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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me > 기독교사상 > 성서와설교 > [오리게네스와 함께 마태복음 읽기]
성서와설교 (2021년 8월호)

 

  예루살렘 한복판에 선 예수
  마태복음 21장 해설

본문

 

여리고에서 두 시각장애인을 고친 일을 끝으로 예수와 제자들은 여정의 최종 목적지인 예루살렘에 도착한다. 이제부터는 크게 수난 기사라고 볼 수도 있다. 예루살렘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예수는 자신을 향한 적대의 시선을 느꼈으리라. 물론 입성하는 과정에서 군중이 보인 열광적 반응은 권력자들의 신경에 거슬릴 만했고, 성전에서의 과격한 행동은 종교 지도자들에게 미운털이 박힌 결정적 사건이었을지 모른다. 이어 말씀하신 비유들도 비유치고는 유대 지도자들에 대한 비판이 너무 노골적이었다. 오리게네스는 다른 복음서와의 병행점들에 주목하면서 예의 번득이는 주석적 통찰을 곳곳에 던져준다.

마태복음 21장 1-11절: 예루살렘에 들어가다

구조와 요점 흔히 ‘예루살렘 입성’이라는 제목이 붙은 이 단락은 세 개의 더 작은 조각으로 이루어져 있다. 예수께서 타실 나귀를 마련하기 위해 두 제자에게 지시하심(1-3절)-성취공식(4-5절)-예루살렘에 들어오는 예수에 대한 무리의 환영(6-11절).
이 단락에는 예수 이야기의 절정(climax)과 반-절정(anti-climax)이 절묘하게 정렬되어 있다. 이제껏 먼 거리를 도보로 이동해 왔지만, 마지막 2-3km를 남겨두고 예수는 굳이 나귀를 타기 원하셨다. 나귀를 타고 입성하는 예수에게 사람들은 마치 개선하는 왕을 맞이하듯이 환호를 보냈다. 하지만 그가 탄 짐승은 말이 아니라 나귀였다. 왕 같지 않은 왕, 그것이 예수의 모습이었다. 동방의 마법사들이 별을 따라 유대인의 왕의 탄생을 축하하러 왔을 때 그랬던 것처럼(2:3) 이번에도 ‘온 성이 소동했다.’(10절)

오리게네스의 주석 오리게네스는 예루살렘 입성을 네 복음서 저자가 모두 기록했고 그들 사이에 이런저런 차이가 있음을 확인한다. 하지만 네 저자가 왜 서로 다른지를 묻기보다는 그 넷을 종합해서 하나의 조화 서사(harmonized narrative)로 제시한다. 특히 구약성서 구절들이 복음서 본문의 의미에 어떤 빛을 비춰주는가에 집중해서 주석을 전개한다. 마태복음과 요한복음에 따르면 예루살렘에 나귀를 타고 들어간 사건은 스가랴 9장 9절의 성취이다. 스가랴의 맥락에서 시온, 곧 예루살렘은 하나님의 딸이지만, 복음서의 맥락에서는 그리스도의 딸이다. 그리스도는 또한 그곳으로 입성하는 왕이기도 하다.
그런데 병행하는 누가복음 19장 41절에 따르면 예수께서 예루살렘 성을 보고 우시며 그 성이 당할 임박한 멸망을 예언하신다. 바로 앞에서 왕을 맞이하며 기뻐하던 딸 예루살렘을 향해 왜 이토록 처참한 심판을 선언하실까? 오리게네스는 전자를 천상의 시온산(히 12:22)과 예루살렘(갈 4:26)으로 규정함으로써 지상의 예루살렘과 구별한다. 지상의 예루살렘에서 십자가에 못 박힌 왕을 천상의 예루살렘이 영접할 것이다. 이렇게 해서 ‘시온’은 양향적, 양가적 속성을 띤 상징으로 설명된다.
현대 주석에서 종종 논란이 되는 당나귀 두 마리에 대해서1 오리게네스는 전혀 문제의식을 느끼지 않는다. 오히려 그에게 중요한 점은 그 두 마리가 묶여 있다가 제자들에 의해 풀려났다는 서술이다. 두 짐승은 예수에게로 나아온 유대인들(큰 나귀)과 이방인들(새끼 나귀)을 상징한다. 전자는 ‘장로들의 유전’에 매여 있었고, 후자는 ‘죄의 사슬’에 매여 있었다. 그들을 매임으로부터 풀 수 있는 권세, 즉 죄를 용서할 수 있는 성령의 권위가 제자들에게 주어졌다.(요 20:22-23) ‘멍에 메는’ 짐승 위에 올라타심으로써 예수께서 그들로부터 쉼을 얻은 것이 아니라 오히려 수고하고 무거운 멍에에 짓눌린 이들에게 쉼을 주셨다. 우리가 곧 나귀와 같은 존재이다. 비록 우리가 얼마큼의 지식과 지혜를 지녔다 하더라도, 지식 그 자체이신 분(αὐτο λόγος)과 신적 위엄(ἡ τοῦ θεοῦ μεγαλειότης)에 비한다면 나귀나 양과 같다.

마태복음 21장 12-17절: 성전의 참 의미를 주창하다

구조와 요점 이 단락 이야기의 흐름은 예수의 행동(12절)-그 행동의 이유(13절)-성전에서 시각장애인과 저는 자들 치유(14절)-어린이들의 환호에 대한 대제사장, 서기관들의 불평과 예수의 대답(15-16절)-베다니에서 유숙함(17절)으로 되어 있다. 특히 첫 두 절 내용에 대해서 흔히 ‘성전 청결 사건’이라고 부르지만, 환전상이나 비둘기 판매업자들이 어떤 의미로든 성전을 ‘더럽혔다’는 명시적 언급도, 암시도 없다. 그들의 상업 활동을 중지시킴으로써 성전이 깨끗해졌는지도 확실하지 않다. 이 사건의 핵심은 예수의 정체, 즉 성전의 본래 기능과 속성을 회복할 뿐 아니라 더 나아가 성전을 대신하는 분으로서 만민을 하나님의 영광과 임재로 이끄시는 바로 그분이라는 주장이다. 예수의 관심사 혹은 예수에 관한 마태 공동체의 관심사는 성전이 아니라 예수의 정체였다.

오리게네스의 주석 이 사건은 다른 두 공관복음과 요한복음에도 기록되어 있고, 특히 요한복음에 대해서 이미 오리게네스가 저술했던 내용 중 한 대목이 여기 반복된다. 예수께서 성전에서 행한 이 행동은 그 자체로 하나의 기적이다. 목수의 아들임에도 많은 사람이 밀집한 성전에서 종교 권력과 관련된 사람들과 기물들을 뒤엎고 몰아낸 행동은 놀라운 용기(παρρησία)와 권위(ἐξουσία)의 발현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오리게네스는 이 말씀에 비추어 자기 시대의 교회를 꼬집어 비판한다. 예수께서 쫓아내시고 뒤엎으셨던 타락의 현실이 자기 시대의 교회에 그대로 나타나고 있었기 때문이다. 성전 권력 시스템 안에 기생하던 장사치들처럼 오리게네스의 교회에도 교회를 사업의 기회로 전락시킨 집사, 장로, 감독들이 있었다. 그들은 “탐욕스럽고(αἰσχροκερδείς), 독재적이고(τυραννικοί), 무지하고(ἀνεπιστήμους), 불경스러웠다(ἀνευλαβείς).” 그런 자들이 지도하고 가르치는 교회는 강도의 소굴이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때 그들의 자리를 뒤엎으시고 그들을 내쫓으실 것이다.

마태복음 21장 18-22절: 무화과나무가 마르다

구조와 요점 복음서의 많은 치유, 기적 기사처럼 이 기사도 예수의 행동(18-19절)과 그 의미 해설(20-22절)로 구성된다. 죄 없는 무화과나무에 다소 가혹해 보이는 예수의 행동은 어쩌면 구약 예언자들과 같은 예언적 행동의 일환이었을지 모른다.2 예언자적 비판 정신에 입각해서 유대 지도자들의 허울뿐인 종교적 위선을 질타하기 위한 행동 언어인 것이다. 즉 성전 정화 사건의 메시지를 이어간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마가와 달리 마태는 성전 정화 사건을 중간에 삽입하지 않음으로써 두 사건의 연관성을 그만큼 약화한다.
이어지는 해설은 이 행동의 의미를 더욱 모호하게 만든다. 이미 여러 번 언급된 바 있는(7:7, 17:20, 18:19) 믿음의 기도 주제가 굳이 이 맥락에서 제시되어야 할 필요가 있었을까? 기적 보도와 해설을 포함해서 이 짧은 기사에 담긴 전승사적 실체 혹은 역사적 예수의 행동과 의도를 밝히기는 쉽지 않다.3

오리게네스의 주석 오리게네스는 먼저 이 기사를 유대인-이방인 구도에서 파악한다. 이스라엘을 상징하는 무화과나무가 마른 것은 하나님의 생명의 기운이 그들로부터 빠져나와 이방인에게로 옮겨졌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는 영적 해석을 시도한다. 예수는 항상 의인들 안에 맺히는 성령의 열매에 굶주려 계시며 그것에 동참하고자 하신다.
이야기 속 무화과나무의 잎의 무성함과 열매의 결핍이라는 극적(dramatic) 대조 역시 영적 의미를 담고 있다. 무성한 잎으로 치장한 무화과나무가 열매를 기대하게 했듯이 예수께서는 신자의 삶의 특정한 정황 안에서 그에 알맞은 열매를 바라신다. 즉 시험 중에 있는(ἐν τοῖς πειρασμοῖς) 신자에게 성령의 열매를 구하시는 것이다. 그래서 박해에 처한 신자에게서 고백과 순교를 기대하신다. 또한 이성과 열정적인 사랑에 빠진 사람에게서 절제와 성적 자제를 찾으신다.
이 본문과 병행하는 마가복음에는 이 사건이 일어난 봄에 무화과에 열매가 맺히지 않는다는 언급이 있는데(막 11:13-14), 이에 대해 오리게네스는 독특한 주석을 제시한다. 열매가 맺히지 않을 것 같은 그런 상황에 예수는 열매를 기대하신다. 성령의 열매 중 첫째인 사랑의 열매를 예로 들면, 다른 이들이 우리를 사랑할 때 그들을 사랑하는 일은 어쩌면 자연스럽겠지만, 우리를 사랑하지 않는 이들을 사랑하는 것이야말로 주님이 귀하게 보시는 열매가 될 것이다.
기도에 관한 가르침(20-22절)을 해설하면서 오리게네스는 정경 복음서에 기록되지 않은 주의 말씀(dominical saying) 한 구절을 소개한다. “위대한 것들을 구하라. 그러면 작은 것들이 너희에게 더해질 것이다. 하늘의 것들을 구하라. 그러면 땅의 것들이 너희에게 더해질 것이다.” 이렇게 오리게네스는 “무엇이든지 믿고 구하는 것을 다 받으리라”(22절)라는 말씀에 내재한 오해의 소지를 없앨 수 있었다. 제자들은 마땅히 구해야 할 것 외에는 구하지 말아야 한다. 주의 말씀에 순종하면서 오직 위대한 것, 하늘의 것만을 구할 때, 그들은 구하는 모든 것을 받게 될 것이다.

마태복음 21장 23-27절: 예수의 권위를 두고 제기된 질문과 역질문

구조와 요점 이 단락은 유대 지도자들의 질문(23절)-예수의 역질문(24절)-유대 지도자들의 대답 거부(25-27a)-예수의 대답 거부(27b)로 이어지는 대칭 구조로 되어 있다. 23절의 ‘이런 일’은 좁게는 성전에서 가르치는 활동을 지칭하겠지만, 보다 넓은 정황으로 보면 예수가 행한 각종 치유와 기적 행위를 포함할 것이다. 그런 일들로 불편해진 심기를 안고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이 예수께 질문을 던졌을 때, 그들은 순수한 호기심에서 묻고 있는 게 아니었다. 사실 질문을 가장한 비난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자신의 존재를 부정하려는 의도에서 나온 질문에 대해 예수는 ‘역질문’(counter-question)을 던진다. ‘요한의 세례가 어디서 왔느냐’는 예수의 질문은 ‘예수의 권위가 어디서 왔느냐’는 유대 지도자들의 질문을 그대로 되돌려준 것이다. 요한의 권위와 예수의 권위는 결국 하나로 묶여 있었기 때문이다.

오리게네스의 주석 예수께서는 적대자들의 질문에 답을 하는 대신 다른 질문으로 응대하셨다. 왜 그러셨을까? 대답할 가치를 느끼지 못했기 때문일까? 예수가 기적을 행할 때 그가 기댔던 권위, 그 초월적, 영적 권위의 근원에 대해 유대 지도자들이 물었을 수 있다. 예수의 권위의 출처는 선하시고 거룩하신 하나님인가 아니면 악한 영, 사탄인가? 하지만 과연 예수가 그 두 가지 선택지 중 후자라고 대답할 가능성이 있었을까? 오리게네스가 보기에 이것은 터무니없는 설명이다. 그렇게 답이 뻔한 질문, 하나 마나 한 질문을 유대 지도자들이 던졌을 리가 만무하고, 예수께서 그렇게 명백하게 답할 수 있을 질문에 답을 회피하셨을 리도 만무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오리게네스는 이 구절에 신비로운 요소(μυστικά)가 담겨 있다고 보고, 그것을 설명하기 위해 지혜로운 마음(βαθεία καρδία)이 요구된다고 전제한다.
그것은 보이지 않는 차원에 존재하고 또 작용하는 다양한 초월적 존재들에 관한 것이다. 최고인 하나님 아버지의 권위 아래 천사들에게 위임된 권위가 있다. 예언자들, 사도들, 하나님의 사람들이 행하는 기적이 바로 그런 권위들에 의해 이루어진다. 하나님의 권위 아래에 작용하는 다른 권위들도 있다. 바울이 골로새서 1장 16절에서 명명한 ‘왕권들, 주권들, 통치자들, 권세들’이 그것이다. 하나님이 정하는 때에 정하신 방식에 따라 하나님의 사람들에게 그들 각각의 권위가 발휘된다. 반대로 악한 이들도 기적을 행하는 경우가 있는데, 그들에게 작용하는 권위는 에베소서 6장 12절에 언급된바, ‘통치자들, 권세들,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 그리고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 속해 있는 권위이다.
그처럼 다양하고 복잡한 영적 세계에 대해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도 어느 정도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총체적인 영적 세계에 대한 설명을 예수에게 요청했다. 하지만 그들의 질문 속에는 단지 신비로운 지식에 대한 호기심만이 아니라 예수를 시험하고 결국 넘어뜨리려는 악의가 도사리고 있었다. 예수는 그것을 직감했다. 그리고 그들이 영적 세계에 대한 고매한 지식을 받을 자격이 없다고 판단하셨다. 역질문을 통해 예수는 질문에 답하지 않는 것이 현명한 일임을 그들에게 일깨워주셨다.

마태복음 21장 28-32절: 두 아들의 비유

구조와 요점 두 아들의 이야기(28-30절)와 그 해설(31-32절)로 이루어진 이 비유는 바로 앞에 제기된 논점을 이어간다. 내러티브 정황상 ‘너희’(28절)는 직전 장면의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을 지칭한다. 요한의 세례가 가진 정당성에 관한 물음이 곧 하나님 앞에서 그들의 위치를 돌아보라는 실존적 질문이었듯, 예수는 이 비유를 통해 청중 자신의 신앙을 다시 한 번 검토하라고 요구한다.
이전 단락의 질문과 이 비유가 주제적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은 결론 부분에서 분명해진다.(32절) 처음에 순응했다가 끝내 아버지의 뜻을 거스른 비유 속 맏아들은 요한의 세례를 거부한 유대 지도자들이다. 반면, 아버지의 명을 거부했다가 결국 순종한 둘째 아들은 요한에게 나아와 믿고 회개했던 ‘세리와 창녀들’이다. 마태복음의 독자들에게 요한과 예수는 일직선상에 있다. 둘은 같은 메시지를 설파했고(3:2, 4:17), 유대인들로부터 배척과 고난받을 운명을 공유했다(11:16-19, 17:9-13). 비유 속 ‘포도원’은 요한과 예수가 전파한 ‘의의 도’를 믿음으로 들어갈 하나님 나라이다.

오리게네스의 주석 일단 오리게네스는 구원 역사의 구도에서 맏아들이 유대인에 상응하고 둘째 아들이 이방인에 상응한다고 본다. 그리고 목회적, 실존적 차원으로 들어가서 교회 안에 존재하는 두 부류의 신자들에게 이 비유를 적용한다. 독신을 비롯한 대단한 서원을 충동적으로 했지만, 그것을 실행하지 못하는 신자들이 있다. 반대로 처음에는 엄두를 내지 못하다가 점차 헌신하는 삶을 사는 이들이 있다. “세리와 창녀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리라”(31절)는 말씀을 오리게네스는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받으리라”(롬 11:26)는 말씀과 연결한다. 하지만 그것이 혈통적 유대인을 지칭하는 것은 아니다. 그들은 영혼의 고매함으로 특징지어지는(ἐν τῇ εὐγενείᾳ τῆς ψυχῆς χαρακτηριζόμενος) 영적 이스라엘이다.

마태복음 21장 33-46절: 포도원 소작농들의 비유

구조와 요점 이 단락은 비유 이야기(33-39절)와 그 해설(40-44절), 청중의 반응(45-46절)으로 진행된다. 33절은 이사야 5장 2절 ‘포도원의 노래’의 첫 구절과 유사하지만, 이어지는 비유와 그 결론은 명백히 기독론적이다. 비유의 요점은 포도원에서 난 열매 자체가 아니라 수확물을 받아오도록 주인이 보낸 종들, 그리고 최종적으로는 주인의 아들을 농부들이 어떻게 대했는가이다. 예수가 자신을 ‘주인’, 즉 하나님의 아들로 밝힌 것은 마태복음에서 여기가 처음이다. 죽임당한 아들의 부활은 언급되지 않지만, 포도원 주인의 ‘오심’(40절)은 농부들에 대한 결정적 심판의 계기가 될 것이다. 하지만 포도원 경작권이 원래의 농부들로부터 다른 농부들에게 옮겨질 것이라는 언급은(41, 43절) 유대 민족의 버림받음과 이방인의 구원을 대비한 것이 아니라, 장차 출현할 신실한 유대인과 이방인으로 구성된 교회를 염두에 둔 것이다.(8:11-12 참조)4 시편 118편 22절 인용과 함께 ‘아들’에서 ‘돌’로 전환되는 지점에 아마 히브리어 언어유희(벤-에벤)가 작동했을 것이다.

오리게네스의 주석 오리게네스는 비유의 각 요소(포도원, 주인, 농부들, 두 차례에 나뉘어 보낸 종들, 아들 등)에 알레고리적 의미를 부여한다. 특히 41절의 ‘다른 농부들’과 44절의 ‘그 나라의 열매가 맺는 백성’을 구분해서 전자는 사도를, 후자는 일반적인 이방인을 가리킨다고 설명한다.
이사야 5장 포도원의 노래와 이 비유를 면밀히 비교하면서 오리게네스는 한두 가지 기발한 해석을 내놓는다. 우선 이사야의 포도원이 언약공동체인 이스라엘 백성이라면 이 비유의 포도원은 토라, 예언서, 성문서로 이루어진 성서를 가리킨다. 유대인들에게 주어진 성서가 이제는 이방인이 주축이 된 교회에 넘겨진 것이다.
다른 한 편으로 오리게네스는 포도원에 심어진 포도가 하나님이 각 개인에게 부여하신 이성(ὁ λόγος)이라고 이해한다. 어린아이에게 이성은 단지 생명을 유지하는 기능으로 작용하지만, 자라면서 언어 능력으로 발전하고 마침내 미덕이라는 꽃을 피우며, 거기에서 더욱 성숙하면 마침내 사랑, 희락, 화평, 오래 참음 등의 열매를 맺게 된다.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예수를 ‘제압하고자’(κρατεῖν) 했으나 그러지 못했다는 서술에 대해서(46절) 오리게네스는 인지적, 언어적 활동의 차원으로 설명한다.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은 다른 모든 로고스들, 즉 논리와 주장을 이해하고 논박하고 가르칠 수 있었지만, 로고스이신 그리스도에 대해서는 그렇게 할 수 없었다.

주(註)
1 스가랴 9장 9절의 히브리어 원문에는 히브리 운문 특유의 평행법이 작동하므로 나귀와 나귀 새끼를 두 개체로 이해하기보다는 새끼 나귀 한 마리에 대한 묘사로 이해해야 한다. 흔히 유대인을 위한 복음서라고 지칭되는 마태복음의 저자가 이러한 기본적인 히브리 운문의 속성을 알지 못했으리라고 보기 어려우므로 마태가 두 마리의 나귀를 언급한 데는 모종의 의도와 이유가 있었을 것으로 많은 주석가들은 짐작한다. R. T. 프랜스, 권해생·이강택 옮김, 『마태복음』(CLC, 2013), 478-479.
2 이사야(8:1-4), 예레미야(13장, 19장, 27-28장), 에스겔(4-5장), 호세아(1:2-9) 등도 행위 예언을 한 바 있다.
3 이에 대한 자세한 논의로 다음을 참고할 것. W. D. Davies and Dale C. Allison Jr., A Critical and Exegetical Commentary on the Gospel according to Saint Matthew (London; New York: T&T Clark International, 2004), 3:149-150.
4 이 비유가 반-유대적(anti-Semitic)으로 해석될 위험에 대해서 여러 주석가들이 경계한다. 프랜스, 『마태복음』, 495; Davies and Allison, Matthew, 3:184.


조재천 | 예일대학교와 노트르담대학교에서 신약학을 공부하였다. 저서로 『그리스도인을 위한 통독 주석 시리즈-히브리서』가 있다. 현재 전주대학교 조교수로 재직 중이다.

 
 
 

2021년 8월호(통권 75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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