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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me > 기독교사상 > 성서와설교 > [신약의 성령론 설교 03]
성서와설교 (2021년 10월호)

 

  기름 부음, 바르게 설교하고 있나
  

본문

 

앞선 연재글에서 이미 다룬 ‘성령 충만’이나 ‘성령 받았다’라는 말에 비해 사용 빈도가 낮기는 하지만, 최근 성령 체험과 관련하여 교회 안에서 심심치 않게 사용되는 말 중 ‘기름 부음’(anointing)이 있다. 대개는 이렇게 사용된다. “어제 집회에서 성령의 기름 부음이 강력히 임했어.” “그 목사는 말씀의 기름 부음이 있는 사람이야.” “어제 성서를 읽는 중에 갑자기 기름 부음이 임했어.”
‘기름 부음’(χρῖσμα)이라는 말은 대체 어디서 온 것인가? 이것이 성령 체험과 관련하여 자주 사용되다 보니, 사용자는 이 말이 성서 용어라는 사실을 모르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이것을 나름대로 재정의해서 사용한다. 어떤 이는 신약성서에 나오는 모든 종류의 성령의 역사를 기름 부음이라는 말로 환원해서 말하기도 하고, 또 어떤 이는 성령의 영감을 강하게 받은 것으로만 한정해서 사용하기도 한다. 기름 부음은 요한일서 2장 20, 27절에 나오는 말이기에, 여기에서는 이 단어가 어떤 의미로 사용되었는지 밝히고, 이 말을 어떻게 사용할지를 제안하고자 한다.

구약성서에서의 기름 부음

신약성서에서 기름 부음의 행위와 그 개념은 구약성서에서 기원한 것이다. 구약성서에서 기름 부음은 성결을 위해 사물에 행해지기도 했고(창 28:18), 사람에게 합법적인 권한을 줄 때 행해지기도 했다. 그래서 구약에서 기름 부음을 받는 대표적인 직책은 왕이었다. 사울(삼상 9:16)을 비롯해서 다윗(삼하 2:7)과 그 가문의 왕들은 기름 부음 예식을 통해서 왕으로 인정되었다. 비록 일상적인 것은 아니었으나 제사장에게나(레 4:3) 선지자에게(왕상 19:16) 기름 부음이 행해지기도 했다.
중요한 것은 이 행위와 개념에서 바로 ‘기름 부음 받은 자’인 메시아의 종말론적 사상이 나왔다는 것이다. 구약성서는 시편과 예언서를 통해서 다윗 왕가에서 장차 메시아가 나올 것을 예언하고 있다.(시 2, 45편, 사 9:1-6, 렘 23:1-4) 신약성서는 모두 구약에서 예언한 말세에 나타날 메시아가 바로 예수라고 말하고 있다. 또한 ‘메시아’라는 말을 그대로 번역해서 ‘기름 부음 받은 자’라는 뜻의 그리스도를 예수를 지칭하는 칭호로 사용하였다. 메시아는 다윗 왕가에서 태어날 왕으로, 말세에 하나님이 주시는 특별한 사명을 감당할 자이다.

예수와 성령의 기름 부음

‘그리스도’라는 단어의 뿌리인 ‘크리오’(χρίω)를 통해 신약성서는 예수가 바로 그 기름 부음 받은 자라는 것을 보여준다. 신약성서에는 ‘기름 붓다’라는 뜻의 헬라어 동사 ‘크리오’가 5번 나온다. 여기에서 나온 명사가 ‘기름 부음 받은 자’라는 뜻의 ‘크리스토스’(χριστός)이다. 본래 이 단어는 ‘기름 부음 받은’이라는 형용사로 쓰였다가, 그것이 그 형태 그대로 ‘기름 부음 받은 남성’이라는 명사로 쓰인 것이다. ‘크리오’는 신약성서에서 문자적 의미보다는 은유적으로 많이 사용되었다.
첫째, 사도행전 4장 27절에서 누가는 예수를 하나님이 특별한 종으로 기름 부은 자라고 소개한다. 헤롯과 본디오 빌라도는 “당신[하나님]께서 기름 부으신 거룩한 종 예수를 거슬러” 행동한 인물들이다. 예수는 메시아 왕으로서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 기름 부음 받은 자이다. 이사야 53장에 나오는 고난받는 종처럼 예수는 사람들에게 거절을 당한다. 이 구절에서는 구약성서에 나오는 기름 부음 받은 자라는 개념이 그대로 사용되고 있다.
둘째, 사도행전 10장 38절에서 누가는 예수가 그 사명을 어떻게 감당하는지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하나님이 나사렛 예수에게 성령과 능력”으로(πνεύματι ἁγίῳ καὶ δυνάμει) 기름 부으셨으며 “그가 두루 다니시며 선한 일을 행하시고 귀신에게 눌린 모든 사람을 고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함께 하셨음이라.” 예수는 단순히 기름 부음 받은 것이 아니라 “성령과 능력으로” 그렇게 되었다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누가는 여기서 기름 부음을 성령의 역사와 연결시키고 있다. 성령의 기름 부음을 받아, 그 힘으로 예수는 하나님이 맡기신 사역을 잘 감당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성령과 기름 부음을 연결시키는 것은 이미 구약성서에 나온다.(삼상 10:1, 6, 10, 사 61:1)
셋째, 누가복음 4장 18절에서도 예수가 기름 부음 받은 것과 그에게 성령이 임한 것을 연결시키고 있다. 개역개정 번역에서는 기름 붓는 것과 성령이 임하는 것의 순서가 불분명한데, 원문에서는 기름 부음이 원인이고 그 결과가 성령 임함이다. 가톨릭 성서는 그 순서로 번역하고 있다.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 주시니 주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 이렇게 예수에게 기름 부음이 임해 성령을 체험하게 한 것을 누가는 이사야 61장 1절의 성취로 본다. 히브리서 1장 9절은 이사야 61장 3절을 인용하여 하나님이 예수께 즐거움의 기름을 부었다고 말하고 있다.
이상을 요약하면, 예수는 구약성서에 예언된 특별히 기름 부음 받은 자이며, 그 기름 부음은 성령 체험과 연관되어 있고, 그 성령 체험을 통해 예수는 메시아의 사명을 감당할 힘과 능력을 얻었다. 구약성서에서는 하나님의 종은 실제 기름을 몸에 붓는 행위를 통해서 사명자로 인정되었는데, 신약성서에서는 그것이 성령 체험으로 대체된 것으로 보인다. 성령 체험이 일종의 기름 부음의 예식이었던 것이다. 예수는 그 기름 부음을 의미하는 성령 체험을 통해 자신의 메시아 사역을 감당했던 것이다.

제자들과 성령의 기름 부음

이렇게 기름 부음으로 성령 체험을 하여 능력을 받아 사역하는 예수의 사역은 그의 제자들에게 그대로 이어진다. 신약성서에는 ‘기름을 바르다’라는 뜻의 동사 ‘알레이포’(ἀλείφω)가 9번 나오는데 문자적 의미로 쓰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 동사는 다음과 같이 네 가지 경우로 쓰이고 있다.
첫째, 이 동사는 육체의 질병을 치유하기 위해 약을 바르는 일에 사용되었다. 한 번은 예수가 한 행위로(막 6:13), 다른 한 번은 예수의 제자들이 교회 생활의 일부로 마땅히 해야 할 행위로 기록되어 있다.(약 5:14)
둘째, 이 동사는 마리아가 예수의 몸(머리 혹은 다리)에 향유를 붓는 것에 사용되었다.(눅 7:38, 46×2회, 요 11:2, 12:3) 요한복음에서 예수는 십자가를 통해서 진리 왕국의 왕으로 등극하는데(요 18:33-38), 마리아의 행동은 일종의 등극식 예비 기름 부음의 의미였다. 구약성서에서 왕위를인정하는 뜻에서 등극식 전에 미리 기름 부음이 있었던 것처럼, 예수는 진리 왕국의 왕으로서 미리 등극식 예비 기름 부음을 받았던 것이다. 물론, 아이러니는 이것이 제사장이나 선지자에 의해서가 아니라 예수의 여제자에 의해서 행해졌다는 것이다.
셋째, 이 동사는 예수의 시체에 향유를 바르는 데 사용되었다. “안식일이 지나매 막달라 마리아와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와 또 살로메가 가서 예수께 바르기 위하여 향품을 사다 두었다가.”(막 16:1)
넷째, 이 동사는 제자들이 기름 부음을 받는 것이 성령 체험과 연관되었음을 말하는 구절에서 사용되었다. “…우리에게 기름을 부으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그가 또한 우리에게 인치시고 보증으로 우리 마음에 성령을 주셨느니라.”(고후 1:21b-22) 물론 여기서 제자들이 기름 부음을 받은 것과 보증으로 성령을 주신 것은 하나님의 별도의 행위이지만, 이 두 행위는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기름 부음 받은 것은 마음속에 성령을 보증으로 받은 것과 사실 같은 것이라는 뜻이다. 이것을 통해서 위 구절들에서 예수의 기름 부음 받은 것이 성령 체험과 연결되어 있듯이, 제자들이 기름 부음 받은 것도 성령 체험과 연결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보혜사 성령과 성령의 기름 부음

위와 같은 배경에서 우리는 요한일서 2장 20, 27절에 사용된 ‘기름 부음’이라는 말을 이해할 수 있다. 우선, 이 구절에서는 특이하게도 앞의 용례들과는 다르게 기름 부음이 동사가 아닌 명사로 사용되었다. 하지만 그것을 예수의 제자들이 소유하고 있다는 것(20절), 혹은 그것을 예수로부터 받았다는 것(27절)과 같은 용례를 통해서 볼 때, 이것이 단순히 신학적 개념으로 사용된 것이 아니라 그들이 실제로 체험한 것임을 보여주기에, 명사로 사용된 것과 동사로 사용된 것에는 큰 차이는 없다.
또 자연스럽게 우리는 기름 부음을 성령의 역사와 관계하여 이해할 수 있다. 20절의 기름 부음의 기능은 요한복음 14-16장에 나오는 보혜사의 기능과 일치한다. “너희는 거룩하신 자에게서 기름 부음을 받고 모든 것을 아느니라.” 기름 부음을 성령 혹은 성령의 역사로 보면 이 문장은 완벽하게 이해된다. 첫째, 요한복음에서 성령은 하나님 혹은 예수로부터 파송되는데(14:16, 26; 15:26), 여기에서는 “거룩한 자”에게서 보내진다. 거룩한 자가 하나님인지, 예수인지에 대해서 주석적 논란이 있는데, 어느 것이든 요한복음에서 말하는 보혜사의 성격과 완전히 부합하는 것이다. 둘째, 요한복음에서 세상은 보혜사 성령을 받을 수 없고 오직 예수의 제자만 받을 수 있는데(14:17), 마찬가지로 여기서도 “너희”, 즉 예수의 제자들만 기름 부음을 소유하고 있다. 셋째, 이렇게 기름 부음을 소유한 “모든 자들”은 그 기름 부음의 역사에 의해서 꼭 알아야만 할 진리를 “알게 되는데”(οἴδατε πάντες), 요한복음에서 보혜사의 중요한 기능 중 하나는 보혜사를 소유한 사람에게 예수의 말씀을 올바로 기억나게 해서 그 말씀의 뜻을 깨닫게 하는 것이다.(14:26)
요한일서 2장 27절에 나오는 기름 부음의 역사도 요한복음 14-16장에 나오는 보혜사 기능과 일치한다. “너희는 주께 받은 바 기름 부음이 너희 안에 거하나니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오직 그의 기름 부음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치며 또 참되고 거짓이 없으니 너희를 가르치신 그대로 주 안에 거하라.” 첫째, 제자들이 성령을 예수로부터 받은 것이듯이(요 15:26), 기름 부음도 “그”, 즉 예수로부터 받은 것이다. 둘째, 보혜사 성령이 신자 안에 거하듯이(요 14:17), 기름 부음도 제자들 안에 거한다. 셋째, 보혜사 성령이 모든 일을(πάντα) 제자들에게 가르치듯이(요 14:25, 16:13), 기름 부음은 모든 일에 관계하여(περὶ πάντων) 제자들을 가르친다. 넷째, 보혜사 성령이 진리의 성령(τὸ πνεῦμα τῆς ἀληθείας)이듯이(요 15:26, 16:13), 기름 부음은 진실되다(ἀληθές).
이상을 통해서 우리는 기름 부음이 요한복음 14-16장에 나오는 보혜사 혹은 보혜사의 기능과 일치한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런데 그것을 보혜사라고 하면 될 것을 왜 굳이 기름 부음이라는 용어를 사용했을까 하는 의문이 남는다. 우리는 그 이유를 정확히 알 수 없지만 다음과 같이 추정해볼 수 있다.
첫째, 요한복음에서는 성령을 보혜사라고 지칭하는데, 요한일서에서는 예수가 보혜사로 지칭된다.(2:1) 물론, 요한복음 14장 16절에 따르면 예수가 원조 보혜사라는 것이 전제되어 있고, 성령은 제2의 보혜사(ἄλλος παράκλητος)이지만, 거기에서는 예수가 보혜사라고 지칭되지는 않았다. 요한일서 2장 1절에서 예수가 보혜사로 지칭되었기에, 곧이어 성령을 보혜사로 지칭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둘째, 요한복음에서는 유대인 불신자들과 싸우면서 보혜사를 제시하기에 보혜사의 핵심 역할이 신자 안에서 예수가 의로운 하나님의 사자라는 것을 증언하는 것인데 반해(15:26), 요한일서에서는 기독교 공동체에 있다가 나간 사람들과 싸우면서 그들이 평상시에 자주 사용하던 용어인 ‘기름 부음’이란 말을 사용해서 오히려 그들의 주장을 반박하고 있는 것이다.

사역을 위한 성령 체험으로서의 기름 부음

요한일서 2장 20, 27절에 나오는 기름 부음이 성령의 역사와 관계된 것이라면, 구체적으로 어떤 성령의 역사와 관계된 것인가? 첫째, 그것은 실제 성령 체험이다. 그동안 서구 학자들은 이것을 체험이 아니라 세례나 견진 같은 종교 의식으로 보려고 했다. 하지만 요한은 세례든 성만찬이든 종교 의식 자체에는 관심이 없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래서 이것을 종교 예식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둘째, 이 성령 체험은 순간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요한은 초기 교회에서 성령 체험을 가리키는 공통 용어인 ‘받다’(λαμβάνω)라는 동사를 사용하여(요 14:17, 행 8:14-20, 갈 3:2), 기름 부음이 기본적으로 신자가 단번에 체험하는 것임을 말하고자 했다. 셋째, 보혜사 성령의 역할이 신자들의 인격 형성을 목적으로 하기보다는 신자들이 사역을 감당하는 것이듯이,1 기름 부음도 그렇다.
그러면 신자에게 성령의 기름 부음이 임하면 그에게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 여기서 가장 중요한 기름 부음의 역사로 제시되어 있는 것은 가르침을 받는 것과 알게 되는 것이다. 그 내용은 기본적으로 예수의 말씀이다. 그래서 기름 부음은 보혜사의 역할 중에서도 말씀에 대한 해석의 기능을 하는 것에 초점이 맞추어진 것이다. 또 그 역할이 모든 일에 대한 가르침이기에 신자가 일상생활에서 발생하는 모든 일에 대해 성령의 인도함을 받는 것도 포함된다.
여기서 제자들에게 요청되는 것은 바로 그 가르침을 따르는 것이며, 그 가르침 안에 거하는 것이다. 27절의 ‘엔 아우토’(ἐν αὐτῷ)라는 말은 문자 그대로는 “그 안에서” 혹은 “그것 안에서”이다. 전자라면 예수(혹은 주)를 의미하고(개역개정 번역에서처럼), 후자라면 기름 부음을 의미한다. 대명사가 남성일 수도, 중성일 수도 있기에 문법적으로는 두 가지 다 가능하지만 필자는 이 어구를 ‘그것’, 즉 기름 부음으로 번역하는 것이 더 적절하다고 본다. 앞 문장이 기름 부음인데, 그 안에 거하라는 것은 “그 기름 부음” 안에 거하라는 것이 자연스럽다. 요약하면, 기름 부음에서의 성령의 주 역할은 제자들을 가르치는 것인데, 그 가르침의 내용은 예수의 말씀과 행위에 대한 해석과 신앙생활 일상에서의 구체적인 인도이다.

말씀의 기름 부음도 가능한가

위에서 본 것처럼, 기름 부음이 성령의 역사를 지칭하는 말인 것은 분명하다. 물론 이에 반대하는 학자들도 있다. 어떤 학자는 기름 부음이 말씀 사역만을 의미한다고 주장한다. 말씀도 예수의 제자가 거룩한 자-하나님이든 예수든-에게서 받는 것이고, 믿은 후 계속 가지고 있는 것이고, 그것을 통해 진리를 알게 되는 것이다.(20절) 또 기름 부음이 말씀이라면, 그것은 신자가 믿을 때 복음으로 받은 것이고, 그 말씀이 그 이후의 모든 삶의 교사가 되며, 신앙생활의 요체는 그 말씀 안에 거하는 것이다.(27절) 그래서 기름 부음은 문맥상 말씀이라고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기름 부음이 오직 말씀(혹은 복음)의 역사라고 주장하는 것에는 문제가 있다. 왜냐하면 기름 부음이라는 용어 자체가 앞에서 보았듯 성서 용례에서 압도적으로 성령과 연관되어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다만, 요한복음에서 보혜사 성령의 역할이 예수의 말씀에 대한 올바른 해석을 하는 것이기에, 기름 부음이 말씀과 상관없는 사역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요한은 보혜사의 중요한 역할로 예수의 말씀을 올바로 해석하는 것과 그 이외의 모든 것에 대해서 가르침을 주는 것이라고 말하기 때문이다.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요 14:16) 이것과 정확히 일치하는 부분이 요한일서 2장 27절에 나오는 기름 부음의 역할이다. “오직 그의 기름 부음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치며.” 또 기름 부음을 통해서 신자는 예수의 복음과 상황에 대한 것을 다 올바로 해석하여 알게 된다.(요일 2:20)
그렇다면 보혜사의 역할과 같이 기름 부음의 역할도 예수의 말씀과 상관없이 독자적으로 제자들을 인도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의 말씀에 입각하여, 예수의 말씀을 올바로 해석하게 하여 제자들을 인도한다고 볼 때 기름 부음은 성령의 역사이면서 동시에 말씀에 관계된 역사라고 할 수 있다.

기름 부음, 어떻게 사용하는 것이 적절한가

그러면 우리는 지금 기름 부음을 어떻게 사용하는 것이 적절한가? 우리는 위에서 고찰한 대로 요한일서에서 말하는 기름 부음의 의미 내에서 이 말을 사용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첫째, 예수를 믿을 때 처음으로 성령의 능력을 체험한 것을 우리는 기름 부음 받았다는 말로 사용할 수 있다.
둘째, 예수를 믿고 그 기름 부음이 자신 안에 계속 거하게 하는 가운데, 자신의 이성이 아니라 성령의 역사로 예수의 행위와 말씀, 성서의 의미를 갑자기 깨닫게 된 것에 대해서 이 말을 사용할 수 있다. 이것은 고린도전서 2장 10절에서 바울이 말하는 성령의 계시와 유사한 것이다.
셋째, 말씀이 성령에 의해서 올바로 해석되는 가운데, 그 말씀의 구체적인 적용에 대해 성령의 인도함을 받았을 때 이 말을 사용할 수 있다. 성령이 마음속에 주는 구체적인 인상이 있을 때도 이 말을 사용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기름 부음을 받았다는 말은 이렇게 쓸 수 있다. “나 어제 예배 시간에 성령의 기름 부음을 처음으로 체험했어.” “성서 말씀을 읽다가 성령의 기름 부음이 임해서 말씀의 뜻을 깨닫게 되었어.” “어제 기름 부음이 임해서 기도하는 문제에 대해서 하나님의 구체적인 뜻을 확실히 깨닫게 되었어.”
결국, 서두에서 기름 부음에 관해서 말한 모든 말들이 다 사용 가능한 것이다. 다만, 이것이 성령의 사역과 연관된 것이기에 이것을 성화와 연관하여 이렇게 사용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성령의 기름 부음을 받아 사랑의 사람이 되었어.” “그는 성령의 기름 부음을 받더니 온전한 사람이 되었어.”

주(註)

1 이에 관해서는 필자의 다음 논문을 보라. 김동수, “‘성령을 받으라’(요 20:22): 요한복음의 두 가지 성령 수여 약속의 통합 성취”, 「신약논단」 26(2019), 981-1010.


김동수1한국신약학회 회장을 역임했다. 『방언과 예언』 등 신약학에서 본 성령론에 관한 다수의 저서와 논문이 있다. 평택대학교 신학과 신약학 교수로 재직 중이다.

 
 
 

2021년 11월호(통권 75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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