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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me > 기독교사상 > 성서와설교 > [르네 지라르의 성서 읽기 02]
성서와설교 (2021년 3월호)

 

  창세기 3장, 뱀의 유혹과 인간의 타락
  

본문

 

에덴동산의 이야기는 이른바 태초의 시간에 벌어진 사건을 묘사하고 있다. 성서의 태초는 물리적 시간의 처음을 가리킨다기보다는 질서와 무질서의 기원에 관한 이야기이다. 창세기는 존재의 기원과 바탕을 이루는 것이 하나님의 선한 힘임을 전하면서, 동시에 세상의 혼란과 고통의 기원에 사람의 타락이 있음을 말한다. 본래의 세상은 질서와 조화를 이루어 모든 게 좋았는데, 하나님과의 위계질서를 어긴 사람의 타락으로 인해 재앙과 고난이 생겨났다. 그것이 창세기 3장까지의 이야기이다. 이어서 4장에는 가인이 아벨을 죽이는 살인 사건이 발생한다.
태초의 이야기를 통해 성서는 재앙과 악의 기원이 신에게 있지 않고 인간에게 있음을 말한다. 그 점에서 성서는 신들의 전쟁과 폭력을 통해 세상이 만들어졌다고 보는 바빌로니아 신화와 다르다. 성서는 선과 악의 두 모습을 지닌 신들의 이야기를 전하는 페르시아 신화나 그리스 신화와도 다른 세계관과 인간관을 보여준다.
에덴동산의 선악과 사건에 대한 지라르의 해석도 크게 보면 위에서 언급한 전통적 해석의 틀 안에서 이루어진다. 이번에 연재하는 글들은 지라르가 직접 성서 본문에 대해 언급한 내용에 필자가 신학적인 보충을 가해서 완성된 것들이다. 또한 지라르의 직접적 언급은 없지만 모방욕망 이론이 지닌 신학적인 의미를 살려서 필자가 성서를 해석한 부분도 많다.

하나님처럼 되리라

창세기 3장은 첫 인간 아담의 타락 이야기이다. 지라르는 모방욕망 이론으로 이 부분을 해석한다. 아담은 하와를 따라했고, 하와는 뱀의 말을 따랐다.
뱀이 하와에게 말을 건다.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3:5) 선악과를 따 먹고 싶은 하와의 욕망은 선악과 때문이 아니라 뱀의 유혹 때문에 생겨났다. “뱀이 나를 꾀므로 내가 먹었나이다.”(3:13) 뱀의 유혹은 “하나님처럼 되리라”는 모방의 유혹이다.
중요한 것은 뱀이 하나님을 인간의 경쟁자로 만들었다는 점이다. 뱀의 말에 따르면, 하나님은 사람이 자기처럼 될 것을 두려워하여 선악과를 먹지 말라고 명령한 셈이 된다. 자식을 경쟁자로 여기고 집어삼킨 그리스 신화의 우라노스와 크로노스를 연상케 하는 대목이다. 경쟁자는 서로를 모방한다. 뱀의 말처럼 하나님이 인간을 경쟁자로 여기면, 인간 역시 하나님을 자신의 경쟁자로 알게 되고, 하나님처럼 되고 싶은 욕망이 생겨난다. 하와의 모방욕망은 하나님을 인간의 경쟁자처럼 보이게 만든 뱀의 속삭임 때문에 생겨났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간의 경쟁자가 아니다. 금지 명령을 통한 인간과 하나님의 위계질서는 인간의 자유를 위한 것이었다. 인간은 결코 하나님이 될 수 없다. 그러므로 하와의 욕망의 대상은 환상일 뿐이다. 다시 말해서 하와의 모방욕망은 맹목적인 것이다. 인간은 자기에게 정말 좋은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고 남이 가진 것을 가지고 싶어 하는 맹목적 모방욕망에 의해 행동한다. 맹목적 모방을 향한 인간 내면의 소리, 그것이 하와를 향한 뱀의 속삭임이다.
지라르에 따르면, 뱀은 서양 문학의 상징적 동물로서 ‘우로보로스’라고 불린다. 우로보로스는 자기 꼬리를 물어 동그랗게 되는 뱀이나 용을 가리킨다. 따라서 뱀은 어디서부터 시작되었는지 모르게 서로 꼬리를 문 채 돌고 도는 인간의 모방욕망의 흐름을 가리킨다. 그 욕망의 순환에서 욕망의 대상은 실체가 없다. 남이 원한다는 것, 그 사실이 욕망을 결정하는 가장 결정적인 원동력이다.
그러므로 뱀의 유혹을 받은 하와는 이미 실체 없는 대상을 놓고 남들과 서로 물고 물리게 될 그런 욕망의 흐름 속으로 들어간 것이다. 선악과가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3:6)로 보인 것은 하와가 뱀의 유혹을 받은 후이다. 본래 하와는 선악과를 먹고 싶다는 욕망을 가지지 않았다. 하나님처럼 되고 싶은 모방욕망에 의해 비로소 선악과는 탐스럽게 보였다. 선악을 아는 하나님의 지혜를 자기도 갖고 싶다는 욕망이 선악과를 탐스러운 대상으로 만들었다.
선악과가 보암직도 하고 먹음직도 하다는 것은 있을 수 있는 일이다. 원래 하나님이 동산을 만드셨을 때에 모든 나무를 보기 좋고 먹기 좋게 만드셨기 때문이다.(2:9) 그러나 선악과가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게’ 보인 것은 오로지 뱀의 말의 효과이다. 누가 먼저 시작했는지 모르게 서로 꼬리를 물고 돌고 도는 욕망은 남의 욕망을 그대로 베낀 것이다. 무엇이 자기에게 좋은지 나쁜지 가리지 못하고, 욕망의 대상이 없이 남의 매개를 통해 남들이 바라는 것을 바라는 맹목적 모방욕망의 시초가 하와와 아담에게서 보인다.

아담–이웃을 따르는 인간

아담은 하와의 이웃이다. 우리말의 이웃은 가족이 아니라는 의미를 품고 있지만, 전통적으로 신학자들은 아담과 하와의 관계를 가족의 탄생일 뿐 아니라 사회생활의 시작으로 보기도 했다. 이것은 사회와 국가를 구분하려는 오래된 기독교 정치철학의 산물이기도 하다. 인간은 처음부터 타자와 더불어 사회생활을 하도록 만들어졌지만, 정치권력이 존재하는 국가는 인간의 타락 이후에 죄의 열매로 생겨났다. 그것이 교부들과 종교개혁자들의 성서적 세계관이었다.
여하튼 하와가 아담의 짝임을 표현하는 언어로 신학자들은 라틴어 ‘소시아’(socia)를 썼으니, 아담과 하와는 사회 속의 이웃인 셈이다. 여기에는 기독교의 개인주의적인 사고방식도 반영된 것으로 보이는데, 이 점에서 기독교의 가족관은 동아시아의 가족관과 다르다. 동아시아에서는 가족을 끈끈한 사랑으로 이루어진 이상적 혈연 집단으로만 보고 국가도 가정의 연장으로 보려고 했다. 부부나 부모자식을 서로 독립된 인격체로 보는 시각은 동아시아에서는 자칫 패륜의 비난을 받을 수 있 었다.
아담의 욕망은 이웃을 매개로 이루어졌다. 하와가 뱀의 속삭임을 따라 선악과를 먹은 후에 아담은 하와를 따랐다. “여자가 그 열매를 따 먹고 자기와 함께 있는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3:6) 아담은 하와가 먹음직스럽게 생각하여 준 선악과를 같이 먹었다. 욕망이 하와에게서 아담에게 전달되고 아담은 아주 자연스럽게 하와를 따라서 먹는다. 인간을 지키고자 하는 하나님의 금지명령은 원래 아담이 받았지만, 이웃을 따라하는 모방욕망 앞에서 진리는 무색하게 되었다.
지라르가 볼 때에 이 모든 것은 모방욕망의 흐름을 가리킨다. 욕망의 모방은 일부러 노력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매우 자연스럽게 무의식적으로 이루어진다. 사람은 자기가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모른다. 아담은 선악과가 탐스럽게 보여서 먹는다고 생각하겠지만, 선악과를 탐스럽게 만든 것은 하와이다. 아담은 이웃을 따라했고 이웃의 가치판단을 물려받았을 뿐이다.
아담이 하와의 뒤에 등장했다고 해서 하와의 죄를 아담보다 크다고 보는 것은 성서의 의미와 무관하다. 그런 주장은 여성을 희생양으로 삼았던 중세의 해석일 뿐이다. 하와는 모방욕망의 창시자가 아니며 하와 이전에 이미 인간 대중의 잠재적 모방욕망이 뱀의 형태로 존재했다. 아담과 하와는 똑같다. 그들은 하나님 앞에 단독자로 서지 못하고 모두가 하나같이 남의 욕망을 자신의 욕망으로 삼아 남에게 종속되는 인간을 묘사한다. 모방이론의 관점에서 보자면, 인간이라는 뜻을 가진 아담을 하와 뒤에 배치함으로써 성서는 인간이 이웃을 매개로 불특정 다수의 욕망의 바다로 빠져든다는 점을 더욱 명확하게 했다고 볼 수도 있다.
아담과 하와가 뱀의 유혹을 따라 선악과를 먹은 행위를 교회는 원죄라고 불렀다. 지라르에 따르면 인간의 원죄는 모방욕망과 연관이 있는 셈이다. 모방욕망 때문에 사람은 하나님에게 순종하지 않고 사람과 군중에게 순종하는 죄를 범한다. 죄는 결국 인간 자신을 불리하게 만드는 일이다. 죄가 곧 벌이라고 한 아우구스티누스의 말도 그런 의미이다. 가끔 인간은 모방욕망을 극복하고 자유의 경지를 누릴 때도 있다. 그러나 결코 그 뿌리를 뽑아낼 수는 없는 뿌리 깊은 죄의 성향이 모방욕망이다.

사탄

에덴동산에 등장하는 뱀을 교회는 전통적으로 사탄이라고 불렀다. 사탄의 정체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해석이 이루어졌지만, 지라르에 따르면 결국 인간의 경쟁과 질투를 불러일으키는 충동적 모방욕망이 사탄인 셈이다. 그런데 모방욕망을 사탄으로 보려면 지라르의 인류학적 설명에 신학적 사유를 더해야 한다. 다시 말해서 모방욕망의 초월적 지위가 확보되어야 모방욕망에 사탄이라는 신학적 이름을 붙일 수 있다.
지라르의 얘기를 잘 살펴보면 모방욕망의 초월적 지위를 가늠할 수 있다. 어떤 사람이 가지고 있는 것을 다른 사람이 가지고 싶어 하면 원래의 소유자는 자신의 소유물에 대한 욕망이 더 커지면서 방어적이 된다. 사물의 가치는 사물 그 자체에 붙어 있지 않고 얼마나 사람들이 그것을 원하느냐에 달렸다. 나보다는 남들이 얼마나 원하느냐가 사물의 일반적 가치를 결정한다. 이웃이 원소유자의 소유물을 부러워하면 소유물의 가치는 올라가고 소유자는 자신의 소유물에 대한 욕망이 더욱 커진다.
원소유자의 커진 욕망은 이웃의 욕망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원소유자 역시 자신의 소유물을 부러워하는 이웃의 욕망을 모방한다. 그러면서 원소유자는 이웃에게 방어벽을 쌓는다. 이런 현상을 다른 각도에서 보면, 이웃의 모델이 되는 원소유자는 자기를 모방하라고 명령하면서 동시에 모방하지 말라고 상대를 밀어낸다. 이것을 가리켜 지라르는 이중 명령(double bind)이라고 한다. 물론 원소유자가 이웃에게 모방을 명령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남들이 가지지 못한 것을 가진 것 자체가 남들의 부러움을 불러일으키고, 그것을 가리켜 모방명령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그리고 원소유자 역시 남들이 자기를 부러워하는 그 욕망을 모방하여 자신의 것에 대한 애착을 더하며, 그럴수록 남들은 그것에 대한 욕망을 더 키운다. 이처럼 사람은 서로 욕망을 끝없이 주고받아 키워가는 상호작용을 반복하면서 모두 하나가 되어 경쟁 관계가 형성된다. 결국 무얼 얻느냐는 중요하지 않고 오직 상대방을 이기는 것만 중요하게 된다. 그리하여 인간의 충동적 욕망의 힘은 급상승한다.
이처럼 상승된 모방욕망을 필자는 초월적 모방욕망이라고 부르겠다.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 전체가 하나가 되어 같은 것을 바라며, 모든 사람들이 한 마음으로 하나가 된 모방욕망은 개인들 위에서 개인을 지배한다. 온 세상이 그것을 바라므로 나는 생각할 필요도 없이 그것을 바라게 된다. 온 세상이 하나 되어 욕망하는 그 욕망을 아이는 부모를 통해 물려받고 교육받는다. 물론 일정한 경쟁의 룰을 지키도록 아이에게 도덕교육도 하지만, 기본적으로 경쟁을 통해 얻으려고 하는 대상은 거대한 인간 세상의 모방욕망의 결과물이다.
사람들 위에서 모든 사람을 지배하는 모방욕망의 이런 초월적 지위를 생각하면 지라르가 뱀으로 상징된 모방욕망을 사탄이라고 부르는 것을 이해할 수 있다. 사탄이란 적어도 인간을 지배하는 어떤 초월적 악의 힘을 가리키기 때문이다. 에베소서에서 “공중의 권세 잡은 자”(2:2)라고 표현한 것도 개인들 위에서 개인의 마음을 지배하는 집단적 죄의 힘을 가리킨다. 다시 말해서 사람들이 한 마음으로 자연스럽게 따르는 집단적 죄의 힘이 사탄이다. 집단적 죄의 내용은 여러 가지로 해석될 수 있지만, 적어도 지라르는 집단적 죄의 기원에 모방욕망을 두는 셈이다.
사탄은 개인을 초월하지만 사람을 초월하지는 않는다. 사탄의 공중권세는 인간 내부의 욕망의 힘들이 결집된 것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상호모방에 의한 욕망의 힘이 집단적 욕망을 형성해서 개인의 생각과 마음을 휘어잡고 있는 것이 사탄이다. 어디서부터 시작되었는지 모르게 서로 꼬리를 물고 물리는 과장된 욕망의 순환 관계 속에 처해 있는 점에서 개인은 세상의 죄의 희생자이다. 그러나 동시에 모든 개인은 세상의 욕망의 흐름에 동참하여 갈등과 폭력의 악순환을 이어가는 죄의 책임자이기도 하다. 공중에서 개인들을 통치하는 인간 세상의 집단적 죄의 권세에 개인들이 연루되어 있다. 구원의 희망은 그 집단적 죄의 고리에서 벗어나는 데 있다.
대체로 지라르는 개신교보다는 가톨릭을 좋아하지만 필자는 지라르에게서 루터를 많이 본다. 루터는 말했다. “세상과 대중은 언제나 비기독교적이다. 세례를 받은 기독교인이라고 해도 마찬가지이다.” 대중에게서 벗어나 참된 개인이 되어야 한다는 것은 지라르가 21세기 들어 진행한 여러 번의 대담에서 특별히 강조한 인간 구원의 길이다. 그는 그것이 기독교인의 자세라고 말한다. 그의 메시지는 교회를 개혁하고 기독교의 본질을 회복하고자 한 루터 신학의 복사판이다. 세상 나라와 하나님 나라의 긴장을 강화시킨 면에서도 지라르는 아퀴나스보다 루터를 많이 닮았다.

하나님이냐 사탄이냐

모방욕망이 그 자체로 사탄이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모방은 발전과 풍요의 원천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보면 문명 발전의 원동력에 사탄적 힘이 늘 같이 따라 다닌다고 해야 할지도 모른다. 동물이기를 벗어나 도구를 만들 줄 아는 ‘호모 파베르’로부터 근대의 기술발전을 이룬 ‘호모 테크니쿠스’에 이르기까지 모방욕망은 인간 세상에 한편으로 풍요를 가져왔고 다른 한편으로는 갈등과 전쟁을 몰고 왔다.
풍요와 파괴의 양면성을 가진 세상의 순환적 모방욕망이 사탄이 되는 이유는 그것이 인간을 하나님에게서 떨어뜨려 놓기 때문이다. 사람이 지닌 모방욕망은 처음부터 하나님을 따르지 않고 이웃을 따를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 아담과 하와가 뱀을 따른 것은 하나님에 대한 불순종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통치하는 하나님 나라와 대중의 욕망이 만든 정치권력이 통치하는 세상 나라는 처음부터 긴장 관계에 있다.
물론 세상은 하나님의 피조물로서 본래 좋은 것이다. “존재하는 것은 모두 선하다.”라고 한 아우구스티누스의 메시지는 기독교가 영지주의나 마니교 같은 이원론적인 종교와 달리 우주의 존재와 인생을 긍정하고 세상에 대한 책임감을 가진 종교임을 알려준다.
세상은 본래 좋은 것이지만, 그러나 사람이 하나님에게서 벗어났을 때에는 인간 세상이 사탄의 나라가 될 수도 있다. 기독교에서 세상이라는 말이 때때로 비판적 의미로 사용되는 까닭이 거기에 있다. 뱀의 유혹은 서로 꼬리를 물고 돌아가는 인간 세상의 모방욕망에 하나님까지도 포함시키려는 유혹이다. 아담과 하와가 그 유혹에 넘어갔음은 인간 세상이 하나님까지도 나쁜 모델로 만드는 함정에 빠졌음을 의미한다.
지라르가 말하는 나쁜 모델이란 맹목적 모방욕망을 불러일으키는 타자를 가리킨다. 그것은 경쟁과 상호갈등을 일으키고 사회적으로 늘 희생양을 요구한다. 이웃은 서로 나쁜 모델이 될 가능성이 많다.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는 우리 속담도 그 점을 잘 표현하고 있다. 인간은 타고난 모방욕망 때문에 어차피 모델이 필요한데, 갈등과 폭력으로 가지 않는 길은 좋은 모델을 좇는 데에 있다. 좋은 모델은 인간을 맹목적이지 않은 주체적 욕망으로 유도하며 세상에 참된 평화를 심을 힘을 준다.
신약성서로 가면 지라르는 예수 그리스도를 인간의 좋은 모델로 본다. 칸트는 예수를 인간의 원형이자 참인간의 모범으로 보았는데, 원형이나 모범이라는 말은 인간 속의 이념을 가리키기 때문에 지라르의 좋은 모델과 다르다. 지라르는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는 일을 중요하게 생각하는데, 그 일은 인간의 이성 능력으로 되지 않는다고 본다. 예수 그리스도는 폭력의 악순환을 평화의 선순환으로 만든 분으로 기독교인의 좋은 모델이다. 이 점에 대해서는 다음에 또 이야기할 기회가 있을 것이다.
그런데 지라르는 좋은 모델과 나쁜 모델을 태초의 아담과 하와에게도 적용한다. 사탄은 나쁜 모델이고 하나님은 좋은 모델이다. 태초에 인간에게 주어진 자유는 선한 모델을 택할 것인지, 악한 모델을 택할 것인지를 선택할 수 있는 자유이다. 하나님을 좋은 모델로 보는 지라르의 생각을 신학적으로는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하나님을 모델로 삼는다면 하나님의 어떤 모습을 닮게 된다는 말인가?
우선 하나님을 모델로 삼으려면 순종해야 한다.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을 모델로 삼고 순종했다면 선악을 아는 하나님의 지혜에 참여할 수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참여한다’라는 말을 써야 할 것 같다. 뱀의 말과 달리 사람은 하나님처럼 될 수 없으며 다만 순종을 통해 하나님의 선한 능력에 참여할 수 있으리라. 그러나 불순종으로 인하여 인간은 선악을 모르게 되었다는 것이 성서의 관점이다. 그러므로 순종했다면 선악을 아는 지혜를 어느 정도 가질 수 있었을 것이다. 지혜는 고대 신화에서 신들이 가진 힘의 근원으로 등장할 만큼 신적 속성을 지녔다. 고대의 동서양 인문주의자들이 세상의 평화를 위해 중요하게 요구한 인간의 덕목 또한 좋고 나쁨을 가릴 줄 아는 지혜였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원이라는 것이 성서의 해법이다.
그러나 인간은 하나님의 뜻을 거슬러 선악과를 따 먹음으로써 선악을 모르게 되었다. 선악과를 먹어서 인간이 얻은 것은 위장하지 않으면 살 수 없는 추락한 자신이었다. “이에 그들이 눈이 밝아져 자신들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로 삼았더라.”(3:7) 인격체를 가리키는 라틴어 ‘페르조나’나 그리스어 ‘프로소폰’은 모두 ‘가면’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한편 아담이 하나님을 모델로 삼았다면 하나님의 자유에 참여할 수 있었으리라고 볼 수 있다. 창세기의 아담이 하나님을 모델로 삼는 일은 사도 시대 이후의 인간들이 그리스도를 모델로 삼는 것과 조금 다르다.
모방욕망에는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남이 가진 것을 가지고 싶어 하는 소유의 모방이다. 또 하나는 소유의 모방욕망 때문에 발생하는 시기와 폭력을 서로 닮는 폭력의 모방이다. 그리스도를 모델로 삼는 일은 후자를 막는 일이다. 그러나 폭력의 모방을 벗어나서 평화를 심으려면 소유의 모방욕망도 어느 정도 정화되어야 한다. 하나님을 좋은 모델로 삼는 일은 그 문제와 관련이 있어 보인다. 만약 최초의 인간 아담이 하나님을 모델로 삼았다면, 그것은 참된 자유의 기원이라 할 수 있다.
인간이 하나님을 모델로 삼았을 때에 참여할 수 있는 하나님의 자유에 대해서 말하자면 출애굽기 3장 14절을 들 수 있겠다. 하나님의 정체를 묻는 모세에게 하나님이 말씀하신다. “나는 나다.”(I am who I am) 개역개정판 성서에는 그리스 철학의 존재론이 반영된 70인역을 따라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니라”로 번역되어 있다. 그러나 히브리 성서에 나오는 하나님의 정체는 “나는 나다.”로 표현된다. 이 말은 누구에게 자기를 설명할 필요가 없는 주권자를 가리키는 말이요, 또한 자기 대 자기의 관계에서 충만한 자기 정체성을 가진 존재를 가리킨다. 이 문장에 등장하는 히브리어의 미완료 동사가 하나님의 정체성을 더욱 풍부하게 하고 있음은 여기서 논할 문제가 아니다.
자신과의 관계에서 충만한 자기 정체성을 가지고 있는 하나님은 남의 욕망을 모방하여 자기 정체성을 만드는 인간과 다르다. 그러나 하나님을 모델로 삼고 하나님 안에 있다면 사람도 “나는 나다.”라고 말할 수 있다. 그것은 세상 나라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세상에 하나님 나라의 기초를 놓을 영적 능력을 가진 자유인의 선언이다. 이 문제는 루터가 기독교인의 자유와 관련해서 중요하게 생각한 부분이다. 루터는 남과의 관계보다 자기와의 관계가 우선한다고 보고, 하나님 앞에 선 인간의 자기의식에서 참된 자유가 탄생한다고 생각했다. 그것은 신율적(theonomy) 자유를 가리킨다.
루터 이후에 “나는 나다.”라는 선언은 데카르트를 거쳐 독일 관념론의 중심 명제가 되었다. 그런데 근대 철학의 “나는 나다.”라는 명제는 개인의식의 강화를 통해 자율적 주체성의 인간해방을 가져오기는 했지만, 근대의 자율은 타자의 고난에 대한 감수성의 결여로 문명의 위기를 초래했다. 인간은 오직 하나님 안에서 “나는 나다.”라고 말할 수 있으며, 그때에 가장 자유로워진다. 신율적 자기정체성이 가져오는 자유는 타자의 고통에 대한 책임감, 곧 사랑으로 이어지고 사랑이야말로 참된 자유를 낳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모델로 삼는다는 의미는 거기서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양명수 | 양명수 기독교윤리를 전공했다. 저서로 『아무도 내게 명령할 수 없다: 마르틴 루터의 정치사상과 근대』 등이 있다. 이화여대 기독교학과 명예교수이다.

 
 
 

2021년 3월호(통권 74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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