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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me > 기독교사상 > 성서와설교 > [구약성서를 통해 본 여성과 성폭력 03]
성서와설교 (2021년 9월호)

 

  세겜의 성폭력 사건과 2차 피해
  

본문

 

들어가는 말

기독교 평화주의에 관심이 있는 독자라면 메노나이트 평화신학자이면서 기독교 윤리학자인 존 하워드 요더(John Howard Yoder)라는 이름에 익숙할 것이다.1 그는 『예수의 정치학』 등의 유명한 저서로 한때 많은 이들에게 평화에 대한 성서적, 기독교 윤리적 통찰과 지향점을 제시한 학자였다. 그러나 2015년 레이첼 W. 구센이 쓴 “Defanging the Beast: Responses to John Howard Yoder’s Sexual Abuse”(야수의 송곳니를 뽑다: 존 하워드 요더의 성추행에 대한 메노나이트 교회의 반응)이란 논문을 통해 요더의 성폭력에 관한 진실이 세상에 폭로되었다.2 그가 1997년 사망한 후 거의 20년 만의 일이다.
요더의 성폭행과 피해자들의 고통을 외면한 아나뱁티스트 메노나이트 성경신학교(Anabaptist Mennonite Biblical Seminary)와 메노나이트 교회의 대응은 요더의 신학에 경도되었던 이들에게 큰 혼란과 충격을 주었다. 요더의 경우뿐 아니라 교회 내 목회자의 성범죄는 적극적으로 은폐되거나 축소된다. 목회자는 대부분의 피해자보다 높은 지위에 있고, 많은 권력을 가졌으며, 목회자의 도덕적 실패는 그가 대표하는 교회의 가치 및 이상의 결함을 뜻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교회 지도자, 회중, 기관, 교단은 일반적으로 피해자를 침묵시키거나 피해자의 말을 신뢰할 수 없게 만들어 피해자들을 교회로부터 멀어지도록 고립시킨다.
교회 안에서 일어난 성폭력을 ‘은밀하고 은혜롭게 덮고’ 넘어가려고 시도하며 제대로 해결하지 못하는 근본적인 원인은 교회의 남성중심적 권력구조와 여성 리더십의 배제에 있다. 또 다른 이유는 성폭력 사건은 피해자의 관점에서 판단해야 한다는 원칙을 대부분 인지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성폭력, 성희롱 사건을 판단하고 대처하는 양태는 도박, 폭력, 살인 등의 범죄와 달리 경계가 뚜렷하지 않다. 몸과 성이 가지는 주관적 체험과 관계의 성격도 사람 숫자만큼이나 주관적이고 다양하다. 그런데 성폭력 사건을 처리하는 주체가 남성 지도자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보니 그 과정에서 여성 피해자의 경험이 배제되고, 가해 사실과는 관련이 없는 가해자의 인격과 능력·사회적 공헌도가 부각되고, 피해자의 회복이 아니라 겉으로 보이는 공동체의 평화와 안정에 초점을 두게 된다. ‘유력무죄, 무력유죄’로 힘 있는 가해자는 보호되고, 힘없는 피해자는 온갖 비난과 조롱, 수치에 시달린다. 피해자에 대해 성폭력 사건과는 직접적인 관련이 없는 사실들을 언급하며 소위 ‘물타기’를 시도하기도 하고, 심지어는 불순한 목적을 가진 꽃뱀이라고 질타하며 피해자를 가해자로 둔갑시키기도 한다. 이 같은 “성폭력 사건처리 및 회복의 전 과정에서 입는 정신적·신체적·경제적 피해”를 ‘2차 피해’라고 정의한다.(「여성폭력방지기본법」 제3조 제3항) 이 법에서는 성폭력 피해자가 2차 피해로부터 보호받을 권리가 있음을 명시하고 있다.(같은 법 제14조 제3항)
구약성서의 성폭력 사건에서 보이는 2차 피해 역시 현대의 사례와 그 유형에 있어서 크게 다르지 않다. 성폭력 사건이 발생한 이후 그 처리 과정에서 피해자는 주변부로 밀려나 침묵당하고, 가해자 혹은 주변의 남성 친족이나 지도자들이 주도적으로 사건을 은폐시키거나, 정치적으로 이용한다. 성서 속의 성폭력 피해 여성에 대한 전통적인 성서주석가들의 해석으로 인한 2차 피해는 더 심각하다. 이번 글에서는 창세기 34장에 나오는 세겜의 성폭행 사건과 그 처리 과정에서 발생하는 2차 가해를 드러냄으로써, 성폭력 사건은 피해자의 관점을 견지하고 판단하고 처리하는 것이 중요함을 강조하고자 한다.3

배제되고 침묵당하는 성폭력 피해자

창세기 34장은 가나안 땅에서 세겜이 디나에게 행한 성폭력 사건을 다룬다. 이야기는 “그 땅의 딸들을 보기 위해 나갔더니”라는 디나의 행보로 시작된다. 주석가들은 어쩌면 단순하게 지나칠 수도 있는 히브리어 동사 ‘나갔다’를 성폭력 사건의 원인이 되는 비난받아 마땅한 행동으로 돌변시켰다. 알렉산드리아의 교부 키릴루스는 “그녀[디나]가 아버지의 집에 머무르며 거룩한 천막에서 계속 살았더라면 그런 비난받을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라고 말한다. 칼뱅도 “거룩한 야곱의 딸이 헛된 호기심으로 인하여 그토록 심한 벌을 받았다면 겁 없이 공공 모임으로 열심히 쫓아다니며 청춘의 정열을 불태우는 요즘의 연약한 처녀들에게는 어떤 위험이 도사리고 있겠는가! …그녀[디나]는 장막 속에서 어머니의 감시하에 머물러 있어야 했다.”라고 주석한다. 매튜 헨리는 디나가 나간 이유를 헛된 호기심 때문이라고 설명하면서 “주목하라. 자녀들이 집을 사랑하는 것은 매우 좋은 일이다. 부모들은 집을 편하게 해주는 지혜가 필요하며, 자녀들은 집에서 편안함을 누릴 의무가 있다. 그녀의 구실은 그 땅의 딸들을 보러 나갔으나 그것이 다가 아니었다. …주목하라 젊은 사람들은 교만과 허영심으로 각가지 올무에 걸리기가 매우 쉽다.”라고 덧붙인다.4
피해자에게 사건의 책임을 전가하는 방식은 가해자들의 전형적인 패러다임이다. 가해자들은 여성이 짧은 치마를 입었다거나, 늦은 시각에 혼자 다녔다는 사실을 언급하며 “그 여자들은 그래도 되는 여자들이다.”라는 패러다임으로 접근한다. 그러나 이 세상에 그래도 되는 여성들은 없다. 그들에게는 자신이 좋아하는 옷을 입고, 자신이 원하는 장소에 갈 수 있는 당연한 자유가 있다. 밖에 나간 디나의 행동이 잘못이 아니고, 성추행한 세겜의 행동이 잘못이다.
정작 사건의 당사자인 디나는 자신의 행동을 설명할 기회를 부여받지 못한다. 성폭력 사건 이후, 가해자와 아버지 사이의 협상에서 결혼 이야기가 오갈 때도 디나는 철저히 배제된다. 로이스 미리암 윌슨의 말처럼, “창세기 34장에서 디나의 감정에 관심을 둔 사람은 없다. 디나는 말 한마디 하지 않았고, 자기를 옹호하지도 않았고, 잊혀진 사람이다. 성폭력 사건의 처리과정에서 디나는 ‘야곱의 딸’, ‘시므온과 레위의 여동생’ 등으로 남자들과의 관계에서 존재가 규정된다. 사건의 중심인물은 디나이지만, 실질적으로 전통적 문화 속에서 살아가는 여성의 경제적, 사회적 역할을 반영하듯, 디나는 항상 주변에 놓여 있다.”5

성폭력 가해자의 뻔뻔함과 사건 무마 시도

창세기 34장 2절은 세겜의 행동을 “그[디나]를 보고 끌어들여 강간하여 욕되게 하고”라며 네 개의 동사로 자세히 묘사함으로써 이것이 명백한 성폭력 사건임을 보여준다. 이어지는 3-4절은 가해자 세겜의 심정과 후속 대응을 설명한다. 세겜은 “그 마음이 깊이 야곱의 딸 디나에게 연연하며(다바크) 그 소녀를 사랑하여(아하브) 그의 마음을 말로 위로(다발 엘레브)”하였다.(3절) 연속하여 세 개의 동사로 세겜의 심정을 되풀이하여 설명하는 것은 그의 애정의 강도를 강조하려는 문학적 기법이다. 이를 통해 저자가 전하고 싶은 메시지는 무엇일까? 너무 사랑해서 참지 못하는 성욕에 대한 정당화라도 하고 싶은 것일까? 그러나 세겜이 디나를 사랑했다고 할지라도 그의 사랑은 그가 폭력을 행사했다는 것과 아무 상관이 없다.
성폭행 이후 세겜은 자신의 행동에 대한 사과나 반성의 절차 없이 너무도 당당하게 아버지 하몰에게 ‘이(하쪼트) 여자아이를’ 아내로 달라고 요청한다.(4절) 근칭지시형용사 ‘하쪼트’(이것)를 사용한 것은 세겜이 성폭행 후 디나를 자신의 집으로 데려갔음을 암시한다. 26절도 디나의 오빠들이 ‘칼로 하몰과 그의 아들 세겜을 죽이고 디나를 세겜의 집에서 데리고 나왔다.’고 적고 있어 디나가 당시 세겜의 집에 머물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세겜은 디나를 성폭행했을 뿐만 아니라 납치해서 자기 집으로 데리고 갔던 것이다. 피해자에게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많은 독자들은 이 사실을 미처 알아차리지 못한 채 본문을 읽는다. 자신을 성폭행한 자의 집에 홀로 남아 있던 디나는 얼마나 수치스럽고 두려웠을까? 게다가 가해자 세겜은 디나와의 결혼을 디나의 의사와 상관없이 진행한다. 성폭력 사건 이후의 처리 과정에서 가해자는 너무 당당한데, 피해자는 주변부로 밀려나다 못해 철저히 배제된다.
성폭행을 했지만 그것은 사랑 때문이었고, 이를 결혼으로 무마하려는 세겜의 결정을 책임 있는 자세라고 평가하는 주석가들도 있다.6 그러나 19절을 함께 고려해볼 때, 세겜의 행동은 반성하며 책임지려는 자세가 아니라 권력을 남용하여 자신의 성폭행을 조속히 은폐하려는 시도였다. 19절은 세겜이 그 일 행하기를 지체하지 않았던 이유를, 그가 성폭행(타파츠)을 했기 때문이며 그의 아버지 집에서 가장 존귀한 자였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그의 행동은 명백한 성폭력 사건이었고, 그가 사회적 특권을 가진 자이기 때문에 사건을 조속히 마무리하려 했고, 또 그렇게 할 수 있었다는 말이다.
성폭행 가해자의 책임 있는 자세란 자신의 방식대로 사건을 미화하고 은폐, 혹은 마무리하는 것이 아니라, 피해자에게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참된 용서를 구하는 것이다. 플라톤의 『파이돈』은 소크라테스의 사후 세계관을 상세하게 묘사하는데,7 이에 따르면 살인자와 같은 구제 불능의 죄인들은 타르타로스(지옥)로 보내져 영원히 풀려나지 못한다. 비교적 정도가 약한 죄를 지은 자들은 타르타로스로 보내져 1년 동안 지내다가 아케론 호수로 토해진 후 피해자들에게 용서해달라고 애걸복걸한다. 오직 피해자가 받아줄 때만 그들은 고문에서 해방될 수 있다. 이처럼 가해자는 무엇보다 먼저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피해자에게 용서를 구해야 한다. 피해자의 동의 없이 가해자인 자기가 책임진다는 식의 결정 배후에는 피해자를 동등한 인격체가 아니라 하층적 존재로 대상화하고, 그에 따라 피해자의 처우를 좌지우지할 수 있는 권한이 자신에게 있으며 피해자의 감정 따위는 개의치 않아도 된다는 교만이 깔려 있다.

성폭력 사건 이후의 2차 가해

6절 이후부터 등장하는 아버지와 남자 형제들의 반응은 성폭력 사건의 초점이 다른 곳으로 이동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디나의 성폭력 사건은 아버지인 야곱에게는 부족의 생존이 위협받을 수 있는 사건이었고, 남자 형제들에게는 부족의 명예와 체면이 손상당한 사건이었다. 사건 판단의 초점이 변화했음을 보여주는 첫 번째 증거는 디나의 성폭력 사건을 묘사하는 동사가 ‘인나’(강간하다) 혹은 ‘샤카브’(동침하다)가 아니라 ‘팀메’(더렵혀진)라는 종교적 언어로 바뀐 점이다. ‘팀메’(더렵혀지다)는 레위기 13-14장에서 제의적 분별(정결/부정결)을 말할 때 반복되어 사용된 상태동사이다. 디나의 몸은 타자화되어 오염의 대상이 되었다.
다음으로 디나는 ‘레아의 딸’(1절)이 아닌 ‘야곱의 딸’로 관계 설정이 바뀐다. 가부장 야곱과의 관계 재설정은 성폭력 사건이 개인의 차원이 아니라 공동체에 끼치는 영향이 관심의 초점이 되는 조직적 차원으로 변화되었음을 의미한다. 이 사실은 남자 형제들이 분노한 이유가 “부끄러운 일 곧 행하지 못할 일”(네발라)이 이스라엘에 발생했기 때문이었다는 설명에서도 잘 드러난다.
사건 묘사의 초점은 개인의 인권유린 사건으로서의 성폭력이 아니라 이스라엘 공동체의 명예 실추와 할례받지 않은 자와의 통혼 문제로 이동한다. 여기서는 성폭행을 묘사했던 세 단어 중에서 ‘샤카브’만이 언급되는데, 이는 야곱의 아들들이 사건의 폭력성과 강제성보다는 이스라엘 여성이 할례받지 않은 이방인과 부적절한 성관계를 가졌다는 종교적 규칙 위반을 더 문제시하고 있음을 재확인해준다.
‘불결’(팀메), ‘할례’라는 종교적 언어의 등장은 ‘헤렘’이라는 또 다른 종교언어를 불러낸다. 즉 25절에서 동사 ‘팀메’(더렵혀진)는 할례로 인해 거동이 불편한 히위족들을 몰살(헤렘)한 행위가 정당했음을 나타내는 이유로 쓰였다. 디나의 인권유린이나 고통은 관심의 초점에서 벗어나 있다. 심지어 31절에서 야곱의 아들들은 디나를 ‘신전 창기’(쪼나)8에 비유한다. 개역개정에서 신전 창녀로 번역된 히브리어 단어 ‘쪼나’는 창세기 38장 15절에서는 유다의 며느리 다말이 ‘쪼나’로 변장했다는 대목에서 언급되며, 레위기에서는 제사장이 결혼하면 안 되는 세 부류의 여자 중 하나로 언급된다.(레 21:7, 14) 신명기에서는 야훼 성전에 바칠 수 없는 돈으로 쪼나가 번 돈과 개 같은 자의 소득을 언급한다.(신 23:18, 공동번역에서는 이 단어를 성전에서 몸을 파는 여자와 남자로 번역한다.) 예레미야 2장 20절은 쪼나를 푸른 나무 아래서 몸을 굽혀서 하는 행음으로 묘사한다. 사건을 바라보는 남성 친족들의 초점의 변화는 그들이 디나에 대한 세겜의 성폭력 사건의 본질을 한 여성의 인권유린의 측면보다 부족공동체의 명예를 실추시키고 수치를 가져온 사회적 폭력이며, 거룩한 이스라엘에 대한 종교적 모독 사건으로 판단하고 있음을 드러낸다.
디나가 당한 성폭력 사건은 히위족을 몰살시키는 데 정치적으로 이용되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그러나 만일 디나가 침묵을 깨고 말할 수 있었다면, 오빠들을 향하여 “‘명예’라고 말하지 마세요. 당신들은 부족의 체면을 세우기 위해서 그 모든 살인을 한 거예요. 그건 바로 당신들의 명예를 걱정한 거지, 나의 명예가 아니에요.”라고 외쳤을 것이다.

나가는 말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창세기 34장은 성폭력 피해자인 디나의 입장을 대변하지 않는다. 범죄 후 사건 처리는 피해자를 배제한 채, 가해자와 남성 친족들의 주도하에 폭력적으로 진행되어 한 종족의 몰살로 끝난다. 가해자 중심의 성폭력 사건 처리는 “여성을 매개로 한 남성 연대를 노골적으로 확인하는 방식으로 새로운 남성 문화의 헤게모니가 구축”되는 과정이다.9 그 과정에서 디나가 겪었을 2차 피해는 여성 독자에게 고통과 안타까움으로 전달된다.
성폭력 사건을 공동체 보존의 관점에서 바라보고 처리했던 디나의 남성 친족들의 시선은 오늘날의 교회와 사회가 성폭력 사건을 판단하고 피해자를 바라보는 시선과 비슷하다. 피해자의 목소리와 인권은 배려하지 않고, 사건과 직접적인 연관이 없는 가해자의 인품이나 능력, 조직의 명예에 집중하고 관심을 가진다. 애틋한 애정과 추장의 아들이라는 권력을 통해 자신의 성폭력을 미화하고 결혼을 통해 이를 조속히 덮으려 했던 가해자 세겜, 그리고 평화라는 지고한 신학적 주제를 탐구한 학자적 덕망과 신학교 교수이자 교단의 중책을 맡은 자로서 교권을 이용하여 직장을 옮기는 것으로 조용히 사건을 덮고 넘어가려 했던 요더는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용서를 구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동일하다. 부족의 존속과 명예를 지키려고 노력했던 야곱과 디나의 남자 형제들의 노력은 신학교와 교회의 명성을 지키려고 했던 메노나이트 교회 관계자들의 노력과 상통한다.
성폭력 사건의 진상규명과 피해자들의 증언 과정에서 피해자들은 “진실이 드러났을 때 정의가 이루어졌음을 느꼈다.”라고 말하면서 “정의가 실현될 때 평화가 찾아왔다.”는 경험을 고백한다.10 이것은 성폭력 사건에서 가해자의 회개와 용서의 간구가 얼마나 중요한 요소인지를 보여준다. 그러나 동시에 이때의 초점은 가해자의 회개와 회복이 아니라 피해자의 회복이 되어야 한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사회심리학자이자 성폭력 피해 여성들의 치유와 회복을 돕는 시스터 케어(sister care) 사역의 디렉터로 활동하는 캐럴린 H. 헤겐은 피해자의 치유와 회복을 위해서는 피해자가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놓을 수 있는 안전한 공간이 있어야 하며, 교회가 그 공간이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아울러 교회나 기관이 책임을 고백해야 함을 다음과 같이 강조한다.

교회가 책임을 고백하는 것 자체가 피해자에게는 치유입니다. 교회가 가해자를 그런 폭력을 가할 지위에 앉힌 책임과 함께, 피해자를 보호하지 못한 책임이 있기 때문이지요. 대부분의 가해자는 자기 잘못을 절대 고백하지 않아요. 교회는 그를 리더로 세운 조직으로서 책임을 고백해야 하는 건 당연한 일이에요.11

지금이라도 한국 교계가 교회 내 성폭력 근절이라는 더 큰 의제로 전환하지 않는다면, 교회의 장래는 더욱 어두워질 것이다. 김성한의 말처럼, “교회를 성폭력으로부터 가장 안전한 공간으로 만드는 것은 세상의 절반이 묻고 있는 질문에 대한 교회의 가장 분명한 대답일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선교적 질문에 답하는 것이다.”12 그러기 위해서는 교회 내 성폭력 사건이 발생했을 때, 사건의 판단과 처리의 전 과정을 피해자의 관점을 견지하면서 진행함으로써 2차 피해를 막으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시간이 흘러도 피해자에게 성폭력 사건은 ‘지금의 현실’일 뿐이다. 피해자에게 마련된 최선의 선택지가 ‘최악’과 ‘차악’밖에 없는 현실이 고대 사회에서뿐만 아니라 지금의 현실 속에서도 모습을 달리하며 계속되고 있다. 이 고리를 교회가 앞장서서 끊어주기를 기대한다.

주(註)
1 요더의 가장 대표적인 저서로는 『예수의 정치학』(한국기독학생회출판부, 2007)이 있으며, 가장 최근에 번역된 책으로는 『(요더총서 13)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교재』(대장간, 2017)가 있다.
2 존 로스 편, 김복기 옮김, 『야수의 송곳니를 뽑다』(대장간, 2018).
3 창세기 34장의 세밀한 본문 연구를 위해서는 이영미, “피해자의 관점에서 읽는 디나의 성폭력 이야기(창 34장)”, 『이런 악한 일을 내게 하지 말라: 구약성서와 성폭력 그리고 권력』(동연, 2010), 51-76을 참조하라.
4 마크 셰리든 편, 이해정 옮김, 『교부들의 성경 주해 구약성경 2: 창세기 12-50장』(분도출판사, 2014), 365; 존칼빈성경주석편찬위원회, 『칼빈성경주석 2』(성서교재간행사, 1990), 266; 메튜 헨리, 『매튜헨리주석: 창세기』(크리스챤다이제스트, 2008), 543.
5 로이스 미리암 윌슨, 조최경자 옮김, 『흔히 들을 수 없는 성서의 여성이야기 2』(한국여신학자협의회 여성신학사, 2003), 135.
6 Danna N. Fewell and David M. Gunn, “Tipping the Balance: Sternberg’s Reader and the Rape of Dinah,” Journal of Biblical Literature 110(1991): 197.
7 플라톤, 천병희 옮김, 『플라톤 전집 I. 소크라테스의 변론/ 크리톤/ 파이돈/ 향연』(도서출판 숲, 2012), 243-244.
8 바이블웍스(Bible Works 9)의 검색 결과에 의하면, ‘쪼나’는 구약성서에서 창 34:31, 38:15, 레 21:7, 14, 신 23:19[18], 수 2:1, 6:17, 22, 25, 삿 11:1, 16:1, 잠 6:26, 7:10, 23:27, 사 1:21, 23:15, 16, 렘 2:20, 3:3, 5:7, 겔 16:30, 31, 41, 23:44, 욜 4:3, 미 1:7, 나 3:4에 등장한다. 기생, 창녀, 음녀, 몸 파는 여자, harlot, prostitute, whore 등으로 번역되었다.
9 권김현영, “그 남자들의 ‘여자문제’”, 정희진 엮음, 『미투의 정치학』(교양인, 2019), 68.
10 옥명호, “정의가 실현될 때 평화가 찾아옵니다: 피해자 중심의 요더 사건 해결을 이끈 사라 웽어 쉥크 AMBS 전 총장 인터뷰”, 김성한, 『요더의 실패한 정치학: 존 하워드 요더의 성폭력과 교회의 대응』(Ivp, 2021), 136에서 재인용.
11 옥명호, “교회는 성폭력으로부터 가장 안전한 공간이어야 합니다: 성폭력 피해 여성들을 위해 일하는 ‘상처입은 치유자’ 캐럴린 & 로다 인터뷰”, 김성한, 위의 책, 167에서 재인용.
12 김성한, 위의 책, 126.


이영미|연세대학교, 한신대학교 신학대학원, 뉴욕 유니온 신학대학원에서 구약학을 공부하였다. 저서로 『이사야의 구원신학: 여성시온 은유를 중심으로』, 『하나님 앞에 솔직히, 민중과 함께』 등이 있다. 현재 한신대학교 신학부 교수로 재직 중이다.

 
 
 

2021년 9월호(통권 75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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