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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me > 기독교사상 > 성서와설교 > [성서와 설교] 바울 구원론의 탐구 03
성서와설교 (2020년 4월호)

 

  하나님의 의로운 심판
  

본문

 

당신은, 하나님의 의로운 심판(‘디카이오크리시아’)이 드러나는(‘아포칼륍시스’) 진노의 날에, 당신의 완고함(‘스클레로테스’: 고집)과 회개하지 아니하는(형용사 ‘아메타노에토스’) 마음에 따르는(‘카타’) 그 진노를 당신 자신에게 쌓고 있습니다(‘데사우리조’의 현재).(롬 2:5, 사역)

신학자들이 모여서 논의하는 걸 보면, 자기들끼리만 통하는 말을 주고받는다 싶은 느낌을 받을 때가 많다. 일반 목사나 교인들이 알아듣기 힘든 말을 해야 학문적(신학적)이라고 생각하는 것인지, 듣는 사람들에 대한 배려가 참으로 부족해 보인다. “배운 게 도둑질”이라는 속담처럼 평생을 남의 말만 흉내내다 보니, 자기도 이해 못하는 말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의심이 들기도 한다. 명색이 목사인데, 나도 이해하기 힘든 말을 그들은 곧잘 내뱉는다. 칭의론의 ‘법정적 의미’란 말도 그런 유에 속한다.
무슨 법정에서 어떤 법에 의하여 ‘의롭다 함을 받았다’는 것인지, 누구를 붙잡고 물어볼 수도 없었다. 그렇게 찾아 헤맨 세월이 짧지가 않다. 그러다가 우연히도, 어느 주석서의 한 귀퉁이에서 그 실마리를 찾게 되었다. 헬라어 ‘디카이오오’(δικαιοω)라는 단어 자체가 법정용어(法廷用語)라는 설명이었다. 법정에서 재판관이 죄인에게 무죄선고(無罪宣告)를 내리는 것을, ‘디카이오오’(의롭다 하다)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죄인의 입장에서는, 그 재판관의 ‘무죄선고’를 ‘의롭다 함을 받았다’고 여길 법하다. 신학을 하기 이전에 법학을 전공한 ‘법꾸라지’(?)가 아니었다면, 생각해낼 수 없는 발상이다. 일견 그럴싸하게 들리지만, 속기 십상이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 ‘무죄선고’라는 말에 마음이 끌렸으면, 500년 동안이나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았다’고 하면서 구원을 확신했던 것일까. ‘의로워지지도 않은 사람’이 ‘의롭다 함을 받았다’고 하는 것이 나로서는 도무지 납득되지 않았지만, 오랜 세월 지속되어온 그 완강한 칭의론의 대세(?) 앞에서 어쩔 수 없었다.
그러다가 이 글을 준비하면서 깨달은 것이 있다. 예전에는 미처 생각지도 못했던 것이다. ‘세상의 재판’과 ‘하나님의 심판(재판)’이 다르다고 하는 데에 생각이 미치게 된 것이다. 혐의가 있는 범인을 기소하여 그 죄의 유무를 가리는 것이, 이 세상 법정의 재판이다. 그래서 재판 결과가 ‘무죄’로 판명되면, 환한 얼굴로 법원 문을 나선다. 요즘 TV에서 흔히 접하는 모습이다. ‘무죄판결’을 받았다는 것으로 ‘자신의 의로움’이 밝혀진 것처럼, 득의양양(得意揚揚)하다. 그런 모습들이 나에게는, 문득 우리 기독교인의 모습과 겹쳐 보인다. 칭의론을 근거로 의롭다 함을 받았다고 믿는 기독교인들이나, 무죄판결을 받았다고 득의만면한 그들 모습이나 무엇이 다르겠는가. 그 무죄선고가 ‘사람됨의 의로움’을 보장하는 게 아님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동안 신학적인 칭의론을 근거로 ‘자신을 정당화(正當化)’하는 데에 골몰해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필자가 이 대목에서 “하나님의 의로운 심판”(롬 2:5)을 주목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하나님의 의로운 심판이 이 세상의 재판과 어떻게 다른지를 깨닫기 위함이다.

하나님의 의로운 심판
앞 단락이 ‘이방인들의 죄’(롬 1:18-32)를 말했다면, 여기 2장 1절부터는 ‘유대인들의 죄’(롬 2:1-3:8)를 적시한다. 그런데 그 첫마디부터가 심상치 않다. “심판하는 사람아(‘안드로포스’의 호격)” 하고 부르면서, “당신이(2인칭 단수) 어떤 사람이든지” 하고 들이댄다. 꼭 눈앞에 있는 어떤 사람을 보면서 하는 말 같다. 주석서를 보면 이 ‘당신’을, 대화의 상대로 바울이 호출해낸 ‘가공의 유대인’이라고 풀이한다. 그러나 그런 풀이를 그대로 수긍하기에는, 뭔가 석연치 않은 느낌이 든다. 어쩌면 로마에 있는 유대인 그리스도인들도, 이 ‘당신’이 누구를 지시하는지 알고 있었을 법하다. “여러 번 여러분에게 가려고 시도했지만, 지금까지도 방해를 받았습니다.”(롬 1:13)라고 말하는 것으로 미루어보면, 그들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을 배후에서 조종할 정도의 영향력을 가진 인물일지도 모른다는 추측이 가능하다.
갈라디아서에서 바울이 폭로하는 ‘안디옥 사건’(갈 2:11-15)을 보면, 이 ‘당신’이 누구인지 어렴풋이 짐작이 간다. “야고보에게서 어떤 사람들이 오기 전까지만 해도, 그는(게바는) 이방인들과 함께 줄곧 음식을 먹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왔을 때, 그는 할례로부터 난 자들을 두려워하여, 줄곧 움츠러들었고 줄곧 그 자신을 구별했던(‘압호리조’의 미완료: 가르다) 것입니다.”(갈 2:12) 이방인들과 함께 음식을 먹던 베드로조차, 뒤로 꽁무니를 빼지 않을 수 없을 정도로 막강한 파워를 가진 사람, 그가 바로 예루살렘교회의 실권자인 ‘야고보’였던 것이다. 거기 보면(갈 2:13), 나머지 유대 사람들도 그(베드로)와 함께 위선을 행했고, 심지어 바나바까지도 그들의 그 위선에 끌려갔을 정도였다고 한다. 초기 기독교의 형성 과정에서, 야고보 계열의 ‘할례파’와 바울 사이의 신학적 갈등이 어떤 것이었을지, 능히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이쯤 되면, 여기서 바울이 상대하는 그 “당신”을 ‘가공의 유대인’이라고 풀이하고 넘길 수만은 없다. “심판하는 사람아, 당신이 어떤 사람이든지”라고 했던 그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교회의 실세(實勢)인 ‘야고보’를 염두에 두고 하는 말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그렇게 생각되면, 이 단락에서 유대인들의 죄를 비판하는 바울의 말들도 한결 가슴에 와 닿는다. “남(‘헤테로스’: 딴 사람)을 심판하는 그것으로(‘엔 호’) 당신은 당신 자신을 심판하고 있다.”(롬 2:1)라는 말만 해도 그렇다. 당신이 비판하는 것과 같은 것들을 당신도 행하고 있으니, 당신이야말로 ‘하나님의 심판’을 면할 수 없지 않겠느냐는 뜻이기도 하다. “이런 것들을 행하는(‘프랏소’) 자들을 심판하면서도 같은 것들을 행하는(‘포이에오’) 사람아, 당신(주어 ‘쉬’)이야말로 하나님의 심판을 면할 것이라고 생각합니까?”(롬 2:3) 비판치고는 자못 통렬하다. 남을 심판하는 ‘당신’도, 하나님의 심판 앞에서는 예외일 수 없음을 분명히 천명하고 나선다. 2절과 3절에서 연이어 두 번이나 언급되는 “하나님의 심판”이, 5절에 이르면 “하나님의 의로운 심판”이라는 말로 보다 구체화되고 있음을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당신은, 하나님의 의로운 심판이 드러나는 진노의 날에, 당신의 완고함(‘스클레로테스’)과 회개하지 아니하는(형용사 ‘아메타노에토스’) 마음에 따르는(‘카타’) 그 진노를, 당신 자신에게 쌓고 있습니다.” 1장 18절 이하에서 이방인들에게 말한 적이 있는 ‘하나님의 진노’가, 여기 유대인들에게는 ‘하나님의 의로운 심판’이 드러나는 “진노의 날”로 말해지고 있다.
논리가 복잡해서 그렇지, 비판의 요지는 분명하다. “당신이 비판하는(‘크리노’) 것과 같은 것들(‘타 아우타’)을 당신도 행하고(‘프랏소’) 있다.”(롬 2:1)는 것이 첫 번째 비판점이다. 자기모순이요, 자가당착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두 번째 비판점은, 유대인들의 선민의식에서 비롯된 우월감을 겨냥한다. 율법을 갖고 있다고 해서, 그것이 자랑일 수 없음을 논박한다. “당신은, 당신을 유대사람이라 칭하면서, 율법에 기대어 하나님 안에서 뽐냅니다(‘카오카우마이’).”(롬 2:17) 그렇지만 그런 율법은 이방인들도 행하고 있음을, 바울은 논증한다. “율법을 갖지 않은 이방인들이 본성으로(‘퓌시스’의 여격) 율법의 것들(행위들)을 행할 경우, 그들이 율법을 갖고 있지 않은 자들이라도, 그것들(그 행위들)이 그들 자신에게는(‘헤아우투’의 여격) 율법이기 때문입니다.”(롬 2:14) 그것을 바울은, “그들 마음속에 기록된 율법의 행위”(15절)라고 하면서, “그들의 양심”을 지목한다. 이것은 마치, 예수를 믿지 않는 강원도 산골 할머니들이 ‘이웃 사랑’에서는 교회 다니는(?) 기독교인들보다 나을 수도 있음을 말하는 것과 같다. 이른바 ‘불신자’라는 이름으로 그런 사람들을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로 치부하는 것도, “남을 심판하는”(롬 2:1) 것이나 다름없지 않겠느냐는 논리이다. 이러고 보면, 여기 로마서 2장의 결론인 28-29절이 우리의 현실일 수도 있다. “겉모양(ἐν τῷ φανερῷ)의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닌 것처럼, ‘겉모양의 기독교인’이 기독교인이 아닐 수도 있지 않겠는가. “내적인(ἐν τῷ κρυπτῷ) 유대인”이어야 유대인인 것처럼, ‘내적인 기독교인’이라야 기독교인이라 이를 수 있지 않겠는가.
‘하나님의 의로운 심판’을 말하면서, 왜 그 하나님을 “겉모습을 취하는 분(προσωπολημψία: 차별대우, 편견)이 아니다.”(롬 2:11)라고 하는지, 이제야 감이 잡힌다. “하나님은 사람(‘안드로포스’)의 외모(πρόσωπον)를 취하지 않는다.”라고 말하는, 갈라디아서 2장 6절은 이보다 더 통렬하다. “무엇인 것처럼(‘에이나이 티’) 보이는(‘도케오’의 분사) 사람들”을 가리키면서, “그들이 어떤 사람이든지, 나에게는 다르지 않다.”라고 딱 잘라 말한다. 심지어 “그 유명하다는(‘도케오’의 현재) 사람들”을 “기둥들인 것처럼 보이는(‘도케오’의 분사) 사람들”(갈 2:9)이라고 고쳐 말하면서, 그들이 “야고보와 게바와 요한”임을 밝히기까지 한다. 사회적 직함이나 평판, 혹은 명예 따위가, ‘하나님 앞에서는’ 껍데기(겉모습)에 불과하다는 소리다. 오늘날로 말하면, 어느 작은 개척교회 목사나 어느 큰 교단의 총회장이 문제가 아니라는 말이나 다름없다. 하물며 목사니 교인이니 하는 것이 무슨 대수이겠는가. “일생을 예수 믿었는데 장로 한번 해먹어야 하지 않겠느냐?”라고 선거운동까지 한 그 장로나, 묵묵히 밤낮을 가리지 않고 예배당을 지킨 그 교회 사찰집사나, 하나님은 그런 것으로 사람을 평가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이렇듯 “사람의 외모(겉모습)를 취하지 않는”(롬 2:11) 하나님이라면, 도대체 하나님은 무엇을 보고 사람을 심판하신다는 것일까? 로마서
2장 16절을 보면 바울은, 자기가 복음으로 전하는 예수 그리스도를 ‘내 복음’이라고 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내 복음을 따라서(‘카타’), 즉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서(‘디아’), 사람(‘안드로포스’)들의 비밀스런 것들을(‘타 크륍타’: 감춰진 것들을) 하나님은 심판하십니다.” ‘사람들의 감춰진 것들’이, 도대체 뭘 말하는 것일까? 그것이 무엇이기에, 그 심판을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서”라고 하고, “내 복음을 따라서”라고 말하는 것일까? 그러고 보면, 2절과 3절에서 두 번이나 언급한 “하나님의 심판”이, 5절에 이르러서는 “하나님의 의로운 심판”이라고 별스럽게 표현된 것도 까닭이 있었겠구나 싶다.
그 ‘하나님의 심판’을, 바울은 왜 굳이 “의로운 심판”이라고 표현한 것일까? 그 심판이 ‘공정하다’는 뜻으로 ‘의로운’ 심판이라고 말한 것처럼 들으면, 그건 엄청난 오해이다. 어쩔 수 없어서 두 단어(‘의로운’과 ‘심판’)로 나누어서 번역했지만, 헬라어 원문에서는 ‘디카이오크리시아’(δικαιοκρισίας)라는 한 단어이다. 그것도 신약성서에서는 단 한 번만 쓰인 희귀한 단어이다. 다른 용례가 없으니, 그 쓰임새를 미루어 짐작할 수도 없다. 주석서나 사전을 보면 ‘디카이오스’(δίκαιος: 의로운)와 ‘크리시스’(κρίσις: 심판)의 합성어(合成語)라고 풀이되어 있지만, 나로서는 선뜻 수긍이 되지 않는다. ‘의로운’과 ‘심판’을 합치면 ‘의로운 심판’이라는, 말 그대로 ‘그 심판은 의롭다’는 뜻인데, 따로 떼어서 표현해도 좋을 ‘형용사’와 ‘명사’를 굳이 합성어로 만들어서 쓸 필요가 없지 않겠는가? 더구나 다른 용례가 없는 독특한 단어임을 감안하면, 바울이 필요에 의해서 만들어낸 ‘조어’(造語)이지 싶다. 필자가 공부해온 바울의 성향으로 보면, ‘하나님의 의로우심’이 심판의 기준이라는 것을 말하고 싶어서, ‘디카이오쉬네’(δικαιοσύνη: 의로움)와 ‘크리시스’(κρίσις: 심판)를 일부러 합성하여 ‘디카이오크리시아’라는 단어를 만들어 썼을 것 같다. 그 ‘하나님의 의로우심’ 앞에서야, 우리 저마다가 지닌 ‘사람됨의 의로움’이 제대로 평가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아니라면 어느 누가 ‘사람됨의 의로움’을 평가할 수 있겠으며, 그 사람이 ‘의로운 사람인지 아닌지’를 판단(심판)할 수 있겠는가? 이 ‘의로움’이야말로, 16절에서 하나님이 심판하신다고 한 ‘사람의 감춰진 것’일시 분명하다. 그리고 이런 눈으로 보면, “내 복음을 따라서”라고 말하는 것도 이해가 되고,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서”라고 말하는 것도 머리가 끄덕여진다.
여기서 잠깐,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서 간략하게나마 설명하고 넘어가야 할 단어가 있다. 로마서에서 필자가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디카이오쉬네’(δικαιοσύνη)라는 단어이다. 우리말 번역 성서는 거의 어김없이 ‘의’(義)라고 번역했지만, 내 생각은 다르다. 이것은 형용사 ‘디카이오스’(의로운)에서 파생된 명사로서, 사전을 보면 ‘의로운 사람의 덕이나 자질이나 상태를 나타낸다.’라고 풀이되어 있다. 그러니까 우리 한글로 표현하면, ‘의로운 사람의 사람됨’을 나타내는 말이라고 이해함이 옳을 것 같다. 이 ‘디카이오쉬네’가 관념적인 추상명사처럼 오해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라도, ‘의’라는 번역보다는 ‘의로움’이라 번역하는 것이 낫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이 ‘의로움’이 ‘의로운 사람’(롬 1:17)과 깊이 연관되어 있음을 암시하기 위해서, 설명도 없이 ‘사람됨의 의로움’이라는 말을 슬쩍슬쩍 써왔다. 바울이 말하는 구원을 ‘사람됨의 과제’로 여기고, 이 ‘의로움’으로 기존의 칭의론을 비판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이제 “하나님의 의로운 심판”(롬 2:5)을 좀 더 구체적으로 실감하기 위해서, 마태복음이 말하는 “최후심판의 비유”(마 25:31-46)를 거칠게나마 살펴보기로 하자.

최후심판의 비유
이 최후심판의 비유는, 사람의 아들(인자)이 그의 영광 가운데서 올 때 영광의 보좌에 앉은 임금으로서, 모든 종족을 그의 앞에 모아놓고 하는 재판으로 그려져 있다. 그것은 마치 “목자가 염소들로부터 양들을 분별하듯이”(마 25:32) 그렇게 분별하여(ἀφορίζω: 가르다, 구별하다) 양들은 오른편에, 염소들은 왼편에 갈라 세우는 것과 같다고 한다.
이 비유를 읽을 때마다 드는 의문이 있다. ‘오른편과 왼편’으로 갈라 세운다는 말로 미루어 보면, 앞에서 설명한 바 있는 ‘사람됨의 의로움’이 심판의 잣대임을 미루어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그러나 사람됨의 의로움을 가려내는 그 심판이 어떻게, ‘목자가 양과 염소를 분별하듯이’ 그렇게 명확할 수 있겠는가 하는 의문이다. 양과 염소야 그 생긴 ‘모양새’ 말고도, 희고 검은 ‘털 색깔’로 한눈에 알아볼 수 있다. 또한 굳이 ‘목자’가 아니더라도 그 분별은 얼마든지 가능하다. 그러나 이 비유가 말하는 ‘심판의 대상’은, 모양새나 색깔로 확연히 구별되는 양과 염소가 아니라 ‘사람’이다. 무엇을 보고 사람을 분별하여, “오른편 사람들”(34절)과 “왼편 사람들”(41절)로 갈라 세울 수 있다는 것일까? 로마서를 통해서, 하나님은 “겉모습을 취하는 분(‘프로소폴렙시아’)”(롬 2:11)이 아님을 우리는 이미 배워 알고 있다. 그리고 하나님이 심판하신다고 하는 “사람들의 감춰진 것들”(롬 2:16)이 ‘사람됨의 의로움’이라는 것도, 필자의 해석을 통해서(동의하든 안 하든) 어렴풋이 감을 잡았다. 문제는, 그 ‘사람됨’을 분간하는 일(재판)이 어떻게 가능하냐 하는 것이다.
이 비유의 34절을 보면, 그 ‘오른편 사람들’을 임금(재판관)은 “내 아버지의 축복을 받은 자들아” 하고 부른다. 그러면서 그 까닭을 이렇게 설명한다. “왜냐하면, 내가 주렸는데 너희는 내게 먹을 것을 주었고, 내가 목말랐는데 너희는 나를 마시게 했고, 내가 나그네였는데 너희는 나를 맞아들였고, 내가 헐벗었는데 너희는 나를 입혔고, 내가 병들었는데 너희는 나를 돌보아주었고, 내가 감옥에 있었는데 너희는 내게로 왔기 때문이다.”(마 25:35-36) 언뜻 들어도 뭔가 이상하다. ‘내가 주렸다’거나 ‘내가 목말랐다’거나 하는, 그 임금의 말들이 납득되지 않는다. “그때에 의로운 자들(οἱ δίκαιοι)은 그에게 응대할 것이다.”(37절)라고 말하면서, 그들의 반응을 이미 예상하고 있다. “주님, 주린 당신을 보고 언제 우리가 잡수시게 했으며, 또 목마른 당신을 보고 언제 우리가 마시게 했단 말입니까?” 맞는 말이다. 언제 임금이 주리거나 목마른 적이 있었겠으며, 그런 임금을 본 적도 없는 그들이 어찌 그를 잡수시게 하고 마시게 했을 리 있겠는가. “네 오른손이 행하는 것을 네 왼손이 알지 못하게 하라.”(마 6:3)라는 산상설교의 가르침대로, 여기 ‘의로운 자들’은 자기가 하고도 했다는 의식조차 없다. 결국 이 비유의 초점은, 40절에서 선포된 임금의 말에서 드러난다.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지극히 작은 자들인 내 형제들 중 하나에게 너희가 행한(‘포이에오’의 과거) 것만큼(‘엡 호손’), 너희는 나에게 행했다.” 알고 들으면, 정말 까무러칠 정도로 놀라운 말씀이다. 이웃을 ‘내 형제들’이라고 하는 것도 놀랍지만, 내 형제들 중 ‘하나에게’ 행한 것이 곧 ‘나에게’ 행한 것이라고 하는 그 말은 우리의 통념을 깨부순다. 흔히들 수직적인 ‘하나님 사랑’과 수평적인 ‘이웃 사랑’을 둘로 나누어서 생각하지만, 깨닫고 보면 ‘둘이 둘이 아니다.’(二而不二) 구체적인 현실에서는,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곧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임을 이 비유가 말해준다.
그러나 필자가 주목하는 것은 따로 있다. 무슨 뜻으로 하는 말인지 이해하기 힘들었던 로마서 2장 6절과 이 비유가 놀라울 정도로 서로 연관되어 있다는 점이다. “하나님의 의로운 심판”(롬 2:5)을 말하면서, 바울은 그 심판을 이렇게 부연한다. “하나님께서는 각 사람에게(여격) 그의 행위들을 따라(‘카타’) 보응하실 것입니다(‘아포디도미’의 미래: 갚다).”(롬 2:6) 하나님의 심판을 ‘행위에 따른 보응’으로 말한다는 것이 선뜻 이해되지 않았다. 더욱이 이 구절이 시편 62편 12절의 인용임을 알고 난 후에는 더욱 헷갈렸다. ‘행위에 따른 보상’을 말하는, 유대교의 ‘공적사상’과 다름없는 말로 들렸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의로운 심판’과 ‘최후심판의 비유’를 연관시켜 생각하다 보니, “그의 행위들을 따라”라고 할 때 그 행위가 어떤 행위를 말하는지, “각 사람에게” 보응한다고 하는 그 보응이 ‘어떤 보응’인지를 깨달을 수 있었다.
이 비유에서 심판의 근거로 제시하는 행위들은, 유대인들이 지키는 ‘율법의 디카이오마(규례)’, 즉 “율법의 행위들”(롬 3:20, 28)이 아니었다. “거룩한 영을 통하여 우리 마음들 속에 부어진”(롬 5:5) 하나님의 사랑(‘아가페’)으로 행하는 ‘자비행’(慈悲行)이었다. 로마서 12장 15절의 말 그대로, “기뻐하는 사람들과 함께 기뻐하고, 우는 사람들과 함께 우는” 동체대비(同體大悲)의 사랑이었던 것이다. 그야말로, ‘주린 사람에게 먹을 것을 주고, 목마른 사람을 마시게 하고, 나그네인 사람을 맞아들이고, 헐벗은 사람을 입히고, 병든 사람을 돌보아주고, 감옥에 갇힌 사람을 찾아가는’, 그런 행위들이다. 그런 행위들을 통해서 그렇게 행하는 사람이 ‘의로워지는’ 것이라면, 그런 사람에게 ‘의로움’으로 보응하고, 또 그런 사람들을 마지막 심판 때에 “의로운 자들”(마 25:37, 46)이라는 이름으로 불러주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 아니겠는가. 더구나 “의로운 자들은 영원한 생명으로 들어갈 것이다.”라는 마태복음 25장 46절과, “선한 행위의 인내를 따라(‘카타’) 영광과 존귀와 불멸을 추구하는 자들에게는(여격), 영원한 생명을 보응하실 것이다.”라는 로마서 2장 7절은, 정확하게 대응한다. “하나님은 각 사람에게 그의 행위들을 따라 보응하신다.”(롬 2:6)는 것이 무슨 뜻인지를, 이 ‘최후심판의 비유’가 그림을 그리듯 비디오로 보여주고 있었던 것이다.
이제 이쯤 되면, ‘세상 법정의 재판’과 ‘하나님의 의로운 심판’이 어떻게 다른지 분명해졌다. ‘죄의 유무’를 가리는 것이 이 세상의 재판이라면, 하나님의 심판은 ‘사람됨의 의로움’을 가리는 재판으로서, 그야말로 하늘과 땅 차이이다. 그런데 그런 세상 법정에서 무죄선고(無罪宣告)를 내릴 때 ‘디카이오오’(의롭다 하다)라는 법정용어를 쓴다고 해서, 그것을 ‘칭의론’의 근거로 삼고 ‘의롭다 함을 받았다’는 식으로 해석하는 것을 과연 언제까지 두고 보아야 한다는 말인가. ‘칭의론’을 그대로 둔 채 그 해석을 조금 달리한다고 해서, 그것을 ‘새 관점’이라고 말하는 것도 어딘지 거시기 하다. ‘마지막 심판’을 앞당겨 현재화한 것이 ‘칭의’라고 말하기도 하지만, ‘마지막을 앞당겨서 현재화한다.’라는 이런 서양식 사고에 익숙해지려면 얼마나 더 오래 살아야 할까.


강일상 | 한국신학대학과 동 대학원을 졸업하였다. 『마가복음의 기적설화』, 『산상설교, 그 사람됨의 가르침』, 『부활되어야 할 부활』을 펴낸 바 있다. 지금은 은퇴하였다.

 
 
 

2020년 5월호(통권 73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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