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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me > 기독교사상 > 성서와설교 > [바울 구원론의 탐구 06]
성서와설교 (2020년 7월호)

 

  그 믿음, 우리 때문
  

본문

 

“그에게(여격; 하나님에게) 간주되었다.”라고 기록된 것은, 그(아브라함) 때문만이(‘디아 아우톤 모논’) 아닙니다. / 오히려(‘알라’) 우리 때문(‘디아 헤마스’)이기도 합니다. 이것은, 우리의 주이신 예수를 죽어 있는 자들(형용사 ‘네크로스’의 복수)로부터(‘에크’) 일으키신 분을 근거로(‘에피’; 위에서) 믿는 우리도, 그는 그렇게 간주하려고(동사 ‘멜로’의 미래 + ‘로기조마이’의 부정사) 하는 것입니다. / 그는 우리의 범죄(‘파랍토마’; 과오, 허물) 때문에(‘디아’) 넘겨졌고(‘파라디도미’의 과거 수동태; 넘겨주다), 우리의 의화(‘디카이오시스’; 의로워짐) 때문에(‘디아’) 일으켜지셨습니다(‘에게이로’의 과거 수동태).(롬 4:23-25, 필자 사역)

로마서에서 가장 오해되고 있는 것이 이 4장인 것 같다. 번역의 난맥상은 물론 그로부터 파생된 해석의 오류는, 몇몇 사람의 힘으로 바로잡기 힘들 정도로, 4장 전반에 걸쳐 있다. 곁에 두고 아껴가며 읽는 주석서를 봐도, 번역에서부터 해석까지 동의하기 힘든 부분이 너무도 많다. 글을 쓰면서 이렇게 외로움을 느끼기는 처음이다 싶을 정도이다. 어쩌면 필자가 쓰는 이 글도, 독자들에게 공감되기를 바라는 마음을 내려놓고서 써야 할 것 같다. 어차피 보는 눈이 다르면, 번역이나 해석도 다를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그 다름을 놓고 공감을 바란다는 것이 주제넘은 생각일지도 모르겠다.
필자는 ‘아브라함의 믿음’을 말하는 4장 3절의 번역에,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공력을 들인 게 사실이다. 하지만 거기에는 나름의 까닭이 있었다. 그 아브라함의 믿음이, 4장 전체를 이해하는 데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더욱이 바울은 그 ‘아브라함의 믿음’을 ‘우리의 믿음’과 연관시켜 말하고 있으니, 그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거기에서 필자는 ‘아브라함의 믿음’에서 “믿음의 의로움”(롬 4:11, 13)을 도출해내고, 그 ‘믿음의 의로움’을 “죽어 있는 자들의 부활”(롬 4:17, 24)에까지 연결시켰다. 특히 ‘기존의 칭의론’에 ‘부활’이 끼어들 여지가 없었던 것과 비교하면, 바울의 구원론에서 ‘죽어 있는 자들의 부활’이 갖는 의미를 천착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은 참으로 다행이다. ‘아브라함의 믿음’과 ‘우리의 믿음’ 사이에서 거멀못 역할을 하는, “믿음의 의로움”을 먼저 이해하는 것이 순서일 것 같다.

믿음의 의로움
이 “믿음의 의로움”은 4장 11절과 13절에 두 번 명시되어 있다. 이것을 “믿음으로 된 의”(개역한글)라고 번역하거나 “믿음으로 얻은 의”(1967년 새번역)라고 번역한 것은, 분명 오역이다. “아브라함이 무엇을 얻었다 하리오?”(롬 4:1, 개역한글)라고 잘못 번역할 때부터, 예상되었던 오역이다. ‘이신득의’(以信得義)라는 교리적 발상이, 번역을 그르친 단적인 실례이다. 어쩌면 4장 3절의 오역도, 이러한 교리적 발상의 산물일지도 모르겠다. 번역을 억지로 교리에 끼워맞추다 보니, 신앙 전반의 기조를 망가뜨리는 과오를 범한 셈이다.
바울이 ‘믿음의 의로움’을 말할 때, 그것은 4장 3절을 근거로 하는 말이다. “성경이 무엇을 말합니까?” 하면서, 바울이 왜 굳이 창세기(70인역) 15장 6절을 인용하는지를 밝히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성경이 무엇을 말합니까?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었다. 그래서 그것이(그 믿음이) 그에게(하나님에게) 의로움에 이르게 하는 믿음으로 간주되었다.’라고 말합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을 하나님께서는, ‘의로움에 이르게 하는 믿음’으로 간주해주셨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간주해주신 의도를, 4장 11절은 이렇게 말한다. “그가 비록 무할례자일지라도 그를 모든 믿는 자들의 조상(‘파테르’; 아버지)이 되게 하기 위함(‘에이스’)이었고, 그래서 그들이(그 모든 믿는 자들이) 의로움으로 간주되는 자들이 되게 하기 위함(‘에이스’)이었던 것입니다.”
이 4장 11절은, 아브라함의 믿음을 말하는 4장 3절의 번역과 해석에 결정적인 열쇠가 된다. ‘모든 믿는 자들의 조상이 되게 하기 위해서’ 아브라함의 <믿음>을 말했고, 그 모든 믿는 자들이 ‘의로움으로 간주되는 자들이 되게 하기 위해서’ 그 믿음을 <의로움에 이르게 하는> 믿음으로 간주해주셨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런지, 11절의 표현은 참으로 치밀하다. “그는 할례의 표지(‘세메이온’)를 받았습니다. 그것은(그 할례의 표지는) 무할례 안에서 받은 믿음의 의로움의 도장(‘습흐라기스’; 보증의 표시)이었던 것입니다.” 그 아브라함의 믿음이야말로, “무할례 안에서 받은” 할례의 표지였고 믿음의 의로움의 도장이었다는 것이다. 그 ‘모든 믿는 자들’ 속에, 무할례자인 ‘이방인들’은 물론 ‘오늘날 우리’까지도 함께 포괄될 수 있음을 은연중에 내비친다. ‘아브라함의 믿음’과 ‘우리의 믿음’을 이어주는 거멀못으로, 바울은 ‘믿음의 의로움’을 말하고 있는 셈
이다.
예까지의 논리를 뭉뚱그려서, 한 문장으로 요약하면 이런 식이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믿음을 “의로움에 이르게 하는 믿음”(롬 4:3)으로 간주해주신 것은, 모든 믿는 자들이 “의로움으로 간주되는 자들 되게 하기 위함(‘에이스’)”(롬 4:11)이었다는 것이다. 이것을 갈라디아서 3장 14절은 ‘아브라함의 축복’이라고 하면서, 이렇게 말하기도 한다. “이것은, 아브라함의 축복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이방인에게도 생겨나게 하기 위함이었고, 우리로 하여금 믿음을 통하여 성령의 약속을 얻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성령의 약속’이야말로, 모든 믿는 자들이 이르기를 희망하는 ‘의로움’(사람됨의 의로움)이다. 이것을 갈라디아서 5장 5절은 ‘의로움의 희망’이라고 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믿음으로부터 난(‘에크’) 성령으로(여격) 의로움의 희망을 학수고대하고 있습니다.” 그러고 보면, 이 ‘성령의 약속’을 “약속된 성령”(약속하신 성령)이라고 번역한 새번역(1967년)/표준새번역은 용납하기 힘든 오역으로서, 바울사상에 얼마나 무지했는지를 번역자 스스로가 폭로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기왕 비판하는 김에, 독자들이 비교해보게 하기 위해서라도, 그 갈라디아서 5장 5절의 잘못된 번역을 이 지면에 적시하고자 한다. “우리는 성령을 힘입어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을 희망을 품고 있습니다.” 이것이 새번역(1967년)이다. 그리고 이것을 근거로 표준새번역은, “우리는 성령을 힘입어, 믿음으로 의롭게 하여 주심을 받을 희망을 간절히 기다리고 있습니다.”라고 고쳐서 번역했다. 몇 번을 개정하고 고쳐 번역해도, 결국은 그 밥에 그 나물이다. ‘기존의 칭의론’에 길들여진 사고의 경직성이 어느 정도인지를 한눈에 알아볼 수 있다. ‘디카이오쉬네’라는 명사를, ‘디카이오오’라는 동사처럼 풀어서 번역한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억지로 칭의론에 끼워맞추기 위해서, ‘의롭다 함을 얻을’ 희망이라고 했다가, ‘의롭게 하여 주심을 받을’ 희망이라고 고치면서, 갈팡질팡하고 있다. 여기 쓰인 ‘디카이오쉬네’(의로움)라는 명사가 ‘의로운 사람의 사람됨’을 말한다는 것은 까맣게 모르고 있다. 그러니 그 ‘사람됨의 의로움’이야말로, 바울이 지향하는 ‘구원’이라고 하는 것을 알았을 리 만무다. 그러다 보니 ‘의로움’과 ‘구원’을 동의어처럼 말하는 로마서 10장 10절도, “우리가 마음으로 믿어 의롭다 함을 얻고, 입으로 고백하여 구원에 이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라고 얼버무려 번역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의로움에 이르도록(εἰς δικαιοσύνην) 그것이 마음으로 믿어지고, 구원에 이르도록(εἰς σωτηρίαν) 그가 입으로 고백되기 때문입니다.”(사역)라고 번역했더라면, 성서를 읽는 일반 독자들도 ‘의로움과 구원의 상관성’을 깨달을 수 있지 않았겠는가.
일일이 거론하기도 번거로울 정도로, 이 로마서 4장의 번역은 총체적으로 부실하다. ‘칭의론’이라는 교리적 매초(埋草)가, ‘바울의 구원론’을 찾아내기 힘들 정도로 뒤덮어버렸다. 그러니,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휘포스타시스’; 본질)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엘렝코스’; 확증)”(히 11:1, 1967년 새번역)라는 말을 아무리 입에 달고 살아도, “비록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랄지라도, 우리의 인내를 통하여 학수고대하는 것입니다.”라고 말하는 로마서 8장 25절과 같은 표현임을 눈치챌 수 있었을까? 그리고 ‘보지 못하는 것을 바란다.’(롬 8:25)는 그 말이, 갈라디아서가 말하는 “의로움의 희망”(갈 5:5)과 연관되어 있음을 보지 못하면, ‘바울의 구원론’을 말한다는 것은 그야말로 연목구어(緣木求魚)에 불과하다. 왜냐하면 바울은, ‘사람됨의 의로움’을 ‘구원’으로 말하기 때문이다. 걸음은 더디고 해는 저무니, 서둘러 다음 단락으로 넘어가야 할 것 같다. 우리와의 관계에서 ‘죽어 있는 자들의 부활’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 함께 천착해보기로 하자.
그러기 전에 필히 살펴야 할 것이 있다. 로마서 4장 23-24절이 무얼 말하는지, 그 말의 내용을 이해하는 일이다. “‘그에게(여격; 하나님에게) 간주되었다.’고 기록된 것은, 그(아브라함) 때문만이(‘디아 아우톤 모논’) 아닙니다. / 오히려(‘알라’) 우리 때문(‘디아 헤마스’)이기도 합니다.” 무슨 소리인가? ‘아브라함의 믿음’을 말하는 4장 3절을 전제로 하는 말이다. “그것이(그 믿음이) 그에게(하나님에게) 의로움에 이르게 하는 믿음으로 간주되었다.”(롬 4:3) 했던 그 말이, ‘아브라함 때문’만이 아니라는 것이다. “의로움에 이르게 하는 믿음으로 간주되었다.” 했던 그 말은, ‘우리 때문’에 한 말이기도 하고, “우리도 그렇게 간주하려고”(24절) 한 말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아브라함의 믿음’만이 아니라 ‘우리의 믿음’도, 하나님께서는 ‘의로움에 이르게 하는 믿음’으로 간주하려고 하신다는 뜻이다. ‘아브라함이 믿었던’ 하나님이 ‘지금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기도 하다는 전제를 깔고 하는 말이다. 그런데 매우 이색적인 것은, 지금 ‘우리가 믿는 하나님’에 대한 그 서술이 예사롭지가 않다는 점이다. 24절을 보라. “우리의 주이신 예수를 죽어 있는 자들로부터(‘에크’) 일으키신 분을 근거로(‘에피’) 믿는 우리도, 그렇게 간주하려고 하는 것입니다.”라고 말한다. 이 구절에서 하나님은, ‘우리의 주이신 예수를 죽어 있는 자들로부터 일으키신 분’으로 서술되고 있다. 그리고 우리는, 그 ‘일으키신 분(하나님)을 근거로 믿는’ 우리이다. 그리고 그 믿음의 내용은, ‘우리의 주이신 예수’이다. 로마서 10장 9절의 표현을 빌리면, “예수를 주라고 고백하는” 믿음인 것이다. 그러니까 ‘일으키신 분’인 하나님이 우리 ‘믿음의 근거’요, ‘우리의 주이신 예수’가 우리 ‘믿음의 내용’인 셈이다.
그러면 이제, 23-24절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들었으니, “우리의 주이신 예수를 죽어 있는 자들로부터 일으키신다.”(롬 4:24)는 것이 무슨 뜻인지, 함께 더듬어 찾아보기로 하자.

죽어 있는 자들의 부활
사도신경으로 신앙을 고백하다 보면,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시리라.”라는 구절이 있다. 한 가지 묻자. 예배 때마다 이 고백을 암송하는 우리는, 과연 ‘산 자’인가, ‘죽은 자’인가? 목숨이 붙어 있으면 ‘산 자’이고, 목숨이 끊어졌으면 ‘죽은 자’일까? 그래서 “심판하러 오신다.”라고 제 입으로 고백하면서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태연할 수 있는 것일까?
한 가지 더 묻자. 창세기의 타락설화를 읽다 보면, ‘하나님의 말씀’과 ‘뱀의 말’이 정면으로 대치하는 대목이 있다. 창세기 2장 17절과 3장 4절이 그것이다. 거기 보면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놓고 하나님은, “먹지 말라”고 하신다. 그러면서 “그것을 먹는 날 너는 반드시 죽을 것이다.”(창 2:17)라고 하신다. 그런데 여자를 유혹하는 뱀의 말은 전혀 다르다. “너희는 절대로 죽지 않는다.”(창 3:4) 하면서, 정면으로 하나님에 맞선다. 도대체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가 뭔데, 지금도 그렇지만 그때도 여자의 눈(?)에는 그것이, 탐스러울 정도로 먹음직도 하고 봄직도 했다고 한다. 그래서 여자는 그것을 따서 먹고, 함께하는 남편에게도 주어서 먹게 했다고 한다. 이쯤 되면, 모태신앙이 아닌 사람은 묻게 마련이다. 그들이 그 열매를 먹고 죽었는가? ‘먹으면 반드시 죽는다’고 한 그 열매를 먹었는데도, 그들이 죽었다는 말은 그다음 어느 구절에서도 찾을 수가 없다. ‘절대로 죽지 않는다’는 뱀의 말이, 오히려 사실로 입증된 셈이다. 그렇다면, ‘먹으면 반드시 죽는다’고 하신 하나님의 말씀은 거짓이었다는 말인가? 독자들께서는 어찌 생각하는지 묻고 싶다. 하나님께서 ‘반드시 죽는다’ 하신 그 말씀은 어떤 뜻으로 하신 말씀이고, 그 죽음은 ‘어떤 죽음’일까?
로마서 6장 11절을 보라. 우리말 성서가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 자로 여길지어다.”(개역한글)라고 번역한 바로 그 구절이다. 오래 길들여지는 동안에 입력된 선입관이라는 것이 참으로 무섭구나 싶다. 우리말 성서 모두가, ‘죽은 자’니 ‘산 자’니 하는 번역에서 한 발짝도 물러서지 않는다. 우리 자신을 ‘죽은 자’로 여기라 하는데도, 이 말이 이상하게 들리지 않는 눈치들이다. 그래서 필자는 헬라어 성서 원문을 놓고 씨름하지 않을 수 없었고, 그 결과 이런 사역을 얻어냈다. “이와 같이 여러분도 여러분 자신을 죄와의 관계에서는(여격) 죽어 있는 자들(형용사 ‘네크로스’의 복수 + 동사 ‘에이미’의 부정사 현재)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엔’) 하나님과의 관계로는(여격) 사는 자들(동사 ‘자오’의 분사 현재 2인칭 복수)로 간주하십시오(‘로기조마이’의 명령법 현재).” 여기서 ‘사는 자들’이라고 사역한 헬라어는, ‘자오’(살다)라는 동사의 분사 현재형이다. ‘산 자’(단수)가 아니라, 말 그대로 ‘사는 자들’(복수)이다. 그런데 정작 중요한 것은, ‘죽어 있는 자들’이라고 사역한 헬라어 ‘네크로스’가 형용사라는 점이다. 그 형용사 ‘네크로스’의 복수에, 고맙게도 영어의 ‘be 동사’에 해당되는 헬라어 동사 ‘에이미’까지 첨가되어 있다. 그러니까, 숨이 끊어져서 ‘죽었다’는 뜻이 아니다. ‘죽어 있는’ 것과 같은 그런 상태(형용사)라는 뜻이다. 죽어서 ‘죽은 자’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죄와의 관계에서”(여격) 보면 ‘죽어 있는 자들’이나 다름없는 삶을 살고 있다는 뜻이다. 그래서 “여러분도 여러분 자신을 죽어 있는 자들로 간주하라.” 하는 것이다. 목숨이 붙어 있어서 살고는 있지만 ‘죽어 있는 자들’인 것처럼, 그런 셈 치라(간주하라)는 것이다. “모두가 죄 아래 있다.”라고 했던 3장 9절에 비추어보면, ‘죄 아래서’ 사는 우리 모두가 ‘죽어 있는 자들’인 셈이다.
이제 이러고 보면, ‘죽어 있는 자들의 부활’은 ‘우리의 부활’(나의 부활)이어야 마땅하다. 갈라디아서 1장 1절에서 바울은, 자신이 ‘사도’가 된 것을 이렇게 말한다. “사람들(복수)로부터도 아니요, 한 사람(단수)을 통해서도 아니요, 예수 그리스도와 그를 죽어 있는 자들로부터(‘에크’) 일으키신(‘에게이로’의 분사 과거) 하나님 아버지를 통하여 사도가 된 바울”이라고, 자기를 소개한다. 사도가 되기 이전에는 자기도, ‘죽어 있는 자’였음을 간접 토로하는 대목이다. 그런 ‘자기로부터’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일으켜 주심으로써, 비로소 사도가 되었고 ‘부활의 증인’으로서 새로운 삶을 살기 시작했다는 말이다. 바울은 자기가 과거에 저질렀던 ‘전과’(前過)를 “육의 연약함”(갈 1:13)이라고 고백하면서, 이어지는 14절에서 이렇게 말한다. “그런데도 여러분은 나를 업신여기지도 않았고 경멸하지도 않았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천사인 것처럼, 그리스도 예수인 것처럼 나를 대접했습니다.”라고 말한다. 자기 삶의 새로운 변화(죽어 있는 자의 부활)를 통하여 ‘그리스도의 부활’을 드러내는, ‘증인으로서의 삶’을 이렇게 넌지시 암시하고 있다고 봐야 할 것 같다.
그런 의미에서 고린도전서 15장 12-14절의 폭탄선언(?)은, 우리의 통념을 깨부수기에 충분하다. “죽어 있는 자들로부터(‘에크’) 그가 일으켜져왔다고(‘에게이로’의 현재완료 수동태) 그리스도가 설교되고 있거늘, 어떻게 여러분 중 어떤 사람들은 죽어 있는 자들의 부활이 없다고 말합니까? / 만일 죽어 있는 자들의 부활이 없다면, 그리스도께서도 일으켜져 오지(‘에게이로’의 현재완료 수동태) 못했을 것입니다. / 만일 그리스도께서 일으켜져 오지 못했다면, 우리의 설교(‘케뤼그마’)도 헛되고 여러분의 믿음도 헛됩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말씀인가? 여기 이 필자의 사역을, 우리말 번역본들과 비교해보라. ‘죽어 있는 자들’을 ‘죽은 자들’인 것처럼 오해함으로써, 우리말 성서들은 이 단락의 매운 맛(?)을 잃고 말았다. “그리스도가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아났다.”는 말이 아니다. “죽어 있는 자들로부터 그가 일으켜져 왔다.”고 한다. 심지어 “만일 죽어 있는 자들의 부활이 없다면, 그리스도께서도 일으켜져 오지 못했을 것입니다.”라고 말하면서, 불경하게(?) 들릴 법한 맵찬 소리까지 마다하지 않는다. 바울은 이런 부활을 말하는데, 그래서 필자도 수년 전 『부활되어야 할 부활』이라는 책을 펴냈는데, 수입신학이 판을 치는 현실 속에서 이름 없는 토종 목사의 미세한 목소리가 들릴 리 있겠는가. 그나마 ‘죽어 있는 자들의 부활’에 대한 이해가 이만큼이라도 깊어졌으니, 이제 마지막으로 로마서 4장 23-25절의 메시지를 함께 찾아보기로 하자.

우리의 의화(義化) 때문에
이 글의 제목을 “그 믿음, 우리 때문”이라고 잡은 것은, 여기 로마서 4장 23절 이하의 메시지에 근거한다. “‘그에게(여격) 간주되었다.’고 기록된 것은, 그(아브라함) 때문만(‘디아 아우톤 모논’)이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 때문(διά ἡμᾶς)이기도 합니다.” 헬라어에서 ‘전치사 디아(διά)’ 다음에 ‘소유격’이 따르면 ‘~을 통하여’라고 번역되고, ‘목적격’이 따르면 ‘~ 때문에’라고 번역해야 한다. 그런데 개역한글은, “아브라함만을 위한 것이 아니요, 의로 여기심을 받은 우리도 위함이니”라고 오역했다. 전치사구인 ‘디아 헤마스’를 “우리를 위함”이라고 번역할 근거는 전혀 없다. 그래서 찾아보니, 영어 성서의 ‘for us’를 근거로 중역(重譯)했음이 드러났다. 게다가 원문에도 없는 ‘의로 여기심을 받은’이라는 말까지 덧붙여, “의로 여기심을 받은 우리도 위함이니”라고, 자의적인 해석까지 번역에 끌어들였음을 알 수 있었다. 4장 3절의 번역(“이것이 저에게 의로 여기신 바 되었느니라.”)을 기정사실화하기 위한, 번역자의 속셈(?)이 읽혀진다. ‘의역’(意譯)이라는 명분으로, 눈치채지 못하는 독자들을 속이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다. 정말 필자로서도, 이런 오역들을 일일이 지적하기가 번거로워서 싫다. 헬라어 원문이 어떻고 하면서 토를 다는, 이런 식의 글쓰기를 못마땅하게 여기는 독자들도 분명 있을 줄 안다. 그러나 이런 번역들이 백 년 넘게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하고 변질시켰다면, 그것을 어찌 보고만 있을 수 있겠는가? 4장 25절을 보라. “예수는 우리의 범죄함을 위하여 내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개역한글)라고 번역함으로써, 메시지 자체를 변질시켰다. “그는 우리의 범죄들(‘프랍토마’의 복수) 때문에 넘겨졌고(‘파라디도미’의 과거 수동태), 우리의 의로워짐(‘디카이오시스’; 義化) 때문에 일으켜지셨습니다.”라고 번역한, 필자의 사역과 비교해보라. 개역한글의 번역처럼,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예수께서 살아나셨다는 말이 아니다. 오히려 뜻으로 보면, 그와 정반대이다. “우리의 의로워짐(義化) 때문에” 그가 일으켜지셨다는 말이다. ‘우리가 의로워짐으로써’, 즉 “우리의 의화 때문에” 예수께서 일으켜지셨다는 것이다. “for our justification”이라고 번역한 것을 보면, 영어 성서도 이 구절을 이해하지 못한 것 같고, 그것을 중역한 개역한글은 그 뜻조차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것 같다. 풀어 말하면, 우리가 의로워져야 ‘우리가 의로워지는 만큼’ “우리의 주이신 예수”(24절)도 일으켜진다는 뜻이다. 그러니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었다’고 하는 <기존의 칭의론>이, 어찌 이 말을 이해할 수 있었겠는가.
이 구절이 말하는 ‘디카이오시스’(義化)를, 영어 성서가 ‘justification’(稱義)라고 번역한 것 자체가 모순이다. 아마도 ‘의로워지다’라는 동사를 명사화하여 ‘의로워짐’(의화)이라고 동명사로 표현할 수 있는 말이, 영어에는 없기 때문이었을 수도 있다. 아니면, ‘우리가 의로워지는 만큼 그가 일으켜진다.’는 생각을, 그들로서는 차마 할 수 없었지 싶기도 하다. 그래서 결국은 ‘우리의 칭의를 위하여’ 그가 일으켜지셨다고, 메시지를 변질시키면서까지 번역을 왜곡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어쩌면 헬라어 ‘디카이오시스’(의화)의 원뜻을 ‘justification’(칭의)이라는 말로 덮어서 가려버리기 위해, 번역으로 재주(?)를 부렸을 수도 있다. 하기야 ‘칭의론’(稱義論)을 신봉하는 그들 신학으로 보면, 바울의 구원론을 ‘의화론’(義化論)으로 말하는 이 구절이 받아들이기 힘들었을 것이다. 로마서 3장 28절과 갈라디아서 2장 16절을 보면 바울은, “믿음으로 사람이 의로워지는”(사역) ‘의화’를 ‘구원’으로 말한다. 그런데 우리말 번역본들은 “믿음으로 사람이 의롭다 함을 얻는”(개역한글) ‘칭의’가 ‘구원’인 것처럼, 번역 자체를 비틀어버렸다. ‘기존의 칭의론’을 정당화하기 위한 눈속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이다.
그렇다면 헬라어 ‘디카이오시스’(δικαίωσις)를 필자가 왜 ‘의화’(의로워짐)라고 번역했는지, 아무래도 설명이 있어야 할 것 같다. 신약성서 전체에서, 유독 로마서에서만 두 번 쓰인(롬 4:25, 5:18) 희귀한 단어이다. 사전을 찾아보면, ‘디카이오오’라는 동사에서 파생된 명사라고 풀이되어 있다. 동사를 명사화한, 일종의 동명사(動名詞)인 셈이다. ‘디카이오오’를 ‘의롭다 하다’(justify)라고 번역하고, 그것을 ‘칭의론’의 근거로 삼는 영어 성서의 번역자로서는, 이 단어를 ‘justification’(칭의)이라고 번역하는 것이 지극히 자연스럽다. 그러나 여기 4장 25절을 “우리의 칭의 때문에 그가 일으켜졌다.”라고 번역해놓고 보니, ‘칭의와 부활의 연관성’이 도무지 아귀가 맞지 않는다 싶었을 것이다. 하기야 그들의 신학적인 사고구조 속에는, ‘우리의 칭의’와 ‘그리스도의 부활’을 연결시킬 수 있는 논리가 없다. 그래서 ‘우리의 칭의 때문에’(because of our justification)라고 번역해야 할 말을, ‘우리의 칭의를 위하여’(for our justification)라고 살짝 눈속임을 한 게 아닌가 싶다. “우리의 칭의를 위하여 그가 일으켜지셨다.”라고 읽히게 만든 꼴이다. 그런데 우리나라 성서 번역자들은 이보다 한술 더 떠서, 영어 성서의 ‘칭의’라는 명사를 일부러(?) 동사처럼 풀어서 의역했다.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그가) 살아나셨느니라.”(개역한글), 또는 “우리를 의롭다고 인정하시기 위하여 (그가) 다시 살아나셨습니다.”(1967년 새번역)라고 번역해놓고 시치미를 떼는 형국이다. 단언컨대 여기 25절은, “우리를 의롭다고 인정하기 위하여 그가 다시 살아나셨다.”는 말이 아니다. “우리의 의로워짐(의화) 때문에 그가 일으켜지셨다.”는 말이다. ‘우리의 의화’와 ‘그리스도의 부활’이 논리적으로 깊이 연관되어 있음을 시사한다. “만일 죽어 있는 자들의 부활이 없다면, 그리스도께서도 일으켜져 오지 못했을 것입니다.”(고전 15:13)라고 말하는 ‘바울의 부활관’에 비추어보면, ‘그리스도의 부활’은 ‘죽어 있는 자들의 부활’을 통해서만 드러나게 마련이다. 그리고 ‘죽어 있는 자들이 일으켜지는 것’과 ‘죄인들이 의로워지는 것’은, 서로 맞물려 있다. “믿음으로 사람이 의로워지는”(롬 3:28, 갈 2:16) ‘의화’(義化)와 ‘부활’은 불가분의 연관성을 갖고 있는 것이다. “우리의 의화 때문에 그가 일으켜지셨다.”(롬 4:25)라고 말하는 논리적 근거가 바로 이것이다.


강일상 | 한국신학대학과 동 대학원을 졸업하였다. 『마가복음의 기적 이야기』, 『산상설교, 그 사람됨의 가르침』, 『부활되어야 할 부활』을 펴낸 바 있다. 지금은 은퇴하였다.

 
 
 

2020년 7월호(통권 73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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