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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me > 기독교사상 > 성서와설교 > [성서와 설교] 교리의 더께를 걷어낸 갈라디아서 읽기 07(마지막회
성서와설교 (2020년 6월호)

 

  그리스도의 법과 삶의 표준, 그리고 새로운 창조
  갈라디아서 6장

본문

 

5장도 그렇지만 6장은 그다지 짜임새 있는 글이 아닌 듯하다. 어느 상황에도 적용할 수 있는 교훈들을 얼기설기 모아놓은 모습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앞 장들에서 바울이 논증한 내용을 떠올리며 읽는다면 6장의 내용은 앞의 논의와 긴밀한 관계에 있음을 알 수 있다. 무엇보다도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는 자유”(5:1)와 “사랑을 통해 발휘되는 믿음”(5:6), 그리고 “사랑으로 종노릇하는 자유”(5:13)와 “이웃사랑과 율법의 성취”(5:14)가 공동체 내의 구체적인 상황에서 어떤 모습을 띠게 되는가를 6장에서 볼 수 있다.

6:1–2
6장 1절의 내용이 어렵다고 생각하는 독자는 많지 않을 것 같다. 교훈의 요체가 간단하기 때문이다. 예수따르미 모임 내에서 “만일 사람이 어떤 잘못에 사로잡혀 있다면” 온유함의 영을 갖추어 그 사람을 권면하며, 권면하는 사람 스스로도 그와 같은 잘못에 빠지지 말라는 말이다. 여기에서 ‘잘못’이라고 번역한 단어는 본디 ‘규준에서 벗어남’을 의미한다. 앞에서 나왔던 “복음의 진리에 맞추어 바르게 걷다”(2:14)와 반대의 뜻이다. 능동적 행위로 인해 잘못을 저지르는 것이 아니라 잘못에 사로잡힌다는 수동적 뉘앙스를 풍기는 점이 흥미롭다.
여기에서 “여러분, 프뉴마스러운 사람들”(ὑμεῖς οἱ πνευματικοί)이라는 표현이 정확히 누구를 지칭하는지는 알기 어렵다. 이 편지에서 처음 등장하는 표현이기 때문이다. 보통 ‘영적인 사람들’이라고 번역하는 이 표현은 남다른 영의 은사를 가진 사람들일 수도 있고, 공동체의 질서를 규율하는 지도자를 가리킬 수도 있다. ‘프뉴마스러운 사람’이라고 그들 스스로 명명했는지, 아니면 바울이 사용한 명칭인지 또한 분명하게 알 수 없다. 하지만 이전 장들에서 육과 영의 극명한 대조가 이어졌다는 점, 그리고 특히 “영에 맞추어 살면서”(5:25) 육을 십자가에 처형한 사람(5:24)에 대해 바울이 줄곧 말했음을 고려한다면, 이렇게 영에 이끌리는 사람들을 바울이 ‘프뉴마스러운 사람들’, 즉 ‘영적인 사람들’이라고 불렀다고 추론할 수 있다. 이 영적인 사람들은 ‘온유의 영’(온유함은 영의 열매 중 하나이다.)을 가지고 범법에 사로잡힌 사람들을 보수해야 한다. 여기에서 ‘보수하다’(고치다)라고 번역한 동사는 어부가 훼손된 그물을 수리하는 행위를 묘사할 때도 사용된다. 고쳐서 원상태로 되돌려놓는 것으로 이해하면 좋다.
어떤 잘못을 지적하고 교정하는 사람이 그 잘못을 행하는 것처럼 어리석은 일은 없다. 그렇지만 실제로는 많은 사람이 이와 같은 잘못을 저지르곤 한다. ‘언행일치’라는 주제는 바울이 안디옥에서 게바를 비난하며 외식과 위선을 지적했던 것을 떠올리게 한다. 예수따르미들은 영의 열매인 온유한 태도로 공동체 일원의 잘못을 교정하고 보수하며 “서로의 짐을 짊어지게” 된다. 너무나 상식적이어서 별로 와닿지 않는 이런 행동을 바울은 그리스도의 법을 이루는 일이라고 말한다. 이 표현을 해석하기는 매우 어렵지만, “법/규율의 성취”라는 표현만 보아도 대단히 의미심장한 일을 가리킴을 짐작할 수 있다. 법의 성취를 가능하게 하는 중요한 행위는 바로 타인을 온유함으로 대하며 서로 잘못을 고쳐나가는 일이라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웅대하고 영웅적인 행동이 아니라 일상에서 타인을 존중하고 그 사람의 안녕을 바라는 것이 정말 중요하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율)법’(ὁ νόμος τοῦ Χριστοῦ)이라는 표현은 오랜 시간 학자들을 괴롭혀왔다. ‘그리스도-사건’이 신의 온전한 은혜의 대명사로 이해되면서 ‘법’(혹은 율법)이라는 단어는 더욱더 부정적 의미를 지니게 되었고, 그 결과 그리스도(은혜)와 법(율법)을 함께 묶는 이러한 표현은 어색하게 느껴진다. 그러나 앞에서도 보았듯 바울은 ‘그리스도-사건’(복음)이 순종의 대상이라고 명확히 말했다. ‘그리스도-사건’은 언약과 동일한 기능과 의미를 지녔기 때문에 사소한 불순종이라도 그것 때문에 그리스도 안의 하나님의 구원 행동에서 제외될 수 있다. 따라서 ‘그리스도’와 ‘법’이라는 두 단어 사이에 극한 긴장이 있어야만 한다고 생각할 필요는 없다.
네덜란드의 학자 보어(Martinus C. de Boer)는 그의 갈라디아서 주석에서 ‘그리스도의 법’이 학계에서 어떻게 해석되어 왔는지를 깔끔하게 정리했다. 그의 요약을 따르는 게 복잡한 해석사를 자세히 소개하는 것보다 훨씬 경제적이고 유익할 것 같다. ‘그리스도의 법’이라는 표현은 크게 네 가지로 이해되었는데, (1) 예수의 가르침, (2) 이웃사랑의 계명, (3) 그리스도에 의해 해석되고 성취된 율법, (4) 그리스도의 희생적 죽음을 통해 새롭게 제정된 규범적 삶의 패턴이 그것이다.1 여기에서 ‘법’으로 번역한 그리스어 단어는 ‘노모스’(νόμος)이다. 노모스는 원리, 규칙, 관습, 법, 모세 율법 등 꽤 다양한 뜻을 지닌 단어이다.2 그래서 이 단어가 바울서신에 나올 때에는 모세 율법을 지칭하는 것인지, 아니면 문맥에 따라 원리 혹은 일반적 의미의 법을 가리키는지 항상 주의깊게 살펴야 한다. 학자들은 대부분의 경우 바울이 노모스라는 단어를 사용하면서 여러 의미를 의도하지 않았을 것으로 보면서 모세 율법으로 해석한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법에 대해 바울이 분명하게 풀어 설명한 내용(6:2)은 의외로 놓치기 쉬우므로 주의를 기울여 읽어보자. “다른 사람들의 짐을 여러분이 짊어지십시오. 그렇게 하면 여러분이 그리스도의 (율)법을 성취할 것입니다.” 한마디로, 타인 사랑에 기반한 태도와 행동이 그리스도의 법의 실제 내용이라고 바울은 말한다. 짐을 지는 일은 주로 노예가 했기 때문에 이 권면은 다른 사람의 노예가 되어 그를 주인처럼 받들며 살라는 말이다.(5:13 참고)3 이것은 “사랑을 통해 효력을 내는 믿음”(5:6)이라는 표현과 맥이 닿아 있다. 대중적 이신칭의 이해는 ‘예수에 대한 믿음’을 강조하면서 그리스도에 집중한 나머지, 정작 바울 자신이 강조하는 ‘그리스도의 법과 사랑을 통해 구체화되는 믿음’이라는 측면을 간과해왔다. 믿음의 삶을 통해 구체화되는 것은 새롭게 형성된 정체성이다. 마찬가지로 이웃사랑은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는 길이며, 믿음을 사랑으로 표현하는 것과 동의어이다. 5장 14절과 6장 2절을 나란히 놓고 보면 더 뚜렷하게 보인다.

5:14 모든 율법(ὁ πᾶς νόμος)은 이 한 마디 말씀에서 온전해집니다(πεπλήρωται). “네 이웃을 네 자신처럼 사랑하라.”
6:2 여러분은 서로의 짐을 짊어지십시오. 그렇게 하면 여러분이 그리스도의 율법(ὁ νόμος τοῦ Χριστοῦ)을 온전히 이루게 될 것입니다(ἀναπληρώσετε).


두 구절 모두 ‘플레르’(πληρ)라는 어근으로 이루어진 동사와 노모스(ὁ νόμος)라는 단어가 있다. 일종의 평행구라고 간주해도 좋을 것 같다. 이런 관찰이 맞다면, 두 구절은 서로의 의미를 해석하고 보완한다. 모든 율법과 규례는 이웃사랑이라는 그 온전한 의미를 드러내며, 서로서로 섬기는 삶은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는 길이다.
여기에서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정체성과 생명을 얻은 사람은 ‘그리스도의 법’을 온전히 이루어야 할 의무가 있다. ‘그리스도-사건’ 자체가 일종의 규범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자신을 내어주신 것처럼(1:4), 그리스도와 일체를 이루는 사람은 이러한 그리스도의 사랑을 체현하는 것이 당연하다. 다르게 표현하면,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법에 순종하고 따라야 한다.
이후의 구절들은 구체적으로 공동체 안에서 예수따르미 자신이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를 알려준다. 그러나 유대 율법처럼 일상의 세부적 사항에 대해 실제적 지침을 주지는 않으며, 커다란 방향성만 규정한다. 영에 이끌려 사는 사람은 이러한 방향성을 염두에 두고 분별력을 발휘하여 구체적 삶의 정황에서 바른 행위를 할 수 있다.

6:3–5
각 구절은 보편적으로 수긍할 만한 가르침을 담고 있다. 상식적 권면이지만 3절부터 5절까지 반복해서 나타나는 주제에 주목해야 한다. 바로 자기 자신에 대한 성찰이다.

6:3 아무것도 아니면서도 스스로를 대단한 사람으로 여기는 사람은 자기 자신을 속입니다.
6:4 각자 자신의 행위를 분별하고 검증하십시오. 그리고 각 사람은 타인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만 자랑거리를 가져야 합니다.
6:5 각자는 자신의 짐을 짊어져야 합니다.


이렇게 스스로를 성찰하고, 과하지 않게 절제하며, 자기가 할 일을 하는 것이 공동체 윤리의 기초라고 바울은 말한다. 결국 이 구절은 5장 26절과 6장 1절에서 강조했던 “잘난 체하지 않기”, “서로 화를 내거나 샘내지 않기”, “타인의 잘못을 온유하게 바로잡기”와 일맥상통한다.
6장 6절은 예수따르미 모임 내에서 이루어지는 선한 ‘교환의 경제’를 말한다. 선한 의도로 조건 없이 주는 선물만이 순수하고 좋은 선물이라는 현대인의 관점에서 볼 때, “말씀을 배운 사람”은 “말씀을 가르쳐준 사람”과 “모든 좋은 것을 함께 나누어야 한다.”라는 바울의 이야기는 어색하게 들릴 수 있다. 하지만 고대 사회에서는 선물을 받은 사람이 그에 보답할 의무가 있다는 것이 일종의 사회 규범이었다. 바울이 여기에서 특히 ‘모든 좋은 것들’을 공유해야 한다고 강조하는 대목이 눈에 띈다. 받은 호의에 최선을 다해 감사로 보답하는 것이 교회 공동체 안에서의 경제 윤리이다.

6:7–8
은혜의 하나님을 강조하는 교회현장에서 자라고 생활한 사람들에게 이 두 구절의 무게가 쉽게 와닿지 않을 수 있다. 이 구절들을 이해하기 위해 잊지 말아야 할 점이 있다. 구약은 물론 신구약 중간기 유대 문헌과 신약성서 모두를 관통하는 하나님의 이미지는 공평과 정의의 신, 즉 행한 대로 보응하시는 하나님이다. 그리고 죄인에게 용서를 베푸는 자비는 하나님의 정의라는 틀 아래에 자리한다. 신약성서와 초기 유대교 연구자 샌더스(E. P. Sanders)가 랍비 유대교를 설명한 말이 여기에도 고스란히 적용된다. “엄격한 정의는 하나님의 자비를 배제하는 말이 아니라, 자의(恣意, 변덕, caprice)의 반대말이었다. 더군다나, 보응 이론은 선택과 속죄라는 더 큰 틀 안에서 기능했으며, 하나님이 언약 안에서 하시는 행위(intra-covenantal behaviour)를 가리키는 것이다.”4 ‘한 번 믿으면 영원히 문제 없음’이라는 신념은 바울의 생각에서 멀다. 신자도 최종 심판을 받는다. 바울이 다른 곳에서는 어떻게 말했는지 자세히 살펴보는 것이 좋겠다.

롬 2:2-5 그러나 그러한 짓들을 행하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심판(정죄)이 진리에 따라 내려진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러한 짓들을 행하는 자들을 심판하면서도 같은 짓을 행하는 사람이여! 당신 자신은 하나님의 심판(정죄)을 피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합니까? 그러나 당신은 당신의 완고함과 회개하지 않는 마음 때문에 격노의 날, 곧 하나님의 의로운 재판이 계시될 날에 내릴 격노를 당신 자신에게 쌓고 있습니다.
롬 2:6 (그분은) 각자에게 그 행실대로 갚아주실 것입니다.
롬 14:10 그리고 당신은 누구이기에 당신의 형제를 심판합니까? 혹은 당신이 누구이기에 당신의 형제를 업신여깁니까?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될 것입니다.
고후 5:10 왜냐하면 우리 모두는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마땅히 나타나야만 하기 때문인데, (이는) 선하거나 나쁘거나 행한 바대로 몸을 통해 (한 것을) 받기 위함입니다.


한 번 ‘믿으면’ 구원이 보장된다고 철석같이 믿는 사람들은 아래의 구절들을 다시 보길 바란다.

갈 5:4 여러분들 중 누구나 율법으로 의롭게 되고자 한다면 여러분은 그리스도에게서 잘려 나갔으며 은혜로부터 떨어져 나갔습니다.
갈 5:19-21 그런데 육신의 행위들이란 명백합니다. 그것은 성적 문란, 더러움, 방탕함, 우상숭배, 주술, 적대감, 분탕질, 시기심, 분노 폭발, 반목, 분쟁, 파당 짓기, 질투, 만취, 흥청망청함, 그 밖에 이와 비슷한 것들입니다. 전에도 말한 바와 같이 나는 여러분에게 또다시 말합니다. 이러한 짓을 행하는 자들은 하나님 나라를 상속받지 못할 것입니다.
고전 15:2 (내가 전한 복음)을 통해 여러분 또한 구원받는 중입니다. 만일 내가 여러분께 복음으로 전한 그 말씀에 여러분이 천착한다면! 여러분이 헛되이 믿은 경우를 제외한다면!


신자도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서 잘못한 일에 대해 벌을 받고 잘한 일에 보상을 받는다. 우리는 바울이 유독 갈라디아서에서 “피스티스로 의롭다고 여겨진 사람”과 하나님과의 관계가 쉽게 깨질 수 있음을 강조하는 것을 보았다. 게바가 그러했고, 심지어 “율법으로 의롭게 되고자 시도하는” 일조차 그리스도와의 연합에서 떨어져 나간다. 이 모든 것은 ‘그리스도-사건’을 선포하는 복음 역시 조금이라도 침해될 수 없는 순종의 대상이자 규범이라는 사실을 말해준다. 물론 이러한 바울의 논증은 청중의 두려움을 불러일으키기 위해 수사학적으로 정밀하게 계산된 결과물이라는 점을 놓쳐서는 안 된다. 갈라디아서에서 바울의 신학적 논증은 청중의 마음을 움직여 설득하려는 그의 의도로 버무려져 있다. 논쟁으로 가득 찬 글에서 ‘순수한 사실 진술’을 기대하는 사람은 너무 순진하다.
뿌린 대로 거둔다는 법칙은 하나님이 다스리는 세계에서 언제나 틀림없이 작동한다. 한없는 은혜를 강조하다가 이러한 하나님의 통치 법칙을 무시하면 하나님을 업신여기는 것과 다르지 않다. 이런 사람들에 대해 바울은 다음과 같이 권면한다. “여러분은 스스로를 속이는 실수를 하지 마십시오.”(6:7) 하나님의 엄정한 통치 원리를 애써 외면하며 스스로를 설득해 속이지 말라는 말이다. 영을 향해 씨를 뿌리는 사람은 영원한 삶을, 육신을 향해 씨를 뿌리는 이는 썩음을 거둔다. 여기에서 다시 한 번 육과 영의 대조가 나온다.

6:9–10
뿌리는 대로 수확한다는 자명한 이치는 6장 9절과 10절에 담긴 지침의 토대가 된다. 바울이 “좋은 일을 하다가 우리 낙심하지 맙시다.”라고 권유하는 근거는 “적절한 때에 수확할 수 있기 때문”이다.(6:9) 마찬가지로, “시간이 되는 대로 모든 사람, 특히 피스티스를 기반으로 정체성을 확립한 가정들에게 선한 일을 합시다.”(6:10)라고 말할 수 있다. 특히 10절에서 “시간이 되는 대로/기회가 있을 때마다”, “모든 사람”에게 선한 일을 하자고 독려한다는 점을 눈여겨보자. 선행의 대상과 때는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최대치여야 한다.

6:12–14a
6장 12절에서 바울은 자신의 적대자들(예루살렘의 거짓 형제와 갈라디아에서 율법의 행위를 선포한 사람들)을 앞서 비판했던 핵심 이유인 ‘강요’를 다시 언급한다. 그런데 이 구절의 해석이 쉽지 않다. 단순히 할례받기를 강요했다고 비난하지 않고 그렇게 강요하게 된 이유를 지적하는데, 그 이유가 명확히 나와 있지 않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바울은 오로지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인한 박해를 피하려는 이유 때문이라고 말하는데, 앞서 이것과 연관된 내용을 말한 적이 없어 난감하다. 다양한 추측이 있을 수 있지만 우리가 탄탄한 근거를 가지고 추론하기는 어렵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우리가 말할 수 있는 최소한은 다음과 같다. 바울이 여기에서 그의 적대자들을 겁쟁이, 즉 자신들이 박해를 피하려고 다른 이에게 짐이 될 만한 일들을 강요하는 사람들로 묘사한다는 점이다.
그러고는 ‘자랑’이라는 주제가 전개된다. 사실 12절부터 시작되어 14절 전반부까지 이어진다. 어떤 자랑이 제대로 된 자랑이냐는 문제를 다루고 있다. 여기에서 주목할 점은 바울이 적대자와 자기 자신을 대조하며 참된 자랑을 정의한다는 것이다. 주 그리스도의 십자가만이 자랑의 대상이다. 그러므로 그 외에 다른 어떤 것을 내세우는 일은 잘못된 자랑인데, 바울의 적대자들은 내적 신념과 외적 행동이 일치하지 않기에 신뢰할 수 없는 사람일 뿐 아니라 갈라디아인에게 할례를 강요하면서 이방인의 할례를 자신들의 뽐낼 만한 성취라고 생각한다. 잘못되어도 한참 잘못되었다. 그런 그들을 따르는 것은 어리석고도 잘못된 길을 선택해 걷는 것이다.

6:14b–15
6장 14절 하반절에서 그리스도와 십자가 처형을 같이 당한다는 주제가 다시 등장한다. 사형당하는 이미지, 특히 가장 수치스러운 처형을 당하는 이미지가 우리에게는 별로 충격적으로 다가오지 않는다. 십자가라는 기독교의 대표적 상징이 은혜와 희생과 사랑을 가리킨다고 널리 여겨지기 때문이다. 물론 맞는 말이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우리 자신이 완전히 처절하고 끔찍한 처형을 당했다는 사실을 자꾸 떠올리지 않으면, 우리의 옛 정체성이 처형당했으며 그 죽음 안에서 신의 힘에 근거한 새로운 생명이 깃들게 되었다는 사실을 쉽게 잊을 수 있다. 이미 죽은 사람에게는 자랑할 것이 없고 자랑할 수도 없다.(6:14a)
바울은 여기에서 또 한 번 놀라운 선언을 하는데, 이 세계가 ‘나’에 관한 한 십자가에서 처형당했고, ‘나’도 세상에 관한 한 처형을 당했다는 것이다. 쉽게 이해되지 않는 말이지만 세상과 ‘나’ 사이에 서로 간섭할 수 없을 정도로 완전한 단절이 일어났다고 해석하면 좋을 것 같다. 세상과 자아가 단절되는 것은 그리스도와 연합하는 새로운 관계로 진입하는 입구이다. 그리스도와의 합체(그분의 죽음에 참여함)는 그리스도의 주권을 인정하는 삶으로 나타난다. 샌더스는 이 대목을 정확히 기술했다.

바울이 그리스도의 죽음을 이야기할 때 말하려 했던 첫 번째 의미가 이 죽음이 과거에 사람들이 지은 범죄를 속하는 속죄[대속]라는 것이 아니라(그렇지만 바울은 그리스도인들이 공통으로 주장하는 견해를 따라 그리스도의 죽음이 속죄라는 것도 주장한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죽음에 동참함으로써 죄의 힘이나 옛 세대에 대하여 죽고, 이로 말미암아 결국 우리가 하나님께 속하게 된다는 것임을 본다. 이 옮겨감은 비단 우상숭배와 부도덕한 성생활이라는 더러움에서 깨끗함과 거룩함으로 옮겨감뿐 아니라, 이 주[主]에서 저 주[主]로 옮겨감을 말한다. 이런 옮겨감은 그리스도의 죽음에 참여함으로써 일어난다.5

그다음 절(15절)에서도 마찬가지로 할례 문제가 다시 언급된다. 그러나 이 주제들은 변주곡처럼 그 음계와 강약이 살짝 달라진다. 2장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처형됨을 말했을 때는 자아의 소멸과 재형성을, 5장에서는 욕망의 제거를 의미했다. 여기에서는 하나님의 효력 있는 은혜와 그리스도의 도래를 통해 정체성이 재형성된 사람(하나님의 자녀, 아브라함의 후손)은 현존하는 세상과 이질적인 존재일 수밖에 없다는 점이 강조된다. 사실상 그리스도와 합체되면서 새로운 생명을 지닌 참 인간이 창조되었는데, 이러한 하나님의 새 창조가 단지 인간에 국한되어 나타난다면 그것이야말로 어불성설이 아니겠는가.
하나님의 새로운 창조 작업의 대상은 당연히 온 세상, 모든 것으로 확장될 수밖에 없다. 생명을 불어넣으시고 모든 것을 새롭게 하시는 하나님의 능력, 그리고 온 세상에 대한 주권의 재천명이라는 빛에서 볼 때 사실 이 편지 대부분을 채운 이방인의 할례 문제는 사소한 것이다.

6:16
6장 16절은 축도라고 볼 수 있는데, 그리스-로마 시대의 일상적 편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요소이다. 바울이 갈라디아서를 통해 말하려고 하는 바를 제대로 포착하기 위해서는 이 편지를 처음부터 끝까지 한 번에 읽는 것이 중요한데(더 나은 방법은 누군가가 읽는 것을 듣는 것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바울의 글에 집중한다면 1장 8-9절(충격적 저주 선포)과 6장 16절 사이에서 극적인 대조를 느낄 것이다.
여기에서 바울은 흥미롭게도 하나님의 복(하나님에게서 오는 평화와 자비)을 받는 대상이 누구인지에 대해 몇 가지 제한조건을 단다. 첫째는 이 규준에 합치하여 사는 사람들, 둘째는 하나님의 이스라엘이다. 이 두 대상이 서로 다른 무리를 가리키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이제껏 바울이 말해온 것을 종합하면, ‘그리스도-사건’으로 의롭다고 여겨진 사람들은 영의 약속을 받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었고, 이러한 사람들이 보이는 삶의 형태는 영에 보조를 맞추어, 영에 이끌리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이 두 대상은 사실상 같은 무리를 지칭하는 것 같다.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유대인과 이방인이라는 태생을 고려하지 않고 새롭게 창조하신 그분의 백성을 바울은 “하나님의 이스라엘”이라고 이름짓는다.
규준을 지키는 사람이 하나님의 복을 받는 대상이 된다는 점에 주목하라. 여기에서 ‘규준’은 그리스어로 ‘카논’(κανών)이다. 기본적으로는 길이를 재는 잣대를 말하며, ‘기준’ 혹은 ‘표준’이라고 번역할 수도 있다. 반복해 말하지만, 복음은 우리의 삶의 규범으로 기능하기 때문에 우리는 복음의 내용에 순종해야 한다.
바울이 계속 강조하는 바는 다음과 같다. 그가 전한 복음은 조금이라도 침해되어서는 안 된다. 침해하는 순간 저주의 대상이 된다. 영에 맞추어 살면서 영에 이끌려 사는 사람이야말로 복음의 진리에 따라 걷고 복음의 진리에 순종하는 사람이다. 따라서 바울의 적대자들이 전파했던 (이방인 신자가 할례를 받고 유대 율법을 지켜야 한다는) 변질된 복음을 따라가면 진리와 ‘그리스도의 법’에 순종하지 않는 것이 된다. 바울 버전(version)의 복음만이 진리이고 절대 더하거나 뺄 수 없는 신성한 법이다. 이것이 1장 8-9절에서 바울이 저주를 선포한 이유이다. 바울 복음에 따라 사는 사람은 올바른 잣대, 즉 그리스도 안의 규범에 맞추어 사는 사람이고, 1장 8-9절에서 선포된 저주의 대상이 아니라 복을 받는 대상이 된다.

6:17–18
바울은 “나 자신이 내 몸에 예수의 자국들을 짊어지고 다닙니다.”라고 말한다. 여기에서 ‘자국들’이라고 번역한 그리스어 단어는 ‘스티그마타’(στίγματα, ‘스티그마’의 복수형)이다. 우리말 번역어로는 ‘흔적’, ‘상처 자국’, ‘낙인’, ‘타투’ 등이 있다. 복잡하고 감정적 요소가 가득 차 있는 이 편지의 말미에 왜 이런 말을 했는지 알 길이 없다. 스티그마가 노예에게 가해진 낙인, 즉 소유권을 명시하기 위해 만든 상처 자국을 가리킬 수 있기 때문에, “예수의 스티그마타”는 1장 10절에서 바울이 명명한 자기 정체성인 “그리스도의 노예”와 서로 상응한다고 볼 수 있다. 즉 그리스도에게 속해 있음을 나타내는 표시이다.6 로마 시대에 노예는 미천한 신분이었지만 노예들 중에서도 사회적・경제적 측면에서 높고 낮음이 있었고, 높은 신분을 지닌 주인에게 속한 노예는 여러 측면에서 ‘높은’ 지위에 있었다.7 그리스도의 종으로서 바울은 편지의 처음과 마지막에 자신이 섬기는 주인이 그리스도라는 것을 명확하게 언급함으로써 자신에게 부여된 권위와 영향력을 드러냈다.
이어서 바울은 “은혜로” 갈라디아인들을 “부르신 분”(1:6)을 상기시키며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갈라디아인의 “영”과 함께하기를 바라는 염원으로 편지를 맺는다.

연재를 마치며-이로써 갈라디아서에 관한 연재를 마무리한다. 연재명의 표현대로 교리의 더께를 걷어내려고 한 이유는 교리 자체가 나쁜 것이기 때문이 아니라, 성서 본문 자체의 흐름과 각 구절의 무게를 당대 역사적 배경과 상황 안에서 고스란히 파악하기 위해서였다.
성서가 지닌 변혁의 힘과 폭발력은 익숙한 성서 본문을 새롭고 낯선 것으로 마주하는 사람에게 전달된다. 교회 역사는 갈라디아서의 힘이 곳곳에서 분출했음을 잘 보여주고 있다. 몇몇 신앙의 선진들에게 전해졌던 갈라디아서의 폭발력을 느끼고 싶다면 익숙하지 않은 번역, 예를 들어 새번역이나 가톨릭의 다양한 번역으로 갈라디아서를 마치 처음 접하는 듯 읽는 게 좋다. 특히 나누어서 읽지 말고 처음부터 끝까지 한 번에 읽기를 권한다. 본 졸고를 통해 갈라디아서를 조금이라도 ‘낯선’ 텍스트로 느낀 독자가 있으면 하는 바람이다.

* 김선용 박사님의 “교리의 더께를 걷어낸 갈라디아서 읽기” 연재를 마무리합니다. 그동안 좋은 글 보내주신 박사님께 감사드립니다. - 편집부


1 Martinus C. de Boer, Galatians: A Commentary, New Testament Library(Louisville: Westminster John Knox Press, 2011), 378-379.
2 BDAG, s.v. “νόμος”.
3 de Boer, Galatians, 376.
4 E. P. 샌더스, 박규태 옮김, 『바울과 팔레스타인 유대교』(알맹e, 2019), 407.
5 E. P. 샌더스, 위의 책, 821.
6 Otto Betz, “στίγμα”, TDNT 7.657-658. 참고, Heinrich Schlier, Der Brief an Die Galater(Göttingen: Vandenhoeck & Ruprecht, 1971), 284.
7 자세한 정보와 학계의 논의는 J. Albert Harrill, “Paul and Slavery”, in Paul in the Greco-Roman World: A Handbook, ed. J. Paul Sampley, vol. 2(London: Blooms-bury, 2016), 301-345를 보라.



김선용 | 시카고대학(University of Chicago)에서 성서학 박사학위(Ph.D.)를 받았다. 신약 정경과 외경, 초대교회사를 공부했고, 초기 기독교 문헌을 그리스-로마 시대의 철학, 수사학, 종교적 배경에서 연구하고 있다. 현재 기독연구원 느헤미야의 객원교수로 일하고 있다.

 
 
 

2020년 6월호(통권 73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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