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으로 | 대한기독교서회 | 회원가입 | 로그인
사이트 내 전체검색

Home > 기독교사상 > 성서와설교 > [성서와 설교–예수에게 길을 묻다 02]
성서와설교 (2020년 8월호)

 

  새 시대의 여명(黎明)과 예수의 길
  

본문

 

그 무렵 세례자 요한이 나타나, 유다 광야에서 이렇게 선포하였다. “회개하여라. 하늘나라가 닥쳐왔다.”(마 3:2)
In those days John the Baptist appeared, preaching in the desert of Judea. (and) saying, “Repent, for the kingdom of heaven is at hand!”(Mt 3:2)
그때부터 예수께서는 “회개하여라. 하늘나라가 닥쳐왔다”하고 선포하기 시작하셨다.(마 4:17)
From that time on, Jesus began to preach and say, “Repent, for the kingdom of heaven is at hand.”(Mt 4:17)


1
내가 슈바이처를 만난 것은 신학교 다닐 때였다. 안병무 교수께서 ‘역사적 예수’라는 과목을 개설했는데, 이 수업에서 나는 슈바이처의 저서 『라이마루스에서 브레데까지』를 발제하게 되었다. “역사적 예수의 생애 연구”(The Quest of the Historical Jesus)라는 부제로 더 알려진 책이다.
신 중심의 중세 기독교 세계가 끝나가고 르네상스 이후 근세에 접어들면서, 역사를 중시하는 인문주의 바람이 거세게 불었다. 기독교계도 예외가 아니었다. 신성(神性)을 지닌 그리스도 예수보다 역사적인 지평에서 ‘맨사람 예수’의 생애 탐구가 일대 유행처럼 되었다.
슈바이처는 17세기부터 19세기까지 3세기에 걸쳐 진행된 역사의 예수에 대한 탐구 성과를 총정리하면서, 그동안 밝혀낸 역사적 예수상들(images of historical Jesus)은 역사적 실존 인물 예수라기보다, 신학자들이 이상(理想)으로 삼고 있던 인간상을 예수에게 투영한 것에 불과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사탄의 통치 시대는 종말이 다가오고, 하나님의 통치 시대가 닥쳐오고 있다는 확신 속에서 예수는 민중과 더불어 생명운동을 펼쳤다는 점에 그는 주목했다.
역사의 예수는 철저한 시한부 묵시종말의 날이 올 것을 고대하고 살았는데, 기대했던 종말이 지연되자 역사의 수레바퀴를 멈춰 세우려고 십자가에 올라갔다. 하지만 역사의 수레바퀴는 멈추지 않고 계속 돌아갔다. 예수는 실패한 묵시종말적 혁명가였다는 것이 슈바이처의 결론이다.
이와 같은 그의 신학적 경향성에 대해 이 자리에서 왈가왈부할 생각은 없다. 그는 복음서를 연구하면서 역사적 예수의 삶과 가르침에 감동을 받은 나머지, 이를 실천하는 삶을 살기 위해 의과대학에 진학하였고, 의사 면허를 딴 후 간호사였던 아내와 함께 아프리카 밀림지대로 선교를 떠났다. 지금의 가봉공화국 랑바레네 지역이었다.
그는 원주민들과 동고동락하면서 생명에 대한 깊은 깨달음을 얻었다. 그의 생명외경(die Ehrfurcht vor dem Leben) 사상에서 나는 21세기 인류 문명이 나아갈 길을 찾아보고자 한다.[A. Schweitzer, Out of My Life and Thought(New York: Holt, 1990)]
슈바이처는 현대 사회의 위기를 생명경시 풍조에서 찾았다. 그리고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가던 길을 멈추어야 하며, 현대의 기술과학 문명에 대한 비판적 성찰이 필요하고, 선악을 가르는 도덕적 판단 기준을 재정립해야 한다고 보았다.
전 지구적 차원의 재앙으로 확산된 금번 코로나 사태는 지금까지 당연시 여겨온 현대 자본주의 문명에 대하여 근원적인 회의를 불러일으켰다. 인간 중심주의에서 생명 중심주의로, 이성 중심에서 영성 중심으로, 효율 중심에서 공생 중심으로, 개인의 이익 중심에서 사회적 공공성에 기반을 둔 복리 중심으로, 모두가 살기 위해서는 이와 같이 가치의 축(軸)을 옮겨야 하는 개벽의 시점에 인류는 서 있다. 인류 문명의 패러다임 교체가 요구되는 일대 전환기를 맞이한 이 시점에서 슈바이처의 생명외경(生命畏敬) 사상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슈바이처는 역사적 예수를 탐구하면서, 예수의 말씀복음 큐(Q)가 전하는 이웃사랑 계명과 황금률을 생명외경 사상의 근간으로 삼았다. 그는 생명의 속성을 자기 본성[神性] 실현과 자기 창조 과정에서 찾았는데, 그는 이것을 모든 생명의 내재적 가치인 하나님의 계획으로 읽었다. 모든 생명은 하나님의 자기 표현 방식이기 때문에 신성하며, 그 자체만으로 존재 이유가 있다고 보았던 것이다.
살아 있는 모든 생명체는 신성한 존재라는 것, 개체 생명의 가치에는 차등이 있을 수 없다는 것, 그러하기에 모든 생명을 두려움과 공경의 마음으로 대해야 한다는 것, 생명을 기르는 것은 선이고 파괴하는 것은 악이라는 것, 모든 생명은 서로 연관되어 있기에 다른 생명을 소중히 여긴다는 것은 곧 자신을 소중히 여기는 것과 같으며, 불가피하게 다른 생명을 훼손하게 될 경우에 희생된 생명에 대해서는 도덕적 책임의식을 가져야 한다는 것, 모든 생명을 이롭게 하기 위해 개체 생명 사이의 연대와 협동이 필요하다는 것, 인간은 모든 생명에 대해 무한책임을 지고 있음을 각성해야 한다는 것, 이러한 슈바이처의 생명외경 사상은 20세기 지구촌을 지배해온 현대 자본주의의 생명경시 풍조나, 개인의 자유라는 가치를 내세워 약육강식과 불평등한 사회제도를 당연시해온 신자유주의적 시장경제 시스템에 대해 일종의 경종을 울려주고 있다.

2
얼마 전 텔레비전 채널을 돌리다 우연히 영화 한 편을 보게 되었다. 제목은 <컨테이젼>(contagion, 2011), 전염병이라는 뜻이다. 전쟁이나 천재지변이 아니라 조류 바이러스 전염에 의해 인류가 종말을 맞게 된다는 줄거리였다. 꽤 오래전에 만들어진 영화가 최근 지구촌을 강타한 코로나 재앙을 상당 부분 예견하고 있어 충격적이었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이 특히 인상적이었다. 인간의 무분별한 삼림벌목, 지구온난화, 대기온도 상승 등 인간이 자연에 가한 폭력으로 인해 지금까지 자기 세계에 머물러 있던 미생물들이 외부로 활동 영역을 넓히게 되었다. 원래 인적이 드문 숲속 동굴에서 서식하고 있던 박쥐들이 둥지를 잃게 되자 인근 마을로 내려와 돼지 사육장에 살게 되었고, 그 배설물을 먹은 돼지들이 도살되어 시장에 판매된다. 애초 박쥐를 숙주(宿主)로 삼아 번식하던 바이러스들은 돼지와 인간으로 숙주를 계속 옮겨가면서 무한 증식해간다. 이 영화는 바이러스의 확장으로 닥쳐오는 인류 문명의 종말을 실감 있게 그려내었다.
인간의 무한한 욕망을 무한히 긍정하고 이를 부추기는 문명은 내가 알기로는 인류 역사에서 단 한 번도 없었다. 대량생산과 대량소비를 미덕으로 삼고 있는 현대 자본주의 물질문명이 유일하다. 먹을거리를 돈벌이 수단으로 삼아 산업화한 데서 촉발된 전 지구적 차원의 전염병 재앙, 한미FTA로 대표되는 세계화와 에너지 위기, 빈부양극화 현상, 인간을 소외시키고 자연을 약탈하는 신자유주의와 성장 근본주의의 결과가 오늘의 생태적 재앙을 불러왔다.
신자유주의적 시장자본주의 체제는 구조적으로 사회의 양극화와 생태계의 파괴를 가져올 수밖에 없다. 지구는 열린 체계(open system)가 아니라 닫힌 체계(closed system)이다. 자원은 한정되어 있다. 한정된 지구의 자원을 고르게 나누어야 모두가 살길이 열리고, 평화가 온다.
포스트코로나 시대에 접어들면서, 현대 자본주의 문명이 안고 있는 모순과 부정적인 결과들에 대한 근원적인 반성과 성찰이 요청되고 있다. 나는 평생 자전거를 탔다. 2018년 가을에는 서울역에서 동경역까지 약 2,300km를 자전거로 달렸다. 한 달 정도 걸렸다. 동경역까지 70km를 앞둔 하꼬네 언덕의 내리막길에서 나는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근처에 있는 일본 시립병원에서 한 달 동안 입원 치료를 받은 후에야 귀국할 수 있었다.
자전거는 페달을 밟아 두 바퀴를 끊임없이 굴려야 앞으로 나아간다. 그렇지 않으면 쓰러지고 만다. 나는 현대 자본주의 생리도 이와 같다고 생각한다. 무한생산과 무한소비라는 두 바퀴를 끊임없이 굴려야 돌아가는 경제 시스템이다. 바퀴가 멈추면 어찌 되나? 붕괴하고 말 것
이다.
“Business as usual!” 종전의 일상생활로 돌아가자는 구호이다. 과연 예전의 경제생활로 돌아가는 일이 가능할까? 종전의 대량생산과 대량소비의 생활 패턴으로 회귀하는 것은 모두가 죽는 길. 이제 인류는 자명하다고 여겨온 것들에 대해 문제를 던져야 한다. 가던 길을 일단 멈추어야 한다. 그동안 당연시한 습성에 대해 가치판단을 멈추고(epoche), 과연 모두에게 유익한 길이었는가를 성찰해보아야 한다. 이제 인류는 지금까지 한 번도 디뎌보지 못한 새로운 길을 찾아나서야 한다.
적자생존과 강자존(强者存)을 이데올로기로 삼고 있는 현대 자본주의 문명은 더 이상 대안이 될 수 없다. 생태학적 재앙을 불러들인 산업자본주의 논리와 성장 주도의 경제정책에 대해서 근본적인 문제제기를 해야 한다. 코로나 재앙 앞에서 당장의 기술적인 해법을 찾고자 급급할 것이 아니라, 보다 근본적인 해결책을 모색해야 한다. 생태계의 훼손을 막고, 대기오염을 줄여가야 한다. 수질을 개선해야 하고, 건강한 먹을거리를 생산하기 위해 생명유기농법을 실시해야 한다. 무엇보다도 단순하고 소박한 삶의 패턴을 생활화해야 한다.
기업의 이윤이 갖는 가치보다 생명이 갖고 있는 가치를 우선시하며, 성장보다는 돌봄을 우선시하는 경제정책이 수립되어야 한다. 모두가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사회적 공공성(公共性)에 기초한 ‘살림 경제’ 시스템을 구축하는 방향으로 인류 문명은 전환해야 한다.
자본주의냐, 아니면 지구 ‘온생명’이냐? 인류는 선택의 기로에 서 있다. 인간의 이성을 도구화하여 자연을 이윤 극대화의 도구로 삼아 달려온 현대 자본주의에서 인간과 자연의 소외는 필연이었다. 이제 현대 자본주의를 넘어 인간과 인간, 인간과 사회, 인간과 자연 생태계가 화해하고 공존할 수 있는 모델을 창안할 시대가 되었다. 이를 위해서는 제도혁명과 의식혁명, 그리고 가치혁명과 생활혁명이 동시에 추진되어야 할 것이다. 인간의 무한한 욕망에 뿌리를 둔 과소비 생활 패턴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제기와 회향(回向) 없이 새로운 미래는 올 수 없다.

3
세례자 요한이 유다 광야에 등장하여 메타노이아 운동을 펼쳤다. 당시 갈릴리 분봉왕 헤롯 안티파스는 이에 위협을 느낀 나머지 그를 민중 선동죄로 몰아 체포한다. 그리고 현재 요르단에 위치한 마케루스 성채(城砦)의 지하 감옥에 감금시켰다. 이 소식을 들은 예수는 갈릴리에 등장하여 본격적인 메타노이아 운동을 펼친다.
요한과 예수가 공생애(public life)를 시작하면서 이구동성으로 외친 첫 설교 말씀이 무엇인가? ‘회개’로 번역된 ‘메타노이아’이다.(마 3:2, 4:17) 이 개념은 예수의 복음 전체를 이해하는 키워드이다.
카를 마르크스는 로마제국을 ‘고대 노예제 사회’로 규정하였다. 로마는 강력한 군대를 동원하여 끊임없이 주변국들을 침략하였고, 전쟁 노예들은 거대한 제국을 지탱하는 터전이었다. 큰 도시마다 노예시장이 개설되었다. 복음서에서 자주 등장하는 주인과 종들의 이야기에서 우리는 예수 시대 노예제 사회의 단면을 엿볼 수 있다.
또한 유대 사회는 율법을 중시하는 유대교와 랍비에 의해서 주도되었다. 그들은 율법 생활화운동을 펼쳤다. 안식일법이나 정결법 등 율법을 지키지 않는 사람들은 죄인 취급을 당했고, 공동체로부터 소외되었다. 율법에 대해 무지(無知)한 암-하아레츠(am-haaretz)가 대표적이었다.
유다는 기원전 63년 로마의 속국이 되었다. 유다 사회의 기층 민중은 로마와 헤롯 왕조하에서 이중으로 수탈당했다. 그들은 양극화된 사회구조와 일상화된 가난과 질병 속에서 고통을 당해야 했다. 이러한 시대에 예수께서 등장하여, “때가 찼고, 하나님나라가 닥쳐왔다. 회개하라.”라고 외쳤다.(막 1:15, 사역) 사탄이 지배하는 ‘옛 에온’은 지나갔고, 하늘 아버지가 통치하는 ‘새 에온’이 동터오고 있음을 선언했다. 예수는 개벽의 새 시대를 맞이하여 사람들이 취해야 할 태도를 촉구한 것이다.
“메타노에이테!(metanoeite) 엥기켄 헤 바실레이아(basileia) 톤 우라논.”(회개하여라. 하늘나라가 닥쳐왔다.) 바실레이아는 하나님이 현존(現存)하시는 장소이다. 그분의 로고스가 구현된 곳이다. 우리는 하나님을 알 수 없다. 영이시기 때문이다.(요 4:24) 알 수 없는 하나님을 어떻게 알 수 있나? 그가 지으신 피조물을 통해서다. 모든 작품에는 작가의 뜻이 담겨 있듯이, 우주에는 로고스 곧 창조주 하나님의 뜻이 프로그램화되어 있다. 따라서 우주 만물이 생성하고 소멸하는 이치를 깨치면, 하나님의 뜻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로고스는 우주를 어떻게 운행하는가? 하늘은 음양과 춘하추동의 공식(公式)으로 운행되고, 땅은 지수화풍의 상생상극 원리로 운행되고 있다. 인간세(人間世)는 황금률인 양심의 법도에 따라 운행되고 있다. 칸트가 말했듯이, 별이 반짝이는 하늘과 인간의 마음속에 있는 양심을 통해서 하나님은 우주를 경영하신다.
예수가 꿈꾼 바실레이아는 다른 게 아니다. 하늘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 위에서 실현된 세상이다.(마 6:10Q) 그것은 가난하고 배고프고 슬퍼하는 기층민중도 인간의 존엄성을 인정받고 모두가 사람답게 사는 평등 세상에서 멀지 않다.(마 5:3-4Q)
바실레이아를 맞이하려면 무엇을 해야 하나? 메타노에이테!(meta-noeite) ‘회개하라’로 번역되어 있다. 이 개념은 지은 죄를 뉘우친다는 의미를 넘어선다. 그리스어 메타노이아(metanoia)의 주요 어근은 누스(nous)이다. 인간의 정신활동을 나타내는 포괄적인 개념이다. 메타노이아의 전형으로는 ‘돌이킨 탕자’의 비유를 들 수 있다.(눅 15:17-20) 아버지의 유산을 타국에서 탕진하고 거지처럼 살던 둘째 아들이 생각을 바꾸어,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간다.(눅 15:17-20)
메타노이아는 지금까지 당연시해오던 생각을 멈추는 것이다. 밖에서 안으로 생각의 방향을 돌리는 것이다. 생각과 삶의 방향 바꿈이요, 의식개혁 또는 사회개혁을 뜻한다. 자기 중심적인 가치관과 세계관에 대한 근본적인 성찰 없이는 새 세상을 맞이할 수 없다. 기존의 것을 내려놓고 버려야 새 길이 보이고 새 세상이 열린다. 메타노이아가 바실레이아의 전제조건이다.

4
고려시대 백운선사는 “대의대오(大疑大悟) 소의소오(小疑小悟) 불의불오(不疑不悟)”를 말했다. 크게 의심하면 큰 깨달음에 이르게 되고, 작게 의심하면 작은 깨달음에 이르게 되며, 의심하지 않으면 아예 깨닫지 못한다는 것이다. 큰 물음을 던져야, 진정한 해답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大疑之下 必有大悟) 큰 물음(大疑)이 바로 예수가 말한 메타노이아이다.
가장 초기의 예수말씀공동체에 속하는 큐(Q)는 200편에 달하는 주옥같은 예수말씀들을 마태와 누가 복음을 통해 우리에게 전해주고 있다. 모두가 메타노이아를 촉구하고 있다. “나에게 ‘주여, 주여!’ 부르짖는다고 해서 모두 바실레이아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라야 들어간다.”(마 7:21Q)
기독교인이라면 누구나 평생 가슴에 품고 살아야 할 화두(話頭)가 있다. 과연 예수가 무슨 일을 했고, 무슨 말을 했으며, 그가 이루려고 했던 하늘 아버지의 뜻은 무엇인가? 이 세 가지 화두를 신앙생활의 교사로 삼고, 늘 자기를 비추어보는 거울로 삼아야 할 것이다.
하늘 아버지의 뜻은 무엇인가? 생명 살림이다. 홍익인간, 이화세계(理化世界)이다. 하늘의 이치에 순응하여 뭇 생명을 살리는 일이다. 『천부경』에서는 ‘인중천지일’(人中天地一)을 말한다. 천지 만물과 사람이 둘이 아니라 ‘한 생명’이라는 사상이다. 한 생명을 살리는 것이 하늘 아버지의 뜻이다.
하늘 아버지의 뜻을 지상에서 가장 온전하게 실행한 분이 누구인가? 예수이다. 예수말씀들 가운데 하늘 아버지의 뜻이 가장 온전하게 드러난 말씀 중 하나가 황금률이다. “남이 너희에게 해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주어라. 이것이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다.”(Do to others whatever you would have them do to you. This is the law and the prophets.)(마 7:12Q)
예수와 거의 동시대인으로 예루살렘에 살았던 랍비 힐렐이 있다. 하루는 헬라인 무역상이 그의 명성을 듣고 찾아갔다. “당신이 예루살렘에서 최고 가는 율법학자라는 소문을 들었습니다. 내가 이렇게 한 발로 서 있는 동안, 율법의 전체 내용을 내게 가르쳐보시지요. 그러면 개종하겠습니다.” 그러자 힐렐이 입을 뗐다. “당신이 당해서 싫은 일을 남에게 시키지 마십시오.”
내가 원하는 것을 남에게 해주고, 내가 당해서 싫은 것을 남에게 시키지 말라는 황금률이야말로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만고불변의 진리이고, 인류의 보편적 가치를 담은 지혜의 말씀이다. 이는 사람이 사는 세상을 펼치기 위해서 없어서는 안 될 윤리 대헌장이기도 하다.
지금 인류는 생명 훼손이 일상화된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나는 종교인의 한 사람으로서, 현대 자본주의 문명의 근본적 문제를 황금률의 부재(不在)에서 찾는다. 앞으로 인류가 살길은 어디에서 찾아야 하는가? 황금률의 생활화, 사회화, 지구화를 통해서다. 황금률 문명으로 패러다임을 전환하지 않고서는 인류의 미래에 희망은 없다. 모든 생명이 존엄성을 인정받고 평화롭게 공존하기 위한 황금률 문명의 건설이 포스트코로나 시대에 우리 모두에게 주어진 지상과제일 것이다.


김명수 | 성균관대학교와 한국신학대학을 졸업하였으며, 독일 함부르크대학에서 예수말씀복음 큐(Q)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Dr. theol.) 지은 책으로는 『큐복음서의 민중신학』, 『역사적 예수의 생애』 등이 있다. 경성대학교 명예교수이며, 충주에 있는 노인요양시설 ‘예함의집’에서 치매 어르신들을 돌보는 일을 하고 있다.

 
 
 

2020년 8월호(통권 740호)

이번호 목차 / 지난호 보기

기독교서회
기독교서회
기독교서회
기독교서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