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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me > 기독교사상 > 성서와설교 > [신약의 성령론 설교 05(마지막회)]
성서와설교 (2021년 12월호)

 

  방언 기도, 바르게 설교하고 있나
  

본문

 

신학의 다양한 주제 중에서 20세기에 새롭게 부각된 것은 성령론이고, 성령론 중에서도 가장 많은 주목을 받은 것은 성령의 은사론이다. 성령의 은사 중에서도 소위 ‘핫 이슈’는 방언이다. 그래서 필자는 ‘신약의 성령론’ 시리즈의 마지막 주제로 방언을 택했다.
지난 한 세기 동안 방언에 대한 사람들의 의견은 크게 두 갈래로 갈렸다. 20세기 초 미국에서 오순절파 교인들이 방언을 시작하자 기존 교회의 신자들은 이들을 이단으로 취급했다. 1970-80년대 한국교회는 조용기 목사로 대표되는 방언을 하는 교회와, 옥한흠 목사로 대표되는 방언을 반대하며 제자훈련을 하는 교회로 갈렸다. 2008년에는 두 평신도(김우현과 옥성호) 사이에서 방언이 하늘의 언어인지, 마귀의 언어인지에 관해 논쟁이 붙었다. 이 논쟁은 신학자들에게 이어져 방언 체험의 유용성을 성서신학적으로 제시하는 필자와, 방언을 소극적으로 인정하여 그 체험의 제한성을 말하는 고신대 박영돈 교수의 논쟁이 있었다. 그 후 극렬한 논쟁은 잦아졌지만, 이 문제는 수면 아래로 가라앉은 것일 뿐 언제든 다시 떠오를 수 있는 것이다.
방언에 대한 사람들의 의견은 크게 세 가지가 있다. 첫째, 방언을 꺼려하는 입장이다. 둘째, 방언에 대해서 적극 찬성하는 입장이다. 셋째, 방언을 반대하지는 않지만, 그것이 적극적으로 나타나는 것을 경계하는 중도적 입장이다. 중도 입장도 방언 체험을 권유하는 것은 아니기에 반대 의견과 비슷한 것으로 보아, 이 글에서는 주로 반대 입장과 찬성 입장을 집중해서 소개할 것이다.

그들은 왜 방언을 꺼려하는가

현대 교회에서 일어나는 방언 현상을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일군의 사람들이 있다. 여기에도 몇 가지 입장으로 나뉜다.
오랫동안 방언에 대해서 부정적인 입장을 견지하고 있는 사람들은 개혁주의자들이다. 이들은 신학적인 이유로 방언을 반대한다. 방언을 비롯한 기적적인 은사들은 예수와 사도들에게만 허용되었던 것이기에 지금은 더 이상 그런 기적은 없다는 것이다. 혹은 방언을 계시적 은사로 분류하고 그것이 계속된다고 하면 신약성서가 완성된 이후에도 계시가 계속되는 것이기에, 방언을 인정하는 것은 계시가 완성되었다는 교리에 배치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필자가 판단하기에 이러한 주장의 근거는 신약성서에서 발견하기 어렵다. 신약성서 자체에는 교회 시대에 기적적인 은사가 종결되었다는 어떤 언급도 없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교회 시대에도 기적은 계속된다는 구절이 있기 때문이다.(요 14:12) 또 방언은 사람이 하나님께 하는 것이기에(고전 14:2) 계시적 은사가 아니며, 비록 방언 통역을 통해서 그 내용이 일부 밝혀지더라도 그것은 일상적인 것이기에 구원의 도리를 말하는 계시일 수 없다.
방언을 꺼려하는 또 다른 집단은 신학적으로 진보적인 입장을 견지하는 사람들이다. 흥미롭게도 신학적으로 양 극단인 보수주의자들과 진보주의자들 모두가 방언을 꺼려하는 것이다. 보수주의자들이 교리적 문제로 방언을 반대하는 반면, 진보주의자들은 주로 정치 이념 문제로 반대한다. 이들은 방언을 하는 사람들이 정치적으로 주로 우파에 속하고, 사회참여적 신앙에 이르지 않게 된다고 본다. 또한 내면적 신앙에 몰두한 나머지 사회정의 문제에 민감하지 않고, 게다가 인격의 성숙이라는 측면에서 방언을 하지 않는 신자들과 크게 다를 바가 없기에 방언을 신앙적으로 의미 있는 행위로 보지 않는다.
그런데 이러한 비판은 방언하는 것 자체에 근본적으로 어떤 문제가 있다는 것은 아니다. 진보적 신앙을 가진 사람들의 입장에서 볼 때 현재 방언하는 사람들의 대다수는 이념적으로 자신들 편에 서 있지 않다는 것일 뿐이다. 특이한 점 중 하나는 한국의 민중신학자들은 대부분 방언을 꺼려하는 데 반해, 서구의 민중신학 지지자들, 예를 들어 몰트만(J. Moltmann)은 방언을 반대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방언에 대해서 마뜩찮게 생각하는 또 하나의 그룹은 서구의 계몽주의 세례를 듬뿍 받아, 초자연적인 현상 자체를 인정하지 않는 신약학자들이다. 이런 사람들은 방언을 주로 종교사적으로 연구하여 방언을 헬라 종교나 문화에서 교회에 이입된 풍습으로 보려 하거나, 고린도전서 12-14장을 주석하면서 바울이 방언 혐오자였다고 주장한다. 이런 주장들은 주로 방언 연구 초기에 성행했지만, 현재는 방언이 유대교나 예수와 상관없이 이방 종교에서 기원했다거나 바울이 방언 혐오자였다는 극단적인 주장은 찾아보기 어렵다.

누가 방언을 환호하는가

20세기 초 미국에서 오순절 운동이 시작되면서 현대 교회에서 방언이 폭발적으로 체험되고, 이어서 1960년대 미국에서 이것이 일반 교회에까지 두루 퍼진 은사갱신 운동이 있었다. 그런데 사실 방언 체험이 교회에 광범위하게 퍼진 곳은 한국이다. 미국에서는 일부 교회에서 방언 현상이 나타난 것에 반해, 한국교회에서는 교파를 불문하고 방언 현상이 널리 나타난다. 초교파 학교인 평택대학교 피어선신학대학원에서 2년 전 필자가 채플 인도 중 즉석에서 조사한 바로는, 참석 학생 30명 가운데 한 사람을 제외하고는 모두 방언의 은사를 체험한 사람들이었다. 서울 소재 개혁주의 보수파 소속의 신학대학원 학생들의 방언 체험률을 그 학교 학생을 통해 조사해보니 대략 50%였다. 웨슬리안/오순절 교파 소속의 학생들의 체험률은 이보다 높다. 또 한국교회에는 상당한 정도의 평신도들이 방언 은사 체험이 있다. 담임목사가 방언을 적극적으로 찬성하지 않는 교회에서도 방언하는 사람은 많이 있다. 이것은 유럽이나 미국의 전통적인 교회의 모습과는 사뭇 다른 것이다.
그렇다면 누가 방언을 하고 있는가? 미국교회와 한국교회 공히 초기에 방언을 경험한 사람들은 주로 민초였다. 방언을 체험하고 계속해서 방언 기도를 행함으로 사람들은 복음적 한풀이 경험을 하게 되었다. 자신들의 답답한 마음을 성령이 직접 개입해서 같이 탄식하는 기도를 해줌으로써(롬 8:26) 사람들은 방언을 통해 해방감을 경험했던 것이다. 또 이성으로만 기도하는 것으로는 체험할 수 없는 것을 성령으로 기도하는(고전 14:15-17) 방언을 통해서 체험했던 것이다.
그런데 1990년대 이후에 방언을 체험하는 사람들의 사회적 지형이 바뀌었다. 이전에는 민초들과 여성들이 주로 방언을 경험했던 것에 반해, 온누리교회 등 성령 운동을 하는 교회에서 지적 엘리트들이 집단적으로 방언을 체험하는 일이 벌어졌다. 그래서 이 교회 출신의 사회적 엘리트들이 방언을 체험한 간증을 책으로 내기도 했다. 방언은 이제 더 이상 가난해서, 말주변이 없어서, 한 맺혀서 체험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 체험의 한 현상으로 자연스럽게 널리 퍼진 것이다. 신약성서 저자 중에서도 지성인에 속했던 바울은 자신이 방언을 하고 있다고 말했고(고전 14:18), 누가는 방언 현상을 생생하게 기록(행 2:4)한 것으로 보아 그 역시 방언 체험자인 것으로 보인다. 지적 엘리트가 방언을 체험하는 것은 초기 교회에서는 일반적인 현상이었던 것이다.

그들은 왜 방언을 하는가

많은 한국교회 신자들이 방언을 한다. 비교적 기도를 많이 한다고 여겨지는 목사, 사모, 권사, 새벽기도회/심야기도회 정규 참석자들 중에 방언하는 사람이 많다. 그러면 그들은 왜 방언을 하는가? 그것은 바로 방언이 성령의 도움으로 자신의 영이 하나님과 교통하는 기도이고(고전 14:2), 이성으로 하는 기도와 방언 기도를 병행함으로(고전 14:15-17) 개인의 기도 생활에 큰 유익을 얻기 때문이다. 그런데 방언이 이런 기도가 아니며, 어린아이들의 재잘거림 혹은 뜻 없는 소리의 반복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또 이런 형태의 방언은 오직 고린도교회에 있었던 특수한 것이고 초기 교회에서 보편적인 것이 아니라는 주장이 있다.
누가는 방언 자체가 무엇인지 명확하게 정의하지 않는다. 그냥 성령 충만의 현상 내지는 결과로, 혹은 영감을 받아서 하는 예언의 범주에 속한 말로 소개한다.(행 2:4, 10:45-46, 19:6-7) 반면 바울은 방언을 신자가 성령의 도움으로 하나님께 말하는 은사라고 설명한다.(고전 14:4) 이어서 바울은 이성으로 기도하는 것과 영으로 기도하는 것을 구별하면서, 방언은 신자 자신의 이성이 아니라 영으로 기도하는 은사라고 하여, 이전보다 더 명확하게 방언을 정의한다.(고전 14:4) 방언은 기도인 것이다.
보다 구체적으로 바울은 그 기도의 종류를 설명한다. 첫째, 방언은 영으로 하는 기도이다.(고전 14:14) 둘째, 방언은 영으로 하는 찬송이다.(고전 14:15) 셋째, 방언은 영으로 하는 감사이다.(고전 14:16) 넷째, “말할 수 없는 탄식”을 방언으로 본다면, 방언은 신자가 영으로 하는 탄식이다.(롬 8:26) 기도와 찬송, 감사와 탄식은 모두 시편에 나오는 기도의 종류로, 방언은 이성으로 하는 기도와 마찬가지로 이 모든 종류의 기도를 포괄하되, 단지 그것을 영으로 하는 것뿐이다.
그런데 방언을 기도로 소개하는 것은 오직 고린도전서 12-14장과 로마서 8장 26절에만 나오고, 따라서 이것이 초기 교회에서 국지적으로 나타난 현상이 아닌가 하는 의문이 늘 있었다. 하지만 방언이란 성령을 통해 신자가 영으로 기도하는 은사라는 정의로 보면, 바울서신과 다른 신약성서에는 이런 종류의 기도를 언급하는 구절이 많이 나온다.
첫째, 에베소서 6장 18절에는 “항상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προσευχόμενοι ἐν παντὶ καιρῷ ἐν πνεύματι)라는 어구가 나오는데, 이것은 고린도전서 14장 15절에서 방언 기도를 의미하는 “내가 영으로 기도하고”(προσεύξομαι τῷ πνεύματι)라는 문구와 거의 일치한다. 바울은 에베소서에서 방언이라는 말을 직접적으로 사용하지는 않지만, 방언으로 기도하는 것을 의미하는 “영으로 기도하기”라는 문구를 통해 이를 표현하고 있다고 본다. 물론 여기에서 이 기도를 방언으로 한정할 수는 없지만, 최소한 이 기도는 성령의 직접적인 역사에 의해 이성의 한계를 뛰어넘는 기도임에는 틀림없다.
둘째, 유다서 20절에는 “성령으로 기도하며”(ἐν πνεύματι ἁγίῳπροσευχόμενοι)라는 어구가 나오는데, 본질적으로 고린도전서 14장 15절과 에베소서 6장 18절에 나오는 문구와 같은 것이다. 초대 교회 안에서 성령 안에서 기도한다는 말은 바울을 넘어 다른 저자까지도 사용하는 말로, 이것이 방언 기도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닐지라도 방언 기도와 같이 이성을 뛰어넘어 영으로 하는 기도 전체를 포괄하는 것이다.
셋째, 골로새서 3장 16절에는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ψαλμοῖς ὕμνοις ᾠδαῖς πνευματικαῖς)라는 어구가 나온다. 에베소서 5장 19절에는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λαλοῦντες ἑαυτοῖς [ἐν] ψαλμοῖς καὶ ὕμνοις καὶ ᾠδαῖς πνευματικαῖς)가 나온다. 이것들은 고린도전서 14장 15절에 나오는 “내가 영으로 찬송하며”(ψαλῶ τῷ πνεύματι)의 확장판이다. 특히 에베소서 바로 앞 구절인 5장 18절에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라는 문구를 통해 뒤에 나오는 것들이 성령의 역사에 의해서 나타나는 현상임을 알 수 있다. 위의 골로새서와 에베소서 각 본문은 성령의 역사로 신자가 영으로 찬양하는 것을 표현하고 있는데, 고린도전서 14장 15절은 그것을 방언이라고 말하고 있다.
넷째, 위 본문들처럼 분명하지는 않지만, 데살로니가전서 5장 19절도 방언을 말하는 구절이라고 볼 수 있다. 멘지스(Robert P. Menzies)는 데살로니가전서 5장 19-20절과 고린도전서 14장 39절의 유사성에 주목하여, 전자에 등장하는 “성령을 소멸하지 말며 예언을 멸시하지 말고”라는 구절과 후자에 등장하는 “예언하기를 사모하며 방언을 금하지 말라”가 서로 상응한다고 말한다. 후자에서는 방언과 예언을 병치시켜서 설명하고 있는데, 비록 순서는 다르지만 전자에서도 그렇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성령을 소멸치 말라”(살전 5:19)는 말은 방언에 관해서 말하는 것일 수 있다는 것이다. 사도행전에서도 방언과 예언이 병치되는 경우가 매우 빈번하다.(행 2:16-18, 10:43-46, 19:6)1

방언에는 신학이 있다

이상을 통해서 볼 때, 바울이 말하는 방언은 방언 기도이며, 이것은 고린도교회만이 아니라 초대 교회에 광범위하게 퍼져 있던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렇다고 해도 방언은 개인 기도일 뿐, 여기에 어떤 중요한 신학이 배어 있는 것은 아니지 않는가 하는 의문이 제기될 수 있다. 이에 대해서 최근 반세기 동안 서구 학자들의 연구를 통해 방언에는 바울의 신학이 깊이 배어 있음이 확인되었다. 그것을 요약적으로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2
첫째, 방언은 종말을 사는 신자가 연약함 때문에 필요한 것이다.(Gordon D. Fee) 바울 신학은 철저하게 종말론의 틀에서 형성되어 있는데, 문제는 종말을 사는 신자는 종말을 올바로 살아내는 일에 무능력하다는 것이다. 그런데 바울 신학에는 인간이 연약할 때 하나님이 주시는 능력으로 강하게 된다는 원리가 있다.(고후 12:9) 방언은 종말을 사는 신자가 무엇을 기도할지 모르는 무능력함을 고백할 때 성령의 직접적인 도움으로 올바로 기도할 수 있게 하는 은사이다.(롬 8:26)
둘째, 방언은 신자의 탄식에 공감하는 성령을 경험하는 것이다.(John Bertone) 종말에는 일반 피조물도, 최고의 피조물인 인간도 탄식한다.(롬 8:22-23) 이때 성령도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탄식으로” 신자의 탄식에 공감하며 탄식하는데(롬 8:26), 그것이 바로 방언이다. 현대에 방언하는 사람들은 그 내용이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방언을 실행하는 가운데 성령의 공감을 체험하여 마음의 치유를 받는 체험을 한다.
셋째, 방언은 타락으로 깨어진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게 하는 중요한 도구 중 하나이다.(Blain Charette) 바울에게 있어 개인 신앙성장을 위한 중요한 개념 중 하나는 신자가 하나님의 형상을 그리스도 안에서 본받는 것이다.(고후 4:4, 골 1:15) 그리고 그렇게 본받는 것을 바울은 집을 세우는 것에 비유한다.(고전 3:9, 고후 5:1) 방언은 바로 이러한 역할을 하는 은사 중 하나이다. 방언은 깨어진 하나님의 형상을 ‘세우는’(οἰκοδομέω) 은사이다.(고전 14:4)
넷째, 방언은 성령을 통해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하는 것이다.(F. Macchia) 누가는 신자가 성령 충만을 체험하는 현상 중 하나로 방언을 말하고 있고(행 2:4), 바울은 성령의 나타남의 하나로 방언을 말하고 있다(고전 12:7). 누가와 바울 모두 방언은 성령 체험 안에 있는 것이고, 이것을 통해 신현현(神顯現)을 맛본다는 것이 전제되어 있다. 방언 체험은 그 내용도 중요하지만, 방언 체험 자체가 하나님이신 성령의 임재를 체험하는 것이기에 방언은 거룩한 분과 조우(遭遇)하는 것이다.
다섯째, 방언은 성서의 내용을 오늘에 사건화한 체험이다.(Robert P. Menzies) 방언은 성서 독자로 하여금 성서의 세계를 오늘에 사건화하는 체험이다. 방언 체험은 성서의 세계와 오늘의 세계 사이의 간극을 메워주어 방언 이외에도 성서의 세계에 있는 것들이 오늘날 체험되고 성취된다는 확신을 준다. 그래서 방언을 체험하면 ‘그들의 이야기’가 ‘우리들의 이야기’가 되어 성서의 세계가 이전보다 가깝고 친숙하게 느껴진다.

방언, 어떻게 볼 것인가

방언에 대해서는 사람들의 호불호가 분명하다. 이러한 현상은 오늘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방언 현상을 처음 목도한 사람들의 반응이기도 했다. 부정적인 반응으로는 “너희들은 미쳤다.”(고전 14:23)와 “그들이 새 술에 취하였다.”(행 2:13)라는 것들이다. 반면, 이것을 긍정적으로 본 사람들은 “우리가 다 우리의 각 언어로 하나님의 큰일을 말함을 듣는도다.”(행 2:11)라고 말했다. 바울은 이 은사를 사용하여 다른 어떤 사람보다도 더 많이 기도하는 것에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고전 14:18) 바울은 방언의 오용에 대해서는 경계했지만, 누가와 바울은 각각 방언 자체는 성령 충만의 현상으로(행 2:5), 혹은 성령의 은사로 규정하여(고전 12:8-10) 모두 긍정적으로 보았다. 당신은 방언을 어떻게 보는가?

[연재를 마치며]
그동안 성령론에 대한 설교를 바르게 하고 있나 하는 주제로 다섯 번의 연재를 했다. 성령론에 대해서는 주석적, 신학적, 실제적 오해가 많이 있다. 결론적으로, 필자는 성령에 대해 이해할 때 이성적 이해와 성서가 기록한 내용을 체험한 것 모두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이성적 지식을 통해 성서가 말하는 성령론의 실체에 가까이 나가고, 그것을 실제로 체험함으로써 그것의 본질을 마주하게 된다. 이성적 연구와 성령에 의한 체험, 이 두 가지를 같이 추구하겠다는 것이 바울의 입장이다. “그러면 어떻게 할까 내가 영으로 기도하고 또 마음(νοῦς, 이성)으로 기도하며 내 영으로 찬송하고 또 마음으로 찬송하리라.”(고전 14:15)

* 김동수 교수님의 연재 “신약의 성령론 설교”를 마무리합니다. 그동안 좋은 글 보내주신 교수님께 감사드립니다.-편집부

주(註)
1 Robert P. Menzies, Christ-Centered: The Evangelical Nature of Pentecostal Theology (Eugene, OR: Cascade Books, 2020). 62.
2 이 부분은 김동수, 『방언, 성령의 은사: 성경과 교회 역사에 나타난 방언』(킹덤북스, 2015), “제2장 방언에는 신학이 있다”의 내용 일부를 요약한 것이다.


김동수|한국신약학회 회장을 역임했다. 『방언과 예언』 등 신약학에서 본 성령론에 관한 다수의 저서와 논문이 있다. 평택대학교 신학과 신약학 교수로 재직 중이다.

 
 
 

2021년 12월호(통권 75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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