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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me > 기독교사상 > 성서와설교 > [바울 구원론의 탐구 11]
성서와설교 (2020년 12월호)

 

  바울의 깨달음
  로마서 7장 9–11절

본문

 

나도(‘에고 데’) 전에는(‘포테’) 줄곧 율법 없이(‘코리스 노무’) 살았지만(‘자오’의 미완료), 그 계명이 오자 그 죄가 다시 살아났습니다(‘아나자오’의 과거). / 그리고 나(주어 ‘에고’)는 죽었습니다(‘아포드네스코’의 과거). 생명에 이르게 하는 것(‘헤 에이스 조엔’)인 그 계명(‘헤 엔톨레’), 바로 그것이(‘하우테’-그 계명이) 죽음에 이르게 하는(‘에이스 다나톤’) 것(계명)임이 나에게 깨달아졌습니다(‘휴리스코’의 과거 수동태). / 그 죄가 계명을 통하여(‘디아’) 기회(‘압홀메’)를 잡아(‘람바노’), 나를 속이고(‘엑사파타오’의 과거; 미혹하다, 기만하다) 그것을 통하여(‘디아’) 나를 죽였기(‘아포크테이노’의 과거) 때문입니다(‘가르’).”(롬 7:9-11, 이하 필자 사역)

바울의 구원론을 탐구하면서 필자는, ‘기존의 칭의론’이 어디에서부터 길을 잘못 접어들었는지를 줄곧 살펴왔다. 로마서의 헬라어 원문 번역에 매달린 것도, 바울서신의 어느 부분을 종교개혁자들이 잘못 읽었는지를 찾기 위함이었다. 칭의론에 대한 논의는 무성한데, 그러한 논의의 근거가 되는 성서에 대해서는 왜들 그렇게 등한한지, 필자로서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칭의론 자체를 가타부타하기보다는, 그러한 논의가 바울이 말하는 구원의 교설에 얼마나 합당한지를 묻는 것이 우선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하긴 우리 손에 쥐어져 있는 ‘우리말 성서’ 자체가 이미 칭의론에 오염(?)되어 있고 보면, 그런 우리말 성서를 근거로 칭의론을 문제삼는 일은 거의 불가능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 단적인 예가, 로마서 3장 28절이다. “율법의 행위들과는 무관하게(전치사 ‘코리스’; 별도로), 믿음으로(여격) 사람이 의로워지는 것으로 우리는 간주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필자의 사역이다. 이 사역을 근거로 필자는, ‘<사람이> 의로워지는’ 것을 구원으로 이해한다. 그리고 사람을 의로워지게 하는 그 ‘믿음’이, 왜 ‘율법의 행위들과는 무관한지’를 묻고 찾는다. 그런데 우리말 번역인 개역한글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라고 번역했다. 아예 노골적으로, ‘사람이 <의롭다 함을 얻는>’ 것에 초점이 모아지도록 번역했다. 그래놓고는, 왜 ‘율법의 행위’로는 사람이 의롭다 함을 얻을 수 없는지, 아무 설명도 없다. 이 기회에 여기 로마서 7장을 근거로, ‘율법에 대해서’ 바울이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는지를 함께 살펴보기로 하자.

왜 ‘율법과 무관하게’라고 할까

7장으로 접어들면, 그 초입에서부터 헷갈린다. 바울이 무슨 말을 하려고 하는지, 그것조차 감이 잡히지 않을 정도이다. “율법은 사람(‘안드로포스’)이 사는 시간(‘크로노스’)만큼만(‘에피 호소스’) 그 사람에게 주인노릇한다(‘퀴리유오’의 현재)는 것을, 여러분은 알지 못합니까?”(1절) “여러분은 알지 못합니까?” 하고 묻는, 이 첫 절부터 못 알아들을 소리다. 그러고는 ‘결혼한 여인’을 예로 들면서, 율법을 ‘그 남편’에 비유하여 말한다. 그래놓고는 “만일 그 남편이 죽으면”(2절) 하고 가정하지만, 어떻게 이런 가정이 성립될 수 있는지 이해하기 힘들다. 이뿐만이 아니다. ‘그 남편’이니 ‘딴 남편’이니 하는 말을 따라가다 보면, 이런 말을 하는 바울의 의중 자체가 오리무중이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1절부터 차근차근 씹어가면서 바울의 의중을 더듬어보기로 하자.
“여러분은 알지 못합니까?” 하고 묻는 말이니, 알긴 알아야 할 말임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율법은 <사람이 사는 시간만큼만> 그 사람에게 주인노릇한다.”(1절)라는 이 말이, 무슨 뜻으로 하는 말일까? 율법의 지배력이 ‘한시적’임을 암시하는 말 같다. 율법이 주인노릇하던 그 ‘사람이 죽으면’, 그 사람에 대한 율법의 지배력도 상실될 수밖에 없지 않겠느냐는 뜻으로 읽힌다. 그렇지만, ‘사람이 죽으면’이라는 이런 발상이 어떻게 가능한 것일까? 한참을 찾아 헤매다 보니, 더듬어지는 구절이 있었다. 6장 2절이다. ‘세례 받은 우리’를, “죄와의 관계에서(여격) <죽은 우리>”로 말했던, 바로 그 구절이다. 그러니까 ‘세례 받은 사람’은 율법의 지배 아래에서도 벗어나는 것으로, 바울은 이해했던 것이다. 바로 이것이, ‘율법과 무관한 의로움’(롬 3:21)을 말할 수 있었던 사상적 근거이다.
로마서에서 전치사 ‘코리스’(무관하게, 떨어져서, 별도의, ~ 없이)가 쓰인 용례를 찾아보면, 6회 중 5회가 ‘율법’과 연관되어 있다. “율법과 무관하게”(롬 3:21, 7:9), “율법의 행위들과 무관하게”(롬 3:28), “행위들과 무관하게”(롬 4:6), “율법이 없으면”(롬 7:8), 이 다섯 구절 모두가 ‘율법에서 벗어난’ 자유로운 삶을 전제한다. “결혼한 여인”(2절)으로 말하면, 그녀가 <묶여 있던> ‘그 남편의 법’(율법)에서 <풀려난> 것과 다름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야말로 “자유로운 여인”(3절)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 ‘자유로운 여인’의 <자발성>을, 바울은 매우 중요하게 생각한다. “<딴 남편(‘헤테로스 아네르’)을 얻더라도>, 간음한 여인은 되지 않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이 그 뜻이다. 그리고 이어지는 4절에서는 그 ‘딴 남편’을 “죽어 있는 자들로부터(‘에크’) 일으켜진 분”으로 밝히고 있다.
4절을 주의 깊게 살펴주기 바란다. “여러분도 율법과의 관계에서는(여격) 그리스도의 몸을 통하여(‘디아’) 죽임을 당했습니다(‘다나토오’의 과거 수동태).” “그리스도의 죽음 속으로 들어가는(‘에이스’) 세례”를 말했던 6장 3절과 연관시켜 보면, 세례 받은 자는 ‘율법과의 관계에서도’ 죽은 것이나 다름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더 풀어서 말하면,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임을 당하셨을 때, 우리도 그와 함께 죽임을 당한 것이나 다름없다는 소리다. 정작 중요한 것은, 전치사 ‘에이스’로 이어지는 그다음 말이다. “이것은, 여러분이 딴 사람(‘헤테로스’의 여격), 즉 죽어 있는 자들로부터(‘에크’) 일으켜진 분인, 그 딴 분과의 관계에서(여격) 만들어지기(‘기노마이’+여격) 위함(‘에이스’)입니다.” 바로 이것이, 율법이라는 ‘그 남편’에게서 벗어나 죽어 있는 자들로부터 일으켜진 분인 ‘딴 남편’을 얻는 까닭이고 목적이다. 그 딴 분과의 관계에서 〈만들어지기 위해> 그 딴 남편을 <얻는다>는 것이다.
그 딴 분과의 관계에서 <만들어지는> 것을, 바울은 <카이노스 크티시스>라고 한다. “만일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다면, 그는 새로운 피조물(창조물)입니다.”(고후 5:17)라고 말하는 것이 그것이다. “왜냐하면, 할례도 무할례도 무엇이 아니고, 오히려 새로운 창조만이 무엇이기 때문입니다.”라고 말하는, 갈라디아서 6장 15절에서도 똑같이 이 말이 쓰인다. 그러니까 바울은, 창세기의 인간창조만이 창조가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인간’으로 만들어지는 것도 ‘창조’로 보고 있는 셈이다. 7장 6절이 말하는 바 그대로, “법조문의 낡은 것(‘플라이오테스’) 안에서가 아니라, 영의 새로운 분(‘카이노테스’) 안에서 종노릇할 정도가(‘호스테’) 된 것이다.” 바울이 말하는 구원의 대명제인 3장 28절에 비추어보면, “율법의 행위들과는 무관하게, 믿음으로(여격) <사람이> 의로워지는” 것 자체가 <새로운 창조>인 셈이다.

율법이 죄인가

새로운 단락인 7장 7절로 접어들면서 바울은, 느닷없이 생뚱맞은 질문을 제기한다. “그런즉 우리가 말할(‘레고’의 미래) 것이 무엇(대문자 ‘티’)입니까? 그 율법이 죄입니까?” 바울이 즐겨 쓰는 자문자답식 화법이다. “그렇지 않았으면 합니다.”라는 말이 이어지는 것으로 보면, ‘율법에 대한 오해’를 우려해서 하는 말 같다. “그런즉”(‘운’)이라는 접속사가 쓰였으니, 앞에서 말한 그 어떤 말이 율법에 대한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고, 바울은 생각한 것 같다. 7장 4절로 되돌아가 보자. “그러므로(‘운’) 나의 형제들이여, 여러분도 율법과의 관계에서는(여격) 그리스도의 몸을 통하여(‘디아’) 죽임을 당했습니다(‘다나토오’의 과거 수동태).” 여기 쓰인 ‘죽임을 당했다’는 말은, ‘다나토오’(죽이다)라는 동사의 과거 수동태이다. 그리스도를 죽인 그 율법이, ‘여러분도 죽인’ 것이나 다름없다는 뜻이다. 이 말대로라면, 율법(‘노모스’)은 <죽이는 법>이지 ‘살리는 법’이 아니다. 오해할 만하다.
이뿐만이 아니다. 이어지는 7장 5절을 읽다 보면, 율법의 지배력이 미치는 영향이 사뭇 부정적이고 구체적이다. “참으로(‘가르’) 우리가 육 안에(‘엔 테 사르키’) 있을 때에는(‘호테’), 율법을 통해서 생겨나는(‘디아’) 죄의 감정들(‘타 파데마타 톤 하마르티온’)이, 죽음과의 관계에서(여격) 열매를 맺는(‘칼폽호레오’의 부정사) 것에 이르기까지(‘에이스’), 우리의 지체들 안에서 계속 활동하였습니다(‘에넬게오’의 미완료 중간태; 일하다).” ‘율법을 통해서 생겨나는 <죄의 감정들>’이라는 말이, 선뜻 와닿지 않는다. 더구나 <율법을 통해서> ‘죄의 감정들’이 생겨난다니, 도무지 모를 소리다. 그러나 경험해본 사람은, 이 소리가 무슨 소리인지를 안다. 어릴 적 기억을 떠올려 보라. 어머니가 어떤 상자를 선반 위에 올려놓고 장보러 가시면서 ‘절대 열어보면 안 된다.’ 하셨을 때, 어린 마음에 무슨 생각이 들던가? 그 감정이 어떤 것인지는, 말하지 않아도 뻔하다. 여기서 ‘죄의 감정들’이라고 할 때 쓰인 <파데마>라는 단어는, ‘외부의 자극으로 야기된, 육체적이고 정신적인 상태’를 의미한다고 한다. 마치 창세기의 타락설화에서 선악과를 ‘먹지 말라’고 했기 때문에 오히려 ‘먹고 싶어지는’ 것과 같은, 그런 감정이다. 누구나 힘들게 넘긴 ‘사춘기’의 경험에 비추어보면, 그 ‘죄의 감정들’이 “우리가 육 안에 있을 때에” 생겨난다고 말하는 것은, 십분 이해하고도 남음이 있다. 분명 바울도, 이런 말을 할 정도의 ‘영적인 사춘기’(?)를 겪었지 싶다.
7절 이하에서 털어놓는, 바울의 속마음을 느껴보라. “그 율법이 죄입니까?” 하고 묻고 나서, 그 말을 뒤집듯이 “그렇지 않았으면 합니다.”라고 말한다. 접속사 ‘알라’(오히려)로 시작되는 그다음 말에 ‘반전’이 있다. “오히려(‘알라’) 율법을 통해서(‘디아’)가 아니었다면(‘에이 메’), 나는 죄를 알지(‘기노스코’의 과거) 못했을 것입니다.” ‘일인칭 단수’(나)가 주어로 쓰인, 바울의 ‘경험적인 자기고백’이다. 그러면서 드는 예가, 조금은 억지스럽다. “율법이 ‘탐내지 말라’고 말하지 않았더라면, 참으로 나는 탐심을 알지 못했을 것입니다.” ‘탐심’이야 인간의 본성에 속하는 마음인데, 그걸 알지 못했다는 소리는 아닐 것이다. 그 탐심이 ‘죄인 줄 알지 못했다’는 소리를, 이렇게 말한 것 같다. 하긴 바울처럼 ‘잘나가던’(?) 인간에게는, 오늘날 성공한 목회자들도 마찬가지이지만, 탐심이 죄로 깨달아지는 데에도 비싼 수업료가 필요했을 것이다. 갈라디아서 1장 14절을 보면, 바울 스스로가 말하는 자기의 ‘과거 행적’이 찬란하게(?) 교만하다. “나는 유대교 안에서 내 동족 중 많은 동년배들보다 줄곧 앞섰습니다(‘프로콥토’의 미완료). 내 조상들에게서 생겨난 전승들(‘파라도시스’의 복수; 전통, 교훈)에 대해서도, 과도할 정도로(부사 ‘페릿소테로스’) 열성적인 사람(‘젤로테스’)이었습니다.”(갈 1:14) 왜 “하나님의 교회를 지나칠 정도로(‘카타 휘포르볼레’) 줄곧 박해했습니다(‘디오코’의 미완료).”(갈 1:13)라고 하는지, 충분히 감이 잡힌다. “나보다 앞선(‘프로 에무’) 사도들을 상대하러(전치사 ‘프로스’)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지도(‘아넬코마이’의 과거) 않았고, 아라비아로 떠났다가(‘아펠코마이’의 과거) 다메섹으로 돌아왔습니다.”(갈 1:17)라고 말하는 것도, ‘자기보다 앞선 사도들’이 그리 앞선 것으로 보이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이쯤 되면, 교만할 만하다. 남더러 “너도 나처럼 능력이 있으면 성공해보라.” 하고 턱을 치켜들 만하다.
이런 바울이, 율법을 통해서는 ‘죄를 인식’할 뿐이라고 말하며 ‘율법과 무관한 의로움’(롬 3:20)을 복음으로 전했다고 하는 것은, 그야말로 경천동지할 일이다. 이 글의 제목을 <바울의 깨달음>으로 정한 것도, 필자 나름으로는 그럴 만한 까닭이 있다.

죄가 계명을 통해서 나를…

“그 율법이 죄입니까?”(7절) 하는 물음을 제기하고 나서 바울은, 그 대답으로 7장 12절을 결론처럼 제시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우위접속사 ‘호스테’), 정녕(‘멘’) 율법이야말로 거룩하고(형용사 ‘하기오스’) 계명도 거룩하고 의롭고(형용사 ‘디카이오스’) 선합니다(형용사 ‘아가도스’).” 엄청난 ‘반전’이다. “여러분도 율법과의 관계에서는(여격) 그리스도의 몸을 통하여(‘디아’) 죽임을 당했습니다(‘다나토오’의 과거 수동태; 죽이다).”(4절)라고 말할 때만 해도, 율법은 <죽이는 법>이지 ‘살리는 법’일 수 없었다. 갈라디아서 3장 21절의 말 그대로, “만일 살릴(‘조오포이에오’의 부정사) 수 있는(‘뒤나마이’의 분사) 것으로 율법이 주어졌다면, 진실로(부사 ‘온토스’) 의로움(‘디카이오쉬네’)은 줄곧 율법으로부터(‘에크’) 생겨났을(‘에이미’의 미완료) 것입니다.”라고 말할 만하다. 그렇다면, ‘죽이는 법’인 율법이 죄라 아니라면, 도대체 무엇이 문제란 말인가?
이 물음에 바울은, ‘죄’가 문제임을 밝힌다. “<죄가> 계명을 통하여 기회를 잡아 나를 속이고(‘엑사파타오’의 과거; 미혹하다), 그것을 통하여 나를 죽였습니다(‘아포크테이노’의 과거).”(롬 7:11)라고 말한다. “<죄가 계명을 통하여 기회를 잡아> 내 안에서 온갖 탐심을 만들어냈다.”라고 말한, 7장 8절의 표현과 유사하다. 여기서 말하는 <계명>(‘엔톨레’; 명령)은, “탐내지 말라”라고 한 7절의 ‘금지명령’을 지시한다. 그러니까, ‘탐내지 말라’는 그 계명(명령)이 내 안에서 ‘온갖 탐심’을 만들어낸 것은, 그 계명을 빌미로 죄가 발동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라는 설명이다. 7장 9절을 통해서 드러내는 바울의 ‘자기성찰’이, 그럴 수 없이 치열했구나 싶다. “나도(‘에고 데’) 그때는(‘토테’) 줄곧 율법 없이(‘코리스 노무’) 살았지만(‘자오’의 미완료), 그 계명이 오자 <그 죄가> 다시 살아났습니다(‘아나자오’의 과거).”(9절) 무슨 소리인가? <율법 없이> 살 때는 죄가 발현(發現)되지 않고 “죽어 있는(형용사 ‘네크로스’) 것(죄)”(8절)으로 잠재(潛在)되어 있었는데, 계명이 오자 ‘그 죄가 다시 살아나더라.’는 고백이다. 필자는 이런 대목을 접할 때마다, 바울의 자기성찰이 얼마나 치열했는지 절로 감탄한다. ‘율법과 무관하게’(율법 없이) 살 때는 발현되지 않고 잠재되어 있던 죄가, 계명이 오자 다시 살아났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다시 살아난 죄’가 나를 속이고 나를 죽였다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나에게 깨달아졌다”라고 말하는 ‘깨달음의 내용’이다. “생명에 이르게 하는 것인 그 계명(ἡ ἐντολὴ ἡ εἰς ζωὴν), 바로 그것이 죽음에 이르게 하는 것(αὕτη εἰς θάνατον)으로 나에게(여격) 깨달아졌습니다(‘휴리스코’의 과거 수동태).”(롬 7:10, 사역)
‘믿음으로 <사람이> 의로워지는’ 구원의 명제를 서술할 때마다, 왜 바울이 <율법과 무관하게>라는 말을 단서조항처럼 첨부하는지, 비로소 우리도 깨닫게 된 셈이다. 그리고 이것으로, 7장 전반부의 해석을 마무리해도 좋을 법하다. 그러나 필자로서는, 11절 속의 말 한 마디가 계속 걸린다. “그 죄가 계명을 통해서 기회를 잡아 나를 속였다.”라는 그 말이다. 그 죄가 바울을 속였다면, 오늘을 사는 우리도 속일 수 있을 터인데, 이 문제를 어찌 그냥 지나칠 수 있겠는가? 죄가 ‘어떻게’ 나를(우리를) 속일 수 있는지를, 더 깊이 천착해보기로 하자.

어떻게 속이는 것일까

“죄가 ‘계명을 통하여’ 나를 속였다.”(롬 7:11) 그냥 지나쳐 읽으면 그럴 수도 있지 싶다. 그러나 그 죄가 속이는 것이 <나>만이 아니라 <우리>일 수도 있다고 생각하면, 왠지 꺼림칙하다. 더구나 <계명을 통하여> 속인다고 말하고 있으니, 우리가 처해 있는 교회 현실과도 무관하지 않을 듯싶어 더럭 겁이 난다. 바울은 말하기를, “율법이야말로 거룩하고, 계명도 거룩하고 의롭고 선하다.”(12절) 했다. 그렇게 ‘거룩하고 의롭고 선한 계명’인데, 그런 <계명을 통해서도> 죄가 우리를 속일 수 있다면, 이는 실로 두려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조금 부풀려 표현하면, 모골이 송연할 정도이다. 과연 어떻게 죄가 나를 속일 수 있다는 것일까? 매우 중요한 질문이다. 몇 십 년을 부부로 함께 살고도, ‘당신이 날 속였다’느니 ‘당신에게 속임을 당했다’느니 하며 서로가 돌아앉는 것을 보면, 이것은 우리의 현실과도 무관하지 않은 질문이다.
이런 질문 앞에서 필자는, 곧잘 창세기의 ‘타락설화’를 떠올린다. ‘토브(좋음)와 라(나쁨)를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게 했던 뱀, 그 ‘간교함’(창 3:1)을 볼 줄 알아야 할 것 같다. 그것을 먹으면 ‘반드시 죽는다’ 하신 하나님의 금지명령을 거스르며, 먹어도 ‘절대로 죽지 않는다’고 뱀은 꼬드겼다. 그 말을 듣고 나서 보니, 그 열매가 ‘먹음직도 하고 봄직도 했다’(창 3:6) 하지 않던가? 그렇다. <좋아 보여야> 속일 수 있다. ‘좋은 것’과 ‘나쁜 것’ 중에서, 인간은 누구라 할 것 없이 ‘좋은 것’을 선택하게 마련이다. ‘욕망’이라는 이름의 뱀이 ‘내 속에서 나를’ 속이는 줄도 모르고, 제가 좋다고 생각하는 것에 혹해서 속임을 당하게 되는 것이다. “죄가 계명을 통해서 기회를 잡아 나를 속였다.”(롬 7:11) 하는 것도, 바울의 말 그대로 그 계명이 “거룩하고 의롭고 선한”(12절) <좋은 것>이기 때문이다. ‘좋은 것’을 탐하는 마음, 이것은 인간 누구에게나 예외가 없다.
그런 면에서는 ‘인간 예수’도 마찬가지였다. 마가복음 1장 12-13절이 말하는, 이른바 ‘광야 유혹’이 바로 그것이다. “이윽고 그 영이 그를 광야로 내몹니다(‘에크발로’의 현재). / 그는 사탄에 의해(‘휘포’) 시험을 당하면서(‘페이라조’의 분사 현재 수동태), 40일을 줄곧 광야에 계셨습니다(‘에이미’의 미완료). 그는 줄곧 짐승들과 함께 계셨는데(‘에이미’의 미완료), 천사들이 그를 섬기곤 했습니다(‘디아코네오’의 미완료).” 여기서 말하는 ‘광야 40일’이 필자에게는, 예수께서 사셨던 ‘그의 일생’을 암시하는 말로 읽힌다. ‘그 영과 사탄’의 대비가 돋보이고, ‘짐승들과 천사들’의 색깔이 다르다. 그러나 필자의 관심은, 사탄에 의해서 시험을 당하셨다고 하는 그 ‘시험의 내용’이다.
그 시험의 내용을, 마태복음 4장 1-11절은 이렇게 밝힌다. 첫 번째 유혹은 ‘경제적인 유혹’이다. 먹고 사는 데에 필수 불가결한, <떡>이라는 ‘좋은 것’이 그를 유혹한다. 그리고 두 번째는 ‘종교적인 유혹’이다. ‘떡보다 더 좋은 떡’인 <흐레마>(말해진 말, 기록된 말)로, 마귀는 그를 유혹한다. 마지막은 ‘정치적 유혹’이다. 세상의 모든 나라와 영광이라는 <정치권력>, ‘최상의 좋은 것’으로 그를 유혹한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런 유의 모든 유혹을 딛고 넘어서신다. “그제야(‘토테’) 마귀는 그를 포기합니다(‘아피에미’의 현재; 내버려두다).”(마 4:11) 이 얼마나 힘든 승리였을까. ‘마귀도 포기한 인간’, 바로 이것이 하나님의 아들로서 그가 성취한 ‘거룩함’이지 싶다.
그런데 어떤가? 오늘날 한국교회의 현실 속에서, 서로 속고 속이는 ‘좋은 것’은 과연 무엇인가? 예배당, 교인수, 헌금, 목사, 설교, 성가대, 프로그램, 이 중에서 과연 무엇이 우리의 눈길을 끌고 있는가? 이 나라 교회 토양에 처음으로 ‘물질축복’이라는 가라지를 뿌린 장본인은 누구였던가? 그가 거둔 성공(?)이 부러워서 ‘목회성공 세미나’를 찾아다니고, 상가 지하실을 빌려 예배하면서도 ‘대형교회’를 꿈꾸는 목사들도 허다하다. 장로가 대통령이 되었다고 ‘장로대통령’이라는 말도 서슴지 않더니, 철 지난 ‘퇴물가수’를 장로로 세워도 누구 하나 뭐라고 하는 사람도 없다. 전국 각지에서 실어 나른 대중 기독교인들 앞에서, “하나님 까불지 마. 까불면 나한테 죽어.” 하고 외치는 목사까지 생겨난 판국인데, 무슨 짓인들 못하겠는가. 기독교의 대사회적인 이미지를 걱정하던 때는, 그나마 순수했다. 그러나 이제는 아니다. 과연 어쩌다 우리가 이 지경에 이르게 되었단 말인가?
십자가의 은혜로 속죄받았다고 하는데, <죄>는 여전히 우리 가운데서 코로나보다도 더 무섭게 창궐하고 있는 게 현실이다. ‘칭의’로도 <사람>은 의로워지지 않고, ‘구원의 확신’으로도 <믿음>은 점점 공허해가고 있다. ‘혹세무민’(惑世誣民)이라는 말이 옛말인 줄로만 알았더니, 죄는 ‘거룩하고 의롭고 선한 것’으로도 우리를 속이고 죽일 수 있다고, 바울은 경고한다. 아무리 ‘선악과’를 입에 물고 살아도, ‘좋은 것’이 좋은 것 아니요, ‘나쁜 것’이 나쁜 것 아님을 깨닫는 날이 언젠가는 있었으면 좋겠다. 절친한 친구 목사의 은퇴식에 갔다가, 그의 손을 잡고 했던 인사가 생각난다. “이제야 죄를 덜 짓게 되었구나. 축하한다.”


강일상 | 한국신학대학과 동 대학원을 졸업하였다. 『마가복음의 기적 이야기』, 『산상설교, 그 사람됨의 가르침』, 『부활되어야 할 부활』을 펴낸 바 있다. 지금은 은퇴하였다.

 
 
 

2020년 12월호(통권 74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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