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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me > 기독교사상 > 성서와설교 > [르네 지라르의 성서 읽기 07]
성서와설교 (2021년 8월호)

 

  복음서, 하나님의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
  

본문

 

복음서는 예수의 죽음을 정점으로 삼고 골고다의 십자가를 향해 모든 사건을 전개하고 있다. 지라르는 복음서의 구조가 이방 신화들의 희생양 메커니즘과 닮아 있음을 지적한다. 즉 사회의 위기 상황에서 공공의 적이 된 한 인물이 희생양이 되어 살해된다. 예수가 부활하여 신격화되는 것도 희생된 제물이 신으로 섬김을 받는 고대 신화와 유사하다. 근대 이성으로 무장한 19세기와 20세기의 신화 연구가들은 십자가에 달려 희생되고 부활한 예수를 신으로 믿는 기독교를 다른 고대 민족들의 종교와 다를 바 없는 신화적 종교로 여겼다.
신화 연구가들의 주장은 다른 말로 하면 기독교 신앙 역시 미신에 불과하다는 뜻이다. 초대 교회의 문헌에서 교부들은 기독교는 미신이 아니라고 그토록 주장했지만, 과학으로 무장한 합리적 이성의 시대에 기독교 신앙은 미신으로 보일 뿐이다. 그러나 지라르는 그리스도의 성육신, 십자가와 부활은 인류학적 관점으로만 이해할 수 있으며, 철학이나 신화학, 실용적 지식으로는 기독교 신앙을 이해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예수의 수난사, 전형적인 희생양 메커니즘

지라르의 말대로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은 고대 이방 신화 속 신들의 생성 과정과 유사하다. 계몽주의 이후, 종교적 독단에서 벗어나 합리적 이성으로 과학기술의 풍요와 민주주의를 이룬 현대인들이 기독교 신앙을 미신으로 여기는 것은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그 점에서 필자는 사도 바울의 설교를 들은 아테네 철학자들의 눈에 비친 기독교 역시 미신으로 보였을 것이라는 점을 먼저 언급하고자 한다.
서양 문명의 한 축으로 일컬어지는 그리스 문화는 2,500년 전에 종교를 윤리로 바꾸는 노력을 진행했다. 진리를 인간의 내면에서 찾으려는 그리스인들의 노력은 미토스(mythos)에서 로고스(logos)로, 곧 신화로부터 이성적이고 논리적인 철학으로 넘어가면서 새로운 시대를 열었다. 청소년들에게 뮤지카(musika), 곧 시가(詩歌) 형식의 호머 신화를 가르치지 못하게 한 인물이 플라톤이다. 제물을 바치고 신에게 복을 빌면 소원이 이루어진다고 믿는 종교를 플라톤은 못마땅하게 여겼고, 신화에 등장하는 신들의 폭력성이 청소년 교육에 해롭다고 여겼다. 그는 신이 있다면 정의롭고 선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다시 말해서 플라톤은 신의 도덕성을 신성의 핵심으로 내세우며 종교를 윤리로 바꾸려고 한 인물이다. 그것은 종교로부터 이성으로 넘어가고 신의 시대로부터 인간의 시대로 넘어가는 인문주의의 출현을 의미했다. 플라톤보다 수백 년 후에 아테네를 찾아가 십자가와 부활의 그리스도를 구원의 신으로 전한 사도 바울의 전도가 그리스 철학자들의 눈에는 이미 극복된 신화와 종교의 세계를 부활시키는 것으로 보였을 것이다.
지라르는 엄격한 유일신을 믿었던 유대교 역시 기독교 신앙을 이방 종교의 재현으로 보았음을 지적한다. 지라르에 따르면 이스라엘의 유일신은 희생 제물로 바쳐진 희생양의 신격화가 사라지면서 탄생했다. 다시 말해서 이스라엘 주변 민족의 다신교는 공동체를 위해 바쳐진 희생양을 신으로 숭배하면서 형성된 것이다. 하나의 민족 내에도 재앙을 막는 기능에 따라 신이 여럿이었고, 그 신들은 마을과 지역을 수호하는 지방 신에 불과하며 인류 전체를 구원하는 보편 신이 될 수 없었다. 필자가 볼 때에는 근동지방을 통일하고 대제국을 건설한 바빌로니아의 신 마르둑(Marduk) 역시 자기 영토를 확장한 지방 신에 불과하다. 오히려 강대국에 눌려 포로 생활을 하던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압제자인 바빌로니아를 포함한 인류 전체를 구원할 보편적 유일신의 통치를 꿈꾸며 하나님의 계시를 받았다. 대제국의 신은 지방 신에 불과한데, 오히려 노예들의 신이 보편적 신이었던 것이다.
보편적 유일신을 믿는 구약성서에는 희생양이 공동체를 살린 신으로 바뀌어 숭배되는 일이 없다. 그 점에서 성서의 하나님과 우상이 구분된다는 점은 앞에서 말한 바 있다. 지라르는 요셉이 신격화되지 않은 사실도 중요하게 본다. 요셉은 공동체의 희생양으로 추방되었다가 나중에 공동체의 구원자로 바뀌지만 신으로 숭배되지 않는다. 그런 대목에서도 이스라엘의 종교가 주변의 자연종교와 다른 점을 볼 수 있다고 지라르는 주장한다. 구약성서의 하나님은 희생을 통해 탄생한 신과 무관하며, 오히려 희생양 메커니즘을 거부하고 무고한 자를 희생시키는 군중의 행태에 죄의식을 부여한다. 지난 호에서 말한 대로 그 점은 예언자들의 계시의 말씀에서 가장 분명하게 드러난다. 그리하여 구약성서의 하나님은 초월적인 유일신으로서 이스라엘뿐 아니라 인류 전체를 위해 새로운 평화의 길을 제시한다.
기독교를 바라보는 유대교의 시각에 관한 지라르의 주장을 신학적으로 보충해보자. 유대교의 눈으로 보면 특히 기독교의 삼위일체론은 다신교이자 우상숭배인 이방 종교의 모습으로 보였을 것이다. 기독교의 삼위일체는 하늘에 계신 성부 하나님을 절대 초월자로 믿으면서, 동시에 이 땅에 오셔서 희생양이 되어 십자가에서 죽으신 분을 하나님의 아들이요 하나님과 동일본질의 신으로 믿는다. 성부와 성자가 같은 하나님이라고 함으로써 기독교는 고대의 지역 신들과 자연종교를 벗어나 구약의 유일신론을 이어갔지만,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 성령 하나님을 각각 별개의 위격으로 말함으로써 엄격한 의미의 유일신을 벗어났다. 자칫 신이 셋으로 보일 수도 있고, 특히 문제는 십자가의 예수를 신으로 믿었다는 데에 있었을 것이다.
신학적으로 말하면 성부와 성자와 성령은 서로 다른 주체이지만 같은 실체이다. 주체와 실체의 구분은 원래 아리스토텔레스가 그의 『형이상학』에서 다룬 개념이지만, 기독교 신학을 통해 변형되어 매우 역동적인 종교적 차원을 열면서 새로운 사회적 상상력을 제공했다. 서양 철학에서 주체 개념의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것이 기독교의 삼위일체 개념이다. 중세의 아퀴나스 신학은 주체보다 실체를 강조했지만, 그는 『신학대전』에서 성자가 성부에게 낯선 주체라고 말할 정도로 이미 기독교는 주체 개념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삼위일체는 서로 다른 주체가 상호관계 속에서 하나의 통일된 공동체를 형성함을 의미하며, 개체의 다양성을 존중하면서도 공동체를 형성할 수 있는 주체 철학의 근거를 제시한다. 더 나아가 나와 남이 다르면서도 뜻으로 하나가 되는 사랑의 공동체를 바라볼 수 있는 개념이 삼위일체이다. 헤겔은 『정신현상학』의 서론에서 개인이 낯선 타자를 겪은 이후에 다시 자기로 돌아와 자기됨을 잃지 않을 때 주체가 될 수 있음을 강조했다. 그것은 기독교의 삼위일체 개념 중에서 실체보다 주체를 강조하는 근대 철학의 특징을 보여준다. 물론 헤겔의 철학은 타자의 타자성을 주체의 자기 동일성으로 흡수하는 동일성의 철학이라는 비판을 받을 수 있다. 레비나스는 참된 주체(subject)는 타자에게 예속될 때에(subjected) 발생한다고 말함으로써 근대의 주체철학을 비판했지만, 여하튼 주체와 타자의 관계에 관한 치밀한 사유 전개는 이미 기독교의 신론인 삼위일체론 안에서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관계에 대한 설명을 통해 이루어지고 있었다.
삼위일체론을 통해 발전한 주체와 타자에 대한 사유는 개인의 주체성과 민주주의 및 공동체주의 등과 관련하여 서구의 중세와 근대 및 현대 사회를 만들어오고 있다. 오늘날 전 세계는 개인과 사회의 관계에서 개인의 존엄성과 자율성을 강조하면서도 협력적 공동체를 이루기 바라며 민주주의를 보편 가치로 인식하는 데에 일치한다. 더 나아가 내가 나로서의 정체성을 분명하게 하면서도 남과 하나가 되는 사랑의 공동체를 하나님 나라의 이름으로 희망하기도 한다. 그것은 유대인들이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보고 절대 유일신을 믿는 이슬람이 평가절하한 삼위일체론에서 시작된 기독교 문화의 영향이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치밀하게 삼위일체의 논리를 전개하고 고백한 기독교를 바라볼 때에, 유대교로서는 희생된 예수를 그리스도로 신격화하는 점에서 기독교 신앙이 구약의 정신과 반대되는 이방 신화로 보였을 것이다. 지라르가 말하는 대로 정통파 유대인 지식인들의 눈에는 기독교가 마치 구약의 노력을 수포로 돌리는 종교로 보였을 수도 있다. 어쩌면 유대인 중의 유대인으로 사울의 이름을 가진 사도 바울이 회심하기 전에 기독교를 박해한 것은 구약성서의 연장에서 당연한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만큼 복음서에 나오는 예수의 수난은 전형적인 희생양 메커니즘의 모습을 보이고 있다. 예수의 죽음의 주역에는 군중과 정치인과 종교인이 모두 동원된다. 지라르에 따르면 바리새파는 자신의 조상들이 죽인 예언자들의 묘비를 세워주고 있었다. 마치 자기들은 예언자를 안 죽일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바리새파는 누구보다도 예수를 죽음으로 몰아가는 데 앞장선다. 예수는 바리새파와 율법학자들의 미움을 받고, 제사장 그룹에서 가야바는 공동체를 살리기 위해 예수 한 사람의 희생이 옳다는 결정을 내린다. 사형 언도의 권한을 가진 빌라도는 군중의 압력에 의해 결국 예수를 십자가의 처형대에 올린다. 그것은 군중의 폭력적 감정이 법 이성을 이기는 희생양 메커니즘의 전형을 보여준다. 평소에 법은 군중을 억제하지만 법과 정치는 때때로 군중에게 압도되어 무고한 자를 희생양으로 만드는 일에 협력한다. 법 이성은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존재하는데, 폭력적 모방욕망의 증가로 사회의 결속력이 해체될 위기에 처할 때에 법과 정치는 희생양을 잡아 다시 결속을 다지고 질서를 유지한다.
사회의 지도층인 빌라도, 헤롯, 바리새파, 제사장들은 서로 간에 모두 긴장 관계에 있었다. 로마에서 파견된 총독 빌라도와 현지의 통치자인 헤롯 사이의 정치적 긴장이 있었고, 자부심 강한 신흥 중산층인 바리새파와 전통적 제사장 그룹 사이의 긴장이 있었고, 이두메 출신의 헤롯 대왕 및 그의 아들들과 정통 유대인들 사이의 긴장이 있었다. 그리고 위에서 열거한 모든 지도층과 민중들 사이에도 일촉즉발의 긴장관계 속에서 정치적 폭동과 종교적 혼란이 끊이지 않았다. 그러나 지라르가 말하는 대로 복음서는 예수를 죽이는 데에 있어서만은 그들이 모방폭력으로 모두 하나가 되어 단결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말하자면 모든 스캔들이 예수에게 집중된 것이다. 지라르는 심지어 예수의 수제자 베드로도 결국 군중 속의 하나로 동화되었다고 주장한다. 한 사람을 희생시켜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심이 일시적으로 정화되고 기존의 질서는 유지된다.
필자가 볼 때, 법의 궁극적 목적은 정의가 아니라 질서와 평화이다. 그러므로 세 번이나 예수를 죽일 이유를 찾을 수 없다고 주장하며 주저하던 빌라도(막 23:14, 15, 22)가 군중의 말을 따라 예수를 처형대에 넘긴 것은 법과 정치의 본래적 속성에 속하는 일이다. 빌라도의 임무는 팍스 로마나(pax romana)를 지키는 일이었다. 법이 내세우는 정의는 질서유지를 위한 수단인데, 때때로 목적을 위해 수단은 얼마든지 무시되거나 왜곡될 수 있다. 무질서를 막기 위해 누군가의 희생이 필요하면 법과 정치는 무고한 자를 희생양으로 만드는 군중의 요구에 언제든 동조할 준비가 되어 있다. 그런 일은 현대에도 일어나는데, 순진하지 않은 현대인들은 각종 법리를 동원해서 희생양 만들기를 정당화한다는 점에서 사태 수습의 방식이 옛날과 다를 뿐이다. 세 번째 연재글에서 보았듯이 인류가 공동체를 이루기 위한 기초는 가인이 아벨을 죽인 집단살해에 있으며, 국가와 정치와 법의 근본적 속성은 오늘날에도 변하지 않았다. 지라르 역시 정치는 늘 윤리적 한계를 안고 있다고 본다. 그래서 기독교 신학에서는 하나님 나라와 세상 나라를 구분했고, 중세에는 교회의 권력으로 정치권력을 견제하려고 했던 것이다.

예수, 희생양 메커니즘을 붕괴시키기 위한 하나님의 어린양

지라르는 예수 수난의 이야기에 시편이 자주 인용되고 있음을 주목한다. 예를 들어 요한복음 15장 25절에는 시편 35편 19절이 나온다. “그들은 아무 이유도 없이 나를 미워합니다.” 또한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시 22:1, 막 15:34)라는 구절이나 “건축자의 버린 돌이 머릿돌이 되었다”(시 118:22, 마 21:42)라는 구절도 모두 시편의 말씀이다. 지라르는 복음서에 인용된 이러한 시편 구절들이 집단살해를 통한 희생양 만들기의 시각에서만 이해될 수 있는 말씀이라고 본다. 한편 누가복음 22장 37절에 보면 최후의 만찬 이후에 예수께서는 고난받는 종에 관한 이사야 53장을 인용한다.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그는 죄인의 하나로 여김을 받았다’ 한 말이 내게 이루어져야 하리니 내게 관한 일이 이루어져 감이라.” 시편과 이사야서의 구절은 모두 집단에 의해 죄인으로 취급되고 살해되는 희생양의 목소리를 전한다.
한편 표적을 구하는 바리새파에게 병 고치는 예수의 기적을 보고 따라 다니는 군중을 향해 예수께서 말씀하신다.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선지자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느니라.”(마 12:39) 요나는 바다의 폭풍우를 잠재우기 위해 희생양이 된 선지자이다. 그가 물고기 밥이 됨으로써 바람은 잠잠해지고 배에 탔던 인간들의 갈등에도 평화가 찾아왔다. 요나의 이야기에는 모방적 폭력으로 해체의 위기에 있는 사회를 구원하기 위해 희생되는 선지자의 모습이 들어 있다.
이처럼 복음서 기자들이 인용하는 구약성서의 말씀은 희생양의 목소리를 대변하는데, 그 초점은 예수에게 맞추어져 있다. 예수는 공동체의 희생양이고, 복음서에서 하나님의 어린양으로 불린다. 그 점에서 복음서 기자들이 기록한 예수의 수난 이야기가 이방 신화의 희생양 메커니즘과 매우 유사하게 보이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복음서에 희생양 메커니즘의 구조가 그대로 드러나는 것은 희생양 메커니즘을 붕괴시키기 위해서임을 지라르는 강조한다. 집단 폭력으로 질서를 유지하고 평화를 만드는 희생양 메커니즘이 밝혀지려면 그 구조를 그대로 따라가면서 그 속에 들어 있는 폭력성을 드러내야 한다. 일단 희생양 메커니즘이 밝혀지면 희생양에 대한 박해의 힘은 그 동력을 상실한다. 인간 공동체는 부끄러움을 느끼며 새로운 평화의 길을 찾아야 한다. 물론 예수의 십자가 이후에도 여전히 인류는 희생양 만들기를 지속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희생양을 만드는 인류의 죄가 노출되면서 지극히 작은 자 하나도 함부로 희생시킬 수 없도록 하는 인권의식이 제도화된 것을 지라르는 성서와 기독교의 영향으로 본다. 지라르는 과거 희생양이 되기 십상이었던 장애인들이 현대 사회에서 비장애인과 동등하게 취급받는 것을 인간 사회의 큰 변화로 본다.
지라르는 성서 이전에는 희생양을 통해 평화를 만드는 신화의 세계와 자연종교의 세계만 있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다가 구약에서 신화는 비신화화되며 희생양 메커니즘이 밝혀지고, 신약에서 모든 자연종교는 완전히 붕괴된다. 그러므로 신화 연구가들이 겉으로 드러난 구조만 보고 예수 수난의 이야기를 고대 신화와 똑같은 것으로 이해한 것은 오류이다. 예수의 수난사는 무고한 자에 대한 박해의 원동력을 해체하여 고대 신화의 세계와는 전혀 다른 세계관을 인류의 정신사에 끌어들였다.
앞에서 본 대로 복음서는 예수의 수난사에 시편과 예언서를 인용하여 예수의 수난이 이방 신화의 희생양 메커니즘과 비슷한 모습을 보이게 하고 있다. 그러나 복음서에서 인용한 시편들은 박해자의 목소리를 대변하지 않고 희생양의 목소리를 대변하며, 따라서 집단적 린치의 대상이 된 희생양이 무고한 자임을 밝힌다. 고난받는 종에 관한 이사야서의 인용도 희생되는 하나님의 종이 우리의 죄를 대신 짊어진 것임을 밝히는 구절이다. 요나의 표적도 결국 죄 없이 희생양이 된 요나가 이방 나라의 수도인 니느웨까지도 구원할 하나님의 종임을 말하는 것이다. 예수가 인용한 ‘건축자의 버린 돌이 머릿돌이 되었다.’는 시편 구절도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버린 예수가 하나님 나라의 머릿돌이 될 것이라는 의미이다. 이것은 모두 박해를 정당화하는 고대 신화와 비슷한 희생양 메커니즘을 끌고 들어와서 그것을 해체하는 작업들이다. 복음서는 예수의 수난에 구약의 구절을 인용하면서 구약을 끝까지 밀고 나가 완성한다.
관습으로 내려오던 희생양 메커니즘을 해체하기 위해 복음서는 군중과 세상의 무지한 폭력을 고발한다. 마태복음 21장 33절 이하에는 포도원 주인이 보낸 종들을 소작인들이 죽이고 끝내 주인의 아들까지도 살해하는 이야기가 나온다. 이것은 구약에서 하나님의 종인 예언자들을 박해한 군중이 마침내 하나님의 아들을 살해하여 희생양으로 삼음을 보여준다. 지라르는 복음서의 구절을 따서 『창세부터 감추어진 것』이라는 책을 썼는데, 창세부터 감추어진 것은 군중의 집단살해 행위가 사회 형성의 기원이라는 사실이다. 모방욕망으로 인한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이 한 사람에 대한 만인의 폭력으로 바뀌면서 사회가 유지된다는 사실, 그것이 창세부터 감추어진 비밀이다. 구약성서는 그것을 고난받는 예언자들의 이야기를 통해 드러냈다. 그리고 복음서는 예언자들의 피가 하나님의 어린양 예수의 피에서 완성됨을 분명히 밝힌다. 예수께서 말한다. “이는 선지자를 통하여 말씀하신 바 내가 입을 열어 비유로 말하고 창세부터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리라 함을 이루려 하심이라.”(마 13:35) 다시 말하지만 여기서 창세란 사회 형성의 기원, 즉 질서를 만드는 방식을 가리킨다. 지라르는 누가복음에서 예수가 예언자들이 흘린 피를 상기시키며 무시무시한 묵시적 형태로 인류의 역사를 공격한다고 주장한다. “창세 이후로 흘린 모든 선지자의 피를 이 세대가 담당하되 곧 아벨의 피로부터 제단과 성전 사이에서 죽임을 당한 사가랴의 피까지 하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과연 이 세대가 담당하리라.”(눅 11:50-51)
유다의 예언자 스가랴는 위기의 시대에 사회의 희생양으로 살해당했다. 그는 군중의 지지를 받은 요아스 왕의 지시에 의해 죽임을 당하여 쓰러지며 하나님께 호소했다. 백성들의 불안과 동요를 잠재우기 위해 정치적 희생양이 된 스가랴가 호소할 수 있는 대상은 오직 하나님뿐이었다. “여호와는 감찰하시고 신원하여 주옵소서.”(대하 24:22) 필자가 볼 때에 예수는 희생양이 된 예언자의 피의 호소를 들으신 하나님과 일치하는 그의 아들의 자격으로 스가랴의 피를 언급한다. 그렇게 예수는 무고한 자의 피를 봐야 평화를 찾는 세상을 꾸짖고 세상의 죄가 세상을 파멸로 이끌 수도 있음을 경고한다.
스가랴의 피를 들어 인간의 죄와 파멸의 가능성을 언급하는 예수의 경고는 땅속에서 외치는 아벨의 피의 호소를 듣고 가인을 꾸짖은 하나님의 경고와 일맥상통한다. 아벨은 이스라엘의 선지자나 예언자가 아니라 모든 인류의 조상이다. 그러나 죽은 아벨의 피의 호소는 희생양 메커니즘에 대한 성서의 첫 고발이다. 그러므로 복음서 기자는 아벨의 희생과 호소를 선지자 전통의 시작으로 삼을 수 있었을 것이다. 앞에서 보았듯이 구약의 예언자들은 인간 사회에서 무의식적으로 자연스럽게 벌어지는 희생양 메커니즘을 고발하고 새로운 죄의식을 불러일으킨 자들이기 때문이다.
창세기 4장에서 하나님은 아벨의 호소를 듣고 반응하셨다. 필자가 볼 때에 누가복음은 아벨의 피와 스가랴의 피를 연이어 말함으로써 스가랴의 피를 지적한 예수의 말씀과 행위가 아벨의 호소를 들은 하나님의 뜻과 연장선에서 이루어지는 일임을 확인시키는 것 같다. 그런 식으로 복음서는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을 일치시킨다. “창세 이후로 흘린 모든 선지자의 피를 이 세대가 감당한다.”는 말을 통해 복음서 기자는 이제 하나님의 어린양이 인류 역사 전체의 폭력을 모두 끌어안아 희생될 것을 암시한다. 그것은 반복되는 인류의 죄에 대처하는 하나님의 방식이고, 그 죄로 말미암은 인류 사회의 재앙에 대처하는 하나님의 사랑 방식이다. 때가 이르렀고, 희생양의 피로 질서를 만들고 전쟁을 통해 종의 멸망을 피하는 인류의 자연선택에 대해 이제 하나님의 종이 아닌 하나님의 아들이 나선다. 하나님의 아들은 하나님과 일치하는 분으로 결국 하나님 자신이 나서신 것이다. 예수 자체를 하나님의 계시로 보는 전통 신학은 하나님의 성육신을 희생된 자들의 부르짖음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으로 본 것이 아닐까?.
이제 인류의 역사는 새로운 단계로 접어든다. 하나님의 어린양의 희생으로 희생양 메커니즘은 붕괴되고 하나님의 나라는 시작되었다. 하나님의 어린양은 인간이 가축으로 길러 제물로 바치는 인간의 어린양이 아니다. 사실 지라르는 인간이 가축을 기른 것은 본래 식량을 조달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희생 제물로 바치기 위해서 시작된 일이라고 본다. 동물을 희생시킬 때에 사람을 희생 제물로 바치는 효과를 내기 위해 오랫동안 사람 곁에 두었다가 사람 대신에 희생 제물로 삼았다. 그러므로 희생된 가축은 인간의 분신이다. 사람의 피를 봐야 피비린내 나는 더 큰 싸움을 막을 수 있기 때문에 가능하면 인간의 분신이 되도록 야생 짐승을 오랫동안 인간 곁에 두었다가 제물로 바친 것이다. 마찬가지로 복음서 기자들이 예수를 하나님의 어린양으로 불렀을 때에는 인간의 분신인 인간의 어린양과 대조해서 예수를 하나님의 분신으로 본 것이 아닐까. 필자는 삼위일체 논쟁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과 동일본질로 볼 때에 이런 문제의식들이 암암리에 포함되었으리라고 본다.
희생양 메커니즘에 순응하면서 동시에 그 폭력성과 인간의 죄를 드러낸 예수의 십자가는 인간의 죄의 힘에 의한 하나님 자신의 희생이면서 인간세상의 죄의 힘에 대한 하나님 자신의 승리이다. 필자가 볼 때에 십자가는 하나님 자신이 세상 죄를 지고 희생양이 되었으니 이제 너희끼리는 희생양을 만들지 말라는 당부를 인간 세상에 던지고 있다. 그리고 그 당부를 받아들이도록 부름받은 이들에게 십자가는 희생양을 만들지 않고도 평화를 이룩하는 능력을 가져다준다. 예수의 피는 모방욕망을 부추겨 폭력의 악순환을 일으키는 사탄을 이기는 힘이고, 모든 무고한 자의 피를 막는 지혜이다. 이것은 모든 인류를 위한 것이지만, 특히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지금 여기서 현실로 일어나는 일이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말했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전 1:18)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오직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고전 1:23-24)
많은 신약학자들은 바울이 예수를 왜곡했다고 본다. 그러나 희생양 메커니즘의 시각에서 지라르는 사도 바울의 서신이 복음서의 핵심을 잘 드러내는 것으로 본다. 필자가 볼 때에 복음서의 예수의 말씀과 사도 바울의 신앙 고백은 짝을 이루며 성서의 의미를 잘 드러낸다. 복음서에서 희생양 메커니즘이 창세부터 감추어진 것으로 얘기되듯이 사도 바울 역시 십자가의 도가 감추어진 것으로 말한다. 삽자가의 도는 하나님의 지혜로서 “만세 전부터 우리(부르심 받은 자)를 위해 하나님이 정해 놓으신 것”(고전 2:7)이다. 그리하여 창세부터 감추어진 집단살해의 희생양 메커니즘과 만세 전부터 예비된 십자가의 도가 대비된다. 전자는 창세부터 뱀의 유혹에 넘어간 인간세상에서 왕 노릇하는 사탄의 지배하에 일어나는 일인데, 만세 전부터 정해진 십자가의 도에 의해 사탄은 그 정체가 밝혀지고 그 폭력의 동력을 잃었다.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사탄이 하늘로부터 번개 같이 떨어지는 것을 내가 보았노라 내가 너희에게 뱀과 전갈을 밟고 원수의 모든 능력을 제어할 권능을 주었으니 너희를 해칠 자가 결코 없으리라.”(눅 10:18-19) 공중에서 개인들을 지배하며 시기심과 증오심, 폭력의 악순환을 일으키는 사탄의 권세는 이미 결정적 타격을 받았고, 십자가와 함께 하나님의 나라가 시작되었다. 인류가 십자가의 비밀을 완전히 받아들이지 않고 있기 때문에 사탄의 권세가 아직도 세상의 왕이라는 이름으로 위세를 떨치고 있기는 하지만 말이다.

성육신과 십자가에 대한 인류학적 이해

지라르는 인간의 모방욕망으로 인해 벌어지는 희생양 메커니즘을 고발하는 구약성서에서 하나님의 계시를 보았다. 그는 희생양 메커니즘을 반대하는 구약성서의 말씀은 인간을 약육강식의 폭력적 자연선택에서 벗어나게 만드는 초월자 하나님의 계시라고 믿는다. 하나님은 희생양 메커니즘이라고 하는 문화적 자연선택을 통해 인류라는 종의 보존을 허락했지만, 무고한 자의 희생을 막고 참된 평화를 이룩하도록 자연선택이 큰 죄임을 성서를 통해 계시했다. 그것은 자연사를 초월한 것이요, 인간의 철학적 이성으로 간파될 수도 없는 초월적 하나님의 계시이다. 지라르가 믿는 구원의 하나님은 종의 멸망을 피하기 위한 인류의 선택 과정을 추적하여 인류학적인 관점으로 본 하나님이다. 인류학적 관점에서 볼 때에 인류 구원의 길은 폭력적 모방욕망을 막고 희생양 메커니즘을 붕괴시키는 일에 있기 때문이다. 물론 모방 폭력뿐 아니라, 고대인들에게는 인간의 나고 죽는 것도 위기이고, 계절의 변화도 위기이고, 자연재앙도 위기이다. 이러한 위기에는 모두 희생제의가 따랐다. 그러나 가장 본질적인 위기는 모방욕망에 의한 시기와 증오심, 그리고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이라는 상호폭력의 위기이다.
성육신에 대한 이해도 마찬가지이다. 성육신하여 십자가를 진 하나님의 아들에 관한 이야기는 인류학적 관점으로만 그 의미를 이해할 수 있다고 지라르는 주장한다. 예수의 수난사는 인류가 희생양 메커니즘을 통해 얼마나 무고한 자들의 피를 흘리고 있는지를 보여주고 인류의 죄를 고발한다. 필자가 볼 때에 지라르의 인류학적 시각은 십자가를 하나님의 사랑의 행위로 보는 신학적 견해와 결합될 수 있다. 우선 앞에서 말했듯이, 성육신한 하나님의 아들의 수난사는 무고한 아벨의 피를 흘린 가인을 꾸짖은 하나님 자신의 문제의식의 반영으로 볼 수 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의 문제의식이 인간의 죄와 고통을 하나님 자신이 스스로 겪고 당하는 십자가의 행위로 나타난다. 십자가가 하나님의 사랑의 행위인 까닭은, 희생양 만들기를 통해 무의식적으로 폭력을 행사하는 인류의 죄를 깨우치되 그 죄의 짐을 하나님 스스로 지고 인류를 끌어안은 것이 십자가이기 때문이다. 신약성서의 예수의 십자가는 구약의 하나님과 연속성을 지닌다. 가인의 죄를 나무랐지만 가인의 나라를 쓸어버리지 않고 끌어안고 간 하나님은 결국 십자가를 통해 인류에게 참 평화의 구원의 길을 제시한 것이다.
지라르가 볼 때 십자가는 새로운 모델을 제시한다. 이웃의 소유를 탐내지 말라고 법으로 금하는 것보다 선한 모델을 제시하는 것이 나쁜 모방욕망을 막는 효과적인 길이다. 십자가는 한편으로 희생양 만들기의 폭력성을 드러내 밝혀 인류의 죄를 고발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이웃을 모델로 삼지 않고 하나님을 모델로 삼아 폭력적 모방욕망에 빠지지 않고 악을 악으로 갚지 않는 좋은 모델을 제시한다. 십자가 앞에서 그리스도인은 자기 숭배와 이웃 숭배가 결합된 모방욕망으로 말미암은 폭력의 악순환을 빠져나와 화해와 참된 평화의 선순환을 일으키는 하나님의 능력 앞에 선다.
그래서 지라르의 인류학적 시각의 연장에서도 우리는 하나님의 어린양 예수의 수난은 인류를 구원하기 위한 하나님 자신의 행위라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희생된 자가 신으로 둔갑하여 높임을 받는 자연종교적 사건이 아니며, 희생양 메커니즘을 통해 인류의 죄를 드러낸 후에 인간의 죄를 이기고 새로운 역사를 시작하는 그리스도의 자기 계시이다. 지라르에 따르면 만일 예수의 부활이 자연종교적 우상의 탄생을 의미한다면 공동체 전체가 그를 신으로 믿어야 한다. 집단살해로 희생된 희생양의 신격화는 공동체 전체에 의해 이루어지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의 부활은 소수의 증언자들을 통해서만 전해졌다. 사도 바울이 ‘부르심을 받은 자들’이라고 부른 바로 그 사람들이다. 부활한 예수에 대한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은 예수가 하나님과 동일본질, 곧 하나님 자신이라는 삼위일체의 신앙고백을 낳았다. 희생양으로 죽은 자를 신으로 믿게 된 것이다. 앞에서 보았듯이 그 문제는 유대인들과 철학자들의 비판을 살 수밖에 없었다. 기독교 역사를 보면 초대 교회 내부에서도 예수를 신으로 믿는 일에는 반대자가 많았다. 아리우스파는 교회 내에서 매우 강력한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다. 4세기 후반에 아우구스티누스가 밀라노에 있을 때에도 황제의 부인은 아리우스파의 지지자였다.
여기서 필자는 예수의 수난을 하나님 자신의 수난으로 볼 것인지에 대한 논쟁이 기독교 역사에서 오래 지속되었다는 점을 지적하고 글을 마치고자 한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를 진짜 하나님(신성)이요 진짜 사람(인성)이라고 믿었는데, 그리스도의 수난은 인성의 수난일 뿐 신성의 수난은 아니라고 보았다. 하나님의 수난이라는 개념은 전능하신 하나님에 대한 일종의 신성모독으로 간주되었다. 그러므로 이른바 성부수난설을 가능하게 하는 사벨리아니즘(양태론)은 이단으로 정죄되었다. 중세 신학 역시 하나님을 절대자로 만들면서 하나님은 감정이 없어 인간의 고난의 영향을 받지 않는 전능하신 분임을 강조했다. 그러나 기독론 중심의 신학으로 종교개혁을 일으킨 루터는 성만찬의 의미를 설명하면서 그리스도의 고통이 나의 고통이고 나의 고통이 곧 그리스도의 고통이라고 말했다.
물론 루터가 말한 그리스도의 고통이 그리스도의 신성의 고통, 곧 하나님의 고통이라고까지 말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는 이른바 속성의 교류(communicatio idiomatum)를 말함으로써 그리스도의 인성의 고통이 신성의 고통으로 전가될 가능성을 열어놓았다. 물론 여기서 말한 신성의 고통은 성자 하나님의 고통을 말하는 것이지 성부 하나님에게까지 이르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의 홀로코스트 이후 인류는 드디어 하나님의 고통을 전면적으로 말하기 시작했다. 하나님은 전능하지만 사랑이시다. 사랑은 상대의 고통을 자기 고통으로 삼는 데서 그 본질을 드러낸다. 그리스도의 수난(Passion)은 인류의 고통에 영향을 입어 자신도 고통을 겪는 사랑의 하나님의 수동성(passive)의 결과이다. 하나님 개념에서 전능보다 사랑이 강조되면서 하나님의 고통은 성부수난설에까지 이른다. 그리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사는 하나님 자신의 수난사라고 말할 수 있게 되었다. 그래서 위르겐 몰트만 같은 학자는 십자가가 삼위일체 한가운데에 들어 있다고 말할 수 있었다. 몰트만의 주장은 십자가의 도가 만세 전에 이미 정해진 것이라고 말한 사도 바울의 말씀과도 일맥상통한다. 예수를 하나님의 어린양으로 본 복음서는 자연종교와 완전히 다른 새로운 신관과 인간관을 제시했으며, 그것은 새 하늘과 새 땅을 제시한 것이었다.

양명수 | 기독교윤리를 전공했다. 저서로 『아무도 내게 명령할 수 없다: 마르틴 루터의 정치사상과 근대』 등이 있다. 이화여대 기독교학과 명예교수이다.

 
 
 

2021년 8월호(통권 75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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