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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me > 기독교사상 > 성서와설교 > [예수에게 길을 묻다 03]
성서와설교 (2020년 9월호)

 

  기독교 신학의 창시자 바울
  

본문

 

나도 전해 받았고, 여러분에게 무엇보다도 먼저 전해준 복음은 이렇습니다. 곧 그리스도께서는 성경대로 우리의 죄 때문에 죽으셨고, 묻히셨으며, 성경대로 사흗날에 부활하셨으며(고전 15:3-4, 이하 필자 사역)
For I handed on to you as of first importance what I also received; that Christ died for our sins in accordance with the scriptures; that he was buried; that he has raised on the third day in accordance with the scriptures.(1Cor 15:3-4, New American Bible)


오래된 미래
현대 사회는 총체적 위기에 놓여 있다. 강자 중심의 사회경제 시스템, 도시화, 글로벌화, 양극화, 사회적 불평등, 가치의 혼란, 무분별한 삼림 훼손, 지구온난화, 기후변화, 코로나19 팬데믹 사태로 이어지는 위기는 현대 자본주의 문명에 대한 보다 심층적인 성찰을 촉구한다.
현대 인류는 과거 어느 때보다도 개인의 행복과 운명이 지구 차원의 구조적인 문제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음을 실감하고 있다. 기존의 문명은 쇠락해가고, 아직 새로운 문명이 태동하지 아니한 전환기에 과연 어떻게 사는 길이 인간다운 삶인가 묻지 않을 수 없다.
일찍이 헬레나 노르베리 호지(H. N. Hodge)는 인류의 미래를 전통사회의 가치 회복에서 찾아야 한다고 말한 바 있다.(『오래된 미래: 라다크로부터 배우다』, 라다크는 서부 히말라야 고원의 작은 마을이다.) 수천 년 동안 내려온 라다크 사회의 미덕인 자급자족 정신, 검약 정신, 조화로운 사회공동체, 환경의 지속성, 내면의 행복을 추구하는 삶에서 미래의 희망을 보았던 것이다.
필자는 그녀의 생각에 전적으로 공감하면서, 인류의 미래를 초기 기독교 세계의 휴머니즘 운동에서 찾고자 한다. 초기 기독교 세계를 이끌어간 두 인물은 예수와 바울이다. 예수의 공생애 기간은 1년 내지 3년이지만, 바울의 경우 30년 이상이다. 예수는 한 줄기 바람처럼 살다 갔지만, 바울은 비교적 긴 시간을 살면서 기독교가 세계적인 종교로 발전할 수 있도록 초석을 놓은 인물이다. 기독교의 실질적인 창시자는 바울이다.
예수는 갈릴리 하층 농민의 한 사람으로서 그들과 동고동락하며 동반자의 삶을 살았다. 굶주림 없는 세상, 차별 없는 세상, 인간의 존엄성이 인정받는 세상, 모두가 인간답게 살 수 있는 민중휴머니즘 세상의 구현이 예수가 꿈꾸던 바실레이아(basileia)이다. 로마는 예수의 민중휴머니즘 운동을 식민지 지배에 대한 반역으로 간주했고, 그를 정치범으로 몰아 십자가에 처형했다. 예수는 서른 즈음에 불꽃처럼 삶을 마감했다.

바울 케리그마
예수는 비명횡사했다. 바울은 예수 처형의 사회정치적 토대를 허물고, 종교적 지평에서 새로운 초석을 놓았다. 바울은 예수의 죽음을 대속적 구원 사건으로 선언한 첫 인물이다. 바울의 집단주관적인 신앙고백을 일컬어 ‘케리그마’(kerygma)라고 부른다. 예수와 그리스도, 역사와 케리그마 신앙고백은 둘이면서 다른 것도 아닌 불일불이(不一不異)의 관계이다. 케리그마는 역사에 뿌리를 두고 있지만, 동시에 역사를 초월한다. 일종의 포월적(包越的)인 의미를 지닌다.
초기 기독교 신학은 바울의 케리그마 위에 정초(定礎)되었다. 바울이 아니었다면, 기독교는 팔레스타인 유대교의 소종파(sect)로 머물렀을 것이고, 그리스-로마 세계 전역으로 전파될 수 없었을 것이다. 초기 그리스도교 창시자는 바울이다.
바울이 태어난 연대는 알 수 없다. 예수와 동시대를 살았던 바울의 출생 연도는 아마도 기원후 4-5년경, 예수보다 7-8년 연하일 것으로 추정된다. 태어난 장소는 길리기아의 헬레니즘 도시 다소이다.(행 22:3) 예수가 농민이라면, 바울은 도시민으로 태어났다.
외전(外典)에 따르면(J. Klausner, Von Jesus zu Paulus), 바울의 할아버지는 갈릴리의 가버나움 북쪽에 위치한 기샬라(Gishala) 출신이다. 기원전 63년 로마의 폼페이우스가 갈릴리를 침공하자, 그는 길리기아의 다소로 이민을 떠난다. 그곳에서 길리기아의 특산물인 실리시움 염소 털(cilicium)로 의류와 침구류를 만드는 수공업에 성공하여 로마의 시민권을 얻게 된다.
바울은 바리새파 유대교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리고 태어난 지 여드레 만에 할례를 받았다. 그는 이스라엘의 왕족인 베냐민 지파였으며, 율법에 충실한 바리새파였다.(빌 3:5) 바리새파의 생활신조는 유대교 랍비 힐렐의 가르침에 따라 “한 손에 율법을, 다른 한 손에 수공업을!”이었다. 바울은 어려서부터 율법 공부에 충실했고, 수공업을 익힌 것 같다. 바울은 목회 사례비를 받지 않았다. 바울의 자급목회 원칙은 아마도 힐렐의 영향이었던 것 같다. 그는 텐트 수리 기술로 생활비를 조달하면서 복음을 전했다. 물론 말기에는 선교 지원금을 받기도 했다.(빌 4:15-18)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난 바울은 청소년 시절 예루살렘으로 유학을 떠났고, 랍비 가말리엘의 ‘율법 아카데미’를 다니며 수준 높은 율법 수업을 본격적으로 받은 것 같다.(행 23:3) 가말리엘은 그의 조부 힐렐에 따라 융통성 있게 율법을 해석했다. 율법이 사람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지, 그 반대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바울의 여러 서신에서 등장하는 권선징악 사상, 메시아 도래 사상, 부활 사상, 대속 사상 등은 이 시기에 배운 바리새파의 유산이다.

바울의 회향(回向) 사건
바울이 어떤 계기로 바리새파 율법 종교에서 예수 메시아 종교로 회향하게 되었는지는 확실치 않다. 사도행전의 저자 누가는 바울의 다메섹 회향 사건을 극적으로 상술하고 있지만(행 9:1-19), 이는 역사적 사실에 근거한 것이라기보다 기원후 100-110년 사도행전 저작 당시 누가교회의 선교신학적 상황이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참조. 눅 3:21-22, 행2:1-4) 바울이 예수의 제자들을 체포하기 위해 대제사장의 추천장을 받아 다메섹으로 향했다고 한다. 그런데 과연 당시 대제사장에게 그러한 권한이 부여되어 있었는지는 의문스럽다.
신약성서에서 바울의 연대에 대한 정보는 사도행전과 진성(眞性) 바울서신(로마서, 고린도전・후서, 갈라디아서, 빌립보서, 빌레몬서, 데살로니가전서)에서 얻을 수 있다. 사도행전은 바울의 일곱 서신에 비해 40년 뒤에 작성되었다. 따라서 서신에 보도된 자료들이 보다 신빙성이 높을 것이다.
예수 처형 당시 바울은 예루살렘에 체류하고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바울은 예수를 직접 만나거나 처형 사건을 직접 목격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예수가 처형된 후, 얼마 안 되어 33년경 스데반의 순교 사건이 발생했는데, 청년 사울(young man named Saul)도 목격자였던 것 같다. 55년경 빌레몬에게 쓴 편지에서 바울은 스스로를 늙은이(old man)라고 자처한다.(몬 1:9)
바울은 하나님께서 그에게 ‘당신의 아들을 그에게 계시했다.’(to reveal his Son to me)라고 술회한다.(참조. 갈 1:16) 계시를 받은 후, 곧바로 아라비아로 갔다가 다시 다메섹으로 갔다는 진술에서 다메섹 회향 사건을 짐작할 수 있다.(갈 1:17)
바울이 받은 하나님의 아들에 관한 계시의 내용이 무엇이었는지는 알 수 없다. 바리새파 신앙 전통에 따르면, 하나님의 아들 계시는 메시아 도래와 연관성이 있다. 그 계시를 통해서 바울은 하나님의 아들과 메시아의 연관성에 대한 새로운 깨달음을 얻게 된 것 같다.
회향 후 바울이 아라비아를 들러 다메섹에 머문 기간은 3년 정도이다.(갈 1:17-18) 다메섹에서 체류하는 동안 바울은 바리새파 회당공동체(synagogue community)에 출석했고, 거기에서 메시아(그리스도)의 도래를 대망하는 일군의 신앙집단과 교제했다. 아마 그들로부터 그리스도에 관한 복음(Gospel about Christus)을 전수(傳受)받았던 것 같다.

나도 전해 받았고, 여러분에게 무엇보다도 먼저 전해준 복음은 이렇습니다. 곧 그리스도께서는 성경대로 우리의 죄 때문에 죽으셨고, 묻히셨으며, 성경대로 사흗날에 부활하셨으며(고전 15:3-4)

‘성경대로’(kata tas graphas) 그리스도가 죽고, 매장되고, 되살아났다는 것이다. 이는 구약의 율법과 예언서들에 예언된 그대로 진행되었다는 뜻이다. ‘죄 때문에’는 후대에 첨가되었을 것이다. 구약의 예언에 따른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관한 복음을 바울에게 전해준 다메섹 유대교 회당의 바리새파 신앙집단을 첫 그리스도인(Christian)이라 명명할 수 있을 것이다. 사도행전에 따르면, 기원후 45년경 바울이 목회하던 안디옥교회 신도들에게 처음으로 ‘그리스도인’이라는 칭호가 붙었다고 한다.(행 11:26) 하지만 여기에는 안디옥교회를 이방 선교의 중심지로 생각한 누가의 선교신학적 의도가 반영되었을 것이다.
본문에서 하나님의 일꾼인 그리스도가 구체적으로 누구를 지칭하고 있는지는 알 수 없다. 모세 5경을 중심으로 성전 제사 업무에 종사하던 사두개파는 부활사상을 거부했다. 하지만 바리새파는 부활을 믿었다.(막 12:18-27, 눅 20:27-40Q) 그리스도의 부활 사상이 바울에게는 친숙했을 것이다. 그도 바리새파 출신이었기 때문이다.
바울은 3년 전 다메섹 회향 사건에서 계시받은 ‘하나님의 아들’이 누구인지 그 정체성의 실마리를 다메섹 유대교 회당의 첫 그리스도인들의 그리스도에 관한 복음 진술과 연계시킴으로써 찾았던 것 같다. ‘성경대로 죽었다가 부활하신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라는 그리스도 케리그마가 형성되었다. 바울은 복음을 하나님께서 예언자들을 통해 당신의 아들에 대해 미리 성서에 약속해놓은 것으로 보았다.(롬 1:2) 바울은 이를 발전시켜 그리스도 케리그마를 만든 것이다.

바울의 제1차 예루살렘 방문
다메섹 회향 이전, 바울은 예수에 대한 소문을 들었을 것이다. 이는 그가 유대 지역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들을 몹시 박해했다는 데서 알 수 있다.

내가 한때 유대교에 적을 두고 있을 때에 나의 행실이 어떠했는지 여러분은 이미 들었습니다. 나는 하나님의 교회를 몹시 박해하며 아예 없애버리려고까지 하였습니다.(갈 1:13, 빌 3:6 참조)

당시 바울은 유대교 신봉자로서 어느 누구보다도 앞장섰고 조상들의 전통을 지키는 일에도 열성이었다. 그가 바리새파 유대교와 다른 예수 메시아 신앙을 믿고 있는 하나님의 교회를 박해했다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런 일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다메섹 회향 후 바울은 심경의 변화를 겪었다. 그가 박해한 하나님의 교회들이 믿고 있는 예수가 과연 누구일까 하는 의구심이 들었을 것이다.
비록 동시대에 살았지만, 바울은 생전의 예수를 만난 적이 없다. 하지만 그는 예수의 갈릴리 활동과 그가 박해하던 예루살렘교회의 활동에 대해서는 익히 알고 있었을 것이다. 예루살렘 신도들 역시 바울에 대해서 거부감을 가졌을 것이다.
바울은 베드로(게바)와 주의 동생 야고보를 만나, 그동안 그가 교회를 박해한 점에 대해서 우선 사과했을 것이다. 그가 하나님 아들에 관한 계시를 받고, 다메섹의 유대교 회당의 신도들로부터 배운 그리스도에 관한 복음에 대해서도 의견을 나누었을 것이다. 반면에 바울은 베드로에게 그가 동고동락하며 따라다니던 예수에 대해 물었을 것이다.
예수가 어떤 인물이었고, 무슨 일을 하였는가? 그가 이루고자 한 꿈은 무엇이었고, 무엇을 가르쳤나? 왜 그는 젊은 나이에 십자가에 처형될 수밖에 없었는가?
베드로는 그가 3년 동안 따라다니며 동고동락한 예수에 대해 아는 바를 말해주었을 것이다. 예수 사후 제자들에 의해서 채집된 아람어 판 예수말씀 모음집(Q1)은 30년대 중반부터 형성되었을 것이다. 보름 동안 바울은 베드로와 숙식을 같이 하면서 예수의 도(道)를 배웠을 것이다. 베드로에게서 들은 예수의 도가 그의 서신 곳곳에서 나타난다.
바울은 큐의 예수말씀을 ‘주의 말씀’으로 받아들였다. 큐는 인자가 도둑같이 올 것을 말하는데(마 24:43-44Q), 이에 따라 바울은 주 예수께서 밤에 도둑같이 올 것을 언급한다.(살전 5:2-4) 그리고 큐에 나오는 ‘인자(人子)의 도래’를 ‘우리 주 예수의 강림’으로 변용시킨다.

여러분은 어떻게 하나님께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으키신 당신의 아들, 곧 닥쳐올 진노에서 우리를 구해주실 예수께서 하늘로부터 오실 것을 기다리게 되었는지 말하고 있습니다.(살전 1:10)

48년경에 쓰인 첫 서신에서,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주’(큐리오스)로 명명하고(살전 1:1),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라는 칭호를 사용한다.(롬 1:4)
로마서 12장 9-21절은 ‘바울의 큐(Q)복음’이라 불릴 만하다. 큐는 인간의 궁극적 목적이 하나님의 완전하심을 닮아 인간의 자기완성(teleios)에 있다고 가르친다.(마 5:44-48Q) 원수를 사랑하고 박해자를 위해 기도하는 단계까지 나아가야 가능한 목적이다. 바울은 이를 신도들의 일상생활 영역으로 확대한다.

‐ 여러분을 박해하는 자들을 저주하지 말고 축복하십시오. …아무에게도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모든 사람에게 선을 베푸십시오. …악에 굴복당하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십시오.(롬 12:14-21)
‐ 서로 사랑하는 것 외에는, 누구에게도 빚을 지지 마십시오.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율법을 완성하는 것입니다. …모든 계명은 ‘네 이웃을 네 자신처럼 사랑하라.’는 말씀으로 요약됩니다. 사랑은 율법의 완성입니다.(Love is the fulfillment of the law.)(롬 13:8-10)
‐ 모든 율법은 한 계명으로 요약됩니다. 곧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하라.’ 하신 (예수의) 계명입니다.”(갈 5:13)


바울은 큐의 하나님나라 복음을 공간적으로 이해한다. 하나님나라는 말에 있는 것이 아니라 능력에 있고(고전 4:20), 먹고 마시는 것이 아니라 성령 안에서 누리는 의로움과 평화와 기쁨이라고 한다.(롬14:17)
이와 같이 베드로에게 들은 큐 예수말씀을 토대로, 바울은 그가 3년 전에 계시로 받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가 다름 아닌 예수라는 확신을 갖게 되었던 것 같다. ‘그리스도로서의 예수’(Jesus as Christ)를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하게 된 것이다.
베드로를 만난 후, 바울은 고향 다소로 돌아가 약 8년 동안 지내면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복음을 전파했을 것이다.(행 9:30) 44년경 시리아의 안디옥교회에서 목회를 하던 바나바가 바울의 소식을 듣고 그를 초빙한다. 바울은 1년 동안 안디옥에 머물면서 바나바와 공동목회를 한다.(행 11:25-26) 이 시기에 안디옥교회는 빠르게 부흥한 것 같고, 이를 기반으로 바울은 45-49년에 제1차 해외 선교여행을 떠난다.(행 13-14장) 안디옥을 출발하여 비너스 탄생의 섬 키프로스, 베르게, 비시디아의 안디옥, 이고니온, 리스트라, 데르베, 아딸리아를 돌면서 5년 동안 복음을 전파한다.

예루살렘 사도모임
제1차 해외 선교여행의 성과는 성공적이었다. 많은 이방인들의 호응을 받았고,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아들였다. 49년경에 바울은 그간의 해외선교에서 거둔 놀라운 성과도 보고할 겸 예루살렘에서 개최된 사도모임에 참석한다.(갈 2:1) 바울은 야고보와 게바와 요한을 교회의 세 기둥으로 소개한다.(갈 2:8) 예수의 동생인 야고보의 이름이 먼저 기록된 것으로 보아, 예루살렘교회의 주도권이 베드로에서 야고보에게 넘어갔음을 추측케 한다.
예루살렘 사도교회는 예수복음과 더불어 율법 준수와 할례를 신앙생활의 주요 덕목으로 삼았다. 유대교 전통에 따르면, 이방인이 입교하고자 할 때 율법 준수와 할례를 요구했다. 예루살렘교회도 이 관례를 따랐다. 복음을 받아들인 이방인들도 율법을 지키고 할례를 받아야 하나님의 구원받은 백성이 된다고 가르쳤던 것이다.
바울의 복음은 이러한 예루살렘교회의 주장과 달랐다. 다메섹 회향에서 받은 하나님 아들의 계시, 다메섹 유대계 그리스도인들(Jewish Christians)로부터 전해 받은 그리스도 전승, 그리고 베드로에게서 배운 큐의 예수말씀을 나름 종합하여 바울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 예수”에 관한 복음을 완성했다. 바울은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에서 율법과 할례의 요구가 거리낌이 된다고 파악하였다.
사도회의에서는 세 가지 합의를 이루어냈다. 첫째, 이방계 그리스도인들에게 유대교 율법을 지킬 의무를 면제해주었다.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기만 하는 것으로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있는 길을 터주었다. 명실공히 기독교가 유대교로부터 독립할 수 있는 기틀이 마련되었다. 둘째, 선교 구역을 나누었다. 예루살렘 사도들은 유대인 전도를 하고, 바울은 이방인 전도를 하도록 했다. 셋째, 이방교회 신도들은 예루살렘교회의 가난한 신도들을 기억하고 모금해주도록 합의했다. 이러한 합의를 이끌어내는 데는 베드로의 중재가 컸다.(갈 2:7-10)
예루살렘 사도모임은 바울에게 희망을 주었다. 그가 전한 복음의 내용뿐만 아니라, 해외선교사로서의 입지를 굳힐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바울은 가벼운 마음으로 안디옥으로 발길을 돌렸을 것이다.

안디옥 사건
바울은 예루살렘 사도회의에서 베풀어준 호의에 보답하는 차원에서 베드로를 안디옥으로 초청하였다.(갈 2:11-14) 베드로는 환영 리셉션에 참석하여 이방 신도들과 한 식탁에서 식사를 하고 성찬(聖餐)을 나누게 되었다. 유대교 관습법[遺傳]에 금지된 이방인들과 한자리에서 식사를 했다.
이 소식이 예루살렘교회에 알려지자 소동이 일어났다. 예루살렘교회의 지도층은 이방인과 한 식탁에 앉아서는 안 된다는 식사정결법을 어겼으니, 좌시할 수 없다는 입장을 보였다. 야고보는 진상조사단을 꾸려 파견하게 된다. 이를 알아차린 베드로와 그의 무리들은 야고보의 문책이 예상되었기에 식사 자리를 피했다. 심지어 바나바조차 슬그머니 자리를 떴다. 그들의 일관성 없는 행동 때문에 교회가 둘로 쪼개지고 말았다.
식사정결법과 교회일치의 가치가 충돌할 때, 무엇을 우선으로 선택해야 하는가? 바울은 후자를 선택했다. 그는 게바와 바나바가 보인 이중적인 태도를 면전에서 책망했고, 그들이 복음의 진리를 따라 올바르게 행동하지 않았음을 비난했다.(갈 2:14) 예루살렘 사도회의에서 결정한 사항이 무엇이었는가? 이방 그리스도인들에게 율법 준수와 할례 의무를 면제한 것이다. 사도회의 결의에 따라 바울은 교회일치의 가치를 중요시한 것이다.
안디옥 사건의 후유증은 엄청났다. 베드로가 누구인가? 예수의 수제자가 아닌가. 예루살렘교회의 수장(首長)이요, 당시 기독교 세계에 가장 큰 영향력을 가진 인물이 아닌가. 신앙의 연륜에서도 바울은 베드로에 비교될 수 없었다. 바울의 돌출 행동에 베드로는 큰 충격을 받았을 것이다. 그는 바울의 무례한 행동에 대하여 예루살렘교회에 보고했다. 그들은 바울을 징계하기로 결의하였다. 바울이 전한 복음에 대해 문제를 삼았고, 그에게 부여한 이방인을 위한 사도권도 거두어들였다.
1년 전 사도회의에서 이룬 합의사항에 대해 무효를 선언했다. 그들은 바울이 개척한 이방교회들을 찾아다니며 바울 복음의 부당성을 주장했다. 그리고 이방 그리스도인들에게 면제했던 율법 준수와 할례를 받도록 요구하였다. 이번 기회에 이방 교회들을 예루살렘교회의 통제 아래 두려고 한 것이다.
절체절명의 상황에서 바울은 예루살렘교회와 단교(斷交)하고 새 길을 개척해야만 했다. 바울은 새로운 돌파구를 모색하였다. 이미 갈라디아교회에서는 바울을 이탈하는 신도들이 나타났다.(갈 1:6-7)

‐ 어리석은 갈라디아교회 신도들이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처형된 모습으로 여러분 눈앞에 생생히 새겨져 있는데, 누가 여러분을 호렸단 말입니까?(갈 3:1)
‐ 여러분은 율법행위(할례)로 성령을 받았는가, 아니면 복음을 듣고 믿어서 성령을 받았는가? 왜 이리 어리석은가? 성령으로 시작하여 육으로 마칠 것인가?(갈 3:2-3)
‐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스스로 저주받은 몸이 되시어, 율법의 저주 아래서 우리를 속량해주셨습니다.(갈 3:13)


다메섹 회향 이전 바리새파 바울은 십자가 처형을 하나님의 저주 사건으로 알고 있었다.(신 21:33) 하지만 안디옥 사건 이후, 십자가 처형 사건을 죄인들을 위해 대신 저주받은 속량 사건으로 해석한다.(갈 5:6)
바울은 새로운 피조물(kaine ktisis)이 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가르쳤다.(갈 6:15) 어떻게 하면 새로운 존재가 되는가?

‐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en Christo)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옛것은 지나갔습니다. 보십시오. 새것이 되었습니다.(고후 5:17)
‐ 나는 살고 있지만, 이제는 내가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en emoi) 사시는 것입니다.(갈 2:20)


나와 그리스도 사이의 특별한 연분(緣分)을, 바울은 ‘엔 크리스토’(en Christo), ‘엔 에모이’(en emoi)로 표현한다. 내가 그리스도 안에, 그리스도가 내 안에 있다는 뜻이다.(고후 13:3-5) 나의 삶은 그리스도에게 뿌리를 두고 있지만, 그리스도는 나를 통해 당신의 뜻을 드러낸다는 것이다.
바울은 자기를 비방하는 예루살렘교회 사도들에 대하여 극단적인 언어를 사용하여 저주한다.

여러분을 교란시키는 자는 누구든지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형제 여러분, 내가 아직도 할례를 선포한다면, 어찌하여 박해를 받겠습니까? 여러분을 선동하는 자들은 차라리 스스로 거세라도 하면 좋겠습니다.(갈5:10-12)

위에서 언급된 갈라디아서의 본문들은 안디옥교회 사건을 배경에 두고 읽지 않으면 본래의 의미를 파악하기가 불가능할 것이다.
바울이 다메섹에서 경험한 하나님의 아들 계시, 다메섹 바리새파 첫 그리스도인들의 성서에 따른 그리스도 사상, 큐(Q)의 역사적 예수의 삶과 말씀, 여기에 예수 죽음에 대한 대속신앙(갈 3:13)을 종합하여 “우리 죄를 위해 죽었다가 부활하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라는 기독교 케리그마가 완성되었다. 명실공히 기독교가 탄생하게 된 것이다.

기독교 신학의 창시자
바울은 기독교 케리그마 신학의 창시자이다. 하지만 그의 케리그마 신학은 단번에 형성된 것이 아니라, 몇 단계의 발전을 거쳐 이룩되었다. 첫째, 33년경에 일어난 다메섹 회향 사건이 그의 케리그마 신학의 바탕을 이루고 있다. 바울이 하나님으로부터 그의 아들에 관한 계시를 받은 사건이다.(갈 1:12) 둘째, 34-35년경 다메섹 유대교 회당에서 만난 유대계 첫 그리스도인들로부터 전해 받은 그리스도 복음이다. 그리스도께서 ‘성경대로’ 우리를 위해 죽고 부활했다는 케리그마이다.(살전 5:10, 고전 15:3 참조) 셋째, 36-37년경 예루살렘에 올라가 보름 동안 베드로에게서 역사적 예수의 생애와 가르침에 관해 집중적으로 공부했다.(갈 1:18-19) 넷째, 49년경의 안디옥 사건이다. 예루살렘교회와 등지고, 독자적인 신앙노선을 걸었다. 예루살렘교회의 율법 복음 대신에, 예
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처형을 우리 죄를 위한 대속 사건으로 선포함으로써 명실공히 기독교가 탄생하게 된 것이다.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요, 우리 죄를 위해 고난받고 죽었다는 대속교리를 선포한 첫 사람이 바울이다. 바울은 예수가 어떤 삶을 살았는가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었다. 그의 죽음이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에 관심을 두고 복음을 완성했다. 바울에게는 살아 있는 예수(living Jesus)보다 죽은 예수(dead Jesus)의 의미가 더 중요했다.
아쉽게도 바울은 죽은 예수의 의미 해석을 복음의 핵심으로 삼는 데서 멈추었다. 그가 예수의 삶(the life of Jesus)을 소홀히 다룬 것은 바울신학의 한계가 아닐 수 없다. 죽은 예수의 의미 해석에 만족하지 못한 후대의 복음서 작가들은 살아생전 예수의 삶과 가르침에 주목했다. 이에 관한 전승 자료들을 부지런히 수집하여 70-100년에 그들의 복음서를 펴냈던 것이다.


김명수 | 성균관대학교와 한국신학대학을 졸업하였으며, 독일 함부르크대학에서 예수말씀복음 큐(Q)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Dr. theol.) 지은 책으로는 『큐복음서의 민중신학』, 『역사적 예수의 생애』 등이 있다. 경성대학교 명예교수이며, 충주에 있는 노인요양시설 ‘예함의집’에서 치매 어르신들을 돌보는 일을 하고 있다.

 
 
 

2020년 9월호(통권 74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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