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으로 | 대한기독교서회 | 회원가입 | 로그인
사이트 내 전체검색

Home > 기독교사상 > 성서와설교 > [바울 구원론의 탐구 08]
성서와설교 (2020년 9월호)

 

  아담과 그리스도
  

본문

 

이 때문에(‘디아 투토’), 즉 한 사람을 통하여(‘디아’) 죄(‘하마르티아’)가 세상 속으로(‘에이스’) 들어왔고, 그 죄를 통하여 죽음(‘다나토스’)이 들어온 것과 같이(‘호스페르’), 그렇게(‘후토스’) 죽음이 모든 사람들 속으로(‘에이스’) 퍼졌기 때문에, 그것을 근거로(‘에피 호’) 모두가(‘파스’의 복수) 범죄했습니다(‘하말타노’의 과거).(롬 5:12, 이하 필자 사역)

하지만(‘알라’) 과오(‘파랍토마’; 실수, 허물)와 달리, 은사(‘카리스마’; 은혜의 선물)는 그렇지 않습니다. 비록(‘에이’; 비록 ~일지라도) 한 사람의 과오(‘파랍토마’)와의 관계에서(여격) 많은 사람들이 죽었을지라도(‘아포드네스코’의 과거), 그 많은 사람들을 위한(‘에이스’) 예수 그리스도 그 한 사람 안에 있는(‘엔’) 하나님의 은혜(‘카리스’)와 그 선물(‘도레아’)은 풍성했습니다(‘페릿슈오’의 과거; 넘치다).(롬 5:15)



새로운 단락이 시작되는 5장 12절은, “이 때문에”(Διὰ τοῦτο)라는 말로 말머리를 꺼낸다. 우리말 번역들이 “그러므로”(혹은 이러므로)라고 접속사처럼 잘못 번역했기 때문에, 그 ‘연속성’을 찾느라 한참을 헤맸다. 그러나 다시 번역하면서 자세히 살피니 그게 아니었다. 이 말이, 뭔가 ‘까닭’을 설명하려는 의도를 내비친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한 사람을 통하여 죄가 세상 속으로 들어왔고, 그 죄를 통하여 죽음이 들어온 것과 같이(‘호스페르’), 그렇게(‘후토스’) 죽음이 모든 사람들 속으로 퍼졌습니다.”라는 말이 ‘이 때문에’를 이어받는다. 정작 중요한 것은, “그것을 근거로(ἐφ’ ᾧ) 모두가 범죄했습니다(‘하말타노’의 과거).”라고 말하는, 그다음 말이다. 우리말 성서들은 ‘그것을 근거로’라는 이 말도 번역에 반영하지 않았기 때문에, 문맥의 흐름을 짚어내기가 어려울 수밖에 없었겠구나 싶다. 이 문장에서 중요한 것은, <이 때문에>와 <그것을근거로> 사이의 ‘연관성’을 파악하는 일이다.
풀어서 말하면 이런 식이다. ‘한 사람’을 통하여 ‘죄’가 들어왔고, 그 ‘죄’를 통하여 ‘죽음’이 들어옴으로써, 그 죽음이 <모든 사람들 속으로> 퍼졌기 때문에, 그것을 근거로 <모두가> 범죄했다는 것이다. ‘들어온 죄’와 ‘퍼져버린 죽음’이, 결국은 ‘우리 모두의 범죄’를 야기했다는 소리다. 그런데 우리말 성서 대부분은,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나니”(개역개정)라는 식으로 번역함으로써, 문맥의 흐름을 전혀 엉뚱하게 뒤바꿔버렸다. 아마도 영어 성서를 근거로 중역(重譯)을 하다 보니, 이런 우를 범한 게 아닌가 싶다. 모두가 <범죄했기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죽음이 이르렀다>는 말이 아니다. 모든 사람들 속으로 <죽음이 퍼졌기 때문에>, 그것을 근거로 모두가 <범죄했다>는 말이다.
사역(私譯)을 통해서 이 문장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찬찬히 살피다 보니, 결코 가벼이 흘려 넘길 수 없는 의미가 단어 하나하나에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다. ‘한 사람’을 통하여 ‘죄’가 세상 속으로 들어왔다는 것은, 무슨 소리인가? 그리고 그 ‘죄’를 통하여 ‘죽음’이 들어왔다는 말은, 어찌 이해해야 한단 말인가? 모든 사람들 속으로 퍼져버린 그 ‘죽음’ 때문에 모두가 ‘범죄했다’는 그 말은, 어찌 설명될 수 있는 것일까? 그야말로 ‘난제 중의 난제’이다. 어느 것 하나 가벼이 다룰 명제가 아니다.
“한 사람을 통하여 죄가 세상 속으로 들어왔다.”라고 했으니, 아무래도 그 한 사람 ‘아담의 이야기’로 돌아가야 할 것 같다. 창세기의 타락 설화에서 ‘선악과를 따 먹은 그 이야기’가 ‘우리의 범죄’와 어떤 연관성을 갖는지를, 이 기회에 함께 천착해보기로 하자. “원죄가 유전된다.”라는 식의 관념적인 틀을 벗어나기 위해서라도, 또 서구 신학이 우리에게 가르쳐준 ‘부실한(?) 해석’을 넘어서기 위해서라도, 한 번쯤은 감행해야 마땅한 도전이 아니겠는가.

선악과의 비밀
주입식 교육을 받고 자란 사람들에게서 드러나는 특징이 있다. 일방적으로 듣기만 해서 그런지, 어쩌다 손을 들고 물어도 ‘잘못된 질문’을 한다는 점이다. 질문 자체가 잘못된 줄도 모르고, 무엇이든 묻기만 하면 질문인 줄 안다. “다른 종교를 믿어도 구원받을 수 있나요?”라든가, “세종대왕은 지옥에 가나요?”라는 식의 질문이다. 얼마나 자기중심적인 사고에 길이 들었으면 이런 질문을 할까 싶다. 또 이런 질문에 대답을 한답시고, 방송에 출연하여 얼굴을 내미는 신학자들도 딱하다. 한국교회의 현실을 민낯 그대로 드러내 보이는 것 같아서, 남이 볼까 저어될 지경이다.
선악과에 대한 질문도 별반 다르지가 않다. 대뜸 묻기를, “왜 하나님은 선악과를 만드셨나요?” 한다. “야 이놈아, 물으려거든 만드신 하나님에게 묻지 왜 나에게 묻느냐?” 하고 일축해버려야 마땅하다. 그래야 자기가 한 그 질문이 잘못되었음을 깨닫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뭔가 사고방식 자체에 조리가 없다. 앞뒤도 구분 못하고, 경중도 가려볼 줄을 모른다. 묻겠거든, 창세기 2장 16-17절을 읽을 때 물었어야 한다. 동산에 있는 모든 나무의 열매는 먹고 싶은 대로 먹으라 하시면서, “왜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만은 먹어서는 안 된다 하셨을까?” 하고 자문(自問)해야 한다. “먹으면 죽으니까.”라는 대답을 얻는다 해도, 더 깊이 물어야 할 것이 있다. 도대체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가 무엇이기에, 그 열매를 먹으면 죽는다고 하는지를 물어야 한다.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라는 말이 무슨 뜻인지를 묻는 것이, 더 근본적인 질문이지 싶다. 이 이야기가 ‘설화’(說話)라는 것을 감안한다면, 창세기 저자의 ‘설화적 화법(話法)’에 관심을 기울이는 것이 우선되어야 하지 않겠느냐는 말이다.
여기서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라고 할 때, 그 ‘선과 악’은 히브리어로 ‘토브와 라’이다. 형용사 ‘토브’는 ‘선한, 좋은’이라는 뜻이다. “하나님께서 보시니 참 좋았더라.”(창 1:31) 할 때도, 이 ‘토브’가 쓰인다. 그리고 형용사 ‘라’는 ‘악한, 나쁜’이라는 뜻이다. 이뿐만이 아니다. ‘안다’고 할 때 쓰인 ‘다아트’라는 동사는, ‘야다’에서 유래된 말로서 ‘체험적인 인식’을 뜻한다고 한다. 그러니까 통상적으로 쓰이는 ‘선악과’라는 말 때문에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라고 번역되었을 테지만, 필자로서는 ‘선과 악을 안다’는 것이 윤리적(도덕적)인 의미로 오해되는 것은 피하고 싶다. 왜냐하면 선과 악을 안다는 것은, 좋은 의미이지 나쁜 의미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라는 번역을, “좋고 나쁨을 알게 하는 나무”라는 뜻으로 그 의미를 달리 이해한
다.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신 ‘하나님의 토브’가, 인간이 선악과를 따먹음으로써 ‘토브와 라’로 나누어지게 되었다고 보기 때문이다. 이른바 이분법적(二分法的)인 ‘상대적(相對的) 인식(認識)’이 생겨났다는 말이나 다름없다. 고저장단(高低長短), 빈부귀천(貧富貴賤), 생사화복(生死禍福) 그 모두가, 이 상대적인 인식에서 비롯된 것이다. 인식만이 아니다. 언어 자체가 그렇고, 생각 자체가 그렇다. 삶이 온통 이 상대성에 의해서 비틀려버렸다. 모든 것을 자기중심적으로 판단하여 ‘좋다, 나쁘다’ 하게 되었다는 말이다. ‘좋다, 나쁘다’ 하는 것 자체가, 욕심에 근거한 판단이다. 그래서 좋다고 생각하는 것은 취하려 하고, 나쁘다고 생각하는 것은 버리려고 한다. 보시기에 좋았다 하신 ‘하나님의 눈’을 상실한 셈이다.
먹지 말라는 선악과를 먹었다고 해서, 그 ‘불순종’(롬 5:19)을 ‘죄’라고 여길 수도 있다. 그러나 그 선악과를 먹음으로써 모든 것을 ‘좋음과 나쁨’으로 가려서 보게 된, 그 상대적인 인식 자체를 필자는 ‘근원적인 죄’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좋고 나쁨을 가려보는’ 그 인식의 밑바닥에는, ‘뱀’으로 상징되는 인간의 ‘원초적 욕망’이 숨겨져 있는 것으로 해석한다. “원죄(原罪)가 유전된다.”라는 식의 관념적인 해석을 수긍하고 싶지 않은 것도 이 때문이다. 그런 식의 원죄는, ‘인식의 비틀림’(상대적인 인식)을 전혀 고려하지 못한 관념적인 이름 짓기에 불과할 뿐이다. 어쩌면 서구 신학이 ‘이원론적인 사고’의 틀을 벗어나지 못하는 것도, ‘좋음과 나쁨을 가려보는’ 이 잘못된 인식을 잘못으로 보지 않기 때문은 아닌지 묻고 싶다.
한 사람(아담)을 통하여 ‘죄’가 세상 속으로 들어왔다는 말이 나름 이해되었으니, 그 죄를 통하여 ‘죽음’이 들어왔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지 함께 생각해보기로 하자. 흔히들 “그것을 먹는 날, 너는 반드시 죽을 것이다.”라고 했던, 창세기 2장 17절을 근거로 이 ‘죽음’을 해석한다. ‘먹으면 반드시 죽는다’ 하신 그 선악과를 먹었으니, “죄를 통하여 죽음이 들어왔다.”(롬 5:12)라고 볼 수밖에 없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그러나 여자가 그 선악과를 먹은 것은, “먹어도 절대로 죽지 않는다.”(창 3:4)라는 뱀의 말을 믿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먹고 나서 보니, 뱀의 말대로 그 선악과를 먹고도 ‘죽지 않는다’는 것이 <사실로> 밝혀졌다. 그렇다면 바울이 “그 죄를 통하여 죽음이 들어왔다.”(롬 5:12)라고 말할 때, 그 ‘죽음’은 어떤 죽음을 말하는 것일까? 더구나 “그 죽음이 모든 사람들
속으로 퍼졌다.” 하는 것으로 미루어보면, ‘들어온 죄’와 ‘퍼져버린 죽음’ 사이의 관계는 필히 규명되어야 마땅하다.
‘토브와 라를 알게 된’ 잘못된 인식 자체를 ‘죄’라고 보는 필자로서는, 그 죄를 통하여 들어와 퍼져버린 ‘죽음’도 이 <상대적인 인식>과 연관된 것으로 보지 않을 수 없다. “먹어도 절대로 죽지 않는다.” 했던 뱀의 말을, 곰곰이 곱씹어 보라. 뱀은, ‘죽지 않은’ 것을 ‘삶’이라 생각해서 이렇게 말하는 것 같다. 그런 점에서는, ‘삶과 죽음’을 상대적으로 인식하는 오늘날 우리와 조금도 다르지가 않다. ‘아직 죽지 않은 목숨을 삶이라 여기는’ 잘못된 관념이 생겨난 것도 이 때문이다. 고린도전서 15장 44절에서 바울은, 이런 삶을 “프쉬키코스 소마”라고 한다. 우리말의 ‘산목숨’처럼, 그저 숨을 쉬며 사는 ‘생존 차원의 삶’을 두고 이르는 말이다. 아담을 에덴동산에서 쫓아낸 후, ‘생명나무에 이르는 길’(창 3:24)을 하나님이 차단하신 것도 이 때문이지 싶다. ‘삶과 죽음’을 서로 반대되는 상대적인 개념으로 인식하는 한, 더는 ‘본래적인 생명’을 살 수 없게 되었다는 뜻이다. ‘산목숨’이란 말 그대로, ‘생명을 잃어버린 목숨’을 살게 된 것이다. 그러니 살면서도 늘 ‘죽음’을 두려워할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이른바 ‘죽음에 종노릇하는 삶’이라고 하는 것도 바로 이것이다. 이제 이쯤 되면, “죄를 통하여 죽음이 들어왔다.”라는 말도 이해되고, “그 죽음이 모든 사람들 속으로 퍼졌다.” 하는 말에도 머리가 끄덕여진다. 그리고 왜 “그것을 근거로 모두가 범죄했다.” 하는지도, 설명이 가능할 것 같다. 로마서 3장 23절(“모두가 범죄했다.”)에 대한 뒤늦은 해석인 셈이다.
생명나무에 이르는 길을 차단당한, 그래서 ‘생명을 잃어버린 목숨’을 살 수밖에 없는, 바로 여기에서부터 삶의 부조리와 모순이 생겨났다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니다. 이런 목숨을 사는 한, 살면서도 늘 ‘죽음’을 두려워하게 마련이다. 더 나아가, 죽지 않으려고 아득바득하는 ‘생존의 욕구’가 삶을 지배하게 된다. 여기 타락설화에 등장하는 ‘뱀’을, 필자가 ‘욕망’의 상징으로 보는 것도 이 때문이다. 우리 저마다의 마음속에 ‘똬리를 틀고 들어앉아 있는 뱀’, 이것이 모든 범죄의 근원인 셈이다. 그래서 이런 삶을 바울은, “죄가 죽음 안에서(엔) 왕 노릇 한(‘바실류오’의 과거; 다스리다, 지배하다)”(롬 5:21) 삶으로 본다. 죄가 우리를 지배하는 수단으로 ‘죽음’을 이용한다는 뜻이다. 그래서 이런 삶을 “죄의 몸”(롬 6:6)이라 이르기도 하고, “죽음의 몸”(롬 7:24)이라 이르기도 한
다. 죽지 않기 위해서는 죄가 시키는 대로 욕심에 이끌려 살 수밖에 없다 하여, 이런 삶을 바울은 “영을 따라 사는” 삶에 대비시켜 “육을 따라(‘카타 사르카’) 사는”(롬 8:4) 삶이라 한다. 그리고 그렇게 욕심을 좇아 사는 사람들을 ‘죄의 종’이라 한다. 로마서 5장 14절에서 아담을, “오실 자의 모형”(개역개정)이라고 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죄라는 측면에서 보면, 인간은 아담처럼 살게 마련인 존재라는 뜻이다. 아담을 죄인의 원형(‘튀포스’)으로 보는, 이른바 ‘아담 동형론’이다. 그렇다면 이제 5장 19절의 말 그대로, “한 사람의 불순종을 통하여 많은 사람들이 죄인들(형용사 ‘하말톨로스’의 복수)이 된 것과 같이, 그렇게 한 사람의 순종을 통하여 많은 사람들이 의로운 자들(형용사 ‘디카이오스’의 복수)이 될 것이다.”라고 했으니, 아담과 다른 그 길이 그리스도를 통해 어떻게 제시되는지, 바울이 가리키는 손가락을 따라가 보기로 하자.

생명의 의화
한 사람 ‘아담’과 또 한 사람 ‘그리스도’를 대비시켜 말하는 5장 15절을 주목하자. “하지만 과오(‘파랍토마’)와 달리 은사(‘카리스마’; 은혜의 선물)는 그렇지 않습니다. 비록(‘에이’; ~일지라도) 한 사람의 과오로(여격) 많은 사람들이 죽었을지라도(‘아포드네스코’의 과거), 그 많은 사람들을 위한(‘에이스’) 예수 그리스도 그 한 사람의 은혜 안에 있는(‘엔’) 하나님의 은혜(‘카리스’)와 그 선물(‘도레아’)은 풍성했습니다(‘페릿슈오’의 과거).” 똑같은 접미어 ‘마’로 끝나는 ‘파랍토마’(과오)와 ‘카리스마’(은사)의 대비가 돋보인다. 아담 그 ‘한 사람’의 과오로 ‘많은 사람들’이 죽었음을 말하고, 그 ‘많은 사람들’을 위한 그리스도 그 ‘한 사람’의 은혜 안에 있는 은사를 이와 대비시킨다. 이른바 ‘one-many의 구조’이다. 그 ‘많은 사람들’이 살아가는 삶의 두 유형을, 원형적인 존재인 ‘아담과 그리스도’로 표상하고 있다. 그러면서 아담의 ‘과오’보다는 그리스도의 은혜 안에 있는 ‘은사’가 풍성했음을 말하려고 한다. 이 구절에서 우리가 유념해 보아야 할 것은(필자도 처음에는 갈피를 잡지 못해 한참을 헤맸지만), 은사(‘카리스마’; 은혜의 선물)라는 말이다. 이 “은사”(‘카리스마’)라는 말을 바울은, 하나님의 “은혜”와 “그 선물”로 나누어 말한다. 왜일까?
이어지는 17절을 보면, 15절에서 말한 “그 선물”이 “의로움(‘디카이오쉬네’)의 선물(‘도레아’)”로 부연되고 있다. 언뜻 보아서는, ‘의로움’을 ‘선물’로 말하는 것처럼 들리기도 한다. 그러나 17절을 보다 세밀히 살피면, 이 ‘의로움의 선물’이 ‘생명’과 연관되어 있음을 눈치챌 수 있다. “비록 한 사람의 과오로(여격) 그 한 사람을 통하여 죽음이 왕 노릇 했을지라도(‘바실류오’의 과거), 은혜와 의로움의 선물의 풍성함(‘페릿세이아’의 목적격)을 받는(‘람바노’의 분사 현재)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 그 한 분을 통하여(‘디아’) 생명 안에서(‘엔’) 더더욱(‘폴로 말론’) 왕 노릇 할 것입니다(‘바실류오’의 미래).”(롬 5:17) ‘의로움의 선물의 풍성함을 받는(현재) 사람들’을 <현재>로 말하면서, 그들이 ‘생명 안에서 더더욱 왕 노릇할(미래)’ <미래>를 내다보고 있다. ‘의로움의 선물의 풍성함’과 ‘생명 안에서’의 연관성은, 6장 23절(“하나님의 은사는 우리의 주이신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영원한 생명입니다.”)로도 확인된다.
그런데 문제는, 한 절 한 절 이어지면서 바울의 논리가 이해하기 힘들 정도로 복잡하게 엮여 있다는 점이다. 15절에서는 “예수 그리스도 그 한 사람의 은혜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은혜와 그 선물은 풍성했다(‘페릿슈오’의 과거).” 하면서, 그 선물의 ‘풍성함’을 말한다. 그리고 17절에서 “은혜와 의로움의 선물의 풍성함(‘페릿세이아’)을 받는 사람들”을 말할 때도, ‘풍성함’이란 말을 잊지 않는다. 뭔가 남아돌 정도로 넘쳐나는 풍성함을 뜻한다. 뜻으로는 별반 눈길을 끌 만한 점이 없다. 오히려 그보다는, ‘의로움의 선물’을 말하는 이 대목에서 바울이 ‘그 풍성함’을 왜 이처럼 강조하여 말하는지를 물어야 할 것 같다. 오랜 고심 끝에 필자는, 이 ‘풍성함’이 ‘바실류오’(왕 노릇 하다)라는 동사와 연결되어 있음을 발견했다. 5장 17절에서 “더더욱 왕 노릇 할 것입니다.”라고 말할 때,
그 <더더욱>이 <풍성함>과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여기 쓰인 ‘바실류오’(βασιλεύω)라는 동사는, ‘다스리다, 지배하다, 왕 노릇 하다’라는 뜻으로, 로마서에서는 여섯 번(5:14, 17, 17, 21, 21, 6:12) 쓰인다. 그중에서도 5장 14절과 17절, 그리고 21절에서 집중적으로 쓰인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렇다면 거슬러 올라가, 14절부터 다시 살펴야 할 것 같다. “하지만 아담에서 모세까지, 아담의 과오(‘파라바시스’)와 같은 것(명사 ‘호모이오마’)을 범하지(‘하말타노’의 분사 과거) 않은 사람들 위에도(‘에피 카이’), 그 죽음이 왕 노릇 했다(‘바실류오’의 과거).” 한다. 이 14절을 이어받아 부연하면서, 17절은 또 다른 반전을 꾀한다. “비록(‘에이 가르’; 비록 ~일지라도) 한 사람의 범죄(‘파랍토마’; 범죄행위)와의 관계에서(여격) 그 한 사람을 통하여(‘디아’) 죽음이 왕 노릇 했을지라도(‘바실류오’의 과거), 은혜와 의로움(‘디카이오쉬네’)의 선물의 풍성함(‘페릿세이아’)을 받는(‘람바노’의 분사 현재)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 그 한 분을 통하여(‘디아’) 생명 안에서(‘엔’) 더더욱(‘폴로 말론’) 왕 노릇 할 것입니다(‘바실류오’의 미래 3인칭 복수).”
‘의로움의 선물의 풍성함’이 ‘생명’과 연관되어 있다는 것은, 앞에서 이미 살핀 바 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더더욱 왕 노릇 할 것이다.”라고 말하는 ‘미래의 약속’이다. 그리고 이 동사의 ‘주어’(3인칭 복수)는, “은혜와 의로움의 선물의 풍성함을 받는(현재) 사람들”이다. 14절에서는 “그 죽음이 왕 노릇 했다.”(과거) 하더니, 여기 17절에서는 “사람들이 왕 노릇 할 것이다.”(미래)라고 말한다. ‘전에는’ <죽음이> 왕 노릇 했지만, ‘앞으로는’ <사람들이> 왕 노릇 할 것을 내다보고 있다. 게다가 “더더욱 왕 노릇 할 것이다.”라고 말하면서, 이 <더더욱>을 “의로움의 선물의 풍성함을 받는 사람들”의 <풍성함>과 연관시켜 말한다. 이뿐만 아니라, “생명 안에서(‘엔’) 왕 노릇 할 것이다.”라고 말함으로써, 그 ‘의로움의 선물’이 ‘생명’임을 간접적으로 시사한다.
이 모든 복잡한 논리를 바울은, 5장 18절의 “그러므로 결국”이라는 말로 마무리한다. “그러므로 결국(‘아라 운’) 한 사람의 범죄행위(‘파랍토마’)를 통하여(‘디아’) 많은 사람들이 형벌(‘카타크리마’)에 이른(‘에이스’) 것 같이(‘호스’), 그렇게(‘후토스’) 한 사람의 의로운 행위(‘디카이오마’)를 통해서(‘디아’) 생명의 의화(‘디카이오시스 조에스’)에 이르는(‘에이스’) 것입니다.” 동사가 없는 문장이다. 그래서 17절과 마찬가지로 이 18절도, 전치사 ‘에이스’를 동사처럼(~에 이른다) 번역했다. 눈여겨보아야 할 것은, ‘한 사람’ 아담과 다른 ‘한 사람’ 그리스도의 대비이다. 그러면서 각기 다른 그 ‘한 사람’이 ‘많은 사람들’에게 미친 영향 또한 대비시켜 말한다. 이 대목에서 필자가 주목하는 것은, 한 사람의 ‘의로운 행위’를 통해서 많은 사람들이 이른다고 한 ‘생명의 의화’이다. 특히 필자가 ‘의화’(義化)라고 번역한 ‘디카이오시스’(δικαίωσις)는, 로마서에서 단 두 번(롬 4:25, 5:18) 쓰인 희귀한 단어이다. “그는, 우리의 범죄들(‘파랍토마’
의 복수) 때문에(‘디아’) 넘겨졌고(‘파라디도미’의 과거 수동태), 우리의 의화(‘디카이오시스’) 때문에(‘디아’) 일으켜지셨습니다(‘에게이로’의 과거 수동태).”(롬 4:25)라고 말한 필자의 사역을 근거로, ‘우리의 의화’와 ‘그리스도의 부활’이 깊이 연관되어 있음을 지난 연재글(2020년 7월호)에서 밝힌 바 있다. “믿음으로부터 나서(‘에크’) 믿음에 이르는(‘에이스’)”(롬 1:17) 구원의 전 과정을, “믿음으로(여격) <사람이> 의로워지는”(롬 3:28, 갈 2:16) 것이 ‘의화’이다.
5장으로 접어들면서,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부터 나서(‘에크’) 의로워졌은즉(‘디카이오오’의 과거)”(롬 5:1)이라고 말할 수 있었던 것도, 4장 25절에서 말한 “우리의 의화”를 전제했기 때문이다. 이 ‘의화’(義化)가 5장 9절에 이르면, “더더욱 의로워졌다”는 말로 선명히 부각된다. ‘더더욱 의로워지는’ 구원의 전 과정을, 바울은 ‘디카이오시스’(의화)라는 단어 하나로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필자가 이 대목에서 “더더욱 의로워졌다”(롬 5:9)는 것을 ‘의화’로 보고 그것을 강조하는 것은, “생명 안에서 더더욱 왕 노릇 할 것이다.”(롬 5:17)라고 말하는 “생명의 의화”(18절)와 그것이 의미상으로 절묘하게 엮여 있음을 보았기 때문이다. ‘더더욱’이라는 말 자체가 ‘아직은’ 뭔가 부족하다는 느낌을 반영한다고 보면, 5장 1절의 ‘의로워졌다’와 5장 9절의 ‘더더욱 의로워졌다’ 사이에도 ‘아직은 아니’(not yet)라는 숨겨진 논리가 분명 있을 것이다.
5장 6절과 8절에서 연속해서 두 번 쓰인 부사 ‘에티’(아직도, 여전히)를 주목해주기 바란다. 5장 1절에서 “우리가 믿음으로부터 나서(‘에크’) 의로워졌은즉(‘디카이오오’의 분사 과거)” 하고 말해놓고도, “아직은(‘에티’) 연약한 상태에(형용사 ‘아스데네스’) 있는(‘에이미’ 동사의 분사 현재) 우리”(롬 5:6)임을 말하고, “여전히(‘에티’) 타락한 상태에(형용사 ‘하말톨로스’; 죄 있는) 있는(‘에이미’ 동사의 분사 현재) 우리”(롬 5:8)임을 놓치지 않는다. 그러면서 <그런 우리>를 위해서 죽으신 그리스도를 말하고, 그의 죽음으로 확증된 하나님의 ‘자기희생적 아가페’를 환기시킨다. “그러므로 이제는 우리가 그의 피 안에서 더더욱 의로워졌습니다.”(롬 5:9)라고 말하는 것도 이 뜻이다. 그리고 이것을 5장 17절(“생명 안에서 더더욱 왕 노릇 할 것입니다.”)과 나란히 놓고 보면, 어렴풋이 깨달아지는 것이 있다. 9절의 “그의 피 안에서”와 17절의 “생명 안에서”는, 정확하게 일대일로 대응한다. 그리고 이것을 통해서 유추해보면, ‘그의 피 안에서 더더욱 의로워져야만’(9절) ‘생명 안에서 더더욱 왕 노릇 하게 된다.’(17절)는 것도 깨달을 수 있다. ‘더더욱 의로워지는’ <의화>를 통해서만 생명 안
에 있게 되고, 그 <생명> 안에서라야 더더욱 왕 노릇 할 수 있다고 해서, 바울은 이것을 <생명의 의화>라고 했던 것이다.


강일상 | 한국신학대학과 동 대학원을 졸업하였다. 『마가복음의 기적 이야기』, 『산상설교, 그 사람됨의 가르침』, 『부활되어야 할 부활』을 펴낸 바 있다. 지금은 은퇴하였다.

 
 
 

2020년 9월호(통권 741호)

이번호 목차 / 지난호 보기

기독교서회
기독교서회
기독교서회
기독교서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