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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me > 기독교사상 > 성서와설교 > [바울 구원론의 탐구 07]
성서와설교 (2020년 8월호)

 

  하나님의 영광의 희망: 로마서 5장 1–2절
  

본문

 

그러므로(‘운’) 우리가 믿음으로부터 나서(‘에크’) 의로워졌은즉(‘디카이오오’의 분사 과거 수동태), 우리는 우리의 주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디아’) 하나님을 향하여(‘프로스’) 평화(‘에이레네’; 화평)를 가지고 있습니다./그를 통하여(‘디아’) 우리는, 믿음으로(여격) 우리가 (지금까지) 그 안에(‘엔’) 서온(‘히스테미’의 현재완료) 이 은혜 속으로의(‘에이스’) 진입(‘프로사고게’; 가까이 감, 접근)을 가져왔던(‘에코’의 현재완료; 가지다)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영광의 희망을 근거로(‘에피’) 우리는 기뻐하고 있는(‘카우카오마이’의 현재) 것입니다.(롬 5:1-2, 필자 사역)

여기 로마서 5장 전반부의 논리 구조는, 우리가 이해하기 힘들 정도로 복잡해 보인다. 눈에 뜨이는 주제어들을 이해하는 일은 물론, 그 주제어들 사이의 의미 연관성은 갈피를 잡기 힘들 정도로 오리무중이다. 느닷없이 우리가 ‘의로워졌다’는 것을 전제로 ‘하나님과의 화해’를 말하고, 그것을 ‘하나님의 영광의 희망’과 연관 지으면서, 우리 마음속에 부어진 ‘하나님의 사랑’을 환기시키기도 한다. 이뿐만이 아니다. 우리의 연약함을 전제하면서도, “그의 피 안에서 더더욱 의로워졌다.”(9절)라고 말하는 대목은 그냥 지나치기 힘들 정도로 눈길을 끈다. 이 모두가 하나님과의 화해를 전제해야만 말할 수 있다. 아무리 힘들어도 필자에게 주어진 소임이니 어쩌겠는가. 차근차근 바울의 논리를 따라가면서, 한 구절 한 구절 매듭 풀듯이 풀어보기로 하자.

우리가 의로워졌으니
첫마디부터가 만만치 않다. “그러므로(‘운’) 우리가 믿음으로부터 나서(‘에크’) 의로워졌은즉(‘디카이오오’의 분사 과거 수동태)”(롬 5:1) 하며, 말머리를 연다. ‘우리가 의로워졌다’고 <과거>로 말할 수 있는 근거가 쉬 찾아지지 않는다. ‘그러므로’라는 접속사가 쓰인 것으로 보면, 4장과의 연속성을 전제로 하는 말 같은데, 무슨 근거로 “그러므로/우리가 의로워졌다”고 말하는 것일까? 아마도 4장 25절에서 말한 “우리의 의화(‘디카이오시스’)”를, 이 ‘그러므로’가 이어받는 것 같다. “그는, 우리의 의화(義化) 때문에 일으켜지셨다(‘에게이로’의 과거 수동태).”(롬 4:25)라고 말한 것으로 보면, 그 ‘우리의 의화(의로워짐)’ 속에 ‘우리가 의로워졌다(과거 수동태)’는 뜻도 내포될 수 있다고 바울은 생각한 것 같다.
더욱이 “우리가 믿음으로부터 나서(‘에크’)” 의로워졌다고 말하고 있으니, 아마도 이 말은 로마서 1장 17절까지 염두에 두고 있는 듯하다. “믿음으로부터 나서(‘에크’) 믿음에 이르는(‘에이스’)”(롬 1:17) 구원의 전 과정을 바울은, “믿음을 통해서(‘디아’)” 사람이 의로워지는 것으로 가르치고 있다. 그렇다면 믿음으로 <사람이> 의로워지는 “우리의 의화(‘디카이오시스’)”(롬 4:25)를 말할 수도 있고, “우리가 믿음으로부터 나서(‘에크’) 의로워졌다.”(롬 5:1)라고 말할 수도 있지 않겠는가. 그렇게 의로워진(과거) 사람이 갖게 된 하나님과의 “평화”(‘에이레네’), 바울이 말하는 ‘화해론’의 골자가 바로 이것이다. “그를 통하여 지금 우리는 화목(‘카탈라게’; 화해)을 갖게 되었다.”(롬 5:11)라고 말하는 것이 그 뜻이다. ‘의로워진 사람’만이 ‘의로우신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부자 관계)를 가질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인 이 “화목”(‘카탈라게’)을 근거로 바울은, 지금까지와는 차원이 다른 ‘새로운 장(場)’을 준비하고 있다. “은혜 속으로의(‘에이스’) 진입”(2절)과 함께 “하나님의 영광의 희망”(2절)을 말하면서, 그 희망을 우리 마음속에 부어진 “하나님의 사랑”(5절)과 연결시키는 의도를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하나님의 영광의 희망
4장을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믿음’을 “의로움에 이르게 하는 믿음”(롬 4:3)으로 간주하신 의도를 이미 살핀 바 있다. 그를 ‘모든 믿는 자들의 조상’이 되게 함으로써, 그 모든 믿는 자들이 “의로움으로 간주되는 자들이 되게 하기 위함”(롬 4:11)이었다는 것이다. 최종적으로 심판하시는 하나님 앞에서 의로움으로 간주되는, 그 ‘사람됨의 의로움’이 구원의 궁극적 목표였던 셈이다. 그래서 그것을 갈라디아서는, “의로움의 희망”(갈 5:5)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그런 바울이 이 대목에서는 “하나님의 영광의 희망”(롬 5:2)을 말하고 있으니, 우리는 이 말을 과연 어찌 이해해야 한단 말인가.
흔하게 쓰이는 말일수록 오해되기 십상이다.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말 또한 그런 유에 속한다. 사람이 사는 목적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라고 가르치기도 하고, 걸핏하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라고 말하면서 자기가 하는 일을 합리화하기도 한다. ‘하나님의 영광’이 우리 믿는 자들의 ‘희망’이라는 것을 가르치는, 그런 설교는 접하기 힘들다. 사실 필자로서도, ‘하나님의 영광과 희망의 관계’가 선뜻 감이 잡히지 않는다. 먼저 떠오르는 구절은, “모두가 범죄했고(‘하말타노’의 과거), 그래서 하나님의 영광에 미치지 못하고 있다(‘휘스테레오’의 현재; 도달하지 못하다).”라고 말하는 3장 23절이다. 범죄 때문에 ‘미치지 못하고 있는’ 하나님의 영광이라면, 그 하나님의 영광은 ‘우리가 도달해야 마땅한’ 그 어떤 경지를 암시하는 말로 들린다. 그렇다면 도대체 ‘하나님의 영광’이라고 할 때, 그 ‘영광’은 무슨 뜻일까?
히브리서 1장 3절은 이렇게 말한다. “그는(그 아들은) 하나님의 영광(‘독사’)의 광채시요, 그의 본질(‘휘포스타시스’; 실체)의 외형이십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그의 본질’로 말한다는 점이 눈길을 끈다. 기독교사상사를 배우면서 들었던, 바로 그 ‘휘포스타시스’이다. 다시 찾아보니, 그것은 ‘본질, 토대, 기초’를 의미하는 말이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본질’을 ‘하나님의 영광’이라고 하는구나 싶었다. 더욱이 이 구절이 ‘하나님의 아들’에 대한 설명인즉, 스스로를 ‘하나님의 자녀들’이라고 믿는 우리로서는 그냥 들어 넘길 수 없는 말임에 틀림없다. 그러고 보면, 로마서 3장 23절에서 “하나님의 영광에 미치지 못하고 있다.”라는 그 말이 다른 느낌으로 다가온다. 진정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들’이라면, ‘그 아들처럼’ 우리도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러야 할 존재’가 아니겠는가. 아마도 ‘하나님의 영광’을 ‘희망’으로 말하는 까닭이 이것이지 싶다.
로마서 15장 7절을 보라. “그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도록(‘에이스 독산 투 데우’)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받아들이신 것과 같이, 여러분도 서로를 받아들이십시오.” 하고 권면한다. 이 구절과 함께, 고린도전서
10장 31절도 다시 찾아 비교해보라. “그러므로 여러분은 먹든지 마시든지, 무슨 일을 하든지, 모든 것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to the glory of God’) 하십시오.”(표준새번역) 사람이 사는 제 일 목적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라고 대답하도록, 세뇌한(?) 바로 그 구절이다. 어떻게 사는 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사는 것인지는 가르치지도 않고, 교회학교 때부터 따라 외우게 했으니, 기가 막힌 교육을 받고 자란 셈이다. 그리고 그렇게 ‘미국식 신학’에 오염된 그대로 백 년이 지났으니, ‘수입업자들’(?)의 죄가 실로 크다. 이 구절의 헬라어 원문은, “판타(‘파스’의 복수) 에이스 독산 데우 포이에이테(‘포이에오’의 명령법)”(πάντα εἰς δόξαν Θεοῦ ποιεῖτε)이다. “모든 것들을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도록 행하십시오.”라고 번역해야, ‘하나님의 영광’을 왜 우리 믿는 자들의 ‘희망’이라고 하는지 제대로 실감된다. 우리가 ‘이르러야 할 영광’이기 때문에, 그 영광을 ‘희망’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정도의 이해만으로는 부족하다.
“그의 영광의 풍성함(‘플루토스’; 부요함)”을 깨달아 아는 일이 더 중요하다. 로마서 9장 23절을 보면, “이것은, 영광에 이르도록(‘에이스 독산’) 예비하셨던 긍휼의 그릇들 위에 임할 그의 영광의 풍성함을 알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라고 말한다. 에베소서 1장 18절은, 이보다 훨씬 더 구체적이다. “그의 부르심의 소망(‘엘피스’; 희망)”을 말하면서, 그 ‘희망’(그의 영광의 희망)이 우리를 부르신 부르심의 내용임을 밝히고 있다. 이뿐만이 아니다. “그의 상속의 영광의 풍성함”을 말하면서, 그의 영광의 ‘풍성함’을 우리가 받을 ‘상속’과 연관시켜 말한다. 우리 믿는 자들을 ‘부름 받은 자들’이라고 하는 것이, 그냥 흘려들을 소리가 아님을 깨닫게 된다.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에게 아버지이신 하나님이 상속해주기로 약속하신 것이 ‘그의 영광의 풍성함’이라는 것을 알면, 어떤 재벌이 그 자식에게 물려주는 ‘억만금의 상속’은 비교도 되지 않는다. 그 영광이 과연 얼마나 풍성(부요)하기에, 사람이 사는 목적을 거기에 이르는 것이라고 가르치는 것일까?
신약성서 전체에서 단 한 번만 쓰인 놀라운 단어가 있다. 로마서 1장 20절이 말하는 ‘데이오테스’(θειότης), 즉 ‘신성’(神性)이라는 말이 바로 그것이다. 거기 보면 바울은, “세상의 창조에서 비롯된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즉 그의 영원한 능력(‘뒤나미스’)과 신성(‘데이오테스’)이, 관찰되는 피조물들에게서 보이기 때문입니다.”라고 말한다. 관찰되는 피조물에게서도 보이는 “신으로서의 성품”(새번역), 그것이 유독 인간에게서만 보이지 않는다는 소리이다. 베드로후서 1장 4절은 이것을 “신의 성품”(θεῖος φύσις)이라고, 알아듣기 쉽게 풀어서 말하기도 한다. 그러니까, 우리의 죄 때문에 ‘잃어버린 성품’이 ‘신성’인 셈이다. 그리고 그런 경지에 이르기를 희망하는 것이 사람이 사는 목적임을 가르치기 위해서, “하나님의 영광의 희망”을 말하는 것이다. 골로새서 2장 9절에서 “신성(θεότης)의 충만”을 말할 때도 이 단어가 쓰인 것을 보면, “그의 영광의 풍성함(부요함)”(롬 9:23)은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뛸 만하다. “하나님의 영광의 희망을 근거로(‘에피’) 우리는 기뻐한다.”(롬 5:2) 하는 그 말이 비로소 실감된다. “뿐만 아니라(‘우 모논 데’) 오히려 환난 가운데서도 우리는 기뻐한다.”(3절)라는 그 말은, 우리의 꺾인 무릎을 일으켜 세우기에 충분할 정도로 힘이 된다.
우리를 이해시키기 위해서 설득하는, 바울의 마음을 느껴보자. 바울은 “환난(‘들립시스’; 역경)은 인내(‘휘포모네’)를 만들어내고”(3절), “그 인내 또한 품성(‘도키메’)을 만들어내고, 그 품성 또한 희망(‘엘피스’)을 만들어냅니다.”(4절)라고 말한다. 개역한글이 ‘연단’이라고 번역한 헬라어 ‘도키메’는, ‘시험을 거쳐 인정된 자질이나 품성’을 의미한다. ‘연단’이라는 번역보다는 ‘품성’이라는 번역이 더 낫지 싶다. 그래야 ‘인내’를 통해서 길러진 ‘그 품성’이 더욱 거룩해져서, “신의 성품”(벧후 1:4)에까지 이르기를 희망할 수도 있지 않겠는가. 그런 점에서, “그 품성(‘도키메’) 또한 희망을 만들어냅니다.”라는 말은 십분 이해된다. 그러나 바울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우리를 납득시키기 위한 그의 설득은, 생각보다 집요하다. “그 희망도 우리를 실망시키지는 않습니다.”(5절)라고 재차 말하면서, 우리 마음들 속에 부어진 “하나님의 사랑(‘아가페’)”을 환기시킨다.
그런데 ‘하나님의 아가페’를 말하는, 이 부분의 설명이 매우 용의주도하다. 그 ‘하나님의 아가페’와 ‘거룩한 영’(성령)이 깊이 연관되어 있음을 놓치지 않는다. “그것은, 우리에게 주어진 거룩한 영을 통하여(‘디아 프뉴마토스 하기우’) 우리의 마음들 속에(‘엔’) 하나님의 사랑이 부어져 왔기(‘엑케오’의 현재완료 수동태; 쏟다, 붓다)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거룩한 영을 말하고, 그 거룩한 영을 통하여 우리 마음들 속에 ‘부어져 온’ 하나님의 사랑을 말한다. 듣기에 따라서는, 자못 ‘육감적으로’(?) 들릴 수도 있는 구절이다. ‘성령’이라고 하면, 흔히들 ‘방언’을 연상하곤 한다. 그러한 우리의 일반적인 통념과는 달리, 바울은 그 거룩한 영인 ‘성령’을 ‘하나님의 사랑’과 연관시켜 말한다. 이 점을 주목해야 할 것 같다. 그러니까 여기서 말하는 ‘사랑’은, 동사(‘아가파오’)가 아니라 명사(‘아가페’)이다. ‘행위’가 아니라 ‘마음’이다. 더구나 “우리 마음들 속에 부어져 온” ‘하나님의 아가페’라고 말하는 것으로 보면, 우리 마음속 ‘자비심’(慈悲心)을 ‘아가페’로 이해해도 무방할 것 같다. 산상설교가 말하는 ‘하나님의 뜻’(마 7:21)과도 통하는 말이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고 말하는 자라고 해서, 다 하늘(들)나라로 들어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하늘(들) 안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자라야 들어갈 것이다.” 그러니까 이 산상설교의 표현대로라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이 ‘자비심’이고, “그 뜻을 행하는” 것이 ‘자비행’(慈悲行)인 셈이다. ‘뜻을(목적격) 행한다’고 번역해야 할 말을 ‘뜻대로 행한다’(개역한글)고 번역한 것은, 그 의도야 어떻든, 매우 잘못된 번역이다.
이제 이쯤 되면, “하나님의 영광의 희망”(2절)을 말하면서 “우리 마음들 속에 부어져 온 하나님의 아가페”(5절)를 환기시키는 까닭이 머리 끄덕여진다. 그 ‘마음속 아가페’(자비심)를 행위로 드러내는, 그 ‘자비행’을 통해서만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기를 희망하며’ 살 수 있다는 뜻이다. 그런데 왜일까? 예까지 쓰고는, 몇날 며칠을 혼자서 끙끙거렸다. 분명 다음에 이어서 해야 될 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뭔가 자꾸만 미진하다는 생각이 들어서, 발이 땅에 붙어버린 사람처럼 걸음을 옮길 수가 없었다. ‘하나님의 영광’이 뭔지를 설명하고, ‘그 영광의 풍성함’을 실감케 하기 위해서 ‘신성’을 말하기도 했건만, 왠지 성에 차지 않기는 마찬가지였다. 말로는 설명하고 해석했는데도 그림이 그려지지 않는다는 것이, 필자로서도 답답했다. 그러고 보니, 하나님과의 ‘화해’를 전제로 말하는 이 단락의 주제어들 모두가, 우리의 인식을 넘어서는 ‘초월적인 차원’을 지시하고 있다는 데에 생각이 미쳤다.
‘영광’도 그냥 영광이 아니다. “하나님의 영광”이다. ‘성품’도 그냥 성품이 아니다. “신의 성품”이다. ‘사랑’도 그냥 사랑이 아니다. “하나님의 사랑(아가페)”이다. 그야말로 하나님이 ‘형용사’처럼 쓰이는, <거룩한 개념>의 말들이다. 이 땅의 평면적인 인식으로는 가 닿을 수 없는, <높이>를 지시하고 있다. 거룩해져야만 이를 수 있는 더 높은 차원, 그래서 예수도 그런 차원을 그림을 그려 보이듯 ‘비유’로밖에는 달리 말할 수밖에 없었겠구나 싶다. 그러나 필자는, 예수가 비유로 그려 보이시던 그림을 간혹 ‘유튜브’에서 볼 때가 있다. 곤충이 탈바꿈하는 ‘변태’(變態, metamorphosis) 장면이다. 하찮은 미물인 ‘애벌레’가 변태하여 전혀 다른 존재인 ‘나비’로 탈바꿈하는 광경은, 신비라는 말로도 부족할 정도의 감격으로 다가오곤 한다. 이 글을 읽는 독자들 중, ‘개미귀신’이라는 벌레를 아는 사람은 그리 흔치 않을 것이다. 마른 흙바닥에 깔때기 모양의 모래구덩이를 파놓고, 지나던 개미가 미끄러져 들어오면 잡아먹는 흉측스러운 놈이다. 그러나 놀라지 마시라. 이 흉측스러운 ‘개미귀신’이, 아름다운 성체로 탈바꿈할 명주잠자리의 ‘애벌레’이다. 어쩌면 인간을 일컬어 ‘하나님의 자녀’라고 하는 것도, ‘하나님의 애벌레’라는 말이나 다름없지 않을까? 달걀(닭의 알)이 부화하여 그 속의 ‘씨눈’이 ‘병아리’가 되듯이, 내 속에서도 그 씨눈과도 같은 ‘속사람’이 길러지고 있다고 생각할 수는 없는 것일까? 지금 우리가 궁구하는 ‘하나님의 영광’이야말로, 그 속사람의 ‘신적(神的)인 DNA’를 이르는, 다른 말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평생을 예수 믿고 살았다 해도 ‘무정란(無精卵) 같은 영성(靈性)’이 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면, 이는 실로 두려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우리에게 주어진 거룩한 영(성령)을 통하여 우리 마음들 속에 부어져 온”(5절) ‘하나님의 아가페’를 이렇듯 별스럽게 말하는 것도, 바울 나름으로는 그럴 만한 까닭이 있을 것이다.

더더욱 의로워졌으니
6절 이하에서 바울은, ‘하나님의 아가페’(5절)를 ‘그리스도의 죽음’과 연관시켜 말한다. “그리스도께서 불경건한 자들(형용사 ‘아세베스’의 복수; 신을 믿지 않는)을 위하여(‘휘페르’) 죽으셨다(‘아포드네스코’의 과거).”(6절)는 것이다. 그러면서 ‘그 죽음의 의미’를 부각시키기 위해서, 다른 죽음과의 비교도 서슴지 않는다. “의로운 자를 위해서 누군가 드물게는(부사 ‘몰리스’) 죽기도 할 것입니다. 선한 자를 위하여 누군가 간혹(부사 ‘타카’) 용기를 내기도 합니다.”(7절) 그러나 ‘불경건한 자들을 위하여’ 죽으신, 그런 죽음은 그 어떤 다른 죽음에서도 찾을 수 없을 정도로 전무후무하다는 것이다. 이것을 8절에서는 “우리를 위하여(‘휘페르’) 죽으셨다.”라고 고쳐 말하면서, 그 죽음으로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위한 그 자신의 사랑을 확증하십니다(‘쉬니스타오’의 현재; 함께 서다, 보여주다).”라고 못 박아 말한다.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하여 확증된 ‘하나님의 사랑’, 이것이 ‘하나님의 의로우심’을 말할 수 있는 논리적 근거이기도 하다. “율법과 무관하게 드러내어져 온”(롬 3:21) ‘하나님의 의로우심’을 말하고, “그것(그 복음) 안에서 드러내어진”(롬 1:17) ‘하나님의 의로우심’을 말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를 설교한다.”(고전 1:23) 하면서, 그것을 바울은 “십자가의 로고스”(고전 1:18)라고 한다. 그 정도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신 그 죽음의 의미는, 바울에게 남다르다.
그러나 대수롭지 않게 여기거나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이 또 있다.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다.”(8절) 하면서 바울은, 그 ‘우리’를 어떤 존재로 말하는지를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바울은 “아직도(부사 ‘에티’; 여전히) 타락해(형용사 ‘하말톨로스’; 죄 짓는) 있는(‘에이미’의 분사 현재)”(8절) ‘우리’임을 밝히면서, “(그런) 우리를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죽으셨음을 상기시킨다. “아직도(여전히) 연약해(형용사 ‘아스데네스’) 있는(‘에이미’의 분사 현재)”(6절) ‘우리’를 전제로, “불경건한 자들을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죽으셨다고 말하는 6절의 구조와 흡사하다. 더욱 놀라운 것은,
6절과 8절의 ‘아직도’(여전히)라는 부사(‘에티’)가, “믿음으로부터 나서 의로워진(과거)” 5장 1절의 ‘우리’를 이어받고 있다는 점이다. 믿음으로부터 나서 ‘의로워진(과거) 우리’(1절)이지만, “아직도 연약해 있는”(6절) 우리이고, “여전히 타락해 있는”(8절) 우리임을 놓치지 않는다. 아직은 ‘더더욱’ 의로워져야 할 여정이 남아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빌립보서 3장 12절에서 말한 그대로 바울은, ‘아직은 아니’(not yet)라는 자세를 끈질기게 견지한다. “내가 이미(already) 붙잡았기(‘람바노’의 과거; 받다) 때문도 아니요, 이미 완전해졌기(‘텔레이오오’의 과거) 때문도 아닙니다. 붙잡을 수만 있다면 붙잡으려고, 나는 오직 좇아가고(‘디오코’의 현재) 있을 뿐입니다.” 이 <이미와 아직 사이>의 긴장감이, ‘기존의 칭의론’에는 있을 수가 없다.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었다.”(롬 5:1, 개역한글)라고 번역해놓고, 그래서 ‘믿음으로 이미 구원받았다’ 하는데, 거기에 무슨 ‘아직은 아니’라는 미완의 여지가 있을 수 있겠는가. 바로 이것이 ‘기존의 칭의론’이 가진 결정적인 결함이고 신학적인 오류이다. 아무리 ‘구원의 여정’이 어쩌고저쩌고 해도, ‘의롭다 하는 선언’으로 그쳐버리는 칭의를 말할 뿐이다.
그런 의미에서, 여기 로마서 5장 9절은 참으로 중요하다. 번역에서부터 해석까지, 어느 한 구석도 소홀히 여길 수가 없다. “그러므로(‘운’) 이제는(‘뉜’) 우리가 그의 피 안에서(‘엔’) 더더욱(형용대명사 ‘폴로’+부사 ‘말론’) 의로워졌으니(‘디카이오오’의 분사 과거 수동태), 그를 통하여(‘디아’) 진노에서 벗어나(‘아포’) 구원될(‘소조’의 미래 수동태) 것입니다.” 이것이 필자의 사역이다. 이 구절에서 “그러므로 이제는”이라는 말은, 새겨들어야 할 말이다. “우리가 의로워졌다”(1절)고 <과거>로 말해놓고도, 그러나 “아직도 우리가 연약해 있다”(6절) 하고 “여전히 타락해 있다”(8절) 하며, <현재>로 말하는 속뜻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 의로워진(과거) 우리이지만, ‘아직은 아니’라는 것이다. <아직은> 연약한 상태에 있고(현재), <여전히> 타락한 상태에 있다(현재)는 것이다. 이 ‘아직도’(여전히)라는 부사 ‘에티’(ἔτι)를, 여기 9절의 ‘이제는’이라는 부사 ‘뉜’(νῦν)이 이어받는다. 헬라어 원문을 보면, “그의 피 안에서”라는 전치사구 앞에 이 ‘뉜’(이제는)을 붙여서, “νῦν ἐν τῷ αἵματι αὐτοῦ”라고 별스럽게 표현했다. 아직도 연약하고 여전히 타락한 상태에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피 안에 있는” ‘지금’임을 잊지 말라는 소리다. 그리고 1절에서 “의로워졌다”(과거)라고 했던 그 말을, 여기 9절에서는 ‘그러므로’라는 뜻의 접속사 ‘운’(οὖν)으로 이어받는다. “더더욱”(‘폴로 말론’) ‘의로워졌다’는 것을 말하기 위해서, ‘폴로’(형용대명사)와 ‘말론’(부사) 사이에 묘하게도 접속사 ‘운’을 끼워넣어서, “πολλῷ οὖν μᾶλλον”이라는 식으로 표현해놓고 있다. 그러니까, “우리는 의로워졌다(‘디카이오오’의 분사 과거 수동태 1인칭 복수)”라는 말을 문장 한가운데에 두고, “이제는 그의 피 안에서 (의로워졌다)”라는 말을 뒤에 이어붙이고, “그러므로 더더욱 (의로워졌다)”이라는 말은 앞에 배치한, 그런 문장 구조이다. 당시로는 대단한 헬라어 문장이었을 것 같은데, 지금 공부하는 나 같은 사람에게는 정나미(?)가 떨어져 다시 들여다보기도 싫을 정도로 구문을 파악하기가 복잡하고 힘들다.
글을 쓰다 보니, 뒤늦게야 새삼 독자들께 미안한 생각이 든다. ‘공부하는 독자들’을 위하고 싶은 마음에, 헬라어 원전(‘스테판 原語聖經 新約’)을 붙들고 씨름하다 보니, 이렇듯 난해한 글이 되어버렸다. 어떻게든 해석자로서의 소임을 다하려고 애쓰다 보니, 이 지경에(?) 이르고 말았다. 모쪼록 오해 없기를 바란다. “칭의론, 무엇이 문제인가”라는 제목의 첫 번째 연재글(2020년 2월호)에서 이 로마서 5장 9절을 다룬 바 있다. 이 글과 대조하면서, 참고해주기 바란다.
이 대목에서 필자가 말하고자 하는 주안점은, 어찌 보면 단순하다. “우리가 더더욱 의로워졌다.”라고 말할 수 있는 근거가 무엇이냐 하는 것이다. “이제는 그의 피 안에서” 더더욱 의로워졌다고 하는데, ‘그의 피 안에서’가 무슨 뜻이냐 하는 것이다. 9절의 전제가 되는 8절을 유념해보라.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확증된 ‘하나님의 아가페’를 말한다. 그리스도를 죽음에까지 이르게 한 ‘자기희생성’이 아가페의 본질임을 말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십자가에 달린 예수를, 사람들이 어떻게 조롱하고 모욕했는지 돌이켜보라. “십자가에서 내려와 네 자신이나 구원하라.”(막 15:30) “그가 다른 사람들은 구원했지만, 자기 자신은 구원할 수 없구나.”(막 15:31) 자기 자신도 구원하지 못한 것처럼 보이는 사람(예수)을, 그리스도(구원자)라고 믿는 것이 우리의 믿음이다. 그 그리스도의 죽음에서 드러난 ‘아가페의 자기희생성’, 그것을 바울은 곧잘 “그의 피”(롬 3:25, 5:9)라는 상징적인 말로 표현한다. 거룩한 영을 통하여 “우리 마음들 속에 부어져 온”(5절) 하나님의 아가페를 말할 때도, 이 사랑의 ‘자기희생성’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 “그의 피 안에서 우리가 의로워졌다.”(9절)라고 말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우리 마음속에 부어진 이런 아가페로 사랑을 했다면, 사랑하면 할수록 “더더욱 의로워졌다”고 말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 아니겠는가. ‘더더욱 의로워지는’ 이 과정이, 4장 25절에서 바울이 말했던 “의화”(義化, 디카이오시스)이다. 그리고 더더욱 의로워지는 이 ‘의화’를 통해서, 그 ‘사람됨’이 의로움에 이를 수 있다고 믿기에, “의로움의 희망”(갈 5:5)을 말하기도 하는 것이다. 그러니, “더더욱 의로워졌다”라고 <과거>로 말하면서도, “구원될 것이다”라는 말은 <미래>로 남겨둘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의로움의 희망’과 ‘하나님의 영광의 희망’을 함께 말해놓고도, 그 ‘두 희망 사이의 연관성’을 말하지 못하는 것이 못내 아쉽다. 그래서 그런지, 지금 필자의 마음속에는 지워지지 않는 그림이 있다. 바람을 거슬러 내달리면서 꼬리 긴 가오리연을 날리는 아이의 모습이다. 왜일까?


강일상 | 한국신학대학과 동 대학원을 졸업하였다. 『마가복음의 기적 이야기』, 『산상설교, 그 사람됨의 가르침』, 『부활되어야 할 부활』을 펴낸 바 있다. 지금은 은퇴하였다.

 
 
 

2020년 8월호(통권 74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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