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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me > 기독교사상 > 성서와설교 > [오리게네스와 함께 마태복음 읽기 09(마지막회)]
성서와설교 (2021년 9월호)

 

  논쟁 그리고 놀라움
  마태복음 22장 해설

본문

 

3세기 중반 오리게네스가 그리스어로 마태복음 전체를 주석한 저작은 본래 스물다섯 권으로 되어 있었다. 열일곱 권이 소실되고 우리에게 전해진 여덟 권은 13장 36절에서 시작해서 22장 33절 주석에서 끝난다.1 오리게네스와 함께 마태복음을 읽어온 우리의 걸음도 일단 여기에서 멈춰야 한다.
그렇지만 오리게네스의 기발한 주석적 발상은 마지막까지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는다. 22장 첫 단락(1-14절)은 그 형식이 비유라는 점, 그리고 그 주제가 유대 지도자들을 향한 경고라는 점에서 21장과 연결된다. 이어지는 두 개의 논쟁(15-22절, 23-33절)은 각각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에 의해 촉발되었다. 납세 논쟁은 정치적 성격, 부활 논쟁은 신학적 성격을 띠지만,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의 속성과 능력을 알지 못하고 믿지 못하는 불신앙이 문제의 핵심이다. 역사적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을 더 이상 대면하지 않았던 3세기 정황에서 오리게네스는 두 논쟁 기사에 감추어진 여러 가지 신비적, 영적 의미를 밝혀낸다.

마태복음 22장 1-14절: 혼인 잔치 비유

구조와 요점 마가복음에는 이 비유가 나오지 않으며, 누가복음에는 나오긴 하지만 맥락과 주제가 다르다. 누가는 예루살렘에서 예수와 유대 지도자들과의 대결 상황이 아니라 갈릴리에서 예루살렘으로 가는 여정 중에 이 비유가 주어진 것으로 서술한다.(눅 14:15-24)2 이미 초대받아 오겠다고 했던 사람들이 정작 잔치가 준비되자 오기를 거부했고, 그 자리를 채우기 위해 가난하고 병든 사람들, 그리고 마침내 ‘길과 성벽’으로부터 부름받은 사람들이 잔치를 즐겼다. 거부했던 유대인들의 불신앙이나 그들에게 내려질 심판보다 이방인에게 확장된 구원의 초청이 하나님의 뜻임을 설명하는 것이 누가복음의 관심이다. 반면 마태복음에서는 초대받은 이들이 더 모욕적이고 폭력적인 방식으로 주인이 보낸 종들을 거부한다. 이에 임금은 군대를 보내어 ‘그 살인한 자들을 진멸하고 그 동네를 불사른다.’ 이렇게 마태는 유대인들에게 임할 심판의 엄중함을 더 분명하게 드러냈다. 이것은 11장의 두 비유에서 이어지는 주제이다.3 그러고 나서 다시 종들을 보내 네거리 길에 있는 사람들을 불러 잔치에 데려오게 하는데 그중 예복을 입지 않은 한 사람이 발각되고 쫓겨나 벌을 받는다. 이 ‘예복’ 모티프는 누가복음의 병행 본문에도, 마태복음 11장의 두 비유에도 없는 이 비유만의 독특한 요소다.
2절에서 시작해서 13절에서 마무리되는 비유 이야기의 내적 구조는 대칭적이다.(2-7절과 8-13절) 첫 번째 소단락에서 왕이 종들을 보내자(2-3a절) 초대받은 사람들이 오기를 싫어하고(3b절), 다시 다른 종들을 보내자(4절) 초대받은 사람들이 다시 거부하고(5-6절), 이에 왕은 군사를 보내 응징한다(7절). 두 번째 소단락에서 왕이 종들을 네거리 길로 보내자(8-9절) 사람들이 가득 모여들었고(10절), 왕이 예복을 입지 않은 한 사람을 다그치자(11-12a절) 그는 침묵하고(12b절), 마지막으로 왕이 그를 끌어내도록 명령한다(13절). 14절은 비유에 붙은 주석으로, 예수를 거부하는 유대인들에 대한 경고도 되고, 구원의 초청을 받아들였으나 그 은혜에 합당한 삶을 살기에 실패한 제자들에 대한 경고도 될 수 있다.

오리게네스의 주석 오리게네스는 2절에 “천국은 마치 한 사람, 한 임금과 같다.”4에 사용된 ‘사람’(ἄνθρωπος)이라는 단어로부터 시작해서 이 비유 전체에 흐르는 영적 의미를(τὰ μυστικὰ πραγμάτα) 파악한다. 이 비유의 플롯은 구속 역사의 진행에 나타난 인간들의 반응과 하나님의 섭리로 이루어진다. 초대받고도 잔치 참석을 거부한 이들과 나중에 ‘네거리 길’에서 초대되어 잔치에 참석한 사람들, 그들이 누구이든지 간에 비유 속 ‘임금’은 명백히 성부 하나님, 아들은 성자 그리스도를 가리킨다. 그런데 임금이신 하나님을 또한 ‘사람’에 비유했다는 사실을 오리게네스는 예사롭지 않게 보았다. 현대적 용어로 ‘신인동형론’이라 부르는 이런 방식의 비유가 구약성서에 이미 사용된 바 있음을 오리게네스는 지적한다. 사람의 신체나 사람이 지니는 감정, 성품, 행위들에 빗대어 하나님을 묘사한 것이다. 구약의 하나님과 마찬가지로 복음서의 여러 비유에서도 하나님은 인간 혹은 인간적 존재로 그려진다. 신약의 하나님이 곧 구약의 하나님이시다.5 이 비유에서도 ‘임금이 노하여… 그 살인한 자들을 진멸했다.’(7절)와 같은 표현을 통해 하나님이 분노의 감정을 지니신 분으로 묘사된다. 하나님은 그런 방식으로 우리에게 자신을 보여주실 수밖에 없다. 인간의 눈높이에서 인간에게 말씀하시고 인간을 다루시기 때문이다. 종말에 우리가 온전한 구원을 누릴 때, 우리의 지적, 감정적, 인격적 한계를 극복할 때, 우리는 비로소 하나님을 ‘있는 그대로’ 보게 될 것이다.(요일 3:2)
신비적 의미는 이 비유의 다른 요소들에도 들어 있다. 혼인 잔치에 참석하는 세 부류의 사람들(신부와 그의 일행, 임금의 종들, 그리고 초대받은 하객들)은 각각 다른 위치와 능력을 지닌 영혼들을 상징한다. 하나님은 각 영혼의 상태에 따라 그 세 부류 중 하나에 속하게 하신다. 그렇다면 아들과 결혼하는 신부는 누구인가? 그는 로고스와 결합하여 교제하는 모든 영혼을 의미한다. 그 영혼은 로고스와의 영적 교제를 통해 선행이라는 영적 자녀를 출산할 것이다. 또 잔치에 준비된 ‘소와 살진 짐승, 그리고 모든 것’에도 영적 의미가 들어 있다. 그것들은 하나님이 공급해주시는 깊고 풍성한 영적 깨달음(ἡ πνευματικὴ θεωρία)이다.
대부분 주석가들처럼 오리게네스도 이 비유가 유대인들의 불신앙에 대한 심판의 경고라고 본다. 하나님의 구원의 초대를 전달했던 선지자들을 거부함으로써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진노를 불러 일으켰다. 그 진노의 결과는 유대 전쟁과 예루살렘의 멸망이었다. 이 구절은 기독교인들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있다. 잔치에 오기를 거부한 이들 중 ‘자기 밭으로’ 간 사람과 ‘자기 사업하러’ 간 사람은(6절) 하나님이 준비하신 ‘소와 살진 짐승, 그리고 모든 것’을 맛보지 못했다. 그렇게 그들은 하나님의 영적 은혜 없이 자신들의 지적, 영적 욕구를 추구했지만 별 유익을 얻지 못한다. 한편 “그 남은 자들”은 종들을 잡아 모욕하고 죽였다.(7절) 이것은 논증과 수사학적 기술로 무장한(ἐπὶ παρασκευήν ἐριστεκῶν καὶ σοφιστικῶν λόγων) 사람들, 즉 지식인들이다. 하나님의 말씀에 헌신하고 그분의 지혜로 권면하는 사역자들을 말과 논리로 굴복시키고 무너뜨리는 사람들이 바로 ‘그 남은 자들’이다.
임금은 다시 종들을 보낸다. 그들이 네거리 길에 나가 불러온 사람 중에는 ‘선한 자’들과 ‘악한 자’들이 섞여 있었다. 이 두 부류는 각각 누구를 가리키는가? 하나님 나라 잔치에 모든 사람이 초대받았음을 강조하기 위한 일종의 수사법(제유법)인가? 오리게네스는 이 두 형용사가 어떤 특정 대상들을 지칭한다고 보았다. ‘선한 자’들은 바울이 로마서 2장 14-15절에 묘사한 대로 자연계시를 통해 하나님께 이끌린 사람들이다. 그 외 부름받은 대부분은 ‘악한 자’들이었다. 일단 부름받아 잔치에 참석한 이상 그들은 이전의 악함 속에 머물러 있으면 안 되었다. 이전 의복을 벗고 하나님 나라의 잔치에 걸맞은 예복으로 갈아입어야 한다. 오리게네스에 따르면 예복을 입는다는 것은 긍휼, 친절, 겸손, 온유, 인내와 같은 미덕의 내면화를 뜻한다.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으라’(롬 13:14)는 바울의 권면이 이 구절을 이해하는 열쇠가 되는 것이다.
오리게네스는 이 비유의 결론-‘부름받은 사람은 많지만 뽑힌 사람은 적다’(15절)-을 자기 시대의 현실 교회에 적용한다. 그의 시대에도 교회에 많은 사람이 모여 들었다. 하지만 그들 모두가 끝까지 구원의 잔치에 참여하지는 못할 것이다. 그 많은 교인 중 ‘정신의 갱신’을 통해 변화되어 신앙에 합당한 생활을 하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반대로 ‘이 세대’를 본받으면서 대충(ῥᾳθυμότερον) 생활하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오리게네스는 후자가 더 많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제자들이 들어가야 할 문은 ‘좁은 문’이며, 더 많은 사람들이 넓고 큰 문으로 들어가려고 할 것이기 때문이다.(눅 13:24, 마 7:13-14)

마태복음 22장 15-22절: 세금을 두고 바리새인들과 논쟁하다

구조와 요점 이 단락의 구조를 보면, 이른바 ‘세금 논쟁’ 자체는 17-21절에 해당하고, 15-16절은 상황 설정을, 그리고 마지막 22절이 논쟁의 결과를 묘사하는 문장으로서 앞뒤를 감싸고 있다. 바리새인들이 던진 질문은 로마 황제에게 바치는 세금이 옳은지, 그른지를 묻는 단순한 질문이었다.(17절) 하지만 어떻게 대답하든 정치적 부담을 안을 수밖에 없다. 질문자의 의도를 대번에 간파하신 예수는 대답에 앞서 질문자들을 ‘외식하는 자들’이라고 꾸짖는다.(18절) 이어 제시되는 대답의 방식은 일종의 소크라테스적 대화법이다. 세금을 낼 때 사용하는 화폐를 가져오라고 하셨고(19a절), 그에 응답해서 바리새인들이 데나리온을 가져왔다(19b절). 예수는 그 동전에 새겨진 화상과 글이 누구의 것이냐고 물었고(20a절), 바리새인들은 황제의 것이라고 대답한다(20b절). 그 답변에 근거해서 예수는 ‘황제의 것을 황제에게, 하나님의 것을 하나님에게 바치라.’는 원리를 제시한다.(21절) 바리새인들은 예수의 질문에 응답하는 과정을 통해 자기들이 원래 던졌던 질문에 대한 답을 찾게 된 것이다.
21절은 종종 정교분리 원칙의 근거로 사용된다. 하지만 이는 주석적으로 명확하지 않다. 21절에 제시된 원리를 실천하려면 먼저 무엇이 황제의 것이고 무엇이 하나님의 것인지가 정립되어야 한다. 내러티브 정황 안에서 보면, 데나리우스 동전이 황제의 것인 만큼 납세 제도는 황제의 통치 영역으로 인정되어야 한다. 하지만 하나님에게 드릴 ‘하나님의 것’은 무엇인가? 테르툴리아누스(3세기 초) 이래로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받은 인간 존재 전체가 하나님의 것이라는 해석이 두루 받아들여졌다.6 더 나아가 인간이 만들어낸 물건뿐 아니라 제도까지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이 되어야 한다면, 납세는 물론 정치, 경제, 사회의 어떤 영역이라도 하나님의 주권이 미치지 않는 곳이 없다. 그렇게 보면 21절은 정교분리가 아닌 영역주권론, 즉 모든 영역에 하나님의 주권이 작동하게 해야 한다는 주장의 근거가 될 수 있다.

오리게네스의 주석 오리게네스는 논쟁의 배경이 되는 15-16절에 대해 먼저 주석한다. 바리새인들은 예수를 말의 올무에 빠뜨리려고 했다. 그래서 그들의 제자들뿐 아니라 헤롯 당원들을 동원했다. 헤롯 당원들은 로마가 세운 꼭두각시 피후견왕 헤롯 왕조의 지지자로서 당연히 로마에 세금 내는 것을 지지했을 것이다. 바리새인들은 로마에 납세하는 것을 반대했다.7 이렇게 납세 지지자들과 반대자들을 함께 보내서 예수가 어느 쪽으로 대답하더라도 그 대답을 반박할 수 있게 한 것이다. 예수는 이러한 상황을 충분히 파악했고, 이 질문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표명하지 않는다. 최종 대답이라고 볼 수 있는 21절,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는 무슨 뜻인가? 그 문자적 의미를 파악하는 것은 의미가 없고 불가능하다면 영적 해석으로 나아가야 한다.
오리게네스에 따르면 우리 인간은 영혼과 육체로 되어 있다. 한편으로는 육체의 통치자(ὁ ἄρχων τῶν σομάτων)에게 세금을 바쳐야 한다. 그것은 육체적 생존을 위해 필요한 음식을 섭취하고 옷을 입고 휴식을 취하는 것과 같다. 다른 한편으로는 하나님의 형상을 담지하고 있는 영혼은 그 통치자이신 하나님께 세금을 바쳐야 한다. 영혼의 본질과 본성에 맞는 생활, 즉 덕을 실천함으로써 그렇게 할 수 있다. 어떤 사람들이 주장하듯, 가이사에 대한 납세 거부를 영적으로 해석하면 금식, 철야, 금욕 등 육체의 필요를 채워주지 않는 행위들이다. 또 다른 영적 해석도 가능하다. 가이사는 이 세대의 지배자, 이 시대의 시대정신이며 하나님은 모든 세대의 지배자이시다. 예수께서는 자신에게 시비를 걸어오는 이들에게 세금 바치는 데 쓰이는 동전을 가져오게 하고 거기 새겨진 내용을 관찰하게 한 후 하나님의 것을 하나님께 바치라고 가르치셨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이 세대의 시대정신을 자세히 살펴 파악하고 충분히 섭렵한 후 그 악한 것에서 벗어나야 한다. 먼저 가이사의 것을 가이사에게 넘겨주지 않으면 하나님의 것을 하나님께 바칠 수 없기 때문이다.

마태복음 22장 23-33절: 부활을 두고 사두개인들과 논쟁하다

구조와 요점 바리새인들과 마찬가지로 사두개인들도 예수를 ‘선생님’이라고 불렀지만, 그들의 의도는 배움이 아니라 예수의 잘못된 견해를 바로잡아 가르치려는 데 있었다. 바리새인들과 달리 그들은 부활을 믿지 않았고, 모세오경만을 성서로 받들었다. 예수께 던진 질문을 통해 그들은 신명기 25장 5절 이하 취수혼(娶嫂婚) 규정을 근거로 부활의 부당성을 제기하려고 했다. 일곱 형제가 차례로 한 여자와 결혼하게 되는 상황은 가상의 상황이지만 이 논쟁의 촉발점으로서 유효하다.8 만약 그들이 부활한다면 형제의 아내를 취하게 될 것이므로 율법을 정면으로 위반하게 된다. 모세 율법을 충실히 지키고자 한다면 부활은 있을 수 없고, 있어서도 안 된다. 이처럼 사두개인들은 일종의 딜레마를 상정하고 귀류법(歸謬法)적 논증을 통해 부활의 불가능성을 주장했다.(23-28절)
이에 대해 예수께서는 세 가지 논점으로 응대하신다. 첫째, 사두개인들은 총체적 무지에 빠져 있다. 부활이라는 특정 주제에 대해 잘 모르는 정도가 아니라 성서 전반과 하나님의 능력을 깨닫지 못하는 근본적인 무지가 가장 큰 문제이다.(29절) 두 번째 논점은 부활 후 존재 방식에 관한 것이다. 부활한 인간은 천사와 같은 삶을 영위할 것이다. 지상에서와 같은 부부의 결합은 천상의 삶에서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모세율법에 대한 취수혼의 여파와 아무 상관이 없으며 사두개인들의 논리는 근거를 잃게 된다.(30절) 셋째,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라 살아 있는 자의 하나님”이라는 신학적 진술(31-32절)의 근거로 출애굽기 3장 6절을 인용한다. 부활의 사실에 관한 한 예수의 입장은 명확하다. 구체적으로 언제, 어떤 방식으로 부활해서 어떤 존재로 살아갈 것인지, 그리고 죽음과 부활 사이 중간 시기의 존재 방식이 어떠할 것인지 등에 관해서는 여러 가지 주석적 논의의 여지가 있다.

오리게네스의 주석 오리게네스는 먼저 사두개인들이 표방하는 두 가지 입장을 확인한다. 그들은 모세오경 외 구약성서의 다른 부분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또 부활과 영혼불멸, 사후 세계를 믿지 않았다. 그리고 전자는 후자의 근거가 되었다. 모세오경이 부활을 명시적으로 가르치지 않기 때문에 부활은 사두개인들에게 ‘비성서적’ 교리인 것이다. 하지만 오리게네스의 독자들인 3세기 기독교인들에게 부활 신앙의 근거가 모세오경에 있는지 없는지는 별로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오리게네스는 고린도전서 15장 등 바울의 여러 글을 통해서 부활 신앙의 정당성과 중요성을 명확하게 논증할 수 있었다.
이어지는 예수의 말씀(29-32절)에 담겨 있는 세 가지 요점을 오리게네스는 세심하게 주석한다. 먼저 30절을 해설하는데, 거기에 사두개인들의 질문에 대한 직접적인 응답이 나오기 때문이다. 사두개인들이 전제했던 부활 후 결혼관계, 즉 육체적 결합과 출산을 전제로 한 남녀의 배타적 관계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부부관계에서 파생되는 부자관계나 형제관계도 없어질 것이다. 심지어 혈연을 바탕으로 한 관계에 대한 기억조차 소멸할 것이다. “너희는 이전 일을 기억하지 말며 옛날 일을 생각하지 말라. 보라 내가 새 일을 행하리라.”(사 43:18-19)라는 말씀이 그런 상황에 대한 예언이다. 부활 세상에서 가족관계는 출산과 혈연에 의해서가 아닌 다른 방식으로 정의될 것이다.
그렇다면 30절에 주어진 이 대답이 “너희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한다.”라는 29절의 전제와 어떻게 연결되는가? 오리게네스가 부활 후 존재 방식에 대해 해설한 내용은 모세오경은 물론 구약성서 어디에도 나오지 않는다. 그러한 내용을 모른다고 해서 사두개인들을 성서에 대해 무지하다고 비판할 수는 없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29절에서 마태가 예수께서 하지 않은 말씀을 기록했다고 판단하거나, 심지어 예수께서 잘못된 말씀을 하셨다고 생각한다. 다른 사람들은 천사들, 천국, 종말에 관한 다양한 내용이 나오는 외경을 염두에 두고 예수께서 29절을 말씀하셨다고 이해한다. 하지만 오리게네스가 보기에 이런 관점들은 모두 말씀을 문자적으로만 해석하려는 데서 발생한 오류이다. 구약성서는 물론 복음서와 사도들의 말씀까지 전체를 관통하는 방식으로 알레고리적 해석을 사용함으로써 문자적 해석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 곧 산 자의 하나님이라는 말씀(32절)에 대해 오리게네스는 세 가지 독특한 주석을 붙인다. 첫째, 출애굽기 3장 6절을 말씀하시던 장면에서 하나님은 모세에게 자신의 이름을 소개하셨다. 그것은 야훼, 즉 ‘나는 존재하는 자다.’(ἐγώ εἰμι ὁ ὤν)였다. 그 이름을 지니신 분이 죽은 자의 하나님일 수는 없다. 아브라함, 이삭, 야곱은 죽어 있지 않고 지금도 살아 있다. 둘째, ‘아브라함, 이삭,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하지 않고, 세 개의 문장으로 각자의 하나님이 되심을 서술했다는 점도 중요하다. 그 세 족장은 개별적으로 하나님이 주시는 특별한 영예를 부여받았다. 그 영예의 연장선상에서, 그리스도의 하나님이 또한 그리스도의 아버지이듯이(고후 1:3, 요 20:17),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하나님이시면서 아버지가 되신다. 셋째, 누가는 이 구절의 병행구에서 “모든 사람이 그분과 함께 살고 있다.”(20:38)라는 말씀을 덧붙였다.9 족장들은 그냥 산 것이 아니다. 다른 존재와 함께 산 것도 아니고, 하나님과 함께 살았다. 우리도 이 말씀을 외우고 내면화해야 한다. 다른 누군가가 아니라 하나님과 함께 살아야 한다.

[연재를 마치며] 교부들과 함께 성서를 읽는다는 것, 그들의 성서해석을 이해하려고 시도하는 것은 몇 가지 면에서 우리에게 유익을 준다. 먼저 교부들의 해석은 많은 점에서 우리의 해석과 일치하기 때문에 우리의 성서해석에 확신을 준다. 하지만 거기에는 다소 불편한 진실도 숨어 있다. 그들이 특정한 주석적 결론에 도달하게 된 과정, 그리고 그 결론으로부터 유추한 특정한 교리들 중에는 우리가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들이 종종 있다. 신실한 신앙의 눈으로 성서를 읽었던 그들에게도 인간 이성의 한계, 그들 시대의 모순, 언어와 문화의 간섭이 성서해석에 고스란히 반영되어 있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에게 반면교사가 된다. 우리도 그들처럼 시대의 한계와 편견 안에 갇혀 억지로 만들어낸 성서해석을 영구불변의 진리인 양 붙들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보게 하는 측면에서 그렇다.
교부들의 성서해석이 우리에게 주는 또 다른 유익은 신선한 영감이다. 그들의 주석 곳곳에는 우리가 미처 생각하지 못한 통찰이 번득인다. 특히 오리게네스처럼 그리스어를 모국어로 사용했던 교부들은 성서 본문의 미세한 뉘앙스까지도 감지하고 거기에서 심오한 묵상으로 나아갈 수 있었다. 성서와 시간적, 공간적으로 가까이 있었다는 점에서 교부들의 성서해석이 지니는 독특한 매력이 있다.
그동안 아홉 번에 걸쳐 “오리게네스와 함께 마태복음 읽기”를 연재할 수 있어서 감사했다. 아직 번역되지 않은 고대 저작을 소개할 수 있어서 좋았고, ‘알레고리주의자’로만 치부되는 주석가이자 설교자, 목회자 오리게네스의 진면목을 조금이나마 보여줄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앞으로 교부들과 대화할 수 있는 자리가 더 많아지기를 기대한다.


* 조재천 교수님의 “오리게네스와 함께 마태복음 읽기” 연재를 마무리합니다. 그동안 좋은 글 보내주신 교수님께 감사드립니다.-편집부

주(註)
1 오리게네스의 마태복음 주석은 6세기에 라틴어로 번역되었고, 그중 16장 13절에서 27장까지 내용이 전해진다. 1장 1절에서 13장 35절까지는 다른 교부들의 글에 인용되었거나 단편으로 발견된 것들의 일부가 남아 있다.
2 도마복음 64장의 비유에는 초대받은 이들이 잔치 참석을 거부한 이유가 좀 더 상세하게 서술되어 있는데, 네 부류 중 셋이 상업적 활동과 관련되어 있고, 비유의 결론 역시 “장사꾼들과 상인들은 내 아버지 집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라는 경구로 되어 있다.
3 ‘다시 비유로 말씀하셨다’(1절)라는 표현 역시 이 단락이 21장의 두 비유(두 아들의 비유와 포도원 농부들의 비유)와 주제적으로 이어지고 있음을 시사한다.
4 그리스어 원문 2a절에는 두 여격 명사가 연이어 나온다.() 현대 역본 대부분은 앞에 놓인 ‘사람’을 따로 번역하지 않고 ‘어떤 임금’(a king) 속에 포함했지만, 오리게네스는 그 둘을 동격 명사로 보고 별도의 주석을 전개한다.
5 여기에서 오리게네스는 마르키온과 같은 이단적 주장을 염두에 두고 있다.
6 테르툴리아누스, 『마르키온 반박』 4.38. Quae similia sunt denario Caesaris; imago scilicet et similitudo eius. Hominem igitur reddi iubet creatori, in cuius imagine et similitudine et nomine et materia expressus est.
7 오리게네스는 1세기 초 팔레스타인의 반(反)로마 정서와 그 정서가 산발적으로 표출된 몇 가지 사건을 언급한다. 그는 주로 요세푸스의 기록에 의존했지만, 사도행전 5장 37절에 언급된 ‘갈릴리인 유다’의 반란도 하나의 사례로 제시하는데, 모두 유대인의 자유를 위한 투쟁이었고 납세 거부가 그 일환이었다고 설명한다. ‘열심당’이라는 이름으로 조직된 집단은 유대 전쟁 발발 후에 등장하기 때문에 복음서 내러티브의 정황상 바리새인들이 반로마 정서를 공유했다고 본 오리게네스의 관찰은 전혀 근거가 없는 것은 아니다.
8 토비트 3장 8절에 귀신이 남편들을 번번이 죽이는 바람에 일곱 번이나 결혼하게 된 여인 사라의 상황이 서술되어 있다.
9 그리스어 원문 ‘πάντες γὰρ αὐτῷ ζῶσι’를 개역개정에서는 “하나님에게는 모든 사람이 살았느니라”라고 옮겼지만, 오리게네스의 취지에 근접하게 번역한 역본은 새번역(“모든 사람은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살고 있다.”) 혹은 공동번역(“하느님 앞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살아 있는 것이다.”)이다.


조재천|예일대학교와 노트르담대학교에서 신약학을 공부하였다. 저서로 『그리스도인을 위한 통독 주석 시리즈-히브리서』가 있다. 현재 전주대학교 조교수로 재직 중이다.

 
 
 

2021년 9월호(통권 75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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