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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me > 기독교사상 > 성서와설교 > [조선과 대한민국 사이에 낀 성서 단어 06]
성서와설교 (2020년 8월호)

 

  ‘거’(居)와 ‘류’(留)의 차이
  

본문

 

세상을 사는 동안 우리는 어느 곳은 지나쳐 가고, 어떤 곳에는 들러 머물며, 또 어느 곳에서는 정착하여 산다. 한국어를 모국어로 하는 사람이라면 ‘지나다’, ‘들르다’, ‘살다’라는 각 단어의 뜻이 어떻게 다른지 별다른 설명 없이도 잘 알고 있다. 한자에서도 이러한 의미 차이를 구별하여 사용했다. ‘류’(留)와 ‘거’(居)가 바로 그것이다. ‘들러 머무는’ 곳과 ‘사는’ 곳은 선택 기준도 다르고, 그곳에 있는 동안 갖추는 마음가짐도 다르다.
편안한 마음으로 텔레비전 사극의 한 장면을 떠올려보자. 한 나그네가 먼 길을 가고 있다. 날은 저무는데 주막을 찾지 못하자 그 마을에서 살림살이가 좋을 것처럼 보이는 집의 대문을 두드린다.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라는 하인의 물음에 “지나는 객이온데, 하룻밤 거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답했다고 치자. 실제로 이렇게 말하는 사람은 없었겠지만, 있다면 딱 잘라 내쫓아야 한다. 거할 수 있느냐고 물었기 때문이다. ‘거’라는 말은 그 집에 계속 살겠다는 뜻이다. 길을 가던 나그네는 피치 못할 사정으로 하룻밤쯤 유할 수 있느냐고, 유숙(留宿)할 수 있느냐고 물을지언정 거할 수 있겠느냐고 하지 않는다. 그건 불한당이 하는 짓이다. 내가 살 테니, 니들은 나가라는 말이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성서의 구절을 살펴보자. 사도행전 16장 12절에 “거기서 빌립보에 이르니 이는 마게도냐 지방의 첫 성이요 또 로마의 식민지라 이 성에서 수일을 유하다가”라는 대목이 나온다. 여기에서 ‘수일을 유하다가’를 ‘수일을 거하다가’로 바꾸면 어색한 표현이 된다. ‘며칠’을 뜻하는 ‘수일’이라는 단어를 빼든지, ‘거하다’라는 동사를 다른 단어로 바꾸든지 해야 한다. ‘거’나 ‘유’는 ‘한 장소에 있다’라는 공통적인 의미가 있지만, 잠시 거치는 곳인지, 머물러 살 곳인지에 따라 구별하여 쓰는 단어이기 때문이다. 이것을 잘못 사용하면 아주 어색하거나 우스운 말이 될 뿐 아니라, 나아가 성서의 핵심 의미를 놓치게 될 수도 있다.
항상 있는 것 vs. 잠깐 있는 것
‘거’(居)는 본래 사람이 의자에 앉아 있는 모습을 형상화한 글자이다. 『설문해자주』에는 걸터앉을 수 있는 의자의 모양을 본뜬 상형문자 ‘궤’(几)에 다음과 같은 설명을 붙였다. “거궤(凥几)는 사람이 엉덩이를 걸치고 앉는 의자라는 말인데, 이때 ‘거’(凥)란 ‘멈추어 쉰다’[処]는 뜻이고, ‘처’(処)는 멈춘다[지(止)]는 뜻이다. 옛날 ‘거’(凥) 자를 지금은 모두 ‘거’(居)로 바꾸어 쓰고 있다. 그래서 거궤라고 하게 되었다.” 이 설명대로 ‘거’는 사람이 의자에 앉아 있는 모습을 형상화한 것으로, ‘앉다’ 혹은 ‘자리를 잡다’를 뜻하는 글자이다.
‘거’는 살다, 자리 잡다, 처지에 놓이다 등의 의미로 사용된다. 가장 일반적으로는 정해진 그 장소에 사는 것을 말할 때 쓴다. 하지만 잠시 머무는 곳이나 잠깐 지나가는 곳에는 ‘거’를 사용하지 않는다.
『설문해자주』의 설명에 의하면, ‘류’(留)는 원래 ‘류’(畱)라고 쓰던 것을 나중에 ‘류’(留)로 쓰게 된 것으로, ‘멈추다’[止]라는 의미의 단어이다. 이와 관련하여 머무르다, 정지하다, 지체하다, 붙잡다, 억류하다 등의 의미로 사용된다. 길을 가다가 혹은 일을 진행해가다가 잠깐 멈춘 상태일 때 ‘유’라고 표현한다. 멈추는 것이나, 지체하는 것이나, 억류하는 것이나 모두 어떤 일을 하는 중에 ‘잠시’라는 의미라는 점에서 공통된다. 잠시 머물고 있을 때에만 ‘유하다’라고 쓰는 것이다. 우리말 ‘들르다’의 의미와 비슷하다.
예를 들어 조선 선비들이면 다 읽었고 오늘날에도 한문을 공부하는 사람이면 다 읽어보았을 『고문진보』(古文眞寶)만 보더라도 이러한 용례가 여러 곳에서 나온다. 이 책 3권에 실린 두보의 시 <여름날에 이공을 만나보다>(夏日李公見訪)의 끝부분에 아래와 같은 구절이 있다.

水花晩色靜 수련이 저녁빛에 고요하니
庶足充淹留 손님을 만류하여 머물게 할 만하네


여기에서 나오는 ‘엄류’(淹留)는 ‘객을 말려 더 머물게 한다’는 뜻이다. ‘객’(客)이라는 단어를 따로 쓰지 않았어도 ‘류’ 자로 표현된다. ‘류’는 거주민이 아니라 손님으로 잠깐 머물 때에 사용하기 때문이다.

‘거’(居)의 의미 확장–중심, 기준점
‘사는 곳’을 유교철학적인 의미로 확장하면 ‘늘 서 있는 자리’ 혹은 ‘늘 지키는 기준’이라는 의미이다. 다시 말해 ‘거’는 사는 집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모름지기 있어야 하는 자리에 굳게 서 있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모든 사람이 모름지기 지켜야 할 자리를 지키고 있을 때 세상이 가장 안정적으로 움직인다. 대표적인 용례가 『논어』의 「위정」 편에 나온다. 정치의 핵심을 설명하면서 가장 앞 대목에 이렇게 적었다.

爲政以德, 譬如北辰, 居其所而衆星共之.
덕으로 정치를 한다는 것은 비유하자면 북극성이 그곳에 거하고 뭇 별들이 그를 떠받드는 것과 같다.


북극성은 한자리에 굳게 자리 잡은 채 움직이지 않으며, 다른 별들은 북극성을 기준으로 회전하며 운행한다. 그 별들은 아무렇게나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북극성을 기준으로 정해진 궤도대로 움직인다. 별들의 움직임을 말할 때 보통 ‘운행한다’는 표현을 사용한다. 별들은 각자의 궤도대로 몇만 년 동안 쉴 새 없이 운행을 계속한다. 이렇듯 운행이란 ‘정해진 길대로’ 움직인다는 의미이다. 별은 항상 움직이고 있으니 한곳에 정착한다는 의미의 ‘거’라는 표현이 어울리지 않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북극성의 영향권 안에서 북극성과의 거리를 일정하게 유지하며 정해진 궤도에만 머무르고 있으니, 이런 면에서는 별도 ‘거’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위에서 인용한 대목은 북극성이 중심이 되어 뭇 별들을 인도하듯, 군주가 자기 위치를 지켜 백성을 인도하면 백성들이 그 기준에 따라 마땅히 가야 할 길을 함께 움직이는 것을 비유한 것이다. 그렇게 하여 별들이 서로 충돌하지 않고 우주의 평화가 유지된다. 이는 유교가 말하는 덕치주의 원리를 여실히 보여준다. 한곳에 사는 것처럼 정해진 장소나 기준 가운데 늘 있음을 표현하는 단어가 ‘거’이다.

‘거’(居)와 ‘류’(留), 두 글자의 구별로 보는 성서
성서가 처음 한글로 번역될 당시에도 사람들은 이 두 단어를 구별해서 사용했고, 번역자들은 이를 반영하여 ‘거’를 사용할 곳과 ‘류’를 사용할 곳을 구별해서 표현했다. 개역개정을 기준으로 볼 때 ‘유하다’라는 표현을 사용한 몇 대목을 인용해보면 다음과 같다.

출 12:20 너희는 아무 유교물이든지 먹지 말고 너희 모든 유하는 곳에서 무교병을 먹을지니라
신 5:14 일곱째 날은 네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인즉 너나 네 아들이나 네 딸이나… 네 문 안에 유하는 객이라도 아무 일도 하지 못하게 하고…
막 6:10 또 이르시되 어디서든지 누구의 집에 들어가거든 그 곳을 떠나기까지 거기 유하라
요 11:6 나사로가 병들었다 함을 들으시고 그 계시던 곳에 이틀을 더 유하시고


일일이 다 설명하지 않아도 알 수 있듯, 최종 목적지가 아닌 임시로 머무는 곳, 잠깐 지나가다 들른 곳은 모두 ‘유하다’라는 동사로 표현했다. 이집트에서 나와 가나안으로 ‘가는’ 동안 ‘유하는’ 곳에서 할 일을 설명했고, 전도 ‘여행’을 하며 움직이는 동안 누구의 집에서 며칠 ‘유하라’ 하는 등 잠시 지나는 곳을 말할 때 ‘유하다’를 쓰는 용례가 명확히 드러난다. 반면 아래에서 보듯 ‘거하다’는 ‘유하다’와는 다른 용법으로 사용되었다.

창 9:27 하나님이 야벳을 창대하게 하사 셈의 장막에 거하게 하시고 가나안은 그의 종이 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하였더라
왕하 13:5 여호와께서 이에 구원자를 이스라엘에게 주시매 이스라엘 자손이 아람 사람의 손에서 벗어나 전과 같이 자기 장막에 거하였으나
마 12:45 이에 가서 저보다 더 악한 귀신 일곱을 데리고 들어가서 거하니 그 사람의 나중 형편이 전보다 더욱 심하게 되느니라 이 악한 세대가 또한 이렇게 되리라


위의 예에서 명확히 보이듯, 한곳에 정착해서 살 때 ‘거하다’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이동하는 도중 잠깐 들른 것이 아니라 완전한 삶의 터전으로 자리잡을 때에 사용한다는 뜻이다. 야벳이 ‘영원히’ 셈의 장막에 함께 산다는 것이고, 이스라엘 자손이 본래 살던 곳에 ‘살게’ 될 것이라는 말씀이며, 귀신이 그 사람 몸에 ‘계속’ 사는 것이다. 이처럼 성서 모든 곳에서는 ‘유하다’를 사용해야 할 곳과 ‘거하다’를 사용해야 할 곳을 구별하여 내용을 전달했다.

‘거하다’에 담긴 주의 사랑과 확고한 약속
특히 이 두 단어의 의미 차이를 인식하며 성서를 읽어보면 주님의 ‘영원한’ 약속에 새삼스레 감격하게 된다. ‘거’는 움직이지 않고 그곳에서 정착해서 살 때, 정해진 그 자리를 지키며 움직이지 않을 때 사용하는 단어임을 기억하며 아래 구절들을 읽어보자.

출 29:45 내가 이스라엘 자손 중에 거하여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니
왕상 6:13 내가 또한 이스라엘 자손 가운데에 거하며 내 백성 이스라엘을 버리지 아니하리라 하셨더라
요 1: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요일 4:15 누구든지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 시인하면 하나님이 그의 안에 거하시고 그도 하나님 안에 거하느니라


하나님께서는 잠시, 임시로, 며칠만 백성과 함께 있는 것이 아니다. 정착해서 영원히 사신다는 뜻이다. 예수께서도 성육신하여 우리와 함께 사셨다. 예수를 주님으로 시인하고 영접하면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는 이름을 주신다고 했는데, 그것은 다른 말로 ‘하나님이 주를 시인하는 사람 안에 거하고, 주를 시인하는 사람도 하나님 안에 거하는 것’이라고도 설명하였다. ‘거하다’는 움직이지 않고 정착해 사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주님을 시인하는 것은, 떠나가거나 지나가시지 않고 ‘정착해 함께 사시는’ 하나님과의 삶을 사는 것이다. 그래서 모든 것이 완전한 삶이다. 이렇듯 ‘거’의 의미에 유의하며 주님의 약속을 떠올리고, 우리에게 약속된 미래를 떠올리면 그 은혜가 더 절실하게 다가온다.

요 8:35 종은 영원히 집에 거하지 못하되 아들은 영원히 거하나니
요 14:2–3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주의 아들 된 우리들은 주님과 영원히 살게 된다. “거하나니”라는 표현에 그 의미와 그 약속이 담겨 있다. 공생애를 마칠 무렵 예수께서는 당신이 잠시 떠나가서 해야 할 일을 설명하시며 ‘거처’, 즉 거할 곳을 예비하러 간다고 하셨다. 그리하여 그분이 마련한 거처로 주의 제자들을 맞아들여 함께 있게 할 것이라 말씀하셨다. ‘거할 곳’에서 함께 ‘거하는’ 것이다. 잠깐 있는 것, 즉 ‘유하는’ 것이 아니다. 완전히, 영원히 함께 있는 것이다. 그것이 주께서 끊임없이 우리에게 주신 약속, 견고하고 지속적인 약속이다.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이 힘든 세상은 잠깐 있는 객지(客地)이고, 주님 옆이 우리가 영원히 살 거처(居處)이다.
눈여겨볼 것은 ‘유하다’에 비해 ‘거하다’의 사용 비중이 높다는 점, 구약보다는 신약에 자주 사용되었다는 점이다. 개역개정 성서를 기준으로 ‘유하다’라는 표현은 20여 회 사용되었다. 반면 ‘거하다’는 100여 회 사용되었으며, 그중 3분의 2는 신약성서에 등장한다. 이러한 현상을 관찰하면서 필자는 한편으로 놀랍고 한편으로 감사했다. 신약에 그 용례가 많은 것은 드디어 오신 메시아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과 믿음의 자녀에게 주어진 영원한 약속에 대한 언급이 많은 덕분이다. 주님을 고백하는 즉시 주께서 그 안에 거하신다는 것, 앞으로도 영원히 주님과 거하게 된다는 약속 등을 예수께서 자주 언급하신 탓에 ‘거하다’가 신약에 많이 등장하는 것이니, 이 단어가 등장하는 횟수만으로도 감사하는 마음이 들었다. 성육신하신 예수께서 무리들과 함께 지내시면서 신약, 즉 새 약속이 현실화되었고 확증되었다. 그리고 사도들도 그 언급을 반복하여 말하면서 현실에서 힘든 삶을 살아가는 믿는 자들을 격려하였다. 그것이 고스란히 ‘거하다’의 용례에 담겼다. ‘거하다’에만 집중해서 읽더라도 성서는 은혜 중에 은혜로다!

북극성을 따라 뭇 별이 돌 듯, 주님 거하신 자리를 따라 사는 삶
‘거’의 의미에 유의해서, 주님이 우리와 함께 ‘거하신다’는 약속, ‘거처’를 마련하신다는 약속이 얼마나 완전하고 평안한 약속인 줄 알게 된 우리 기독교인들은 이제 ‘거’에 담긴 의미에 주의하며 지금의 삶을 어떻게 살 것인지를 생각하기 바란다.
앞서 설명한 내용을 다시 떠올려보자. 북극성이 정해진 자리에 거하면, 뭇 별들은 북극성을 중심으로 돈다. 별들은 한자리에 고정된 것이 아니라 움직이기 때문에 ‘거’가 아닌 것 같지만, 북극성의 영향권 내에서 북극성과의 거리를 일정하게 유지하며 정해진 궤도 위에만 있기 때문에 그런 면에서 뭇 별들도 ‘거’하고 있는 것이라 했다.
성서에서 믿는 이들의 삶을 이야기할 때도 이러한 의미로 ‘거’를 사용하고 있다. 우리는 주님과 함께 주의 나라에서 영원히 함께 살 사람들이다. 그런 면에서 우리는 이 땅에 잠시 유하는 나그네이다. 하지만 이 땅에 유하는 동안에도 주님 안에 ‘거하며’ 주님이 인도하신 길로만 가는 사람들이다. 주께서 삶의 중심이 되시어 우리에게 그의 모습을 보여주신다. 그러면 주의 백성은 주가 서 계신 자리, 그가 세우신 원칙을 중심으로 그가 안내하신 길로 가는 것이다. 이것이 주의 백성이 ‘운행’할 길이요, ‘거할’ 곳이다. 이 점을 생각하며 성서를 읽어보면 다음과 같은 구절들의 의미가 더 선명해질 것이다.

요 8:31 그러므로 예수께서 자기를 믿은 유대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으로 내 제자가 되고
요 15:4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요 15:10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 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


주의 백성이 기준으로 삼을 대상, 떠나지 않고 서 있을 곳은 주님, 주의 말씀, 주의 계명이다. 주님 옆에 잠시 스치듯 지나가는 것이 아니라, 거기에 뿌리를 박고 ‘거하는’ 것이 믿는 이들이 취해야 할 삶의 방식이다. 별들이 정해진 궤도로 운행하듯, 우리도 주를 기준으로 정해진 궤도로 움직이며 사는 것이다. 그러다가 주님 나라에 가서 영원히 주님과 함께 거할 것이다.


서신혜 | 고전문학을 전공하여 박사학위를 받은 후 신학(M.Div.)을 공부하였다. 저서로 『한국 전통의 돈의 문학사, 나눔의 문화사』 등이 있다. 한양대학교 인문대학 부교수이다.

 
 
 

2020년 8월호(통권 74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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