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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me > 기독교사상 > 성서와설교 > [예수에게 길을 묻다 10]
성서와설교 (2021년 4월호)

 

  산상설교의 안티테제와 인간 완성의 길
  

본문

 

모세가 네 조상들에게 이른 말은 너희가 들은 대로다. ‘살인하지 말라. 살인한 자는 재판에 넘겨진다.’ 하지만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자기 형제에게 성을 내는 자는 누구나 재판에 넘겨질 것이다. 그리고 자기 형제에게 ‘라가!’라고 하는 자는 산헤드린 최고 법정에 넘겨지고, ‘미련한 놈!’이라고 하는 자는 불타는 지옥에 던져질 것이다. 그러므로 제단에 제물을 바치려고 하다가, 형제가 너에게 원망을 품고 있는 것이 떠오르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놓아두고 물러가 먼저 그 형제와 화해하여라. 그런 다음 돌아와 예물을 바쳐라.(마 5:21-24, 이하 필자 사역)
You have heard that it was said to your ancestors, ‘You shall not kill, and whoever kills will be liable to judgment.’ But I say to you, whoever is angry with his brother will be liable to judgment, and whoever says to his brother, ‘Raqa,’ will be answerable to the Sanhedrin, and whoever says, ‘You fool,’ will be liable to fiery Gehenna. Therefore, if you bring your gift to the altar, and there recall that your brother has anything against you, leave your gift there at the altar, go first and be reconciled with your brother, and then come and offer your gift.(Mt 5:21-24, NAB)


1. 큐복음에 채록된 예수의 육성에 가까운 말씀들은 대략 300절 정도 된다. 큐의 예수말씀들은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 본래 모습이 거의 유지된 채 전승되고 있다. 복음서의 저자 누가는 예수말씀을 큐의 순서에 따라 복음서 전체에 폭넓게 배치하고 있고, 이와 달리 마태는 모세의 율법 전통이 강한 디아스포라 유대인 교회 공동체의 편집 의도에 따라 큐를 한군데로 모아 수록하고 있다. 이른바 산상설교로 불리는 그 대목이다.(5-7장)
유대인들은 민족의 정체성을 선민의식에서 찾는다. 그들만이 하나님으로부터 특별히 선택되어 율법(토라)을 하사받았다고 생각했다. 율법은 파라오의 종살이에서 벗어난 이스라엘 해방공동체를 지탱하기 위해 주어진 생활 규율이었다. 그것은 야훼와 이스라엘 사이에 맺은 계약 (covenant)의 산물이다. 계약 내용은 야훼는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되고, 이스라엘은 야훼의 백성이 된다는 것이었다. 계약 체결에는 쌍방에 의무와 책임이 주어진다. 이스라엘에 주어진 의무는 하나님의 법, 곧 율법을 지키는 일이었고, 하나님의 의무는 율법을 성실히 지키는 사람에게 복을 주는 것이었다. 이러한 계약 율법 속의 인과응보 사상을 일명 신명 기 사관이라 하는데, 이는 유대 역사의 근간을 형성하고 있다.
율법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다. 제의법(祭儀法, ritual law)과 양심법(conscience law, moral law)이다. 제의법은 이스라엘과 하나님의 바른 관계를 설정하기 위한 율법이다. 하나님께서 기쁘게 받으실 예물을 바쳐서 벌을 피하고 복을 구하려는 것이 제의법의 특징이다. 예루살렘 성전 의 희생제사가 대표적이다.
제의법과 달리 양심법은 이스라엘 해방공동체 구성원 사이에서 올바른 인간관계를 유지하기 위한 규율이다. 양심법은 어떻게 사는 것이 인간답게 사는 길이고 공동체 전체에 유익을 가져오는 길인가를 보여준다. 이 두 가지 율법은 원래 상호 보완적이다. 이는 예수의 최고 계명인 경천애인(敬天愛人)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마 22:37-40Q, 막 12:28-34) 하지만 예수 시대 유대 사회에서는 어떠했는가? 율법은 제의법만을 의미했고, 양심법은 뒷전이 되었다. 바리새파는 하나님의 복을 구하기 위해서는 그분이 기뻐 받으실 제물을 드리는 것이 우선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당대 바리새파 유대교는 제의법을 생활화하는 운동을 펼쳤다. 십일조 생활, 안식일 준수 등 613개의 율법 조항을 철저히 실천하는 운동을 벌였다. 제의법을 준수하는 일이야말로 복 받는 비법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이러한 당시 상황은 예수가 바리새파를 비판하는 장면에서도 나 타난다. “화가 있어라, 너희 위선자, 서기관과 바리새파들아! 너희는 박하와 회향과 뿌리채소의 십일조까지 바치는 일에는 열과 성을 다하면서, 정작 정의와 자비와 신실과 같은 율법의 더 중요한 부분을 지키는 일은 무시하고 있구나. 십일조 바치는 것도 중요하다.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일을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마 23:23)
본문에서 예수는 제의법을 준수하는 것도 필요하지만, 양심법을 실천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말하고 있다. 정결법 규정이 엄격했던 유대 사회를 거슬러 예수는 모든 음식에 더럽고 깨끗한 것이란 따로 없다고 했다.(막 7:19) 더럽고 깨끗함은 단지 마음의 문제일 뿐이라고 본 것이다.

2. 예수의 심법(心法)이 가장 온전하게 드러난 곳은 산상설교이다.(마 5-7장) 산상설교에는 이웃과 나를 ‘둘이 아닌 한 몸’(不二一體)으로 보았던 예수의 심법이 담겨 있다.
산상설교의 대상은 누구인가? 제자들과 예수를 따랐던 군중(오클로스, Ochlos)이다.(마 7:28) 오클로스는 예수의 하나님 통치 운동 초기부터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던 사회의 소수자들이었다.(마 4:24-25)
산상설교의 앞뒤 맥락을 살펴보자. 예수의 공생활(公生活)은 그의 수세(受洗)에서 시작된다.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을 때 예수는 하늘이 열리는 신비체험 중에 득도(得道)하게 된다. 예수는 성령 체험을 통해 자신이 하나님의 영을 모신 ‘영적 존재’라는 깨달음을 얻었고, 천어(天語)를 들음 으로써 신인(神人, 테이오스 아네르) 의식을 갖게 되었다.(마 3:13-17Q)
자신의 본성인 참나가 성령임을 깨닫게 된 후 예수는 성령 참나의 힘으로 살아간다. 참나 성령은 예수를 통해서 자기의 뜻을 펼친다. 예수는 참나 성령에 이끌려 광야로 나간다. 40일 동안 단식을 하면서 ‘에고(ego) 나’와의 치열한 내적 투쟁을 겪는다. 이때 사탄이 등장하여 예수에게 하나님의 아들임을 천하에 드러내라고 유혹한다. 돌을 빵으로 만드는 기적을 행하고 배고픔을 면하라는 것이다. 하지만 참나 성령의 능력으로 예수는 사탄의 유혹을 물리친다. “사람은 빵으로만 사는 게 아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산다.” 이것은 ‘에고 예수’의 말이 아니다. 참나 성령이 예수의 입을 빌려 하는 말이다.(마 4:1-11Q) 하나님의 아들 됨은 기적을 통해서가 아니라, 앞으로 산상설교에서 제시될 ‘말씀’에 순종하는 삶에서 입증된다는 것이다.
그 후 신인 의식을 갖게 된 예수는 갈릴리로 발길을 돌려 호숫가의 가버나움으로 간다. 그곳을 하나님 통치 운동의 본거지로 삼고, 뜻을 함께할 동지와 제자들을 규합한다. 예수는 제자들과 함께 갈릴리 지역을 주유(周遊)하며 하나님 통치가 임박했음을 전파하고, 그 징표로 갖가지 질병에 시달리는 사람들을 치료해준다. 그 소문이 갈릴리를 비롯하여 팔레스타인 전역으로 퍼져나가자, 많은 사람이 그 소문을 듣고 예수에게 몰려든다. 예수는 산에 올라 이들에게 가르침을 펼친다.(마 4:18-25)
“예수께서 입을 여시어 그들을 이렇게 ‘가르치셨다.’(에디다스켄)”(마 5:1-2) 예수의 하나님 통치 운동은 기적 체험보다 더 중요한 것이 ‘말씀’임을 상기시켜 준다. 예수의 설교는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축복 선언으로 시작된다. “복이 있어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3절) 이것은 명령이 아니라 축복이다. 가난은 죄요 불행이라는 당대 사회적 통념이 지배하는 현실 속에서 마음이 가난한 사람에게 복이 있다고 선언한 것이다. 이는 기존의 사회적 가치체계의 종결을 뜻한다. 하늘나라에 합당한 사람이 누구인가? 예수는 율법을 잘 지키는 사회의 모범생들이 아니라고 말했다. 사회적 소수자들이 하늘나라의 수혜자라고 선언한 것은 당대의 신앙 가치관을 뒤집어놓은 것이다.
참 행복의 길(3-12절)을 설교하신 후 예수는 제자들을 향하여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요 빛이다.”라고 선언한다.(13-16절) 이 말씀에서 서술법(indicative)은 명령법(imperative)을 담고 있다. ‘소금과 빛이다.’라는 서술은 세상의 부패를 방지하고 어둠을 밝히는 ‘소금과 빛으로 살라.’는 명령을 담고 있다.
이어서 예수는 자기가 온 것은 율법을 완성하러 왔음을 천명한다. 이 말씀은 마태공동체 구성원들이 율법에 대하여 호의적이었음을 반영하고 있다. 그러나 예수는 제자들에게 말한다. “너희 의로움이 서기관과 바리새파의 그것을 능가하지 않으면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마 5:20) 바리새파의 의로움은 무엇인가? 생활 속에서 율법 조항을 지키는 것이다. 바리새파를 능가하는 예수의 제자들이 행해야 할 의로움이란 무엇인가? 예수는 그것을 안티테제(antithesis)에서 보여준다.

3. 산상설교 속 안티테제는 ‘에쿠사테(you have heard)-에고 데 레고(but I say to you)’ 문법 구조로 되어 있다.(마 5:21-48) ‘너희는 그렇게 들었다. 하지만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의 구조이다. 예수께서 유대 민족의 최고 권위자인 모세에게 이의(異義)를 제기하고 있다는 뜻에서 이 본문에는 안티테제(반대 명제)라는 별명이 붙었다.
모세가 네 조상들에게 이른 말은 너희가 들은 대로이다. ‘살인하지 말라. 살인한 자는 재판에 넘겨진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자기 형제에게 성을 내는 자는 누구나 재판에 넘겨질 것이며, 자기 형제에게 ‘라가!’라고 하는 자는 최고 법정에 넘겨지고, ‘미련한 놈!’이라고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던져질 것이다.
율법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 먼저 안식일 논쟁을 간단하게 살펴보자.(마 12:1-8Q, 참조 막 2:23-28) 안식일에 예수께서 밀밭 사이를 지나가시는데, 제자들이 밀 이삭을 잘라 비비기 시작했다. 배가 고파서였다고 한다. 이를 본 바리새파가 왜 당신의 제자들은 안식일 법을 어기는가 하고 따진다. 예수가 응수한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자비이지 희생제물이 아니기에, 제자들의 행위는 안식일 법에 저촉되는 것이 아니다.”
앞에서 율법에 제의법과 양심법이 있다는 것을 언급했다. 자비가 양심법에 속한다면, 희생제물은 제의법에 속한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희생제물이 아닌 자비이다. 제의법의 본질이 양심법이라는 것이다. 두 법이 충돌할 때, 본질인 양심법을 따르는 것은 율법을 어긴 것이 아니다. 따라서 배고픔을 해결하기 위한 제자들의 행위는 율법을 어긴 것이 아니다. 예수의 생각이다.
예수는 바리새파의 비난을 반박하면서, 안식일이 존재하는 이유는 사람 때문이며(막 2:27) ‘사람의 아들[人子]이 안식일의 주인이다.’라고 말한다. 본말(本末)이 뒤바뀌어서는 안 된다는 선언이다. ‘사람의 아들’은 하나님의 통치를 인격화한 집합 개념이다. ‘하나님의 심부름꾼’ 정도로 해석하면 될 것이다. 본문에서 예수는 사람의 아들과 스스로를 일치시킨다. 에고의 나가 아닌 참나를 하나님 통치의 화현(化現)인 사람의 아들로 본 것이다.
바울은 자기가 한 일을 두고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한 일’ 또는 ‘그리스도께서 나를 통해 하신 일’이라고 말한다.(롬 15:17-18)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것이다.”라고 말하기도 한다.(갈 2:20, 참조 요 15:4) ‘내가 그리스도 안에(엔 크리스토), 그리스도가 내 안에(엔 에모이)’라는 바울의 불이변증법적(不二辨證法的) 자기 이해는 그리스도를 참나로 여기고 있음을 보여준다.
예수에게 참나는 성령이요 사람의 아들이었다. 바울에게 참나는 그리스도요 성령(고전 6:19)이었다. 예수와 바울에게서 볼 수 있는 이러한 참나 의식은, 인간이 본래 하나님의 유전자를 갖고 태어난 신적 존재(테이오스 아네르)임을 깨닫게 해준다.

4. “살인하지 말라. 살인하면 재판에 넘겨질 것이다.” 모세가 동해보복(同害報復)의 원칙하에서 살인의 행위와 결과를 중요시한다면, 예수의 안티테제는 살인의 동기와 마음 상태를 중요시한다. 모세의 율법은 물리적인 의미에서 살인을 하지 않았으면 법정에 설 필요가 없다고 말한다. 하지만 예수는 이와 다르게 본다. 사람을 죽이지 않았다 해도, 형제에게 분노와 미움을 품고 있는 것 자체가 최고 법정에 넘겨지거나 불타는 지옥에 던져질 범법(犯法) 행위라는 것이다. 언행으로 표현되기 전이라도, 양심에 반하는 비윤리적인 생각을 품는 것조차 재판에 넘겨질 범죄 행위로 보아 경계하도록 했다. 예수는 간음 이전에 마음에 음욕을 품는 것 자체를 범죄 행위로 보아 금지시켰다. 그런 면에서 볼 때 예수는 마음공부를 소홀히 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형제에게 ‘라가’라고 욕하면, 산헤드린 최고 법정에 넘겨질 것이다. ‘라가’는 인격을 모독하는 ‘바보 멍청이’라는 의미의 욕설이다. 형제에게 ‘미련한 놈!’이라고 말하는 사람은 불타는 지옥에 던져질 것이다. 상대방에게 감정이 섞인 욕설을 퍼부어 마음에 상처를 입힌다면, 그 자체가 재판에 넘겨질 범법 행위로 여겨지는 것이다. 마음에 음욕을 품는 것 자체가 간음죄를 범한 것과 같다. 예수의 심법(心法)이다.

5. 성서는 원수를 사랑하라고 말한다.(마 5:44) 원수란 무엇인가? ‘에고 나’에게 해를 입힌 대상이다. 따라서 이해득실이나 동해보복의 원칙에 따라 움직이는 ‘에고 나’ 차원에서 보면 상대방을 미워할 수밖에 없다. 하나님의 명령이라 해도 따르기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원수를 사랑하라는 예수의 말은 불가능의 가능성(impossible possibility)을 요구하고 있다. 어디에 기반을 두고 한 말인가? 존재의 기반, 곧 어디에 근거해서 말하고 생각하느냐의 문제이다. 이는 존재의 근거를 ‘에고 나’에서 ‘참나 성령’으로 바꾸지 않으면 불가능하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계명은 행위의 변화가 아니라 존재 기반의 변화를 요구한다.
하나님 나라와 부자의 관계에 대한 비유가 있다.(마 19:16-26) 부자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보다 낙타가 바늘구멍으로 빠져나가는 것이 쉽다고 한다. 그러면 ‘누가 구원을 받겠는가?’ 제자들의 물음에 예수가 답한다. “사람에게는 그것이 불가능하지만(impossible), 하나님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possible).” 존재의 기반을 ‘에고 나’에서 ‘참나 성령’으로 바꾸면 가능하다는 것이다. ‘에고의 나’의 힘으로 살지 말고, ‘참나 성령’의 힘으로 살면, 불가능을 가능하게 할 수 있다는 말이다.
원수를 사랑할 수 있는 힘, 곧 불가능을 가능하게 하는 힘은 무엇일까? 사마리아인의 비유(눅 10:29-37)에서 그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당시 유대인과 사마리아인은 상종하기를 꺼리는 원수지간이었다.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는 길에서 강도를 만나 사경을 헤매는 유대인 원수를 보고 사마리아인은 어떠한 반응을 보였나? 무슨 힘이 그로 하여금 원수를 사랑하도록 했는가? 단지 “불쌍한 마음이 들어서”(with compassion)라고 했다.(눅 10:33) 측은지심이다. 하나님이 태초에 모든 인간의 마음속에 새겨놓은 천명(天命)인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불가능을 가능하게 만든 것이다.
수운 최제우는 득도 체험에서 인간의 본래 마음과 하나님의 마음이 동일함을 깨달았다.(吾心卽汝心) 그는 하나님을 모신 시천주(侍天主)에서 인간다운 인간의 본모습을 보았다. 인간은 태생적으로 ‘영적 존재’라는 것이다. 이를 깨닫고 시천주라는 영적 존재로 사는 것이 동학의 사인여천(事人如天) 사상이다. 이는 동학의 영성 휴머니즘이다.
참나가 성령임을 깨닫고, 참나 성령에 존재의 기반을 두고 살면서, 그 힘으로 원수를 사랑하라는 예수의 명령을 수행하는 것, 불가능을 가능하게 만들어가는 것, 이것이 바리새파의 의로움을 능가하는 삶, 이 세상의 빛과 소금으로 사는 삶, 하나님 자녀로서의 삶인 것이다. 이는 곧 하나님의 심부름꾼으로 오신 예수를 따라 하늘 아버지의 완전하심을 닮아 인간 완성을 성취하는 삶이다. 영성 휴머니즘 지평에서 예수의 심법과 동학의 심법은 서로 만난다.

6.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만물을 창조하셨다(바라), 무에서 유를 창조하셨다(creatio ex nihilo)고 말하는 창세기 1장 1절은 기독교 창조신앙의 뿌리이다. 원래 ‘없음’이 내 존재의 그루터기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없음에서 있음으로 나를 불러내신 것이 천지만물이 존재하게 된 이유이며 동기이다. 무에서 유로 초대받아 나의 현존이 가능하게 된 것이다.
없음은 둘이 아니다. 하나이며 전체이다. 하나님도 둘이 아니다. 하나이며 전체이다. 한 뿌리에서 나온 것이 나와 너이고, 천지만물은 뿌리로 파고들면 하나이지만, 현상으로 보면 여럿이다. 우리 모두는 한 분 하나님에게서 나와 한 몸을 이루고 있는 여러 지체들이다. 화엄경이 말하고 있는 ‘일즉다 다즉일’(一卽多 多卽一)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우주의 실상 이며 존재의 참모습이다. 그러니 “하나는 여럿을 위하여, 여럿은 하나를 위하여”(one for all, all for one) 있는 것이 존재의 소이연(所以然)이다. 이러한 우주 전체 실상을 나로 삼는 우주적인 나, 곧 참나 성령의 안목에서 볼 때 원수란 있을 수 없다. 서로 다름만 있을 뿐이다. 다름이 서로 조화를 이루는 화이부동(和而不同)의 화엄세계만 있을 뿐이다.
원수는 ‘에고 나’의 산물이다. 이해득실에 따라 움직이는 ‘에고 나’에서 ‘참나 성령’으로 존재의 기반을 옮겨 생각하면 원수는 사라지고,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또 다른 나의 모습을 원수에게서 보게 될 것이다. 이와 같이 예수는 우리에게 참나 성령을 존재의 기반으로 삼고 하나님의 뜻을 펼쳐나가는 삶을 경영하라고 촉구한다.

김명수 | 성균관대학교와 한국신학대학을 졸업하였으며, 독일 함부르크대학에서 예수말씀복음 큐(Q)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Dr. theol.) 지은 책으로는 『큐복음서의 민중신학』, 『역사적 예수의 생애』 등이 있다. 경성대학교 명예교수이며, 충주에 있는 노인요양시설 ‘예함의집’에서 치매 어르신들을 돌보는 일을 하고 있다.

 
 
 

2021년 4월호(통권 74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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