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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me > 기독교사상 > 성서와설교 > [르네 지라르의 성서 읽기 08]
성서와설교 (2021년 9월호)

 

  사탄아 물러가라
  (마 16:23, 막 3:23-26, 요 8:44)

본문

 

‘사탄’은 히브리어이다. 복음서는 사탄을 가리켜 그리스어 ‘디아볼리아’를 사용하기도 하는데, 우리말 성서에는 ‘마귀’로 번역되어 있다. 복음서에 나오는 사탄이나 마귀는 페르시아나 바빌로니아의 악한 신과는 관련이 없다. 성서는 근동지방의 이원론적 종교를 비신화화했고, 악을 초월적 실체로 인정하지 않는다. 다시 말해서 사탄은 존재론적 실체가 아니다. 구약의 세상 창조 이야기에서 시작된 비신화화는 신약으로 이어지고 완성된다. 기독교는 사랑의 하나님 외에는 다른 초월적 실체를 인정하지 않는다.
그 점은 우상을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한 사도 바울의 말(고전 8장)에서도 확인된다. 이방신 앞에 놓인 음식을 먹는 문제를 놓고 바울의 원칙은 대담하고 분명했다. 우상은 아무것도 아니고 초월적 존재는 오직 하나님 한 분이 계신다. 모든 음식은 하나님이 주신 것이니 감사하는 마음으로 먹으면 된다. 우상으로 불리든지 아니면 사탄이나 귀신으로 불리든지 사람을 해칠 수 있는 초월적 힘을 가진 실체는 없다. 아퀴나스도 사탄이 실체가 아님을 분명하게 말했다. 기독교와 함께 하늘은 깨끗해졌다.
그렇다면 복음서에 나오는 사탄이나 마귀의 정체는 무엇인가? 지라르는 사탄을 매우 중요하게 다룬다. 그는 사탄 때문에 인간은 자기 힘으로 자유로워질 수 없다고 말한다. 앞에서 창세기 3장의 뱀을 설명하며 사탄에 대해 생각해보았는데, 신약성서에 등장하는 사탄을 통해 성서가 생각하는 사탄의 정체를 다시 한 번 살펴보고자 한다.

사탄이란 스캔들을 가리킨다

마태복음 16장에는 처음으로 예수의 수난 예고가 나온다. 예수는 자신이 장로들과 제사장들에 의해 죽임을 당하고 사흘 후에 부활한다고 말한다. 그러자 그런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고 베드로가 펄쩍 뛴다. 베드로가 생각한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어린양인 그리스도와 달랐던 것이다. 베드로의 항변에 대해 예수께서 말했다.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마 16:23)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란 그리스 원어로는 ‘스칸달론’이다. 그것은 걸림돌(영어로는 ‘stumbling block’)을 가리키니 곧 스캔들이다. 베드로를 꾸짖는 예수의 말에서 사탄은 곧 스캔들을 가리킨다. 지라르는 복음서에서 예수가 스캔들의 위험성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했음을 강조한다. “만일 네 손이나 네 발이 너를 범죄하게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 만일 네 눈이 너를 범죄하게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마 18:8-9) 여기서 ‘범죄하게 한다’는 말은 그리스 원어로는 ‘스칸달리제이’로 되어 있으니, 곧 ‘스캔들에 몰아넣는다’는 뜻이다. 앞선 글에서 언급했듯, 스캔들이란 나의 경쟁적 모방욕망을 자극하는 타자의 소유 또는 타자의 욕망을 가리킨다. 타자의 소유와 그의 욕망은 나의 모방욕망을 부추기면서 동시에 막으니, 그것이 나를 걸려 넘어지게 하는 스캔들이다. 스캔들에 걸리면 나의 모방욕망은 더 커지고, 결국 인간은 격렬한 상호 경쟁과 갈등 그리고 시기와 증오의 구도로 빠져든다.
인간은 누구나 자기도 모르게 서로 스캔들에 빠져든다. 스캔들은 나의 밖에서 나를 유혹하여 끌고 가는 악한 힘으로 나를 지배한다. 그 점에서 스캔들이 곧 사탄이라고 할 수 있다. 사탄은 독립적 인격성을 띠고 세상을 통치하는 악한 신의 모습으로 그려지기도 한다. 사탄이 그처럼 독립적 인격체로 보이면, 사탄이 스캔들을 만든다고 할 수도 있다.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라는 예수의 말도 사탄은 스캔들이 아니라 스캔들을 만드는 자라는 해석이 가능하다.
그러나 사탄은 인간 밖의 초월적 실체가 아니라 곧 인간의 모방욕망이다. 물론 앞에서도 말했듯이 모방욕망 자체를 사탄이라고 할 수는 없으며 스캔들을 일으키는 모방욕망이 사탄이다. 하나님을 모방하지 않을 때에 인간의 모방욕망은 반드시 스캔들을 일으킨다. 인간을 걸려 넘어지게 하는 스캔들이 사탄이고, 근원을 따져 올라가면 그런 스캔들을 일으키는 인간의 모방욕망이 사탄이다. 또 다르게 말하면 하나님을 따르지 말고 자기를 따르라고 유혹하는 세상 사람들과 이웃의 욕망과 탐심이 사탄이다. 사탄은 다름 아닌 인간의 마음이 만들어낸 죄의 힘이다. 지라르는 사탄을 만들어내는 인간의 모방욕망을 가리켜 프로이트가 말하는 본능도 아니고 운명론이나 과학적 결정론도 아니라고 말한다. 인간이 마음을 돌이켜 하나님에게 순종하면 사탄은 힘을 잃고 사라지고, 그런 길이 지금도 열려 있다. 그러나 그것은 좁은 길이고, 성서는 아담이 하나님에게 순종하는 대신에 뱀의 유혹을 따랐다고 말한다.
앞에서 창세기 3장의 뱀을 해석하며 필자는 사탄을 가리켜 인간의 집단적 죄의 힘이라고 했다. 군중의 일반적 욕망의 힘이 개인 위에서 개인의 마음을 지배하기 때문에 종종 사탄은 초월적 인격체로 묘사된다. 신약성서에는 ‘세상의 왕’이라는 표현도 쓰인다. 그러나 성서에서 초월적 실체는 하나님 한 분이며 사탄이란 결국 인간의 마음 문제이다. 개인이 극복하기 어려운 집단적 삶의 방식과 사고방식 또는 세상 풍조가 사탄이다. 물론 필자의 글에서도 사탄을 때로 초월적 주체인 것처럼 표현하지만, 그것은 인간의 집단적 욕망이 개인에게 행사하는 강력한 지배력을 나타내는 표현이다. 그래서 필자는 창세기 3장 해석에서 사탄은 개인을 초월하지만 인간을 초월하는 것은 아니라고 말했다. 사탄은 인간의 집단적 삶의 방식과 일반적 사고방식 안에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마가복음에서 예수가 베드로를 향해 ‘사탄’이라고 한 것은 베드로의 모방욕망을 가리킨 것이고, 그의 모방욕망이 예수에게 스캔들이 될 수 있음을 가리킨다. 그것은 예수의 그리스도 됨을 베드로가 세상 방식으로 이해했음을 의미한다. 베드로는 자기 방식의 그리스도를 원했다. 베드로가 칼을 가지고 있었다는 성서 구절(요 18:10)은 베드로가 어떤 그리스도를 상정했는지를 암시한다. 압도적인 물리력으로 세상을 통치할 메시아에게 수난은 어울리지 않는다. 그래서 바울은 십자가가 유대인에게 스캔들이라고 했다.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고전 1:23) 이 구절에서 ‘거리낀다’는 말 또한 ‘스칸달론’이다. 십자가의 기독교가 유대인들에게는 시기와 증오 및 박해의 대상이 될 수 있음을 가리킨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기독교 신학의 역사에서도 그리스도의 수난을 하나님의 수난으로 보는 논리는 매우 조심스럽게 단계적으로 정착했다. 아퀴나스는 하나님을 가리켜 순수 현실태(actus purus)라고 했다. ‘악투스’(actus)라는 라틴어에는 여러 가지 의미가 있지만 그중에는 하나님이 언제나 능동적(active)이며 수동적(passive)일 수 없다는 뜻도 포함된다. 십자가의 수난을 가리켜 패션(Passion)이라고 하는데, 수난을 당하고 겪는 것은 수동적인 일이다. 그러한 수동성이 전능하신 하나님에게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이 중세 신학의 사유 방식이었다. 아퀴나스 자신이 성자는 성부에게 낯선 타자라고까지 말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수난도 그 인성의 수난을 가리킬 뿐 신성의 수난은 아니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베드로의 메시아 개념에 수난은 없다. 그러나 베드로가 생각한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일이 아니라 세상의 일에 속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마 16:23) 베드로의 욕망, 즉 힘으로 힘을 누르는 일은 폭력의 악순환을 일으키고 희생양 메커니즘을 지속시킨다. 그것은 사탄이 원하는 일이다. 한 사회의 희생양들에게 죄가 있도록 믿게 함으로써 군중으로 하여금 무고한 자를 희생시키도록 만드는 일이 사탄의 일이다. 그런 식으로 사탄은 옛 종교의 희생양 메커니즘을 오늘날까지 이어가게 만들고 있다. 하나님의 어린양 예수의 희생은 희생양 메커니즘을 무찌르기 위한 것이다. 십자가의 도는 희생양 메커니즘이 아니고도 평화를 이룰 수 있는 새로운 길을 제시한다. 그것이 하나님 나라를 향한 하나님의 일이다.
베드로는 예수를 세상의 일에 끌어들이려고 하는데, 그렇게 되면 예수는 베드로를 포함한 군중의 욕망을 충족시켜야 한다. 그럴 경우에 예수는 이스라엘의 영웅이 되겠지만, 그것은 예수가 세상의 경쟁적 모방욕망 속으로 들어가는 것을 의미한다. 베드로를 통해 세상 사람들의 모방욕망이 예수에게 스캔들이 되면 예수는 하나님의 일에서 멀어진다. 그래서 예수는 ‘사탄아 물러가라’고 말함으로써, 인간세상의 욕망이 자기에게 스캔들이 되는 것을 막았다.
스캔들을 뿌리고 다니지 않는 것도 중요하고, 스캔들에 걸려 넘어가지 않는 것도 중요하다. 스캔들을 뿌린다는 말은 자신의 영광을 구하고 자랑하여 남들의 경쟁적 모방욕망을 자극하는 일을 가리킨다. 스캔들에 걸려 넘어가지 않는다는 것은 남의 소유와 세상의 경쟁적 모방욕망을 모방하지 않음을 뜻한다. 두 가지 일 모두 사람의 힘으로 되지 않는다. 스캔들에서 벗어나려면 하나님께 순종함으로 그리스도를 모방해야 하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영적 능력으로 되는 일이다. 그것이 사탄을 이기는 성령의 작용이다. 요한복음은 일찌감치 문서의 앞부분인 3장에서 사람이 성령으로 거듭나야 한다는 예수의 말씀을 배치했는데, 그것은 스캔들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구원의 길을 제시한 것이다.
성서에는 중요한 순간에 예수께서 성령을 언급하는 대목이 나오는데, 복음서에 따르면 예수는 공적인 활동을 시작하기 전에 성령에 이끌려 광야에서 사탄의 시험을 받고 그 시험을 이겼다. 또한 예수는 성령의 힘으로 끝까지 세상의 스캔들에 걸리지 않고 사탄을 물리칠 수 있었다. 그리고 복음서는 예수께서 귀신을 쫓는 일도 성령으로 한 일임을 강조한다. 그것은 예수의 악령 추방 행위가 자연종교적인 퇴마 행위가 아니라 스캔들로부터 인간을 해방시키는 일이었음을 의미한다. 복음서에는 병 고치고 귀신을 쫓아내는 이야기가 많이 나오는데, 그것은 스캔들을 뿌리고 스캔들에 넘어가는 인간세상의 모방욕망이 가져온 고통과 폭력으로부터 인간을 구원하는 하나님 나라의 사건을 의미한다. 다음 본문을 통해 그 점을 확인해보자.

사탄이 사탄을 추방하다(막 3:23-26)

예수가 병을 고치고 귀신도 내쫓는 능력을 보이자 예루살렘에서 갈릴리까지 학자들이 찾아왔다. 그들은 예수가 귀신 들린 상태에서 귀신의 왕인 바알세불의 힘을 빌려 귀신을 내쫓는다고 비방했다. 당시에는 퇴마사들의 악령 추방 행위가 사탄의 힘으로 일어나는 일이라는 비난이 많이 있었다고 한다. 실제로 당시의 퇴마사나 무당은 신들린 상태에서 귀신을 내쫓았다. 그런 시각에서 예수를 비판하는 예루살렘의 학자들은 예수를 사탄과 결탁한 퇴마사로 본 셈이다.
지라르에 따르면, 성서에도 나오는 무당들의 병 고침이나 악령 추방은 자연종교의 희생제의와 관련이 있다. 원시종교에는 제의적 절차 중 하나로 집단적 신들림이 있었다. 신들림 곧 귀신들림(possession)은 모방욕망으로 말미암아 타자와 나의 차이가 흔들리는 환각 상태를 가리킨다. 충족되지 않은 모방욕망이 모델을 자기 안으로 끌어들여 동일시하는 일종의 히스테리성의 황홀경이 귀신들린 상태이다. 본래 그것은 차이가 없어지는 데서 생기는 사회의 위기를 재현하는 것으로서, 집단적 신들림 후에는 반드시 제물을 살해하여 바치는 희생제의가 따랐다. 그리하여 다시 차이와 질서를 회복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샤먼이 의술적 차원에서 신들린 상태로 병을 고치고 악령을 추방하는 일은 사회적 차원의 질서 회복이 개인 차원에서 일어나는 일이라고 볼 수 있다. 귀신들린 자와 동일시되어 환각 상태에서 그를 지배하였던 모델을 그로부터 떼어내어 자기로 돌아오게 하는 일, 그것이 샤먼의 악령 추방이다. 그러므로 무당의 병 고침이나 악령 추방은 원시 종교의 희생양 메커니즘에서 파생된 행위로서 다만 희생제물을 바치는 끝부분이 생략된 것이다. 지라르의 견해가 그렇다. 그렇게 보면 자연종교에서 벗어난 구약성서의 문헌에 정통한 당시의 율법학자와 서기관들이 무당이나 퇴마사의 악령 추방을 우상과 사탄의 힘을 빌려서 일어나는 일로 생각할 만하다. 그리고 그들은 예수가 귀신을 쫓아내는 기적 행위도 같은 눈으로 보았다. 친족까지도 예수를 미쳤다고 보았다고 복음서는 전한다.(막 3:21)
예수를 귀신들려 귀신을 좇아내는 자, 곧 사탄의 힘으로 사탄을 쫓아내는 자로 보는 성서학자들을 향해 예수께서 답한다. “사탄이 어찌 사탄을 쫓아낼 수 있느냐 또 만일 나라가 스스로 분쟁하면 그 나라가 설 수 없고 만일 집이 스스로 분쟁하면 그 집이 설 수 없고 만일 사탄이 자기를 거슬러 일어나 분쟁하면 설 수 없고 망하느니라.”(막 3:23-26)
이 부분에 대한 지라르의 해석은 다음과 같이 정리될 수 있을 것 같다. 우선, 사탄이 사탄을 내쫓는다는 것을 예수가 인정한다. 둘째, 그러나 그것은 원래 사탄의 활동 방식이지 사탄끼리의 분쟁은 아니다. 그러니까 지라르는 ‘사탄이 어찌 사탄을 쫓아낼 수 있느냐’는 구절의 ‘어찌’를 부정의 말로 보지 않고 사탄이 사탄을 쫓아내는 방식을 가리키는 말로 보는 셈이다. 사탄이 사탄을 쫓아내는 것은 맞다. 그러나 그것은 사탄을 다시 불러들이는 방식으로 일어나는 일이다. 그래서 사탄이 사탄을 쫓아내는 것은 사탄 나라의 분열이 아니라 원래 사탄이 자기 세계를 유지하는 방식이다. 사탄이 사탄을 쫓아낸다는 말은 일리가 있지만, 알고 보면 그것은 사탄이 자기 입지를 공고히 하기 위한 방도이다.
지라르의 시각을 따르자면, 예수는 퇴마사들의 악령 추방 행위를 지적하는 율법학자들의 이야기를 이용해서 희생양 메커니즘의 실상을 밝히고 있다. 복음서의 모든 이야기의 초점은 예수의 수난에 맞추어져 있고, 예수의 수난은 오래된 희생양 메커니즘의 폭력성을 드러내고 새로운 평화의 원리를 제시하는 데에 있다. 예루살렘의 학자들과 바리새인들은 예수의 귀신 쫓는 행위가 사탄의 힘에 의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예수는 그들의 말을 받아 실제로 일반적인 퇴마사들의 악령 추방은 사탄의 힘에 의한 것이며, 그것은 오래된 종교 행위인 희생양 메커니즘과 연관되어 있음을 드러낸다.
예수의 답변이 왜 희생양 메커니즘을 드러내는 것인지 보도록 하자. 지라르에 따르면 사탄이 사탄을 내쫓는다는 것은 사탄이 무질서의 원칙이자 질서의 원칙임을 의미한다. 사탄은 인간의 모방욕망을 부추겨 스캔들을 일으키고, 스캔들이 전염되고 확산되어 인간 세계는 경쟁적 소유를 위한 시기와 증오로 빠져든다. 그렇게 세상에 분열과 갈등이 끊이지 않게 만들어놓은 사탄은 그 갈등이 인류라는 종의 멸망으로 가지 않도록 질서를 회복시키는 해결책을 내놓는다. 그것이 희생양 만들기이다. 다시 말해서 무질서를 조장한 사탄이 그 무질서를 내쫓고 질서를 회복하기 위해 희생양을 만든다. 그렇게 희생양을 통해 회복된 평화는 인간의 경쟁적 모방욕망을 정화한 것이 아니므로 거짓 평화다. 희생양의 피로 평화를 찾은 인간 사회는 또다시 희생양의 피를 부른다. 약자와 불구자를 제물로 바치거나 젊은이들을 전쟁의 제물로 바치거나 마녀사냥을 통해 무고한 자를 살해하거나 박해한다.
그런 식으로 희생양 메커니즘은 사탄의 나라를 유지시키고 공고하게 만든다. 인간의 시기심과 분열을 일으켜 무질서의 위기를 초래하는 사탄을 내쫓아 질서와 평화를 회복하도록 하는 사탄의 행위가 희생양 메커니즘이다. 그처럼 희생양 메커니즘은 사탄이 사탄을 내쫓는 역학구조로 설명된다. 사탄을 내쫓는 사탄의 왕이 바알세불이라면 희생양 만들기야말로 바알세불이 주도하는 일이다. 사탄의 왕은 무고한 자들의 피를 불러 인간 사회의 위기와 파멸을 틀어막음으로써 자신의 세력을 유지한다. 사탄은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실체가 아니라 오직 인간 사회에 기생하여 활동하기 때문에 사탄의 왕은 인간 사회의 파멸을 막아야 하는 것이다. 사탄이 인간 사회에 기생한다는 말은 사탄의 실체가 인간의 집단적 죄의 힘이라는 점을 기억하면 이해될 것이다. 여하튼 사탄이 사탄을 내쫓아 인간 사회가 유지되는 것은 사탄의 생존을 위한 필수 조건이다.
그러므로 사탄이 사탄을 내쫓는다는 말은 맞는 말이면서 틀린 말이기도 하다. 희생양 만들기는 스캔들과 분열을 조장하는 사탄을 내쫓지만, 그렇게 함으로써 결국 사탄은 버젓이 제자리에서 세상의 왕으로 군림한다. “사탄이 어찌 사탄을 내쫓을 수 있느냐.”라는 말이 “사탄이 사탄을 내쫓는 것이 아니다.”라는 말로 들리는 까닭도 거기에 있다. 실제로 그렇게 부정화법으로 해석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결론이고, 희생양 메커니즘의 과정에는 사탄이 사탄을 내쫓는 일이 포함되어 있다.
필자가 볼 때 마가복음 3장 27절은 희생양 메커니즘의 시각에서 보지 않으면 앞 구절과 잘 이어지지 않는다. 희생양 메커니즘을 통해 사탄의 나라는 공고하게 유지됨을 밝힌 후에 예수는 자신이 사탄의 나라를 종식시키는 자임을 드러낸다. “사람이 먼저 강한 자를 결박하지 않고는 그 강한 자의 집에 들어가 세간을 강탈하지 못하리니 결박한 후에야 그 집을 강탈하리라.”(막 3:27) 퇴마사들의 악령 추방은 사탄이 만드는 희생양 메커니즘을 종식시키지 못하고 오히려 사탄의 군림을 지속시킨다. 가장 강한 사탄이 바알세불이라면 퇴마사들의 악령 추방은 바알세불을 여전히 세상의 왕이요 강한 자로 군림하도록 도울 뿐이다. 그러나 예수는 강한 자 바알세불을 결박하고 그의 세간을 강탈한다. 이것은 예수가 희생양 메커니즘을 종식시키고 사탄의 세계를 끝내는 자임을 가리킨다. 그리하여 희생양을 잡지 않고도 평화를 이룰 수 있는 하나님 나라가 예수에게서 시작된다.
결국 예수의 악령 추방은 단순히 개인의 병을 고치는 문제가 아니라 이 땅에 하나님 나라가 시작되었음을 알리는 것이다. 바알세불의 이야기가 나오는 마가복음과 마태복음 본문을 잘 읽어보면 예수께서 귀신을 쫓는 일과 예수에게서 시작된 하나님 나라가 밀접히 연관되어 있다. 마가복음 3장의 바알세불에 관한 이야기와 동일한 이야기를 전하는 마태복음에서는 예수께서 이렇게 말한다. “내가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마 12:28) 마가복음에는 예수께서 귀신을 쫓아낸 것이 희생양 메커니즘을 주도하는 사탄의 힘이 아닌 성령 곧 하나님의 능력으로 한 일이라는 점을 전제로 이렇게 말한다. “누구든지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영원히 사하심을 얻지 못하고 영원한 죄가 되느니라.”(막 3:29) 예수의 귀신 쫓음을 사탄의 능력으로 말하는 예루살렘의 학자와 바리새인들에 대한 경고이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본문은 예수가 퇴마사가 아님을 암시한다. 사실 복음서에 따르면 예수의 병 고치는 능력이나 악령 추방 능력을 보고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들 때, 예수는 그들을 피해 다니는 경우가 많았다. 사람들이 예수의 행위를 희생양 메커니즘에 기반을 둔 자연종교의 사제들의 병 고침이나 악령 추방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의 기적은 희생양 메커니즘에 기반을 둔 사탄의 나라를 종식시키고 하나님 나라를 시작하기 위한 것이다. 병 고치고 악령을 추방하는 예수의 기적 행위를 사람들이 오해하자 예수는 자신이 보여줄 기적은 요나의 기적뿐이라고 말했다. 하나님의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이 희생양 메커니즘을 따라 일어나지만 오히려 희생양 메커니즘을 종식시키는 것이듯이, 그의 악령 추방 행위도 희생 제의에서 파생된 퇴마와 비슷하지만 사실은 경쟁적 모방욕망의 질고로부터 인간을 해방하는 하나님 나라의 예시이다. 예수께서 병을 고칠 때에 ‘너의 죄가 사함을 받았느니라’고 말한 것도 세상의 모방욕망이 일으키는 죄의 힘으로부터 해방을 선언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너희 아비는 마귀다(요 8:44)

요한복음 8장에는 예수가 간음한 여인을 사람들의 손에서 구한 사건이 나오고, 이어서 예수와 유대인들과의 대화가 나온다. 예수는 유대인들이 세상에 속하였고 자신은 세상에 속하지 않았다고 말한다.(8:23) 논쟁을 벌이는 유대인들과 예수는 아버지가 다르다. “나는 내 아버지에게서 본 것을 말하고 너희는 너희 아비에게서 들은 것을 행하느니라.”(8:38) 예수의 아버지는 하나님이고, 그와 논쟁하는 유대인들의 아버지는 마귀 곧 사탄이다.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대로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그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그가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라.”(요 8:44)
지라르는 이 본문이 반유대주의와는 관련이 없다고 본다. 예수는 유대인들과 논쟁하고 있지만 그의 말씀은 세상에 속한 인간의 일반적인 욕망과 삶의 방식을 가리킨다. 그리고 여기서 아버지는 모델을 가리킨다.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다.” 세상 사람들의 아버지는 마귀 곧 사탄이니 사람들은 사탄을 모델로 삼고 살아간다. 사탄과 마귀는 하나님에게 순종하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사는 세상과 세상 사람들 또는 군중의 모방욕망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세상 사람들이 마귀와 사탄을 모델로 삼는다는 것은 하나님을 모델로 삼지 않고 서로를 모델로 삼는 것을 가리킨다. 사탄을 모델로 삼은 세상 사람들은 사탄의 욕심을 행한다. “너희 아비의 욕심대로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사람은 세상과 군중을 따라 다른 사람이 가진 것을 갖고 싶어 하는 모방적 소유의 욕심과 남을 제압하려는 모방적 절대 폭력의 욕심을 지니고 있다.
그리하여 모방욕망 때문에 서로에게 스캔들이 되고 차이가 없어져 모두 똑같아지고 갈등이 커질 때, 사탄은 무고한 자를 살해하여 희생 제물로 삼음으로써 민심의 카타르시스를 통해 일시적으로 평화를 회복한다. “너희 아비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라는 말은 세상의 모방욕망이 희생양의 피를 요구하는 것을 가리킨다. 그러나 희생양의 피로 이룩한 평화는 무고한 자를 죄인으로 잡아 집단적 린치를 가해서 얻은 거짓 평화이다. “그가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라는 말은 그런 뜻이다. 창세부터 감추어진 것은 희생양 메커니즘이고, 희생양 메커니즘으로 이끄는 세상 사람들의 경쟁적 모방욕망 곧 사탄은 창세부터 감추어진 거짓의 아비이다. 오늘날에도 각종 방식으로 희생양을 만들어 평화를 유지하는 세상은 거짓의 아비를 따르고 있는 셈이다. 지라르는 지금도 인류의 웬만한 질서와 평화는 희생양 메커니즘에 의존하고 있다고 본다.
예수는 하나님을 모델로 삼아 하나님께 순종하고 하나님을 모방하여 ‘그에게서 들은 것을 세상에 말한다.’(8:26) 예수는 자기를 내세우지 않고 자기가 무엇을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내가 스스로 아무 것도 하지 아니하고 오직 아버지께서 가르치신 대로 이런 것을 말하는 줄도 알리라.”(8:28) 여기에 진리가 있다. 자기를 내세우지 않고 하나님에게 순종하느냐 아니면 자기숭배와 이웃숭배에 빠져 사탄에게 순종하느냐, 양자택일이 있을 뿐이다. 하나님에게 순종하는 자는 세상의 모방욕망으로부터 자유로워진다. 자유는 진리의 열매이다.
예수는 자기를 믿으라고 말한다. 지라르는 예수를 믿는 것은 예수를 모방하는 것이라고 본다. 예수를 모방한다는 것은 예수라는 위인의 영웅적 업적을 닮으라는 뜻이 아니다. 예수처럼 정신적 영웅이 되려고 하면 안 된다. 그 점에서 예수를 인간의 도덕적 자기완성의 원형으로 본 칸트의 이성종교는 기독교 신앙과 길이 다르다. 예수를 믿는 것은 참 인간됨의 자기완성을 꾀하는 일이 아니다. 지라르에 따르면, 예수가 자기를 믿으라는 말은 하나님을 모방하는 예수의 그 모방을 모방하라는 말이다. 거짓의 아비인 희생양 메커니즘에서 벗어나 참된 평화를 만드는 진리가 거기에 있고, 세상과 군중의 경쟁적 모방욕망을 모방하지 않음으로써 세상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길이 거기에 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자기를 믿은 유대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으로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요 8:31-32) 믿음과 진리와 자유. 예수를 믿지 않으면 세상의 종 곧 ‘죄의 종’(8:34)이 되어 자유가 없고 희생양 메커니즘에 의한 거짓 평화에 가담하며 죄 가운데에 죽는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기를 너희가 너희 죄 가운데에 죽으리라 하였노라 너희가 만일 내가 그인 줄 믿지 아니하면 너희 죄 가운데서 죽으리라.”(요 8:24)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사탄이 하늘로부터 번개 같이 땅에 떨어지는 것을 내가 보았노라.”(눅 10:18) 지라르의 해석에 따르면, 사탄은 하늘에서 떨어졌지만 땅에서 몸부림치며 위력을 발휘하고 있다. 사탄이 하늘에서 떨어졌다는 말은 사탄이 더 이상 초월적 실체인 신으로 숭배되지 않음을 의미한다. 희생양 메커니즘에 의존하는 자연종교의 다신 숭배와 우상 숭배는 끝났다. 기독교와 함께 일어난 일이다. 지라르는 사도신경에 사탄이 단 한 번도 언급되지 않음을 강조한다. 그러나 희생양 메커니즘은 여전히 이 땅에서 세상 질서의 주인 노릇을 하고 있다. 인간은 여전히 상호 폭력의 악순환에서 빠져 나오지 못하고 무고한 자들의 희생을 요구하고 있다. 지라르는 현대 문명이 모방욕망의 증가로 더 폭력적이 되고 있으며 그래서 더 큰 희생양의 피에 갈급해 있다고 본다.
그래서 사탄에 대해 언급하는 것은 여전히 중요하다. 사탄 때문에 인간은 스스로 자기를 구할 수 없으며 종교로 돌아와야 한다고 지라르는 말한다. 사탄은 초월적 실체가 아니지만 인간집단의 죄의 힘은 여전히 개인들을 조종하고 지배하고 있다. 만일 사탄을 존재론적 실체로 여긴다면 인간은 책임적 주체가 되지 못하고 악의 운명론에 빠질 것이다. 그것은 성서가 거부한 것이다. 그러나 사탄을 더 이상 거론하지 않는다면 인간은 자신의 힘으로 이길 수 없는 자신과 세상의 악의 힘을 간과할 것이다. 그리하여 인류는 인간 이성의 헛된 낙관론 속에서 실패의 길을 갈 것이다.
사탄에 관한 담론을 제거하는 것은 사탄이 원하는 일이다. 사탄이라는 이름으로 인간집단의 죄의 힘에 대한 경각심을 가져야 한다. 그래야 인간은 깨어 있을 수 있으며, 자기를 부인하고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드러난 하나님의 능력에 의지하게 될 것이다. 자기희생을 통해 사탄을 이긴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의지할 때, 인간은 비로소 경쟁적 모방욕망의 폭력에서 벗어나 참된 평화를 위한 책임적 주체의 길을 찾을 수 있다.

양명수|기독교윤리를 전공했다. 저서로 『아무도 내게 명령할 수 없다: 마르틴 루터의 정치사상과 근대』 등이 있다. 이화여대 기독교학과 명예교수이다. msyang@ewha.ac.kr

 
 
 

2021년 9월호(통권 75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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