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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me > 기독교사상 > 성서와설교 > [성서와 설교] 바울 구원론의 탐구 05
성서와설교 (2020년 6월호)

 

  아브라함의 믿음
  로마서 4장 3절

본문

 

성경이 무엇을 말합니까? “아브라함이 하나님을(여격) 믿었다(대문자). 그래서 그것이(그 믿음이) 그에게는(여격; 하나님에게는) 의로움에 이르게 하는(‘에이스 디카이오쉬넨’) 믿음으로 간주되었다(‘로기조마이’의 과거 수동태).”라고 말합니다.(롬 4:3, 필자 사역)

4장으로 접어들면서, 왜 바울은 새삼스럽게 아브라함을 거론하는 것일까? 우리 생각에 새삼스러운 것처럼 보여도, 바울은 충분히 논리적이다. “그렇다면”(접속사 ‘운’)이라는 말로, 3장과의 논리적 연속성을 설정해놓고 들어간다. “율법의 행위들과는 무관하게(전치사 ‘코리스’; 별도로) 믿음으로(여격) 사람(‘안드로포스’)이 의로워지는(‘디카이오오’의 부정사 현재 수동태) 것으로 우리는 간주한다(‘로기조마이’의 현재).” 했던, 3장 28절을 염두에 두고 있는 듯하다. 이 말에 비추어보면, 이스라엘의 조상인 아브라함은 ‘율법 이전의 사람’(갈 3:17)으로서, 그야말로 “율법의 행위들과는 무관하게” 산 사람이다. 그렇다고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으로’ 산 사람은 더더욱 아니다. 여기 1절의 말 그대로, 그저 “육을 따라”(‘카타 살카’) 산 사람일 뿐이다. 그러니까 ‘율법의 행위들을 통해서’ 의로워졌다고 볼 수도 없고,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으로’ 의로워질 수도 없는 사람이 아브라함인 셈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아브라함 같은 사람은 어떻게 의로워질 수 있단 말인가? 그도 하나님을 믿은 사람인데, 그런 ‘아브라함의 믿음’으로도 ‘사람이’ 의로워질 수 있는 것일까? 그 믿음을 통하여 아브라함이 ‘추구한 것’은 과연 무엇이었단 말인가? 3장 28절의 주제를 아브라함에게 적용할 경우에 생겨날 수 있는 의문을, 바울은 4장 1절에서 이렇게 전제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육을 따라 산(‘카타 살카’) 우리의 선조인 아브라함이 찾아온(‘휴리스코’의 부정사 현재완료) 것을 무엇이라고 말할까요?” 그러니까 바울은 이 4장을 통해서, ‘믿음의 사람’인 아브라함이 ‘추구하며 찾았던 것’이 무엇인지를, 우리더러 함께 생각해보자고 권유하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다.
그런데 이해되지 않는 것은, 다음에 이어지는 2절이다. 2절에서 왜 바울은 가정법적인 ‘문제 제기’를 덧붙이느냐 하는 것이다. “만일 아브라함이 행위들로부터(‘에크’) 의로워졌다면” 하는 이 가정이 선뜻 와 닿지 않는다. “비록 아브라함이 행위들로부터 의로워졌다고 할지라도”라고 읽어도 마찬가지이다. 아마도 아브라함을 ‘의로운 사람’의 모범으로 여기는 사람들, 즉 ‘아브라함의 믿음’에 대해서 바울과 견해를 달리하는 사람들을 염두에 두고 하는 말 같다. 야고보서를 보면, 그 견해 차이가 뚜렷하다. 거기 2장 20절을 보면 야고보는 “행위들과 무관한(‘코리스’) 그 믿음”의 무용함을 비판한다. 바울은 분명 “율법의 행위들과 무관한 믿음”(롬 3:28)을 말했음에도 불구하고, 야고보는 그 ‘율법의 행위들’이란 말을 일부러 곡해하여 ‘행위 자체’를 부정하는 것처럼 비판하고 있다. 오늘날 칭의론을 놓고 ‘행위냐 믿음이냐’ 하며 논쟁하는 신학자들을 보는 것과 같다. “율법의 행위들과 무관한 믿음”을 마치 ‘행위 없는 믿음’인 것처럼 곡해한다는 점에서는, 오늘날 일부 신학자들이나 야고보나 다를 바 없다. 바울의 말을 잘못 알아들은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라면, 그 ‘행위 없는 믿음’을 두둔하든 비판하든 그게 무슨 대수이겠는가. 야고보서 2장 21절에서, 그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그의 아들인 이삭을 제단 위에 바침으로써 의로워진(‘디카이오오’의 과거 수동태) 것도, 그 행위들로부터(‘엑스 엘곤’)가 아니었습니까?” 바울 당신은 ‘행위들과 무관한 믿음’을 복음으로 전하지만,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그의 아들을 제단에 바침으로써 의로워진 ‘그 행위’는 어찌 무시하느냐는 비판이다. 야고보의 해석대로라면, 아브라함은 ‘행위들로부터 의로워진 사람’의 전형이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여기 2절은, 자기를 비판하는 야고보 계열의 반론을 바울이 이미 알고 있었다는 뜻이 된다. 그리고 그러한 야고보의 주장을 ‘가정법적으로’ 인정하면서 되받아친다. “만일 아브라함이 행위들로부터(‘에크’) 의로워졌다면(‘디카이오오’의 과거 수동태) 그는 자랑을 가지고 있겠지만(‘에코’의 현재),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는 그렇지 못하기 때문입니다(‘가르’).” 아브라함이 행위들로부터 의로워져서 그것을 ‘사람들 앞에서’ 자랑으로 내세울 수 있다고 할지라도, ‘하나님 앞에서는’ 그렇지 못하다는 것이 바울의 반론이다. 왜 그것이 ‘하나님 앞에서는’ 자랑일 수 없다는 것일까? 2절에 쓰인 접속사 ‘가르’(때문입니다)를 3절에서도 이어받아 쓰면서, 그 까닭(‘가르’; 왜냐하면)을 창세기(70인역) 15장 6절로 논박한다. 갈라디아서 3장 6절에서도 인용하는 중요한 구절이다.
이것은, 다음에 이어질 4장 3절을 해석하는 데에 결정적인 열쇠가 된다. 그러니까 “성경이 무엇을 말합니까?” 하는 말로 3절을 시작하는 것은, ‘창세기(70인역) 15장 6절이 이렇게 말하는데’ 어찌 ‘하나님 앞에서도’ 그것을 자랑으로 여길 수 있겠느냐는 뜻이다. 이러한 바울의 논리대로라면, 아브라함을 ‘행위들로부터 의로워진 사람’으로 여길 수 없다. 설령 행위들로부터 의로워졌다고 할지라도, ‘하나님 앞에서는’ 그것이 자랑일 수 없다. 우리말 번역본들이 놓치고 있는 것이 바로 이 점이다. “의로 여기신 바 되었다.”라거나 “의롭다고 인정하셨다.”라는 식으로 번역한 우리말 번역본들을, 필자가 감히 오역(誤譯)이라고 단정하지 않을 수 없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잘못된 번역을 근거로, 아브라함을 마치 ‘칭의의 전형(典型)’인 것처럼 해석하는 것이야말로 엄청난 ‘신학적인 오류’이다. 이제 필자는 여기 4장 3절의 번역과 해석을 통해서, ‘기존의 칭의론’이 우리의 신앙을 얼마나 오도해왔는지를 밝히 보여줄 작정이다.

4장 3절의 우리말 번역본들
여기에 예시한 번역문들은, “성경이 무엇을 말합니까? 아브라함이 하나님을(여격) 믿었다(대문자). 그래서” 다음에 이어지는 문장이다. 앞에서 밝힌 필자의 사역(私譯)과 비교하면서 읽으면, 그 차이가 분명히 드러날 것이다.

개역한글 이것이 저에게 의로 여기신 바 되었느니라.
개역개정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기신 바 되었느니라.
새번역(1967) 그의 믿음 때문에 하나님이 그를 의롭다고 인정하셨다.
표준새번역 하나님께서 그것을 의로움으로 인정하여 주셨다.
새번역(2007) 하나님께서 그를 의롭다고 여기셨다.
공동번역 하나님께서는 그의 믿음을 보시고 그를 올바른 사람으로 인정해주셨다.


먼저 이 문장의 주동사인 ‘로기조마이’(λογίζομαι)를 어찌 번역할지, 독자들과 함께 생각을 모아보기로 하자. ‘의로 여기셨다’고 해서 ‘칭의’(稱義)라 하고, ‘의롭다고 인정하셨다’ 해서 ‘의인’(義認)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로기조마이’라는 동사의 번역에 따라, 같은 뜻의 말인 ‘칭의’와 ‘의인’을 달리 표현한 것에 불과하다. 성서에 쓰인 헬라어 자체가 덜 분화된 고어(古語)이기 때문에, 다양한 말뜻이 한 단어에 포함되어 있음을 감안할 필요가 있다. 말뜻이 다르면 그에 따라 언어도 분화되어야 마땅한데, 성서에 쓰인 헬라어는 그렇지 못하다. 그래서 ‘계산하다(상업 용어), 판단하다(법정 용어), 여기다, 인정하다, 간주하다’라고, 달리 번역되기도 하는 단어이다. 그중에서도 필자는 ‘그런 셈치다’라는 뜻으로 ‘간주(看做)하다’라고 번역하기를 즐겨한다. 뭔가 딱 잘라서 확정적으로 단언하기 힘들 때 쓰는 말이다. 로마서 6장 11절을 번역하면서, “죽어 있는 자들로 간주하라.”라거나 “사는 자들로 간주하라.”라고 필자가 사역하는 것도 이런 생각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 문장에서는 ‘로기조마이’가 ‘과거 수동태’로 표기되었기 때문에, “간주되었다”라고 사역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눈여겨보아야 할 것이 한 가지 더 있다. 헬라어에서 ‘동사의 주어’는, 따로 분명히 밝히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그 동사 속에 포함되어 있다. 이 문장의 주어(主語)도, ‘로기조마이’라는 동사 속에 ‘3인칭 단수’로 감추어져 있다. 그러니까 “그것이 간주되었다.”라고 읽을 수밖에 없고, ‘그것이’ 무엇을 지시하는지를 밝혀야 한다. 그러고 보면, 앞 문장에서 “아브라함이 하나님을(여격) 믿었다(대문자).”라고 할 때, 그 ‘믿었다’는 동사가 ‘대문자’로 표기된 것이 눈에 뜨인다. 그리고 아브라함이 믿은 그 하나님이 ‘여격’이라고 하는 것도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그러니까 “그것이(그 믿음이) 그에게는(여격 ‘아우토’; 하나님에게는) 이러저러한 것으로 간주되었다.”라고 번역함이 마땅하다.
남겨진 과제는, ‘그 믿음이 하나님에게는’ <어떤 것으로> 간주되었다는 것인지를 찾아내는 일이다. 그리고 이것이, 4장 3절의 번역에서 제일 중요하고 힘든 대목이다. 원문을 그대로 옮기면 “καὶ ἐλογίσθη αὐτῷ εἰς δικαιοσύνην”인데, 이 부분의 번역이 문제라는 말이다. 우리말 번역본들이 저마다 달리 번역한 것도, 이 문장이 그만큼 어렵다는 것을 방증한다고 볼 수 있다. 특히 전치사구(前置詞句)인 ‘에이스 디카이오쉬넨’의 번역은 난공불락일 정도이다. 우리말 번역본 그 어느 것도, 이 전치사구를 제대로 번역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여기 쓰인 헬라어 명사 ‘디카이오쉬네’는, 형용사 ‘디카이오스’(의로운)에서 파생된 명사로서, 사전을 찾아보면 “의로운 사람의 덕이나 자질이나 상태를 나타낸다.”라고 풀이되어 있다. 우리식으로 이해하면, 의로운 사람의 ‘사람됨’을 의미하는 말이라 볼 수 있다. 그러니까 ‘사람됨의 의로움’이 ‘디카이오쉬네’인 것이다. 우리말 번역 성서 거의 모두가, 이 말을 추상명사처럼 이해하여 ‘의’(義)라고 번역해놓은 것을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그리고 이 단어 하나에 이토록 집착하는 데에는 필자 나름의 사연이 있다.
필자는 오래전에 『산상설교, 그 사람됨의 가르침』이라는 책을 펴낸 바 있다. 산상설교가 제자들의 ‘사람됨’을 가르친다는 것을 말하기 위해서, 책의 제목도 그렇게 붙였다. 그런데 두고두고 후회하는 것이 있다. 거기 산상설교에서 자주 쓰이는(마 5:6, 10, 20, 6:33) ‘디카이오쉬네’라는 단어가 ‘의로운 사람의 사람됨’을 의미한다는 것을, 그때는 미처 깨닫지도 못했다는 점이다. 산상설교를 ‘사람됨의 가르침’으로 보고 책을 쓰면서도, 정작 거기 쓰인 ‘디카이오쉬네’가 ‘사람됨의 의로움’을 나타내는 말이라는 것을 몰랐으니, 지금 돌이켜 생각해도 부끄럽기 이를 데 없다. 팔복선언의 첫 구절인 마태복음 5장 3절이, 왜 “영과의 관계에서(여격) 가난한 자들(거지들)은 복되다.”라고 했는지를 좀 더 깊이 이해했더라면, 그다음에 이어지는 가르침도 보다 선명해질 수 있었을 것이고, 그 번역이나 해석도 많이 달라질 수 있었을 것이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마 5:6)도 “의로움을 배고파하고 목말라하는 자들”로 번역을 달리했을 것이고, 그다음에 이어지는 7절이 왜 “자비로운 자들은 복되다.”라고 했는지도 저절로 이해되었을 것이다. 이뿐만이 아니다.
5장 20절에서 왜 “너희의 의로움이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보다 낫지 않으면, 너희는 결코 하늘(들)나라로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라고 하는지, 그것도 여기 로마서에서 바울이 말하는 ‘율법과 복음의 관계’에 비추어 좀 더 풍부한 해석을 도출해낼 수 있었을 것이다. 산상설교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6장 33절, 즉 “너희는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로움을 추구하라.”라는 가르침이야말로, 로마서의 중심 주제인 ‘하나님의 의로우심’(롬 1:17)과 깊이 연관되어 있음을 말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리되면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그 길이 에워싸여 있어서, 그것을 찾는(‘휴리스코’) 이 적다.” 하는 마태복음 7장 14절에 대한 이해도 그 깊이를 더할 수 있었지 싶다. 생명으로 인도하는 그 ‘좁은 문’이 곧 ‘하나님의 의로우심’을 달리 표현한 말이라는 것도 깨달을 수 있었을 것이고, “그것을 찾는(‘휴리스코’의 현재) 사람이 적다.”라고 한 그 말씀이 “아브라함이 찾아온(‘휴리스코’의 부정사 현재완료) 것”(롬 4:1)과 연관되어 있음을 볼 수도 있었을 것이다.
이러한 전이해(前理解)를 갖고 보면, 여기 로마서 4장에서 ‘2절과 3절의 연관구조’가 한눈에 들어온다. 2절에서 “만일 아브라함이 행위들로부터 의로워졌다면 그는 자랑을 가지고 있겠지만,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는 그렇지 못하기 때문입니다.”라고 했던,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제대로 감이 잡힌다. 아브라함이 의로워졌다고 할지라도, 하나님 앞에서 ‘그 사람됨’이 의롭다는 판정을 받기에는 까마득 못 미친다는 뜻이다. 지난번 세 번째 연재에서 <하나님의 의로운 심판>을 다루면서, 필자가 했던 말을 기억해주기 바란다. “하나님은 사람들의 감춰진 것들(비밀스런 것들)을 심판하신다.”라는 로마서 2장 16절을 근거로, ‘디카이오쉬네’(사람됨의 의로움)가 심판의 기준임을 밝힌 바 있다. ‘하나님의 의로우심’(롬 1:17) 앞에서라야 ‘사람됨의 의로움’이 최종적으로 판별(判別)된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그것을 바울은 아브라함에게도 그대로 적용한다. 비록 아브라함이 “의로워졌다”(‘디카이오오’의 과거 수동태)고 할지라도, 하나님 앞에서 그 사람됨이 마지막으로 평가되는 “의로움”(‘디카이오쉬네’)에는 이르지 못했다고 보아야 하지 않겠느냐는 뜻이다. 3절에서 “에이스 디카이오쉬넨”(의로움에 이르게 하는)이라는 전치사구가 쓰인 것도 이 때문이다. “의로 여기신 바 되었다.”라거나 “의로움으로 인정하여 주셨다.”라는 식의 번역을 감히 오역이라고 비판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에이스 디카이쉬넨’
그러면 이제, 로마서 4장 3절의 우리말 번역들이 무엇을 놓치고 있는지, 함께 살펴보기로 하자. 우리말 성서에서 드러나는 대부분의 오역은, ‘에이스 디카이오쉬넨’이라는 이 전치사구가 무엇을 수식하는지를 몰랐다는 데서 연유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 전치사구 자체를 번역할 줄 몰랐으니 그럴 수밖에 없었겠구나 싶다. 아마도 영어 성서가 “and it was counted unto him for righteousness.”라고 번역한 것을 근거로 중역(重譯)을 하다 보니, 이런 부실한 번역들이 생겨난 것 같다. 어쩌면 2절과의 연관성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는 것이, 제일 큰 과오였을 수도 있다. 앞에서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이 문장의 주어(3인칭 단수)는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었다(대문자).” 할 때 대문자로 쓰인 ‘아브라함의 믿음’이다. 그리고 전치사구인 ‘에이스 디카이오쉬넨’은, 주어인 “그것”(그 믿음)을 수식한다. 그러니까 “그것이(그 믿음이) 그에게는(하나님에게는) 의로움에 이르게 하는(εἰς δικαιοσύνην) 믿음으로 간주되었다.”, 이것이 필자의 최종적인 사역이다.
“이것이(그것이) 저에게(그에게) 의로 여기신 바 되었느니라.”라고 번역한 개역한글(개역개정)은, 영어 성서를 놓고 씨름하다가 말아버린 것 같아서, 별로 언급하고 싶지도 않다. “그의 믿음 때문에 하나님이 그를 의롭다고 인정하셨다.”라고 번역한 새번역(1967)은, 억지로 ‘칭의론’(의인론)에 끼워 맞추기 위해서 용감하게(?) 원문을 무시했다. 의역이라고 보기도 힘들 정도의 자의적인 번역이다. “하나님께서 그를 의롭다고 여기셨다.”라는 새번역(2007) 역시, 이렇게 번역해도 독자들은 모를 것이라고 생각했는지, 막간다 싶을 정도로(?) 뻔뻔하다. “하나님이 그것을 의로움으로 인정하여 주셨다.”라고 번역한 표준새번역이, 그나마 의역을 통해서라도 원문의 뜻을 전달하려고 애쓴 흔적이 엿보인다. 그러나 ‘그것’(그 믿음)을 ‘의로움’으로 인정한다는 것이 얼마나 큰 모순인지를 모른 것 같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믿음을 보시고 그를 올바른 사람으로 인정해주셨다.”라고 번역한 공동번역은, 의역을 통해서라도 아브라함이 “올바른 사람”(의로운 사람)으로 인정받은 것처럼 읽히게 하고 싶었던 것 같다. 그러나 바울이 말하고자 했던 ‘2절의 취지’와 전혀 어긋나는 번역이 되어버렸다.
총체적으로 평한다면, 이 문장의 주어(3인칭 단수)가 “그것”(그 믿음)이라는 것을 너무도 소홀히 다루고 있다. 바울은 이 인용문(창 15:6)을 통해서, <아브라함의 믿음>을 말하려고 했지 <아브라함의 의로움>을 말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다만 그의 그 믿음이 “의로움에 이르게 하는 믿음”으로 간주되었다는 것을 말함으로써, 그를 ‘이스라엘의 조상’에서 “모든 믿는 자들의 조상”(롬 4:11)으로 격상시키려는 의도를 갖고 있을 뿐이다. 그래서 갈라디아서 3장 7절은, “믿음으로부터 난(‘에크’) 사람들, 바로 그런 사람들이 아브라함의 아들들(자손들)입니다.”라고 말하기도 한다.
이 전치사구의 중요성은, 그 사용 빈도로도 미루어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여기 4장만 하더라도 여러 절에서 이 전치사구가 쓰인다. 독자들의 공부에 도움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기존의 우리말 성서와 비교해보게 하기 위해서, 일부러 필자의 사역을 그대로 옮긴다.

롬 4:5 그러나 일을 하지 않는 자일지라도 그에게는(여격), 즉 불경건한 자를 의롭게 하시는(‘디카이오오’의 분사) 분을 근거로(‘에피’) 믿는 자에게는(‘피스튜오’의 분사 여격), 그의 그 믿음이 의로움에 이르게 하는(‘에이스 디카이오쉬넨’) 믿음으로 간주됩니다.
롬 4:9 그러면 이런 복은 할례자 위에(‘에피’)이겠습니까, 혹은 무할례자 위에(‘에피’)이겠습니까? 왜냐하면, ‘하나님에게는(여격) 그 믿음이 의로움에 이르게 하는(‘에이스 디카이오쉬넨’) 믿음으로 간주되었다.’고 우리는 말하기 때문입니다.
롬 4:22 그 때문에(‘디오 카이’) 그것이(그 믿음이) 그(하나님)에게는(여격) 의로움에 이르게 하는(‘에이스 디카이오쉬넨’) 믿음으로 간주되었던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을 하나님께서 “의로움에 이르게 하는 믿음”으로 간주해주심으로써, 그를 “모든 믿는 자들의 조상”(롬 4:11)이 되게 하신 의도를, 바울은 이렇게 밝힌다. 필자의 사역을 근거로, 로마서 4장 11절을 면밀히 살펴주기 바란다.

그는 할례의 표지(‘세메이온’)를 받았습니다. 그것은(그 할례의 표지는) 무할례 안에서 받은 믿음의 의로움의 도장이었던 것입니다. 그것은, 그가 비록 무할례자일지라도 그를 모든 믿는 자들의 조상이 되게 하기 위함(‘에이스’)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이(그 모든 믿는 자들이) 의로움으로(‘디카이오쉬네’의 목적격) 간주되는 자들이 되게 하기 위함(‘에이스’)이었던 것입니다.(롬 4:11, 필자 사역)

이 구절에서 제일 중요한 주제는, 아브라함을 “모든 믿는 자들의 조상”이 되게 하신 하나님의 의도를, 전치사 ‘에이스’를 연속해서 씀으로써 밝히고 있다는 점이다. “그래서 그들이(그 모든 믿는 자들이) 의로움으로 간주되는 자들이 되게 하기 위함(‘에이스’)이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4장 전반부의 핵심 주제이다. 여기서 거슬러 올라가면서 역순(逆順)으로 그 의미를 추적하면 이런 식으로 말할 수도 있다. ‘모든 믿는 자들’을 “의로움으로 간주되는 자들”이 되게 하기 위해서 아브라함을 “모든 믿는 자들의 조상”이 되게 하셨고, 그를 믿는 자들의 조상이 되게 하기 위해서 그 아브라함의 믿음을 “의로움에 이르게 하는 믿음”으로 간주해주셨다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이 구절이 말하는 “믿음의 의로움”을, “믿음으로 된 의”(개역한글, 개역개정)라고 번역하거나 “믿음으로 얻은 의(의로움)”(새번역, 표준새번역)라고 이해하는 것은 엄청난 착각이다. 신학적인 무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그 번역도 해석도 잘못되었다. 4장 3절이 말하는 “의로움에 이르게 하는 믿음”(아브라함의 믿음), 그 믿음을 통하여 ‘모든 믿는 자들이 이르게 될 의로움’을 바울은 “믿음의 의로움”이라고 한다. 그리고 이것은 4장 후반부로 이어지면서 그 깊이를 더한다. 여기 로마서 4장 3절이 말하는 “의로움에 이르게 하는 믿음”과, 1장 16절에서 말한 바 있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하나님의 능력”은, 의미상으로 깊이 연관되어 있다. 바울에게 ‘의로움’은 ‘구원’의 다른 표현이다. ‘사람됨의 의로움’이야말로, 바울이 말하는 구원론의 핵심 개념인 셈이다. 달리 표현하면, ‘사람다운 사람’이 되는 것이 구원이라는 말이다. 우리가 ‘예수’를 ‘그리스도’(구원자)라고 믿고 고백하는 것도, 그분이야말로 ‘사람다운 사람의 원형’이시기 때문이다.
그래서 로마서 10장 10절은 이렇게 말한다. “의로움에 이르도록(εἰς δικαιοσύνην) 그것이 마음으로 믿어지고, 구원에 이르도록(εἰς‘ σωτηρίαν) 그가 입으로 고백되기 때문입니다.” 이 말이, 우리 믿는 자들의 마음속에 깊이 새겨지기를 빈다.


강일상 | 한국신학대학과 동 대학원을 졸업하였다. 『마가복음의 기적 이야기』, 『산상설교, 그 사람됨의 가르침』, 『부활되어야 할 부활』을 펴낸 바 있다. 지금은 은퇴하였다.

 
 
 

2020년 6월호(통권 73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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