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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me > 기독교사상 > 성서와설교 > [바울 구원론의 탐구 12(마지막회)]
성서와설교 (2021년 1월호)

 

  비참한 사람인 이 '에고'
  로마서 7장 22-24절

본문

 

내가 속사람으로는(‘카타 톤 에소 안드로폰’) 하나님의 법을 함께 즐거워하고 있으나(‘쉬네도마이’의 현재; 진심으로 승인하다), / 내 지체들 속에 있는 딴 법(‘헤테로스 노모스’)이 내 이성의 법에 대항하여(‘안티스트라튜오마이’의 분사 현재; 대항하여 전쟁을 일으키다), 내 지체들 속에 있는 죄의 법에 나를 사로잡는(‘아이크말로타조’의 분사 현재; 포로가 되게 하다) [것을] 보기 때문입니다(‘가르’). / 나는(‘에고’) 비참한(형용사 ‘탈라이포로스’; 불쌍한, 고생하는) 사람(‘안드로포스’)입니다. 누가 나를 이 죽음의 몸으로부터(‘에크’) 끌어내어 주겠습니까?(‘흐류오마이’의 미래; 구출하다)-롬 7:22-24 (이하 필자 사역)

로마서 3장 9절을 보면 바울은, “헬라 사람이나 유대 사람이나 모두가 죄 아래 있다.”라고 말한다. 누구라 할 것 없이 〈모두가〉 ‘구원되어야 할 존재’라는 뜻이다. 이어지는 10절에서 “의로운 자는 없다. 하나도 없다.”라고 말하는 것도, 이 구원과 무관하지 않다. 믿음으로 〈사람이〉 의로워져야 ‘의로운 자’라고 할 수 있지 않겠느냐는 뜻이기도 하다. 그러니까 로마서 3장 9-10절이야말로, 바울이 말하고자 하는 ‘구원론의 대전제’인 셈이다. 그리고 ‘모두가 죄 아래 있는’ 우리 삶의 현실을 보다 심도 있게 분석한 것이, 여기 로마서 7장이다. 더욱이 바울의 ‘경험적인 자기 고백’이 토로되고 있기 때문인지, 오늘을 사는 우리의 현실을 그대로 드러내 보여주는 것처럼 실감되기도 한다.
7장 전반부에서 말한 ‘죄와 율법의 상관성’을 근거로 필자는, 왜 바울의 구원론에서 ‘율법과는 무관하게’라는 말이 그리도 끈질기게 따라붙는지를 살폈다. 이번에는 7장 후반부를 중심으로 ‘죄와 죽음의 상관성’에 대해 살피면서, “누가 나를 이 죽음의 몸으로부터 끌어내어 주겠습니까?”(롬 7:24) 하고 탄식하는 ‘바울의 마음’을 함께 느껴보기로 하자.

왜 우리는 알지 못할까

7장 후반부의 첫 절인 13절은, 바울 특유의 자문자답식 화법으로 시작된다. “그렇다면(‘운’) 그 선한 것이 내게 죽음이 되었단(‘기노마이’의 과거 중간디포) 말입니까?” ‘그 선한 것이 내게 죽음이 되다니’, 언뜻 들어서는 무슨 소리인지 알아듣기 힘들다. 종속접속사 ‘운’(그렇다면)이 쓰였으니, 앞에서 했던 말을 살펴야 할 것 같다. 바로 앞 절인 12절이 눈에 들어온다. “율법이야말로 거룩하고, 계명도 거룩하고 의롭고 선합니다.” 그러니까 12절이 말한 ‘계명’을, 13절은 ‘그 선한 것’으로 달리 표현했음을 알 수 있다. 게다가 11절까지 거슬러 올라가서, “그 죄가 계명을 통하여 기회를 잡아 나를 속였고, 그것을 통하여 나를 죽였습니다.”(11절)라는 말까지 감안하면, “그 선한 것(계명)이 내게 죽음이 되었단 말입니까?”(13절) 하고 물을 수도 있겠구나 싶다. “그 율법이 죄입니까?” 하고 물었던, 7장 7절과 유사한 형태의 질문이다. 그때도 “그리되지 않았으면 합니다(‘기노마이’의 소원법).”라는 말로 그 질문을 뒤집더니, 여기 13절에서도 바울의 논리는 또다시 반전된다. “죄가 그 선한 것(계명)을 통하여(‘디아’) 내게 죽음을 만들어내는(‘카텔가조마이’의 분사 현재)” 데에는, 그 나름의 목적이 있었다는 것이다. “죄가 밝혀지기(‘화이노’의 가정법 과거 수동태) 위해서(종속접속사 ‘히나’)” 그랬다는 것이다.
하긴, 그러고 보니 그렇다. ‘그 선한 것’이 ‘죽음’을 만들어낼 리는 없다. 그렇다면 ‘내게 죽음을 만들어내는 것’은 분명 〈딴 놈〉이 아니겠느냐는 논리이다. 그래서 밝혀진 ‘딴 놈’이 바로 〈죄〉이다. 필자가 보기에 이 고백은, ‘선한 것’을 행한다고 하면서 결과적으로는 ‘악을 행했던’ 바울의 지난 삶에 대한 간접 고백으로 들린다. 이것을 13절 하반절은, “죄(‘하말티아’)가 계명을 통하여(‘디아’) 죄된 상태(형용사 ‘하말톨로스’)를 더 넘치게(‘카타 휘페프볼레’) 만든다(‘기노마이’).”(롬 7:13)라고 말하기도 한다. ‘하말티아’(죄)가 ‘하말톨로스’한(죄된) 삶을 더욱 증가시키는 것도, 〈계명을 통해서〉 그런다는 말이다. 일종의 ‘확신범’과도 같은 신념이다. 로마서 5장 20절에서, “율법이야말로 범죄를 증가시키기 위해서 개입했다.”라고 말하는 것도 그 뜻이다. 바꾸어 말하면, 신앙의 이름으로 더욱 타락할 수도 있는 것이 인간이라는 뜻이기도 하다.
빌립보서 3장 5-6절에서 말하는 바울의 자기 진술이, 그것을 반영한다. “여드레 만의 할례로, 이스라엘 족속 중에서도 베냐민 지파에 속한, 히브리 사람들 중의 히브리 사람이고, 율법을 따라서는 바리새파 사람입니다. / 열심을 따라서는(‘카타 젤로스’) 교회를 박해한 사람이고, 율법과 관계된 의로움을 따라서는(‘카타 디카이오쉬넨’) 흠 없이(형용사 ‘아멤피토스’) 된(‘기노마이’의 분사) 사람입니다.” 그가 자부하는 바와 같이, 베냐민 지파에 속한 ‘히브리인들 중의 히브리인’으로서, ‘율법적인 의로움’으로는 〈흠 없이 된 사람〉이었다는 것이다. 심지어 ‘바리새파 사람다운 열심’을 내세우며 〈교회를 박해한 사람〉임을 자랑하기까지 한다. 갈라디아서 1장 13-14절의 진술도 대동소이하다. “나는 하나님의 교회를 지나칠 정도로 줄곧 박해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줄곧 유린했습니다. / 나는 유대교 안에서 내 동족 중 많은 동년배들보다 줄곧 앞섰습니다.”
이쯤 되면, “죄는 그 선한 것을 통하여 내게 죽음을 만들어낸다.”라고 말하는 것이 실감된다. 선한 것을 행한다고 하면서 ‘악을 행했던’ 것을 바울은, “죽음을 만들어내는” 것으로 보고 있다. 그야말로 “죄가 밝혀지기 위해서”(롬 7:13), 그가 겪어야만 했던 바울의 지난 과거이다. 비싼 수업료를 지불하고서야, 비로소 ‘죄의 실체’를 깨닫게 된 셈이다. ‘선한 것을 행한다.’ 하면서 악을 행하게도 하고, 그렇게 악을 행하게 함으로써 죽음을 만들어내는 것이 죄라는 뜻이다. 알고 들으면 무서운 소리다.
그러나 더 무서운 것은, 15절의 말 그대로 “내가 만들어내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한다.”(롬 7:15) 하는 점이다. ‘내가 만들어내면서도’ 그것을 왜 〈나는〉 알지 못하는 것일까? 물론 ‘내가 만들어내는 것’이 죽음이기 때문에 그럴 수도 있다. 자기는 ‘선한 것’을 행한다고 생각하는 한, 그것이 ‘죽음’을 만들어내는 줄은 까맣게 모를 수밖에 없다. 앞에서도 말한 바와 같이, ‘선한 것’이 죽음을 만들어낼 리는 없다. 죽음을 만들어낸다 해도, 그건 어디까지나 〈내가〉 만들어내는 것이다. 14절에서 “율법은 영적이지만, 내가(‘에고’) 육적입니다.”(롬 7:14)라고 말하는 것이 그 뜻이다. 이 〈육적인 에고〉, 바로 이것이 자기 성찰을 통해서 바울이 깨달은 ‘자아’(自我)이다. 오늘날로 말하면, “신앙은 영적이지만, 목사인 내가 육적이구나.”라고 말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육적인 나’를 신앙의 이름으로 위장하며 사는 것에 우리는 이미 익숙해져 있다.
그렇다. 아무리 율법이 어쩌니 믿음이 어쩌니 해도, ‘나’라는 인간은 ‘육적인 존재’일 뿐이다. 이 ‘육적인 에고’를 바울은, “죄 아래(‘휘포 텐 하말티안’) 팔아넘겨져 온”(14절) ‘에고’라고 한다. 어떤 주석서는 “죄에 의해서” 팔린 것처럼 해석하기도 하던데, 그리되면 죄가 나를 팔아먹은 것으로 오해하기 십상이다. ‘피프라스코’(팔다, 팔아넘기다)라는 동사가 ‘분사 현재완료 수동태’로 표기되어 있음을,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율법은 영적이지만) “내가 육적(‘살키코스’)이다.”라고 말하는 것은, ‘내가’ 〈죄 아래 팔아넘겨진 에고〉이기 때문이라는 설명이다. 로마서 3장 9절에서 “모두가 죄 아래(‘휘포’) 있다.” 했던, 그 ‘죄 아래 사는 삶’을 보다 구체적으로 부연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죄 아래 팔려서’ 모두가 죄 아래 있게 되었다는 말이다. 이 말대로라면 우리 모두는, 마치 몸을 파는 윤락녀처럼, 제가 저를 팔아서 먹고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팔려도 비싸게 팔리기를 원하는 이 ‘기막힌 무지(無知)!’ “내가 만들어내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한다.” 했던 15절의 말은, 이 경우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이런 눈으로 보면, 잘나가는 사람들이 자랑하는 그 ‘연봉’(年俸)이야말로, 이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화대’(花代)의 다른 이름에 불과하지 않을까? 우리가 신봉하는 ‘자유’조차도 〈욕망 추구의 자유〉로 변질시키는 사회체제 속에서, 나는 지금 스스로를 창녀로 전락시키며 살고 있구나, 한 번쯤은 소스라치게 놀랄 만도 하다. 호세아서를 읽을 때마다 필자는, 예언자 호세아에게 하신 여호와의 말씀이 예사롭지 않게 들린다. “너는 가서 음란한 여자를 맞이하여, 음란한 자식들을 낳으라.”(호 1:2) 예언자
호세아에게는 ‘이스라엘 백성’이야말로, 그가 결혼한 ‘음란한 여자’였음에 틀림없다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이 말대로라면, 이 시대 우리 목사들이 하는 일도 ‘음란한 여자를 맞이하여 음란한 자식을 낳는’ 일 외에 다른 것일 수 없다는 생각이 든다. 어쩌면 음란한 자식을 낳아도 가능한 한 ‘많이 낳는’ 것을, 지금 우리는 ‘목회 성공’으로 착각하는 것은 아닐까? 그 ‘목회 성공’이라는 말 자체가, 죄가 우리를 속이기 위해서 만들어낸 말일 수도 있다고 생각하면, 이는 실로 두려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죄 아래 팔아넘겨져 온” 〈나〉, 그래서 “내가 만들어내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하는” 〈나〉, 아무래도 이 ‘에고’에 대한 더 깊은 이해가 있어야 할 것 같다.

죄와 나(‘에고’)의 관계

“그러나 이제(‘뉘니 데’), 그것(죽음)을 만들어내는 것은 더 이상(부사 ‘우케티’) 내(‘에고’)가 아니라, 내 안에 거하는(‘오이케오’; 거주하다) 죄(‘하말티아’)입니다.”(롬 7:17) 이 17절이, 13절의 물음(“그 선한 것이 내게 죽음이 되었단 말일까?”)에 대한 대답이다. 그런데 그 13절의 질문에서 17절의 대답을 얻기까지, 바울이 풀어내는 논리의 전개 과정은 이해하기 힘들 정도로 매우 아리송하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선한 것’이 ‘죽음’을 만들어낼 리는 없다. 그렇다면 과연 무엇이 ‘죽음을 만들어낸다’는 것일까? 그래서 드러난 것이 ‘죄’이다. 바울의 말을 빌리면, “죄가 밝혀지기 위해서” 죄는 선한 것을 통해서 내게 죽음을 만들어낸다는 것이다.
필자에게는 이 말이, 과거에 교회를 박해했던 ‘자기의 죄과’에 대한 바울의 간접 고백으로 들린다. 율법(계명)에 충실했던 자기의 ‘의로움과 열심’(빌 3:6)이, 결국은 남을 잡아 죽이는 일에 앞장서게 했다. 딴에는 ‘선한 짓’을 한다고 했는데 뒤늦게 깨닫고 보니 그것이야말로 ‘죽을 짓’이더라, 이렇게 말했으면 화끈하게(?) 들렸을 법도 하다. 그런데도, “그 선한 것이 내게 죽음이 되었단 말입니까?” 하고 구차스럽게(?) 되묻는다. 더욱 옹색한 것은, “그 선한 것을 통해서 내게 죽음을 만들어내는” 것을 〈죄〉라고 하면서, 마치 ‘죄’에 책임을 전가하듯이 말한다는 점이다. 말인즉 “죄가 밝혀지기 위해서” 그랬다는 것이다. 그것을 통해서 비로소 ‘나는 죄를 깨달았다.’라고 말하면 될 것을, 마치 남의 말 하듯이 ‘죄가 밝혀지기 위해서’ 그랬다고 한다. 물론 “율법은 영적이지만, 내가(‘에고’) 육적입니다.”라고 말하는 14절의 말로, ‘육적인 나’와 ‘죄’의 상관성을 놓치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7절에 이르면, 이러한 논조가 또다시 흔들리는 것처럼 보인다. 14절에서는 죽음을 만들어내는 것이 ‘나’(육적인 나)인 것처럼 말했는데, 17절에 이르면 “그러나 이제 더는 ~이 아니다”(‘뉘니 데 우케티’)라는 ‘두 개의 부사’로 말이 달라진다. “그것(죽음)을 만들어내는 것은, 더 이상 내가 아니라 내 속에 거하는 죄입니다.” 분명 죽음을 만들어내는 것은 ‘내가 아니다’라고, 마치 선을 긋듯이 못 박아 말한다. 내가 아니라, ‘내 속에 거하는 죄’가 죽음을 만들어낸다는 것이다. 〈나〉와 〈내 속에 거하는 죄〉를 구분하여 말하는 이러한 발상이, ‘죄’에 책임을 전가하는 것처럼 들려서, 도무지 갈피가 잡히지 않는다. 도대체 이런 말을 하는 바울의 의도가 뭘까?
필자의 생각에 바울의 이런 발상은, “내가 만들어내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한다.”(롬 7:15) 할 때부터 예상되었다. ‘만들어내는 나’와 ‘알지 못하는 나’를 분리해 말하는 것은 바울 나름의 ‘인간 이해’를 반영한 것으로서, 그의 구원론을 위한 ‘필수불가결한 전제’라는 인상을 지울 수가 없다. ‘죄 아래 있는 인간’(롬 3:9, 7:14)이 전제되어야, 〈사람이〉 의로워지는(롬 3:28) 것을 구원으로 설교할 수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필자가 이 대목에서 〈나〉와 〈내 속에 거하는 죄〉 사이의 ‘상관성’을 더 깊이 살피고자 하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15절 하반절에서 “내가 원하는 그것을 나는 행하지(‘프랏소’의 현재) 않고, 오히려 내가 미워하는 그것을 내가 행한다(‘포이에오’의 현재).”라고 말하는 것도, 바울의 이런 ‘인간 이해’에 근거한다.
생각해보라. 사람이라면 으레 ‘제가 원하는 것’을 행하게 마련이다. 가고 싶으면 가고, 오고 싶으면 온다. 그런데도 바울은 “내가 원하는 그것을 나는 행하지 않고, 오히려 내가 미워하는 그것을 내가 행한다.”라고 말한다.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 것일까? 내가 원하는 것을 ‘행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 〈내 속에〉 있다는 소리다. ‘내 속에 있는 그것’이, 오히려 내가 미워하는 것을 행하게 하더라는 소리다. 우리의 일반적인 ‘인간 이해’로는 쉬 납득되지 않는 말이다. 그러나 우리가 영위하는 일상사를 들여다보면, 이러한 인간 내면이 언뜻언뜻 내비칠 때가 있다. 필자가 즐겨보는, ‘전원일기’ 같은 농촌 드라마를 상상해보라. 동네 아낙네들 서너 명이 모여서, 찬밥을 양푼에 비벼 나눠 먹는다고 하자. 어떨 것 같은가? “어이구, 오랜만에 맛있게 잘 먹었다.” 하며 흡족하게 숟가락을 놓는 여자들이 있는가 하면, 그 비빔밥을 남기는 것이 아깝다며 끝까지 바닥을 긁는 여인도 하나쯤은 분명 있을 것이다. “내가 미쳤지 미쳤어.” 하면서도 계속 먹어대는 ‘아줌마(?) 심리’, 이런 심리가 누구에겐들 없겠는가. 아침에 출근하기 싫어서 꾸물대는 평범한 가장에서부터, 권력에 빌붙어 치부하는 이른바 ‘수재라고 하는 놈들’에 이르기까지, 겉보기와는 다른 그 ‘사람 속’을 어찌 다 미루어 짐작할 수 있겠는가. 어느 유행가 가수가 부른, “내 속에 내가 너무도 많아”라는 가사 그대로다. 너무도 많은 ‘내 속의 나’, 이것을 뭉뚱그려서 바울은 〈내 속에 거하는 죄〉라고 하는 게 아닐까 싶다.
돌이켜보면, “죄가 밝혀지기 위해서”라고 했던 13절의 그 말 한마디는, 17절에 이르러서야 “죽음을 만들어내는 것은, 내가 아니라 〈내 속에 거하는 죄〉입니다.”라는 말로 밝혀진 셈이다. ‘내 속에 거하는 죄’, 그 죄가 시키는 대로 살 수밖에 없는 까닭이 바로 이것이다. 내 속에서 죄가 주인노릇을 하는 한, 어쩔 수 없이 나는 ‘죄의 종’으로 살게 마련이다. ‘죄의 종’으로 사는 이런 삶을, 바울은 ‘죄의 몸’(롬 6:6)이라고 한다. 그리고 그 죄가 죽음을 만들어내기 때문에, 그 ‘죄의 몸’을 일러 ‘죽음의 몸’이라고 달리 부르기도 한다. “누가 나를 이 죽음의 몸으로부터(‘에크’) 끌어내어 주겠습니까?”(롬 7:24) 하고 부르짖는 것도, 구원을 갈구하는 ‘인간 실존의 비참함’에 대한 탄식일 것이다. 왜 인간이 〈구원되어야 할〉 존재인지, 왜 〈사람이〉 의로워져야 한다고 말하는지, 비로소 깨닫게 된 셈이다. 그러나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다. 소단락으로 치면, 다음 단락에 속한 것으로 보아야 마땅한 7장 18절이 그것이다.
그 18절에서 바울은 이렇게 말한다. “왜냐하면(‘가르’), 〈선한 그것이〉(중성) 내 안에도(‘엔 에모이’) 거하지 않고 내 육 안에도(‘엔 테 사르키 무’) 있지 않다는 것을, 나는 알아왔기 때문입니다.” 많은 주석가들이 잘못 해석하는 대목이, 바로 이 구절인 것 같다. 그들은 이 구절을, 14절(“율법은 영적이지만, 내가 육적입니다.”)과 연관된 것으로 본다. 〈육적인 나〉이기 때문에, “내 안에도” 또 “내 육 안에도” 선한 것은 있지 않다는 식으로 해석한다. 그래서 그런지 우리말 성서 모두가, 필자가 보기에는 오역이다. “내 안에, 곧 내 육신 안에는 선한 것이 있지 않다는 것을 나는 압니다.”라고 잘못 번역해놓고 있다. 내가 육적이기 때문에, 〈내 안에는 선한 것이 없다〉라는 식으로 잘못 이해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 18절의 “선한 그것”이 무엇을 말하는지를, 잠깐 놓쳐버린 것 같다. 13절 이후로 “그 선한 것”(τὸ ἀγαθόν)은, 줄곧 ‘계명’을 지시하는 말이었다. 그러니까 그 〈계명〉(‘엔톨레’; 명령)이 ‘내 안에도’ 거하지 않고 ‘내 육 안에도’ 있지 않다면, 그것은 〈밖에서 타율적으로〉 주어졌다고 볼 수밖에 없다. ‘내 속에 거하는 죄’가 ‘나’를 지배하는데, ‘밖에서 주어진 율법’이 무슨 대단한 영향력을 미칠 수 있겠는가. 이 ‘율법(계명)의 타율성(他律性)’이야말로 어쩔 수 없는 율법의 ‘윤리적 한계’임을, 바울은 말하고 싶었던 것이다. 마치 공부하기 싫어하는 아이에게 엄마가, 공부하라고 따라다니며 잔소리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고 본 것이다. 그렇게 해서 ‘말 잘 듣는 아이’를 길러낼 수 있을지는 몰라도, 그 아이가 ‘위선과 가식’에 길들여지는 것도 바로 그런 교육 때문은 아닐까? 그래서 바울도 18절 하반절에서, “그것(선한 그것)을 원함(‘델로’의 부정사)은 내게 있으나, 그 선(‘칼로스’)을 만들어냄(‘카텔가조마이’의 부정사)은 그렇지 않습니다.”라고 말했던 게 아닌가 싶다. 예수께서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을 비판하면서 ‘회칠한 무덤’ 같다고 하신 말씀이 생각난다. “이와 같이 너희도, 겉으로는 사람들에게 의롭게 드러나 보이지만, 속으로는 불법과 위선이 가득하다.”(마 23:28) 왠지, 오늘을 사는 우리를 두고 하시는 말씀 같지 않은가?
이쯤 되면, 왜 〈사람이〉 의로워져야 한다고 말하는지, 그러면서도 그 구원을 왜 〈율법과는 무관하게〉라고 말하는지, 비로소 우리도 깨닫게 된 셈이다.

구원되어야 할 나

로마서 7장 24절을 끝으로 약속했던 열두 번의 연재를 마치게 된 것도, 우연은 아니지 싶다. 인간 실존의 비참함을 탄식하는 이 구절이야말로, 구원을 갈구하는 모든 인간의 부르짖음이어야 마땅하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나(‘에고’)는 비참한(‘탈라이포로스’) 사람(‘안드로포스’)입니다.” 주어인 ‘에고’(나)를 분명히 밝히고 들어간다. 그뿐만 아니라, 이 〈나〉를 ‘비참한 〈사람〉’이라고 하면서 ‘안드로포스’(사람)라는 말 또한 잊지 않는다. ‘사람인 나’의 〈비참함〉을 탄식하고 있다. ‘탈라이포로스’라는 형용사의 사전적인 의미(심한 고난을 겪는, 불행한, 비참한, 고생하는)만으로는 실감하기 힘든, 삶의 질고를 총체적으로 이르는 말일 것 같다. 아마도 바울로서는, “죄 아래 팔아넘겨져서”(14절) 그 죄가 시키는 대로 ‘죄의 종’으로 살 수밖에 없는 인간이라는 뜻으로, “비참한 사람”이라 했을 것이다. 우리에게 익숙한 ‘생로병사’(生老病死)라는 말 그대로, 사람으로 ‘태어나 늙고 병들어 죽는’ 것 자체가 괴로움이니, 우리말 번역 성서처럼 “곤고한 사람”이라 이를 만하다. 어쩌면 요즘 젊은이들이 쓰는 “거지 같다”라는 시쳇말이, 그들에게는 훨씬 피부에 ‘팍팍 꽂히지’(?) 싶다. 입시지옥에 시달리느라 거지 같고, 등록금 때문에 아르바이트를 해야 하니 거지 같고, 졸업하고도 취직 못하니 거지 같고, 그런데도 휘고 젖히며 사는 강남 친구를 보니 더욱 거지 같고… 이래저래 인생이 거지 같을 것이다. 그러나 잘 먹고 잘살아도, 인생이 거지 같기는 마찬가지다.
요한계시록 3장 17절을 보라. ‘라오디게아교회’의 사자에게, 써 보내라 하면서 전하는 말이다. “너는 말하기를 ‘나는 부자다. 나는 풍족하고 부족한 것이 조금도 없다.’ 하지만 사실 너는 비참하고 불쌍하고 가난하고 눈멀고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고 있다.” 어떤가? ‘나는 부자다.’ 하는 너야말로, ‘비참하고 불쌍하고 가난하고 눈멀고 벌거벗었다.’라는 것이다. 자신이 비참하다는 것을 〈알지 못하니〉, 자신이 부자임을 내세운다는 것이다. 이러고 보면, ‘비참한 부자’도 있구나 싶다. 아니, ‘부자야말로 비참한 자’이구나 싶다. 못 먹고 못살아서 거지 같은 게 아니라, 잘 먹고 잘살아서 ‘더더욱 거지 같다’는 것을, 과연 그 ‘라오디게아교회’는 언제쯤 깨달았을까?
며칠 전 유튜브에서, 생계를 위해 목수 일을 하는 목사를 본 적이 있다. 평일에는 목수로 일하고 주말에야 목사로 돌아오는, 이른바 ‘이중직 목사’였다. ‘목사 목수’라고 부르든 ‘목수 목사’라고 부르든, 별로 개의치 않을 얼굴이었다. 그런데 그 얼굴 뒤에서, 태연하게 가난을 감내할 한 여인이 자꾸만 눈에 밟혔다. 그쯤 되면 그 ‘목사노릇’(?) 집어던질 만도 한데, 그렇지 않고 버티며 그 나름의 목회를 한다는 것이 그럴 수 없이 고마웠다. 오랜만에 뭔가 ‘거머잡은 사람’의 모습을 보는 것 같았다.
바야흐로 모든 허상이 벗겨지는 것 같은 시대로 접어들었다. 눈에 보이지도 않는 바이러스가, 지금까지와는 다른 삶의 패턴을 우리에게 강요하고 있다. 갑자기 인간이 그럴 수 없이 미미해 보이고, 어찌 보면 산다는 것이 별거 아니라 싶기도 하다. “사람으로 태어나 산다는 것 자체가 이런 것이다.” 하며, 이 삶의 허허로운 실상을 누군가가 우리에게 직면하게 하는 것 같다. “나는 비참한 사람입니다. 누가 나를 이 죽음의 몸으로부터 끌어내어 주겠습니까?” 이 바울의 탄식 섞인 질문이 우리 삶의 새로운 출발점이 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으랴. 말 그대로 ‘비참한 사람’이다. 더 살아보지 않아도 ‘거지 같은 삶’이다. 기왕 거지 같은 인생이라면, 한 번쯤 ‘진짜 거지’가 되어보는 것은 어떨까?
“영적인 거지는 복되다. 하늘나라가 그들 것이다.”라고 말한 분이 있다. 그러면서 하신 말씀이 기가 막히다. “의로움을 배고파하고 목말라하는 자는 복되다.” ‘〈의로움〉을 배고파하고 목말라하는 자’야말로, 진짜 거지라는 뜻이 아니겠는가. 모쪼록 배고파하며 살고, 목말라하며 찾자. 언제까지 ‘떠주는 밥’만 먹고 살겠는가. 누구도 대신해줄 수 없는 ‘한 번뿐인 삶’이라면, 살아도 내가 살고 찾아도 내가 찾아야 한다는 것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다.

* 강일상 목사님의 “바울 구원론의 탐구” 연재를 마무리합니다. 그동안 좋은 글 보내주신 목사님께 감사드립니다. -편집부


강일상 | 한국신학대학과 동 대학원을 졸업하였다. 『마가복음의 기적 이야기』, 『산상설교, 그 사람됨의 가르침』, 『부활되어야 할 부활』을 펴낸 바 있다. 지금은 은퇴하였다.

 
 
 

2021년 2월호(통권 74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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