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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me > 기독교사상 > 성서와설교 > [오리게네스와 함께 마태복음 읽기 04]
성서와설교 (2021년 4월호)

 

  그리스도, 고난받을 분
  마태복음 16-17장 해설

본문

 

치유 기사와 요약문이 예수의 가르침과 섞여 나왔던 14-15장과 달리 16장에는 치유 기사가 전혀 등장하지 않는다. 이 부분에서는 논쟁 기사를 시작으로 제자들과의 사적인 담화를 통한 예수의 메시아적 정체성과 수난 예고, 제자도에 대한 가르침이 이어진다.
마태복음 전체 이야기의 흐름상 첫 번째 수난 예고가 나오는 16장 21절은 하나의 분수령을 이룬다.1 하지만 예루살렘에서 일어날 메시아 수난의 불길한 전조는 16장 첫 구절부터 감돌기 시작하고, 베드로의 그리스도 고백이나 높은 산에서 예수가 영광스럽게 변화한 사건은 오히려 두 번의 수난 예고(16:21, 17:22-23)의 음울함을 더욱 도드라지게 하는 효과를 낸다. 오리게네스는 이 부분을 주석하며 마가, 누가, 요한의 병행구절은 물론 마태복음 내의 연계된 구절들과 구약의 반향들(echoes)까지 풍성하게 동원해서 흥미로운 영적 해석을 이어간다.

마태복음 16장 1-12절: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에 대한 경계

구조와 요점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로 대표되는 유대 지도자들이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을 보여달라고 요청했을 때, 그것은 순수한 호기심에서 비롯된 탐구도 아니었고, 절박한 곤란으로부터 구원해달라는 호소도 아니었다. 그것은 실상 예수의 정체와 정당성을 처음부터 다시 증명하라는 도전이었다. ‘요나의 표적’은 앞에서 한 번 언급되었지만(12:38- 40), 여기서는 아무런 부연설명 없이 수수께끼처럼 던져진다. 그것의 의미는 수난과 부활의 맥락에서 비로소 온전하게 이해될 것이다. 이어지는 소단락에서(5-12절) 갈릴리 바다를 건너갈 때 떡 가져오기를 잊은 제자들은 예수의 ‘누룩’ 언급을 아주 엉뚱하게 오해한다. 바로 앞 표적 논쟁의 맥락에서 보면, 제자들이 경계해야 할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의 누룩’은 예수와 제자들을 향한 유대 지도자들의 적대적 태도와 행동이다.
오리게네스의 주석 오리게네스는 이 본문에서 두 가지 의아한 점을 발견한다. 하나는 부활 등 몇몇 교리에서 입장이 전혀 다른 바리새인과 사두 개인이 예수를 의심하고 시험하는 일에서는 연합하고 있다는 점이다. 하지만 오리게네스는 성서에서 악한 세력들이 힘을 합쳐 선을 대적하는 다른 사례들을 제시하는데, 그중 하나는 헤롯과 빌라도가 예수를 심문하는 일에 서로 협력했던 사실이다.(눅 23:6-12) 성서신학적으로 말하면 이 연합은 ‘세상의 군왕들과 관원들’이 주님을 대적하는 시편 2편 2절의 성취이다.
유대 지도자들이 이전에 예수가 행하신 수많은 기적을 보고도 또다시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을 요청한 점도 의아하다. 이 점에 대해서 오리게네스는 다시 성서의 사례를 들어 설명한다. 출애굽기에서 모세가 행하는 기적에 맞서 이집트의 술사들 역시 유사한 기적을 행했는데,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은 예수의 기적을 거짓 기적 혹은 악령(바알세불)을 힘입어 행하는 기적이라고 판단했다.(마 12:22-32) 하지만 예수의 기적을 무시하고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을 구하는 것이야말로 가시적 기적 그 자체에 매몰되는 어리석은 일이다. 죽은 이를 소생시키는 일, 바람과 파도를 명해서 잠잠케 하는 일은 창조주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데, 그 일을 행하신 예수를 의심하고 믿지 않는 이들은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을 받을 자격이 없다.

마태복음 16장 13-28절: 그리스도 고백과 인자의 고난

구조와 요점 예수께서는 왜 빌립보 가이사랴, 갈릴리 너머 북쪽 이방인 지역에까지 와서 자신의 메시아적 지위와 능력을 제자들에게 밝히셨을까? 그동안의 사역을 평가하고 제자들의 인식을 점검하기 위해 군중으로부터 분리된 시공간이 필요했을지 모른다. 더구나 이때 밝혀진 예수의 메시아 정체성은 아직 공표되어서는 안 될 비밀이었다.(20절) 베드로의 메시아 고백은(13-20절) 이어지는 예수의 수난 예고(21-23절)의 계기가 되고, 그에 대한 베드로의 오해와 무지는 다시 생명을 건 제자도에 대한 가르침으로 이어진다.(24-28절) 전체적으로 이 세 소단락에는 기독론적 주장과 제자도의 본질이 신학적 균형을 이루고 있다. 예수는 메시아이고, 고난받고 죽겠지만 부활할 것이며, 신적 영광으로 자신의 왕국에 오실 것이다.2
메시아 고백의 당사자인 베드로는 교회의 기초가 되고 천국 열쇠를 보유할 권위가 부여되지만, 곧이어 그가 수난 예고에 항변하자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 ‘사탄’이라는 책망을 듣는다. 하지만 여기서 베드로는 고유한 개인이라기보다는 제자의 전형 혹은 대표로 이해되어야 한다. 20절과 24절은 이 단락의 가르침이 제자들 모두를 향하고 있다는 단서가 된다.
오리게네스의 주석 오리게네스 역시 ‘반석’이 베드로만의 이름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닮는 모든 이의 이름이라고 이해한다. 또한 ‘반석’은 그리스도의 다른 이름이기도 하다. 신자는 ‘그들을 따르는 신령한 반석’으로부터 물을 마신다.(고전 10:4) ‘지옥의 문들’은 ‘그것’을 이기지 못하는데, 이 때 ‘그것’은 교회가 세워진 반석일 수도 있고, 교회일 수도 있다.3
영적 현실에서 ‘지옥의 문들’은 신자들을 넘어뜨려서 지옥에 이르게 하는 모든 죄를 가리킨다. 오리게네스는 지옥의 문들과 시온의 문들(시 9:14-15)을 대비시키면서, 그 둘에 대응하는 대비되는 덕목을 다음과 같이 나열한다. 무절제와 절제, 불의와 정의, 비겁함과 용기, 생각없음과 사려깊음, 그리고 거짓 지식과 참 지식. 오리게네스는 ‘하늘들의 왕국의 열쇠들’(19절)이라는 표현에서 복수형이 사용된 점에 착안하여 그 열쇠들은 여러 가지 지식과 덕목들이라고 이해한다. 이렇게 이해하고 나면 ‘회개하라 천국이 가깝다.’라는 말씀이나(마 3:2, 4:17) 하나님 나라가 제자들 가운데 있다는 말씀(눅 17:21)이 제자들의 내면에서 온전하게 만들어지는 덕목과 인격을 가리킨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예수께서 자신의 메시아적 정체성을 공개하지 말라고 명령한 이유에 대해서 오리게네스는 십자가 죽음과 부활을 목격한 이후에 비로소 ‘그리스도’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즉 십자가 없는 그리스도 설교는 불완전하다.
오리게네스는 베드로의 항변에 대한 예수의 꾸지람을 긍정적 권면으로 이해한다. 예수께서는 먼저 베드로에게 ‘돌이키셨다.’(23절) 예수가 주어로서 이 ‘돌이키셨다’라는 동사를 서술어로 취하는 복음서의 용례들을 살피고 나서 오리게네스는 예수의 ‘돌이킴’이 그 돌이킴의 대상에게 유익을 주고자 하는 행동이라는 점을 확인한다. 그렇기 때문에 이어지는 ‘내 뒤로 물러가라.’(23절)는 명령은 베드로를 내치고자 하는 의도에서 한 것이 아니다. 베드로는 잠시 ‘사람의 일을 생각’하느라고 제자의 경로에서 벗어났다. 그에게 예수의 뒤를 따르는 길로 복귀하라고 권면하는 말씀이 바로 ‘내 뒤로 오라.’는 명령이다.
‘인자가 아버지의 영광으로 그 천사들과 함께 옴’(27절)에 대한 오리게네스의 해석도 특이하다. 일단 이 표현을 예수의 파루시아(재림)로 보는 단순한 해석을 받아들인다. 하지만 문자적 의미 너머 영적 의미를 살핀다면 이 말씀은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을 띤 로고스(요 1:14)를 지칭함을 알 수 있다. 로고스가 신자의 정신에 임할 때 신자는 그의 온전한 행위에 상응하는 로고스의 은혜와 진리를 조우할 것이다. 또 인자와 함께 올 ‘천사들’[원어로 ‘전령’(傳令)이라는 의미도 됨]은 로고스의 고난과 영광에 일치하는 예언자들의 말씀을 가리킨다.

마태복음 17장 1-13절: 산에서 변형되시다

구조와 요점 예수의 변형 사건은 16장 28절(“여기 서 있는 사람 중 죽기 전에 인자가 자기 나라에 오는 것을 볼 자들도 있다.”)의 성취로 해석되기도 한다. 주석가들은 이 단락의 몇몇 요소들(산, 빛나는 얼굴과 흰옷, 목격자들의 두려움)이 부활과 승천 기사에 나타난다는 점에 주목하면서 앞서 16장에 서술된 예수의 메시아 정체성, 그리고 수난-부활 예고와 주제적으로 연결된다고 본다.
베드로를 비롯한 제자들의 입장에서는 수난 예고로 위축된 메시아 신앙이 변화산 사건을 통해 다시 고양되는 가시적 체험을 한 셈이고(1-8절), 하산하면서 나눈 대화를 통해서는 엘리야 귀환에 대한 의문이 해결되었다.(9-13절) 변형 사건을 이해하는 가장 중요한 열쇠는 출애굽기 24장 15-18절이다. ‘엿새 후’라는 시간 표현, 지명이 특정되지 않은 ‘높은 산’, 모세의 등장, 함께 산에 오른 세 명의 추종자들, ‘빛난 구름’ 속에서 나는 소리 등 뚜렷하고 중요한 병행점들이 보이기 때문이다.
오리게네스의 주석 오리게네스는 세계가 엿새 만에 창조된 사실에 기초해서 변형 사건이 새로운 안식일 경험이라고 전제한다. 영적 의미로 보자면, 세 제자뿐 아니라 모든 시대의 신자들도 가시적 세계의 허상을 지나 ‘보이지 않는 것들’에 다가가는 초월적 체험을 할 수 있다. 변형된 예수의 ‘해같이 빛나는 얼굴’은 ‘하나님의 형상’(빌 2:6)4과 다르지 않고, ‘빛나는 흰옷’은 예수의 가르침을 정확히 이해하고 복음서의 모든 말씀을 밝힐 수 있는 사람의 체험을 가리킨다. 초월적 관점과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예수를 이해하는 사람은 모세로 대표되는 율법, 엘리야로 대표되는 예언서 전체의 의미를 예수를 중심으로 종합할 수 있다.(‘예수와 더불어 말함’, 3절) 예수의 흰옷에 대해서 마가는 ‘세상에서 빨래하는 자가 그렇게 희게 할 수 없을 만큼 희다.’고 묘사했다.(막 9:3) 이 표현은 세상의 문필가들이 거짓되고 하찮은 내용을 미사여구로 포장하는 것에 빗댄 것이다. 그와 달리 예수의 말씀은 멋지고 화려한 수사는 없을지라도, 그 내용의 탁월함으로 세상 어떤 저술보다 빛난다.
“여기 있는 것이 좋으니 초막 셋을 짓자.”라는, 베드로의 순진하지만 엉뚱한 제안은 빛난 구름이 그들을 덮음으로써 응답되었다. 구름은 사람의 손으로 짓는 초막보다 훨씬 뛰어난 하나님의 초막이기 때문이다. 그 빛난 구름 아래에서 제자들은 보호받고 비췸과 깨우침을 받게 될 것 이다. 하늘의 소리를 들은 제자들이 눈을 들어 보았을 때 ‘오직 예수 외에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는 서술은 율법과 예언서가 예수의 복음 속으로 통합되었음을 의미한다.
산에서 엘리야가 예수와 함께 있던 것을 본 제자들로서는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한다’는 서기관들의 주장이 의아했을 법하다.(10절) 그들은 예수의 설명을 듣고 나서 세례 요한이 곧 엘리야였음을 알게 된다. 하지만 어떻게 한 인물이 수백 년의 시간을 넘나들며 활동할 수 있는가? 세례 요한이 엘리야의 ‘혼’(ἐν ψυχῇ)이 아니라 ‘영과 능력’(ἐν πνεύμαι καὶ δυνάμει) 안에 있었다는 점을 근거로(눅 1:16-17) 오리게네스는 이 문제가 영혼의 이주 혹은 윤회사상과 무관하다는 점을 강조한다. 또한 엘리야의 ‘영’만을 받은 엘리사와 달리(왕하 2:9, 15), 요한에게는 그의 ‘영과 능력’이 깃들었기 때문에 그는 엘리야라고 불릴 수 있었다.5
오리게네스는 요한이 로고스를 준비하는 역할뿐 아니라, 로고스이신 예수가 가야 할 고난의 길을 먼저 걸어간 예표적 역할을 했다고 이해한다. 비록 요한이 엘리야의 영과 능력을 갖추었지만 사람들은 그를 ‘자기들 마음대로’ 대했다. 오리게네스는 이 역설을 사랑의 원리로 설명한다. 사랑의 원리에 따라 유익을 끼치는 사람이 그 유익의 수혜자들 때문에 해를 입는다. 예수께서도 병자들 때문에 아파하셨고, 배고픈 사람들 때문에 배고파하셨으며, 요한과 마찬가지로 헤롯 왕가에 의해 고난당하고 죽음에 처했다.

마태복음 17장 14-23절: 간질을 앓던 아이를 고치시다

구조와 요점 모든 치유 기사에는 인간의 곤란과 고통을 불쌍히 여기셔서 그로부터 건져주시는 예수의 구원 의지와 능력이 스며들어 있다. 특별히 이 단락에는 그러한 구원의 회화적 심상과 함께 16장과 17장 1-13절에 반복해서 지적된 유대인들의 불신앙(17절), 그리고 제자들의 무지와 두려움(19-20절)에 대한 경고가 드러난다. 10장 1절에 따르면 열두 제자는 치유와 축귀의 능력을 부여받았고 그 능력을 행사했을 것이다. 따라서 간질병자를 고치지 못한 것은 실망스러운 실패였고, 그들은 그 이유를 알고자 했다. 예수의 대답의 핵심은 ‘겨자씨 한 알만큼의 믿음’이었다. 하지만 그 믿음의 성격 혹은 그 믿음을 지닐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일까? 이어지는 22-23절에 그 해답이 담겨 있다면, 믿음은 결국 하나님의 뜻을 받들어 많은 사람의 생명을 위해 죽음의 길을 자처하는 순종일 것 이다. 반면 수난 예고에 대해 큰 슬픔으로 반응하는 제자들이야말로 ‘믿음’의 대척점에 선 모습이었다.
오리게네스의 주석 오리게네스는 이 단락에 대한 주석의 상당 부분을 간질(σεληνιάζεσθαι) 혹은 발작병의 영적 의미를 설명하는 데 할애한다. 마비 증세가 영혼의 경직 상태를 의미하고, 눈멂이 영적 세계를 보지 못하는 상태, 귀먹음이 구원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상태를 의미하듯, 간질도 영혼의 상태와 관련이 있다. 이 병자는 ‘항상’ 불과 물에 넘어지는 것이 아니라 ‘자주’(πολλάκις) 발작을 일으켰는데, 그와 같이 평소에 자제력과 덕목을 갖춘 건강한 영혼의 상태로 있다가 곧잘 영혼이 정욕의 발작에 휩싸이는 사람들을 의미한다.
또 영적 해석의 관점에서 볼 때, 이 아이를 대신해서 예수 앞에 무릎 꿇은 아버지는 각 사람에게 붙여진 천사일 것이다. 또 치유를 시도했으나 실패한 제자들은 불완전한 지식을 지닌 사람들이다.
영혼의 고질병을 앓는 사람을 치유하는 일은 쉽지 않으며, 그래서 ‘산 을 옮기는 일’에 비유된다. ‘산’의 또 다른 영적 의미는 사람들의 영혼 속에 자리잡은 거대한 악이다. 오리게네스는 이 표현과 유사한 개념을 고린도전서 13장 2절에서 발견한다. ‘내가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다.’는 바울의 서술에 비추어 ‘겨자씨만 한 믿음’은 곧 ‘모든 믿음’이며, 그것은 성서의 어떤 말씀도 의심하지 않는 믿음, 아브라함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근거로서의 믿음이다. 그런 믿음이 영혼 속의 거대한 악, 악한 영의 권세를 옮겨 무저갱으로 던져넣을 것이다.
당시 오리게네스가 참조한 신약성서 사본에는 21절에 “이러한 종류는 믿음과 금식 없이는 나오지 않는다.”라는 말씀이 추가되어 있었는데,6 이 구절에 대해 그는 다음과 같이 해설한다. “이러한 영혼의 질병을 치유하고자 할 때 신자는 마귀에게 명령하거나, 요청하거나, 심지어 말을 걸어서도 안 된다. 오직 기도와 금식을 통해 하나님께 아룀으로써 더러운 영을 쫓아낼 수 있을 것이다.”

마태복음 17장 24-27절: 세금 논쟁

구조와 요점 가버나움은 베드로의 집이 있는 곳이었고(8:14-17), 이미 그 곳에서 많은 치유를 행하셨다.(8-9장) 이 짧은 담화는 세금과 관련된 질문으로 촉발되었는데, 대부분의 주석가들은 ‘반 세겔’(원문에는 ‘두 드라크마’)이 매년 유월절에 모든 이스라엘 성인 남성에게 징수되는 성전세를 가리킨다고 본다.(출 30:13-14) 납세로 대표되는 세속 질서에 대한 예수의 태도는 양면적이다. 한편으로는 예수뿐만이 아니라 제자들도 왕이신 하나님의 자녀로서 특권적 지위를 누리기 때문에 세속 질서에 종속되지 않는다.(25-26절)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신앙 공동체 바깥의 사회질서를 기본적으로 존중할 필요가 있다.(‘그들이 실족하지 않게 하기 위해’, 27절) 신자의 자유와 사회 질서에 부합한 생활, 이 두 가지 덕목의 균형을 잡는 것은 초대 기독교인들의 중요한 관심사였을 것이다.
오리게네스의 주석 오리게네스는 빌립보서 2장 7절에 비추어 본래 하나님의 형상이신 그리스도가 ‘종의 형상’을 가졌고, 자발적인 비움과 섬김의 일환으로 마치 채무자인 양 세금을 납부하셨다고 설명한다. 또한 그는 베드로에게 낚시를 던져 잡은 고기의 입에서 한 세겔을 취하라는 예수의 명령에 대해서(27절) 두 가지 영적 해석을 시도한다. 먼저 마태복음에서 세금 문제에 대해 논하는 다른 구절(22:15-22)을 연상하면서 카이사르의 형상이 새겨진 동전과 하나님의 형상이신 예수가 공존할 수 없기 때문에 물고기 입에서 동전을 취하도록 명령하셨다고 이해한다.
27절에 대한 또 다른 해석은 구원론적이다. 세상의 염려와 욕심의 파도가 넘실거리는 바다에는 동전을 입에 문 고기처럼 탐욕의 언어와 성품을 지닌 사람들이 많다. 베드로와 같은 복음 선포자는 신령한 낚싯바늘인 진리의 말씀을 던져서 그들을 낚아 올린다. 그리고 그들의 입에서 불신과 탐욕을 제거한 후 그들의 인격에 하나님의 형상이신 그리스도의 말씀을 불어넣을 것이다.

주(註)

1 킹스베리는 “그 때부터 예수께서는 ~하기 시작하셨다.”라는 어구가 나오는 4장 17절과 16장 21절에서 마태복음의 구조적 마디가 맺어진다고 보았다. 그에 따라 마태복음 내용은 세 덩어리, 곧 메시아 예수의 인격(1:1-4:16), 메시아 예수의 선포(4:17-16:20), 그리고 메시아 예수의 고난, 죽음, 부활(16:21-28:20)로 구분된다. J. D. Kingsbury, Matthew: Structure, Christology, Kingdom (Philadelphia: Fortress Press, 1975), 7-25.
2 개역개정 성서에는 “인자가 그 왕권을 가지고 온다”라고 번역되었지만, 헬라어 원문에는 “인자가 그 왕국에 온다”라고 되어 있다.
3 18절 ‘πύλαι ᾅδου’를 개역개정 성서에서는 ‘음부의 권세’로 번역했다. 하반절에 나오는 ‘이기다’의 목적어는 여성 단수 대명사인데, 상반절에 언급된 두 명사 ‘반석’ 과 ‘교회’가 여성 단수이기 때문에 둘 다 그 대명사의 선행사가 될 수 있다.
4 개역개정 성서의 번역(“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과 달리 빌립보서 2장 6절 원문은 “그는 하나님의 형상 안에 있었다”(ὅς ἐν μορφῇ θεοῦ ὑπάρχων)라고 되어 있다.
5 열왕기하 2장 9절과 15절에서 엘리야의 ‘루아흐’(히브리어)/‘프네우마’(그리스어) 를 “엘리야의 역사”라고 새긴 개역개정이나 “엘리야의 능력”이라고 번역한 새번역은 모두 의역이다.
6 21절은 에프렘 재생 사본 등 5세기 이후 필사된 대문자 사본들과 비잔틴 계열 사본들에 나오지만 시내 사본, 바티칸 사본과 시리아어, 콥트어 역본 등 초기 사본들에는 없다. 이 구절이 원문에 있었다면 필사자들이 굳이 누락할 이유가 없고, 반대로 원문에 없던 것을 마가복음 9장 29절을 따라 후대 필사자들이 삽입해 넣었을 확률이 높기 때문에 네스틀레-알란트 등 현대 비평본(과 그것을 대본으로 한 거의 모든 현대 역본들)에는 21절을 본문에 포함하지 않는다.


조재천 | 예일대학교와 노트르담대학교에서 신약학을 공부하였다. 저서로 『그리스도인을 위한 통독 주석 시리즈-히브리서』가 있다. 현재 전주대학교 조교수로 재직 중이다.

 
 
 

2021년 4월호(통권 74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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