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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me > 기독교사상 > 성서와설교 > [바울 구원론의 탐구 09]
성서와설교 (2020년 10월호)

 

  세례, 그 의미와 목적
  로마서 6장 4절

본문

 

그러므로(‘운’) 우리는, 그 죽음 속으로 들어가는(‘에이스’) 세례를 통해서(‘디아’) 그와(여격) 함께 묻혔습니다(‘쉰답토’의 과거 수동태). 이것은 아버지의 영광을 통하여(‘디아’) 그리스도가 죽어 있는 자들(형용대명사 ‘네크로스’의 복수)로부터(‘에크’) 일으켜진(‘에게이로’의 과거 수동태) 것과 같이(‘호스페르’), 그렇게(‘후토스’) 우리도 생명의 새로운 분(‘카이노테스 조에스’) 안에서(‘엔’) 행하기(‘페리파테오’의 가정법) 위함(‘히나’)입니다. (롬 6:4, 이하 필자 사역)

바울의 논리를 따라가다 보면, ‘자문자답’ 식으로 서술하는 대목을 종종 접하게 된다. 아마도 독자들과 소통하기 위한, 그 나름의 화법이지 싶다. 여기 6장 1절에서 제기하는 질문도, 그다음 논리를 전개하기 위해서 그가 설정한 전제이다. “그런즉 우리가 말할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은혜가 풍성하기 위해서 죄에 머물까요?” 뭔가 아귀가 맞지 않는다 싶을 정도로 생뚱맞은 질문이다.
그러나 거슬러 올라가 5장 20절(“그러나 죄가 증가한 곳에 은혜가 더욱 풍성했습니다.”)을 보면, 이렇게 말한 의도가 어느 정도 감이 잡힌다. 5장 20절은 ‘율법의 역기능’을 전제로 한 말이었다. 죄를 짓지 않게 하기 위해서 주어진 율법이 오히려 범죄를 증가시켰고, 그렇게 ‘증가한 범죄’가 그리스도를 죽이는 데까지 이르게 했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그렇게 죽임을 당한 그리스도로부터 베풀어진 은혜는, 그들의 범죄를 능가할 정도로 풍성했다는 것이 5장 20절의 요지였다.
그러나 이 말이 귀에 거슬리게 들리는 사람들 입장에서는, 일부러 어깃장을 놓을 수도 있다. “그러면 은혜를 풍성하게 하기 위해서라도, 죄에 머물러 살아야겠군.” 이렇게 의도적으로 곡해하는 사람들을 설득하기 위해서, 바울은 나름의 논리를 펼칠 요량이다.
“그리 되지(‘기노마이’의 소원법) 않았으면 합니다. 죄와의 관계에서(여격) 죽은(‘아포드네스코’의 과거) 우리가, 어떻게(‘포스’) 아직도(‘에티’) 그것(그 죄) 안에서 살겠습니까(‘자오’의 미래)?”(롬 6:2) 여기서 바울이 ‘죄와의 관계에서 죽은 우리’를 말하는 것은, ‘세례 받은 우리’임을 환기시키는 말이다. 이어지는 3절이, 그것을 확인시켜 준다. “또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속으로 들어가는(‘에이스’) 세례를 받았다(‘밥티조’의 과거 수동태)고 하는 것은, 그의 죽음 속으로 들어가는(‘에이스’) 세례를 받은 것임을 여러분은 알지 못합니까?”(롬 6:3) “여러분은 알지 못합니까?” 하고 묻는 바울의 그 말이, 왠지 마음에 걸린다. 세례 받은 우리라면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인데, 세례는 받았으면서 그것도 모르냐는 핀잔처럼(?) 들리는 것을 어쩔 수가 없다.
여기 로마서 6장으로 접어들면서 바울은, 왜 새삼스럽게 ‘세례’를 언급하는 것일까? ‘바울의 구원론’에서 세례가 갖는 의미가 무엇이기에, “예수 그리스도 속으로 들어가는” 세례를 말하면서, 그 세례를 ‘그의 죽음’과 연관시켜 말하는 것일까? “죄와의 관계에서 죽은 우리가, 어떻게 아직도 그것(그 죄) 안에서 살겠습니까?” 하는 2절의 메시지 속에 뭔가 있는 것 같다.

세례의 의미
2-3절로 미루어보면, ‘세례와 죽음’은 불가분의 연관성을 갖고 있는 것 같다. 죽어도 그냥 죽는 것이 아니라, ‘죄와의 관계에서 죽는’ 것을 세례라 말하면서, 그것을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연관시켜 말한다는 점이 눈길을 끈다. 그러고 보니, 언뜻 떠오르는 구절이 있다. 고린도후서 5장 14절이다.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죽었다’는 것을 의식화(儀式化)한 것이 ‘세례’임을 깨닫게 하는 구절이다. 더 쉽게 이해하면,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을 때 우리도 그와 함께 죽은 것이나 다름없다는 소
리다.
그러나 ‘대속신앙’(代贖信仰)에 길들여진 사람들의 생각은 다르다.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위하여(‘휘페르’) 죽었다.” 할 때도, <위하여>라는 뜻의 전치사 ‘ὑπὲρ’를 굳이 <대신하여>로 이해하여,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다.”(개역한글)라는 식으로 번역 자체도 비틀어놓는다. 구약의 ‘속죄양’을 ‘예수의 죽음’에 투사시키려는 의도이다.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죽음으로써, 그 핏값으로 ‘우리 모두의 죄가 씻기어졌다.’는 것을 말하려는 것이다. 로마서 3장 24절이 말하는 ‘속량’(贖良)을 ‘속죄’(贖罪)와 혼동하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만일 예수의 죽음을 이런 식으로 이해한다면, 이미 ‘죄가 씻기어진 사람’에게 ‘죄와의 관계에서 죽는’ 세례를 말한다는 것은 무의미하다. 그리고 그 ‘속죄’를 ‘무죄 선고’와 같은 뜻으로 보고, 그것을 ‘칭의’(의롭다 함을 얻었다.)의 근거로 삼는 것도, 신학적으로는 문제가 있는 발상이라 아니할 수 없다.
필자가 이 대목에서, “죄와의 관계에서(여격) 죽은 우리”(세례 받은 우리)를 주목하는 데에는 나름의 까닭이 있다. 뒤에 이어지는 6장 7절을 보라. 바울은 ‘죄와의 관계에서 죽은’ 사람을 “죽은 자”(개역한글)라는 말로 명시하면서, “죽은 자(동사 ‘아포드네스코’의 분사 과거)는 죄에서 벗어나(‘아포’) 의로워져 왔다.”(사역)라고 말한다. ‘아포드네스코’(죽다)라는 동사의 과거형이 쓰이고 있음을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그리고 이것과 비교하기 위해서, 6장 11절을 살펴주기 바란다. “이와 같이 여러분도 여러분 자신을, 죄와의 관계에서는(여격) 죽어 있는 자들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엔’) 하나님과의 관계로는(여격) 사는 자들로 간주하십시오.” 이 구절에서 ‘사는 자들’은 동사 ‘자오’(살다)의 2인칭 복수 분사 현재형으로 표현되어 있다. 그리고 여기서 필자가 사역한 ‘죽어 있는 자들’이라는 말은, 형용사 ‘네크로스’의 복수에 고맙게도 ‘에이미’ 동사(영어의 be동사)까지 첨가되어 있다. 우리 자신을 ‘죄와의 관계에서(여격) 죽어 있는 자들’로 간주하라고 하는 것은, ‘죄인’이라는 점에서 우리 모두는 ‘죽어 있는 자들’이나 다름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바울에게서 ‘죽어 있는 자들’은, ‘죄인’을 일컫는 다른 표현이다. 그러니까 2절에서 말하는 “죄와의 관계에서(여격) 죽은 우리”(7절의 “죽은 자”)와 11절이 말하는 “죄와의 관계에서(여격) 죽어 있는 자”는, 의미상으로 구별해서 써야 할 ‘전혀 다른 뜻의 말’이다. 우리말 번역 성서가 ‘죽은 자’와 ‘죽어 있는 자’를 구별하지 못하는 것은, 단순한 번역상의 착오가 아니다. 신학적인 무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이다. 성서가 말하는 ‘죽어 있는 자들의 부활’을 ‘죽은 자들의 부활’로 오해함으로써 생기는 신학적인 파행은, 이미 구제불능일 지경이다.
세례를 말하는 이 단락에서도, 그러한 무지는 극명하게 드러난다. 4절을 보라. “그리스도가 죽어 있는 자들로부터(‘에크 네크로스’) 일으켜진(‘에게이로’의 과거 수동태) 것과 같이”라고 번역해야 될 말을, 개역한글은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라고 오역해놓고 시치미를 뗀다. 새번역(1967)이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아난 것같이”라고 번역한 것도, 부활에 대한 몰이해 때문이다.
신학적인 무지에서 비롯된 이러한 번역상의 과오는, 이어지는 9절에서도 여전히 반복된다. 바울은 지금 ‘죽어 있는 자들의 부활과 세례의 관계’를 염두에 두고 있는데, 그것이 우리말 성서에서는 전혀 반영되어 있지 않다. 11절과의 연관성 속에서 보면 바울은, ‘죽어 있는 자들’이 <죽어서> ‘사는 자들’로 살게 하기 위해 세례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깨닫는 것은 이것입니다.”라고 말하는 6장 6절의 말 속에서 ‘세례의 목적’을 찾고자 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세례의 목적
필자의 사역을 근거로, 6장 6절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보다 세밀히 살펴보기로 하자. “우리가 깨닫는(‘기노스코’) 것은 이것입니다. 즉 우리의 옛(‘플라이오스’; 낡은) 사람(‘안드로포스’)이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쉬스타우로오’의 과거)고 하는 것은, 죄의 몸(‘하마르티아스 소마’)이 소멸되어(‘카탈게오’의 과거 수동태; 쓸모없이 되다) 더는(‘메케티’) 우리가 죄에 종노릇하지(‘둘류오’의 부정사) 않기 위해서(‘히나’)라는 것입니다.” 종속접속사 ‘ἵνα’(위해서)가 이끄는 종속절, 즉 “죄에 종노릇하지 않기 위해서”가, 바울이 말하고자 하는 ‘세례의 목적’이다. ‘죄에 종노릇하지 않기 위해서’(6절), ‘죄와의 관계에서(여격) 죽는’(2절) 세례를 말했다는 것이다.
이 말을 잘못 들으면, 죄에 종노릇하지 않기 위해서 ‘죄를 죽이라’고 말하는 것(‘내 안의 죄 죽이기’라는 설교)처럼 오해하기 십상이다. 그러나 그게 아니다. 바울은 ‘죄’를 죽이라고 말하지 않고, 죄에 종노릇하는 ‘나’를 죽이라고 말하고 있다. ‘죄에 종노릇하는 나’ 그것이, 바울이 말하는 “옛사람”(‘플라이오스 안드로포스’)이다. 그리고 ‘죄에 종노릇하는 삶’ 그것을, 바울은 “죄의 몸”(‘하마르티아스 소마’)이라고 한다. 그러니까 “우리의 옛사람이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라거나 “죄의 몸이 소멸되었다.”라고 말하는 것은, ‘죄에 종노릇하지 않기 위해서’라는 세례의 궁극적인 목적을 성취하기 위함이었다는 뜻이다.
이러한 바울의 논리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죄가 죽음 안에서 왕 노릇 한(과거) 것과 같이”(롬 5:21)라고 말한 5장 마지막 절을 잊지 말아야 한다. ‘죄에 종노릇한다’고 할 때 쓰는 <둘류오>라는 동사와 ‘죄가 왕 노릇 한다’고 할 때 쓰는 <바실류오>라는 동사가, 서로 대비되어 쓰이고 있음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는 뜻이다. 바울의 견해로는, <죄가> 왕 노릇 함으로써 우리 삶이 <죄에> 종노릇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사실 왕 노릇 한 것은, ‘죄’ 이전에 ‘죽음’이다. “죽음이 왕 노릇 했다.”(롬 5:14)라는 것을 이해할 수 있어야, “죄가 죽음 안에서(‘엔’) 왕 노릇 했다.”(롬 5:21)라는 말도 제대로 이해된다. 그리고 이것은, 우리 삶이 ‘죽을 수밖에 없는’ 필멸의 삶이라는 것을 밝히 깨닫는 일과도 무관하지 않다.
6장 12절을 보면, ‘죄와 죽음과 욕심의 상관성’이 밝히 드러난다. “그러므로 여러분의 죽을 수밖에 없는(형용사 ‘드네토스’; 필멸의) 몸 안에서(‘엔’), 그것의(그 몸의) 욕심(‘에피뒤미아’; 탐심, 탐욕)에 굴복하지 않기 위해서(‘에이스’)라도, 그 죄가 왕 노릇 하지(‘바실류오’; 지배하다) 못하게 하십시오.”(롬 6:12) 무슨 소리인가? ‘죽을 수밖에 없는 삶’을 살기 때문에 죽지 않으려고 ‘욕심’을 부리게 되고, 욕심을 좇아 살게 됨으로써 죄가 왕 노릇 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 말대로라면, ‘죽을 수밖에 없는 삶’을 산다고 한 데서부터 ‘죄가 왕 노릇 하게’ 되고, 우리는 ‘죄에 종노릇하며’ 살 수밖에 없게 되었다는 말이 된다. 그러니까 ‘죄에 종노릇하는’ 삶에서 벗어나게 하기 위해서는, 6절의 말 그대로 “죄의 몸”이 소멸되어야 하고, 죄의 몸이 소멸되려면 “옛사람”이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야 한다는 것이 바울의 주장이다.
결국 ‘옛사람의 죽음’을 말하기 위해서, ‘죄와의 관계에서 죽는’(2절) 세례를 말했고, ‘그(예수 그리스도)의 죽음 속으로 들어가는’(3절) 세례를 말하기도 했던 것이다. 심지어 4절에 이르면, “그의 죽음 속으로 들어가는 세례를 통하여, 우리는 그와(여격) 함께 묻혔다(‘쉰답토’의 과거 수동태).”라는 말까지 서슴지 않는다. 그리고 그와 함께 묻힌 목적을, 접속사 ‘히나’(위하여)로 이끄는 종속절이 이렇게 밝히 말한다. “이것은, 아버지의 영광을 통해서(‘디아’) 그리스도가 죽어 있는 자들(형용대명사 ‘네크로스’의 복수)로부터(‘에크’) 일으켜진(‘에게이로’의 과거 수동태) 것과 같이(‘호스페르’), 그렇게(‘후토스’) 우리도 생명의 새로운 분(‘카이노테스’) 안에서(‘엔’) 행하기(‘페리파테오’의 가정법) 위함(‘히나’)입니다.” 필자의 사역이 기존의 우리말 성서와 왜 이렇게 다른지, 아무래도 설명이 있어야 할 것 같다.

생명의 새로운 분 안에서
먼저 우리말 성서들이 이 6장 4절을 어떻게 번역했는지, 비교해보기로 하자.

개역한글(개역개정)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
새번역(1967)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의 영광으로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신 것같이, 우리도 새로운 생명 가운데서 다시 살게 하려는 것입니다.
표준새번역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아버지의 영광으로 살리심을 받은 것과 같이, 우리도 새로운 생명 가운데서 살아가게 하려는 것입니다.
새번역(2007)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아나신 것과 같이, 우리도 또한 새 생명 안에서 살아가기 위함입니다.


앞에서도 필자는 “죽은 자”(7절)와 “죽어 있는 자들”(11절)이, 의미상으로 전혀 ‘다른 뜻의 말’임을 지적한 바 있다. 그러니 그것을 재론하지는 말자. 이 구절에서 필자가 주목하는 것은, 우리말 성서들이 “새(새로운) 생명 가운데서(안에서)”라고 번역해놓은 바로 그 말이다. 헬라어 원문에서 이 말은 “엔 카이노티 조에스”(ἐν καινότητι ζωῆς)이다. 여기서 ‘조에스’는 ‘조에’(생명)의 소유격으로 ‘카이노테스’(새로움)를 수식한다. 그러니까 “새 생명”이 아니라 “생명의 새로움”이다. “새 생명 가운데서”가 아니라 “생명의 새로움 안에서”라고 번역해야 맞다. 그런데 정작 그렇게 번역해놓고 보니 ‘생명의 새로움 안에서’라는 말이 무슨 뜻인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그러다가 이 글을 준비하면서, ‘카이노테스’(καινότης)가 신약성서 전체에서 유독 로마서에서만 두 번(롬 6:4, 7:6) 쓰인 희귀한 단어임을 알고는, 이 단어에 대한 관심이 더 깊어졌다. 여기에 쓰인 ‘카이노테스’는, ‘카이노스’(새로운)라는 형용사에서 파생된 명사이다. 그리고 ‘카이노스’는, 일반적으로 쓰이는 ‘네오스’(새로운)와도 뜻이 달라서, ‘질적으로 전혀 새로운, 전례가 없는’이라는 뜻으로 쓰인다는 것을 발견했다. “새로운 피조물”(고후 5:17)이나 “새로운 창조”(갈 6:15)로 번역되는 <카이노스 크티시스>에도 이 단어가 쓰이고 있었다.
그런데 ‘카이노테스’라는 명사에 붙은 접미어(接尾語) ‘테스’(της)가, 헬라어 문법에서는 ‘활동을 하는 사람’을 나타내는 어미임을 가까스로 찾아냈다. 그래서 ‘시인’(詩人)은 ‘포이에테스’라 하고, 재판관(裁判官)은 ‘크리테스’라고 한다는 것을 알았다. 그렇다면 여기 쓰인 ‘카이노테스’도, 마땅히 <새로운 분>으로 번역해야 한다는 결론을 얻었다. 그것도 전례(前例)가 없을 정도로, 그야말로 질적(質的)으로 전혀 다른 ‘새로운 분’이라면, ‘예수 그리스도’를 지칭하는 말로 볼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생명의 새로운 분 안에서 행하기(‘페리파테오’의 가정법) 위함입니다.”라고 사역하기에 이르렀다.
이렇게 사역해놓고 보니, 이 말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들”(롬 8:1)을 말하는 로마서 8장과 연결되어 있음을 눈치챌 수 있었다. 거기 8장 4절을 보면, “육을 따라(‘카타 사르카’) 행하지 않고 영을 따라(‘카타 프뉴마’) 행하는(‘페리파테오’의 분사 현재) 우리”라는 말이 있다. 그러니까 여기 6장 6절을 8장 1-4절과 연관시켜 보면, “생명의 새로운 분 안에서 행하기 위함”(롬 6:6)이라는 말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롬 8:1) “영을 따라 행하기”(롬 8:4) 위함이란 뜻으로 풀이할 수도 있는 말이었던 것
이다.
왜 바울은 “옛사람”(롬 6:6)을 말해놓고도 ‘새사람’은 말하지 않는 것일까? 떨쳐버릴 수 없는 이 질문이 필자로 하여금 바울서신의 구석구석을 찾아 헤매게 했다. 그리고 그렇게 찾아 헤맨 결과 얻은 소득이 “생명의 새로운 분”(롬 6:4)이었다. “업은 아이 삼 년 찾는다.”라는 속담처럼, 6장 6절 앞에 6장 4절이 있는데도, ‘옛사람’에 대비되는 ‘새사람’을 찾아 그렇게도 헤맨 셈이다. 아마도 우리말 성서가 잘못 번역해놓은 “새(새로운) 생명 가운데서(안에서)”라는 말이 무슨 뜻인지를 묻지 않았더라면, 그리고 그것을 헬라어 원문에서 확인하려고 하지 않았더라면, “생명의 새로운 분 안에서”라는 사역은 얻어낼 수 없었을 것이다. 번역이 잘못되면 해석도 그르칠 수밖에 없다는 것을, 날이 갈수록 더욱 절감한다. 끝으로 6장 7절의 번역과 해석을 건너뛰고 싶지 않은 것도 이 때문이다.

6장 7절의 번역과 해석

알란드본 ὁ γὰρ ἀποθανὼν δεδικαίωται ἀπὸ τῆς ἁμαρτίας
사역 왜냐하면 죽은 자(‘아포드네스코’의 분사 과거)는 죄에서 벗어나(‘아포’) 의로워져 왔기(‘디카이오오’의 현재완료 수동태) 때문입니다.
개역한글 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이니라
새번역 죽은 사람은 벌써 죄의 권세에서 해방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KJV For he that is dead is freed from sin.


굳이 6장 7절의 번역을 문제삼는 데에는, 필자 나름의 까닭이 있다. ‘기존의 칭의론’이 얼마나 번역을 왜곡했는지를 실증적으로 보여주기 위함이다. 번역을 조작(?)하면서까지 고수해야 할 ‘칭의론’이라면, 그러한 교리의 성서적 근거 자체를 의심해야 마땅하지 않겠는가. 루터나 칼뱅이 눈앞에 있다면, 이런 구절을 과연 어떻게 번역하고 해석했는지를 묻고 싶다. 헬라어 동사인 ‘디카이오오’를, 왜 ‘의롭게 하다’라고 번역하지 않고 한사코 ‘의롭다 하다’라는 번역해야 하는지, 필자로서는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필자가 공부한 바로는, 로마서에서 ‘디카이오오’를 ‘의롭다 하다’라고 번역할 구절은 8장 33절 한 곳뿐이다. “하나님이 택하신 자들을 거슬러(‘카타’) 누가 소송하겠습니까(‘앙칼레오’의 미래; 고소하다)? 의롭다 하시는(‘디카이오오’의 분사 현재)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삶이나 사람에 대해서 최종적으로 평가(재판)하시는 분은, ‘심판의 주’이신 하나님뿐이라는 뜻이다. 특히 ‘사람됨’에 대한 평가는, 최후심판의 때까지 유보되어야 마땅하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래서 그랬는지, 누가복음 16장 15절을 보면, 바리새파 사람들에 대한 예수의 비판 또한 자못 통렬하다. “너희는 사람들 앞에서 자신을 의롭다 하는(‘디카이오오’의 분사 현재) 자들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너희 마음들을 아신다.” 어떤가? ‘의롭다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신데, 그들 바리새파 사람들은 ‘자신을 의롭다 했다’ 하지 않는가? 이리 되면, 오늘날 ‘칭의론’을 근거로 ‘의롭다 함을 얻었다’ 하며 구원을 확신하는 우리야말로, 신학적으로 ‘자신을 의롭다 하는’ 현대판 바리새파 사람들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 않을까?
6장 7절만 해도 그렇다. 우리말 번역 성서는 ‘의롭다 하다’라는 번역을 고집한다. “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함을 얻었음이라.”(개역한글) 이 구절에 쓰인 ‘디카이오오’라는 동사의 시제(時制)는 매우 특이하다. 신약성서 전체에서 ‘디카이오오’(수동태)가 ‘현재완료형’으로 쓰이기는, 이 6장 7절이 유일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역한글은 ‘의롭다 함을 얻었다’라고 <과거>로 번역해버렸다. ‘의롭다 함을 얻어 왔다’는 식으로 번역하는 것이 어색하다고 생각되었던 모양이다. 그래서 그랬는지, 새번역(표준새번역)은 그보다도 한술 더 뜬다. <‘디카이오오’라는 동사 자체를 번역에서 배제>시켰다. “죽은 사람은 벌써 죄에서 해방된 것이기 때문입니다.”라고 번역해놓고 시치미를 뗀다. 아무래도 믿기지 않아서 영어성서를 대조해보았더니, “For he that is dead is freed from sin.”(KJV)을 근거로 중역(重譯)했음이 드러났다. 우리 한국교회가 신주처럼 모시는 영어성서도, 이런 대목에서는 막간다고 볼 수밖에
없다.
이쯤 되면, 성서에 비추어 ‘칭의론’ 자체를 재고하는 신학적인 움직임이 생겨날 법한데, 이 나라 토양에서는 도무지 감감무소식이다. 개혁교회의 개조(開祖)로서 루터와 칼뱅은 존중되어야 하겠지만, 그들이 내세운 ‘칭의론’에 대한 비판은 학문적으로 얼마든지 허용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어쩌면 칭의론에 대한 ‘해석학적 논의’보다는, 그것의 근거가 되는 바울서신의 많은 구절에 대한 ‘심도 있는 번역’이 우선되어야 하리라 믿는다.
이 구절에 대한 필자의 사역은 이러하다. “왜냐하면 죽은 자는 죄에서 벗어나(‘아포’) 의로워져 왔기(‘디카이오오’의 현재완료 수동태) 때문입니다.” ‘의로워져 왔다’고 하는 것으로 보면, 그 ‘의로워지는 과정’이 과거의 어떤 시점으로부터 현재까지도 지속되었음을 의미한다. 어쩌면 ‘죄와의 관계에서 죽는’(2절) 그 세례가 ‘의로워지는 과정’(義化, 롬 4:25, 5:18)의 출발점이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한 가지 의문은 여전히 남는다. 세례를 받았다고 해서 이제 죄에서 벗어났다고 말해도 되는 것일까? 죄에서 벗어남으로써 의로워지는 게 아니라, 오히려 의로워지는 만큼 죄에서 벗어나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 같다. 죄에서 벗어나는 일이 ‘단 한 번의 세례’로 가능하다고는 여길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바울도 6장 10절을 말했지 싶다. “그(예수 그리스도)가 죽었다는 것은 죄와의 관계에서 단번에(부사 ‘엡하팍스’) 죽었다는 것이요,” 하며, ‘그의 죽음’과 ‘우리의 죽음’ 사이에 선을 긋는다. 왜 바울이 “나는 날마다 죽는다.”(고전 15:31)라고 했는지 비로소 이해된다. 죄와의 관계에서 ‘단번에’ 죽을 수 없는 우리로서는, ‘날마다’ 죽으면서 의로워져 가는 ‘의화의 여정’에 매진해야 할 것이다. 의로워짐으로써 그 ‘사람됨’이 의로울 수 있다는 것을 믿는 우리라면, 저 빌립보서 3장 12절의 말 그대로, 조금쯤은 ‘덜된 놈, 되지 못한 놈’임을 자처하는 것도 그리 부끄러운 일만은 아닐 것이다.


강일상 | 한국신학대학과 동 대학원을 졸업하였다. 『마가복음의 기적 이야기』, 『산상설교, 그 사람됨의 가르침』, 『부활되어야 할 부활』을 펴낸 바 있다. 지금은 은퇴하였다.

 
 
 

2020년 10월호(통권 74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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