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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me > 기독교사상 > 성서와설교 > [성서와 설교] 교리의 더께를 걷어낸 갈라디아서 읽기 05
성서와설교 (2020년 4월호)

 

  자기 정체성 다시 깨닫기: 노예가 아니라 자녀!
  갈라디아서 4장

본문

 

갈라디아서 3장 29절에서 바울은 혈통에 따른 유대인이 아니라 ‘그리스도에 속한 사람’이야말로 아브라함의 후손이라고 말했다. ‘약속에 따른 아브라함의 자녀’는 하나님께서 갈라디아에 있는 예수 따르미들에게 부여하신 새로운 정체성이다. 바울은 4장에서 다소 복잡한 논증을 통해 이러한 정체성의 문제를 자세히 다룬다.
4장에서 특히 강조되는 점은 ‘아브라함의 진정한 후손’은 자유로운 신분의 소유자라는 것이다. 그 누구도 이들을 강압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께서 자유롭게 하신 이들이 누리는 자유를, 강요를 통해(갈 2:3, 14 참고) 빼앗는 행위는 하나님의 업적을 파괴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에서도 바울은 갈라디아 교회에 있는 그의 ‘적대자들’(다시 말하지만, 바울의 입장에서 볼 때 ‘적대자’이다.)을 악의적으로 묘사하고, 갈라디아 신자들의 두려움을 자극하는 설득 방법을 채택한 모습을 볼 수 있다.

4:1–7
1 내가 이제 말합니다. 상속자가 어린이일 때는, 그가 모든 것의 주인이라 하더라도 노예와 전혀 다르지 않습니다. 2 오히려 아버지가 정해준 기간까지는 후견인과 집을 관리하는 사람 아래 있습니다. 3 마찬가지로 우리 역시 그러합니다. 우리가 어린이였을 때, 우리는 세상을 이루는 기초 원소들 아래 노예 노릇을 했습니다. 4 그러나 만기(=시간의 충만함)가 도래했을 때, 하나님이 그의 아들을 내보내시어, 그 아들이 여자에게서 나시고 율법 아래 나셨습니다. 5 이는 그분이 율법 아래 있는 이들을 속량하시기 위해서, 우리가 양자로 입양됨을 얻기 위해서였습니다.(이하 사역)

바울은 한 집안의 상속자와 노예라는 완전히 다른 두 신분에 관해 이야기하면서 갈라디아인들 자신이 어느 신분에 속해 있는지, 다시 말해 어떤 정체성을 소유하고 있는지 재차 깨닫기를 바란다. 그는 정체성에 대한 문제를 율법과 ‘세상을 이루는 원소들’과 연관짓는다. 율법이 맡은 기능이 한시적일 뿐이라는 3장 22-25절의 선언이 여기에서 되풀이된다. ‘아버지가 정해준 때까지(만) 율법 아래서 살았다.’ ‘우리가 어렸을 때는 세상을 구성하는 원소들에게 종노릇했다.’ 결국 갈라디아 신자들이 깊이 자각해야 하는 것은 ‘그리스도-사건’을 통해 새롭게 탄생한 자아(하나님의 딸과 아들로 입양됨)의 눈으로 율법의 무능력과 한시성을 직시하며 이전의 허탄한 종교생활로 되돌아가지 않는 것이다.
율법 아래 살았던 삶과 ‘이 세상을 이루는 기초 원소들’에게 노예 노릇 하는 것을 동일시하는 점은 선뜻 이해하기 어렵다. 바울의 주장을 이해하기 어려운 이유 중 하나는 그가 어떤 진술을 던져놓고 다른 이야기로 샜다가 다시 처음 진술로 돌아가는 데 있다. 그는 ‘세상을 이루는 기초 원소들’을 숭배하는 것을 3절에 언급한 후에 그것이 어떻게 율법 아래의 삶과 같은지 납득할 만한 논리를 전개하지 않다가, 8-9절에 가서야 다시 이 주제로 돌아온다.(이 문제는 본문의 흐름을 따라 8-9절을 해설할 때 자세히 다루겠다.)
1-7절은 ‘그러나 만기(시간의 꽉 참, 충만함)가 도래했을 때’라는 표현으로 시작하는 4절을 기점으로 ‘그리스도-사건’ 전과 후의 대조에 기반한 논증으로 이루어져 있다.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을 보내시기 전에는 인간이 상속자임에도 불구하고 후견인과 청지기 아래 있는 삶, 세상의 원소들을 주인으로 섬기는 노예의 삶을 살았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아들을 보내셔서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속량하셨고, 그 결과 우리는 입양을 통해 하나님의 딸과 아들이라는 가장 명예로운 신분을 얻게 되었다. 이는 ‘신의 아들’로 불리던 로마 황제에 비길 만한 높은 신분인 것이다! 언뜻 외적으로 보아서 알아차리기 어려운 신분의 급진적 변화는 ‘우리 마음에’ 하나님이 보내신 그 아들의 영이 ‘압바 아버지’라고 우렁차게 소리지르는 것에서 가시적으로 확인된다.

6 여러분이 하나님의 아들들이므로, 하나님이 그의 아들의 영을 우리의 마음들에 보내셨고, 그의 아들의 영은 ‘압바, 아버지!’ 하고 크게 소리칩니다. 7 따라서 당신은 더 이상 노예가 아니라 아들입니다. 당신이 아들이라면 하나님을 통한 상속자입니다.

6절에서 압바 아버지라고 부르는 주체가 ‘그의 아들의 영’임을 주목하라.(후대에 정립된 삼위일체 교리를 이 구절에 투영해 ‘성령’이라고 번역하면 오해를 불러일으키기 쉽다.) 그리스도의 영이 우리 안에 내주(內住)–문자 그대로 우리 안에 계시다는 말이다!–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라는 정체성을 갖게 된다. 여기에서 사용된 ‘크게 소리치다’는 ‘비명을 지르다’는 뜻을 가진 단어(κράζω)이며, 대단히 열광적이고 은사주의적이었던 초창기 예수 따르미 공동체의 분위기를 엿볼 수 있게 한다.
4장 3절의 ‘타 스토이헤이아 투 코스무’(τὰ στοιχεῖα τοῦ κόσμου)라는 표현이 정확히 무엇을 가리키는지에 대해 고대로부터 지금까지 열띤 토론이 있었다. 개역개정은 이 문구를 ‘이 세상의 초등학문’으로, 공동번역은 ‘자연(숭배)’으로, 새번역은 ‘세상의 유치한 교훈’으로 번역했다. 공동번역을 제외하고는 노예 노릇을 했다는 3절의 표현을 제대로 이해하기 어렵다. 초등학문이나 유치한 교훈의 노예로 산다는 말을 문자적으로 어떻게 이해할 수 있는가? 앞에서 말한 대로 4장 전체가 자유와 노예라는 대조에 근간을 두고 있기 때문에 이것이 은유적 표현이라고 하기에는 무언가 부족하다. 학계에서는 여전히 의견이 갈리고 있지만[예를 들어, 천체(heavenly bodies), 낮은 차원의 영적 존재들(elemental spirits) 등], 오늘날 많은 학자들은 이 표현이 그 당시 사람들이 가지고 있던 세계관을 반영한 것이라고 해석한다. 고대 그리스 자연철학자들은 이 세상을 이루는 근본 원리와 요소가 무엇인지를 탐구했다. 바울 시대 전후로 많은 사람들은 물, 불, 바람(공기), 흙, 이 네 가지를, 세상을 구성하는 기본 원소로 보았다.1
유대인인 바울이 볼 때, 이 네 가지 원소는 숭배의 대상, 즉 신일 수 없다. 유대인에게는 명징한 사실인데 왜 갈라디아인들은 이러한 세상의 요소들을 신으로 여기고 숭배했는가? 아마도 그들이 살던 지역에 이 원소들을 숭배하는 종교가 있었던 것 같다. 그리고 이 종교는 절기를 지키는 행습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이 4장 8절과 10절에서 그들이 ‘본래 신들이 아닌 것들을 위해 노예로 일하고’ ‘날, 달, 절기, 해’를 지켰다고 말한 것 같다.

4:8–10
한편 바울은 갈라디아 신자들이 복음을 듣기 전에 신이 아닌 흙, 불, 물, 공기를 신처럼 숭배하고 노예 노릇을 했던 이유가 하나님을 알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진단한다. 그러나 이제 그들이 하나님을 알게 되었으니 다시 신이 아닌 것들에게 돌아가 노예 노릇을 하면서 사는 것은 당연히 어리석은 행동일 수밖에 없다. 바울이 종종 보이는, 흥미로우면서도 신학적으로 심오한 ‘말 고치기’(rhetorical correction)의 예가 9절에 나온다. 그는 갈라디아인들이 이제 하나님을 알게 되었다고 말하자마자, ‘그보다는 오히려 하나님에게 알려졌다.’고 말을 보탠다. 일종의 신학적 수정을 가한 셈이다. 이렇게 말한 이유는 무엇일까? 무엇보다도 하나님께서 먼저 갈라디아인들을 부르시고 아셨다는, 하나님의 선행(先行)에 방점을 찍고 있다. 따라서 ‘세상을 이루는 원소들’에게 되돌아가 그것들을 신으로 숭배하는 행동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저버리고 떠나는 것과 동치이다. 이는 갈라디아서 1장 6절을 떠올리게 한다. ‘여러분이 [그리스도의] 은혜로 여러분을 부르신 분을 이토록 빨리 떠나 다른 복음으로 향했다는 사실에 나는 놀랐습니다.’ 이는 진리를 따라 바르게 걷는 것과 정반대의 행위이다.(갈 2:14)
위에서 잠깐 언급한 대로, 여기에서 우리는 정말 곤혹스러운 바울의 주장을 마주한다. 갈라디아인들이 ‘율법의 행위들’을 준행하려고 한 것과 ‘세상을 이루는 원소들’에게 종노릇하는 것을 무슨 근거로 마찬가지라고 말했을까? 둘 사이를 잇는 공통점은 직관적으로 보이지 않는다. 실제로 어떤 학자는 갈라디아 교회에 유대교 율법을 준수하려는 무리와 이방 종교로 되돌아가려는 무리가 있었다고 주장했다.2 갈라디아서 연구자들이 이 문제의 답을 찾기 위해 다양한 해석을 내놓았으나, 그 많은 해석 가운데 똑 부러진 명확한 답은 없다.
필자의 견해는 바클레이(John M. G. Barclay)와 마틴(J. Louis Martyn)의 견해와 비슷하다.3 바로 다음 구절인 10절에서 갈라디아 예수 따르미들이 ‘날과 달과 절기와 해를’ 지킨다고 바울이 꼭 집어 언급한 점에서 볼 때, ‘절기를 지킴’이라는 행위가 유다이즘과 (갈라디아인들의 회심 이전) ‘원소 숭배’ 사이의 공통점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4장에서 반복되어 나오는 전치사 ὑπό를 볼 때, 율법의 권위 아래(ὑπό) 사는 삶과 세상의 원소에게 노예 노릇하는 것 모두 어떤 권위 아래 복속된 삶이라는 점에서 유사하다고 볼 수 있다. 갈라디아서 2장에서 예루살렘 방문과 안디옥 사건을 통해 ‘강요’와 ‘종으로 삼으려는’ 일체의 노력에 강력히 반발한 바울의 모습, 4장 전체가 자유로움과 종살이를 대조하고 있다는 사실, 그리고 4장의 복잡한 논증이 그리스도 안에서 얻은 자유인으로서의 정체성을 강조하는 것으로 귀결되는 것(4:31-5:1)을 볼 때, 이러한 해석은 타당성을 확보한다. 자유인은 그리스도와 하나님 외에 어떠한 외부의 강요와 압력을 받을 이유도 없고, 더 나아가 그리스도가 주신 자율성을 침해하는 어떤 압력에도 저항해야 한다.

4:11–20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바울이 정교한 논리나 객관적 증거에 의지하지 않고 일방적으로 율법 아래 사는 삶을 부정적으로 묘사한다는 점이다. 바울의 주장은 논리적 설득이 아니라 청중의 감정에 호소하는 파토스(pathos)의 수사학에 의지하고 있다. 이 점은 바로 이어지는 11절부터 16절에서 더 명확하게 나타난다. 바울은 ‘나의 수고가 헛되게 될까 두렵다’며 예전에 갈라디아인들이 보여준 따뜻한 환대를 상기시킨다. 자신들의 눈이라도 빼어줄 정도로 호의와 애정을 베푼 갈라디아인들이 이제 자신을 원수처럼 대하고 있다고 바울은 말한다. 전적 환대와 적의라는 극적인 감정 변화가 자기를 서운하게 했다고 말이다. 이 모든 언급은 감정을 자극하는 수사 전략이라고 볼 수 있다.
‘나처럼 되어라’는 4장 12절의 청유는 16절과 18절에서 그 의미가 분명해진다. 바울은 진리를 말하고 있으며, 좋은 의도를 가지고 갈라디아인의 유익을 위해 일해왔고, 지금 편지를 쓰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은 바울의 적대자들이 진리를 말하는 사람들이 아니며 선한 의도로 갈라디아인을 대하는 것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바울이 자신의 사역을 산모에 비유하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19절)4 사도로서의 사역은 여자만이 겪을 수 있는 해산의 고통을 수반한다. 갈라디아인들을 ‘나의 아이들이여’(19절)라고 부르는 것은 이러한 사역의 성격을 더욱 강조한다. 편지의 초두부터 매섭게 갈라디아인을 질타하고 ‘바보 같은 갈라디아인이여!’(3:1)라고 한탄하며 자신의 청중을 수치스럽게 한 일(그리스-로마는 명예와 수치가 지배하는 사회였고, 수치를 받는 것은 사회적 죽음과 다를 바 없었다!)이 사실 모두 어머니의 마음에서 나온 것이라고 말한다. 그가 갈라디아에 가서 자신의 어조를 바꾸고 싶다고 한 것, 즉 언성을 높이고 싶다고 말한 것(20절)은 모두 이러한 동기에서 비롯된다. 그러니 갈라디아인들은 불쾌해하지 말고 바울의 선의를 제대로 이해해야 하는 것이다.
산모로서의 사역 목표는 갈라디아인 안에 그리스도의 모습이 형성되도록 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와의 연합이라는 2장의 주요 주제가 되풀이되고 있다. ‘그리스도-사건’으로 믿음을 통해, 신자는 그리스도로 가득 차 있고(2:20), 그리스도 안에 머물면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신분을 얻었으며(3:26),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가는 세례를 받았다(3:27). 이 모든 것이 그리스도-사건 안에서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자 혜택이다.
갈라디아서가 두려움을 자극하는 설득의 기술로 가득 차 있다는 우리의 관찰은 여기서도 확인된다. 바울은 갈라디아인들이 바울의 적대자의 메시지를 따른 결과 그들 안에 계신 그리스도가 사라졌다고 한다.(이것이 갈라디아인들 안에 그리스도의 모습이 다시 형성되게 해야 하는 이유이다.) 요즘 교회에서 사용하는 쉬운 말로 하면 ‘구원의 취소’ 정도가 되겠다. 가장 값진 선물을 내다버린 당혹스러운 행동을 한 갈라디아인들에게 바울은 언성을 높여 화를 내고 싶어 한다. 이 맥락에서 우리는 난해하기 짝이 없는, 사라와 하갈 이야기에 대한 바울의 재해석을 마주하게 된다.

4:21–31
바울은 창세기의 사라와 하갈 이야기를 아찔할 정도로 특이하게 해석한다. 이 해석은 율법과 약속을 인위적으로 분리한 3장 15-29절에 기반을 두고 있으나, 몇 가지 특이한 점이 이 본문의 해석을 어렵게 만든다. 여기에서 바울은 창세기에 없는 내용을 첨가하거나(아래를 보라.), 유대인에게 당연한 신념을 철저히 거부하며(현재의 예루살렘이 노예 상태에 있다!), 30절에서 ‘상속을 받을 수 없을 것이다.’라고 저주를 한다.(5장 21절에서 ‘하나님 나라를 상속받지 못한다.’는 선언과 언어적으로 이어지기 때문에 저주로 볼 수 있다.)
갈라디아의 독자/청자가 자신의 논리를 따라가기 어려울 것을 충분히 숙지한 바울은 이 이야기를 ‘알레고리적으로’ 이해해야만 한다고 해석의 전제를 천명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이 해석은 이해하기 어렵다. 갈라디아서 연구자들 사이에 어떤 합의점도 없다는 사실은 다수가 납득할 만한 주해를 얻기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이방인인 갈라디아인들 역시 바울이 재해석한 사라와 하갈 이야기를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 본문의 요지와 바울의 주장에 담긴 목적을 알 수 있다. 이해를 돕기 위해 먼저 본문을 직역해보자.

21 나에게 말해보십시오, 율법 아래 있고자 하는 이들, 여러분!(2인칭 복수) 여러분은 율법을 듣지 않습니까? 22 왜냐하면 기록되어 있기를, 아브라함은 두 아들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나는 젊은 여자 노예에게서, 다른 하나는 자유로운 여자에게서. 23 젊은 여자 노예에게서 [난] 아들은 육(肉)을 따라, 자유로운 여자에게서 [난] 아들은 약속을 통해서 태어났습니다. 24 이것들은 알레고리적(무언가를 말하되 다른 것으로 말하는 방식)으로 말해졌습니다. 왜냐하면 이 여자들은 두 언약이기 때문입니다. 한 여자는 시내산으로부터 노예가 되기 위한 자식을 낳았는데, 이 여자가 하갈입니다. 25 하갈은 아라비아에 있는 시내산이고, 현재의 예루살렘에 일렬로 정렬했는데(=상응하는데), 그 자녀들과 함께 노예로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26 그러나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자유롭고, 그는 우리 어머니입니다. 27 왜냐하면 기록되어 있기를, “기뻐하여라, 아이를 낳을 수 없는 여자여! 터뜨려 외쳐라, 해산의 고통을 겪지 않은 여자여! 왜냐하면 광야의 자녀들이 남편을 가진 여자의 자녀들보다 훨씬 많기 때문이다.” 28 형제들이여, 여러분은 이삭을 따른 약속의 자녀들입니다. 29 그러나 예전에 육을 따라 태어난 자가 영을 따라 태어난 자를 박해한 것처럼, 현재도 그와 마찬가지입니다. 30 그러나 성서는 무엇을 말합니까? “젊은 여자 노예와 그 아들을 내쫓아라. 실상 젊은 여자 노예의 아들이 자유로운 여자의 아들과 절대로 함께 상속받을 수 없을 것이다.” 31 따라서 형제들이여, 우리는 젊은 여자 노예의 자녀가 아니라 자유로운 여자의 자녀입니다.

세밀히 살펴보면, 창세기에 나오는 하갈과 사라 이야기와 바울이 전한 이야기는 상당한 차이를 보인다. 우선 칠십인역 창세기에서 하갈은 파이디스케(παιδίσκη), 즉 어린 여성 노예로 언급되는 반면, 사라는 ‘자유인 신분의 여자’(ἡ ἐλευθέρα)로 지칭되지 않는다. 자유인 신분과 노예라는 대조가 창세기 본문 자체에서 관심을 쏟는 요소가 아니라는 말이다. 바울이 창세기 본문을 자신의 목적에 맞게 재해석하면서 자기 관심사를 삽입한 것이다.5
또한 창세기에서는 하갈이 시내산과 어떤 연관이 있는지 전혀 언급하지 않는 반면, 바울은 ‘하갈이 시내산’이라고 단언한다. 하갈 이야기는 아브라함과 하나님이 맺은 언약 이야기 안에 있는데, 바울은 아브라함 이야기와 시내산 언약 이야기 사이의 시간을 훌쩍 뛰어넘어 둘을 연결한다. 유대인라면 받아들이기 어려운 시내산 언약의 폄훼(시내산 언약=여자 노예)를 그는 거침없이 말한다. 하갈을 ‘현재(바울 당시) 존재하는 예루살렘’과 같다고 말한 본문은 바울 이전 어떤 문헌에서도 찾을 수 없다. 예루살렘에 있는(있던) 거짓 형제들의 강요와 게바를 위선으로 이끈 ‘야고보에게서 온 어떤 이들’에 대한 이야기로 이미 바울은 예루살렘을 부정적인 이미지로 묘사했다. 하갈이 현재의 예루살렘과 같고 이 예루살렘이 노예의 상황에 있다는 말은 논리적 근거와 경험적 근거가 미비하지만, 청중에게 충격을 주기에는 충분한 단언(assertion)이다. 사라와 하갈에 대한 바울의 해석이 갈라디아서 전반에 흐르는, 감정에 호소하는 설득 노력 안에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이스마엘이 이삭을 핍박했다는 기록도 바울 이전의 유대 문헌에는 없다.6 창세기 29장 9절에는 단지 이스마엘이 이삭과 ‘놀았다’는 언급만 있다.
바울은 본문의 단순한 스토리에 몇 가지 알레고리의 겹을 쌓으며 이해하기 어려운 논증을 펼친다. 그의 재해석에는 구멍이 숭숭 뚫려 있다. 갈라디아 예수 따르미들도 바울이 말하는 맥락과 요지를 거의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다. 바울도 이를 분명히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왜 바울은 이렇게 이해하기 어렵고 설득력이 없어 보이는 사라와 하갈 이야기의 해석을 이 편지에 쓴 것일까? 필자는 여기에서 학자들의 복잡한 해석을 요약해 소개하기보다는 필자 나름의 해석을 제시하되 바울의 ‘다시 이야기하기’(retelling)가 지닌 의도와 설득에 관련된 기능에 주목하고자 한다.
바울은 4장 21절에서 사라와 하갈 이야기 재해석의 청자를 ‘율법 아래 있기 원하는 사람들’로 한정한다. 그들은 율법이 말하는 바를 제대로 ‘듣지’ 못하고 있다. 여기에서 ‘듣다’(ἀκούω)라는 동사는 율법과 함께 쓰일 때 ‘순종하다’ 혹은 ‘이해하다’의 의미를 가진다. 그의 대적자들과 율법의 행위들을 받아들이는 갈라디아인들이 율법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다는 비난으로 볼 수 있다. 바울의 급진적 해석은 노예와 자유인이라는 대조를 골격으로 하고, 이 대조는 육체와 약속의 대립 관계로 이어진다. 재미있는 사실은, 바울은 창세기 16장 1-16절과 17장 15-22절에 나와 있는 이야기를 다루고 있는데, 정작 그 두 본문 사이에 있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할례 명령(창 17:1-14)은 마치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아무 언급도 하지 않는 것이다. 하나님의 명령이었는데도 말이다! 매우 작위적인 해석 같지만, 2장과 3장을 다룰 때 말했듯이 ‘내 목적과 이익에 적합한’ 해석을 가능한 한 다 끌어다 사용하고(심지어 문서에 없는 내용까지 추가하면서), ‘내 이익에 반하는 본문’을 언급하지 않는 모습은 그리스–로마 세계의 사람들과 고대 유대인들의 문헌 해석에서 자주 볼 수 있다.
알레고리라는 문학기법은 그리스–로마 시대에 널리 알려지고 사용되었다. 이 본문의 알레고리적 성격을 다룰 때 학자들 사이에서 거의 논의되지 않은 점이 있다. 바로 알레고리가 청자에게 미치는 영향이다. 구멍이 많은 바울의 ‘다시 이야기하기’는 사실 그리스–로마 시대의 수사학자들이 알레고리의 장점으로 꼽은 요소를 가지고 있다. 키케로(Cicero)는 “명확한 것들을 뛰어넘으며 말이 안 될 정도의 억지스러운 것들을 택하는 것”이 청중으로 하여금 더욱 이야기에 집중하게 만들 뿐 아니라 그들의 감정과 상상력을 자극한다고 말했다.(de oratore, 3.160) 이렇게 구멍을 메우도록 청중의 상상력을 북돋우면 청중은 즐거움이나 두려움을 느끼게 된다. 데메트리우스(Demetrius)는 알레고리가 특히 청중에게 ‘위협’을 가할 때 유용하다는 점을 지적했다.(On Style, 99) 해석의 여지가 열려 있어 두려움이나 경외심을 불러일으킬 수 있기 때문이다.7
할례를 비롯한 율법의 행위들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에게 미치는 저주와 정죄에 대해 바울은 이미 여러 번 말했다. 그리고 5장 4절에서도 바울은 극단적인 표현을 써서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취소됨’, 즉 칭의와 구원의 상실(=저주)을 다시금 명확하게 이야기할 것이다. 바울의 이 편지가 갈라디아 예수 따르미들 앞에서 여러 번 낭독되었을 것이 분명하기 때문에 할례와 ‘율법의 저주’ 사이의 연결은 그들의 뇌리에 깊이 남았을 것이다. 따라서 바울의 알레고리 사용은 지금껏 우리가 관찰해온, 반복되는 저주 모티프와 두려움을 자극하는 설득의 기술 사용과 일맥상통한다.
마지막 구절을 눈여겨보아야 한다. ‘성서’가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직접 명령한다. 바울이 창세기 본문을 의도적으로 수정한 결과이다. 칠십인역 창세기 21장 10절에는 사실 사라의 말이 담겨 있다. 그러나 바울은 이 청유의 발화자가 사라라는 사실을 말하지 않고 ‘성서’가 명령했다고 말한다.

30 그러나 성서는 무엇을 말합니까? “젊은 여자 노예와 그 아들을 내쫓아라. 실상 젊은 여자 노예의 아들이 자유로운 여자의 아들과 절대로 함께 상속받을 수 없을 것이다.”

수수께끼 같은 알레고리적 해석이 목표로 하는 것은 바로 이 명령이다. 약속에 따라 아들을 낳은 사라와 약속의 실현인 복음을 통해 갈라디아인을 ‘낳은’ ‘어머니 바울’ 사이의 유사성도 놓칠 수 없다. 새롭고 진정한 생명의 탄생은 하나님의 약속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율법은 ‘살게 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지 않다.(갈 3:21) ‘위에 있는 예루살렘’이라는 난해한 표현 또한 신자들의 정체성이 하나님 존재 자체와 그분의 행동에 달려 있음을 강조한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좋다. 결국 갈라디아인들에게 할례를 강요하면서 그들을 종으로 만들려는 바울의 적대자들과 그 동조자들을 공동체에서 쫓아내라는 매우 강력한 권고인 셈이다. 무려 ‘성서’의 명령이기에 더욱 그러하다.
자신들의 정체성을 바로 깨닫고 더 이상 신이 아닌 것들에 종노릇하는 것을 그만두기 위한 노력의 일환이 ‘박해하는 이들’을 공동체에서 내쫓는 일이다. 갈라디아인들은 자유인의 신분을 지녔으나 ‘박해’를 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고 바울은 말한다. 이러한 일을 하게끔 유도하는 바울의 언사가 지닌 설득력은 부분적으로 청중의 두려움과 분노라는 감정을 자극하는 데서 온다. 종노릇하는 것처럼 수치스러운 일은 없다. 박해당하는 것은 부당하고 억울한 일이다. 하나님의 자녀이자 자유로운 신분의 소유자라는 정체성은 지고의 명예이다. 늘 그렇듯 사람은 자신의 정체성을 망각하기 쉬우므로 바울은 기억을 되살리며 ‘자신이 누구인지를 깨닫고 그렇게 살라.’(Be what you already are!)고 권고한다.
4장 후반부의 난해한 성서 이야기의 재해석은 5장 1절을 향한다. “자유를 위해(누리도록)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굳건히 서서 다시는 노예의 멍에를 메지 마십시오.”


1 자세한 논의는 Martinus C. de Boer, “The Meaning of the Phrase τὰ στοιχεῖα τοῦ κόσμου in Galatians”, New Testament Studies 53(2007): 204-224와 그의 갈라디아서 주석 Galatians: A Commentary, New Testament Library(Louisville: Westminster John Knox Press, 2011), 252-256을 보라.
2 갈라디아인들이 이방종교로 되돌아가려고 했다는 대표적 연구로는 Troy Martin, “Apostasy to Paganism: The Rhetorical Stasis of the Galatians Controversy”, Journal of Biblical Literature 114(1995): 437-461을 보라.
3 하나님을 반역하는 영적 세력(율법 포함)에 복속한다는 점을 공통점으로 보는 J. Louis Martyn, Galatians: A New Translation with Introduction and Commentary, Anchor Bible 33A(New York: Doubleday, 1997), 417, 또한 Martinus C. de Boer, “The Meaning of the Phrase τὰ στοιχεῖα τοῦ κόσμου in Galatians”, New Testament Studies 53(2007): 216-217을 보라.
4 이 주제에 대한 전문 연구는 Beverly R. Gaventa, Our Mother Saint Paul(Louisville: Westminster John Knox Press, 2007)이 있다.
5 Richard Hays, Echoes of Scripture in the Letters of Paul(New Haven: Yale University Press, 1989), 113.
6 이스마엘이 이삭에게 적대적이었다는 내용이 담긴 후기의 유대 문헌에 대해서는 J. Louis Martyn, Galatians: A New Translation with Introduction and Commentary, Anchor Bible 33A(New York: Doubleday, 1997), 444, 각주 155를 보라.
7 보다 자세한 논의는 필자의 논문을 참고하라. Seon Yong Kim, “The Pauline Gospel Protected with a Curse: An Investigation of the Curse Motifs in Galatians”(Ph.D. diss., University of Chicago, 2016), 247-254.



김선용 | 시카고대학(University of Chicago)에서 성서학 박사학위(Ph.D.)를 받았다. 신약 정경과 외경, 초대교회사를 공부했고, 초기 기독교 문헌을 그리스-로마 시대의 철학, 수사학, 종교적 배경에서 연구하고 있다. 현재 기독연구원 느헤미야의 객원교수로 일하고 있다.

 
 
 

2020년 7월호(통권 73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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