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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me > 기독교사상 > 성서와설교 > [성서와 설교] 조선과 대한민국 사이에 낀 성서 단어 02
성서와설교 (2020년 4월호)

 

  허물의 종류를 나타내는 단어 ‘건’(愆)과 속건제
  

본문

 

레위기 앞부분에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 명하신 제사의 종류와 드리는 방식이 정리되어 나온다. 그중 네 번째와 다섯 번째로 나오는 제사의 이름이 ‘속죄제’와 ‘속건제’이다. 죄의 문제를 다룬다는 점은 같은데 특별히 이 둘을 구분했다. ‘죄’라는 말은 오늘날 독자들도 잘 알고 있으니 별도의 설명이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 만약 ‘건’(愆)이라는 단어가 무슨 뜻인지 궁금해하는 어떤 능동적인 독자가 한자사전을 찾아본다면, ‘허물 건’이라는 음훈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 지점에 이르면 또 다른 궁금증이 생겨난다. “죄를 속하는 것과 허물을 속하는 것이 다를까?”
기존의 일부 학자들은 속죄제와 속건제를 구분하여 설명할 때, ‘배상’에 초점을 두어 속건제를 ‘배상 제사’라고 특징지어 말했다. 속죄제와 달리 속건제는 5분의 1의 배상을 더하여 주어야 한다는 점에 집중한 것이다. 그런데 사실 배상의 의미는 ‘건’이 아니라 ‘속’이라는 단어와 관련이 있다.
‘속’(贖)은 조선시대 내내 사용되던 법률 제도의 이름이다. 오늘날 현대인들이 임대차보호법을 잘 알고 있듯, ‘속’이라는 법률 제도는 조선시대 모든 계층이 매우 잘 알고 이용한 제도였다. 지난 호(2020년 3월호)의 글에서 설명했듯, ‘속’은 값을 지불하는 행위를 뜻하는 법적 용어이자 제도이다. 천인 신분에서 벗어나기 위해 몸값을 지불하거나, 죄인 신분에서 벗어나기 위해 죗값을 지불하는 두 가지 경우가 있었다. 그리고 그 방식은 돈으로 값을 치르거나, 직위를 반납하거나, 본인이 세운 공으로 값을 치를 수 있고, 나이와 성별이 비슷한 다른 사람을 구해서 대신 주는 방식으로 값을 치를 수 있었다. 특히 마지막에 설명한, 다른 사람으로 대신하는 방식을 ‘대구속신’(代口贖身)이라 불렀으며, 이것의 줄임말이 ‘대속’이다. 이것이 조선시대 내내 통용되던 ‘속’이라는 법률 제도였다. 예수께서는 죄인 신분인 우리의 ‘죗값’을 ‘대신’ 치러주셔서 ‘하나님의 자녀’라는 새로운 신분으로 만드셨다. 그것이 ‘속죄’, ‘대속’이다.(‘속’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은 지난 호의 글을 참조하기 바란다.)
따라서 속죄제와 속건제를 구분지을 때 주목할 점은 값을 치른다는 배상의 문제가 아니라 ‘건’이라는 단어이다. 이 단어의 의미를 명확히 파악하면 속죄제와 속건제를 성서에서 따로 명명한 이유를 파악할 수 있다.
‘건’이라는 용어는 특정한 허물을 저질렀을 경우를 지칭하는 용어였다. ‘죄’라는 단어는 보다 일반적이고 넓은 범위의 잘못을 포괄하는 용어이고, 특별한 잘못을 한 경우, 다시 말해 ‘결코 어겨서는 안 되는 절대 법칙이나 기준을 어긴 허물’은 ‘건’이라고 따로 구별했다. 조선시대에도, 성서를 처음 번역한 근대 초기에도 이러한 ‘건’의 의미가 통용되고 있었고, 그것에 따라 정확하게 ‘속건제’라는 번역어를 사용한 것이다. 이제 그 내용을 본격적으로 살펴보자.

‘건’이라는 단어와 ‘불건불망’의 의미
‘건’(愆)이라는 단어는 ‘심’(心)과 ‘연’(衍)이라는 두 글자가 합하여 이루어진 한자이다. ‘연’은 ‘자라서 퍼지다’라는 뜻을 담고 있다. 즉 도를 지나쳐 멋대로 거동하는 모양에서 ‘그르치다’의 뜻을 나타내는 단어가 되었다. 이런 의미에 기반하여, 이 단어는 중국과 우리나라 등 한자 문화권에서 ‘마땅히 따라야 할 절대적인 기준과 법칙을 어기고 위반한 허물’이라는 뜻으로 사용되었다. ‘건’의 의미가 어떻게 이해되는지 『논어』의 다음 구절을 보면 선명하게 알 수 있다.

군자를 모실 때 세 가지 허물[愆]을 저지르기 쉽다. 말할 때가 아닌데 말하는 것을 조급하다 하고, 말할 때가 되어서도 말하지 않는 것을 숨긴다고 하고, 안색을 살피지 않고 말하는 것을 소경이라고 한다.1

군자를 모시는 사람들이 저지르는 허물을 나열한 대목인데, 그 허물이란 말하거나 침묵하거나 눈을 감는 것이 아니다. ‘절대적 기준’이 되는 ‘합당한 때’를 어긴 것이 허물, 즉 건이 된다고 말하고 있다.
‘건’이라는 단어는 ‘특정한’ 허물에 대해서만 사용한다는 점에서 용례를 중요하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한자 문화권에서 ‘건’이라는 단어는 항상 ‘불건불망’(不愆不忘)이라는 용례로 이해되었다. 『시경』(詩經)의 “가악”(假樂) 두 번째 노래에 “불건불망 솔유구장”(不愆不忘 率由舊章), 즉 “어기지도 말고 잊지도 말아 모두 옛 법을 따른다.”라는 구절이 나온다. 맹자는 『맹자』의 “이루” 첫 장에 이 대목을 인용하여 “시경에 ‘옛 법 따르기를 불건불망하라’고 했다.”라고 설명하였고, “선왕의 법을 따르고서 잘못되는 자는 없었다.”라고 덧붙여 풀이하였다.
불건불망은 “어기지도 않고 잊지도 않는다.” 혹은 “잘못하지도 않고 잊지도 않는다.”라고 번역한다. 어기지 않는다는 것은 어떤 기준을 철저하게 따라 그것에 어긋나도록 하지 않는다는 뜻이요, 잊지 않는다는 것은 어떤 기준이 있다는 사실을 망각한 채 마음대로 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다시 말해, 기준이 되는 어떤 행위를 하다가 다르게 하지도 않고, 그 기준을 잊어버리고 안 하지도 않는다는 말이다. 그대로 따르면 잘못이 없고, 어기면 잘못이다. 조선시대에 통용된 ‘건’은 모두 이런 의미로 사용되었다. ‘건’이라는 한 글자만 언급해도, 유학자들은 이를 모두 ‘불건불망’의 뜻으로 이해했다.
조선의 위정자들은 특히 『맹자』의 언급에 따라 ‘불건불망’을 정치철학의 기본으로 삼았다. 조선이라는 국가의 기반이 되는 법전인 『경국대전』 “서문”에 이러한 내용이 잘 드러나 있다.

지금부터 거룩한 자손들이 완성된 법을 따라 불건불망한다면, 우리나라의 빛나고 밝은 정치가 어찌 주(周)나라에 비교해서 융성할 뿐이겠습니까. 억만 년 무궁한 공적이 마땅히 더욱 오래도록 길이 이어질 것입니다.2

선왕의 법을 절대 기준으로 하여 불건불망하는 것을 국가 경영의 핵심으로 명시한 것이다. 그렇게 하면 맹자의 말처럼 “정치도, 세상도 잘못되지 않는다.”라는 확신에 찬 선언이었다.

마땅히 따라야 할 절대적인 기준과 법칙
앞의 설명처럼, ‘건’은 단지 ‘허물’이라는 뜻이 아니라 ‘마땅히 따라야 할 절대적인 기준과 법칙을 어긴 허물’이라는 세밀한 의미를 담고 있는 용어이다. 그렇다면 마땅히 따라야 할 절대적인 기준과 법칙으로는 무엇이 있을까? 선왕의 법, 자연의 섭리, 예법, 법률로 정해지고 명시된 기한 등이 이에 해당한다.
불건불망의 대상 중 대표적인 것이 선왕의 법과 제도이다. 여기서 ‘선왕’(先王)이라는 말은 단순히 조선시대 선대의 왕들이 아니다. 유학자들은 중국 주나라 때를 가장 이상적인 정치가 이루어진 시기로 여겼다. 예법 또한 주나라 때의 것인 『주례』를 완성된 이상적 모범으로 삼아 조선의 예법을 정비했다. 『경국대전』 “서문”에서 기준으로 제시한 ‘완성된 법’이 바로 그것이다. 유교적 통치는 주나라 때 완전히 이루어졌고, 후세는 그런 선왕의 법과 제도인 『주례』를 불건불망하는 것을 목표로 삼은 것이다.
자연의 섭리도 불건불망의 대상이다. 예컨대 사계절 같은 것이다. 봄은 봄같이, 여름은 여름같이, 가을은 가을같이, 겨울은 겨울같이 되는 것이 절대 법칙이다. 양기가 성하여 겨울 날씨가 너무 따뜻하거나, 반대로 봄이 지나치게 추운 현상은 문제이다. 씨를 뿌려야 할 때에 백성을 전쟁에 동원하는 등의 일을 하지 않고, 봄이면 봄에 할 일을 하게 하고, 여름이면 여름에 할 일을 하게 하면 문제가 없다. 『춘추좌씨전』에 언급하기를, “성인이 나라를 다스리게 되면 겨울에는 건양이 없고 여름에는 복음(伏陰)이 없다.”라고 했다. 겨울이 지나치게 따뜻해지는 현상을 ‘건양’(愆陽)이라고 표현했다. ‘건’의 뜻을 알면 이 구절을 금방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정치가가 자연의 섭리에 따르니 온 백성이 잘못되지 않는 것이다.
예법(禮法) 또한 불건불망의 대상에 해당한다. 국가가 주관하는 제례 등의 행사에는 순서나 방식 등이 정해져 있는데, 그 예법을 하나도 빠짐없이 완전하게 따라서 허물이 없도록 해야 한다는 뜻이다. 정해진 절차대로 해야 권위도 살고, 온갖 귀신이나 관련 인물들도 서운하게 여기지 않게 된다. 각종 국가 예법을 불건불망해야 한다는 말이 자주 나오는 이유이다.
법률이나 명령으로 명시된 ‘기한’도 불건불망의 대상으로 여겼다. 예컨대 세금 납부기한을 어기면 ‘건’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여 그 내용을 적었다. 이백의 시 <고풍>(古風)에는 “공을 이룬 뒤 몸 물러나지 않음이, 예부터 허물이 많이 되었다.”(功成身不退 自古多愆尤)라는 대목이 있다. ‘건’이라는 단어가 ‘정해진 기간을 지키지 않고 어긴 허물’로 쓰이는 대표적인 용례이다. 시 한 구절에서도 ‘건’을 특정한 뜻으로 사용하는 용례가 명확히 지켜지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불건불망의 원리와 성서
단순히 생각하면, 불건불망을 말하는 조선시대 유학자와 위정자들을 ‘사대주의자’라거나, 너무 옛 법에 얽매여 사는 사람들이라고 욕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들이 불건불망을 말하고 실천하려 한 것은 정해진 의례와 삶의 예법을 지켜야만 ‘천명(天命)이 백성에게 드러나게’ 되기 때문에 자발적으로 행한 것이다. 하늘의 뜻이 왜곡되지 않고 본래의 모습대로 드러나게 하는 것이 위정자가 행해야 하는 교화(敎化)의 최종 단계이다. ‘억지로’ 따르는 법칙이 아니라, 본래 하늘이 정해준 가장 좋은 것이기 때문에 금과옥조(金科玉條)로 여기며 불건불망하려는 의도였다.
이를 성서에 적용해보자. 성서가 말하는 절대적 기준이란 ‘하나님’, ‘하나님이 정하신 계명’, ‘하나님의 성물’ 등을 들 수 있다. 당시 사람들은 ‘건’을 ‘반드시 따라야 할 절대 기준을 어긴 허물’이라 이해하고 있었으니, 성서를 처음 접한 조선인들은 성서가 말하는 ‘건’을 ‘하나님’ 혹은 ‘하나님이 정하신 것’, ‘하나님의 것을 어긴 허물’로 이해했을 것이 명확하다.
하나님의 명령은 사람을 얽매는 끈이 아니다. 하나님이 정하신 계명을 따르라는 율법과 규례는 사람들의 삶을 얽어매는 줄이 아니라, 그렇게 해야만 살 수 있기 때문에 지켜야 하는 기준이자, 결국에는 살게 하고 복을 누리게 하는 준칙이다. 그러므로 늘 기억하고 그것에 따라 살면 영원히 복을 누릴 수 있다. 성서에는 이와 같은 뜻이 담긴 말씀이 반복적으로 나타난다. 해당 구절이 여럿이나 몇 구절만 인용하더라도 이 정도이다.

-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이 모든 규례를 지키라 명령하셨으니 이는 우리가 우리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여 항상 복을 누리게 하기 위하심이며 또 여호와께서 우리를 오늘과 같이 살게 하려 하심이라.(신 6:24)
- 이 율법의 모든 말씀을 지켜 행하게 하라 이는 너희에게 헛된 일이 아니라 너희의 생명이니 이 일로 말미암아 너희가 요단을 건너가 차지할 그 땅에서 너희의 날이 장구하리라.(신 32:46-47)
- 그들이 교만하여 사람이 준행하면 그 가운데에서 삶을 얻는 주의 계명을 듣지 아니하며 주의 규례를 범하여 고집하는 어깨를 내밀며 목을 굳게 하여 듣지 아니하였나이다.(느 9:29)


성서가 처음 번역된 대한제국기와 일제강점기 초기까지도 ‘불건불망’이라는 단어와 그 용례는 널리 통용되고 있었다. 당시에 발간되던 근대 신문에서도 이러한 용례를 찾아볼 수 있다. 예를 들어, 「대한매일신보」 1908년 5월 15일 2면 1단 기사, 「황성신문」 1908년 5월 17일 1면 1단 기사, 1910년 8월 14일 2면 사설에 ‘불건불망’이 등장함을 확인할 수 있다. 신문이 일반 대중을 위해 발행되는 매체임을 고려할 때, 여러 신문에 이 용어가 등장한다는 사실은 당시 대중에게 ‘불건불망’의 의미가 통용되었다는 증거라고 말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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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컨대 조선시대 사람들은 선왕의 제도나 법률, 예악 등의 절대적 기준을 불건불망하면 정치가 잘 되고 백성이 평안하리라고 여겨 이를 따르려 했다. 성서의 원리도 이와 겹친다. 하나님과 하나님의 법을 따르면 살 수 있고 복을 누리게 된다. 불건불망의 의미를 아는 이들에게, 하나님의 율법을 온전히 지키면 생명을 얻고 ‘살게 된다’는 설명은 매우 잘 이해되는 개념이었다. 성서가 처음 번역되던 시기에 ‘건’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여 ‘속건제’라고 명명했을 때, 그 단어만으로 당시 사람들은 해당 내용을 매우 잘 이해할 수 있었다.

‘건’의 의미로 보는 성서의 속건제
앞서 설명한 ‘건’의 의미를 기억하면서 속건제에 관한 성서 구절을 살펴보자. 속건제를 설명하는 대표적인 구절은 레위기 5장 14절부터 6장 7절까지이다. 15절에서는 “여호와의 성물에 대하여 부지중에 범죄하였으면” 속건제를 드리라 했고, 17절에서는 “여호와의 계명 중 하나를 부지중에 범하여도” 속건제를 드리라 했다. 이러한 경우는 여호와의 성물 혹은 계명을 어긴, 절대적 기준을 어긴 행위이므로, 당연히 속건제를 드려야 할 것이다.
문제는 6장에 언급된 사례이다. “이웃이 맡긴 물건이나 전당물을 속이거나 도둑질하거나 착취하고도 사실을 부인”한 경우(2절), 그리고 “남의 잃은 물건을 줍고도 사실을 부인하여 거짓 맹세”를 한 경우(3절)에 배상을 하고 속건제를 드리라고 명하고 있다. 서두에 언급했듯 일부 학자들은 ‘배상’의 의미에 집중하여 ‘하나님께 피해’를 입힌 경우와 ‘이웃에게 피해’를 입힌 경우에 속건제를 드리는 것이라고 설명했지만, ‘건’은 ‘절대 기준을 어긴 허물’에만 사용되는 용어이다.
6장 2-3절에서 말하는 사례들이 속건제를 드려야 하는, 절대적 기준을 어긴 허물일까? 그렇다. 그것은 바로 이스라엘 사람들이 지켜야 할 가장 핵심 계명이라 할 수 있는 십계명을 어긴 것이다. 구체적으로는 “도둑질하지 말라”(8계명), “네 이웃에 대하여 거짓 증거하지 말라”(9계명), “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라”(10계명)라는 계명을 어겼다고 할 수 있다. 게다가 6장 2-3절의 사례를 말하기 직전에 이미 그 죄가 어떠한 성격인지를 밝혀놓았다는 점도 눈여겨보아야 한다. “누구든지 여호와께 신실하지 못하여 범죄하되 곧”이라는 6장 2절의 첫머리는 이후에 언급하는 행위들이 바로 ‘여호와’에 대한 행위이며, 이러한 행위는 여호와께 ‘신실하지 못한’ 것이라고 그 죄의 성격을 규명한 대목으로 읽어야 한다. 자신이 말한 대로, 그리하여 상대방이 기대하는 대로 지키는 것이 곧 신실이며, 하나님의 절대 기준을 ‘불건불망’하는 것이 신실이다. 2-3절에 언급되는 사례에 대해 속건제를 드리라고 명한 것은 단순히 ‘이웃에게 끼친 피해’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절대 기준인 십계명을 어겼기 때문’이라고 해석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오늘날 ‘구역’(舊譯)이라고 부르는, 1911년에 우리말로 완역된 최초 성서의 표현으로 레위기 5장 15절을 살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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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물을 범야’라고 한 것은 ‘건’(愆)을 반영한 것이요, ‘아지못고(알지 못하고) 범죄엿스면’이라 한 것은 ‘망’(忘)을 반영한 것이다. 이러한 내용을 종합하여 ‘속건제’를 드리라는 번역어를 쓴 것이다. ‘건’이라는 단어가 이때까지도 ‘불건불망’의 의미로 사용되고 있었으니, 이 시기 사람들은 ‘속건제’라는 단어만 들어도 ‘건’이라는 단어 때문에 그것이 무엇을 규정한 죄인지 명확히 알 수 있었을 것이다.

글을 마치며
‘잘못’이라는 의미를 지닌 한자는 ‘과’(過)도 있고, ‘오’(誤)도 있다. 그래서 성서를 번역할 때 ‘속과죄’ 혹은 ‘속오죄’라는 용어를 사용할 수도 있었겠지만, ‘속건제’를 선택한 것은 의미와 용례를 고려한 결정으로 볼 수 있다. ‘건’이라는 단어만의 고유한 함의가 있어서 이것을 오늘날의 다른 현대어로 담아낼 수는 없어 보인다. 이해하기 쉬운 단어로 바꾸는 차원에서 단순히 ‘잘못’이나 ‘허물’이라고 대체해버리면, ‘절대 기준에 대한 불성실성’이라는 개념은 사라지고 만다.
한자 사용에 익숙하지 못한 현대인을 위해 성서를 보다 쉬운 말로 고쳐야 한다는 의견이 많이 나온다. 언어는 시대에 따라 변하는 것이므로 필자 또한 원칙적으로 그 의견에 동의한다. 하지만 ‘쉬운’ ‘한글’로 바꾸려고 할 때, 원래 단어의 정확한 의미를 먼저 살필 필요가 있다. 적합한 대역어가 없는 경우에는 단어를 바꾸는 대신, 당시 그 단어가 통용되던 의미를 보다 깊게 파악하려고 노력하는 일이 선행되어야 할 것이다.


1 『論語』, “季氏”: 孔子曰, “侍於君子有三愆: 言未及之而言謂之躁, 言及之而不言謂之隱, 未見顔色而言謂之瞽.”
2 『經國大典』, “序文”: 繼自今, 聖子神孫, 率由成憲, 不愆不忘, 則我國家文明之治, 豈唯比隆於成周而已乎. 億萬世無疆之業, 當益悠久而悠長矣.



서신혜 | 고전문학을 전공하여 박사학위를 받은 후 신학(M.Div.)을 공부하였다. 저서로 『한국 전통의 돈의 문학사, 나눔의 문화사』 등이 있다. 현재 한양대학교 인문대학 부교수로 재직 중이다.

 
 
 

2020년 5월호(통권 73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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