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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me > 기독교사상 > 성서와설교 > [오리게네스와 함게 마태복음 읽기 03]
성서와설교 (2021년 3월호)

 

  시온의 회복자 예수
  마태복음 15장 1-39절 해설

본문

 

마태복음 15장에는 네 개의 이야기가 들어 있다. 정결례에 관한 장로들의 전통 위반으로 촉발된 바리새인-서기관들과의 논쟁(1-20절)을 시작으로 가나안 여자의 믿음(21-28절), 치유 요약 기사(29-31절)가 이어진 후, 사천 명 급식 사화(32-39절)로 마무리된다. 이 내용은 모두 마가복음과 겹친다. 누가가 마가복음 6장 15절-8장 26절(오천 명 급식 사화부터 베드로의 신앙고백까지)의 내용을 통째로 누락한 것과 대조적으로(누가의 ‘대생략’), 마태는 마가복음이 서술하고 있는 예수의 갈릴리 사역을 충실히 따라가고 있다.

마태복음 15장 1-20절: 장로들의 전통

구조와 요점 15장 첫 단락에는 두 개의 소주제가 연결되어 있다. 첫 번째 주제는 정결례, 두 번째 주제는 음식법과 관련된다. 예수는 당시 유대인들의 삶을 규정한 대표적인 두 가지 관행을 비판하신다. 하지만 예수의 접근은 이론적이기보다는 실천적이다. 바리새인들은 제자들이 씻지 않은 손으로 식사함으로써 ‘장로들의 전통’을 위반했다고 지적했다. 이에 대해 예수는 고르반의 경우를 예로 들면서 장로들의 전통이 오히려 하나님의 뜻을 행하지 못하게 한다고 꼬집는다.
이어 음식법과 관련된 논박에서 예수는 음식법을 정결법의 맥락에서 파악하면서 의식적 부정(ritual impurity)과 도덕적 부정(moral impurity)을 대비시킨다. 대체 무엇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가? 사람의 입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입에서 나오는 것, 즉 마음에서 나오는 각종 악한 의지, 욕망, 그리고 언어가 사람을 더럽게 한다. 특정한 음식을 먹는다거나 음식을 먹기 전에 손을 씻지 않는 것이 악이라고 주장한 ‘장로들의 전통’은 허구이다.

오리게네스의 주석 오리게네스는 성서 본문의 작은 문구도 예사롭게 보지 않았다. 1절 첫 단어 “그 때”는 14장 말미의 상황을 가리킨다. 즉 게네사렛 근방에 있는 모든 병든 자가 예수께 나아왔고, 그의 옷자락에 손을 댄 모든 병자가 나았던 때를 말한다. 놀라운 치유의 능력을 보여주신 바로 그분께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시비를 걸고 있다. 그들이 제기하는 문제는 고작 ‘장로들의 전통’에 관한 것이다. 모세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율법이 아니다. 오리게네스는 여기서 모세 율법과 장로들의 전통을 구분한다. 둘 중 권위가 더 낮은 것은 말할 필요도 없이 후자이다. 그런 저등한 것에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집착하고 있다. 예수께서는 보다 본질적인 것을 다루신다. 예수께서 인용하고 옹호하는 모세 율법은 문자에 따른 율법이 아닌 올바른 이성에 대한 율법이다.
예수는 토라의 두 구절을 인용하신다.(4절) 하나는 부모 공경을 직접 명령하는 제5계명이고(출 20:12, 신 5:16), 다른 하나는 부모를 비방하는 자를 죽음으로 벌하도록 한 명령이었다.(출 21:17, 레 20:9) 고르반을 핑계로 부모 봉양을 소홀히 하는 것은 제5계명에 대한 위반이다. 또한 고르반을 가르치는 바리새인들은 자녀의 부양이 필요한 부모를 마치 ‘성전 도둑’ 취급하는 셈이다. 그렇게 해서 간접적으로 부모를 비방하도록 부추기는 것이다.
‘더러움’의 문제를 다루는 10절 이하 본문을 주석할 때 오리게네스는 하나의 원칙적인 관점을 제시한다. 악을 일으키는 것들을 금하고 덕과 관련된 것들을 실천하도록 규정하는 내용이야말로 하나님의 법의 핵심이다. 이 핵심에서 벗어난 것들, 즉 정결례나 음식법 등 모든 의식법(ceremonial laws)이 다루는 문제들은 ‘구분할 필요가 없는 것들’(아디아포라, ἀδιάφορα)이다. 구분할 필요가 없는 문제들은 중요하지 않은 문제들이고, 이를 주제로 논쟁하고 문제를 삼는 것이야말로 죄의 원인이 될 수 있다고 오리게네스는 경고한다.
음식 문제에 관하여는 신약성서 전반에 걸쳐 제시된 원리가 있다. 음식 그 자체는 어떤 것도 인간을 죄인으로 만들거나 죄에서 구원하지 못한다.(롬 14:1, 23, 고전 8:7-8, 10:20, 31, 골 2:16, 딛 1:15) 할례와 마찬가지로, 형식과 외관이 아니라 내면과 마음이 그 효력을 결정한다.(롬 2:25-26) 아울러 오리게네스는 두 가지 흥미로운 사례를 든다. 음식 혹은 음식을 취하는 행동이 때로 탐욕의 표현 수단이 된다는 점에서 바울은 “그들의 신은 배”(빌 3:19)라고 지적했다. 이후 중세의 이른바 7대 죄의 하나로 ‘탐식’(貪食)이 지목된 것도 비슷한 맥락이다.
또 다른 적용점은 주의 만찬이다. 신자들이 주의 만찬에서 먹는 빵과 포도주도 그것이 음식이라는 점에서 그 자체에 어떠한 마술적인 힘도 깃들어 있지 않다.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질’(딤전 4:5) 때 비로소 그것을 먹는 사람에게 유익이 된다. 빵은 빵일 뿐이다. 주의 만찬에서 선포되는 말씀, 그리고 그것을 먹는 사람이 합당하게 먹느냐가 주의 만찬의 효력을 결정한다.

마태복음 15장 21-28절: 가나안 여자의 믿음

구조와 요점 예수는 귀신들린 딸의 치유를 호소하던 가나안 여자를 세 번에 걸쳐 거부하신다. 처음에 예수는 ‘한 말씀도 대답하지 않았다.’(23절) 여자가 계속 소리지르자 예수는 제자들에게 자신이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양’에게로만 보냄 받았다고 대답하신다.(24절) 마침내 예수를 마주하고 도움을 요청하는 여자에게 ‘자녀의 떡을 취해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않다.’고 말씀하신다.(26절) 여자는 포기하지 않았고 예수의 관점을 정면으로 부정하지도 않으면서 개들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을 자격이 있다는 창의적인 응답을 덧붙인다.(27절) 그녀의 간절함과 끈질김 속에서 예수는 본성적 모성애 이상의 ‘큰 믿음’을 보신다.(28절)

오리게네스의 주석 오리게네스는 사소해 보이는 시간과 장소 표현들에서도 의미를 발견한다. 예수께서 게네사렛을 떠나 두로와 시돈으로 가신 이유가 무엇일까? 게다가 두로와 시돈 ‘지방’(τὰ μέρη, ‘부분들’)은 어디를 가리키는가? 가나안 여자는 어떻게 예수를 보자마자 ‘주 다윗의 자손’이라고 인정하게 되었을까? 그 인정은 그녀가 ‘그 지경에서 나왔다.’는 서술과 관련이 있을까? 이런 질문들로부터 흥미로운 주석적 관찰이 도출된다.
먼저 오리게네스는 이전 단락에서 예수의 반론이 ‘바리새인들에게 걸림이 되었다.’는 언급(12절)에 주목한다. 정결례 논쟁을 통해 바리새인들 사이에 예수에 대한 반감이 일어났고, 예수는 이를 인지하고 잠시 몸을 피하기 위해 게네사렛을 떠났을 것이다. 두로와 시돈은 갈릴리에서도 상당히 먼 해변의 도시이다. 예수 일행이 그 도시를 중심으로 한 지역 전체를 순회했을 가능성은 희박하다. 아마 그들은 갈릴리 북쪽 이방인 거주 지역 중 일부 지역에 잠시 머물렀을 것이다. ‘그 지경에서 나온’ 가나안 여자가 단지 소문에 편승해서 예수를 ‘주 다윗의 자손’으로 인정했다고 치부할 수 없다. 오리게네스는 동일한 칭호로 예수를 불렀던 복음서의 다른 세 사례를 함께 분석한다.(마 20:30, 8:29, 14:33) 28절에서 예수는 그녀의 ‘큰 믿음’을 확증하신다. 이것은 그녀가 ‘그 지경에서 나옴’으로써 이방 문화의 죄악된 분위기를 탈피하고 겸손하게 마음을 열었음을 의미한다.
본격적으로 본문 속 예수와 여자의 대화를 해설하면서 오리게네스는 ‘이방인=개’, ‘유대인=자녀’라는 구약성서에 기반한 신학적 명제를 기본 전제로 받아들이는 한편, 이방인 됨과 유대인 됨, ‘빵’과 ‘부스러기’의 알레고리적 의미를 탐색한다. 오리게네스는 예수께서 이미 15장 24절에서 천명하셨고, 24절에서 다시 한 번 확인하신 ‘유대인 우선성’이라는 선교의 원칙을 기억한다. 단, 그 유대인이 혈통적 유대인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그리스도를 더 이상 육체대로 알지 않기로 했다는’(고후 5:16) 바울의 관점을 취한다면, 유대인들은 로고스이신 예수와 혈통적으로가 아니라 지식으로 연관된 자들, 곧 ‘지식을 지닌 자들’(οἱ συνετώτεροι)이다. 예수께서는 일차적으로 그들을 구원하러 오셨다. 하지만 고린도전서 1장 21-28절의 상황처럼 하나님은 전도의 미련한 것을 사용하셔서 세상의 어리석은 자들을 택하사 지혜로운 자들을 부끄럽게 하신다. 가나안 여자에게 일어난 구원도 바로 그런 것이었다.
결국 개였던 가나안 여자는 자녀인 이스라엘에 마련된 은혜를 입었다. 오리게네스는 이 사건을 계기로 가나안 여자가 하나님의 자녀로 그 신분이 변했다고 보았다. 부스러기가 아니라 큰 떡덩어리를 받아 누렸기 때문이다. 이러한 변화는 오리게네스에게 개인의 내면과 인격에 일어난 실질적 개선을 의미했다. 즉 본래 개와 같이 사악함과 광기, 무례함과 뻔뻔스러움을 지닌 사람이라도 개가 부스러기를 꾸준히 먹듯이 부족하나마 하나님의 말씀의 부분적인 깨달음을 지속적으로 받는다면, 끝내 이성과 미덕을 내면화할 수 있다. 그 반대의 경우도 성립한다. 본래 아들과 같이 이성적이고 지식을 갖춘 사람도 게으름과 무관심을 통해 개의 처지로 떨어질 수 있다.

마태복음 15장 29-31절: 치유 사역 요약문

구조와 요점 마태복음의 치유요약문 중(4:23–24, 8:16, 9:35, 12:15, 14:35-36) 마지막인 이 요약문은 마가복음에 병행하지 않는다. 따라서 여기에 마태의 신학이 보다 뚜렷하게 나타난다고 볼 수 있다. 네 종류의 병증(말 못하는 사람, 장애인, 다리 저는 사람, 맹인)이 치유되었다는 묘사는 앞서 세례 요한에게 대답으로 제시된 다섯 종류의 병증 치유 묘사와 상당 부분 겹친다.(마 11:5) 이 특정한 치유 묘사와 함께, 치유받은 사람들이 ‘이스라엘의 하나님’께 영광돌렸다는 언급은 이사야 35장 5-10절에 묘사된 시온의 회복을 떠올리게 한다.
주석가들은 이 단락이, 이어지는 마태의 두 번째 급식 사화에 신학적 기반을 제공한다고 본다. 즉 기적적인 급식은 치유와 시온의 회복이라는 종말론적 사건의 한 양상이며, 예수는 시온을 회복하는 자 혹은 어쩌면 시온을 대체하는 구원자일 것이다.

오리게네스의 주석 오리게네스는 이 단락과 4장 23-24절의 치유요약문 사이의 유사점과 차이점을 면밀히 살핀다. 4장에서의 치유 사건은 그 장소와 대상이라는 측면에서 5장의 산상수훈과 구분된다. 4장에서 치유받은 무리는 산 위에서 제자들에게 베풀어진 높은 수준의 가르침을 받는 자리에 동참하지 못했다. 하지만 이제 15장에서 ‘산’은 제자들만의 교실이 아니라 치유의 현장이다. 또한 예수 앞에 모두가 모이는 곳이고, 그래서 그곳은 교회이다.
예수의 발 앞에 앉혀진 병자들은 세례를 받기 위해 준비하는 예비신자들(catechumens)이다. 약속들을 듣지 못하고 참 빛을 보지 못하고 이성에 따라 행하지 못하던 영혼의 병자들이 예수의 몸된 교회로 들어와 고침을 받는다. 이 지점에서 오리게네스도 현대의 주석가들처럼 이사야 35장 5-10절의 예언이 성취되고 있음을 지적한다. 그들이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찬양한 행동은 구약의 하나님, 유대인의 하나님이 또한 모든 민족의 하나님이심을 인정한 것이다.

마태복음 15장 32-39절: 사천 명을 먹이다

구조와 요점 만약 이 단락이 실제로 두 번째 일어났던 빵의 기적을 기록했다면, 얼마 전 거의 비슷한 기적을(14:13-21) 경험한 제자들이 어떻게 33절과 같은 의문(“광야에 있어 우리가 어디서 이런 무리가 배부를 만큼 떡을 얻으리이까?”)을 품을 수 있었는지를 대답하기가 어렵다. 그래서 대부분 현대 주석가들은 두 급식 사화가 실은 하나의 사건을 두 번 기록한 이중 기사(doublet)라고 이해한다.
표면적으로는 마가복음 혹은 마가가 사용했던 자료에 두 급식 사화가 기록되어 있었고 마태는 그 자료에 충실했다고 말할 수도 있다. 하지만 여기에서 마태의 신학적 관점 또한 감지된다. 앞에 나왔던 치유요약문(29-31절)과 함께 이 단락을 읽으면, 사천 명을 먹이신 예수는 시온을 회복하실 종말론적 구속자로 부각된다.

오리게네스의 주석 이 단락을 주석하는 오리게네스의 주안점은 오천 명을 먹인 사건과의 대비에 있다. 마태복음의 급식 사화 둘만 비교한 게 아니라 마가복음의 병행 본문, 오천 명 급식 사화가 기록된 누가복음과 요한복음도 종합적으로 살핀다. 오리게네스는 이곳의 무리가(사천 명) 다음과 같은 점에서 14장의 무리(오천 명)와 다르다고 설명한다.
먼저 사천 명은 광야가 아닌 산에 있었고, 하루가 아닌 사흘 동안 예수와 함께 있었으므로 그만큼 더 예수와 친밀했을 것이다. 오천 명을 먹이기 전 예수께서 ‘병자’를 고쳐주신 것과 달리 사천 명을 먹이기 전 특정한 네 종류의 장애인들을 고쳐주셨다는 점도 다르다. 전자가 보다 심각하고 총체적인 병증을 포함한다. 그리고 오직 여기서만 무리가 치유에 대해 놀라 하나님을 찬양했다. 첫 급식 사화에서는 제자들이 요청하고 예수께서 응답했지만, 여기서는 예수께서 주도적으로 무리를 먹이고자 하셨다. 사천 명에 대해서 그만큼 더 각별한 관심을 보이셨다고 할 수 있다. 오천 명을 먹일 때 예수께서는 빵을 들고 축복하셨지만(εὐλογέω), 여기서는 빵을 감사하셨다.(εὐχαριστέω) 후자는 이미 오리게네스 시대에 사용되고 있었던 ‘성만찬’(εὐχαριστία)이라는 용어와 직결된다. 첫 급식 사회에서 빵과 함께 생선 두 마리가 아니라 ‘몇 마리’(ἀπὸ τῶν ὀλίγων)를 먹었고, 다섯 덩어리의 빵을 먹고 남은 조각 열두 광주리를 남긴 것과 달리, 두 번째 급식 사화에서는 그보다 더 많은 일곱 덩어리를 먹고 더 적은 일곱 광주리만을 남겼다. 그만큼 로고스가 베푸는 어려운 가르침들을 사천 명이 더 많이 수용하고 이해할 수 있었음을 의미한다. 마지막으로, 빵을 받기 위해 풀 위에 몸을 기울인 오천 명과 달리, 사천 명이 땅에 앉았다는 사실에서 그들은 풀 같은 육체로 규정되는 무리가 아니라 땅의 모든 것을 밟고 행하는 보다 성숙한 이들이라고 오리게네스는 추론한다.

조재천 | 조재천 예일대학교와 노트르담대학교에서 신약학을 공부하였다. 저서로 『그리스도인을 위한 통독 주석 시리즈-히브리서』가 있다. 현재 전주대학교 조교수로 재직 중이다.

 
 
 

2021년 3월호(통권 74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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