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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me > 기독교사상 > 성서와설교 > [르네 지라르의 성서 읽기 03]
성서와설교 (2021년 4월호)

 

  창세기 4장, 가인의 살해
  

본문

 

창세기 4장에는 가인이 아우 아벨을 살해하는 이야기가 나온다. 에덴동산에서 추방된 인간이 벌인 최초의 사건은 살인이다. 가인이 아벨을 죽인 것은 질투에서 생긴 증오심 때문이다. 아벨의 제물은 받아들여지고, 가인의 제물은 받아들여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가인의 죄를 묻는다. 가인은 아벨의 피가 배인 땅에서 추방되어 안식 없이 방랑하는 자가 된다. 가인은 모든 사람이 자기를 죽이려 들까 봐 두려워했고, 그러자 하나님이 표를 주어 가인을 보호한다. 하나님은 살인 사건을 두고 가인을 징계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가인을 사람들의 살기(殺氣)로부터 보호한다. 가인은 하나님 앞을 떠나 롯 땅에 살며 도시를 건설하고 자기 아들의 이름을 따라 그 도시를 에녹이라고 부른다.
창세기 4장에는 여러 가지 신학적인 논점들이 있는데, 여기에서는 지라르의 모방이론을 적용하여 해석해보자.

가인, 아벨을 죽이다

에덴동산의 선악과 사건은 과거의 어느 시점에 벌어진 일이라기보다는, 지금도 인간이 겪고 있는 질서와 무질서의 원인에 관한 성서적 신념의 표현이다. 모방욕망을 타고난 인간에게는 ‘모델’이 필요한데, 인간이 하나님을 모델로 삼아 따른다면 하나님처럼 되리라는 뱀의 유혹에 사로잡히지 않을 것이다. 좋은 모델은 라이벌 관계를 형성하지 않고 닮을 수 있기 때문이다.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었다는 창세기의 말씀(1:27)은 인간의 모방욕망이 하나님을 닮는 쪽으로 작동할 길이 열려 있다는 말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사람은 하나님 대신 다른 사람을 모델로 삼아 모방하며 산다. 하나님에게 순종하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사는데, 그것은 결국 사람에게 순종함을 의미한다. 남의 욕망을 자기 욕망으로 삼아 생긴 경쟁 속에서 인간은 타자를 이기고 정복하려는 상호 폭력을 피할 수 없게 되었다.
모방욕망에서 생기는 경쟁심은 살인의 기원을 이룬다. 인간은 자신의 모델을 제거하려고 한다. 모델은 모방을 지시하면서 동시에 밀어내는 이중 명령을 내리기 때문이다. 창세기 4장은 그러한 살인의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 태초의 공간인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이후의 이야기는 인간이 벌인 역사의 이야기이다. 성서는 왜 좀 더 아름다운 얘기를 기록하지 않고 역사의 처음에 살인이 있었음을 전하고 있을까? 지라르의 눈으로 보자면 창세기 4장은 인류학적 사실 그 자체를 매우 잘 기록하고 있다. 살인은 동물과 다른 인간의 특징이고 인류 사회의 기초를 이룬다.
지라르는 동물의 싸움이 상대를 죽이는 데까지 이르지 않는다는 점을 지적한다. 종의 보존을 위해 수컷들이 싸울 때는 힘겨루기를 통한 지배와 복종이 있을 뿐이다. 그러나 인간은 모방욕망 때문에 생긴 시기심과 증오심의 결합으로 죽을 때까지 싸운다.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이라는 말은 홉스가 『리바이어던』에서 사회계약의 근거를 설명하며 사용했지만, 그 이전에 루터가 『세속권세에 대하여』라는 글에서 실감나게 묘사했었다. 그는 국가의 공권력이 없다면 인간은 족쇄 풀린 짐승처럼 서로 먹고 먹히는 싸움을 계속할 것이라고 보았다. 그리고 사실은 루터 이전에 성서가 인간의 폭력성이 매우 심각하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었다.
질투와 증오심 때문에 인간은 자신이 본래 원했던 것을 잊어버리고 상대를 제거하는 폭력 자체를 욕망하게 된다. 가인은 아벨에게 밀린 후 질투심 때문에 화가 났고 침울해졌다. 아벨과 같은 대우를 받지 못한 가인은 승복하지 않고 분노하며 결국 아벨을 죽인다.
그런데 왜 하나님은 가인의 곡식 제물은 받지 않고 아벨의 짐승 제물만 좋게 보았을까?(4:4-5) 인간 사회에서 근거가 확실하지 않은 알 수 없는 경쟁과 승패가 생겼다고 볼 수도 있다. 사실 하나님이 왜 가인의 제물을 받지 않았는지, 그것이 가인에게 무슨 불이익을 주는지 암시하는 대목이 성서에는 없다. 다만 승자가 생겼고 패자가 생겼다. 이 점을 지라르의 시각을 적용해 해석하자면, 모방욕망 때문에 인간은 이득이 분명치 않은 대상을 놓고 경쟁하여 승자와 패자를 만든다고 볼 수 있다. 사탄의 유혹에 넘어간 아담과 하와의 후예들이 벌이는 일이 그렇다. 사실 인간이 선악과를 먹는 불순종으로 하나님의 지혜에 참여할 수 없게 되어 선과 악에 대해 무지하게 되었다는 말은 단지 도덕적 선악을 구분할 수 없다는 말이 아니라, 자기에게 뭐가 좋고 나쁜지, 곧 뭐가 이득이 되고 불이익이 되는지를 모르게 되었다는 뜻이다.
때로 인간들은 왜 이겨야 되는지 모르는 일을 놓고 목숨 걸고 이기려는 경우도 많다. 마치 사람들이 줄을 길게 서 있으면 저 앞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모르면서도 남에게 뒤질세라 재빨리 뒤에 가서 붙는 경우처럼 말이다. 사실 현대인이 겪고 있는 무한경쟁도 그렇지 않은가. 모두가 경쟁력 강화를 외치고 마치 경쟁력 강화가 존재의 목적인 것처럼 말하는데, 도대체 무엇을 위한 경쟁력 강화인가? 생존을 위해서 경쟁력을 강화한다고 하는데, 생존에 필요한 물질이 오늘날만큼 많아진 시기가 없지 않은가.
그런데도 생존경쟁이 더 치열해졌다면, 결국 경쟁 자체가 주도권을 쥐고 인간의 욕망을 이끌고 있는 셈이다. 지라르의 눈으로 보면, 대놓고 경쟁력 강화를 향해 치닫는 현대 문명은 자기 파괴의 대멸망을 향해 질주하는 묵시(apocalypse) 현상을 보이고 있는 셈이다. 어느 한편이 시기심과 증오심에 휩싸였을 때에 지구촌 전체를 파멸시킬 수 있는 기술과 무기를 인류는 이미 손에 쥐고 있지 않은가.
그런데 지라르는 초기 작품인 『폭력과 성스러움』에서 하나님이 가인의 제물을 받지 않은 이유를 설명한 적이 있다. 지라르에 따르면, 피를 보아야 사람들의 싸움이 멎고 잠시나마 평화가 찾아오는데, 가인의 곡식 제물에는 피가 없기 때문에 제의의 효과가 없는 제물이었다. 짐승의 피를 낸 아벨의 제사만이 인류의 보존에 기여하고, 그렇기 때문에 아벨의 제사는 신에 의해 받아들여졌다. 지라르의 이러한 설명대로라면 창세기 4장의 하나님은 희생제물을 즐겨 받는 하나님이고, 그것은 성서종교의 특징이라기보다는 인류의 보편적인 종교의식을 보여준다.
지라르는 성서에 신화와 비신화가 섞여 있다고 본다. 성서의 특징은 비신화 또는 반(反) 신화에 있다. 하나님이 아벨의 제사를 받은 이야기는 신화에 속한다. 인류의 모든 신화는 희생양에 대한 폭력을 정당화한다. 공동체 내부에 형성된 증오와 죄를 희생제물에 얹어 살해함으로써 공동체 내의 긴장을 해소한 후에 그 희생제물을 숭배하는 것은 신화에 속하고, 희생제물이 죄 없이 희생되었음을 고발하는 것은 반 신화이다. 지라르는 유대교와 기독교를 반 신화의 종교라고 본다. 그러나 구약성서에는 인류를 보존하는 기능을 수행했던 신화적 종교의 이야기도 섞여 있다.
지라르는 신화적 종교 즉 자연종교를 사탄이라고 보는 많은 개신교인들의 시각을 비판한다. 희생제물을 드리던 자연종교는 자연선택에 의한 인류의 생존 방식이었고, 그것 역시 하나님의 계시에 포함되어야 한다는 것이 지라르의 주장이다. 지라르는 인류문명의 진화 과정을 하나 님의 섭리로 보는 셈이다. 사실 지라르의 견해를 수용해서 신학적으로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인류의 초기 역사를 이루는 자연종교는 하나님이 원치 않았으나 허락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사람이나 동물을 살해하여 제물로 드리는 일은 아담의 타락 이후에 생긴 일이기 때문이다. 물론 하나님의 허락 역시 하나님의 섭리를 가리키는 것이므로 자연종교를 하나님의 섭리로 보는 지라르의 견해는 이해할 만하다.
그런데 기독교는 분명히 자연종교와 다르다는 점 역시 지라르가 강조 하는 대목이다. 기독교를 자연종교와 다를 바 없다고 보는 시각이야말로 매우 사탄적이라고 지라르는 주장한다. 사실 초대교회의 교부들도 기독교를 자연종교와 구분하려고 애썼으며, 그들은 로마를 비롯한 여 러 민족의 자연종교를 가리켜 미신이라고 불렀다. 지라르는 『황금가지』로 유명한 19세기의 유명한 인류학자 프레이저를 비판한다. 프레이저가 종교의 핵심을 희생제의에서 찾은 것은 훌륭하나 기독교를 다른 종교와 같은 희생제물의 종교로 본 것은 잘못이다. 더구나 희생양 만들기는 제의가 사라진 오늘날에도 지속된다는 점을 프레이저는 간과했다. 프레이저는 너무 근대 이성의 낙관적 세계관에 따라 세상을 관찰했다.
지라르처럼 기독교를 자연종교와 전혀 다른 종교로 본다면, 기독교는 미신이 아니라는 점에서 합리적인 종교이다. 교부들도 신앙을 지성의 희생(sacrificium intellectum)으로 보지 않았고, 중세의 스콜라 신학은 물론이고 하나님의 전적인 은총을 강조한 종교개혁자들도 이성을 중요한 도구로 사용했다. 물론 신앙을 합리적으로 모두 설명할 수는 없다. 그러나 신앙이 인간 내면의 깊은 성찰을 수반하고 세상에 평화를 주는 차원 높은 도덕성 문제와 뗄 수 없다는 뜻에서, 그리고 인간을 구원할 어떤 보편 정신을 지닌다는 뜻에서 기독교 신앙은 합리성을 지니고 있다. 지라르가 개신교 근본주의를 매우 싫어하는 까닭은 그들이 기독교 신앙에 들어 있는 보편 정신을 도외시하고 일차원적인 승리주의에 집착하기 때문으로 보인다.
여하튼 가인의 제물이 받아들여지지 않은 문제에 대해 모방이론을 적용하자면 위와 같이 생각해 볼 수 있다. 이제 가인이 아벨을 죽인 살인 사건에 대한 하나님의 반응을 통해 유대 기독교 전통의 독특한 점을 살펴보자.

하나님, 가인의 죄를 묻다

앞에서 보았듯, 가인의 살인 행위는 인간의 경쟁심이 빚은 결과로 볼 수 있으며, 그러한 관점의 연장선에서 아벨의 죽음을 집단 살해로 볼 수도 있다. 지라르는 가인을 개인이 아닌 집단의 이름으로 볼 수 있다고 말한다. 이렇게 되면 이야기는 아벨이 드린 동물 희생 제사보다 앞서 인간을 제물로 바치던 시대의 종교로 돌아간다. 다시 말해서 성서는 인류 사회의 기원에 제의적 살인이 있었음을 알려준다. 사람은 모방욕망 때문에 살기를 가진 폭력본능의 노예가 되었고, 폭력이 집단 전체로 번지지 않도록 만장일치로 한 사람을 희생시키는 일을 구원의 수단으로 삼았다. 집단 살해는 제의적 살인이며, 종교는 희생물에 대한 집단 살해 의식을 통해 인류 사회의 기반을 다진다.
지라르에 따르면 창건신화에는 형제 살인이 들어 있는 경우가 매우 많다. 대표적으로 로마의 창건신화에 로물루스와 레무스라는 쌍둥이 형제가 등장하는데, 로물루스가 레무스를 살해하고 로마의 창건자가 된다. 지라르는 로물루스의 살해를 사회 구성의 기초를 이루는 집단 살해, 곧 제의적 살해로 본다. 지라르가 참고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아우구스티누스 역시 『신국론』에서 신의 도성과 대비되는 땅의 도성(civitas terrena)을 설명하며 가인과 로물루스의 예를 든다. 그는 두 사건의 형제 살인이 질투에 의한 것이며, 가인의 도시 에녹과 로물루스의 로마제국은 모두 질투에 의한 살인에 기초를 두고 있다고 주장한다.
아우구스티누스가 로마제국을 거론할 때에 그는 인간이 이루는 사회와 국가 전체를 가리킨 것이다. 국가의 기초에 살인이 있었다고 보는 지라르와 아우구스티누스의 시각은 국가를 상호협력에 의한 최고선의 공동체로 보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학』의 시각과 너무나 다르다. 국가 및 정치철학과 관련된 성서와 기독교의 시각에 대해서는 다음에 언급할 기회가 있을 것이다.
제의적 살해는 자연종교에 해당하는 것이고 따라서 가인의 살해 행위는 모든 민족의 보편적 현상이다. 자연종교가 아닌 성서의 독특성은 하나님의 태도에서 찾을 수 있다. 성서의 하나님은 인신공양을 받아들이는 신이 아니다. 하나님은 가인의 죄를 묻는다. “네 아우 아벨은 어디에 있느냐?”(4:9) 하나님은 신에게 제물로 드려진 아벨의 죽음을 무고한 자의 희생으로 본다. 오늘날 희생이라는 말이 무고한 자에게 해당하는 의미로 쓰이는 것은 기독교 문명의 덕분이라고 지라르는 주장한다. 자연 종교에서 희생은 희생제물을 가리키고 희생제물은 그 자신의 죄 때문에 죽는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공동체의 집단 폭력으로 희생당한 무고한 자의 호소를 듣는 분이다. “네 아우의 피 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하느니라.”(4:10) 그리고 마침내 가인은 무고한 자의 피가 배인 땅으로부터 버림받고 추방당한다. “땅이 그 입을 벌려 네 손에서부터 네 아우의 피를 받았은즉 네가 땅에서부터 저주를 받으리니, 네가 땅을 갈아도 그 효력을 네게 주 지 아니할 것이요, 너는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되리라.”(4:11-12)
성서의 하나님은 무고한 자의 피에 대해 매우 민감한 반응을 보인다. 북이스라엘과 남유다 왕국은 아시리아와 바빌론에 의해 멸망당하는데, 성서는 그 이유를 이스라엘과 유다의 백성과 왕들이 하나님에게 순종하지 않은 데에서 찾는다. 그런데 바빌론의 느부갓네살에 의해 유다가 망하고 포로로 끌려간 일을 두고 성서는 특히 유다 왕 므낫세의 죄를 지목한다. “이 일이 유대에 임함은 …므낫세의 모든 죄 때문이며 또 그가 무고한 자의 피를 흘려 예루살렘에 가득하게 하였음이라.”(왕하 24:3- 4) 솔로몬 이후 많은 왕이 하나님 앞에서 성실하게 살지 않은 죄를 범했는데, 무고한 자의 피를 많이 흘린 죄는 므낫세의 일이었고 성서는 그를 특별히 지목해서 유다 왕국의 멸망 원인으로 본다.
가인의 죄를 물은 하나님은 제의적 살해를 당한 자가 무고한 피를 흘렸다고 보는 신이다. 성서의 종교는 인신공양을 일찍부터 멀리한 종교라고 할 수 있다. 구약성서에는 사람을 제물로 바치는 제의가 이스라엘의 주변 민족들 사이에서 큰 효력을 발휘하고 있었음을 알려주는 대목 이 있다. 열왕기하 3장에는 북이스라엘과 남유다의 연합군이 모압을 치는 이야기가 나온다. 모압 왕은 전세가 불리해지자 자기 아들을 성 위에서 희생제물로 바친다. 그러자 어떤 무서운 힘이 작용하여 모압의 성을 포위했던 이스라엘 군대가 철수했다.(왕하 3:27) 아마 모압에서도 동물을 제물로 드리는 의식을 거행했겠지만, 큰 위기가 닥치면 사람을 바치는 것이 더 효과적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원래 사람의 폭력심을 정화하기 위해서는 사람의 피를 보아야 했기 때문이다.
지라르에 따르면 고대 왕들의 신성함은 그들의 죽음에 있었다. 말년의 어느 시기에 희생제물로 바쳐지면서 왕은 영원히 죽지 않고 자기가 다스리던 종족을 보호하는 신이 된다. 옛 사람들은 희생제물 덕분에 공동체가 존속하고 살아남았기 때문에 자신들이 죽여 바친 희생제물을 숭배하며 신격화하는 습성이 있었다. 왕들도 그렇게 해서 신격화된 것이다. 그렇게 보면 모압 왕이 자신의 왕위를 계승할 첫 아들을 희생제물로 드린 행위는 오래된 자연종교의 모습인 셈이다.
때로는 왕이나 추장 자신들이 축제 기간 중에 제물로 드려지기도 했다. 축제는 희생제물을 드려 사회가 평화를 되찾는 종교적 제의의 일부인데, 축제 기간에는 공동체의 위기가 재현된다. 여기서 말하는 위기는 모방욕망으로 말미암아 차이가 없어져 공동체가 붕괴될 위기를 말한 다. 공동체의 위기를 재현하기 위해 위아래의 차이를 없애고, 집안의 차이를 없애고, 때로는 남녀의 차이를 없애고, 때로는 사람과 짐승의 차이도 없애는 각종 분장이나 춤이나 노래를 통해 축제가 거행된다. 말하자면 금기를 일정한 한도에서 해제한 자리를 마련한 것이 축제이다. 마치 약한 병원균이 들어 있는 백신을 맞으면 몸속에 항체가 생겨 병을 예방하는 것과 같다. 옛날의 금기란 차이를 유지하기 위한 것이었다. 인간 사회는 어떤 기본적인 차이들로 구성되는데, 모방욕망이 아무 데나 가서 붙어 차이가 사라지고 공동체가 붕괴되는 일을 막는 것이 금기이다. 축제 동안에는 그런 금기가 가상으로 해제됨으로써 사회의 위기를 재현한다. 그래서 축제 기간에 벌어지는 제의적 근친상간도 있었다. 근친상간은 부모와 자식의 차이를 없애는 상호모방을 가리킨다.
축제의 끝에 제물이 바쳐짐으로써 차이 소멸의 무질서한 위기는 극복 되고, 공동체는 다시 질서를 찾아 결속된다. 이때 맨 위에 있는 왕들이 제물로 바쳐지기도 했다. 원래 인신공양은 보복할 수 없는 약한 집안의 아이들을 택하거나 공분을 사는 범죄자들을 택했는데, 맨 꼭대기에 있는 왕도 사회에 쌓인 상호 폭력성을 배출하기 위한 희생제물이 될 수 있었다. 이 점은 현대의 정치와 사회에도 많은 점을 시사해준다. 옛 어른들이 너무 나서지 말고 중간만 가라고 했는데, 이 말은 희생양이 되는 것을 피하기 위한 오래된 지혜에서 나온 것일지도 모른다.
구약성서에서 우상숭배를 그토록 강하게 금지하고 이방신들과 뒤섞인 혼합종교를 큰 죄악으로 간주하는 까닭도 결국 희생양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는 폭력적 자연종교에 대한 비판과 관련이 있어 보인다. 그럼 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의 왕들과 백성들은 줄기차게 이방신들에 대한 매력을 떨치지 못했던 것 같다. 유다 왕 아하스는 아들을 희생제물로 바치는 일까지 저지르는데(왕하 16:3), 요시야의 개혁을 보면 이런 일은 아하스 왕에게 국한된 사건이 아니었던 것 같다.(왕하 23:10) 인신공양은 하나님 보시기에 매우 역겨운 짓으로 묘사되어 있다.
결국 구약의 하나님이 이방신과 섞이기를 거부한 것은 인간 사회의 보존을 위한 희생양 만들기를 거부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하나님의 백성은 희생양 만들기에서 벗어난 사람들이고 세상의 희생양 메커니즘을 용납하지 않는 사람들이다. 인간제물을 넘어 동물제사로, 그리고 동물 제사를 넘어 마음의 제물로 넘어간 종교가 성서의 종교이다. 마음의 제물이란 하나님에 대한 순종을 가리키고 하나님을 좋은 모델로 삼아 군 중의 모방욕망에서 어느 정도 자유로워지는 일을 가리킨다. 그러한 자 유로움으로 스스로 사탄적인 폭력의 악순환에서 해방되어 세상의 희생 양 메커니즘과 다른 방식으로 공동체의 보존과 번영을 꾀하는 사람들 이 하나님의 백성이다. 이것이 예수의 성전 정화와 원수 사랑의 가르침으로까지 이어진다고 볼 수 있다. 이 문제는 뒤에서 다시 이야기할 기회가 있을 것이다. 여하튼 지라르가 유대교와 기독교를 같은 종교로 보아야 한다고 말하는 것도 대체로 그런 관점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하나님, 가인을 보호하다

가인은 아벨의 피를 흘린 땅에서 추방되고 하나님 앞에서 멀어진다. 그는 안식 없이 떠도는 자가 되고, 사람들이 자기를 죽일까 봐 두려워한다. “내가 주의 낯을 뵈옵지 못하리니 무릇 나를 만나는 자마다 죽일지니라.”(4:14) 지라르는 이 대목을 무한한 상호 폭력의 위험으로 본다.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고 모방욕망 속에서 라이벌을 죽인 가인은 타락한 모든 인간을 대변한다. 또는 사람을 죽여 평화를 찾은 가인 공동체는 위기가 닥칠 때마다 누구든 희생양을 만들어 살해할 준비가 되어 있다. 희생제물의 효과는 오래가지 못하므로 제의는 반복되어야 하고 희생양 만들기도 반복된다. 그러므로 가인 자신도 언제 희생될지 모른다. 하나님 앞을 떠난 인간은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으로 들어간다. 이때 하나님이 가인을 보호한다.
“가인을 죽이는 자는 그 벌을 칠 배나 받으리라 하시고 가인에게 표를 주사 그를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서 죽임을 면하게 하시니라.”(4:15)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받게 된다는 말씀을 지라르는 살인 금지의 법규가 생긴 것으로 본다. 인류 사회는 종교와 살인 금지의 법 규범을 기초로 형성되었다. 만장일치의 살인을 행하는 종교, 그리고 일상에서의 살인을 금하는 사회법이 인류를 종의 멸망으로부터 구한 두 기둥이다. 신에게 드리는 제의적 살인을 통해 사회 구성원의 폭력성을 일시적으로 해소하고, 제의가 벌어지는 성소 밖에서는 살인을 금지하는 법으로 폭력의 전염을 막는다. 종교와 사회법의 이중 장치를 통해 인류는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을 제어하고 공동체를 유지해 왔다.
원래 폭력은 쉽게 모방되어 전염되기 때문에 제의적 살해는 군중들과 철저한 거리를 두고 이루어진다. 그것이 성속의 이분법으로 구성된 종교의 역할이다. 지라르 이전에도 19세기와 20세기의 인류학자들은 성과 속의 거리야말로 가장 기본적인 차이를 이루었고 인류 사회 최초의 절대적 이분법을 형성했음을 밝혔다. 필자는 유학 중에 프랑스 인류학자들과 엘리아데의 책을 인상 깊게 읽었다. 그런데 성과 속의 이분법이 제의적 폭력의 전염을 막기 위해 생긴 것임을 밝힌 사람이 지라르이다.
살인은 복수를 낳고 복수의 악순환은 멸망으로 이어진다. 과거 인류 사회에서 복수는 명예회복의 길이면서 정의로운 것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복수는 증오심의 급상승을 가져와 모두 망하는 길로 인도하기 때문에, 복수를 막는 것은 공동체의 중요한 과제였다. 그것은 중앙 권력의 출현으로 이어지는데, 국가가 법에 의거한 강력한 공권력으로 개입해서 개인 간의 보복행위를 불법으로 규정하고 막는다. 그렇게 보면 고대 국가는 제의적 살해에 기초를 두고 있으면서 일반적인 살인을 막는 기능을 수행한다.
제3자인 국가가 개입해서 범죄자에게 벌을 주는 것은 정의이지만, 개인적 응보행위는 주관적 감정이 개입하여 복수의 연속으로 이어지기 때문에 정의가 아니다. 이것이 복수를 바라보는 인류의 시각이다. 중앙 권력의 출현 이후에도 개인적인 모욕이나 가문의 싸움이나 라이벌 국가 사이에서 복수는 정의와 명예를 위한 의무로 여겨졌다. 어떤 제도나 가르침도 아직 인간의 복수심을 막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아주 오래 전부터 인류는 복수의 위험을 알고 있었다.
살인 금지 규정은 가장 위험한 보복살해의 위험을 막기 위해 등장했다. 가인이 살해당하지 않도록 보호하는 하나님의 조치는 인류 사회의 기초를 형성한 살인 금지라는 금기이다. 그것은 거의 종교적 금기와 같은 성격을 지닌다. 십계명뿐 아니라 모든 고대 민족의 법 조항에는 살인 금지 규정이 들어간다. 그렇게 보면 살인 금지는 한 사람의 목숨을 중히 여기는 조치가 아니라 인류의 보존과 관련된 인류학적 의미를 지닌다. 제사의식에 따르는 수많은 금기가 제의적 폭력의 전염을 막기 위한 것이라면, 살인 금지 규정 역시 일상에서 피비린내 나는 폭력 모방의 악순환을 막기 위한 종교적 금기의 성격을 지니고 있다.
하나님이 가인을 보호한 것은 타락한 인간들을 보존하기 위한 조치이다. 인간은 타락했지만 보존되어야 한다. 타락한 인간 가인과 그의 집단은 희생제물을 바치는 종교와 강제적 법 규범을 통해 보존된다. 지라르는 하나님이 가인에게 준 표(4:15)가 차이를 의미한다고 본다. 인간의 모방욕망에 의해 차이가 사라지면 혼돈(카오스)이 생기고 복수로 인해 멸망에 이른다. 그러므로 가인에게 표를 준 것은 타락한 상황에서도 인류가 그 나름의 질서와 문화를 만들며 보존되게 하기 위한 조치이다. 그러나 물론 자연종교와 법 규범은 인간을 보존하지만 구원할 수는 없다. 사도 바울이나 루터, 칼뱅이 그토록 복음과 율법을 대비해서 말한 까닭 도 거기에 있다.
이미 가인은 남을 피하는 자기 방어적 존재가 되었다. “내가 주의 낯을 뵈옵지 못하리니 내가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될지라.”(4:14) 이어서 가인은 “하나님 앞을 떠나서”(4:16) 에덴 동쪽에 자기 방어적인 성곽 도시를 건설한다.(4:17) 3장의 에덴은 사방이 트인 동산인데, 4장의 가인은 이제 성으로 둘러싸인 도시에서 산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을 떠나 사람과 군중을 모방한 인간의 폭력 본능 때문에 생긴 일이다.
그러므로 가인 공동체는 구원의 공동체일 수 없다. 그리고 인간의 역사는 계몽주의자들이나 마르크스의 기대와 달리 하나님 나라를 건설할 수 없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류라는 종의 보존을 위해 가인을 보호하신다. 보존해야 구원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장차 하나님이 은총으로 이루실 하나님 나라도 인간의 역사를 거친다. 지라르는 그 점에 대해 침묵한다. 그는 역사발전에 대한 기독교인의 책임에 대해 강조하지 않는다. 자신의 역할은 묵시적 위기를 알리는 데 있다고 생각한 것 같다.
그러나 지라르도 인정한 대로 하나님이 가인을 보호하신다면, 하나님은 타락한 인간의 역사를 버리지 않고 그것을 통해 구원의 역사를 펼치실 것이다. 역사의 끝에 도래할 하나님 나라도 에덴동산이 아니라 새 예루살렘(계 3:12)이라는 이름의 도시가 아닌가. 살인자 가인이 만든 도시를 품고 전혀 다른 도시를 만드는 것이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이다. 하나님 나라는 태초의 에덴으로의 복귀에 있지 않고 타락한 인간의 역사와 함께 이루어질 미래에 있다.
필자가 유학 시절에 지도교수로부터 제일 먼저 읽으라고 권면받은 책은 뜻밖에도 알버트 슈바이처의 책들이었다. 그는 의사이기 이전에 철학자이자 신학자였다.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그가 한 말이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에 남는다. “하나님 나라는 인간 역사의 연장에 있지 않다. 그러나 역사와 무관하지도 않다.”
양명수 | 기독교윤리를 전공했다. 저서로 『아무도 내게 명령할 수 없다: 마르틴 루터의 정치사상과 근대』 등이 있다. 이화여대 기독교학과 명예교수이다.

 
 
 

2021년 4월호(통권 74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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