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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me > 기독교사상 > 성서와설교 > [르네 지라르의 성서 읽기 11]
성서와설교 (2021년 12월호)

 

  베드로의 배반과 성령의 역사
  

본문

 

지라르는 성령을 인류학적 관점에서 평화와 관련하여 이해한다. 평화는 인류라는 종의 보존을 가능하게 하는 요소이다. 모방욕망을 타고난 인류에게 갈등은 불가피하고 따라서 평화를 마련하지 못하면 멸망에 이를 수도 있다. 성령은 ‘참된’ 평화의 영이다. 요한복음에서 성령을 ‘진리의 영’이라고 할 때, 진리의 문제도 결국 참된 평화와 관련이 있다.
그리스도는 세상의 참된 평화를 위해 세상의 희생양이 되었고, 성령은 인간을 움직여 그리스도의 사역을 이어가도록 만든다.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은 인간을 통해 일하신다.
성서는 성령을 받은 후의 제자들과 그 이전의 제자들을 대조적으로 보이게 함으로써 성령의 힘을 증언한다. 무지하고 무능했던 제자들은 성령강림 이후에 진리의 사람들로 바뀌었다. 복음서에 나오는 베드로의 배반은 인간의 무지와 무능을 잘 보여주고, 사도행전의 기록은 성령의 능력을 잘 보여준다. 신약학자들이 사도행전을 가리켜 성령행전이라고 말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베드로의 배반

지라르가 볼 때 베드로의 배반이야말로 인간의 모습을 잘 보여준다. 그 이야기에는 군중의 선동으로 이루어지는 추방의 관습이 들어 있고, 추방되지 않기 위해 군중에 합류하려는 베드로의 무의식이 잘 드러나 있다.
예수께서 말했다. “오늘 밤에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마 26:31) 베드로가 답한다. “모두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결코 버리지 않겠나이다.”(26:33) 그런데 ‘버리리라’고 번역된 말의 그리스어 원어는 ‘스칸달리스테소마이’(σκανδαλισθήσομαι)이니, 곧 스캔들에 걸려 넘어진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예수는 제자들이 남들을 따라하는 모방욕망 때문에 자신에게서 멀어질 것을 예고한 셈이다. 예수가 복음서 기자들보다 인간의 모방욕망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고 지라르는 확신한다. 복음서는 이 ‘스칸달리온’이라는 말의 중요성을 잘 부각시키지 못하고 때로 다른 말로 얼버무려 놓기 때문이다. 인간에 대해서 잘 아는 예수의 예언대로 베드로는 대제사장의 마당에서 자기를 둘러싼 다른 사람들, 곧 군중 속으로 빠져들어 마침내 그들과 하나가 되었다.
예루살렘의 3월 밤은 춥다. 베드로가 경비병과 종들 틈에서 불을 같이 쬐고 있었다.(막 14:54, 요 18:18) 지라르는 불 쬐는 행위에서 이미 베드로가 군중 속으로 들어가 군중과 함께 있다고 본다. 한밤중에 타오르는 불은 ‘함께 있음’을 만든다. 불을 가운데 두고 둘러앉은 사람들은 서로를 바라보며 하나가 되어간다. 하이데거가 인간의 일상적 존재양식으로 말한 ‘함께 있음’(Mitsein)은 군중 속의 인간을 가리킨다.
갑자기 여종이 나타나 말했다. “너도 나사렛 예수와 함께 있었도다.”(막 14:67) 여종이 베드로를 예수의 제자로 생각한 것은 아닐 것이다. 베드로를 예수와 한패로 보았다면 여종은 당장 베드로를 고발하여 처형되게 했을 것이다. 여종은 베드로가 낯선 자라는 사실을 강조하고 그곳에서 쫓아내고자 했던 것이다. “예수와 함께 있었도다.” 예수와 함께 있음은 군중으로부터의 독립을 의미한다. 그러나 지금 베드로에게 군중으로부터의 독립은 군중으로부터의 추방을 의미한다.
여종은 다른 사람을 움직였다. 그녀는 같은 말을 다시 한 번 반복한다. 지라르에 따르면 여종은 적어도 그 자리에서 군중을 선동하는 리더이다. 아마 여종이야말로 평소 그 집에 드나드는 사람들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마태는 베드로의 갈릴리 사투리가 결정적으로 베드로를 이방인으로 만들었다고 본다. “너도 진실로 그 도당이라 네 말소리가 너를 표명한다.”(마 26:73) 갈릴리 사람이기 때문에 예수와 한 무리라는 것은 논리의 비약이다. 그러나 낯선 자를 추방하려는 여종의 말은 군중을 움직여 베드로를 예수와 함께 있던 자로 단정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여종의 선동으로 그녀의 말을 모방해서 베드로를 예수와 한패라고 말했지만, 불을 쬐는 일꾼들에게 중요한 것은 베드로가 천한 갈릴리인이요, 자기들과 다르다는 점이다. 이방인에 대한 추방의 동기가 작동한 것이다. 사실 여종의 선동도 같은 동기에서 비롯된 것이다.
베드로는 그들의 주장을 부인했다. 지라르는 베드로의 부인이 죽음에 대한 두려움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고 본다. 죽음을 두려워했다면 다른 제자들처럼 도망갔을 것이다.(막 14:50) 여하튼 베드로의 반응은 강력했다. “베드로가 저주하며 맹세하되 나는 너희가 말하는 이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막 14:71) 베드로의 강한 어조는 추방의 두려움에서 생긴 무의식적 반응이다. 그는 처음에 대제사장 집 일꾼들과 같이 불을 쬘 때부터 군중으로 돌아가 있었다. 아니, 그는 예수와 함께 있을 때에도 군중에서 완전히 벗어나지는 못했다. 그들이 강하게 주장할수록 베드로는 더 강하게 부인하여 군중으로 남는다. 예수와 온전히 함께 있지 못했던 베드로는 이제 본래의 자리인 군중과 함께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대제사장 집의 일꾼들이라는 군중은 예수를 처형하는 대제사장과 한패가 아닌가. 물론 대제사장의 일꾼들이 아니더라도 군중은 언제나 예수의 박해자이다. 지라르의 시각에 따르면 그것은 오늘날도 마찬가지이다.
지라르는 베드로의 배반을 예언한 예수의 말씀이 인간의 일반적 행동원리를 지적한 것이라고 본다. 사탄은 세상의 왕(요 16:11)이요, 인간은 사탄을 이기기 어렵다. 누가는 ‘사탄’이라는 말을 분명히 집어넣어 베드로의 행동을 예고한다. “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탄이 너희를 밀 까부르듯 하려고….”(눅 22:31) 그러므로 본문에 나오는 ‘닭 울기 전’이라는 구절은 중요한 구절이 아니다. 지라르에 따르면, 예수의 말씀이 기적처럼 이루어졌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 복음서 기자들은 닭 울음소리와 베드로의 배반 행위를 연관시켰다. 기적을 보고 싶어 하는 제자들의 마음이 본문에 반영된 셈이다.
그러나 예수가 보여줄 기적은 요나의 기적뿐이지 않은가. 예수의 말씀이 이루어진 것은 기적이 아니라 어찌 보면 당연하고 일반적인 결과이다. 베드로의 행동을 우리 모두는 너무나 잘 이해한다. 지라르의 생각이 맞다면, 사탄의 힘에서 벗어나기 어려운 보편적 인간성에 대한 예수의 말씀을 공관복음의 기자들은 잘 이해하지 못했다. 베드로는 강하게 부인했지만, 스캔들에 빠지지 않는다고 강하게 부인할수록 인간은 더 쉽게 빠져든다. 모방의 스캔들을 사탄이라고 부르는 까닭도 거기에 있다. 베드로는 자기도 모르게 박해자들과 한편이 되었다. 베드로가 예수를 박해하는 무리에 끼어 있는 것은 상상하기 어려운 일인데, 군중의 하나가 되다 보니 희생양에 굶주린 박해자의 무리에 속하게 되었다. 군중과 함께 있음은 예수와 함께 있지 않음이다. 예수와 함께 있지 않으면 예수를 희생양으로 만드는 무리에 속하게 된다.
지라르는 베드로의 강한 어조가 예수에 대해 화를 내는 것이라고 본다. 그것은 어떻게든 군중으로부터 추방당하지 않기 위한 행위이다. 남들이 미워하는 자를 같이 미워하는 일이야말로 그들과 하나 될 수 있는 가장 좋은 길이다. 그들로부터 의심받지 않고 추방되지 않기 위해서는 그들의 증오를 그대로 모방해야 한다.
지라르는 베드로의 강한 부인으로 대제사장 집의 뜰에서 하나의 종교가 탄생했다고 본다. 종교(religion)의 어원인 라틴어 ‘re-ligare’는 ‘다시 묶는다’는 뜻이다. 예수라는 사나이에 대한 박해를 중심으로 군중은 하나가 되었다. 갈등으로 흩어질 뻔한 구성원들을 다시 하나로 묶어 사회의 존립을 지속하는 역할은 종교의 차지였다. 희생제물의 피를 내는 집단살해는 신에게 제물을 드리는 종교의 형태로 그 진실을 은폐하고 있었다. 희생양에 대한 집단살해, 곧 집단적 박해는 무의식적으로 이루어짐으로써 박해로 인식되지 않고 신에 대한 성실함으로 이해되었던 것이다. 제자들의 박해를 예고하는 요한복음의 본문도 그 점을 잘 보여준다. “때가 이르면 무릇 너희를 죽이는 자가 생각하기를 이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라 하리라.”(요 16:2)
베드로의 강한 부인에는 박해의 무의식이 작동했다고 볼 수 있다. 그는 예수를 박해하려고 하지 않았다. 그러나 군중에게서 벗어나지 않으려고 애쓰다가 자기도 모르게 박해자의 편에 서게 된 것이다. 베드로의 통곡(마 26:75, 눅 22:62)은 무의식적 행위의 의미를 안 후에 터져 나온 울음일 것이다. 단지 군중에서 추방되지 않으려고 애쓴 것뿐인데, 자기도 모르게 예수를 박해하는 무리에 속하게 되지 않았는가. 그러나 베드로의 통곡이 그를 예수와 함께 있도록 이끌지는 못했다. 그는 예수와 함께 처형되는 길을 가지 않았다. 그 일은 오직 성령의 역사로만 가능하다. 성령강림 이후에 벌어질 수 있는 일이다. 이렇게 말해야 할지 모른다. 인간은 예수의 죽음을 슬퍼할 수 있지만 막을 수는 없다. 그러나 슬퍼하는 자에게 복이 있지 않은가.
군중에 동화되어 예수를 모른다고 한 이후에 통곡하는 베드로의 이야기는 인간의 약한 모습을 보여주면서도 인간을 정죄하지 않고, 정죄하지 않으면서도 인간 스스로를 영원히 돌아보게 만든다. 그리고 돌아보는 일은 돌보는 일이 될 것이다. 지라르는 베드로의 배반 이야기를 신약성서에서 가장 아름다운 이야기로 본다.
몇 해 전에 필자는 안식년을 맞아 베를린 자유대학에 머물렀다. 고난주일에 ‘베를린 돔’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고색창연한 교회에서 바흐의 〈마태수난곡〉 공연을 감상한 적이 있다. 공연 내내 분위기가 엄숙했지만, 특히 베드로의 통곡을 형상화한 47번 알토 아리아 〈불쌍히 여기소서〉(Erbarme dich)가 연주될 때에는 정말 모든 이들이 숨죽이며 베드로의 슬픔을 자기 슬픔으로 삼는 것 같았다. 지라르가 아름답다고 한 그 말을 필자는 성서의 미학이 주는 위로와 치유의 효과로 이해한다.
지라르의 말대로 베드로와 바울은 모두 박해자의 편에 섰던 사람들이다. 지라르는 다메섹 도상에서 바울이 들은 말이 정확한 표현이라고 본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행 9:4) 인간은 박해자요, 군중을 이루어 박해한다. 예수의 희생은 박해받고 집단 살해된 모든 희생양들의 피와 고통을 대표한다.
군중에서 벗어나 박해의 피를 멀리하는 데에는 성령의 힘이 필요하다. 베드로와 바울은 모두 성령강림 이후에 회심하여 예수를 구원자로 선포하는 증인이 되었다. 지라르는 오직 성령만이 그 일을 할 수 있다고 본다. 성령은 그리스도의 뒤를 이어 희생양 메커니즘을 고발하고 종식시킨다.

성령은 진리의 영, 희생양의 변호자

사탄은 하늘에서 떨어졌지만(눅 10:18), 이 땅에서 사람들을 지배하며 세상의 왕(요 16:11) 노릇을 하고 있다. 다시 말해 사탄은 기독교 때문에 그 초월적 실체성을 상실하고 더 이상 하늘의 신으로 숭배되지 않지만, 인간의 모방욕망과 스캔들을 통해 분쟁을 조장하고 희생양을 만들어 자신의 나라를 유지하고 있다. 이 땅의 인간은 타인 숭배를 통해서 우상 숭배를 지속하고 있다. 우상 숭배는 권력의지로 이어지고 무의식적 폭력 숭배로 이어진다. 그리스도에게서 평화의 하나님 나라가 시작되었지만, 인간은 사탄과 악령의 지배를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다.
그리스도에게서 시작된 하나님 나라를 이어가는 것이 바로 성령이다. 하늘에서 떨어진 사탄을 이 땅에서 상대해 이길 수 있는 자는 성령뿐이다. 그리스도 역시 성령으로 귀신들린 자의 악령을 쫓아내지 않았는가. 지라르에게 역사란 성령이 이 땅에서 사탄과 싸우는 시간의 흐름이다. “당신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처럼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사탄을 하늘에서 몰아낸 분이 하늘에 계신 아버지였다면, 그리스도 이후 땅으로부터 사탄을 몰아내는 일은 성령의 몫이다. 성령은 이 땅의 사람들을 통해 일하신다.
성령은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과 순교자들을 통해 참된 평화를 위한 그리스도의 사역을 이어간다. 만일 시간이 흐를수록 사탄의 실상, 곧 희생양을 만드는 인간의 죄의 실상이 더 잘 드러난다면 그만큼 역사는 진보하는 것이다. 오늘날 독재자나 전체주의의 폭력과 희생양 만들기에 대해 인류가 즉각적으로 저항할 줄 아는 것은 그만큼 진보한 것이라고 지라르는 평가한다. 그런 저항은 현대 사회에서 예수의 이름을 들먹이지 않고도 일어나지만 그것은 기독교의 유산이요, 그동안 성령이 이루어놓은 결과물이다.
히브리어 ‘사탄’은 ‘고발자’ 또는 ‘비난하는 자’라는 뜻이다. 성령은 보혜사이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요 14:16) 여기서 ‘보혜사’라고 번역된 그리스어 파라클레토스(παράκλητος)는 ‘변호하는 자’라는 뜻이다. 예수가 이미 희생양의 변호자이기 때문에 또 다른 변호자(보혜사)를 보낸다고 성서는 말하고 있는 것이다. 사탄은 고발자요 성령은 변호자이니, 말의 뜻에서부터 사탄과 성령은 서로 맞수이며 원수이다. 사탄과 성령은 인간의 운명을 놓고 우주적 싸움을 하고 있다.
지라르는 성령에 관한 기존의 연구가 만족스럽지 못하다고 본다. 신학자들이 신약성서의 성령이 함축하고 있는 문화적이고 역사적인 의미를 간과하고 있기 때문이다. 성령의 문화적 의미란 문화의 기초를 이루는 희생양 만들기를 종식시키는 성령의 사역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 그것은 폭력의 종식을 의미한다. 성령의 역사적 의미란 자연선택의 자연사에서 벗어난 성서적 계시의 시간에 이루어지는 성령의 역할을 가리킨다고 보면 된다. 자연종교로부터 성서종교로 옮겨간 이후, 성령은 그리스도에게서 시작된 평화의 하나님 나라를 인간의 역사 속에서 확장해나간다.
그러므로 사탄과 성령은 모두 희생양 메커니즘과 관련하여 이해되어야 한다. 군중이 한마음이 되어 누군가를 열광적으로 비난하는 집단 히스테리를 일으킬 때, 그것을 사탄의 장난이라고 할 수 있다. 사탄은 피를 보기 원하고 피의 대가로 평화를 준다. 반면에 성령은 죄 없이 비난받는 자 또는 죄보다 과하게 비난받는 자를 옹호한다. 성령은 희생양의 변호자로서 박해의 실상을 일깨워준다. 때로는 정의의 이름으로, 때로는 애국심의 이름으로 한 사람이 불쌍하게도 세상에 발붙일 곳 없이 비난받을 때, 성령은 군중과 세상의 무지한 폭력을 고발한다. 그 점에서 성령은 진실을 알려주는 진리의 영이다. 지라르는 요한복음의 본문에 주목한다.

25 내가 아직 너희와 함께 있어 이 말을 너희에게 하였거니와 26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요 14:25-26)
12 내가 아직도 너희에게 이를 것이 많으나 지금은 너희가 감당하지 못하리라 13 그러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스스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들은 것을 말하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14 그가 내 영광을 나타내리니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겠음이라(요 16:12-14)


성령은 다른 말을 하지 않고 오직 그리스도에게서 들은 것을 말하고 그리스도의 말을 생각나게 한다. 그렇게 성령은 그리스도의 일을 이어간다. 그리고 성령은 제자들로 하여금 그리스도가 하신 말을 이해하게 만든다. 성령강림 이전에 제자들은 그리스도의 말씀과 수난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한다. 그들이 그리스도의 말을 ‘감당하지 못하는’ 이유는 아직 군중에서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베드로가 그리스도를 부인한 사건이 그 점을 잘 보여준다. 군중으로서 그들은 그리스도의 수난이 오래된 희생양 메커니즘의 폭력성을 고발하기 위한 것임을 알지 못했다. 이제 성령이 그들로 하여금 모든 것을 알게 한다. 실상을 알린다는 점에서 성령은 진리의 영이다. 성령은 폭력에 기초한 평화를 거부하는 점에서 참된 평화의 영이요, 그 점에서도 성령은 진리의 영이다.
성령강림 이후 제자들은 그리스도의 증인으로 바뀌었다. 사도행전 3장과 4장에서 베드로는 십자가와 부활에 대해 증언한다. 관리들과 장로들과 서기관들과 대제사장 문중이 모두 모인 앞에서 베드로는 ‘성령이 충만하여’ 말했다. “너희와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은 알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고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 사람이 건강하게 되어 너희 앞에 섰느니라 이 예수는 너희 건축자들의 버린 돌로서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행 4:10-12)
베드로는 예수가 세상의 희생양이었음을 말함으로써 십자가의 의미를 밝힌다. 예수를 죽인 자들은 ‘너희와 모든 이스라엘 백성’이니, 여기서 ‘너희’는 베드로 앞에 모인 정치권력과 종교권력이고, ‘모든 이스라엘 백성’은 군중을 가리킨다. 온 세상이 하나 되어 만장일치로 죽이는 살해행위는 희생양 만들기의 특징이다. 또한 권력자들과 세상 사람들은 예수의 죄를 물어 죽였는데, 희생양에게 죄가 있다고 믿는 것은 희생양 만들기의 한 과정이다. 그러나 베드로는 예수가 ‘거룩하고 의로운 자’(행 3:14)였다고 말한다. 예수는 무고한 자인데 피를 보기 원하는 세상의 희생양이 되었음을 베드로는 분명히 밝히고 있는 셈이다. “형제들아 너희가 알지 못하여서 그리하였으며 너희 관리들도 그리한 줄 아노라”(행 3:17)는 구절도 예수의 죽음이 세상이 무의식적으로 벌이는 희생양 메커니즘에 의한 것임을 밝히고 있다. 그리고 그 예수의 희생 덕택에 희생양 메커니즘의 폭력성이 세상이 알려지게 되었다.
예수의 십자가는 희생양 메커니즘의 폭력성을 드러내어 고발할 뿐 아니라 희생양 메커니즘을 종식시키는 일의 시작이기도 하다. 그래서 베드로는 예수가 그리스도로서 세상을 구원할 자라고 증언한다. ‘건축자의 버린 돌이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으니’, 예수의 죽음은 옛집을 헐고 새 집을 짓는 일의 기초를 이룬다. 새 집은 희생양 만들기의 피비린내 나는 폭력이 없이도 평화를 이루는 세상을 가리킨다. 그 점에서 예수는 ‘생명의 주’(행 3:15)요,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다.’(행 4:12)
십자가뿐 아니라 부활의 의미도 밝혀야 한다. 부활을 통해 예수는 세상의 희생양 만들기가 통하지 않음을 보였기 때문이다. 그것을 말하기 위해 베드로는 하나님이 십자가의 예수를 다시 살리셨음을 강조한다.(행 3:15, 4:10) 하나님이 살리셨다는 말은 예수의 부활이 신화에 등장하는 신들의 부활과 다름을 암시한다. 신화에 나오는 신들은 모두 희생제물로 바쳐진 인간을 사회가 다시 살려내어 신으로 받든 거짓 신이다. 희생제물 덕택에 모두가 살았기 때문에 그 희생양을 신으로 받드는 것이다. 물론 이런 일은 모두 무의식적으로 일어나며 박해의 무의식과 연관된 일이다. 그러나 베드로는 예수의 부활이 인간이 만든 게 아니라 하나님이 행하신 일임을 강조한다.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은 모두 희생양 메커니즘을 기반으로 형성된 신화의 세계를 종식시키는 의미를 지닌다.
베드로와 제자들의 담대한 증언, 그것은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었다. ‘사람들이 너희를 넘겨줄 때에 어떻게 또는 무슨 말을 할까 염려하지 말라. 그 때에 너희에게 할 말을 주시리니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속에서 말씀하시는 성령이시니라.’(마 10:19-20, 막 13:11)

박해받는 증인들과 순교

예수의 증인들은 세상에서 박해를 받는다. 베드로는 박해하는 자의 무리에 속했다가 박해받는 자로 바뀌었다. 바울은 박해에 앞장섰다가 박해받는 자로 바뀌었다. 사도행전은 제자들이 받는 박해를 잘 보여주고 있다. 초대교회의 교인들도 박해를 받았다. 지라르는 그들이 주로 하층민이었고 여자와 아이들이 많아 박해받기 쉬웠다고 본다. 이질적이고 약자인 개인이나 집단은 희생양을 필요로 하는 인간세상의 먹잇감이 되기 쉽다. 사회의 위기를 수습하는 방안으로 그리스도인들은 박해받았다.
지라르의 시각으로 볼 때,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박해의 대상이 된 근본적 이유는 그들이 평화를 뒤흔들어 놓았기 때문이었다.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에 대한 증언은 희생양 메커니즘에 대한 고발이다. 그것은 무의식적으로 행해진 오래된 평화수립의 방식을 거부하는 위험한 일이다. 기존 사회로서는 그리스도인의 존재로 말미암아 뭔가 불안을 느낄 수밖에 없으며, 심지어 그리스도인들은 반역자로 보일 수도 있다. 그리스도인들의 반사회적이고 반역적인 행위는 로마 신 숭배를 거부하고 황제 숭배를 거부한 데서 분명해진다. 그러나 그러한 숭배 거부 뒤에는 자연종교와 황제 숭배의 기반이 되는 무의식적 희생양 메커니즘에 대한 거부가 있었던 것이다.
박해 속에서도 예수를 증언한 제자들과 그리스도인들은 단지 신앙을 고집한 것이 아니라 폭력을 거부한 것이다. 그 폭력은 무고한 희생양에 대한 집단살해를 통해 평화를 만드는 폭력이다. 그러므로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에 대한 초기 그리스도인들의 증언은 이전의 피비린내 나는 평화가 거짓임을 드러내는 증언이고 예수의 피로 시작되는 새로운 평화의 힘에 대한 증언이다.
따라서 예수의 증인들은 박해받고 순교한다. 그들이 박해받는 이유는 기존의 평화를 불안하게 만들고 뒤흔들기 때문이다. 거라사 사람들은 예수에게 떠나줄 것을 요청했다. 그들은 자신들의 평화 시스템을 지탱하는 악령이 추방되는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예수에게 떠나달라고 간청하는 거라사인들의 두려움에는 예수의 증인들에 대한 세상의 박해가 예고되어 있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거라사인들은 다만 두려워하고 예수를 증오하지 않았지만, 예수의 제자들에 대한 박해는 세상 ‘모든 사람’과 ‘모든 민족’의 미움과 증오에서 비롯된다.(막 13:13, 마 24:9, 눅 21:17)
세상이 만장일치로 제자들을 미워하고 증오하는 것은 그만큼 세상의 평화가 흔들리고 있다는 증거이다. 사도행전은 예수의 죽음 이후 성령의 역사로 믿는 자들이 많아졌다고 보고한다.(행 4:4) 늘어난 예수의 증인들은 헤롯과 로마황제와 종교가 만드는 평화를 위협했기 때문에 증오와 박해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들이 평화를 위협한 것은 예수의 사역의 연장에 있는 것이다.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마 10:34) 누가는 ‘검’이란 말 대신에 ‘분쟁’이란 말을 사용한다.(눅 12:51) 평화를 깨고 분쟁을 일으키는 일이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이요, 예수의 증인들은 증언을 통해 평화를 깨고 분쟁을 일으킨다. 복음서에 나오는 묵시적 종말 예고 역시 제자들이 일으키는 분쟁과 연관이 있다.
성서에 나오는 묵시적 종말 예고를 분석하는 두 가지 관점이 지라르에게 보인다. 하나는 차이의 소멸이고, 또 하나는 평화를 깨는 복음의 역할이다. 세상의 질서가 무너지고 파탄에 이르는 재앙은 차이가 없어지는 현상을 가리킨다. 소유의 모방에서 비롯된 갈등과 폭력을 서로 모방하며 세상 사람들이 모두 똑같이 증오와 폭력에 빠져든다. 개인과 개인이 대립하고 집단과 집단이 증오하며 모두 하나같이 싸움과 전쟁을 향해 치닫고 종의 멸망을 재촉한다. 마태복음 24장과 마가복음 13장, 그리고 누가복음 21장에 공통으로 종말의 환난에 대한 예고가 나온다. 그때에는 “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여 일어나겠고… 형제가 형제를, 아버지가 자식을 죽는 데에 내주며 자식들이 부모를 대적하여 죽게 하리라.”(막 13:8, 12) 이러한 질서의 파괴에는 복음의 영향도 크다. 복음의 전파는 희생양 메커니즘과 법적 강제력의 결합으로 이루어진 위계질서를 뒤흔들어 놓을 것이기 때문이다.
가정의 질서에 변화가 올 것이라는 말씀은 종말의 재앙을 예고하는 본문 말고도 다른 곳에서도 여러 번 나온다. 마태와 누가는 모두 예수가 일으킬 분쟁을 가정에서 일어날 인간관계의 극적인 변화로 말하고 있다.(마 10:35, 눅 12:53) 그것은 가정의 구성에도 희생양 메커니즘이 작용했다고 보는 성서의 독특한 시각을 반영한다. 지라르의 시각을 따르자면 그렇다. 그렇다면 복음이 땅끝까지 전파되고 영향력을 발휘할 때에는 가정 내의 폭력적 질서 역시 해체될 것이다. 지라르에 따르면, 이처럼 가정 내의 분쟁에 대한 언급이 여러 번 나오는 까닭은 복음이 가져올 인간관계의 변화가 가장 가까운 관계에서 가장 극적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여하튼 지라르의 시각에 따르면, 종말에 있을 재앙에 관한 본문은 한편으로는 종의 멸망에 이를 수 있는 인간의 모방욕망과 폭력에 대한 지적이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그리스도의 증인들이 일으킬 질서의 재편을 예고한 것이기도 하다. 제자들의 박해에 대한 예고(마 24:9, 막 13:9-10, 눅 21:12-13)가 대재앙을 예고하는 본문 가운데에 들어 있는 것은 질서붕괴에 복음의 전파가 어떤 역할을 하고 있음을 암시한다.
기존의 질서와 평화를 재편해서 새로운 질서를 만들기 시작한 예수의 증인들이 갈 길은 순교이다. 순교자를 의미하는 ‘마티어’(martyr)는 원래 ‘증인’이라는 뜻이다. 과거에 군중을 모델로 삼았던 제자들과 세상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이 됨으로써 예수를 모델로 삼는다. 예수를 모델로 삼는다는 것은 희생양을 만드는 세상의 일치된 폭력을 거부하는 일이다. 그 점에서 예수의 증인들은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세상이 그들을 미워하고 박해하는 까닭은 거기에 있다.(요 15:18-20) 순교는 박해하는 폭력에 대해 폭력으로 맞서지 않고 박해를 당하는 것이다.
요한복음에 나오는 고별사에서 예수는 자신을 박해한 세상이 제자들도 미워하고 박해할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진리의 성령이 증인이 되리라고 말한 후에 이어서 이렇게 말한다.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실족하지 않게 하려 함이니.”(요 16:1) 여기서 실족한다는 말 역시 스캔들에 걸려 넘어진다는 뜻이다. 성령은 제자들로 하여금 군중의 모방욕망이 일으키는 스캔들에 걸려 넘어지지 않게 한다. 스캔들에 걸려 넘어진다는 것은 상대의 폭력을 모방해서 폭력으로 맞서는 일을 가리킨다.
그러나 제자들은 성령의 역사로 스캔들에 걸리지 않고 폭력을 당한다. 폭력의 악순환을 끊고 사랑의 선순환으로 갈 수 있는 유일한 통로는 자기희생에 있다. 순교가 의미하는 바가 거기에 있다. 순교는 복수의 반대인 셈이다. 오늘날 문명사회에서 신앙 문제로 순교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그러나 복수의 반대가 순교라면 순교는 우리의 일상생활에서도 일어날 수 있고 일어나야 할 일이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의미에서 지라르는 산상수훈의 말씀을 주시한다.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마 5:39) 사람들은 자기들이 무슨 짓을 하는지 모르고 있기 때문에 용서해야 한다. 그 길 외에는 다른 구원의 길이 없다고 지라르는 말한다. 그러나 물론 그 일은 우리 인간의 실력으로 되지 않는다. 군중의 돌에 맞아 죽은 그리스도교 최초의 순교자 스데반의 마지막 말은 다음과 같다.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행 7:60) 스데반이 “성령 충만하여”(행 7:56) 한 말이다.

양명수|기독교윤리를 전공했다. 저서로 『아무도 내게 명령할 수 없다: 마르틴 루터의 정치사상과 근대』 등이 있다. 이화여대 기독교학과 명예교수이다.

 
 
 

2021년 12월호(통권 75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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