간은 이웃을 모델로 삼아 이웃 숭배에 빠져 있다. 숭배는 스캔들에 걸리게 만들고 이웃 숭배는 이웃을 경쟁자이자 라이벌로 만든다. 그러면서 나는 자기 숭배에 빠지게 된다. 이웃 숭배에 대한 대응으로 자기 숭배가 생기는 것이다. 즉 자기 숭배는 지나친 자기중심적 존재를 가리킨다. 중심을 남에게 내준 반작용으로 생긴 것이 자기 숭배이다. 중심을 라이벌에게 내주고 그와의 경쟁 관계에서 이기기 위해 인간은 과도하게 자기중심적 존재가 되는 것이다. 어떻게 보면 인간의 자기 숭배는 이웃 숭배의 결과인 결핍감과 열등감에서 생겼다고 볼 수 있다.
이웃 숭배는 이웃을 사랑하지 않는 것이고, 자기 숭배는 자기를 사랑하지 않는 것이다. 인간은 자기 숭배에 빠지지 말고 자기를 사랑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이웃 숭배에 빠지지 말아야 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인간은 이웃 숭배에 빠지지 않을 수 있을까? 여기서부터는 신학적 계시가 필요하다. 모방욕망으로 인한 이웃 숭배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인류학적 고찰은 종교적이고 신학적인 계시를 요청한다. 이웃 숭배는 곧 우상 숭배이다. 이웃을 숭배한다는 것은 그들이 가진 권력과 돈과 힘을 숭배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웃 숭배를 벗어난다는 것은 우상 숭배를 벗어나는 일이고, 우상 숭배를 벗어나는 일은 하나님에게 순종하고 하나님을 따르는 일이다. 하나님을 모델로 삼아야 한다. 또는 그리스도를 모델로 삼아야 한다. 지라르에게 그리스도는 자기를 내세우지 않고 하나님을 모델로 삼은 분으로서 인간의 선한 모델이다.
타고난 모방욕망 때문에 인간은 모델이 필요하다. 인간은 이웃을 모델로 삼아 군중과 세상을 따를 것인지, 아니면 그리스도를 모델로 삼아 하나님에게 순종하며 하나님을 따를 것인지의 갈림길에 서 있다. 하나님에게 순종하는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다. 창세기 3장은 인간이 세상과 군중의 유혹에 빠져 하나님을 사랑하지 못하고 이웃을 숭배하는 우상 숭배의 길로 들어섰음을 보여준다. 선택된 백성인 이스라엘도 그토록 우상 숭배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성서의 기록도 결국 이웃 숭배에서 벗어나기 힘든 인간의 성향을 말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을 가리켜 하나님 숭배라고 하지 않는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중심을 남에게 내주지 않고 자기 중심을 갖게 되기 때문이다. 이웃을 모델로 삼지 않아 소유가 아닌 존재 자체로 자기 존중감을 갖게 된다. 말하자면 무(無)에서 자기를 긍정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amor dei)이 자기를 사랑하는 것(amor sui)이라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유명한 말도 그런 뜻으로 풀 수 있다.
결국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모방욕망에서 비롯된 자기 상실과 희생양 만들기의 폭력을 해결하는 열쇠이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앞에 “하나님을 사랑하라”가 와야 한다. 하나님 사랑에서 자기 사랑이 가능해지고 자기 사랑에서 이웃 사랑이 나온다. 예수께서 가장 큰 계명을 사랑으로 말씀하시되, 하나님 사랑을 첫째로 말하고 이웃을 자신처럼 사랑하는 것을 둘째로 말한(막 12:28-31) 까닭도 그렇게 이해할 수 있다.
결국 지라르의 윤리는 근대적 자율이 아닌 신율(theonomy)의 윤리이다. 인간은 종교의 자식으로 돌아와야 한다는 것이 지라르의 생각이다. 그 점과 연관해서 지라르는 정치로 세상을 바꾸는 것보다 인간 내면이 바뀌는 것을 더 중요하게 보는 것 같다. 그의 사회 윤리는 개인 윤리에 기초를 두고 있다. 다시 말해서 지라르는 변화된 개인의 삶 곧 그리스도의 증인들의 삶이 진정으로 세상을 바꿀 수 있는 힘을 만든다고 보는 것 같다. 그래서 세상을 바꾸고자 하는 정치 이데올로기에 사로잡힌 근대 사회에 대해 지라르는 비판적이다. 그 점에서 지라르의 윤리 사상은 종종 보수적인 측면을 보일 수도 있다.

지라르의 역사관

지라르는 역사가 좋은 쪽으로도 발전하고 나쁜 쪽으로도 발전한다고 본다. 역사가 진보하고 있지만 대재앙으로 인한 종말의 가능성도 그만큼 커져가고 있다. 이러한 진단은 근대 문명에 대한 평가에서 나온 것이기도 하다.
근대에 들어 서구에서 신분제도나 노예제도가 폐지되고, 자유와 평등의 가치 아래 민주주의와 인권이 확립된 것은 진보이다. 근대의 진보는 희생양에 대한 기독교의 관심이 이뤄낸 결과라고 지라르는 평가한다. 그는 20세기에 가장 큰 모방의 대상은 희생양에 대한 관심이었다고 본다. 억압받는 자에 대한 관심이 경쟁적으로 일어나고 평등이 강조되었다. 정치 이념이나 종교 전통으로 인해 억압적 통치 밑에 있는 나라들도 이전과 같은 전체주의적 통제가 불가능해졌다. 자유와 평등의 민주적 가치는 지구 전체로 전파되어 온 세계의 시민들을 깨우고 독재자들을 위협한다. 지라르가 볼 때 이런 현상은 희생양에 대한 관심이 전 세계적으로 모방되면서 생겨났다. 말하자면 기독교 정신이 인류의 선한 모델이 되고 있는 셈이다.
그러나 근대의 진보는 차이를 없애서 경쟁을 강화시켰다. 지라르에 따르면 고대 사회에는 경쟁이 없었다. 경쟁은 증오와 폭력을 증가시켜 사회의 멸망을 가져올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다양한 차이를 차별로 만들어 모방을 차단했다. 신분질서나 남녀의 차이나 부모와 자식의 차이나 어른과 아이의 차이도 모두 차별로 연결되었다. 차별은 관습과 제도로 일상화된 희생양을 만든다. 고대 사회는 희생제의나 전쟁을 통해 희생양의 피를 신에게 바치는 일 외에도 각종 차별을 통해 희생양 메커니즘을 제도화했던 것이다. 그것이 고대 사회에서 평화를 유지하는 방법이었다.
근대 이래로 서구 유럽에서 각종 차별을 철폐하기 시작한 것은 그만큼 희생양을 줄이고자 하는 관심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런데 차별을 없앤다면 모방욕망으로 인한 폭력적 충돌을 피하고 평화로운 세상을 이룩할 수 있을까? 서구인들은 무의식적으로 그런 자신감을 가진 것 같다. 그 자신감의 근거는 자율적 주체의 등장에 있었다. 근대인의 특징은 자율성에 있는데, 자율적 주체는 자기 세계에 충실한 개성 있는 인간을 의미한다. 개인의 자기 세계가 강한 만큼 이웃을 모방하고 숭배하는 힘은 약해질 것이라고 믿었던 것 같다.
그러나 바로 그 점에 지라르가 생각하는 불안 요소가 들어 있다. 자유와 평등을 내세운 근대의 자율 이성은 원래 기독교에 근거를 둔 것이었지만 기독교에서 벗어났다. 희생제물을 드렸던 옛 종교는 물론이고 십자가의 기독교도 배척한 근대의 세속화된 사회는 인간의 폭력성을 정화할 수단을 잃었다. 과거에 인류는 경쟁을 막기 위해 타율적 사회에 살았다면, 근대 이성은 타율(heteronomy)을 벗어나기 위해 자율(autonomy)을 강조하면서 동시에 신율(theonomy)도 벗어났다. 그 결과 근대의 자율적 주체는 절제를 상실한 욕망과 탐심의 주체가 되었고, 결과적으로 모방욕망은 더 커졌다. 현대인은 위험한 무한경쟁의 사회에서 살게 되었다.
헤겔의 변증법은 무한경쟁이 몰고 올 폭력을 정당화하는 길을 열어주었다. 헤겔은 『정신현상학』에서 내가 타자와 만난 후에 다시 내게로 돌아오는 것을 주체라고 했다. 타자와 부딪힘으로써 즉자적 자아가 지양되고 발전된 자아가 생겨난다는 것이다. 그러나 지라르는 헤겔의 ‘지양’(Aufhebung)은 없다고 단언한다. 타자와의 관계는 근본적으로 모방과 경쟁의 관계이기 때문이다. 타자와 공존하는 인간사회의 기초는 폭력이다. 희생양 만들기는 사회의 성립을 가능하게 하는 기초 폭력(fundamental violence)이다.
헤겔이 말한 정반합의 변증법은 인간 사회의 기초 폭력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고 결과적으로 폭력을 키운다. 그 결과 헤겔의 정치철학은 공동체의 유지를 위해서 희생양 만들기를 정당화할 수밖에 없다. 헤겔 철학의 논리적 귀결이 그렇다. 실제로 헤겔은 말년의 작품인 『법철학』에서 국가 차원의 희생양 만들기를 찬양했다. 그는 국가를 위한 희생을 절대 정신의 자기실현과 연관시키며 전쟁을 정당화했다. 지라르가 헤겔 철학을 현대적 폭력의 기원이라고 평가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헤겔의 정치철학이 나치즘의 국가 사회주의에 영향을 주었고, 그의 역사 철학이 마르크스의 폭력혁명 사상에 영향을 준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지라르의 눈으로 볼 때 근대 이성이 초래한 무한경쟁은 종의 멸망을 초래할 대재앙을 예고한다. 무한경쟁은 차이를 없애고 결국 만인이 서로를 라이벌로 만들어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으로 인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지라르에 따르면 차이를 강조한 구조주의나 포스트모더니즘의 출현은 차이가 없어진 현대사회의 위기를 반영한다. 레비스트로스의 구조주의는 실체를 부정하고 차이만 인정했고, 자크 데리다는 차이 만들기(differantiation)를 강조했다. 지라르는 그들이 실체적 진리를 부정한 것을 비판하면서도 그들이 강조한 차이는 현대사회의 위기에 대한 반응으로 받아들인다.
참된 평화를 위해서는 차별을 없애면서도 차이를 유지해야 한다. 차이를 유지한다는 것은 군중에서 벗어나는 것을 가리킨다. 그때 인간은 이웃 숭배에 빠지지 않을 수 있다. 군중에서 벗어난 개인을 가리켜 지라르는 ‘참다운 개인’이라고 한다. 니체의 초인이나 하이데거의 현존재는 초개인주의로서 참다운 개인과 거리가 멀다. 말하자면 초개인주의는 이웃 숭배를 막지 못한다. 하이데거의 기초 존재론(fundamental ontology)은 희생양 메커니즘이라는 기초 폭력을 방조하거나 부추긴다. 그래서 지라르는 근대의 독일 철학이 광기를 지녔다고 평가한다.
그는 아우구스티누스의 구절을 인용해서 ‘참다운 개인’을 설명한다. “당신은 나의 내면보다 더 깊은 내면에 계시고, 내가 도달할 수 있는 높이보다 더 높은 곳에 계십니다.”(『고백록』, Ⅲ.6.11) ‘내면보다 더 깊은 내면’이란 도덕 양심의 자리인 인문주의적 내면보다 깊은 초월의 자리를 뜻한다. 나의 ‘안의 안’에서 신을 만나는 자는 세상으로부터 일단 벗어나 신 앞에 선 단독자를 가리킨다. 지라르는 기독교 전통을 따라 신 앞의 단독자에서 희생양 메커니즘을 극복할 인류 구원의 길을 찾았다.
근대 이성이 풀어놓은 모방욕망과 무한경쟁 때문에 지라르는 인류의 묵시적 종말을 경고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우주의 주인인 그리스도가 마침내 모든 폭력을 이기고 승리할 것이라고도 말한다. 그리스도의 증인들이 증가하고 그들의 영향력이 커지면서 일어날 일이다. 인류는 선택의 기로에 있다. 중요한 것은 대재앙을 막아야 한다는 것이며, 그러기 위해서는 사람의 마음이 변해야 한다. 그 일을 성공으로 이끌어가다 보면 하나님 나라가 은총으로 주어질 것이다. 지라르의 역사관을 정리하면 그렇다. 분명한 것은 지라르는 인류가 자기 힘으로 하나님 나라를 이룰 수 있다고 믿지 않는다는 점이다. 알베르트 슈바이처의 말을 다시 한 번 언급하면서 연재를 마친다. “하나님 나라는 역사의 연장에서 오지 않지만 역사와 무관하지도 않다.”

* 양명수 교수님의 연재 “르네 지라르의 성서 읽기”를 마무리합니다. 그동안 좋은 글 보내주신 교수님께 감사드립니다.-편집부

양명수|기독교윤리를 전공했다. 저서로 『아무도 내게 명령할 수 없다: 마르틴 루터의 정치사상과 근대』 등이 있다. 이화여대 기독교학과 명예교수이다.

 
 
 

2022년 4월호(통권 76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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