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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me > 기독교사상 > 성서와설교 > [조선과 대한민국 사이에 낀 성서 단어 07]
성서와설교 (2020년 9월호)

 

  사역자의 설자리: ‘강’(講)과 ‘예’(預)
  

본문

 

본격적인 논의에 앞서 먼저 ‘설자리’라는 단어부터 살펴보자. ‘설자리’는 국궁(國弓)에서 활을 쏠 때에 서는 자리를 말한다. 활을 쏠 때 정해진 자리에 굳건히 서서 활을 쏘아야 과녁에 명중시킬 수도 있고 불의의 사고도 예방할 수 있다. 설자리가 아니라 다른 곳에 서서 활을 쏘면 화살의 진행 방향에 다른 사람이 진입하는 사고가 생길 수 있고, 쏘는 동작에서 옆에 있던 사람이 다칠 수도 있다.
‘설자리’라는 단어로 글을 시작하는 것은 이런 질문을 하기 위해서이다. ‘사역자’의 설자리, ‘설교자’의 설자리는 어디인가? 이런 문제의식을 가지고 ‘강’과 ‘예’라는 두 단어를 각각 살펴본다.

‘기준’을 충실히 푼다는 의미의 ‘강’(講)
예배를 드릴 때 설교 순서가 되면 인도자는 아무개 목사님의 ‘강론’이 있을 것이라고 소개한다. 그러면 소개받은 목사님은 ‘강대’에 올라 ‘강대상’에 성서를 올려놓고 말씀을 시작한다.
‘강’(講)이라는 글자는 ‘말’을 나타내는 글자 ‘언’(言)과 ‘얽다 혹은 짜맞추다’는 뜻의 ‘구’(冓)가 합해져 이루어진 한자이다. 즉 말로 알아듣도록 설명을 얽는 것을 ‘강’이라 한다. 한자 사전에는 ‘외우다, 암송하다, 풀이하다, 설명하다, 연구하다’ 등의 의미로 새기고 있다. ‘강’의 핵심 뜻은 ‘기준이 되는 어떤 것’을 그대로 암송하고 구조를 분석하면서 그 뜻을 명확히 이해하는 행위에 있다. 사람들은 ‘그 기준’(서적)에 올바른 예와 규정이 ‘완성’되어 담겨 있다고 믿고 있다. ‘그 기준’을 완벽하게 숙지하고 풀이하고 해석하며 적용하는 것이 ‘강’의 의미이다. 이를 숙지하기 위해 암기, 소리 내어 읊기, 뜻풀이하기 등의 방
법을 쓰는 것이다. 자기의 생각만을 쏟아내면 ‘강’이 아니다.
예컨대 과거 정치제도에도 ‘강’의 활용이 잘 나타나 있다. 고려시대 이래 조선 초기까지, 관리를 등용하기 위한 시험인 과거(科擧)에는 명경과와 제술과가 있었다. 조선 중기 이후 과거가 세분화되면서 두 과로 분류하는 것은 사라졌지만, 시험 방식으로서의 명경, 제술은 계속 유지되었다. 제술과(製述科)는 쉽게 말해 각 개인의 글짓기 시험으로 생각할 수 있다. 상황에 따라 시(詩), 부(賦), 송(頌), 책(策), 의(義) 등 여러 문체 중 일부로 글을 짓게 한다. 문장을 구사하는 능력을 보면서 동시에 각종 정책에 대해 수험자가 가진 생각이 조리 있게 서술되었는가를 평가하는 과목이다. 명경과(明經科)는 『논어』, 『맹자』, 『중용』, 『대학』, 『주역』, 『시경』, 『서경』, 『예기』 등 유학 경전에 관한 지식을 묻는 시험이다. 즉 자신의 생각을 서술하기보다 해당 구절을 얼마나 잘 알고 외우고 있는지를 알아보는 시험이다. 대나무를 쪼개어 그 안쪽 하얀 부분에 유교 경전 각 장의 첫 구절을 적어둔 것을 ‘찌’[한자로는 ‘생’(栍)이라 한다.]라고 하는데, 명경과를 시행할 때는 각 책별로 정리된 찌 중에서 하나를 그 자리에서 뽑아 강술하게 한다. 평소에 공부할 때에도 찌를 뽑아 해당 구절을 설명하는 경우도 많았다. 이것이 ‘강’이다.
또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에는 ‘경연’(經筵)이라는 제도가 있었다. 경전의 ‘경’, 자리의 ‘연’을 합한 말로, 임금이 신하들과 함께 학문을 연마하는 자리를 뜻한다. 경연에서 주로 하는 일은 유교 경전을 ‘강’하는 일이다. 아침에 하는 강은 조강(朝講), 점심에 하는 강은 주강(晝講), 저녁에 하는 강은 석강(夕講)이라고 세분하기도 한다. 왕은 이런 여러 자리를 통해서 경전을 읽고 옛 성군의 예악제도, 정치방식 등을 배우고 그것에 따라 정사를 펼치려 하였다. 사서오경 등의 경전은 왕과 신하들이 정치를 해나가는 ‘절대적 기준’이었기 때문에 이를 끊임없이 ‘강’하였던 것이다.
이렇듯 ‘강’이란 바탕이 되는 경전에 대해 구조를 분석한다거나 구문을 암기하여 완벽히 이해하고 설명하는 행위이다. ‘기준이 되는 경전’이 있고, 그것을 사적으로 말하거나 사적으로 곡해하지 않고 경전 그대로를 충실히 따르고자 하는 태도, 그것이 ‘강’에 담겨 있다.

성서에 사용된 ‘강’(講)
성서에서도 ‘강론’이라는 단어가 사용되었다. 개역개정 번역본을 기준으로 10회 사용되었다. 신명기의 한 구절을 살펴보자.

신 6 : 7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을 갈 때에든지 누워 있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

신명기 11장 19절에도 비슷한 내용이 반복된다. 여기에 쓰인 ‘강론’이라는 단어는 ‘강’의 의미를 명확히 살린 표현이다. ‘율법’을 기준으로 삼아 그것을 가르치라는 맥락에서 ‘강론’이라는 표현을 사용한 것이다.
반면에 예수의 활동과 말씀을 기록한 복음서에서는 단 한 번도 ‘강론’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았다. 기준이 되는 경전을 풀이한 것을 ‘강’이라 하지만, 복음서에서는 기준이 되는 ‘경전’이 제시되는 것이 아니라, 기준 자체이신 예수께서 직접 말씀하신 내용이 담겨 있다. 그래서 예수께서 ‘강론하셨다’고 말하지 않은 것이다. ‘강론’이라는 표현 여부만을 보더라도 예수의 하나님의 아들 되심, 절대자 되심이 고백되고 있는 것이다.
사도행전에는 ‘강론’이라는 표현이 자주 사용되었다. 사도인 바울이 복음을 전하면서 ‘주의 말씀’을 ‘기준’으로 하여 그 말씀을 ‘설명’했기 때문에 ‘강론’이라고 표현한 것이다.

행 17 : 2 바울이 자기의 관례대로 그들에게로 들어가서 세 안식일에 성경을 가지고 강론하며
행 28 : 23 그들이 날짜를 정하고 그가 유숙하는 집에 많이 오니 바울이 아침부터 저녁까지 강론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증언하고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말을 가지고 예수에 대하여 권하더라



교회에서 목회자가 말씀을 전하기 위해 서는 곳을 ‘강대’(講臺)라 한다. 여기에서 ‘대’는 주변에 비해 조금 높게 튀어나와 있는 부분을 말한다. 각 교회마다 설교자가 잘 보이도록 다른 예배자의 좌석에 비해 조금 높게 돌출된 형태로 만들어놓은 곳이 강대이다. 그리고 강대에 둔 가구를 ‘강대상’이라 한다. 강대상 앞에 서는 목회자는 ‘강’이 무슨 뜻인지 기억해야 할 것이다. 자기 자신의 말이 아니라, 기준이 되는 ‘성서’를 풀어내는 것이 ‘강’이다. ‘강대’는 자신의 생각이나 주장을 펼치며 청중을 설득하는 연설 자리가 아니며, 자기 지식을 자랑하며 설명하는 강의 자리도 아니다. 한마디로, 성서의 말씀에 바탕을 두고 그것만을 언급하며 그 본뜻에 맞게 풀이하여 삶에 적용하도록 하는 것이 강론이다. 성서에 바탕을 둔 설교만이 강론이다. 명심하고 또 명심할 단어이다.

용례의 구별–‘예비’(豫備)와 ‘예치’(預置)
사역자의 설자리와 관련하여 주목할 또 하나의 단어가 ‘예’(預)이다. 우선 ‘예’(豫)와 ‘예’(預)라는 두 단어를 비교해보자. 한두 개의 뜻만 간단히 적어놓는 작은 사전에서는 두 글자 모두 ‘미리’라는 뜻의 한자라고 적혀 있을 것이다. 하지만 표의문자인 한자는 한 단어가 여러 의미로 쓰인다. 한 단어가 문맥에 따라 여기에서는 이런 의미로, 저기에서는 다른 의미로 쓰이기도 한다. 그래서 한문을 번역할 때는 문맥을 잘 살피고 맞추어야 비로소 그 의미를 정확히 파악할 수 있다.
‘예’(豫)는 보통 ‘미리’라는 뜻으로만 새기는 글자이다. 반면 ‘예’(預)는 ‘맡기다, 참여하다, 간섭하다’ 등의 의미를 지니고 있고, 일부 경우에는 ‘미리’라는 의미를 지닌 ‘예’(豫)와 통용되는 글자이다. 19세기 어휘 용례 사전인 『조고자결』만 보더라도, ‘예’(豫)와 비슷한 의미를 지닌 글자로 ‘예’(預)만 소개했고, ‘예’(預)와 비슷한 의미를 지닌 글자로는 ‘여’(與), ‘간’(干), ‘섭’(涉), ‘관’(關) 등을 적었다.
두 글자는 음이 같고 모양도 비슷하여 헷갈리기 쉽지만, 분명 구별되는 글자이다. 요즘 사람들이 흔히 쓰는 용례인 ‘예비’와 ‘예치’로 설명해보자. 예비(豫備)는 ‘미리 준비한다’라는 의미이다. 이때 ‘예’는 ‘미리’라는 뜻이다. 반면 ‘예치’(預置)는 ‘맡겨두다’라는 의미이다. ‘미리 두다’라는 뜻이 아니다. 예를 들어 ‘예치증서’는 물건이나 돈 등을 맡겨둔 경우에 발급하는 서류이다. ‘예’(預)는 ‘맡기다’는 뜻의 글자이다. 그래서 ‘예금’이라는 단어는 한자로 ‘豫金’이 아니라 ‘預金’이라고 쓴다. 맡긴 돈이지, 미리 준비한 돈이 아니기 때문이다. 같은 원리로, ‘맡기다, 참여하다, 간섭하다’는 의미를 나타내는 단어에는 ‘예’(預)를 써서 ‘예탁금’(預託金), ‘참예’(參預), ‘간예’(干預) 등으로 쓴다.
하지만 이렇게 명백히 다른 두 글자도 비슷하게 생기면 통용되곤 하는 것이 한자의 특성 중 하나이다. ‘예’(豫)와 ‘예’(預) 또한 바로 그런 경우라서, 서로 다른 의미를 지닌 글자였지만, ‘미리’라는 의미로 사용할 때는 두 단어를 같은 의미로 통용하기도 하였다.
또 처음에는 한 가지 의미만 서로 겹쳐 사용하던 두 단어가 서서히 나머지 의미까지 겹쳐 사용되는 경우도 있다. 모양이 비슷한 글자가 음까지 같은 경우 이러한 경향이 더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예’(豫)와 ‘예’(預)는 모양도 비슷하고 음까지 같아서 ‘미리’라는 의미뿐 아니라 다른 부분의 의미로도 겹쳐 쓰는 사람이 생겨났다. 일제강점기에는 물론 지금까지도 이 두 글자가 완전히 같은 글자인 것으로 아는 이들이 많다.

초기 성서 역본에서 통용되던 ‘예’(預)와 ‘예’(豫)
두 단어를 이렇듯 자세히 설명한 것은 성서에서의 쓰임새를 보기 위해서이다. 성서에서 ‘예’ 자는 자주 나오는데, 대표적으로 ‘예언’이 있다. ‘미리 예’(豫) 자를 사용하여 ‘예언’(豫言)이라고 하면 ‘앞일을 미리 말함’이라는 의미가 된다. 그런데 ‘맡을 예’(預) 자를 사용한다면, ‘預’와 ‘豫’가 같은 의미로 쓰인 경우로 생각하여 ‘앞일을 미리 말함’이 되기도 하지만, ‘맡다’라는 의미를 살려 ‘말씀을 맡음’이라는 의미가 된다. 그래서 선지자가 ‘예언’(預言)하였다고 하면 그가 앞일을 미리 말했다고 할 수도 있지만, 선지자가 하나님께서 내리신 ‘말씀을 맡아’ 그것을 충실히 전달했다는 의미로 쓸 수도 있다. 그래서 이 두 글자 중 어느 글자를 사용했느냐를 흥미 있게 살펴볼 수 있다. ‘예’(豫)를 사용했다면 ‘미리’라는 의미로만 받아들이지만, ‘예’(預)를 사용했다면 보다 다양한 의미
로 읽을 수 있는 것이다.
한자 표기를 담은 첫 우리말 성서는 1906년에 발간된 『국한문(國漢文) 신약전서』이다. 이 성서에서는 ‘예언’이라는 단어뿐 아니라 예비, 참예 등까지 모두 ‘예’(豫)가 아니라 ‘예’(預)를 썼다. 우리가 지금 사용하는 성서에서 ‘예언’(豫言)이라고 표기하는 것과는 다른 현상이다. 구체적으로 살펴보자.(괄호 안의 한글 표기는 필자가 추가하였다.)

마 11: 13 諸先知者(제선지자)와 律法(율법)에 預言(예언)●거시 요한■지至(지)○엿스니
롬 12 : 6 上帝(상제)가 賜(사)○신대로 我等(아등)의 得(득)● 恩惠(은혜)가 各異(각이)○니 或(혹) 先知者(선지자) 되◆者(자)는 信(신)의 分數(분수)대로 預言(예언)을 ○고
롬 12 : 17 惡(악)으로써 惡(악)을 報(보)치 말고 齊人前(제인전)에 善行(선행)을 預備(예비) ○라
계 20: 6 誰(수)이던지 第一次復活(제일차부활)에 參預(참예)○◆ 者(자)가 福(복)이 有(유)○고 聖(성)○도다


위 번역본 말고도 게일(奇一) 선교사가 1925년 번역해 펴낸 『신역(新譯) 신구약전서(新舊約全書)』에서도 ‘예’(預)를 사용하였다. 1926년에 발간한 『선한문(鮮漢文) 관주 성경전서』에서도 전체적으로는 ‘예’(預)가 쓰이고, 모세오경에서만 ‘예’(豫)를 사용하였다.
이처럼 초기 성서 번역본에서는 ‘예’(預)가 더 많이 사용되었으며, ‘예’(豫)와 ‘예’(預)가 동시에 사용되기도 하였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이러한 표기는 변화를 맞게 된다. 1964년에 나온 『간이(簡易) 국한문(國漢文) 관주 성경전서』에서는 ‘예언’(豫言)으로 표기되어 있다. 오늘날까지도 성서에 나오는 모든 예언은 ‘예언’(豫言)으로만 쓰고 있다.

‘미리’를 포함한 ‘맡김’의 의미: 예(豫) 너머 예(預)
별로 중요하지 않게 보일 수도 있지만, ‘예’라는 글자를 어떻게 이해하느냐의 문제는 오늘날 목회자의 자기 인식, 성도들이 목회자에게 요구하는 태도와 연관되어 있다. 성서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그 말씀을 백성에게 전하고 그 말씀대로 어떤 일을 행하는 사람을 예언자나 선지자 혹은 선견자 등으로 부르며, 그들이 하는 말을 ‘예언’이라고 한다. ‘예’(豫)나 ‘선’(先)의 의미에 집중하여 ‘미리, 먼저’라는 뜻만 강조되고 있다. 그래서 목회자나 성도 대부분이 ‘미리, 먼저’ 아는 것에 과도하게 신경쓰고, 미리 알기를 바라는 듯하다. 성도들은 어렵고 답답할 때 목회자를 찾아가 어떻게 하면 좋을지를 물어본다. 무언가 아는 것이 있으면, 혹은 무언가 보여주신 것이 있으면 알려달라고 목회자에게 대놓고 요구하기도 한다. 목회자 역시 답답한 마음으로 성도와 함께 아파하며 함께 기도하지만, 앞으로 있을 일을 미리 알고 있는 듯 미래에 어떻게 될 것이라고 말하려고 하거나 그래야만 할 것 같은 유혹이 생기기도 한다.
그런데 ‘예언’을 예언(豫言)이 아닌 예언(預言)으로 이해하면 하나님의뜻, 성서의 의미를 보다 잘 이해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지정하신 사람에게 어떤 말씀을 하시며 지시하셨다. 그를 선지자나 선견자, 예언자 등으로 불렀다. 성서를 보면, 하나님께서 그에게 ‘앞으로’ 이룰 어떤 일을 미리 말씀하시는 경우도 있지만, ‘지금’ 당장 누구에게 어떠한 말을 하라고 지시하시는 경우도 많다. 즉 미래 일뿐만 아니라 지금 현재 일을 말씀하시며 지시할 때도 많다는 것이다. 전자의 경우 앞으로 일어날 일을 ‘미리 말씀하심’이라는 의미이지만, 후자의 경우 그 사람은 ‘맡기신 말씀’을 가지고 지정하신 장소에 가서 전한다는 의미이다. 전자의 경우 ‘예’는 ‘미리’이고, 후자의 경우 ‘예’는 ‘맡기다’이다. 같은 ‘예언’이지만 두 단어의 의미가 달라진다. ‘미리 말하는 것’인가, ‘맡기신 말씀’을
전하는 것인가의 차이이다. 이 점을 생각하면서 개역개정 번역본으로 신명기 18장의 구절을 읽어보자.

18 내가 그들의 형제 중에서 너와 같은 선지자 하나를 그들을 위하여 일으키고 내 말을 그 입에 두리니 내가 그에게 명령하는 것을 그가 무리에게 다 말하리라
19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전하는 내 말을 듣지 아니하는 자는 내게 벌을 받을 것이요
20 만일 어떤 선지자가 내가 전하라고 명령하지 아니한 말을 제 마음대로 내 이름으로 전하든지 다른 신들의 이름으로 말하면 그 선지자는 죽임을 당하리라 하셨느니라
22 만일 선지자가 있어 여호와의 이름으로 말한 일에 증험도 없고 성취함도 없으면 이는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것이 아니요 그 선지자가 제 마음대로 한 말이니 너는 그를 두려워하지 말지니라


선지자는 ‘먼저 안 자’, 그래서 ‘미래를 말하는 자’라기보다는 하나님께서 ‘전하라는 말을 맡아 전하는 자’라고 이해할 때 위의 구절이 더 명확히 이해된다. 선지자는 전하라는 ‘말을 맡은 자’, 즉 ‘예언자’(預言者)이다. 선지자는 그 맡은 말씀을 지정하신 곳에 정확히 전하는 임무를 맡은 자이다. 또 유일한 참 신이신 하나님은 ‘말씀하신 대로’ ‘이루실’ 수 있기 때문에, ‘전하라는 말’ 중 일부는 앞으로 일어날 일을 ‘미리’ 말씀하시는 ‘예언’(豫言)이기도 하다. 그래서 ‘예언’(豫言)은 의미상 더 작은 단어이며, ‘예언’(預言)은 ‘예언’(豫言)의 의미를 포괄하면서 동시에 다른 의미도 포함하는 보다 큰 단어이다.
오늘날 목회자는 앞으로 있을 일을 미리 말하는 예언(豫言)이 아니요, 주님이 맡기신 말씀을 정확히 전달하는 예언(預言)을 하고 있다고 스스로의 역할을 다잡으면 어떨까? 그래서 성도들에게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이라고 말해주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주신 말씀’에 집중하게 만드는 역할을 했으면 한다. 성도들 또한 목회자들에게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인지, 어떻게 해야 잘 되겠는지 미래의 일에 관하여 물어볼 것이 아니라, 주께서 주신 말씀, 맡기신 말씀이 정확히 무엇인지 바르게 알고 그것에 집중하는 데 도움을 달라고 요청하는 것이 올바른 신앙인의 태도가 아닐까?
설자리에 올바로 서야 화살을 과녁에 명중시킬 확률도 높아지고, 사고도 예방할 수 있다. ‘강’(講)과 ‘예’(預)의 의미를 되새기면서 사역자로서, 설교자로서, 나아가 한 사람의 성도로서 우리가 서야 할 자리는 어디인가, 기준으로 삼아야 할 것은 무엇인가를 돌아보기를 권한다.


서신혜 | 고전문학을 전공하여 박사학위를 받은 후 신학(M.Div.)을 공부하였다. 저서로 『한국 전통의 돈의 문학사, 나눔의 문화사』 등이 있다. 한양대학교 인문대학 부교수이다.

 
 
 

2020년 9월호(통권 74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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