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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me > 기독교사상 > 성서와설교 > [신약의 성령론 설교 02]
성서와설교 (2021년 9월호)

 

  "성령 받았다", 바르게 설교하고 있나
  

본문

 

유튜브에서 “성령 받으라” 혹은 “성령 받았다”라는 어구를 검색하면 복음성가 몇 곡이 뜨고, 이어서 수많은 설교가 올라온다. 이 어구는 복음성가 가사, 설교 제목, 신자들의 일상 용어로 빈번하게 사용되고 있다. 그런데 우리는 이 말을 바르게 사용하고 있는가?
교회에서 우리는 흔히 이런 말을 듣는다. “나 어제 부흥회 참석해서 성령 받았어.” 그런데 이런 말을 들을 때 언짢아하는 사람이 있다. “성령은 예수 믿을 때 이미 받았는데, 무슨 성령을 또 받아?” 그래서 이 문제를 가지고 서로 논쟁을 벌이기도 한다. 전자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예수를 믿었던 열두 제자들이 오순절 날 성령을 받은 것 아니야?” 후자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성령이 없으면 그리스도인이 아니라는 바울의 말(롬 8:9)은 그리스도인이 될 때 성령을 받는다는 말 아닌가?” 이런 논쟁은 자기 입장만 확인하는 것으로 끝나는 경우가 많다. 각자 나름의 성서적 근거를 가지고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지난 글에서 언급한 ‘성령 충만’과 같이 ‘성령 받았다’는 말도 교회 용어이기 이전에 신약성서에 사용된 성서 용어다. 마찬가지로 이 문제에 대한 해답도 신약성서의 용례를 면밀하게 분석해야 얻을 수 있다.

성령 받았다는 말은 성령을 체험했다는 말이다

성령 받았다는 말은 성령 체험을 단순하게, 직설적으로 표현한 말이다. 신약의 핵심 저자들인 바울, 누가, 요한 모두 성령 체험을 이 말로 표현하고 있다. 바울은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그들이 ‘다른 복음’(갈 1:6-9)을 따르는 것을 경고하면서 그들이 돌아갈 곳으로 공통적으로 가졌던 원초적 경험을 상기시킨다. 그것은 바로 성령 체험이었다. 바울의 말 그대로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이 율법의 행위로냐 혹은 듣고 믿음으로냐”(갈 3:2) 그들이 성령을 공통으로 체험한 것을 바울은 ‘성령 받은 것’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요한도 마찬가지로 성령 받는다는 말을 성령 체험을 가리키는 뜻으로 사용했다. 요한복음의 예수는 초막절 마지막 날에 사람들에게 장차 사람들이 경험할 성령 체험에 대해서 말한다.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요 7:38) 요한은 이것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이는 그를 믿는 자들이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요 7:39) 이어서 고별 설교에서 보혜사를 소개하면서 예수는 세상이 보혜사인 성령을 받지 못한다고 말한다.(요 14:17) 마지막으로, 부활 후 예수의 성령 수여를 “성령을 받으라”라는 말로 표현한다.(요 20:22) 바울과 마찬가지로 요한도 성령 체험을 성령 받는다는 말로 표현한 것이다.
누가도 사도행전에서 이 말을 성령 체험에 관계된 것으로 줄곧 사용하고 있다. 베드로는 자신의 설교를 듣고 마음이 찔린 사람들에게 그들이 회개하면 결국 성령의 선물을(혹은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라고 말한다.(행 2:38) 또 사마리아 사람들이 성령을 체험하는 것을 성령을 받는다는 말로 계속해서 표현하고 있다. “성령 받기를 기도하니”(행 8:15), “성령을 받는지라”(행 8:17), “성령 받는 것을 보고”(행 8:18), “성령을 받게”(행 8:19). 또 베드로의 설교 중에 고넬료와 그 집안 사람들이 성령 체험한 것을 베드로는 “이 사람들이 우리와 같이 성령을 받았으니”(행 10:47)라고 표현하고 있다. 또 바울이 에베소에 가서 그들에게 성령 체험 여부에 대해서 질문할 때도 이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행 19:2)
이상을 통해서 볼 때 ‘성령 받는다’는 말은 성령 체험에 대해서 신약 저자들이 공통으로 사용하고 있는 용어임을 알 수 있다. 이런 현상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그것은 신약 저자들이 구약성서에 있는 성령의 약속을 받는다는 의미로, 또 예수가 약속한 성령을 받는다는 의미로 단순하게 표현한 것이다. 여기에서 ‘받는다’는 의미의 헬라어 ‘람바노’는 어떤 것을 취하는 것, 인격을 영접하는 것(요 1:12), 어떤 것을 받아들인다는 의미 등으로 광범위하게 쓰이는 기본 단어이기에, 성령 체험을 이 말로 쓴 것은 자연스럽게 이루어진 것이다.

성령 받았다는 말은 여러 다른 말로 표현된다

성령을 받았다는 말은 그리스도인이 성령을 받아들였다 혹은 체험했다는 말이다. 이것은 인간을 주어로 해서 한 말이다. 그렇다면 이 말을 하나님을 주어로 해서 말하면, 하나님이 성령을 주셨다는 표현이 된다. 실제로 성령을 받았다는 말과 같은 의미로 (하나님이) 성령을 주셨다는 말이 누가와 바울과 요한에게 모두 나온다. 누가는 하나님이 성령을 주신다고 표현한다.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눅 11:13) “하나님이 자기에서 순종하는 사람들에게 주신 성령도 그러하니라.”(행 5:32) “또 마음을 아시는 하나님이 우리에게와 같이 그들에게도 성령을 주어….”(행 15:8)
바울 역시도 하나님이 성령을 주신다고 말한다. “그가… 보증으로 우리 마음에 성령을 주셨느니라.”(고후 1:22; 참조. 5:5) 바울은 신자가 성령을 받았다는 말을 하나님을 주어로 하여 하나님이 성령을 주셨다고 말한다. “너희에게 성령을 주시고”(갈 3:5; 참조. 살전 4:8) 요한은 하나님뿐만 아니라 예수를 주어로 하여 성령을 주신다는 표현을 썼다는 면에서 독특하다. “그의 계명을 지키는 자는 주 안에 거하고 주는 그의 안에 거하나니 우리에게 주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요일 3:24) 여기서 주(主)는 그리스도를 가리킨다. 또 다른 곳에서는 성령을 주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그의[하나님의] 성령을 우리에게 주심으로.”(요일 4:13)
‘성령을 받는다’와 ‘하나님/예수님이 성령을 준다’는 말은 여러 가지 다른 표현으로 나온다. 성령을 보낸다(요 14:26, 갈 4:6), 성령이 위로부터 내려온다(행 8:16, 10:44), 하나님이 성령을 부어준다(행 10:45), 성령의 동업자가 된다(히 6:4), 성령을 소유한다(롬 8:9, 유 1:19) 등이 있다. 이 모든 것은 성령을 받는다는 말과 다른 것이 아니다. 신약 저자들은 성령 체험을 성령을 받는다는 말과 함께 여러 표현으로 기술하고 있다.

성령 받았다는 말은 그리스도인의 정체성과 관련된 말이다

‘그리스도인’이라는 말은 본래 비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인들을 지칭하며 쓴 말이다.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던 예수의 제자들이 유대인들의 박해로 인해 흩어졌다가 이방인 지역인 안디옥에 이르러 큰 무리가 되었고, 그곳의 이방인들이 이 무리를 일컬어 ‘그리스도인들’이라고 부른다.(행 11:26)
그런데 초대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에 대한 정체성을 ‘그리스도인’이라는 말보다는 공통의 성령 체험에서 우선적으로 찾았다. 바울은 이것을 감동적인 필치로 이렇게 표현했다.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고전 12:13) 바울은 그리스도인이 하나인 이유를 그리스도인이 모두 한 성령을 체험한 것에서 찾는다. 이 구절에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았다’는 말과 ‘한 성령을 마신다’는 말은 모두 성령 체험을 역동적인 비유로 표현한 것이다. 즉 비유로 말하자면, 성령 체험은 성령에 잠기는 것이며, 성령의 인격을 깊이 맛보는 것이다.
누가도 어떤 사람이 그리스도인이라는 확증은 바로 성령 체험에서 얻는다고 믿었다. 베드로는 유대인으로서 오직 유대인만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있다고 처음에는 생각했다. 그와 함께 처음으로 성령을 체험한 사람들도, 열두 제자를 비롯한 120명의 제자들도 모두 유대인들이었다. 그들이 그리스도인인 것은 바로 성령 체험에 있었다. 그런데 이방인도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있음을 베드로가 받아들인 사건이 바로 고넬료 집안 사람들의 성령 체험이었다. 베드로는 이방인들이 성령 체험하는 것에 놀랐다.(행 10:45) 여기서 성령 체험은 바로 하나님의 백성임을 확인시켜 주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 후에 있은 예루살렘 공의회에서 베드로는 이방인들이 제2급의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라 유대인들과 똑같은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증거로 “하나님이 우리에게와 같이 그들에게도 성령을 주어”(행 15:8)라는 말로 표현하고 있다. 성령 받은 것은 바로 하나님의 백성의 표식이라는 것이다.
요한도 교회와 세상이 다른 점이 바로 성령을 받았느냐의 여부라고 본다. 고별 설교에서 예수는 제자들에게 보혜사인 성령을 보내줄 것을 약속한다. 그런데 그 보혜사는 오직 예수의 제자들만 받을 수 있고, 불신자들인 세상은 받을 수 없다. 그들은 성령을 받고자 해도 받들 수 없으며 오직 예수의 제자들만 그를 경험하고 상호내주를 통해서 교류할 수 있다. “세상은 능히 그를 받지 못하나니… 그러나 너희는 그를 아나니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요 14:17) 요한에게도 어떤 사람이 그리스도인인지 아닌지는 성령 체험으로 판가름 나는 것이다.

성령 받았다는 말은 두 가지로 쓰이고 있다

이상을 통해서 볼 때 성령 받는 것은 오직 그리스도인에게만 관계될 뿐, 어떤 경우든 비신자는 성령을 받을 수 없다. 그렇다면 이 말은 그리스도인의 어떤 체험을 말하는 것인가? 이것에 대해서는 신학적인 논쟁이 있다. 제임스 던(James D. G. Dunn)은 성령을 받는다는 말은 초대교회 안에서 ‘회심과 크리스천 제자도의 입문’을 말하는 전문 용어라고 주장한다.(롬 8:15, 고전 2:12, 고후 11:4, 갈 3:14, 요 7:39, 행 2:38, 10:47, 19:2)1 쉬운 말로 하면, 성령 받는다는 말은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뜻이지 다른 뜻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에 반해 멘지스(Robert P. Menzies)는 이 말이 신약의 저자에 따라서 다른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고 한다. 바울에게서 이 말은 던의 주장대로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에 관해서 말하는 것이지만, 누가에게서 이 말은 그리스도인이 된 사람이 사명 감당을 위해 능력을 체험하는 말이라는 것이다.2 이 문제에 대한 논쟁은 별도의 학술 논문에서 심도 있게 다루어져야 할 것이다. 그동안 필자는 이 문제에 대해서 깊이 고심했다. 필자 나름대로 얻은 해답을 다음과 같이 제시한다.
첫째, 바울이 이 말을 그리스도인이 되는 회심-입문에 관계해서 사용했다는 점은 분명하다. 이것에 대해서는 학자들 사이에 이견이 없다. 바울은 어떤 사람이 그리스도인인지 아닌지를 구분할 때 성령을 소유하고 있는지 아닌지로 판단한다고 말한다. 이것에 관해서 바울이 말한 대표적인 어구가 바로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롬 8:9)이다. 이 구절을 보다 문자적으로 번역하면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을 소유하고() 있지 않으면, 그 사람은 그에게 속해 있지 않다.” 성령 소유 여부는 어떤 사람의 그리스도인 여부를 결정하는 것이다. 그래서 앞에서 다룬 ‘성령을 받다’는 말과 이와 연관된 다른 표현들은 바울에게는 모두 그리스도인임을 나타내는 것이다.
둘째, 누가가 이 말을 어떻게 썼는지에 관해 학자들의 의견은 두 가지로 갈라져 있다. 일군의 학자들은 누가도 이 말을 그리스도인이 되는 문제와 연관해서 썼다고 주장한다. 이 주장의 근거는 사도행전 2장 38절에 나오는 것처럼 성령을 받는다는 말은 어떤 사람이 회개하고 세례받고 죄 사함을 받은 사람에게 자동적으로 주어지는 것을 표현하는 말이라는 것이다. 바울이 에베소 교인들에게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행 19:2)라고 질문한 것도 믿을 때에 성령을 받은 것이 정상이라는 것이다.
반면, 일군의 다른 학자들은 사도행전에서 성령 체험을 한 사람들이 많은 경우에 이미 그리스도인이었다는 것을 들어 위 견해에 반대한다. 사도행전에서 성령을 받는다는 말은 그리스도인이 된 사람에게 사명 감당을 위해 성령의 능력이 부어지는 것을 표현하는 말이라는 것이다. 사마리아인들이 예수를 믿었지만 아직 성령을 받지 못했다(행 8:15-19)는 말, 또 에베소 교인들도 예수의 제자가 되었지만 성령 체험을 하지 못했다(행 19:1-7)는 말이 이를 증명한다고 주장한다.
셋째, 필자의 판단으로는 위의 두 가지 견해 중 후자의 경우로 이해하는 것이 더 설득력이 있다. 예수는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는 사람들에게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눅 11:13)라고 말하고 있다. 누가에게 있어서 성령 체험은 이미 그리스도인이 된 사람이 기도를 통해 하나님께 요청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은 사도행전에 나오는 사마리아 그리스도인의 성령 체험에도 그대로 나온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그리스도인 된 사마리아 제자들에게 베드로와 요한은 “그들을 위하여 성령 받기를 기도”한다.(행 8:15) 여기서 성령 체험은 그리스도인이 된 사람들에게 자동적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기도를 통해서 주어진다. 첫 제자들이 오순절에 성령을 체험할 때도 역시 간절히 기대하며 오로지 기도에만 전념했다.(행 1:13-14)
넷째, 흥미롭게도 요한은 성령을 받는다는 말을 성령을 받아들인다는 의미로도, 또 성령의 능력을 받는다는 의미로도 쓴다. 예수는 초막절에 미래에 받을 성령을 제자들에게 약속한다. 그런데 여기서 성령을 받는다는 것은 성령을 받아들여 성령이 제자들 안에 거하여 거기로부터 생명이 폭발적으로 흘러나온다는 것이다.(요 7:38) 여기서 요한이 성령을 받는다는 말이 의미하는 것은 바울과 같이 성령을 소유한다는 의미다. 그런데 고별 설교에서 예수가 소개하는 보혜사의 핵심 역할은 예수를 증언(행 15:26)하는 일인데, 그것은 사도행전에 나타난 성령의 증인(행 1:8)이 되게 하는 역할과 같은 것이다. 그런데 예수는 이 보혜사 성령을 체험하는 것을 받는다고 표현한다.(요 14:17) 여기서 요한은 누가적인 의미로 성령을 받는다는 말을 쓰고 있다. 이어서 요한은 “성령을 받으라”(요 20:22)라는 말로 두 가지 서로 다른 성령 받음이 한 사건으로 성취되는 것임을 말하고 있다. 요한은 성령을 받는다는 말을 바울의 의미로 성령 소유라는 의미로도 쓰고, 또 누가의 의미로 성령으로 인해 증인되는 능력을 받는 것으로도 쓰면서 두 가지가 한번에 성취됨을 말하고 있다.3
정리하면, 신약성서에는 성령을 받는다는 말을 두 가지로 사용하고 있다. 바울은 이 말을 성령을 받아들여 소유하고 있다는 의미로 쓴다. 그래서 바울서신에서 성령을 받는다는 말은 성령을 받아들여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과 그 체험을 일컫는다. 반면 누가는 이 말을 이미 그리스도인이 된 사람이 그리스도가 주는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 성령의 능력을 체험한다는 의미로 쓴다. 그래서 누가에게 성령을 받는 것은 예수를 믿으면 자동적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께 요청해야 하는 것이다. 요한은 이 두 가지를 다 말하는데, 그것이 하나로 통합되어 성취된다고 본다.

성령 받았다는 말,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가

이제 우리가 신약성서를 읽을 때 이 말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는 분명해졌다. 바울서신을 읽을 때는 성령을 받아들여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는 의미로,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을 읽을 때는 그리스도인이 된 사람이 성령의 능력을 체험한다는 의미로 읽어야 한다. 그리고 요한복음을 읽을 때는 7장 38절의 경우는 바울의 의미로, 14장 17절은 누가의 의미로, 20장 22절은 둘이 통합된 의미로 이해하면 된다.
그러면 우리는 교회 안에서 이 말을 어떻게 사용해야 할까? 또 다른 사람이 이렇게 말하는 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우리는 성령을 받는다는 말을 때로는 성령을 받아들인다, 혹은 성령을 소유한다는 의미로, 때로는 성령의 능력을 체험한다는 의미로 사용할 수 있다. 그렇게 사용하는 상대방의 말을 그 정황에 맞게 알아들으면 된다. 그렇다면 서두에서 말한 부흥회에서 성령을 체험한 사람도 성령을 받았다는 말을 성서(누가)의 용례에 부합해서 사용한 것이고, 또 예수 믿을 때 성령을 받아들였다는 의미로 이 말을 쓴 것도 성서(바울)의 용례에 부합하는 것이다. 다만 이것을 신학적 용어로 정리하여 하나의 통합된 용어로 만드는 것은 별도의 신학화 작업이 필요한 부분이다.

주(註)
1 James D. G. Dunn, The Epistle to the Galatians (Peabody, MA: Hendrickson, 1993), 152-153.
2 Robert P. Menzies, Empowered for Witness: The Spirit in Luke-Acts (Sheffield: Sheffield Academic Press, 1994).
3 이 문제에 관한 학술 논문으로는 다음 글을 보라. 김동수, “‘성령을 받으라’(요 20:22): 요한복음의 두 가지 성령 수여 약속의 통합 성취”, 「신약논단」 26(2019): 981-1010.


김동수|한국신약학회 회장을 역임했다. 『방언과 예언』 등 신약학에서 본 성령론에 관한 다수의 저서와 논문이 있다. 평택대학교 신학과 신약학 교수로 재직 중이다.

 
 
 

2021년 9월호(통권 75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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