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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me > 기독교사상 > 성서와설교 > [신약의 성령론 설교 01]
성서와설교 (2021년 8월호)

 

  성령 충만, 바르게 설교하고 있나
  

본문

 

교회에서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용어 중 성서의 용법과는 전혀 다르게 사용하는 경우가 많이 있다. 일례로 한국교회에서 직분이 없는 신자를 흔히 ‘성도’라고 부르는데, 성서에서 이 단어는 하나님의 백성 무리 전체를 지칭하는 용어이다.(롬 1:7, 고전 1:2) 이러한 오용 중에서도 특히 성령론에 관계된 것들이 많다. 이에 필자는 앞으로 몇 차례에 걸쳐 교회에서 흔히 잘못 사용하는 성령론에 관한 용어들을 살펴보고, 그것들을 어떻게 바르게 사용할지를 제안하고자 한다.
두 종류의 사람을 가정해보자. 한 사람은 신앙이 성품화되어 모든 사람과 좋은 관계를 맺고 사람들의 칭찬을 받으며 교회 사역을 잘 감당하는 사람이고, 다른 한 사람은 마음의 상처를 받아 사람들과 좋은 관계를 맺기가 어려웠는데 갑자기 부흥회에서 성령을 받아 방언을 말하고 담대히 전도하는 사람이다. 이 두 사람 중 누가 진정으로 성령 충만한 사람일까? 첫 번째 사람일까, 두 번째 사람일까? 둘 다 아닐까? 아니면 둘 다일까?
이 질문에 답하기에 앞서 우리는 ‘성령 충만’이라는 말이 신학 용어나 교회 용어이기 전에 먼저 성서 용어라는 사실을 인지해야 한다. 이 어구는 신학 용어나 교회 용어로 자주 사용되지만, 근본적으로 신약성서에 15번 나오는 성서 용어이다. 그래서 위 질문에 대해 각자의 신학적 입장에 따라 나름대로 정의한 성령 충만이라는 개념을 가지고 답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그러한 답은 이미 입장이 정해진 답이기 때문이다. 올바른 답은 성서의 용례에 부합해야 한다. 따라서 위 질문에 올바로 대답하기 위한 우리의 첫 번째 과제는 성령 충만이라는 어구의 성서 용례를 살펴보는 것이다.
우선 성구 사전에서 성령 충만이라는 어구를 찾아보면 우리는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사실에 놀랄 것이다. 첫째, 15번의 용례 중 한 번을 제외하면(엡 5:18), 이 어구는 모두 누가 문헌(누가복음과 사도행전)에만 나온다. 이 말은 교파를 불문하고 널리 사용되기에 신약성서에서도 광범위하게 나타나는 용어일 것이라고 흔히 생각하지만,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이것은 성령 체험을 표현하는 누가의 특수 어구이다. 둘째, 신약성서에서 성령 충만은 단 한 번도 ‘성령’이라는 명사와 ‘충만’이라는 명사의 결합으로 나오지 않고, 모든 경우 ‘성령으로 충만하게 되다’라는 수동태 동사로, 혹은 ‘성령으로 충만한’이라는 형용사 형태로만 나온다. 이러한 사실은 누가가 이 어구를 어떤 개념을 설명하기 위해 만든 것이 아니라, 성령 체험의 상태를 표현하기 위해 고안한 용어라는 점을 알려준다.
다음으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충만하게 하다’ 혹은 ‘충만한’이라는 단어는 기본적으로 물질에 관계해서 쓰는 용어이지, 인격에 대해서 쓰이는 경우는 파생된 용례라는 사실이다. ‘충만한’이라는 단어의 가장 일반적인 쓰임새는 다음과 같다. “컵에 물이 충만해(가득 차) 있다.” “물고기가 배에 충만해(가득 차) 있다.” 이러한 기본적인 용례에서 발전해서 이 단어는 사람의 감정을 표현하는 것으로 확대된다. 예를 들어 이런 것들이다. “그는 기쁨이 충만하다.” 혹은 “그는 분노로 충만해 있다.” 이러한 용례의 연장선에서 성령 체험을 은유적으로 표현하여 ‘성령으로 충만하다’는 표현이 사용된 것이다.
그런데 우리말로는 모두 ‘성령 충만’이라고 번역되었지만, 그 원어를 찾아보면 모두가 같은 단어가 아니라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넓게 보면 여기에 사용된 단어는 그 어근에 따라 두 부류로 나눌 수 있다. 첫째, ‘핌플레미’(πίμπλημι)라는 동사이다. 둘째, ‘플레레스’(πλήρης)라는 형용사와 같은 어근의 ‘플레로우’(πληρόω)라는 동사이다. 표준 어학 사전을 찾아보면 이 두 단어의 일반 용례는 크게 다르지 않다. 두 단어 모두 기본적으로 비워진 것에 무엇이 채워진 물리적 상태나 감정적 상태를 나타낸다. 여기에서 출발하여 여러 은유적인 쓰임새로 발전한다. 일반 용례만 보면 위 두 어군의 의미 차이는 별로 없는 것이기에, 누가 문헌에 사용된 “성령으로 충만하게 되다”라는 어구는 하나의 상태 혹은 체험을 표현하는 말이라고 쉽게 결론내릴 수 있다.
그런데 누가 문헌에 등장하는 14번의 용례를 자세히 고찰해보면 누가가 위 용어를 미묘하게 다르게 사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대략적으로 보아 인격의 열매와 관계된 경우에는 ‘플레레스/플레로우’ 어군을 사용하고 있고, 성령의 능력을 체험하는 것에는 ‘핌플레미’를 사용하고 있다. 그렇다면 누가는 두 어군의 단어를 자기 나름의 신학으로 재정의하여 구별하여 사용하고 있다고 추정할 수 있다. 비록 일반 용례에서 그 단어의 기본 의미는 크게 다르지 않지만, 누가 자신이 각각의 경우를 구별하여 사용할 수 있는 것이다.
필자는 대학생 시절 예수원의 대천덕 신부가 쓴 글을 읽었다. 신약성서에는 두 가지 성령 충만이 나오는데, 서두에서 말한 첫 번째 사람의 성령 충만은 인품에 대한 것이고, 두 번째 사람의 충만은 능력에 대한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후에 신약학자가 된 필자는 예수원 창립 50주년을 기념하는 세미나에 연사로 초청되어 대천덕의 성령론을 발제하면서 신약학자로서 그의 주장이 학문적으로 입증할 수 있는 것인지를 살펴볼 기회가 있었다. 또 2016년 연세대학교에서 개최된 성서학회 국제 모임(SBL International Meeting)에서 이 주제로 논문을 발표했고, 이어서 이 논문을 「신약연구」에 투고하여 게재하였다.
필자가 관련된 구절을 주석하고 누가의 신학을 분석하여 내린 결론은 대천덕 신부가 언급한 대로, 누가는 두 가지의 성령 충만을 말하고 있고 각각을 구별된 단어로 표현했다는 것이다. 첫째, ‘핌플레미’로 표현된 성령 충만에서 누가가 표현하고자 했던 것은 순간적인 성령 체험이다. 이 단어로 표현된 모든 경우에서 성령 체험은 그 사람에게 순간적으로, 갑자기 이루어진다. 세례 요한(눅 1:15), 엘리사벳(눅 1:41), 사가랴(눅 1:67), 예루살렘의 120명의 제자들(행 2:4), 베드로(행 4:8), 예루살렘 교인들(행 4:31), 바울(행 9:17, 13:9)은 각각 순간적으로 자신의 몸에 성령이 임하는 것을 경험한다.
그렇다면 이들이 성령으로 충만하게 되었을 때 나타나는 현상과 그 체험이 주어진 목적은 무엇인가? 우선 이들에게 나타나는 현상은 영감 받은 예언적 언사를 말하는 것(눅 1:16, 42, 68, 행 2:4), 담대하게 증언하는 것(행 4:9, 32), 치유(행 9:18), 선포(행 13:10-11)였다. 그 목적은 모두 하나님이 주신 사명 감당이었다. 즉 ‘핌플레미’ 동사에 의해서 표현된 성령 충만은 갑자기 임한 성령을 체험하는 것이며, 이를 체험하면 하나님의 말씀으로 마음이 갑자기 가득 채워져 그것이 담대하게 선포되는 것이다.
둘째, ‘플레레스/플레로우’ 어군에 의해서 표현된 성령 충만은 성령이 한 사람 안에 내주하여 성령의 열매가 충만히 나타남을 의미한다. ‘핌플레미’가 순간적인 체험을 표현한 것인 반면, 이 어군은 지속되는 성품을 표현하는 것이다. 이것은 어떤 사람이 예수를 믿으면 성령이 그 안에 내주하고 그것이 성품화되어 성령의 성품이 인격화된 열매로 나타나는 것이다. 누가가 이러한 의미에서 성령 충만한 인물로 가장 먼저 등장시키는 이는 예수이다.(눅 4:1) 예수는 세례 요한이나 엘리사벳 혹은 사가랴와는 달리 순간적으로 어떤 성령 체험을 한 인물이 아니라 성령이 지속적으로 그를 인도한다는 의미에서 성령 충만한 인물이었다. 사도행전에 이러한 성령 충만한 인물로 제시된 개인은 예루살렘의 일곱 일꾼(행 6:3, 5)과 스데반(행 7:55)과 바나바(행 11:24)이다. 성령의 성품은 신자에게 인격적으로 맺히는 열매이기에, 이러한 성령 충만은 흔히 성령의 열매인 기쁨(행 13:52), 믿음(행 6:5), 착함(행 11:24)과 같이 언급된다.
그렇다면 성령 충만은 무엇과 관계되는가? 그것은 기독교인의 성품과 관련된다. 여기서 누가가 의미하는 성령 충만은 성품이 속으로만 형성된 것을 말하는 게 아니다. 성품의 열매가 충만하여 밖에서도 그 사람의 성령의 열매에 의한 성품을 충분히 인지하고 누구나 인정할 수 있는 것이다. 예루살렘 교회에서 일꾼을 뽑을 때, 또 바나바가 안디옥 교회에 사역자로 파송받을 때 교회는 그들의 성령 충만한 인품을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었던 것이다.
정리하면, 누가는 두 가지 성령 충만을 구별하여 말하고 있는데, 하나는 순간적으로 체험하여 하나님이 주신 과업 성취를 위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성령이 그 안에 거하여 성령의 성품이 인격화된 열매를 맺게 하는 것이다. 누가가 이를 구별한 것은 두 가지 각각이 의미가 있으며, 두 가지 모두 기독교인의 삶에서 중요함을 말하려고 한 것이다. 그는 성령으로 인해 기독교인이 하나님의 성품을 닮되, 충만히 닮는 것을 목도했고 또 친히 체험했을 것이다. 또한 그는 성령이 어떤 사람에게 순간적으로 임해 그 사람이 변화되어 예수를 담대히 증언하는 것을 보았을 것이다. 문학가인 누가는 각각의 체험을 성령으로 가득 차게 된 것으로 표현하되, 그 단어를 달리하여 구별하려 했던 것이다. 이상을 도표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참고를 위해 엡 5:18도 포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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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누가가 성령 충만을 두 가지로 구별한 성서적 근거는 무엇이었을까? 우선, ‘핌플레미’를 사용하여 말한 성령 충만의 구약성서적 근거는 베드로의 입을 통해서 분명히 제시되었다.(행 2:16-18) 그것은 요엘서 2장 28-32절에서 말한 예언의 성취다. 구약성서에서는 이미 말세에 모든 하나님의 백성이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성령을 받을 것이라 예언되어 있었고, 그것을 오순절 날에 제자들이 모두 체험한 것이다. 누가는 이것을 성령으로 충만하게 된 체험으로 표현하고 있다.(행 2:4) 누가가 강조한 것은 이 부분이다.
다음으로 ‘플레레스/플레로우’로 표현된 성령 충만의 구약성서적 근거는 무엇인가? 누가는 이에 대해 직접적으로 언급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성령이 사람의 마음을 변화시키는 영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 이것의 구약성서적 근거로 흔히 언급되는 구절은 예레미야 31장 31-34절과 에스겔 36장 26-27절, 37장 14절이다. 누가는 말세에 성령이 하나님의 백성에게 주어져 그 마음을 변화시켜 하나님의 성품으로 충만한 사람이 된 것을 위 어군을 사용해 성령 충만한 것으로 묘사한 것이다. 누가가 이 부분을 ‘핌플레미’로 표현된 성령 충만에 비해서 강조한 것은 아니다. 성령에 의한 성품의 변화에서 성령의 역할이 중요함을 말한 이는 바울이다.(엡 5:18, 갈 5:22-23) 하지만 누가도 이것을 중요하게 언급하고 있다.
이상을 통해서 볼 때 성령 충만이라는 용어를 성령 체험에 은유적으로 사용한 누가의 눈으로 보면, 서두에서 던진 질문에 이제 대답할 수 있을 것이다. 한마디로 말해, 서두에서 말한 두 사람 모두 누가 문헌에서 성령 충만의 용례와 부합한다.
첫 번째 사람이 성령 충만한 것을 표현한 것이라는 성서 근거 구절은 사도행전 6장 3절이다. 예루살렘 교회에 구제 배분의 문제가 생겼을 때 이것을 담당할 지도자를 뽑게 되었는데 그 자격 조건으로 제시된 것이 성령 충만이었다. 그런데 그 성령 충만한 상태가 바로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받는 사람”(행 6:3)이다. 이것을 다시 설명하자면 “믿음(신실함)과 성령이 충만한 사람”(행 6:5)이다. 그래서 서두에서 말한 첫 번째 사람은 이런 의미에서 성령 충만한 사람이다.
누가는 두 번째 사람도 성령 충만한 사람으로 포함시킨다. 오순절 날 제자들이 한곳에 모였을 때 모인 곳과 사람들에게 갑자기 성령이 임했는데, 그때 “그들이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언어[방언]들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행 2:4) 베드로는 갑자기 성령이 충만하여 담대히 증언하였고(행 4:8), 예루살렘 교인들은 기도하다가 모두 “성령이 충만하여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다.(행 4:31) 그래서 서두에서 말한 두 번째 사람도 성령으로 충만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사실을 설교 강단에서 어떻게 적용하고 활용할 것인가? 첫째, 신약성서는 두 가지 성령 충만을 말하고 있다는 것을 인지하고 그 바탕 위에서 성령 충만에 대해서 설교해야 한다. 이러한 사실은 이미 국내외 여러 신학자들이 지지하는 것이다. 대천덕은 누가가 다른 용어를 사용한 것을 근거로 이것을 ‘성령 충분’과 ‘성령 충만’으로 번역하자고 제안했다. 박형용은 두 가지 용례를 ‘생활을 위한 충만’과 ‘봉사를 위한 충만’으로, 나용화는 ‘상태적 성령 충만’과 ‘역동적 성령 충만’으로, 김판호는 ‘내적 충만’과 ‘외적 충만’으로 구별하자고 했다. 필자는 ‘성품적(지속적) 성령 충만’과 ‘체험적(순간적) 성령 충만’으로 구별하자고 제안한다.
둘째, 성령 충만을 말할 때 두 가지를 구별하여 말하면서, 동시에 두 가지를 균형 있게 강조해야 한다. 초대 교회 때와 같이 지금도 여전히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는 오순절에 제자들이 경험한 성령 충만 체험이 필요하다. 그 체험은 예수가 요단강에서 체험한 것(눅 3:21-22)을 제자들이 오순절에 체험한 것이다.(행 2:1-4) 사도행전은 초대 교회의 특수한 역사를 기록한 것이 아니라 후대 기독교인이 추구해야 할 삶의 모델 혹은 범례로 기록한 것이다. 이러한 체험이 지금도 계속되어야 함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또한 성령을 받아들여 신앙인이 된 사람은 그 성령의 열매가 풍성해져 성품화되는 일 또한 힘 있게 선포해야 한다. 신앙인과 비신앙인이 구별되는 것은 바로 이 성령의 열매이며, 성숙한 기독교인의 지표는 그 열매의 풍성함이다.
셋째, 성령 충만의 개념이 각각 다를 뿐만 아니라 체험하는 방법도 다르다는 것을 인식하고, 그것에 맞게 두 가지 성령 충만을 별도로 추구해야 한다. 서두에 언급한 두 사람의 경우를 적용하면, 누가가 제시한 온전히 충만한 사람이 되려면 첫 번째 사람에게는 순간적 체험의 성령 충만이, 두 번째 사람에게는 지속적 성품적 성령 충만이 더해져야 한다. 한 가지 성령 충만을 체험했다고 다른 것 또한 자동적으로 주어지는 것은 아니다. 그 성격이 다른 것으로 각각을 별도로 추구해야 하는 것이다.
인격적, 지속적 성령 충만을 체험하는 것은 사람의 노력에 달려 있지 않다. 신앙인이라면 자동적으로 성령이 그 사람 속에 거하여 열매를 맺기 시작하기 때문이다. 다만,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자신 안에 있는 육체의 소욕을 제거하고, 성령의 인도를 받아 하나님의 성품으로 채워지면서 성령의 완전한 인도를 받도록 자신을 비우는 작업이 필요하다.(갈 5:16-26) 이에 비해 순간적 성령 체험은 오순절 성령 강림 이전에는 하나님의 주권으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하나님의 사람들에게 주어진 반면(눅 1:41, 67), 오순절 성령 강림과 그 이후 시대에는 성령 체험을 위한 신자들의 기도(행 1:14, 8:13)와 사역자들의 안수(행 8:17, 19:6) 등 체험하고자 하는 자들 편에서의 적극성인 열성에 의해서 주어졌음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주(註)
1 김동수, “누가가 말하는 성령 충만: 한 가지인가? 두 가지인가?”, 「신약연구」 15(2016): 678-701.


김동수 | 한국신약학회 회장을 역임했다. 『방언과 예언』 등 신약학에서 본 성령론에 관한 다수의 저서와 논문이 있다. 평택대학교 신학과 신약학 교수로 재직 중이다.

 
 
 

2021년 8월호(통권 75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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