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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me > 기독교사상 > 성서와설교 > [르네 지라르의 성서 읽기 01]
성서와설교 (2021년 2월호)

 

  지라르의 모방욕망 이론과 기독교
  

본문

 

모방욕망 이론으로 유명한 르네 지라르(René Girard, 1923-2015)는 성서를 독특하게 해석했다. 오늘날 신학을 비롯한 다양한 학문에 영향을 주는 그의 성서해석을 살펴보기에 앞서 간략하게 그의 사상을 소개하고자 한다.

모방욕망

‘모방’이라는 말은 고대 인문주의자들이 이미 중요하게 사용한 용어이다. 플라톤은 본(패러다임)이 되는 선의 이데아를 본받고 모방하는 것을 진리 추구로 생각했고, 공맹의 유학도 배움을 모방(效)으로 이해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모방(미메시스) 이론을 중심으로 자신의 시학을 발전시켰다. 그러나 인문주의자들은 모방 때문에 발생하는 병리학적 인간관계를 간과했다. 20세기의 지라르는 모방욕망이 생산과 발전의 동력이면서 동시에 분열과 폭력의 기원이라는 점을 인류학적으로 밝혔다. 그는 세계화가 진행되면서 테러가 일상화된 현대사회의 위기를 진단하고, 기독교 신앙을 새로운 언어로 조명하며 인류 구원의 길로 제시했다.
사실 조금만 주의 깊게 관찰하면 모방욕망은 도처에서 발견된다. 사람은 남이 가진 것을 갖고 싶어 한다. 자본주의는 유명인을 모델로 삼은 광고를 통해 모방욕망을 자극하여 소비를 촉진시킨다. 시각 미디어가 쏟아내는 수많은 정보도 현대인의 모방욕망을 부추겨 본 대로 갖고 싶게 만든다. 인간의 성욕과 식욕 등 기본적인 생리적 욕구도 모방욕망 때문에 과장되어 있다. 인간의 출세욕과 명예욕도 모방욕망의 결과이다. 한국 사회의 왕성한 교육열은 한국인들이 남다른 모방욕망을 가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지라르는 프로이트가 말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도 아이가 아버지를 모방한 결과물이라고 본다. 인간은 기본적으로 타자를 모방하며 자기 정체성을 형성하고 지식을 쌓는다.
다른 사람들이 원하기 때문에 나도 그걸 원한다. 그래서 사람은 모두 한 마음으로 같은 것을 원한다. 서로 바라는 게 다르면 충돌할 일이 없지만 같은 것을 바라므로 인간 사회에서 경쟁과 갈등은 불가피하다. 남과의 비교를 통해서 욕망이 생성되기 때문에 엄밀히 말해서 인간의 욕망은 그 대상이 정해져 있지 않다. 남만큼 살고 싶고, 남부럽지 않게 살고 싶고, 남보다 잘살고 싶어 하기 때문에 사람의 욕심은 끝이 없다. 남들의 욕망이 내 행위의 동기를 이루기 때문에 사람의 삶은 남들에 의해 좌우된다. 가족이나 직장 속의 개인적인 라이벌뿐 아니라 집단과 집단 사이에도 라이벌 관계가 형성되어 상호 긴장과 시기심이 발동하고 맹목적 증오가 발생한다. 인간의 일반적 삶의 방식을 이끄는 온 세상 사람들이 서로 모방의 대상이 될 수 있다. 모방욕망 때문에 인간은 군중 속의 하나로 산다. 개인은 자율적이지 않으며 자율적일 수 없다.
그래서 오래전부터 내면의 자유를 통해 세상의 평화를 이룩하기를 바란 플라톤이나 공맹이나 퇴계 같은 동서양의 도학자들은 물욕을 버리고 자족하라고 교훈했고, 고등종교는 욕망의 주체인 자아를 부인하고 무아에 접근할 것을 구원의 길로 제시했다. 물아일체가 되면 모방욕망 때문에 남과 충돌할 일이 없어지고 거칠 것이 없어지기 때문이다.
기독교의 경우에는 대체로 무욕이나 무아의 가르침에 무게를 두지 않았다. 다만 구약성서의 십계명에는 “이웃의 소유를 탐내지 말라.”라는 경고가 들어 있다. 이 계명은 정확히 모방욕망을 지적하는 말이다. 이 계명이 경고하는 것은 소유욕이 아니라 이웃에 대한 시기심이다. 아주 멀리 있거나 나와 관계없는 사람은 모방적 경쟁이라는 충동을 일으키지 않는다. 이웃은 아주 멀지도 않고 아주 가깝지도 않은 존재이다. 열 번째 계명은 이웃을 부러워하는 그 부러움의 위험성을 경고하고, 부러워함이 타자에 대한 시기심으로 번지는 것을 금지하는 계명이라고 볼 수 있다. 질투와 시기심은 다른 모든 범죄의 근간을 이루며 인간관계와 사회를 병들게 만들고 파괴하는 저력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기독교에서 인간의 원죄로 탐심을 거론할 때에, 그것은 시기심을 불러일으키는 모방욕망이 인간의 숙명적 본성의 일부임을 일깨우고 동시에 그것의 위험한 파괴력을 상기시킨다.

르네 지라르

지라르는 1923년에 프랑스 아비뇽에서 태어나 중세 역사와 고문서학을 공부한 후 1947년에 미국으로 건너가 1953년에 인디애나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학자로서의 그의 활동은 대부분 미국에서 이루어졌다. 듀크대학을 거쳐 1961년에 존스홉킨스대학에서 정교수가 된 후 버팔로의 뉴욕주립대학교에서도 가르쳤다. 이 시기에 나온 유명한 책이 프랑스어판 『폭력과 성스러움』(1972)이다. 1981년에 지라르는 프린스턴 대학교로 옮겨 1999년에 은퇴할 때까지 그곳에서 가르쳤다. 이 시기에는 인류학적 시각에서 기독교의 문명사적 의미를 탐구하면서 근대성과 현대문명에 대한 진단을 많이 내놓았다. 지라르는 2005년에 프랑스 학술원(아카데미 프랑세즈)의 영구회원으로 선출되었고, 2015년 11월 4일에 캘리포니아의 프린스턴 자택에서 숨을 거두었다.
지라르는 자크 데리다를 비롯한 프랑스의 포스트모더니즘의 선구자들을 미국으로 초청해서 학술대회를 열었는데, 그것이 미국 학계에 포스트모더니즘이 유행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지라르 자신은 포스트모더니즘을 좋아하지 않았으며, 사실에 기초한 확실한 진리가 있다고 믿었다. 1990년에는 모방욕망과 희생양 메커니즘을 토대로 종교와 폭력의 관계를 연구하는 학술단체(Colloquium on Violence and Religion)가 탄생했다. 스위스의 가톨릭 신학자인 레이먼드 쉬바거가 단체의 공동창립자이자 의장을 맡았고, 르네 지라르는 명예회장을 맡았다.
오늘날 지라르의 모방욕망 이론은 문학비평, 철학, 신학, 신화학, 심리학, 경제학 등 다방면에 영향을 주고 뇌과학에도 그의 이론이 적용되고 있다. 특히 그는 신학자가 아닌 인류학자로서 기독교가 인류에게 주는 의미를 사회과학적으로 재해석해서 세속화된 시대에 기독교 르네상스를 이끄는 인물로 평가되고, 21세기의 교부로 일컬어지기도 한다.

희생양 메커니즘

지라르에 따르면, 종교를 통해 인류는 멸망하지 않고 종의 보존을 계속할 수 있었다. 종교는 인간 사회의 기초이자 평화의 수호자이다. 왜냐하면 종교 제의를 통해 인류는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으로 번지는 폭력을 막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종교의 희생제물이 그 역할을 했다.
동물과 다른 인간의 특징인 모방욕망은 생산물의 증가와 삶의 윤택함을 가져왔지만, 동시에 서로 경쟁하며 대적하는 상호폭력성을 증가시켰다. 실제로 인류의 오랜 역사에서는 부족이나 마을 간의 전쟁으로 한쪽이 전멸하는 일이 수없이 발생했다. 모방욕망에서 시작된 조그마한 충돌이 불씨가 되어 시작된 폭력은 폭력의 악순환을 낳는다. 폭력도 모방된다. 일상에서 모방욕망 때문에 상대적 결핍감과 좌절감에 시달리는 인간은 분노를 표출할 대상을 찾아 언제든 폭력에 동참할 준비가 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폭력은 쉽게 전염된다.
지라르에 따르면, 싸우지 않고 폭력을 해소하는 방법으로 생겨난 것이 희생제물을 잡는 일이다. 피를 봐야 인간의 폭력성이 해소되고 사회가 안정되는데, 공동체 전체가 제물에게 집단 폭력을 가함으로써 폭력성을 해소하는 것이 희생제물을 바치는 종교의식이다. 그때 제물을 살해하는 폭력이 군중에게 전염되지 않도록 구별된 제단에서 제물의 피를 내야 한다. 여기서 성(the sacred)과 속(the profane)의 이분법이 발생한다. 흐르는 피는 폭력의 전염성 때문에 부정하며, 따라서 군중과 떨어져 있는 제단에서 피를 내야 한다. 그러므로 성속의 이분법은 거리두기를 통해 유지되며, 제물과 제단은 일반인이 함부로 손을 댈 수 없도록 성별(聖別)된다. 제물에 손을 댈 수 있는 자는 제사장인데, 그는 제물에 폭력을 행사하여 사회의 안전과 평화를 도모하기 때문에 성별되고 특별한 지위를 부여받는다. 부정 타는 것을 막기 위한 모든 성별과 금기는 폭력의 전염을 막기 위한 장치이다.
사람들은 공동체의 죄를 씻고 재앙을 막기 위해 제물을 잡아 신에게 제사를 지내고 종교제의를 거행하고 예배를 드린다. 그러나 실제로 제물의 피를 요구하는 것은 신이 아니라 군중들이요, 공동체의 구성원들이다. 제물을 드려 씻김을 받는 것은 신에 대한 죄가 아니라, 공동체 구 성원들의 살기(殺氣)이다. 사람들은 그들의 죄가 제의를 통해 씻김 받고 정화된다고 믿지만 실제로는 살기와 폭력심이 해소되는 것이다. ‘정화’를 가리키는 그리스어 ‘카타르시스’도 폭력심의 해소를 가리킨다. 또한 재앙을 막으려고 신에게 제사를 드리지만 재앙은 신에게서 오지 않고 인간에게서 온다. 상호폭력을 통한 사회의 멸망, 그것이야말로 종교의식을 통해 막으려는 재앙의 실체이다. 그러나 이러한 종교의 사회적 기능은 성별과 거리두기로 인해 철저하게 가려진다. 오직 복과 화를 줄 수 있는 전능한 신에 대한 두려움과 신앙심으로 제사장의 권위와 제의의 효력이 지속된다.
제물을 드리는 종교를 통해 사회가 파괴되지 않고 존속되기 때문에, 사람이나 짐승을 잡아 각을 뜨고 피를 내어 제단 주위에 뿌리는 종교의식은 마을이나 국가의 가장 중요한 의식으로 자리 잡았다. 희생제의는 희생제물에게 가하는 작은 폭력으로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이라는 큰 폭력을 막는 일이다. 말하자면 희생제물은 공동체 구성원들 상호간에 팽배한 폭력성의 스트레스가 지상에서 폭발하지 않고 밑으로 배출되도록 유도하는 하수구 역할을 한 것이다. 폭력성이 흘러나갈 하수구가 없으면 인류 사회는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으로 가기 때문에 존속할 수 없다.
희생제물의 피 흘림이 더 큰 유혈극을 막고 인간을 살린다는 점은 성서의 이야기에도 나온다. 히브리인들이 이집트에서 탈출할 때에 문설주에 양의 피를 발랐더니 죽음의 기운이 히브리인들의 집을 피하고 이집트의 장남들만 죽였다는 성서 기사가 있다. 필자가 20년 전에 대전의 한 집을 방문했을 때에 화장실 문틀 위에 붉은 칠이 되어 있어 놀랐는데, 알고 보니 팥죽이 뿌려져 있는 것이었다. 액을 쫓기 위해 문설주에 피를 바르는 일이 성서에만 나오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고대 중국의 제후들이 회맹을 통해 평화조약을 맺을 때에 단 위에서 그릇에 담긴 말의 피를 찍어 입술에 발랐다. 이런 풍습도 피를 통해 피 흘림을 막는 희생제의에서 생긴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동짓날 액을 쫓기 위해 먹는 붉은 팥죽도 농경사회에서 동물의 피를 대신한 것이 확실하다. 에밀레종의 전설도 아이를 제물로 드리는 유습이 있었음을 알려준다. 몇 해 전에 경주박물관 앞마당에서 신라시대의 우물이 발굴되었는데, 그 안에서 발견된 인골을 학자들은 제물로 바쳐진 아이의 유골로 본다. 영주에 있는 소수서원의 입구에는 큰 너럭바위가 있다. 안내자의 말에 따르면 짐승을 제물로 잡던 자리라고 한다. 소수서원은 왕이 직접 땅과 노비 등을 제공한 최초의 사액서원으로, 종교를 배척하고 유학에서 말하는 덕을 교육하여 평화를 도모하기 위한 곳인데, 그 입구에서 짐승의 피를 내는 종교의식이 공식적으로 거행되었다는 사실에 놀랐다. 인문주의의 나라인 조선도 제물의 피를 흘려야 정화되고 재앙을 막을 수 있다고 믿는 오래된 종교적 유산의 힘을 배척할 수는 없었던 모양이다.
희생제물을 신에게 바쳐서 재앙을 막으려던 옛 종교로부터 벗어나고자 한 사람들이 2,500년 전에 등장한 인문주의자들이다. 그리스 인문주의가 등장하기 전에 아이스킬로스, 유리피데스, 소포클레스 등 비극 작가가 출현했는데, 지라르는 제물을 바치는 희생양 메커니즘이 더 이상 통하지 않는 위기 상황에서 그리스 비극이 등장했다고 본다. 그것은 말하자면 옛 종교의 위기요, 사람들이 더 이상 신에게 제물을 바치는 종교를 신뢰하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바로 그 시점에 동서양의 인문주의가 출현했다.
플라톤이나 공맹은 종교를 윤리로 바꾼 사람들이다. 인문주의의 출현은 세상의 혼란과 재앙을 막을 해결책을 인간에게서 찾기 시작했음을 의미한다. 엄청난 돈을 들여 아테나 신을 모시는 파르테논 신전을 지을 때에 아테네 시민들의 반대가 많았다. 인문주의자들은 제물의 피보다는 덕성 함양으로 폭력성을 잠재우고 세상의 평화를 이루려고 했다. 그러나 인간의 이성능력으로 모방욕망이 통제될 수 없다면, 인문주의자들의 도덕주의는 집단살해에 기초를 둔 희생양 메커니즘이 인간 사회에서 사라지기에는 너무 무력하다.
그리하여 그리스 문명을 이어받은 로마의 포룸 로마눔에서는 여전히 다신교적인 희생제사가 이루어졌고, 스토아 철학자들이 국가의 지도자로 있던 로마제국은 수많은 청년들의 희생을 요구하는 정복전쟁을 지속했다. 이뿐만 아니라 검투사들은 열광하는 로마 시민들 앞에서 피를 흘리며 처참하게 죽어갔다. 전쟁터에서 흘리는 청년들의 피나 콜로세움에서 흘리는 검투사들의 피도 희생제물의 피다. 그것은 피를 봐야 한동안 인간집단의 폭력성이 잠잠해지고 평화가 깃드는 희생양 메커니즘에 속한다.
고대 말기에 크게 유행한 아카데미학파의 회의주의의 등장은 인간의 폭력성을 정화할 진정한 길을 인문주의에서 찾을 수 없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유럽은 기독교라는 새로운 길로 들어섰다. 기독교는 인문주의도 아니고, 성별된 희생제물을 신에게 드려 액을 막고 은총을 구하는 그런 종교도 아니다.

기독교

신학교에서 아우구스티누스의 원죄론을 가르치는데, 원죄가 개인의 잘못을 지적하는 것이라면 성악설에 기초한 도덕교육과 다를 바 없다. 그러나 원죄론은 성악설이 아니고 비극적 상황에 처해 있는 인간에 대한 연민을 드러내는 데 그 초점이 있다. 그리고 원죄는 개인의 죄보다는 세상의 죄를 가리킨다. 원죄란 세상 사람들이 당연하게 알고 살아가는 방식, 곧 제도와 관습과 인식에 들어 있는 죄를 가리킨다. 다시 말해 원죄는 구조 악을 가리킨다. 구조가 악하니 그 구조 안에서 사는 사람들이 모두 죄를 지을 수밖에 없다. 기독교의 원죄론은 서구 사회에 사회과학적 비판사상을 제공하였고 정치 메시아니즘을 제거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신학을 공부하는 여정에서 필자는 인간의 원죄에 대해 심각하게 느낀 적이 몇 번 있다. 유럽에서 마르크스의 이데올로기 비판을 공부하면서 아우구스티누스의 원죄론을 실감나게 깨달았다. 그리고 지라르를 공부하면서 인간의 원죄가 무엇인지 다시 한 번 생각할 수 있었다. 지라르는 모방이론과 희생양 메커니즘을 바탕으로 해서 기독교의 원죄론을 과학적으로 받아들인다.
사람이 평화를 만드는 방식에 죄가 들어 있다. 인류라는 종이 멸망을 피하고 존속하는 방식에 죄가 들어 있으니 누가 그 죄를 피할 수 있겠는가. 서너 명이 모여 노는 아이들 집단으로부터 직장이나 국가와 국제사회에 이르는 큰 공동체에 이르기까지 모든 집단은 희생양을 필요로 한다. 누구를 왕따로 만들면서 나머지 구성원은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즐긴다. 어떤 스캔들을 계기로 유명 연예인이나 정치인을 무차별 공격함으로써 군중은 쌓였던 폭력성을 해소하고 편안해진다. 인격살인은 제물살해의 현대판이다. 군중은 희생양에 굶주려 있다. 국제사회 역시 끊임없는 전쟁을 통해 평화가 유지된다. 전쟁의 지진대에 속한 민족이 피를 흘리는 조건으로, 지진대에서 먼 대부분 지역이 평화를 누린다.
지라르에 따르면 성서야말로 희생양 메커니즘을 고발한 최초의 유일한 문서이다. 물론 구약성서에는 제물을 신에게 드리는 종교의 흔적이 들어 있다. 그리고 신이 엄청난 폭력을 원하고 주도하는 대목들도 있다. 그러나 창세기와 시편과 욥기 등 많은 문서가 신 인식의 변화를 보여준 다. 구약의 예언자들에 따르면, 성서의 신은 제물을 바라지 않고 마음의 제물을 원한다. 희생제물을 바치는 종교를 통해 인류는 멸망을 면하고 존속할 수 있었기 때문에 성서에 그 흔적이 남아 있지만, 기본적으로 성서는 폭력으로 폭력을 막는 인류의 생존 방식을 비판하는 종교이다. 지라르는 성서가 희생양의 처지에서 그의 억울함을 대변하는 문서라고 본다.
인신공양에서 동물희생으로 바뀐 후에 전형적인 희생제물은 원래 양이 아니라 염소다. 냄새나고 성질이 사나워 밉상인 숫염소를 희생 제물로 바쳤다. 희생양을 가리키는 영어 ‘scape goat’도 염소를 가리킨다. 그러나 신약성서는 온순한 양을 희생제물로 지칭하며 희생양이란 말을 사용함으로써 집단살해의 대상이 죄 없이 억울하게 당하고 있음을 알린다. 그리스도의 죽음에 가담하는 제사장과 빌라도와 군중은 종교와 정치와 군중의 연대를 보여준다. 권력은 군중에게 있으며 종교와 정치는 군중의 요구에 따라 희생양을 만들어 종교권력과 정치권력을 유지 한다.
그처럼 희생양 메커니즘을 적나라하게 드러낸 기독교는 이전의 자연 종교와 완전히 다르다. 그리고 자연종교에서 벗어나려고 했던 인문주의와도 다르다. 인문주의는 개인의 악행을 드러내고 고치려 한 점에서 위대하지만, 집단의 죄를 몰랐다. 세상 전체가 돌아가는 방식 자체에 들어 있는 죄를 인식하지 못했다. 성선설에 기초하여 숭고한 인간정신을 내세운 인문주의 때문에 희생양을 찾는 집단폭력의 문제는 은폐되었다.
근대 인문주의 이후 신분해방을 통해 자유롭고 평등한 삶을 지향하는 현대사회를 지라르는 불안한 눈으로 바라본다. 신분해방은 발전이지만 동시에 인간의 모방욕망이 극대화되고 무한경쟁의 사회가 생겨났다. 그렇게 되면 풍요로워질수록 인간의 상대적 결핍은 더 커지고 그만큼 분노와 폭력성이 더 쌓이니, 더 크고 더 많은 희생양을 요구하게 된다. 인류의 진보에 대한 낙관론이 지배하던 19세기가 지난 직후 20세기에 들어서자마자 유례없는 대학살의 세계전쟁이 두 차례 발발한 것도 우연이 아니지 않을까. 그리고 소련 공산당의 1,000만 명 학살은 어떤가. 호메로스의 『일리아드』에서 아가멤논이 그리스 진영의 역병을 막기 위해 수백 마리의 소를 잡아 태워서 신에게 바치는데, 3,000년 후에 수천만 인간의 피를 뿌려야 안정을 찾을 만큼 현대문명은 그 어느 때보다 더 큰 모방욕망 속에서 폭력성의 증가를 향해 내닫고 있지는 않은가.
현대사회에서는 사람을 매장시키거나 죽이는 일이 정치 이데올로기를 위해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고, 그것이 정당한 처벌인 것처럼 정의의 이름으로 이루어진다. 그래서 라인홀드 니버는 현대사회가 그 어느 때보다 위선적이라고 말했다. 정의는 중요하지만 피의자에 대한 군중의 집단적 증오심의 폭발은 희생양을 잡는 집단폭력일 가능성이 크다.
희생양을 만들지 않는 일은 개인이 덕을 쌓는다고 되는 일이 아니다. 오히려 인간 세상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이 희생양으로 희생되고 있는지를 직시하는 일이 필요하다. 그리고 나 자신도 희생양을 만드는 일에 연루되어 있음을 보아야 한다. 기독교의 원죄론이 인류에게 주는 희망은 거기에서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십자가는 이렇게 말하고 있지 않은가. 하나님이 희생양이 되었으니 이제 너희끼리는 희생양을 만들지 마라. 희생양을 만들지 않으면서도 평화를 이루는 방식, 그것이 정치와 다른 종교의 영성이다. 정치는 군중의 증오에 바탕을 두고 힘을 키우고 질서를 만든다. 그러나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의 평화와 다르다.” 지라르는 새로운 평화의 가능성이 성령의 능력에서 나온다고 말한다. 성령의 사람은 그리스도의 증언자로서 사탄의 방식인 폭력의 악순환에 말려들지 않는다. 지라르는 복음서와 바울 서신의 핵심이 거기에 있다고 본다. 신앙은 기적이고 성령의 사람들은 소수이기 때문에 인류 문명에 대해 지라르는 낙관적이지 않다. 그러나 구원의 길은 분명히 거기에 있다는 것이 지라르의 유언이다.
모방이론과 희생양 메커니즘을 적용하면 성서는 어떻게 새롭게 읽히게 될까? 다음 회부터는 지라르의 성서해석을 살펴보며 기독교 신앙의 특징을 알아보기로 하자.


양명수 | 기독교윤리를 전공했다. 저서로 『아무도 내게 명령할 수 없다: 마르틴 루터의 정치사상 과 근대』 등이 있다. 이화여대 기독교학과 명예교수이다.

 
 
 

2021년 3월호(통권 74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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