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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me > 기독교사상 > 성서와설교 > [예수에게 길을 묻다 01]
성서와설교 (2020년 7월호)

 

  예수휴머니즘과 나의 신학의 길
  

본문

 

그들 중 율법학자 한 사람이 다가와서 예수를 시험하려고 물었다. “선생님, 율법 중 가장 큰 계명이 무엇입니까?”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혼신을 다하여 주님이신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이것이 가장 크고 첫째가는 계명이다. 둘째도 이와 같다. “네 이웃을 네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예언서의 골자이다.(마 22:37-40Q; 참조 막 12:28-34)

해방과 분단의 시대
해방이 분단으로 이어진 시대에, 나는 충청남도 부여군 홍산면 오지마을 식송에서 태어났다. 전쟁으로 강토가 피폐해지고, 대다수 국민이 초근목피(草根木皮)로 연명해가던 시절이었다. 아버지는 일찍이 객지로 떠나셨고, 산골 오두막에서 할머니, 어머니와 함께 살았다. 두 분은 아침 일찍부터 저녁까지 산비탈을 개간하고, 거기에 농작물을 심고 가꾸었다. 그래도 세 식구 먹고살기가 빠듯했다. 어머니께서 고구마 몇 개를 삶아놓고 밭으로 나가시면, 나는 그것으로 배를 채우며 온종일 혼자 있어야 했다.
오두막 뒤에는 공동묘지가 있었다. 볼록하게 올라온 묘의 봉우리들은 마치 어머니 젖무덤처럼 포근한 느낌이 들었다. 묘지 위에 누워 하늘에 떠가는 조각구름을 바라보며 상상의 나래를 펴다가 잠이 든 경우도 종종 있었다. 나는 해질녘을 좋아했다. 해가 서산으로 뉘엿거리고, 땅거미가 짙게 드리우기 시작하면, 내 존재가 어둠과 동화(同化)되어 가는 신비감을 느끼곤 했다. 하늘, 별, 바람, 구름, 공동묘지에 핀 들꽃, 풀벌레 소리, 모두가 나의 친구였다. 오감(五感)을 통해 자연과 하나 되는 삶을 살았던 어린 시절은 나에게 풍부한 감수성을 선사해주었다.

예수와의 인연
초등학교 4학년 때였다. 더 이상 산속에서는 먹고살 길이 막막해지자 세 식구는 충남 대천으로 이사를 했다. 생계를 위해 어머니께서는 길거리에서 좌판을 벌여놓고 국수를 팔았다. 집에서는 닭, 토끼, 염소를 키웠는데, 가축을 돌보고 키우는 일은 주로 내 몫이었다. 학교에서 돌아오면 풀 뜯으러 다니기에 바빴고, 공부는 뒷전이었다.
나는 대천에서 난생처음으로 교회당을 보았다. 교회당 옆에는 조그만 종탑이 있었다. 저곳이 도대체 무엇을 하는 곳인지 궁금했다. 하루는 밖에서 교회 종소리가 들렸다. 마치 나를 부르는 소리 같았다. 나는 종소리에 끌려 교회로 발길을 옮겼다. 마룻바닥에 내 또래 아이들 열댓 명이 옹기종기 앉아 이야기를 골똘하게 듣고 있었다. 무슨 이야기인지 궁금했다. 망설이다가 용기를 내어 들어가 아이들 틈에 앉았다.
이야기의 줄거리는 기억나지 않지만, 누군가가 나를 위해 죽었다는 내용이었다. 지금 돌이켜 생각해보면, 아마도 수난절 설교였던 것 같다. 나를 위해 죽었다는 그분이 누구인지 모르지만, 하여튼 고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분에게 호기심이 생겼고, 주일이 기다려졌다. 교회에 가는 게 즐거웠다. 종소리에 끌려 예수와 인연을 맺게 된 것은 나에게 운명이었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칠십 평생을 나는 그분과의 인연 속에서 굴곡진 삶을 살아왔다. 어쩌면 예수의 발길에 차여 살아왔다는 표현이 더 적절한지도 모르겠다.

전태일 사건과 민중
중학교 1학년 때인 1960년에 4・19 학생혁명이 일어났고, 그 이듬해에 5・16 군부 쿠데타가 일어났다. 군부 권력은 반공과 경제부흥을 국시(國是)로 삼았다. 경제개발 정책을 성공적으로 추진하기 위해서는 두 가지 여건이 필요했다. 한편으로 자본과 기술력이 있어야 했고, 다른 한편으론 값싼 노동력이 필요했다. 군부정권은 1965년에 굴욕적인 한일청구권협정을 체결한다. 양국 간 국교가 정상화되었다. 그때 일본 측으로부터 5억 달러 상당의 유무상(有無償) 차관을 받아 경제개발의 발판으로 삼았다.
다른 한편으로 값싼 노동력의 지속적인 공급을 위해 인구의 도시 집중화가 추진되었다. 농촌은 피폐해졌고, 청년들은 새로운 일자리를 찾아 도시로 몰려들었다. 이를 통해 값싼 노동력을 원활하게 공급할 환경을 마련하였다. 군부정권은 ‘선개발 후분배’ 정책을 시행했다. 경제개발의 주역이었던 노동자들은 그 혜택으로부터 배제되었다. 노동자, 빈농, 도시빈민을 중심으로 하는 사회 소수자들(social minorities)인 민중이 등장하였고, 사회정의(social justice) 문제가 사회적 이슈로 떠오르기 시작하였다.
중학교 3학년 때였다. 잠결에 부모님끼리 언성을 높여 다투시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의 상급학교 진학 문제로 두 분의 의견이 엇갈렸다. 어머니는 자식만큼은 가난의 굴레에서 벗어나게 해주어야 한다며 진학을 시켜야 한다고 고집하셨다. 지금은 미국에 살고 계신 외숙부가 당시 영등포역 부근 골목길에서 밤에 카바이드 불을 켜놓고 책을 팔고 있었다. 고민하던 끝에 외숙부에게 편지를 썼다. 중학교를 졸업하면 상경하라는 기별이 왔다.
졸업과 동시에 서울로 간 나는 야경주독(夜耕晝讀)을 했다. 낮에는 고등학교에 다니고, 저녁이 되면 외숙부를 도와 책을 팔다가, 통행금지 시간이 다가오면 책을 정리하여 리어카에 싣고 집으로 돌아오는 것이 일상이었다. 졸업 후 일반대학에 다닐 형편이 못 되어 육군사관학교에 지망했다. 하지만 신체검사에서 떨어졌다. 영양실조로 폐결핵에 걸린 줄도 몰랐다. 나는 성균관대학교 공과대학에 진학했다. 안정된 직장을 구하기에 수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4년 동안 가정교사 생활을 전전하면서 학교에 다녔다.
1970년, 대학 3학년 가을학기였다. 11월 13일, 전태일의 분신 사건이 일어났다. 그는 초등학교를 졸업한 후 가정형편상 청계천 평화시장에서 봉제공으로 일했다. 하루 14시간을 일하고 받은 일당이 50원이었다. 당시 다방커피 한 잔 값이었다. 전태일은 열악한 근로환경과 장시간 노동을 견디다 못해 피를 토하고 죽어가는 동료 근로자들을 목격하면서, 노동자들의 처우개선을 위해 노력했다. 노력이 수포로 돌아가자, 시위를 결심한다.
전태일은 동료들과 함께 시위에 나섰다. 그들의 손에는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노동자를 혹사하지 말라!”,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라는 구호가 쓰인 플래카드가 들려 있었다. 하지만 시위는 긴급 출동한 기동경찰대에 의해 저지당한다. 전태일은 옆에 있는 친구의 도움으로 자기 몸에 불을 댕긴다.
전태일의 분신 사건이 한국 기독교계에 끼친 파장은 실로 컸다. 개신교와 천주교 공동으로 개최된 전태일 열사 추모예배에서 김재준은 이를 한국 기독교가 자기성찰의 계기로 삼아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우리 기독교인들은 여기에 전태일의 죽음을 위해 애도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한국 기독교의 나태와 안일과 위선을 애도하기 위해 모였습니다.”
전태일 사건은 내 인생의 전환점이었다. 나와 동갑내기였던 그의 죽음은 나에게 삶의 의미에 대해 새롭게 묻도록 했다. 어떻게 사는 것이 인간다운 삶이고, 사람답게 산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고심 끝에 나는 인생의 길을 공학에서 신학으로 바꾸기로 했다. 유신헌법이 선포되던 해인 1972년에 한국신학대학에 편입학했다.

민중신학의 탄생
토인비(A. J. Toynbee)는 인류 문명을 도전(challenge)과 응전(response)의 역사로 규정한 바 있다. 전태일 사건의 도전에 대응하여 한국교회는 어떻게 응전했는가? 당시 한국교회의 주류 신앙 양태는 피안적인 영혼구원과 정교분리(政敎分離)였다. 물론 루터의 ‘두 왕국론’(two kingdoms theory)에 근거한 것이다.
전태일 사건을 경험하면서, 한국교회는 종전의 인습적인 신앙 양태에 대해 자아성찰을 하게 되었다. 복음을 새로운 각도에서 보기 시작하였다. 피안(彼岸)에서 차안(此岸)으로, 초월에서 역사로, 개인구원에서 사회구원으로 선교의 방향을 전환하기 시작했다.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안에 본격적으로 민중선교운동 기관들이 생겼다. 도시산업선교, 빈민선교, 노동선교, 농민선교 센터 등이 그것이다. 이러한 민중선교운동에 대한 신학적 성찰이 한국교회의 진보적 지식인들(서남동, 안병무, 현영학, 서광선, 김용복, 허병섭) 사이에서 일어나기 시작했고, 이는 민중신학으로 열매를 맺었다.
내가 신학교에 들어간 첫 학기에 감명 깊게 읽은 책이 있다. 에드워드 카(E. H. Carr)가 쓴 『역사란 무엇인가』이다. 그는 인류 역사를 “기록자와 사실 사이의 부단한 상호작용이며, 현재와 과거의 끊임없는 대화”로 정의했다. 과거는 지나가 버린 것이 아니라, 대화를 통해 끊임없이 현재를 규정하고 있다고 본 것이다. 불교의 카르마(karma)가 이와 유사한 개념일 것이다.
안병무는 카의 역사 인식을 수용하여 민중신학의 기틀을 놓았다. 인류 역사가 계급사회로 진입할 때부터 피지배 민중은 존재해왔다. 단지 지배 구조와 형태가 바뀌었을 뿐, 2,000년 전 예수의 시대나 오늘날 우리 시대에도 민중은 상수(常數)처럼 항시 존재한다. 안병무는 이 점에 착안하여 예수 사건과 전태일 사건을 상호공속적(相互共屬的)인 관계로 본다. 현재 역사의 눈으로 과거 역사를 보고, 예수 사건의 지평에서 전태일 사건을 해석한다.
기독교에서 복음의 원형(archetype)을 어디에서 찾아야 하는가는 중요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종전의 기독교는 예수를, 우리 죄를 대신하여 죽었다가 부활하신 하나님의 아들 구세주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데서 찾았다. 이는 바울의 신앙고백(케리그마)에 의거한 복음 이해이다. 한데 바울의 신앙고백의 뿌리는 무엇인가? 역사적 예수 사건이다. 케리그마는 이에 대한 바울의 해석일 뿐이다. 복음에는 일차적인 본(本) 사건이 있고, 이차적인 말(末) 사건이 있다. 본은 예수 사건이고, 말은 케리그마 사건이다. 그런데 종전의 기독교는 복음의 본말을 뒤집어버렸다. ‘태초에 케리그마 사건이 있었다.’고 본 것이다. 이에 도전하여 안병무는 ‘태초에 예수 사건이 있었다.’고 선언한다. 복음의 본말을 바로잡은 것이다.

안병무의 몸신학
유신헌법의 공포(公布)는 민주주의의 종언(終焉)을 뜻했다. 유신철폐 학생시위가 가열차게 전국으로 확산되어 갔고, 당시 한국신학대학도 그 중심에 있었다. 유신헌법이 이웃사랑 실천과 사회정의 구현이라는 복음의 정신에 정면으로 배치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진로를 바꾼 나는 가랑비에 옷 젖듯이 신학교의 분위기에 젖어들기 시작했다. 당시 안병무 선생을 만나게 된 것은 큰 행운이었다. 그는 진보신학자요 재야인사로서 유신철폐운동에 앞장섰다. 1976년 신구교(新舊敎) 공동으로 3·1절 기념미사가 명동성당에서 열렸다. 민주회복, 민중생존권 보장, 경제적 평등을 내용으로 하는 <3・1민주구국선언>이 발표되었다. 중앙정보부에 의해 체포된 안병무는 구속 기소되어 3년형을 받았다. 그는 감옥에서 얻은 지병이 악화되어 생을 마쳤다.
안병무의 가르침 중에서 특히 기억나는 것이 있다. 몸신학(Soma Theologie)이다. 인간은 몸을 소유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곧 몸이다. 몸은 존재(being)이지 소유가 아니다. 따라서 분리되거나 쪼개질 수 없다. 세계 모두가 하나의 유기적인 몸으로 구성되어 있다. 몸신학에서는 육과 분리된 영의 구원은 있을 수 없다. 전체로서의 몸의 구원과 개인구원을 넘어선 사회구원이 있을 뿐이다.
몸이 전체이듯이, 구원도 전체이다. 육과 분리된 영의 구원은 따로 있을 수 없다. 개인이 모여 사회를 이루듯, 개인구원과 사회구원도 둘이 아니다. 이러한 몸신학은 나에게 ‘나’와 ‘나 아닌 것’을 둘로 쪼개어 보는 이분법적인 사고(dualism)에 익숙한 나의 눈을 바로잡아주었다. 사람도 하나, 사회도 하나, 우주도 하나에서 비롯된다는 만법귀일(萬法歸一) 사상은 나 자신이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주변 환경 일체와 관계를 맺고 있는 존재요, 이웃에 대해 책임져야 할 사회적 존재임을 각성하게 해주었다.
몸의 특징은 ‘~을 향하여 있다’는 데서 찾을 수 있다. 나의 주체적 결단에 의해서 모두를 이롭게 하는 선을 지향할 수도 있고, 사익을 우선하는 악을 지향할 수도 있다. 양심의 도구로 쓰임받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몸의 훈련이 중요하다. 고린도전서 9장 27절이 말하고 있지 않은가. ‘나는 내 몸을 운전하고 훈련시킵니다.’(I drive my body and train it) 이러한 몸신학은 안병무 민중신학의 근본 뼈대를 이룬다. 나는 기숙사 생활을 하면서, 검도와 요가 등 몸 수련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인생대학 시절
1975년 10월 어느 신새벽, 나는 검은 잠바 차림의 청년들에 의해 납치되었다. 나를 태운 검은 승용차는 어느 건물 앞에 당도했다. “우리는 음지에서 일하고 양지를 지향한다”라는 현판이 현관에 걸려 있었다. 남산에 있는 중앙정보부(KCIA) 대공분실이었다. 나는 지하실에서 한 달 동안 온갖 구타와 고문을 당하며 주야로 취조를 받았다. 신학대학 기숙사에서 함께 지내던 재일동포 학생을 친절하게 대한 것이 화근이었다. 그가 북괴공작원이라고 했고, 내가 참여한 반정부 학생시위는 북괴공작원의 남한 전복 전략의 일환이었다고 중앙정보부는 조작하였다. 나는 그의 지령을 받아 학생운동을 배후에서 조종했다는 누명을 썼다.
1심 재판에서 무기형이 선고되었고, 2심 재판에서 10년형이 확정되었다. 햇수로는 4년 반 동안, 날수로는 1,540일을 0.78평에서 수감생활을 했다. 외부와 단절된 세계에서 나는 시선을 안으로 돌릴 수밖에 없었다. 생각을 ‘지금–여기’로 모으고, 참나를 찾아 내면의 세계를 여행하는 시간이 많아졌다. 감옥에서는 두 가지만 생각하기로 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고,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 이를 위해 건강을 챙기는 일과 책 읽는 일에 몰입했다. 감옥에서는 사회과학 서적과 이념서적 외에는 대부분 독서가 허용되었다. 주로 성서해석과 관련된 주요 신학서적들과 동서양의 고전(古典)들을 읽는 데 집중했다. 감옥에서의 독서는 훗날 나의 신학사상이 형성되는 데 큰 자양분이 되었다. 아마도 감옥이라는 인생대학 시절이 없었다면, 오늘의 나는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당시 중앙정보부 대공실장 김기춘 씨는 내가 관련된 재일동포 유학생 간첩단 사건을 조작한 장본인이다. 그는 이 사건을 유신시절 가장 자랑할 만한 치적으로 꼽고 있다. 훗날 경성대학교에서 은퇴할 즈음, 당시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소속 이석태 변호사의 권유를 받아들여 40년 만에 나는 재심을 신청하였다. 그는 왜곡된 역사의 부채를 바로잡는 것도 나에게 주어진 시대적 과업이라며 나를 설득했다. 그리하여 2017년 3월 31일, 대법원에서 무죄확정판결을 받았다. 탄핵을 당한 박근혜 전 대통령이 구속되던 날이었다.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출소 후 복학한 나는 실로 8년 만에 대학원을 졸업했다. 졸업 후 안병무 소장의 배려로 한국신학연구소에서 일했다. 민중신학을 본격적으로 공부할 수 있었던 이 시간은 나의 신학적 소양을 넓히는 계기가 되었다. 이후 나는 세계교회협의회(WCC)의 장학생으로 선발되어 1984년 봄 성서학의 본고장인 독일로 유학길에 올랐다.
나는 분단의 시대에 태어나, 분단된 한반도에서, 분단 이데올로기의 희생자가 되어 간첩 누명을 쓰고 살아야 했다. 출소한 후에도 수사기관의 감시하에서 제약된 삶을 살아야 했다. 분단의 카르마는 내면화되어 운명이 되었고, 평생 나의 삶 전부를 지배했다. 무죄판결을 받은 후, 비로소 내면화된 간첩의식에서 벗어나 자유인으로 살아갈 수 있게 되었다.

독일 유학과 예수휴머니즘신학
8년간의 유학생활 동안 오직 한 우물만 팠다. 예수의 원육성(原肉聲)을 전해준 초기 기독교 큐(Q) 공동체를 사회사적 지평에서 연구하는 데 집중했다. 큐는 예수 말씀의 원천(源泉, Quelle)이며, 육성에 가장 근접한 말씀이라는 뜻이다.
신학을 공부하기 시작하면서 나는 예수의 신성(神性) 신앙에 대해서 흥미를 갖지 못했다. 로고스, 하나님의 아들, 구세주, 그리스도, 부활, 대속, 기적 등 예수의 신성을 강조하는 신앙은 나로 하여금 예수로부터 멀어지게 했다. 인간은 예수처럼 신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한데 큐에서는 어떠한가? 예수 신성 신앙을 찾아볼 수 없다. 큐에서 예수는 ‘참 사람’이요, 인간의 본성인 하늘 아버지 뜻을 지상에서 가장 온전하게 구현하신 ‘사람의 아들’일 뿐이다. 예수는 우리에게 삶의 길을 가르쳐주신 선생(didaskalos)이요, 예언자, ‘앞서가신 분’(leader)이다.
민중과 동고동락하며 동반자로 살았던 예수의 걸림 없는 라이프스타일과 청중의 폐부를 찌르는 촌철살인(寸鐵殺人)의 말씀들, 그리고 사람 사는 세상을 만들기 위한 그의 꿈에서 나는 인간이 무엇이고 인간답게 사는 길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었고, 예수 따르미(Jesus follower)가 되어 그가 이루고자 했던 꿈에 참여하는 삶을 살겠다고 다짐하였다.
큐에서는 천지개벽의 구원 드라마(big story)를 찾아볼 수 없다. 대신 민중의 일상적인 고통을 해결해주는 생활구원 이야기들(small stories)을 만나게 된다. 구원에 관한 큐의 입장은 단호하다. ‘주여, 주여’ 하는 사람이 아니라 ‘하늘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을 하늘나라의 수혜자로 선언한다.(마 7:21Q) 내가 지은 죄를 예수께 떠넘기는 대속(代贖)신앙 대신 큐는 자속(自贖)신앙을 제시한다. 자기 몫의 십자가를 스스로 지고, 예수를 따르는 데서 구원이 완성된다고 말한다.(마 16:24Q)
나는 큐복음이 전해주는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참 사람’ 예수의 길에 무한한 매력을 느꼈다. 예수휴머니즘에서 인류가 걸어가야 할 보편적인 길을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나는 경천애인 사상(마 22:37-40Q; 참조 막 12:28-31)과 황금률(마 7:12Q)을 인류가 가야 할 보편적인 생명의 길이라고 생각한다. 이에 대해서는 앞으로 심도 있게 다룰 기회가 있을 것이다.
기독교는 어디에서 자기 정체성을 찾아야 하는가? 제자들의 케리그마 사건이 아니라 맨사람 예수 사건이다. ‘예수에 관한 신앙’(faith about Jesus)에서 ‘예수의 신앙’(faith of Jesus)으로 돌이킴을 통해서이다.

일손(日損)의 삶
유학하는 동안 나는 독일의 사회민주주의(social democracy)에 대해서 깊은 감명을 받은 바 있다. 독일은 요람에서 무덤까지 온 국민의 기초생활(의식주, 의료, 교육)을 국가가 책임지는 보편복지제도를 시행하고 있었다. 독일에서 시행되고 있는 보편복지제도는, 예수휴머니즘 정신이 사회화(社會化)된 형태라는 생각이 들었다. 귀국 후 대학에 재직하는 동안 나는 틈나는 대로 독일의 사회복지제도를 소개했다. 내 강의를 들었던 제자 중 상당수가 현재 사회복지 분야에서 활동하고 있다.
은퇴를 앞두고 나는 종전의 축적하는 삶에서 앞으로 덜어내는 삶으로 삶의 방향을 바꾸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한 의미에서 『도덕경』의 한 구절(48장)을 따서 내 호를 ‘일손’(日損)이라 지었다. 매일 덜어내는 삶을 살겠다는 다짐이 담겨 있다.
현재 나는 충주에 있는 노인 요양시설 ‘예함의집’에서 치매 어르신들을 돌보는 일을 하고 있다. 다른 한편으로는 텃밭을 가꾸며 자연의 이치에 순응하는 삶을 배워가고 있다. “예수에게 길을 묻다”라는 연재명으로 열두 번의 글을 이어갈 것이다. ‘코로나19’로 인하여 인류는 지금까지 가보지 않은 새로운 길을 가야 하는 문명의 전환기에 접어들었다. 코로나 이후(Post-Corona) 한국교회는 어디로 가야 하는가? 나는 초창기 그리스도교 큐공동체가 전해준 예수의 삶과 말씀 복음에서 그 답을 찾으려고 한다. 그리고 예수의 가르침을 동서 문명의 만남이라는 지평에서 새롭게 해석해보고자 한다.


김명수 | 성균관대학교와 한국신학대학을 졸업하였으며, 독일 함부르크대학에서 예수말씀복음 큐(Q)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Dr. theol.) 지은 책으로는 『큐복음서의 민중신학』, 『역사적 예수의 생애』 등이 있다. 경성대학교 명예교수이며, 충주에 있는 노인요양시설 ‘예함의집’에서 치매 어르신들을 돌보는 일을 하고 있다.

 
 
 

2020년 7월호(통권 73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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