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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me > 기독교사상 > 성서와설교 > [르네 지라르의 성서 읽기 09]
성서와설교 (2021년 10월호)

 

  거라사의 귀신 들린 자
  (막 5:1-20, 마 8:28-34, 눅 8:26-39)

본문

 

예수께서 갈릴리 호수를 건너 거라사라는 곳에 가셨다. 거라사는 데가볼리 지역의 땅으로 갈릴리 호수와 요단강 동쪽이고, 유대나 갈릴리 혹은 사마리아가 아닌 이방 지역이다. 예수께서 배에서 내리시자 귀신 들린 자가 멀리서 예수를 알아보고 달려와 무릎 꿇는다. 예수는 귀신에게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고 명령한다. 군대라는 이름을 가진 그 귀신은 그 지역에서 쫓겨나지 않게 해달라고 예수께 간청한다.
마침내 귀신은 그 사람에게서 나와 돼지 떼 속으로 들어간다. 먹이를 먹고 있던 그 지역의 돼지 떼는 귀신이 들어가자 모두 산비탈을 내달아 물속에 빠져 죽는다. 돼지 치는 자의 전갈을 듣고 몰려든 거라사 주민들은 귀신 들린 자가 제정신이 돌아와 멀쩡하게 앉아 있는 모습을 본다. 거라사인들은 예수에게 떠나달라고 간청하고 예수는 그곳을 떠난다.

귀신 들린 자는 주민들의 희생양

지라르는 거라사의 귀신 들린 자를 거라사 사람들의 희생양으로 본다. 그가 무덤에서 산다는 사실은 추방을 암시한다. 누가는 그가 ‘광야로 나갔다’고 말함으로써(눅 8:29) 귀신 들린 자가 희생양 만들기의 한 방식인 추방에 의해 버림받은 자임을 암시하고 있다. 그가 늘 귀신 들려 있는 것은 아니다. 누가는 그가 ‘가끔’ 귀신에 붙잡혔다고 명시하고 있다.(눅 8:29) 어느 정도 제정신이 돌아왔을 때 그는 마을로 내려왔을 것이다. 마을로 들어오면 사람들이 그를 붙잡아 쇠고랑과 쇠사슬로 손과 발을 묶었다.
지라르는 거라사 주민들의 집단 폭력에 명분이 있었다고 본다. 귀신의 힘을 억제해서 귀신 들린 자를 고치고 그가 다시 무덤으로 돌아가는 것을 막는다는 명분이다. 실제로 누가는 마을 사람들이 귀신 들린 자를 ‘지키기 위해’ 쇠고랑을 채웠다고 기록하고 있다.(눅 8:29) 그러나 그를 쇠사슬로 묶는 폭력은 그의 상태를 더욱 악화시켜서 그로 하여금 다시 마을 밖으로 뛰쳐나가게 만들었다. 그는 쇠고랑과 쇠사슬을 끊고 달아났다.(막 5:4) 그를 지킨다고 채운 쇠사슬은 그를 뛰쳐나가게 만들었고 주민들은 그를 추방하는 효과를 보고 있다.
마을로 돌아온 귀신 들린 자를 마을 사람들이 쇠사슬로 묶고, 그는 그 결박을 풀고 다시 무덤으로 돌아가 소리 지르며 산속을 배회한다. 이런 일은 반복되었다. 귀신 들린 자가 ‘여러 번’ 결박당했으나 그럴 때마다 그가 결박을 풀고 나가 아무도 그를 제압할 수 없었다는 본문(막 5:4)은 마을로의 귀환과 추방이 반복되었음을 암시한다.
지라르에 따르면 이러한 귀환과 추방의 반복은 희생제의를 연상시킨다. 희생양을 잡는 희생제의는 반복되어야 한다. 희생양 메커니즘은 공동체의 분열 위기를 근본적으로 해결하지 못하고 임시로 봉합할 뿐이다. 그러므로 희생양 메커니즘은 희생양의 피를 계속 요구한다. 돌아온 자를 다시 추방하는 희생제의의 반복은 주민들에 의해 기술적으로 이루어졌다.
지라르는 마을 사람들이 귀신 들린 자를 느슨하게 묶었다고 본다. 쇠사슬을 풀 수 없도록 단단히 묶을 능력이 그들에게 없었던 것이 아니다. 귀신 들린 자가 풀 수 있도록 느슨하게 묶어 그가 결박을 풀고 마을 밖으로 뛰쳐나갈 수 있게 만들었다. 그런 식으로 마을 사람들은 그를 지킨다는 명분도 살리면서 실제로는 폭력으로 그를 추방하는 효과를 보고 있었던 것이다. 마을로 돌아온 그 불쌍한 사람은 다시 주민들의 폭력에 의해 추방되어 무덤에서 살 수밖에 없었다. 고대 사회에서 공동체로부터 추방당하는 것은 곧 죽음과 동일시되었다. 추방은 살해와 같은 것이다.
거라사의 귀신 들린 자가 무덤에서 살고 있었다는 성서 본문은 그가 죽임을 당하는 희생양임을 암시한다. 무덤은 죽음을 암시하기 때문이다. 거라사 사람들은 그에게 쇠고랑을 채우는 집단 폭력을 통해 집단 추방의 효과를 보고, 집단 추방을 통해서 희생양의 피를 보는 집단 살해의 효과를 누리고 있었다. 무덤에서 사는 귀신 들린 자는 살아 있으나 죽은 자이다. 그는 죽기 위해 살아 있고, 다시 묶이기 위해 자유로우며, 무덤으로 추방당하기 위해 마을로 귀환한다. 그에게는 죽음과 삶, 자유와 구속, 귀속과 추방의 차이가 없다. 삶과 자유와 귀속이 죽음과 구속과 추방에 완전히 종속되어 생긴 무차별이다. 욕망의 좌절로 극도로 피폐해져 환각 상태에 빠진 그 귀신 들린 자는 모방욕망으로 말미암은 질투와 증오가 시시때때로 몰고 오는 거라사 마을의 위기를 해결하기 위한 지역 공동체의 희생제물이었던 것이다.
희생제의와 관련된 구절이 또 있다. 귀신 들린 자가 “돌로 자기의 몸을 해치고 있었더라”(막 5:5)라는 구절이다. 지라르에 따르면 이 구절은 희생양에 대한 군중의 투석 행위와 관련이 있다. 지금도 중동 지방에서 가끔 행해지는 투석은 고대 사회부터 내려온 집단 살해 방식 중 하나였다. 투석은 구약성서 레위기에도 사형집행 방식으로 나오고, 요한복음에 나오는 간음한 여인에 대한 군중의 처형 방식도 집단 투석이었다. 그리고 사도행전에서 스데반도 돌에 맞아 순교했다. 그리스에도 투석이 있었다고 한다.
돌을 던지는 것은 군중이지 개인이 아니다. 개인들은 군중에 묻혀 얼굴이 가려져 있다. 투석의 대상으로부터 모두가 일정한 거리를 두고 있으므로 어떤 개인이 가해자로 두드러지지 않는다. 그러므로 투석은 사적인 복수를 막는 공적인 행위이며 공동체 자체의 응징행위로 인식되었다. 투석을 통해 희생양에 대한 집단 살해가 이루어지거나 투석이 죄인에 대한 응보적 정의를 실현하는 사형집행의 방식으로 이용된 까닭은 거기에 있다.
지라르에 따르면 귀신 들린 자가 돌로 자기 몸을 자해하는 행위는 마을 사람들의 투석을 재현하는 것이다. 무리가 떼를 지어 돌을 던져 죽이거나 추방하여 희생양을 만드는 행위가 귀신 들린 자의 자해행위에 투영되어 있다. 실제로 거라사 주민들은 쇠사슬을 끊고 뛰쳐나가는 그에게 돌을 던졌을 것이다. 귀신 들린 자 스스로 자기 몸을 돌로 찧는 행위는 마을 사람들이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지라르의 해석이 맞다면, 거라사 사람들도 이미 희생양 메커니즘의 위기를 겪고 있는 셈이다. 피해자가 가해자의 행위를 재현하고 있음은 가해자의 폭력을 폭로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지라르는 자기 몸을 돌로 찧는 귀신 들린 자의 행위에는 마을 사람들에 대한 비난이 들어 있다고 본다.
만일 거라사 지방의 사람들이 희생양 메커니즘의 위기를 겪고 있다면 자신들의 행위에 대한 약간의 주저함이나 죄의식을 가졌을 것이다. 지라르에 따르면 귀신 들린 자에게 쇠고랑을 느슨하게 채운 데에는 그런 주저함도 한몫했다. 사실 나사렛 예수가 활동할 때는 이미 그리스 비극이나 그리스 철학이 출현한 지 수백 년이 흐른 다음이므로, 중동 지방에도 옛 종교에 기반을 둔 희생양 메커니즘의 효력에 조금씩 금이 가고 있었으리라 추정할 수 있다. 그러나 거라사 사람들의 주저함은 인식의 전환으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그들은 아직 자연종교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다시 말하면 그들은 희생양 메커니즘을 대체할 평화수립의 방식에 대해 아는 바가 없었으며 따라서 새로운 평화의 도, 곧 예수의 복음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지 않았다. 귀신을 쫓아낸 예수를 두려워하며 떠나달라고 요청한 까닭이 거기에 있다. 그 점은 나중에 뒤에서 보도록 하자.

내 이름은 군대입니다

거라사의 귀신 들린 자에 관한 본문에서 마가는 귀신을 단수로 취급하기도 하고 복수로 취급하기도 한다. 마가복음 5장 2절에서는 “귀신 들린 사람”이라고 말하며 귀신을 단수로 쓰고, 13절에서는 “귀신들이 나와서 돼지에게로 들어가매”라고 복수를 사용하고 있다. 예수께서 이름을 물었을 때에 귀신은 이렇게 대답한다. “내 이름은 군대니 우리가 많음이니이다.”(막 5:9) 귀신은 자기를 가리켜 ‘나’라고 하는 단수 대명사를 사용했다가 이내 ‘우리’라는 복수 대명사로 바꾼다. 이처럼 단수가 복수로 바뀌는 것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군대라는 이름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우리말 성서에서 ‘귀신’이라는 말은 그리스어 원문에서는 ‘악령’(프뉴마 아카타르토스, evil spirit) 또는 ‘더러운 영’(unclean sprit)을 가리킨다. 사탄이나 마귀는 개인이 감당하기 어려운 집단적 악의 힘을 초월적 실체처럼 표현하는 말이라고 볼 수 있고, 귀신은 사람에게 들어와 그 사람의 영을 지배하고 조종하는 사탄이나 마귀를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 그러니까 신약성서에 나오는 귀신은 사탄이나 마귀와 다른 것이 아니라고 할 수 있다.
성서의 세계관에서 악은 인간에서 나오고 인간이 만든 것이므로 악령인 귀신도 인간집단에서 생성된 죄의 힘을 가리킨다. 그 점은 지난 호에서 설명한 바와 같다. 인간세상의 죄의 힘이 세상 풍조를 이루어 개인의 영이나 생각이나 정신상태를 지배하는 집단정신을 형성하는데, 죄가 이루는 집단정신을 영적인 것으로 표현하면 악령이 된다. 개인의 영혼이 그러한 악령에 사로잡혀 자기 정체성을 완전히 잃을 때에 귀신 들렸다고 말한다. 악령, 곧 죄의 힘이란 하나님에게 순종하지 않고 세상을 따라 스캔들을 일으키는 집단적 모방욕망을 가리킨다. 세상 사람들, 곧 군중은 서로 스캔들을 일으키고 스캔들에 걸려 넘어져 치열한 모방욕망으로 경쟁하며 남부럽지 않게 살고 남보다 잘살기 위해 산다.
거라사의 귀신 들린 자를 지배하는 귀신은 세상 사람들 또는 거라사 사람들의 모방욕망이다. 세상 사람들의 모방욕망을 모방하던 그는 적어도 그가 부러워하는 한 사람의 모델이 일으킨 스캔들에 걸려 크게 넘어진 자이다. 지라르는 마태복음의 “귀신 들린 자 둘이 무덤 사이에서 나와 예수를 만나니”(마 8:28)라는 구절에 주목한다. 지라르에 따르면 마태는 귀신 들린 자를 두 사람으로 표현함으로써 귀신 들림이 부러움의 모델이 되는 다른 사람을 모방하는 데에서 발생하는 사건임을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 모델이 일으킨 스캔들은 욕망의 좌절을 가져왔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라지지 않는 격렬한 모방욕망이 모델을 자기와 동일시하며 귀신 들림의 결과를 낳았다.
그런데 모델이 스캔들을 일으키는 까닭은 그 역시 세상 사람들과 군중의 욕망을 모방하고 있기 때문이다. 귀신 들린 자가 스캔들에 걸리는 까닭 역시 그가 군중의 욕망을 모방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귀신 들린 자를 장악하고 있는 모델 뒤에는 세상 사람들과 군중이 있다. 필자가 볼 때 귀신이 단수이면서 복수인 까닭이 거기에 있다. 그러므로 마가복음 5장 9절에서 귀신이 자기를 단수로 표현한 것은 귀신 들린 자가 부러워한 특정한 사람 곧 모델을 가리키고, 귀신이 다시 자기를 복수로 표현한 것은 세상 사람들을 가리킨다. 귀신이 자기 이름을 군대라고 한 것은 바로 숫자가 많은 세상 사람들 또는 군중을 가리킨다. 흔히 귀신을 단수로 말하지만 그 단수는 복수로 이루어져 있다.
지라르는 군대라는 이름이 하나와 다수의 일치를 의미한다고 본다. 다수가 하나 되고 하나가 다수가 되는 곳이 군대이다. 우선, 다수가 하나 되는 것은 인간사회의 형성 원리 또는 사회적 관습을 가리킨다. 군대는 고향도 다르고 배경도 다른 수많은 사람으로 이루어지지만 획일적으로 움직인다. 인간사회 역시 모방욕망으로 말미암아 서로 경쟁적 관계에 놓여서 하나로 뭉칠 수 없는 개인들이 희생양 만들기를 통해 하나로 결속된다. 그런 식으로 인간은 분열을 막고 공동체를 이루고 산다. 그 점에서 군대라는 귀신 이름은 희생양 메커니즘을 통해 다수가 하나가 되는 인간사회의 형성 원리를 암시한다.
그런데 군대라는 이름은 인간사회의 위기를 나타내기도 한다. 수많은 군인들은 군대에서 억압에 의해 획일적으로 움직이지만, 복무기간이 끝나면 언제든 뿔뿔이 흩어져 다수가 될 준비가 되어 있다. 그와 같이 모래알 같은 개인들은 희생양 만들기를 통해 군대처럼 하나로 뭉치지만, 희생양 만들기는 사람을 진정으로 결속시키지 못하므로 개인들은 이내 다수로 흩어져 서로 경쟁한다. 이처럼 임시로 하나가 되었다가 다시 다수로 돌아가는 것도 군대와 같다. 그 점에서 군대라는 이름은 하나가 다수로 흩어져 상호 경쟁에 몰두하여 긴장이 고조되는 인간사회의 위기를 반영하기도 한다.
그러므로 귀신이 군대라는 이름을 가진 것은 귀신이 인간의 모방욕망과 희생양 메커니즘을 통해 활동한다는 점을 알려준다. 경쟁적 모방욕망을 통해 인간을 다수로 분열시켜 인간사회의 위기를 초래하게 하는 것도 귀신의 일이고, 다수로 흩어진 인간을 무고한 자의 희생을 통해 다시 하나의 공동체로 결속시키는 것도 귀신의 일이다. 다시 지난 호에서 사탄은 무질서의 원칙이자 질서의 원칙이라고 한 말을 기억하면 된다. 귀신 들린 자는 인간사회를 움직이는 귀신을 남보다 더 격렬하게 내재화하여 제정신을 잃어버린 자라고 볼 수 있다. 그는 남과의 경쟁력을 완전히 잃은 자요, 남을 희생양으로 만들지 못하고 본인이 희생양이 될 가능성이 많은 자이다.
예수는 귀신에게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고 명령했다. 귀신은 퇴마사나 무당에게 하듯이 예수에게 거래를 시도한다. 그 사람에게서 나오되 거라사 지방에서는 쫓겨나지 않게 해달라는 부탁이다. “그 지방에서 내보내지 마시기를 간구하더니.”(막 5:10) 귀신은 자기가 머물 자리를 옮길지라도 어떻게든 그 지역을 벗어나지 않으려고 한다. 귀신은 원래 그 지역 사람들을 움직이는 지역의 지배자이기 때문이다. 사탄이나 귀신은 세상의 왕이라고 할 수 있는데, 옛 사람들에게 세상이란 자기가 사는 지역을 가리킨다. 태어난 지역을 거의 벗어나지 않았던 고대인들은 지역주민들의 욕망을 모방하며 귀신의 지배를 받고 있었다고 보면 된다. 그처럼 지역의 지배자인 귀신은 어떤 특정한 사람에게 더 강하게 역사해서 그를 귀신 들린 자로 만든다.
퇴마사나 무당이 쫓아낸 귀신은 그 지역에서 사라지지 않는다. 그들은 사람을 스캔들에서 벗어나 세상으로부터 자유롭게 해주는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자연종교의 사제인 무당이 어떤 사람에게서 귀신을 내쫓았어도 언제든 다른 사람이 격렬한 모방욕망으로 귀신 들린 자가 생겨날 수 있다. 또한 마을의 필요에 의해 다른 사람을 귀신 들린 자로 만들 수도 있다. 고대 사회는 언제나 희생제물이 필요했고 귀신 들린 자는 희생양 삼기에 좋았을 것이다. 그래서 주민들이 연약한 자에게 폭력을 가하여 귀신 들린 자로 만들 수도 있다.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에 나오는 거라사의 귀신 들린 자에게도 그런 흔적이 보이지 않는가. 여하튼 자연종교의 사회에서 무당이 귀신을 쫓아내도 다시 귀신 들린 자가 생겨나는 현상을 가리켜 귀신이 한 사람에게서 나와 다른 사람에게로 들어간다고 표현할 수 있다. 본문에서 귀신이 그 지역에 머물게 해달라는 것은 다른 사람에게 들어갈 기회를 보는 것이다. 귀신은 무당에게 통하는 거래를 예수에게 시도했다.

물에 빠져 죽은 돼지 떼

귀신 들린 자에게서 나간 귀신이 산 위에서 먹이를 먹던 그 지역의 돼지 떼로 들어갔다. 귀신이 악취 나는 돼지 떼로 들어갔다는 사실은 그만큼 귀신이 궁박한 처지에 몰렸음을 의미한다.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들고 온 예수는 귀신과 공존하는 무당이 아니다. 그는 귀신이 생겨나는 근원을 파헤치고 성령으로 악령을 그 지역에서 쫓아낼 수 있는 권능을 가졌다. 그러므로 귀신이 예수에게 시도한 거래는 실패하고 만다. 돼지 떼로 들어가 잠시나마 그 지역에 머무를 수 있었던 귀신은 돼지 떼가 물속으로 들어가 몰살함으로써 그 지역에서 완전히 사라진다. “더러운 귀신들이 나와서 돼지에게로 들어가매 거의 이천 마리 되는 떼가 바다를 향하여 비탈로 내리달아 바다에서 몰사하거늘.”(막 5:13)
여기서 비탈은 절벽을 가리킨다. 절벽은 높은 곳에서 갑자기 낭떠러지 밑으로 떨어지는 지형을 가리킨다. 이 사건은 갈릴리 바다(호수)에 임한 지역에서 일어난 것 같고, 돼지 떼는 절벽 위의 산에 있다가 절벽 밑으로 내달아 바다에 빠져 죽었다.
지라르에 따르면 절벽은 고대 사회에서 제의적 집단 살해의 장소로 이용되었다. 절벽 밑으로 떨어뜨리는 것은 사회로부터의 완전한 단절과 추방을 의미한다. 희생제물은 성소에서 살해되기도 했지만, 거리를 둔 채 집단 투석으로 살해되기도 했다. 그리고 원시인이나 고대인들은 광야로 추방하는 방식으로 희생제물을 신에게 드리기도 했고, 절벽 아래로 떨어뜨리는 방식을 통해 사회 내부에 있는 폭력성의 정화, 곧 카타르시스를 경험하기도 했다. 지금은 마르세유가 프랑스에 속해 있지만 고대에는 그리스인들이 진출하여 살았던 곳이다. 마르세유에 살던 그리스인들은 불쌍한 파르마코스(φαρμακός)를 바닷가 절벽에서 떨어뜨려 죽게 했다고 한다. 누가복음에는 나사렛의 군중이 예수를 절벽 아래로 떨어뜨리려고 했다는 얘기가 나온다.(눅 4:28-30) 그런데 나사렛에는 절벽이 없다. 지라르에 따르면 누가는 희생제물에 대한 집단 살해가 벌어지던 절벽을 끌어들여 예수가 세상의 희생양이 된다는 점을 암시한다.
절벽이 의미하는 거리와 단절은 투석이나 추방처럼 희생제물의 피가 군중에게 전염되는 일을 막는다는 의미가 있다. 그 거리는 희생제물이 된 자의 복수를 막으면서 동시에 희생제물에 가한 폭력의 기운이 군중에게 전염되어 공동체 구성원들끼리의 상호폭력으로 이어지는 것을 막는다. 폭력은 쉽게 전염되기 때문에 피를 흘리는 제물로부터 거리를 두는 일은 매우 중요했다. 성소에서 제물을 잡아 피를 낼 때에도 일반인은 성소에 발을 들일 수 없게 해서 거리를 유지함으로써 폭력의 전염을 막았다.
돼지 떼 속에 들어간 귀신은 바다로 떨어져 거라사 지역에서 사라졌다. 이 일은 귀신 들린 자를 강하게 사로잡고 있던 그 지역주민들의 경쟁적 모방욕망이 그를 더 이상 지배하지 못함을 의미한다. 동시에 모델이 일으킨 스캔들에서 그가 벗어났음을 의미한다. 세상 사람들의 모방욕망에서 벗어난 인간의 탄생이라는 점에서 이 일은 예수의 다른 기적처럼 세상과 다른 하나님 나라의 시작을 알리는 사건이다. 하나님 나라는 세상으로부터 자유로운 자와 함께 시작하기 때문이다. 사탄의 힘을 빌려 사탄을 내쫓는 퇴마사나 무당의 퇴마행위와 달리 이 일은 하나님의 은총으로 된 일이다. 깨끗이 나음을 입은 귀신 들린 자가 예수를 따라가려고 하자 예수께서 이렇게 말한다. “집으로 돌아가 주께서 네게 어떻게 큰 일을 행하사 너를 불쌍히 여기신 것을 네 가족에게 알리라.”(막 5:19)
그런데 지라르는 거라사 지역 사람들의 반응에 주목한다. 사건의 자초지종을 목격한 돼지를 치던 자들이 지역주민들에게 그 일을 알렸다. 여기저기서 사람들이 몰려왔다. 그들은 귀신 들린 자가 온전한 정신으로 앉아 있는 것을 보고 두려워했다. 그리고 그들은 예수께 그 지방에서 떠나달라고 간구했다.(막 5:15-17) 그들은 무엇을 두려워하여 예수가 떠나기를 간절히 바랐을까? 2,000마리에 이르는 돼지 떼가 죽은 경제적 손실 때문일까?
지라르는 그렇지 않다고 본다. 사실 경제적 손실이 중요했다면 주민들이 예수에게 따지거나 손해배상을 요구할 일이지 단지 떠나달라고 간청할 일이 아니다. 필자가 볼 때 적어도 마가나 누가는 경제적 손실이 중요한 문제가 아님을 분명히 밝히고 있는 것 같다. 마태는 거라사 주민들이 무엇을 두려워했는지 명확히 밝히지 않았지만, 마가나 누가의 본문에 보면 거라사 주민들이 와서 보고 두려워한 것은 그 사람이 온전한 정신으로 돌아온 사실에 있다. “사람들이 어떻게 되었는지를 보러 와서 예수께 이르러 그 귀신 들렸던 자 곧 군대 귀신 지폈던 자가 옷을 입고 정신이 온전하여 앉은 것을 보고 두려워하더라.”(막 5:14-15. 참조 눅 8:35)
그렇다면 그들은 왜 귀신 들린 자가 치유받은 기적을 두려워할까? 거라사 주민들은 악령과 공존하는 사람들이었다. 악령이 주도하는 희생양 메커니즘에 의존해서 살아왔기 때문이다. 그들에게는 악령 들린 자가 필요했다. 그를 희생양 삼아 박해함으로써 모방욕망에서 생긴 공동체 와해의 위기를 극복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그들 스스로도 평소에 어느 정도 악령의 지배를 받는 자들이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세상과 인간사회는 어느 정도 사탄의 세상이 아닌가. 악령과 사탄의 실체는 스캔들을 일으키는 집단적 모방욕망에 있으며, 모방욕망이라는 악령의 지배를 받아 인간사회는 분열과 전쟁의 위기를 겪는다. 물론 거라사의 보통 사람들을 가리켜 악령 들린 자라고 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스캔들을 뿌리고 스캔들에 걸려 넘어지는 한, 보통 사람들도 어느 정도 악령의 지배를 받고 있는 셈이다. 스캔들 때문에 위기를 겪는 거라사 주민들은 다시 악령의 수법을 따라 무고한 사람을 희생양으로 만들어 위기를 모면하고 평화를 유지한다.
악령과 공존하며 공동체를 유지하는 거라사 주민들은 악령을 그 지역에서 내쫓는 예수의 권능이 두려울 수밖에 없었다. 귀신 들린 자가 제정신으로 돌아온 일뿐 아니라 귀신이 돼지 떼에 들어가 몰살한 일도 두려운 일이다. 두 사건은 같은 사건이다. 마가는 거라사 주민들이 악령 들린 자에게 일어난 일과 돼지의 일을 듣고 예수에게 떠나달라고 요청했다고 적고 있다.(막 5:16-17) 돼지에게 일어난 일이란 경제적 손실의 문제가 아니라 악령과 귀신이 그 지역에서 완전히 떠나는 문제이다. 그렇게 보면 악령 들린 돼지 떼는 희생양 메커니즘을 따라 살아온 거라사의 주민들을 가리킬 수도 있다. 돼지 떼에 들어간 수많은 악령들은 거라사 주민들 한 사람 한 사람을 어느 정도 지배하던 악령들이다. 그렇게 보면 돼지 떼와 악령들의 몰살은 스캔들을 일으키는 모방욕망의 종말이요, 희생양 메커니즘의 종말을 가리킨다. 그렇게 복음서 기자들은 예수의 기적을 통해 하나님 나라가 시작되었음을 알린다.
거라사 주민들은 귀신 들린 자를 마을에서 추방했지만 예수는 귀신을 그 지역에서 추방했다. 거라사 주민들이 귀신과 공존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그들이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유다와 갈릴리에서 귀신을 내쫓는 기적을 행했을 때에 사람들은 놀라워하며 예수를 쫓아다녔다. 그러나 거라사 주민들은 두려워하며 예수가 그 지역에서 떠나가기를 바란다. 지라르는 이방 지역인 거라사의 주민들이 예언자 전통과 접촉한 경험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본다. 예언자 전통이란 희생양을 만들지 않고 평화를 이룩하는 방식을 고난받는 하나님의 종을 통해 보여준 전통이다. 예언자 전통은 자연종교와 다른 하나님의 계시로서 구약성서의 핵심을 이룬다. 자연종교에서 벗어나지 못한 거라사 사람들은 희생양 메커니즘을 초월한 신을 알지 못하고, 희생양 메커니즘을 벗어난 평화 수립의 방식을 알지 못했다. 그래서 거라사 주민들은 자신들의 평화와 존속을 위해 예수가 떠나기를 바랐던 것이다. 물론 그들의 평화는 폭력을 수반한 거짓 평화이지만 말이다.
예수는 그들의 요청대로 거라사를 떠났다.(막 5:18) 지라르는 여기서 마태복음의 한 구절을 연상해낸다. 마태복음에서 거라사의 귀신 들린 자에 관한 이야기는 8장에 나오는데 다음 구절은 그 직전의 7장에 나온다.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 그들이 그것을 발로 밟고 돌이켜 너희를 찢어 상하게 할까 염려하라.”(마 7:6) 준비되지 않은 자에게는 진리가 먹히지 않고 오히려 모욕당할 수 있음을 알리는 말씀이다. 마태복음 7장의 돼지와 8장의 바다에 빠져 죽은 거라사의 돼지가 연관된다. 앞에서 돼지는 거라사인들 자신일 수 있음을 보았다. 그들은 자신들에게 주어진 진주를 알아보지 못하는 사람들이었다. 예수는 거라사인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보여주었지만, 복음을 받아들일 준비가 안 된 그들의 요청으로 미련 없이 그곳을 떠났다.
이 대목에서 떠오르는 이야기가 있다. 귀신 들린 딸을 가진 이방 여인의 요청을 예수께서 거절한 사건이다. 예수께서 두로와 시돈 지방에 가셨을 때의 일이다. 귀신 들린 딸을 고쳐달라고 한 여인이 소리 질러 외쳤다. 마가는 그 여인이 헬라인이라고 말하고, 마태는 가나안 여인이라고 적고 있다. 여인의 요청에 대해 예수께서 이렇게 답하셨다. “자녀로 먼저 배불리 먹게 할지니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막 7:27) 여기서 말하는 자녀가 이스라엘을 가리킨다는 것을 마태는 분명하게 밝힌다.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마 15:24) 마태복음에 나오는 예수의 응답에는 ‘개’라는 단어가 나오지 않는다. 그러나 예수의 응답에 대한 여인의 반응에는 ‘개’라는 단어가 나온다. “여자가 이르되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마 15:27)
이 사건에서 자녀와 개의 구분은 이스라엘과 이방 지역의 구분을 가리킴이 분명하다. 마태복음 7장 6절에 나오는 개와 연관이 있음도 분명해 보인다. 예수의 응답은 이스라엘에 대한 민족적 애정을 표현한 말이 아니다. 이방 지역에 대한 차별도 아니다.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에게 던짐이 마땅치 않다는 예수의 말씀은 준비되지 않은 곳에서 예수의 행위가 제대로 이해될 가능성이 없음을 가리키는 것 아닐까. 자연종교와 희생양 메커니즘에 빠져 있는 이방 지역은 귀신을 쫓아내는 예수의 행위를 인간사회의 새로운 평화 수립 방식으로 이해하지 못한다. 물론 이스라엘 사람들도 예수의 행위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그들 역시 대부분이, 특히 엘리트층일수록 예수가 사탄의 힘을 빌려 사탄을 내쫓는다고 보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 나라에 관한 복음을 전할 때 그것을 받아들일 준비가 된 곳은 예언자 전통과 구약성서를 가진 이스라엘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귀신 들린 딸을 가진 여인에 대한 예수의 일차적 반응을 전하는 복음서 기자들의 의도를 그렇게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이스라엘이라는 민족의 특권을 인정하자는 말이 아니라 신약성서의 복음은 구약의 전통과 연속선상에 있다는 말이다.

양명수|기독교윤리를 전공했다. 저서로 『아무도 내게 명령할 수 없다: 마르틴 루터의 정치사상과 근대』 등이 있다. 이화여대 기독교학과 명예교수이다.

 
 
 

2021년 11월호(통권 75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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