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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me > 기독교사상 > 성서와설교 > [예수에게 길을 묻다 07]
성서와설교 (2021년 1월호)

 

  폴라니의 경제인류학과 큐 예수의 '오래된 미래'
  

본문

 

너희가 되돌려 받을 가망이 있는 이들에게만 꾸어준다면 무슨 인정을 받겠느냐? 죄인들도 고스란히 되돌려 받게 될 줄 알면 서로 꾸어준다. 그러나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고 그들에게 좋은 일을 하여라. 또 되돌려 받을 생각하지 말고 꾸어주어라. 그러면 너희가 받을 상이 클 것이다. 그리고 너희는 지극히 높으신 분의 아들이 될 것이다.(눅 6:34-35Q)
If you lend money to those from whom you expect repayment, what credit (is) that to you? Even sinners lend to sinners, and get back the same amount. But rather, love your enemies and do good to them, and lend expecting nothing back; then your reward will be great and you will be children of the Most High.(Luke 6:34-35)


폴라니의 경제인류학

사회주의가 몰락한 이후 지구촌을 지배하는 경제체제는 자본주의 시장경제로 일원화되었다. ‘이윤’이라는 동기와 수요공급의 원칙을 두 날개로 하는 시장자본주의 경제는 사회적 불평등, 전통사회의 해체, 나아가 지구촌 생태계 파괴의 주요 원인이 되고 있는 것이 오늘의 현실이다.
헝가리의 경제학자 칼 폴라니(Karl Polanyi)는 자본주의 시장경제체제의 묵시적 종말을 예견하면서, 앞으로 세계 경제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오래된 미래’(ancient futures)에서 찾고 있다. 인류 역사에서 존재해온 다양한 비시장적 경제 요인들과 가치를 회복함으로써 시장 자본주의를 넘어선 바람직한 미래의 경제체제를 설계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그는 경제학과 사회인류학을 접목시켜 경제인류학이라는 새로운 경제 용어를 만들어내었다. 사회가 인간관계의 총체라면, 특권을 가진 소수층만이 아니라 구성원 모두가 인간다운 삶을 살도록 네트워크를 만들어야 할 것이다. 전통사회에서 경제는 사회를 구성하는 정치, 문화, 종교 등 다채로운 비경제적 요인들과의 연관성 가운데서 자기 역할을 해왔다.
고대의 도시국가, 봉건제 사회, 중세의 자치 도시, 중상주의 체제에서 확인된 사실은, 개인의 경제행위가 자율적으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포괄적인 사회의 제(諸) 관계에 의해서 규정되며, 사회의 공공(公共) 가치에 의해 제약된다는 것이다. 폴라니는 고대 전통사회가 가진 도덕 경제의 특성으로 호혜(reciprocity), 재분배(redistribution), 공공(公共)의 살림살이(households)라는 3대 원칙을 꼽았다.
자본주의 시장경제의 특징은 무엇인가? 이윤의 극대화이다. 수요공급에 의한 가격 결정이다. 이 두 가지 요인에 의해 경제는 자기 목적성을 따라 움직인다. 사회를 움직이는 제 관계를 시장자본의 논리에 복속시켜 사회 전체를 그 통제 아래 둔다. 시장경제는 스스로 자기 조정 능력을 상실하고, 자본 증식의 논리를 따라 움직인다. 그 과정에서 대다수 인간은 비인간화되고, 자연은 소외된다.
시장자본주의 체제하에서 전통사회를 주도하던 도덕 경제는 해체되고, 공동체적 가치 또한 붕괴된다. 인간의 도덕적 본성인 양심은 찾아볼 수 없고, 노동은 상품화된다. 자연 또한 즉물화(卽物化)되어, 인간 욕망을 위한 착취의 대상이 된다.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 존재한다.”(마 2:27, 이하 필자 사역) 2,000년 전 예수께서 선언한 인권대헌장은 오늘날 자본주의 시장경제에 대해서도 그대로 적용된다. 시장자본주의를 위해 인간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모두를 이롭게 하는 공공선(公共善)의 도구로 자리매김되어야 한다.
일찍이 인류 역사에서 인간의 욕망을 무한히 긍정하고 과생산(過生産)과 과소비(過消費)를 미덕으로 삼는 경제체제는 없었다. 자본주의 시장경제체제가 유일한데, 이는 현재 전 세계의 시민이 경험하고 있듯이 인류 공공의 가치를 무화(無化)시키고, 재앙을 불러일으킨다.
자본주의 시장경제에 대해서 신고전파 경제학(neoclassical econo-mics)은 어떻게 평가하나? 그들은 시장을 자율에 맡기면 생산과 소비가 가격에 의해 적절히 조화를 이루며 경제가 성장하고, 사회도 안정된다고 보았다. 이에 근거해 그들은 정부의 시장 간섭을 배제하는 ‘작은 정부론’을 폈다. 그들은 인간이 자기의 이해관계에 따라 생각하고 움직인다는 점에서 인간을 합리적인 존재로 보았다. 인간은 자기에게 이로운 것은 받아들이고 해로운 것은 멀리하는 ‘호리피해’(好利避害)라는 동기로 움직인다고 이해하고, 이러한 이기적인 동기를 경제발전의 근본으로 삼았다.
폴라니는 이러한 신고전파 경제학의 인간 이해를 비판하면서, 전통사회에서 볼 수 있는 인간의 보편적 선의지(善意志)에 주목했다. 그는 인간의 본성을 현대 자본주의 시장경제 문명에 도사리고 있는 이기주의에서 찾은 게 아니라, 전통사회를 주도했던 도덕 경제에서 찾았다. 인간의 보편적 가치인 ‘양심’에 기초한 사회적 제 관계, 상부상조, 협동의 경제학에서 찾았다. 그는 모든 인간이 인간답게 살 수 있는 바람직한 사회의 모습을 현대 자본주의 시장경제 시스템에서가 아니라, 전통사회의 공동체 중심의 경제체제에서 찾았던 것이다.
폴라니가 경제인류학에서 말하고자 하는 ‘모두를 이롭게 하는 사회적 제 관계의 회복’은, 필자에게는 맹자의 성선설(性善說)을 떠올리게 한다. 2,300년 전 맹자는 인간은 선천적으로 타고난 본성이 있는데, 그것을 ‘양심’이라 했다. 나(에고)에게 이롭거나 해로운 것을 따지는 것이 ‘욕심’이라면, ‘양심’은 모두에게 이롭고 해로운 것을 따진다. 모두에게 이로운 것이 선이라면, 모두에게 해로운 것이 악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창조주로 믿는다면, 하나님께 이로운 것이 선이고, 하나님께 해로운 것이 악이다.
맹자는 인간의 본성인 양심에 각인되어 있는 유전자를 사단지심(四端之心)이라 했다.

어려움에 처한 사람을 측은하게 여기는 공감의 마음(共感心), 남에게 해를 끼치지 않으려는 정의로운 마음(正義心), 남과 조화를 이루려는 겸애의 마음(兼愛心), 사물을 바르게 판단하려는 지혜의 마음(智慧心)이 그것이다. 사단은 인간이 공동체를 이루며 더불어 살아가는 데 없어서는 안 될 필수적이고 기본적인 요소이다. 인의예지의 싹인 사단은 후천적으로 습득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갖고 태어난 인간의 본성이요 하늘의 명령(天命)이다.

폴라니가 꿈꾸는 경제인류학, 전통사회의 휴머니즘적인 사회적 제 관계의 회복과 유대 강화는, 필자에게는 일찍이 동양의 인문주의 문화 사상에서 찾아볼 수 있는 모두를 이롭게 하는 ‘홍익인간’과 양심이 지배하는 ‘이화세계’(理化世界) 구현에서 그리 멀지 않게 느껴진다.
자본주의 시장경제에 의해 인간의 사회적 본성이 점점 파괴되고, 전 세계적으로 사회적 소수자들이 확대되는 현상을 보며, 폴라니는 전 지구적 시장자본주의가 인류 역사 발전에서 필연적인 것도 아니고 자명한 것도 아니며, 절대적인 것도 아니라고 보았다. 사회는 인간에 의해서 구성된 것이므로, 사회의 모순은 인간의 의지 여하에 따라 개조되고 변혁될 수 있을 것이다.
폴라니는 자본주의 시장경제 논리를 넘어, 경제인류학에 의거한 새로운 경제모델을 창출해야 할 시대가 왔다고 보았다. 인간과 인간, 인간과 자연이 공존할 수 있는 협동과 자치에 기반을 둔 도덕 경제 공동체를 모색하고, 모두가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인정받고 인간다운 삶을 살 수 있는 휴머니즘 사회를 건설해야 할 때가 온 것이다.
고대의 전통사회에서 경제는 사회적 제 관계의 일부로서 사회적 가치, 관습, 상부상조하는 공동체의 운영 원리에 총체적으로 포섭되는 도덕성을 지니고 있었다. 경제는 인간 사회의 여러 활동 중 하나로서 모든 사회 구성원을 위한 생계 논리, 배려, 유대를 근간으로 하는 인간관계의 속성에 의해 움직여왔다. 모두를 위한 사회적 제 관계의 회복과 상호작용에 의해서 본래적 모습의 ‘지구촌 살림살이’로서의 경제, 곧 “모두의 이익을 위한 선”으로서의 경제를 회복하는 것이 경제인류학의 지향점이라고 볼 수 있다.

예수 시대의 갈릴리

폴라니의 경제인류학을 응용하여 큐의 예수운동을 살펴보자. 예수는 갈릴리 촌락에서 소농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서른 살쯤 되어 갈릴리 촌락을 주유(周遊)하며 제자들을 모으고 갈릴리 토착민을 대상으로 하나님 나라 운동을 펼쳤다. 그것은 갈릴리 농민의 인권신장을 위한 운동이라는 성격을 띤다.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는 출애굽 사건에서 시작된다. 기원전 13세기경, 이집트에서 강제노역을 하던 히브리 노예집단은 모세의 인도로 파라오의 압제에서 탈출했다. 그들은 반세기에 걸친 떠돌이 광야생활 끝에 가나안 땅에 정착했다. 히브리 노예집단, 곧 이스라엘은 가나안에 정착하면서, 특정 인간을 왕으로 세우지 않고 지파동맹 공동체를 형성했다. 일종의 신정정치(神政政治)를 펼친 것이다. 지파동맹의 건국 이념은 평등주의(egalitarianism)였다. 하나님 앞에서 모든 지파 사이에 차별이 있을 수 없고, 평등과 협동을 통치의 근간으로 삼았다.
모세의 계약을 근본 이념으로 삼은 이스라엘의 지파동맹은 약 200년간 지속되었다. 하지만 이 체제는 주변 열강들의 침략과 내부 분열로 인해 와해되었다. 왕 중심의 군주국이 탄생한 것이다. 사울 왕의 뒤를 이은 다윗 왕조는 군대, 행정관료, 성전 제사장 계층을 중심으로 권력 카르텔을 형성했고, 남과 북 사이에 차별화정책을 실시했다. 다윗 왕조의 차별화정책에 불만을 품은 북이스라엘은 솔로몬이 죽자 남유다와는 별도로 북이스라엘 왕국을 세웠다.
북이스라엘은 호세아 왕 9년, 기원전 722년 앗수르에 멸망했다. 그 후 외세의 지배하에 있다가, 기원전 104년 하스몬 왕가 시절에 유다의 행정구역으로 편입되었다. 기원전 63년 로마의 폼페이우스는 하스몬 왕가를 멸망시키고 이방 이두매 사람 헤롯을 내세워 허수아비 정권을 세웠다. 로마는 예루살렘 성전의 대제사장을 직접 임명하여 성전국가의 권력을 장악했다.
예수 시대에 갈릴리는 도시와 촌락으로 구성된 인구 20만 명 정도의 유다 행정구역이었다. 큰 도시로 세포리스(1만 5,000명)와 티베리아스(2만 명)가 있었다. 헤롯 안티파스는 기원후 18년 갈릴리 호수 서쪽에 로마 황제의 이름을 딴 티베리아스라는 신도시를 건설하고 이곳을 행정수도로 삼았다. 중소 도시로는 벳새다, 고라신, 막달라, 게네사렛, 가나가 있었다. 예수 운동의 중심지였던 가버나움은 인구 1,000명 미만의 소도시였고, 그곳에는 백인 대장이 통솔하는 로마 부대가 주둔하고 있었다.(눅 7:1-10Q)
그리고 갈릴리에는 200여 개의 전통적인 촌락이 산재해 있었다. 한 촌락에는 대략 500명 미만의 주민이 모여 살았는데 갈릴리 인구의 절대다수가 이 촌락에 살고 있었다.
로마는 갈릴리를 통치하면서 도시화정책을 폈고, 로마식 궁전과 신전, 원형경기장과 극장, 목욕탕과 수도 등을 건설했다. 토착 귀족들은 도시에 거주하면서 호화로운 생활을 했다. 도시 건설을 위해서 소농들이 동원되었고, 그들은 과중한 세금과 노역에 시달려야 했다. 로마, 헤롯 왕조, 예루살렘 성전이라는 삼중의 수탈구조하에서 갈릴리 농민들의 삶은 날로 피폐해졌다. 빈부 및 문화적 격차로 인해 도시와 농촌 간의 사회적 불평등과 갈등은 심화되었다.
그럼에도 전통적인 촌락에는 이스라엘 지파동맹의 모세 계약, 해방 전통, 평등주의 전통이 맥을 이어오고 있었다. 십계명, 안식일법, 희년법, 노예해방법 등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상부상조의 전통이 갈릴리 촌락공동체에 보존되고 있었다.
그런데 로마의 노예제 경제 시스템에 편입되면서, 갈릴리 토착 농민들은 경제적 빈곤, 질병, 정신질환에 시달렸고, 계속되는 자연재해로 빚더미에 올라앉게 되었다. 촌락에서 맥을 이어오던 모세 계약과 해방 전통이 와해되고 있었다.
도농(都農) 간의 빈부 격차, 귀족과 농민 간의 사회적 갈등, 그리고 모세 계약과 해방 전통이 와해되는 정체성 위기의 한복판이 큐 예수가 벌인 하나님 나라 운동의 현장이었다.
예수의 가르침을 복음의 본질로 삼았던 큐 교회는 역사에 존재한 첫 기독교 공동체였을 것이다. 주된 구성원은 나사렛, 가나, 가버나움 출신의 소농들로 추정된다. 그들은 북이스라엘의 모세 계약과 해방 전통을 계승하는 데 철저했다. 모세의 계약 정신을 회복하고 율법의 근원으로 돌아가자는 큐 교회의 예수운동은, 스웨덴의 환경운동가 헬레나 노르베리 호지(Helena Norberg Hodge)가 라다크의 전통사회에서 배운 협동과 자치의 공동체를 기록한 『오래된 미래』(Ancient Futures-learning from Ladakh)에 상응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내가 율법이나 예언자들의 말을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마라.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도리어 완성하러 왔다. …하늘과 땅이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한 자, 한 획도 결코 없어지지 않고 다 이루어질 것이다. 누구든지 이 계명들 가운데 가장 작은 것 하나라도 어기고, 또 사람들을 그렇게 가르치는 자는 하늘나라에서 가장 작은 사람이라고 불릴 것이다. …너희 의로움이 율법학자들이나 바리새파 사람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지 않는다면,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마 5:17-20Q)

큐 예수의 “오래된 미래” 운동

갈릴리 촌락의 빈농(貧農) 중심으로 펼쳐진 큐 예수의 하나님 나라 운동은 모세 계약의 휴머니즘 전통과 사회정의 구현을 내세운 예언자 전통의 맥을 잇고 있다. 가난한 사람들을 비롯한 사회적 소수자들과 더불어 살아가는 상부상조 전통이 살아 있었다. 큐 예수는 어떻게 사는 것이 인간다운 삶인가를 알려주기 위해 자연에 있는 미물의 삶의 방식을 상기시킨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목숨을 위해서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마라. …공중의 새를 보라. 뿌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곳간에 모아들이지도 않으나,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기르신다. 너희는 그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너희 가운데 누가 걱정함으로 키를 한 자인들 늘릴 수 있겠느냐?(마 6:25-29Q)

공중의 새들은 씨를 뿌리지도 않고, 거두어들이지도 않는다. 곳간에 쌓아두지도 않는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그것들을 기르신다. 들에 핀 꽃은 어떤가? 실을 내지도, 옷감을 짜지도 않는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것들을 입히신다.
공중의 새와 들에 핀 꽃들이 염려하지 않는 일들이 무엇인가? 씨 뿌리고, 수확하고, 곳간에 거두어들이는 일이다. 실을 뽑고 옷을 짓는 일이다. 촌락의 농부와 아낙들이 하는 일상생활, 곧 의식주이다.
의식주를 위해 온종일 일하고 염려해도 가난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는 소농들을 향하여 큐 예수는 말한다. 자연에서 살아가는 미물도 그것들을 염려하지 않아도 사는데, “하물며 너희일까 보냐?”(마 6:30Q) 이는 인간의 생명이 다른 생명에 비해 우월함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의식주에 대한 염려에서 해방되지 않는 한, 인간은 자기의 본래 모습을 찾을 수 없다는 뜻이다. 인간(에고)은 의식주에 대한 염려에서 벗어날 수 없다. 먹고 입어야 생명을 지탱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어떻게 의식주에 대한 염려에서 벗어날 수 있는가?
하루는 어려서부터 십계명을 성실히 지켜온 부자 청년이 예수께 와서 영생을 얻는 방법을 묻는다. 예수는 그에게 율법을 지키는 것 외에도 소유를 팔아 가난한 사람들과 나누라고 한다. 그 말을 듣고 그냥 돌아가는 부자 청년의 모습을 본 예수는 부자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귀로 빠져나가는 것이 더 쉽다고 제자들에게 말한다. 그렇다면 “누가 구원받겠는가?” 하고 제자들이 수군거렸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말한다. “사람에게는 불가능하지만, 하나님께는 그렇지 않다. 하나님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기 때문이다.”(막 10:25-27)
사람은 할 수 없으나, 하나님은 하실 수 있다. 적어도 하나님 자녀라면, 하나님의 힘으로 살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성령의 능력을 의지하여 살아갈 때, 의식주를 위한 염려에서 벗어난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이다. “먼저 그 나라와 의로움을 구하여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더하여 주실 것이다.”(마 6:33) 적어도 하늘 아버지의 자녀로 살아간다면, 의식주보다 더 고차원적인 가치를 추구해야 한다. 하늘 아버지께서 계신 곳, 곧 그 나라(basileia)가 어디인지, 그리고 어떻게 사는 것이 그분의 뜻에 합당한 것인지(dikaiosyne)를 찾아야 한다. 하늘 아버지가 현존하시는 장소는 어디인가? 하나님의 영이 계신 곳이다. 성령의 능력 안에서 살아갈 때 하나님의 임재를 느낄 수 있다. 성령의 뜻은 양심으로 표현된다. 양심을 구현하는 삶을 통해서 하나님의 의로움을 찾게 된다.
큐는 인간의 본성(本性)을 하늘 아버지 뜻이 구현된 나라와 의로움을 구하는 데서 찾는다. 의식주를 위한 지나친 에고의 욕망에서 벗어나 성령의 뜻인 양심의 법도에 따라 살라는 것이다. 나의 이해관계에 매몰되어 살지 말고, 모두를 이롭게 하는 양심을 따라 사는 것이야말로 하나님 자녀로서의 길이라는 것이다. 모두를 이롭게 하는 삶을 살 때, 나머지 문제는 저절로 해결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이론을 초월해 체험을 통해서 획득될 수 있는 진리이다. 이러한 예수의 메시지는 하루하루 힘들게 살아가는 갈릴리 촌락의 주민들과 큐 교회 구성원들에게 삶의 용기와 하나님에 대한 전적인 신뢰를 갖도록 한다.

너를 고소한 사람과 함께 법정으로 가는 도중에 얼른 타협하라. 그렇지 않으면 고소한 사람이 너를 재판관에게 넘겨주고 재판관은 교도관에게 내어주어 네가 감옥에 갇힐 것이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네가 마지막 한 푼(고드란트)까지 다 갚기 전에 결코 거기에서 나오지 못할 것이다.(마 5:25-26/눅 12:57-59)

갈릴리 지방은 자주 흉년이 들었다. 자연재해가 계속될 때마다 소농들은 먹고살 길이 막막했다. 그들은 땅을 담보로 지주들에게 비싼 이자를 내고 돈을 빌려야 했고, 빚을 갚지 못하면 땅을 잃고, 심한 경우 채무노예로 팔리고 감옥에 갇히는 일이 다반사였다.

위의 말씀은 예수 시대 갈릴리 소농들이 처한 일상적인 채무 상황을 여실히 보여준다. 촌락의 농민들이 빚을 갚을 수 없는 형편에서 도시의 법정에 섰을 때, 판사로부터 자비로운 판결을 기대하기란 불가능했다. 빚을 다 갚기 전에는 감옥에서 풀려날 수 없었다.
예수 시대, 로마의 화폐 단위로는 렙돈(눅 21:1-4), 고드란트(막 12:42), 앗사리온(마 10:29), 데나리온(막 14:3-5), 드라크마(눅 15:8-9), 므나(눅 19:12-27), 달란트(마 18:24-35)가 있다. 데나리온과 드라크마는 일용직 노동자의 하루 품삯에 해당한다. 1므나는 100드라크마, 그리고 1달란트는 6,000드라크마에 해당한다. ‘한 푼’으로 번역된 고드란트(Quadrans)는 로마의 동전 중 가장 작은 화폐 단위이다. 렙돈의 두 배, 앗사리온의 4분의 1이다. 현재 화폐 가치로 환원하면 대략 1,000원에 해당한다.
같은 맥락에서 큐 예수는 제자들에게 “우리가 우리에게 빚진 이웃에게 부채를 탕감해준 것같이, 우리 죄를 탕감해주소서.”라고 기도하라고 가르친다.(마 6:12/눅 11:4) 하지만 이 기도는 채무 농민들이 빚을 갚지 못할 때 감옥에 가두거나 채무노예로 만드는 당시 사회적 관행을 비판하고 있다. 빚 탕감이 하나님께 죄 용서를 비는 전제조건으로 제시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웃의 채무를 탕감해주라는 예수의 주기도문은 당시 로마 노예제 사회구조하에서 무자비한 채무상환제도로 인해 삶의 벼랑 끝으로 몰린 갈릴리 농민의 비참한 현실을 반영하고 있다. 큐 예수의 ‘채무탕감운동’은 기득권 세력에게는 사회적 도전으로 다가왔을 것이고, 엄청난 사회적 반향(反響)을 일으켰을 것이다.
큐 예수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간다. “너희가 되돌려 받을 가망이 있는 이들에게만 꾸어준다면 무슨 인정을 받겠느냐? 죄인들도 고스란히 되돌려 받게 될 줄 알면 서로 꾸어준다. 그러나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고 그들에게 좋은 일을 하여라. 또 되돌려 받을 생각을 하지 말고 꾸어주어라. 그러면 너희가 받을 상이 클 것이다. 그리고 너희는 지극히 높으신 분의 아들이 될 것이다.”(눅 6:34-35Q) 이 말씀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조건으로 무엇이 제시되었는가? 어려운 이웃이 도움을 요청할 때, 빈손으로 돌려보내지 말라는 것이다. 그런데 꾸어주되, 돌려받을 생각을 하지 말라고 한다. 꾸어주었으면, 그것으로 끝내라는 것이다. 꾸어주었다는 생각에 사로잡히면, 돈도 잃고 친구도 잃게 된다.
큐에서 원수는 누구를 지칭하는가? 막연하게 로마나 박해자들을 지칭하지 않는다. 본문의 맥락에서 볼 때, 원수는 채무자 친구를 지칭한다. 돈을 꾸어주었다는 생각을 버리면 돈만 잃는다. 그러나 그 생각을 버리지 못하면 돈도 잃고 친구도 잃는다. 친구가 원수가 된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의 본뜻은 본문의 맥락에서 친구나 이웃의 채무를 탕감해주라는 것이다. 그렇게 할 때 더 많은 상을 받게 될 것이며, 하나님의 아들이 될 것이라고 한다.
불교에서는 베풂의 정신으로 삼륜청정(三輪淸淨)을 말한다. 주는 사람(施者), 받는 사람(受者), 물건(施物) 모두가 깨끗할 때 공덕이 제일 크다는 말이다. 베풀고 나서 생색을 내는 것이 아니라, 베풂 자체로 끝내야 오래간다는 것이다. 세상의 모든 관계는 주고받는 구조로 이루어져 있다. 하지만 어떤 대가를 염두에 둔 거래는 오래가지 못한다. 내가 누구에게 무엇을 베풀었다는 생각을 갖지 말고 베푸는 것이다.
큐 예수는 빚으로 인해 파탄지경에 이른 갈릴리 농민들의 비참한 삶의 현실을 사회 전체의 문제로 보고 있다. 채권자와 채무자 모두가 살 길을 제시한다. 그것은 빌려준다는 생각 없이 빌려주고, 받았다는 생각 없이 받는 것, 곧 주되 준 사람이 없고, 받되 받은 사람이 없는 공적(空寂)하고 포용적인 하나님 나라의 경제질서를 통해서다. 큐 예수는 채무에 대한 기존의 사회적 관행을 타파하고, 사회 구성원 모두가 함께 사는 상부상조의 경제 모델을 제시하고 있다.


김명수 | 성균관대학교와 한국신학대학을 졸업하였으며, 독일 함부르크대학에서 예수말씀복음 큐(Q)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Dr. theol.) 지은 책으로는 『큐복음서의 민중신학』, 『역사적 예수의 생애』 등이 있다. 경성대학교 명예교수이며, 충주에 있는 노인요양시설 ‘예함의집’에서 치매 어르신들을 돌보는 일을 하고 있다.

 
 
 

2021년 2월호(통권 74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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