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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me > 기독교사상 > 성서와설교 > [예수에게 길을 묻다 09]
성서와설교 (2021년 3월호)

 

  예수의 득도와 후천개벽 운동
  

본문

 

백성이 모두 세례를 받았다. 예수께서도 세례를 받으시고, 기도하시는데, 하늘이 열리고, 성령이 비둘기 같은 형체로 그의 위에 내려오셨다. 그리고 하늘로부터 소리가 났다.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다. 내가 너를 좋아한다.”(눅 3:21-22, 표준새번역)
When all the people were being baptized, Jesus was baptized too. And as he was praying, heaven was opened and the Holy Spirit descended on him in bodily form like a dove. And a voice came from heaven: “You are my Son, whom I love; with you I am well pleased.”(Lk 3:21-22, NIV)


공관복음서 자료비평 이야기

신약 정경(正經)에는 역사적 실존인물 예수의 생애와 말씀을 주요 내용으로 담은 네 권의 복음서가 있다. 복음서들을 비교하며 읽다 보면, 서로 중복되는 내용이 다수 발견된다. ‘내용이 중복되는 복음서가 굳이 4권이나 있을 필요가 있을까? 예수의 자전적(自傳的) 내용을 담은 한 권의 복음서만 있으면 족한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실제로 2세기 중엽에 이러한 의식을 가진 사람이 있었다. 시리아의 타티아누스(Tatianus)이다. 그는 ‘말씀이 육이 되어 우리 가운데 머물렀다.’는 요한복음 1장의 로고스 그리스도론을 뼈대로 삼아, 복음서들 가운데 중복되는 내용을 추려서 한 권의 복음서로 만들었다. 『디아테사론』(diatessaron)이 그것이다. 이 책은 일종의 통합 복음서인 셈인데, 5세기 말까지 시리아 교구의 지역 교회들에서 많은 사랑을 받았다.
『디아테사론』은 신약성서 비평연구사 지평에서 볼 때 큰 의의를 지닌다. 본문비평을 기조로 하는 역사비평학의 시원(始原)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복음서는 예수사건을 사진이나 동영상으로 찍어놓은 다큐멘터리 기록물이 아니다. 작가의 주관적인 기질이나 사물을 보는 시각에 따라, 동일한 예수사건이라도 다양한 모습으로 저술될 수밖에 없다. 그런 면에서 네 복음서는 저자의 고유한 특성을 지닌 일종의 초상화 시리즈로 볼 수 있다.
신약성서에는 원본(autograph)이 없다. 5,000여 종의 사본(manuscript)이 있을 뿐이다. 하지만 이들 가운데 동일한 것은 하나도 없다. 서로 다른 사본을 비교·연구하여 원래의 본문(the original text)을 추적하는 작업을 일컬어 본문비평(textual criticism)이라 한다.
이러한 본문비평 작업은 기원후 100년경에 기록된 누가복음에서 이미 시작되었다. 저자 누가는 복음서 머리말에서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우리 가운데서 일어난 사건들을 재료로, 이야기를 꾸미는 작업을 여러 사람들이 해왔습니다. 그들은, 처음부터 목격자요 말씀의 종이 된 이들이 전해준 것을 그대로 엮은 것입니다. 존경하는 데오필로 선생님, 저도 이 모든 일을 처음부터 자세히 살펴보았는데, 이를 순서대로 적어 보내드리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는 선생님께서 들으신 것들의 실상을 바르게 전해드리기 위함입니다.”(눅 1:1-4, 필자 사역)
복음서는 여러 단계를 거쳐 작성되었다. 맨 처음 예수사건(예수의 공생애)이 있었고, 목격자들이 있었다. 이들은 목격한 예수사건들을 구두(口頭)로 전해주었다. 이들을 가리켜 1세대 그리스도인이라 할 수 있다. 아람어로 된 구두전승(oral tradition)을 이어받은 사람들은 이를 문서로 작성했다. 아람어 또는 코이네 그리스어로 기록된 문서화 작업이 진행된 것이다. 이들을 2세대 그리스도인이라 할 수 있다. 누가는 최종적으로 구전(口傳)과 문전(文傳) 자료들을 종합하고 비교·분석하여 일관된 체계를 지닌 예수 이야기를 완성했다. 저자 누가는 3세대 그리스도인에 속 한다.
예수사건에 관한 최초의 자료는 바울서신들에서 나타난다. 바울은 예수와 동시대인이었지만, 살아생전에 예수를 만난 적이 없다. 바울은 기원후 33년경 다메섹으로 가다가 계시 가운데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듣고 바리새파가 추구한 ‘율법 신앙’에서 ‘예수 메시아 신앙’으로 회향(回向)했다. 이것은 바울의 득도(得道) 사건에 해당한다.
다메섹에서의 득도 사건 이후, 바울은 35년경 예루살렘으로 올라간다. 예수의 수제자였던 베드로를 만나기 위해서였다. 바울은 베드로와 보름 동안 숙식을 같이하면서(갈 1:18) 십자가 처형 사건을 비롯하여 예수 생애에 관한 여러 정보를 얻었을 것이다.
베드로를 만난 후 바울이 내린 결론은 무엇인가? 그는 십자가 사건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않기로 했다.(고전 2:2) 예수가 왜, 어떻게 죽었는가에 대해 바울은 침묵했다. 바울에 의해서 십자가 처형(crucifixion) 사건은 대속적 죽음을 상징하는 십자가(cross) 구원 사건으로 바뀌었다. 바울의 십자가 이해는 큐의 그것과 상당한 편차를 드러낸다.(눅 9:23-24Q) 바울은 예수가 정치범으로 처형당한 사건을, 바리새파 유대교의 ‘고난의 종’ 메시아 지평에서 ‘내 죄를 위한’ 구원의 사건으로 비정치화(非政治化)한 것이다.
하지만 바울이 죽은 후 교회의 사정이 바뀌었다. 중산층 지식인들이 기독교에 입도(入道)하게 되면서, 그들은 예수가 도대체 어떤 인물이었는지 예수의 생애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복음서들이 탄생하게 된 동기이다.
그중 하나가 마가복음이다. 마가는 바울의 십자가 복음 전통을 계승하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생전의 예수(living Jesus)의 삶에 시선을 돌렸다. 예수 이야기 복음이 탄생하게 된 것이다. 마가는 예수의 공생애 기간에 일어났던 사건들을 수집하고, 이를 중심으로 자전적(自傳的) 예수 이야기를 엮어나갔다. 수난 이야기를 중심으로 18개의 기적 이야기가 배치되었다. 이 기적 이야기들은 예수가 신적 권능을 행사하는 ‘초인간’(테이오스 아네르)임을 드러낸다. 예수는 갈릴리에서 예루살렘으로 고난의 길을 걸어간 ‘테이오스 아네르’라는 것이 마가복음의 전체 주제이다.
마가복음은 70년경 로마에서 기록되었다. 베드로가 십자가에 처형되고 바울이 교수형을 당하는 등 로마의 기독교 박해가 대대적으로 진행되던 시기였다. 복음서 곳곳에는 마가 공동체 신도들이 겪어야 했던 박해와 고난의 흔적들이 암시되어 있다.(막 4:15, 17, 19, 8:34-35, 10:29, 38, 13:9-13) 마가는 고난의 종으로 오신 예수를 구세주 그리스도로 선언함으로써, 당시 고난과 박해를 받고 있던 마가 공동체 신도들이 희망을 갖고 인내하도록 했다.

예수의 후천개벽 의식

마가복음은 예언과 성취의 맥락에서 요한의 등장을 해석한다. 예수가 이 땅에 오기 약 600년 전에 이사야는 메시아의 도래를 예언했다.(사 40:3) 마가복음은 그 메시아의 길을 예비하고 곧게 할 사명을 지닌 ‘광야의 소리’[野聲]가 바로 요한임을 선언한다.(막 1:2-3)
큐와 마가복음은 예수의 수세 장면을 전하면서 신학적 성찰을 가하지 않는다. 사람들이 요한에게 세례를 받듯, 예수도 요한에게 세례를 받았다고 전할 뿐이다.(눅 3:21) 마태복음의 편집은 다르다. 예수께서 자기에게 오시는 것을 본 요한은 “제가 선생님께 세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 어째서 선생님께서 저에게 오시나요?” 하고 말한다. 그러자 예수가 답한다. “지금은 그렇게 하도록 하여라. 이렇게 해서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의(義)를 이루는 것이 옳다.”(마 3:14-15, 필자 사역) 본문에서는 요한과 예수 사이의 차별화가 감지된다. 예수가 세례를 받은 것은 보통 사람들처럼 회개의 징표로서 받은 것이 아니라, 요한이 추구한 회개운동이 갖는 시대적 사명에 동의하여 하나님의 의를 이루기 위해서라고 한다. 이렇게 첨가된 부분은 예수가 요한의 문하생이라는 오해를 불식시키기 위한 마태 공동체의 변증적 성격을 지니고 있다.
영지주의 문화권에서 수록된 요한복음은 예수의 수세 보도를 아예 삭제한다. 요한복음은 예수를 태초부터 하나님과 함께 계신 로고스의 화육(化肉)으로 선언한다.(요 1장) 요한은 예수께서 자기에게 오시는 것을 보면서 말한다. “보시오.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입니다.”(요 1:29)
예수의 수세 사건은 역사적 사실일 개연성이 높다. 예수 메시아 신앙이 확고하게 자리 잡기 전, 맨 처음 교회인 큐 공동체 시대에는 요한을 예수에 버금가는 메시아로 신앙하던 시기가 있었던 것 같다.(눅 3:15, 참조 요 1:19-22) 큐 예수는 요한을 엘리야의 화신(化身)으로 인정하거나, 또는 여자에게서 태어난 사람 중 ‘으뜸’이라고 극찬하며 요한을 스승으로 받아들인다. ‘맨 처음 교회’인 큐 공동체 시기이다.(마 11:11-14Q) 하지만 예수 메시아 신앙이 교회에서 점차적으로 확립되면서 예수와 요한의 차별화 전략이 시도되었다. 요한이 물 세례를 베푼다면, 예수는 ‘성령과 불’로 세례를 베푼다.(마 3:11Q)
수세 이전 예수의 생애에 대해서는 별로 기록이 남아 있지 않다. 영웅전의 맥락에서 작성된 탄생 이야기를 제외하면, 예수가 12살쯤 되었을 때 유월절에 부모를 따라 예루살렘 성전을 참배했던 내러티브가 전부이다. 소년 시절의 에피소드는 다음의 문장으로 끝맺는다. “예수는 부모를 따라 나사렛으로 돌아가 그들을 받들어 섬겼습니다. …예수는 지혜와 키가 자라며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욱 사랑을 받게 되었습니다.”(눅 2:51-52) 수세 이전 예수는 육신의 부모를 받들어 섬기는 부자유친(父子有親)의 삶을 살았음을 알 수 있다.
예수는 30세쯤 되어 자아성찰의 계기가 있었던 것 같다. 인간이 무엇이고, 어떻게 사는 것이 사람답게 사는 길인가? 그는 인생의 참다운 길을 찾아 집을 떠나기로 결심한다. 그리고 갈릴리 전역을 주유(周遊)하며 민중의 비참한 삶의 현실을 목도했을 것이다. 당시 민중들은 내적으로는 헤롯 왕조, 예루살렘 성전, 율법 형식주의에 의해서 인간다운 삶을 박탈당하고, 외적으로는 그레코 로마의 식민권력에 의해서 침탈당하고 있었다. 말 그대로 내우외환에 직면한 하층 농민들이었다. 우리가 복음서를 읽을 때마다 예수 주변에 그림자처럼 몰려드는 민중의 무리가 바로 그들이다. 그러던 중 예수는 요한의 회개운동 소식을 듣게 되었고, 그를 만나기 위해 요단강변의 광야로 나아간다. 그는 요한의 회개운동과 강렬한 사회비판적 메시지에 깊은 감명을 받았고(마 3:1-12), 민중 구제의 희망을 발견했을 것이다.
예수는 민중이 직면한 고난의 문제를 사회역사적 지평을 넘어 ‘우주적 지평’에서 찾았다. 사탄이 지배하는 선천(先天)시대는 물러가고, 후천(後天)시대가 닥쳐오고 있음을 보았다. 놀라움과 산고(産苦) 속에서 하늘 아버지의 뜻이 구현된 하나님 통치(바실레이아)가 지금 동터오고 있음을 본 것이다. “회개하라. 하늘나라가 동터오고 있다.”(마 4:17, 참조 마 3:2)
선천시대를 마감하고, 후천개벽의 시대를 맞이하기 위해 민중이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 회개(메타노이아)이다. 동학의 창시자 수운 최제우의 개념을 빌리면, 하늘의 이치를 거역하는 이기주의적인 ‘각자위심’(各自爲心)의 삶에서 천리에 순응하는 자리이타(自利利他)적인 나눔의 삶으로 언행을 돌이키는 것이 곧 회개이다.(눅 3:10-14) 예수의 수세 사건은 이러한 후천개벽 의식을 반영하고 있다.

예수의 득도 사건

인간이 무엇이고, 어떻게 사는 것이 인간답게 사는 것인가? 이것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인류의 보편적인 물음이 아닐 수 없다. 예수의 수세 사건은 이에 대한 답변의 성격을 지닌다.

사람들이 모두 세례를 받고 있었습니다. 예수도 세례를 받으시고 기도하실 때에 하늘이 열리고, 성령이 비둘기 같은 형체로 그 위에 내려오셨습니다. 그리고 하늘에서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가 기뻐한다.”(눅 3:21-22Q)

예수가 요단강에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고 올라올 때, 세 가지 사건이 연출된다. 첫째, 하늘이 열렸다. 개천(開天) 사건이다. 둘째, 성령이 비둘기 형체로 예수 위에 내려왔다. 영 내림(來臨) 사건이다. 셋째, 하늘의 음성이 들려왔다. 천어(天語)를 듣는 사건이다.

(1) 개천이 무엇인가? 우리나라 국경일 중에 개천절이 있다. 이는 조선의 상고민족사에 나오는 건국신화와 연관성이 있다. 『삼국유사』와 『제왕운기』에 따르면, 천제(天帝) 환인(桓因)은 그의 아들 환웅(桓雄)이 인간세(人間世)에 뜻을 품고 있음을 알고, 삼부인(三符印)을 주어 지상에 파송한다. 환웅은 3,000명의 문명개척단을 대동하고 태백산 신단수(神檀樹) 아래 내려와 신시(神市) 배달국을 세운다. 이를 우리 민족국가의 시원으로 삼은 것이 하늘이 열린 개천절의 시원이다.
이렇게 세워진 신시 배달국의 국시는 무엇이었나? 이화세계(理化世界), 홍익인간(弘益人間)이다. 하늘에서와 같이 지상에서도 하늘의 이치가 다스리는 세상을 구현하는 것이 이화세계라면(마 6:1 참조), 모든 종류의 차별을 철폐하고 민중이 인간다운 삶을 살 수 있는 대동세상을 여는 것이 홍익인간이다.(눅 6:20-21 참조) 이와 같은 이화홍익(理化弘益) 이념이 실현된 후천개벽 세상을 여는 것이 개천 사건이다.
이처럼 큐는 예수의 수세 사건을 통해서 사탄과 불의가 지배하는 선천시대가 물러가고, 하늘 아버지의 뜻이 실현된 후천개벽 하나님 통치 시대가 열리고 있음을 보았다. 하나님 통치(바실레이아)의 단초를 본 것이다.
예수가 선포한 후천개벽 하나님 통치의 기본이념은 무엇인가? 이는 큐 예수의 ‘첫 설교’에 나타나 있다. “복이 있어라, 가난한 사람들!(호이 프토코이) 하나님 나라가 너희 것이다. 복이 있어라, 지금 배고픈 사람들!(호이 페이논테스) 너희는 배부르게 될 것이다. 복이 있어라, 지금 슬퍼하는 사람들!(호이 클라이온테스) 너희는 웃게 될 것이다.”(눅 6:20-21Q) 이 첫 설교는 큐 예수말씀 전체를 관통하는 주제이자 키워드이다.
첫 설교의 대상은 누구인가? 가난한 사람들, 배고픈 사람들, 슬퍼하는 사람들, 곧 사회의 소수자들(social minorities)이다. 하지만 마태는 이 말씀을 영적으로 가난한 자들에 대한 축복으로 윤리화시킨다. 누가는 ‘지금-나중’의 문제로 바꾸어 지금 배고픈 사람들은 미래에 배부르게 될 것이라고 한다. 하지만 큐는 ‘지금 이 자리’에서의 상황 반전(反轉)을 선언한다.
상황 반전의 근거는 무엇인가? 후천개벽 하나님 통치가 닥쳐왔기 때문이다. 예수의 수세로 인해 민중의 상황을 반전시킬 후천개벽 하나님 통치가 시작되었다는 것이 큐의 확신이었다. 큐가 전하는 예수의 후천개벽 운동은 젤롯파가 추구한 유대 민족의 독립해방 투쟁과 다르다. 바리새파가 추구한 율법의 생활화 운동을 통한 율법왕국 건설도 아니며, 사두개파가 추구한 예루살렘 성전 국가의 재건도 아니다. 유대의 사회종파 운동과 달리, 예수의 후천개벽 운동은 사회적 소수자들이 놓인 비참한 운명의 반전 성격을 지닌다.
필자는 앞서 소개한 큐 예수의 첫 설교를 오늘 우리의 언어를 사용하여 한마디로 정의한다면, ‘민중 기본소득 선언’이라고 이름하고 싶다. 기본소득이란 무엇인가? 개인의 능력, 직업, 재산, 소득, 노동의 유무를 떠나서 사회 구성원이라면 누구에게나 차별 없이 최소한 인간다운 삶의 기본여건을 보장해야 한다는 것이 오늘날 회자되는 기본소득의 원칙이다. 전체적으로 볼 때, 큐가 전하는 예수의 후천개벽 하나님 통치 운동은 민중 기본소득 운동의 성격을 지닌다. 무상 급식 운동(마 14:13-21)과 무상 치유 운동(눅 7:22)은 예수가 민중을 대상으로 펼친 운동의 두 축이다. 큐 주기도문은 “우리가 우리의 빚진 자에게 빚을 탕감해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용서하여 주옵소서.”라고 말한다.(마 6:12Q) 그리고 돈을 꾸어줄 때는 돌려받을 생각을 하지 말고 꾸어주라고 한다.(눅 6:34-35)
당시 민중이 놓인 비참한 상황을 큐는 참새의 비유를 들어 설명한다. “참새 두 마리가 한 닢에 팔리지 않느냐? 그중 한 마리도 아버지의 뜻이 아니고는 땅에 떨어지지 않는다. 아버지께서는 너희의 머리카락까지도 일일이 세고 계신다. 두려워하지 마라. 너희는 수많은 참새보다 더 귀하다.”(마 10:29-31Q) 이 말씀의 청중은 누구인가? 인간으로서 인간 대접을 받지 못하고 참새보다도 못한 삶을 살아가야 하는 당시 사회의 소수자들이다. 그들을 하늘 아버지께서 보살피신다는 것이다. 이는 보잘것없는 참새 한 마리보다 사회적 소수자들의 생명이 더 소중함을 일깨워준다. ‘삶의 양’이 아니라 ‘삶의 질’이 귀중함을 선언한 것이다.
억압과 빈곤을 재생산하는 불평등한 사회제도 아래 신음하는 사회의 소수자들을 보면서, 예수는 모세 계약에 기초한 고대 이스라엘의 휴머니즘 정신과 상부상조하는 가치 질서의 정신이 회복될 것을 지향한다. 하나님 통치 시대, 곧 후천개벽 시대가 열리면 기존의 사회 가치가 반전(反轉)된다. 사회적 소수자들의 귀중한 생명을 긍정하고 보호하는 것이 하늘 아버지의 뜻을 실현하는 것이다.

(2) 하나님의 영이 비둘기 형체로 ‘그(예수) 위’에 내려앉았다. 일종의 영 강림(降臨) 사건이다. 『삼일신고』에 나오는 한 구절을 인용한다. “인간의 본성에서 하나님의 씨알을 찾으라. 그분은 이미 너희 뇌에 내려와 계시다.”(自性求子降在爾腦神) 하나님을 밖에서 찾지 말고, 내 안의 본성에서 찾으라는 뜻이다. 밖에서 찾을 수 있는 것은 오감의 대상(형상)뿐이다. 하나님은 형상으로 만날 수 없다. 영이시기 때문이다.(요 4:24)
창세기에는 하나님의 창조 이야기가 나온다. 하나님이 흙과 물로 사람을 빚으시고 그 코에 생명의 바람(니슈마트 하임)을 불어넣어 사람다운 사람(네페쉬 하야)이 되었다.(창 2:7) 인간의 코에 불어넣은 생명의 바람은 성령이다. 즉 성령이 인간(아담)의 내면에서 활동해야 살아 있는 사람(네페쉬 하야)이 되고, 사람의 생명을 지탱하며 살아가게 하는 힘이 인간의 본성인 ‘참나 성령’에서 나온다고 본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성령이 비둘기 형체로 ‘그 위에’ 임했다는 것은 예수의 본성에 있는 참나 성령에 대한 수사적 표현이다. 내 안의 본성인 참나가 성령임을 깨닫고, 늘 그와 소통하며 성령의 힘으로 사는 것이 참사람의 삶이다.
수세 이후 예수는 성령의 힘에 이끌려 살았다. 성령의 힘에 이끌리어 광야로 나가 40일 동안 사탄의 시험을 받았고(마 4:1Q), 성령의 힘으로 가난한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파했으며 포로들을 해방시켰다. 성령의 힘으로 눈먼 사람들을 다시 보게 했고, 억눌린 사람들을 풀어주었다. 성령의 힘으로 희년(요벨)을 선포하여 빚을 탕감해주고, 빼앗긴 삶의 터전을 돌려주었다.(눅 4:18-19Q) 성령의 힘으로 예수는 하늘 아버지 뜻을 이룬다. 우리가 참나 성령의 힘에 이끌려 살아가고 있음을 자각할 때, 내 안에서 하나님의 현존(現存)을 느끼게 된다.(요일 4:13)

(3) 예수가 들은 천어(天語)는 무엇인가?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다. 너의 존재 자체가 나의 기쁨이다.” 예수는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요, 하나님은 자기 아버지임을 깨달았다. 부자유친의 관계로 하나님을 알게 된 것이다.
큐 예수가 사용한 하나님의 공식 호칭은 무엇인가? ‘우리 아버지’(파테르 헤몬)이다.(마 6:9Q) 마가복음에는 ‘압바 아버지’(압바 호 파테르)라는 호칭이 나온다.(14:36, 참조 롬 8:15, 갈 4:6, 이 호칭은 가부장제의 산물로 아버지에 대한 절대 신뢰를 상징한다.) 부자유친의 효(孝) 관계로 하나님을 이해한 것이다. 부모는 자식을 낳아서 사랑으로 기르고, 자식은 부모를 절대 신뢰하고 섬긴다. 공자는 인간의 기본도리를 부자유친에서 보았고, 불효보다 더 큰 죄가 없다고 했다.
“나는 천지만물을 지으신 하나님의 아들이다. 나의 존재 자체가 그분을 기쁘시게 한다.” 인간의 존엄성을 이보다 더 적절하게 표현할 수 있을까? 예수가 들은 천어는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무한 긍정이요, 인간을 가능성의 존재로 선언한 것이다. 불교에서 말하는 천상천하유아독존(天上天下唯我獨尊)이라는 인간 이해와 맥이 닿는 대목이다.
수세 사건을 통해서 예수는 스스로가 신적 DNA를 받아 태어난 하나님의 분신(分身)임을 자각하게 된다.(참조, 요 10:34-35) 자신이 하나님의 사랑하는 아들이요, 자신의 존재 자체가 하나님의 기쁨이 된다는 새로운 깨달음을 얻은 예수는 갈릴리 민중들의 현장으로 가서 후천개벽 하나님 통치 운동을 펼친다.
하늘 아버지 자녀임을 각성하고 산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그분의 뜻이 반영된 자연법(양심)과 황금률을 지키며 사는 것이고(마 7:12Q), 경천애인의 삶을 사는 것이다.(마 22:37-40Q) 수세 사건이야말로 예수의 마음속에 잠자고 있던 신성의식(神性意識)을 각성하도록 만든 일종의 득도(得道) 사건이다. 득도한 예수는 어떻게 살았나? 선천시대의 지배자 사탄이 번갯불처럼 떨어지는 것을 보면서(눅 10:18Q), 동터오는 후천개벽 하나님 통치를 준비하는 삶을 살았다.(마 4:17)
득도한 예수는 나의 본성인 참나가 성령임을 깨닫고, 성령의 힘에 이끌리어 언제, 어디서,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주인의식을 갖고 사회의 소수자들을 ‘섬기는 지도자’로 살았다. 임제선사가 말한 수처작주(隨處作主) 입처개진(立處皆眞)의 삶을 살았던 것이다.
득도한 예수는 성령에 이끌리어 갈릴리 민중의 현장으로 가서 그들을 구제하는 삶을 산다. 예수가 천어를 듣고 득도하여 후천개벽 하나님 통치 운동을 펼쳤다면, 동학의 창시자 수운도 37세에 천어를 듣고(1860년 4월 5일) 시천주 후천개벽 운동을 폈다. 예수가 들은 천어가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다.”라면, 수운이 들은 천어는 “오심즉여심”(吾心卽汝心)이다. 하나님과 인간을 부자유친의 관계로, 하나님 마음과 사람의 마음을 불이관계(不二關係)로 본 점에서 양자의 득도 체험은 같은 맥락에 서 있다. 하늘의 뜻, 곧 민중 구제의 길을 가다가 권력층에 의해 처형된 점에서도 양자의 운명은 유사하다.
인간이 인간답게 사는 길은 다른 데 있지 않다. 인간이 무엇이고, 어떻게 사는 것이 인간답게 사는 것인지 깨닫고, 이를 실천하는 데 있다. 예수의 수세 사건은 인류가 가야 할 길의 방향을 잡아주는 나침판 역할을 한다.

김명수 | 성균관대학교와 한국신학대학을 졸업하였으며, 독일 함부르크대학에서 예수말씀복음 큐(Q)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Dr. theol.) 지은 책으로는 『큐복음서의 민중신학』, 『역사적 예수의 생애』 등이 있다. 경성대학교 명예교수이며, 충주에 있는 노인요양시설 ‘예함의집’에서 치매 어르신들을 돌보는 일을 하고 있다.

 
 
 

2021년 3월호(통권 74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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